2. 空間(공간) 有限論(유한론)과 無限論(무한론)
空間(공간)의 끝이 있는가 없는가에 관한 問題(문제)는 有史(유사)이래 人類(인류)가 풀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큰 難題(난제) 중의 難題(난제)이다. 이 空間(공간) 有無限論(유무한론)에 관한 問題(문제)는 그다지 科學的(과학적)인 常識(상식)과는 關聯(관련)없이 窮究(궁구)할 수 있는 것으로, 人間(인간)의 思惟作用(사유작용)이 活性化(활성화)됨에 따라 東西古今(동서고금)을 莫論(막론)하고 硏究(연구)의 對象(대상)이 되어 왔다.
中國(중국)에서는 이런 空間有無限(공간유무한)의 觀點(관점)에 의하여 宇宙觀(우주관)을 發展(발전)시켜 왔는데, 盖天說(개천설), 渾天說(혼천설), 宣夜說(선야설)이 그 代表的(대표적)인 例(예)이다.
(1) 盖天說(개천설)의 空間觀(공간관)
古代人(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日月星辰(일월성신)의 出沒(출몰)과 變化莫測(변화막측)한 氣象變化(기상변화)는 실로 深刻(심각)하고 敬畏(경외)로운 現狀(현상)들이 아닐 수 없었다. 대낮에는 눈부신 太陽(태양)이 氣焰(기염)을 토하고, 밤이면 은은한 달이 자아내는 月光(월광)은 실로 神秘(신비)와 敬畏心(경외심)을 일으키기에 充分(충분)하였다. 이런 現狀(현상)들은 古代人(고대인)들의 好奇心(호기심)을 불러오게 되었는데, 이것이 天文思想(천문사상)의 萌芽(맹아)이며 나아가서는 宇宙理論(우주이론)으로 發展(발전)하게 되었다. 그 中(중), 처음으로 받아들여진 理論(이론)이 ‘盖天說(개천설)’이다.
盖天說(개천설)은 <晋書(진서) 天文志(천문지)>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句節(구절)에서 由來(유래)한 것이다.
“天象盖笠(천상개립) 地法覆盤(지법복반) 天地各中高外下(천지각중고외하) 北極之下(북극지하) 爲天地之中(위천지지중) 基地最高(기지최고) 而滂沱西隤(이방타서퇴) 三光(日月星(일월성))隱映(삼광은영) 以爲晝夜(이위주야)”
대저 하늘은 삿갓을 덮어놓은 것과 같고, 땅은 쟁반을 엎어놓은 것과 같도다. 天地(천지)의 中央(중앙)으로 갈수록 높아지고, 가장자리로 갈수록 낮아진다. 天地(천지)의 中央(중앙)에는 北極星(북극성)이 位(위)하며 이곳이 가장 높은 곳이다. 이러한 하늘에서 四方(사방)으로 비가 쏟아져 내리고, 太陽(태양)과 달과 별들이 빛을 내리는 바, 이로써 晝夜(주야)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以上(이상)과 같은 理論(이론)으로 宇宙(우주)를 그려보면 아래의 模型(모형)과 같이 되는데, 이 理論(이론)을 根據(근거)로 天體變化(천체변화)를 論(론)한 것이 七衡六間論(칠형육간론)이다. 아래의 七衡六間圖(칠형육간도)를 보면 일곱 개의 동심원이 있는데, 이 동심원을 ‘衡(형)’이라 하며, 바깥쪽을 外衡(외형), 안 쪽을 內衡(내형)이라 한다. ‘衡(형)’은 每(매) 節氣(절기)마다 다르게 運行(운행)하는 太陽(태양)의 軌道(궤도)를 表示(표시)하는 것으로, 每年(매년) 冬至(동지)에 太陽(태양)은 제일 바깥쪽인 外衡(외형)의 軌道(궤도)에서 運行(운행)하고, 夏至(하지)에 이르면 제일 안 쪽의 內衡(내형)의 軌道(궤도)에서 運行(운행)한다. 그리고 春分(춘분), 秋分(추분)에는 가운데인 中衡(중형)의 軌道(궤도)로 運行(운행)한다. 이렇게 太陽(태양)은 正東(정동)에서 正西(정서)로 지며, 每(매) 節氣(절기)마다 不動(부동)한 運動(운동)을 하는 것으로, 이로써 節氣變化(절기변화)와 日月星辰(일월성신)의 運行(운행), 그리고 ‘空間(공간)’의 槪念(개념)을 理解(이해)하고자 했던 것이다.
盖天說(개천설)은 周初(주초)에 擧論(거론)되기 始作(시작)하여 紀元前(기원전) 一世紀(일세기) 前(전)에 그 體系(체계)를 이루었는데, 이는 古代人(고대인)이 宇宙(우주)를 理解(이해)하기 위한 첫 理論體系(이론체계)로서 그 價値(가치)가 있다 할 것이다.
<七衡六間圖(칠형육간도)>
(2) 渾天說(혼천설)의 空間觀(공간관)
古代(고대)의 宇宙觀(우주관)에 있어서 가장 複雜(복잡)하고 深遠(심원)한 理論(이론)은 盖天說(개천설)에서 發展(발전)된 ‘渾天說(혼천설)’이다. ‘盖天說(개천설)’을 자세히 檢討(검토)해 보면 적잖은 汚點(오점)을 찾을 수 있는데, 이것을 修正(수정)하여 提示(제시)된 理論(이론)이 ‘渾天說(혼천설)’이다. 假令(가령), 盖天說(개천설)은 空間(공간)의 끝에 天地(천지)가 相互(상호) 붙어있는 곳이 位置(위치)하고 있는데, 이곳은 하늘인가 땅인가 하는 問題(문제)와 太陽(태양)은 何處(하처)에서 出(출)하여 何處(하처)로 沒(몰)하는가 하는 問題(문제)에 逢着(봉착)하게 된다. 이 問題(문제)는 盖天說(개천설)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問題(문제)이며, 이것을 補完(보완)하여 들고나온 理論(이론)이 ‘渾天說(혼천설)’로 <太平御覽(태평어람)> 에 나오는 다음의 句節(구절)에서 詳察(상찰)할 수 있다.
“天地渾沌如鷄子(천지혼돈여계자) 盤古生基中(반고생기중) 萬八千歲(만팔천세) 天地無辟(천지무피) 陰濁爲地(음탁위지) 盤古在基中(반고재기중) 一日九變(일일구변) 神于天聖于地(신우천성우지) 天日高一丈(천일고일장) 地日厚一丈(지일후일장) 盤古日長一丈(반고일장일장) 如此萬八千歲(여차만팔천세) 天數極高(천수극고) 地數極深(지수극심) 盤古極長(반고극장) 故(고) 天去地九萬里(천거지구만리)”
天地(천지)란 마치 鷄卵(계란)과 같이 混沌(혼돈)되어 있으며, 나이가 萬八千歲(만팔천세)나 된 盤古(반고)가 그 가운데에 存在(존재)하고 있다. 오래 전에 天地(천지)의 境界(경계)가 渺然(묘연)하였을 때, 그 神性(신성)은 하늘에 닿아 每日(매일) 一丈(일장)씩 하늘이 높아지게 되었고, 그 聖性(성성)은 땅에 가득하여 每日(매일) 地盤(지반)이 一丈(일장)씩 두꺼워지게 되었다. 또한 그 사이에서 盤古(반고)도 每日(매일) 一丈(일장)씩 길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하늘과 땅과 盤古(반고)의 高(고), 厚(후), 長(장)의 變化(변화)는 萬八千年(만팔천년)이 흘러서야 窮極(궁극)에 달하여 그 變化(변화)를 멈추게 되었는바, 이 때 하늘과 땅의 거리가 실로 九萬里(구만리)나 벌어지게 되었다.
以上(이상)의 古代(고대) 神話(신화)는 天地(천지)는 마치 鷄卵模樣(계란모양)으로 하늘은 흰자위, 땅은 노른자위에 該當(해당)함을 說明(설명)하고 있다. 여기서의 天(천)과 地(지)와 盤古(반고)의 高(고), 厚(후), 長(장)의 變化(변화)는 곧 노른자위가 두터워지면서 同時(동시)에 空間(공간)이 四方(사방)(高(고), 長(장))으로 擴大(확대)되어 나아가는 것을 意味(의미)한다.
以上(이상)의 神話(신화)는 아직은 모호함이 多分(다분)하여 理論的(이론적) 體系(체계)로서는 미흡하나, 渾天說(혼천설)의 嚆矢(효시)로서 價値(가치)가 있다 할 것이다.
여기서 進一步(진일보)하여 東漢(동한)의 張衡(장형)에 의하여 渾天說(혼천설)의 기틀이 定立(정립)하게 되었는데, 그가 著述(저술)한 <渾天儀注(혼천의주)> 에는 다음과 같은 句節(구절)이 나온다.
“ 渾天如鷄子(혼천여계자) 天體圓如彈丸(천체원여탄환) 地如鷄子中黃(지여계자중황) 孤居于天內(고거우천내) 天大而地小(천대이지소)… 天地各乘氣而立(천지각승기이립)… 天轉爲穀之運也(천전위곡지운야) 周施無端(주시무단) 基形渾渾(기형혼혼) 故曰渾天也(고왈혼천야) ”
渾天(혼천)이란 마치 鷄卵(계란)과도 같이 하늘은 彈丸模樣(탄환모양)의 圓形(원형)으로 되어 있으며, 땅은 鷄卵(계란)의 노른자위처럼 둥근 形態(형태)로 외롭게 하늘(空間(공간)) 사이에 居(거)하고 있는바, 하늘은 크고도 크며 땅은 작고도 작도다. 이런 天地(천지)는 各各(각각) 氣(기)를 타고 떠있는 것이다. 故(고)로 天體(천체)가 움직임에 마치 수레바퀴가 軸(축)을 中心(중심)으로 움직이는 것과도 같이 運行(운행)하는 것이다. 周圍(주위)가 圓形(원형)으로 구부러져서 모서리가 없는바, 실로 그 形狀(형상)이 둥글고 둥그니 이것을 둥근 하늘(혼천)이라 하는 것이다.
以上(이상)의 天體(천체)에 대한 說明(설명)은 蓋天說(개천설)에 비하여 대단히 進步(진보)한 것으로, 땅이 ‘球形(구형)’이라는 놀랄만한 事實(사실)이 담겨있다. 그리고 地球(지구)와 하늘을 支撑(지탱)하는 것은 氣體(기체)나 液體(액체)(水分(수분))로, 이것들이 空間(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으며, 地球(지구)는 마치 胎兒(태아)가 養水(양수) 속에 떠있는 것과 같이 空間(공간) 사이에 떠있는 것이라 한다. 이런 渾天說(혼천설)은 戰國時代(전국시대)에 이미 出現(출현)하였고, 西漢(서한) 末期(말기)에 이르러 楊雄(양웅)이 最初(최초)로 ‘渾天(혼천)’이라는 用語(용어)를 使用(사용)하였으며, 이 당시 벌써 天體觀測(천체관측) 器具(기구)인 渾天儀(혼천의)가 製作(제작)되기 始作(시작)하였다.
여하튼, 渾天說(혼천설)은 둥근 하늘의 가운데에 둥근 地球(지구)가 떠있다는 天圓地球說(천원지구설)의 定立(정립)을 가져왔다.
(3) 선야설의 공간관
蓋天說(개천설)과 渾天說(혼천설) 外(외)에 또 하나의 宇宙觀(우주관)이 있는데 이것이 宣夜說(선야설)이다.
蓋天說(개천설)에서 더욱 進步(진보)되어 나온 것이 渾天說(혼천설)이지만 그래도 問題(문제)가 적잖게 있었던 것이다. 즉 渾天說(혼천설)대로 하늘이 球形(구형)이고 여기에 日月星辰(일월성신)이 固定(고정)되어 있다면 하늘의 끝은 과연 何處(하처)인가 하는 問題(문제)에 逢着(봉착)하며, 또한 日月星辰(일월성신)이 天空(천공)에 固定(고정)되어서는 觀測(관측)되는 것과 같이 自由運動(자유운동)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점을 勘案(감안)하여 ‘宣夜說(선야설)’에서는 日月星辰(일월성신)은 모두 氣(기)가 聚合(취합)하여 形成(형성)된 것이고, 끝도 한도 없는 空間(공간)에서 自由(자유)롭게 運行(운행)한다는 理論(이론)을 내세우게 된 것이다. 이는 실로, 現代(현대)에서 보는 宇宙(우주)와 大同小異(대동소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宣夜說(선야설)의 內原(내원)은 <太平御覽(태평어람)> 第二權(제이권)에 실린 抱朴子(포박자)의 말에 基因(기인)한다.
“宣夜之書亡(선야지서망) 而郄萌記先師相傳宣夜說云(이극맹기선사상전선야설운) 天無質(천무질) 仰而瞻之(앙이첨지) 高遠無極(고원무극) 眼瞀精極(안무정극) 蒼蒼然也(창창연야) 譬旁望遠道黃山而皆靑(비방망원도황산이개청) 俯察天仞之谷而黝黑(부찰천인지곡이유흑) 夫靑非眞色(부청비진색) 黑非有體也(흑비유체야) 日月星象浮空中(일월성상부공중) 行止皆積氣焉(행지개적기언) 故七曜惑往惑游(고칠요혹왕혹유) 逆順伏見無常(역순복견무상) 進退不同(진퇴부동) 由無所根系(유무소근계) 故各異也(고각이야) 故辰極(고진극) 常居基所(상거기소) 北斗不如衆星西沒焉(북두불여중성서몰언) 七曜皆東行(칠요개동행) 日行一度(일행일도) 月行十三度(월행십삼도) 速疾任性(속질임성) 若(약) 附天體不得也(부천체부득야)”
宣夜說(선야설)을 擧論(거론)한 文獻(문헌)은 모두 消失(소실)되었다. 그러나 臧書家(장서가)인 郄萌(극맹)이, 이전에 그가 先師(선사)들로부터 전해 들은 宣夜說(선야설)을 記憶(기억)하여 적어놓고 있다. 先師(선사)가 말하기를, 하늘은 텅 비어 있는 것으로, 그 사이에 어떤 物質(물질)도 없다.
하늘을 우러러 보건데, 가히 높고 높아 끝이 없는바, 까마득할 따름이다. 하늘이 짙은 藍色(남색)으로 보이나 實狀(실상)이 그렇지 않은 것으로, 이는 단지 人間(인간)의 눈이 近視的(근시적)이어서 分明(분명)한 色(색)을 가려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假令(가령), 누런 빛의 山(산)을 멀리서 바라본다면 푸른색으로 보이며, 깊고 깊은 溪谷(계곡)을 注視(주시)하면 暗黑(암흑)으로 보이는 것과 같은 理由(이유)이다. 그러나 藍色(남색)도 暗黑色(암흑색)도 결코 黃山(황산)과 溪谷(계곡)의 本然(본연)의 色(색)이 아니듯, 하늘色(색) 또한 푸른색이 아닌 것이다.
日月(일월)을 비롯한 모든 별들은 空中(공중)에 自由(자유)롭게 떠 있으며, 어떤 것은 움직이고 어떤 것은 靜止(정지)하여 있다. 이것들은 모두 氣(기)가 쌓여 形成(형성)된 것으로 일곱 개의 發光體(발광체)(日月(일월)과 五星(오성))가 나타나고, 숨고, 나아가고, 물러가고 하는 등, 실로 不同(부동)한 規則下(규칙하)에서 運行(운행)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모든 日月星辰(일월성신)들은 어떤 特定(특정)한 것에 얽어 매지거나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별들은 이와 같이 運行(운행)함에 變化無常(변화무상)하나, 오직 北極星(북극성)만은 固定(고정)되어 不動(부동)한다. 그리고 北斗七星(북두칠성)은 다른 별들과 같이 서쪽으로 지지도 않으며, 일곱 개의 큰 별들은 매일 東(동)쪽으로 移動(이동)하며, 太陽(태양)은 每日(매일) 一度(일도)씩 逆行(역행)하고, 달은 每日(매일) 十三度(십삼도)씩 逆行(역행)한다. 이것들의 速度(속도)는 모두 각자의 特性(특성)에 맞게 定(정)해지는 것이다. 요컨데 모든 별들이 각기 自由運動(자유운동)을 하며 어떤 것에도 固定的(고정적)으로 매달려 있지 않은 것이다. 만일 渾天說(혼천설)과 같이 天空(천공)에 매달려 있는 것이라면 이와 같은 變化(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蓋天說(개천설), 渾天說(혼천설), 宣夜說(선야설) 등의 諸般(제반)의 宇宙觀(우주관)이 비롯된 데에는 古人(고인)들의 空間觀(공간관)에 基因(기인)하고 있다. 蓋天說(개천설)의 段階(단계)에서는 空間(공간)이 끝이 없다는 생각을 꿈에도 할 수 없었기에 單純(단순)한 天圓地方(천원지방)의 模型(모형)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空間(공간)의 槪念(개념)이 擴大(확대)되면서 ‘渾天說(혼천설)’과 같은 좀 더 進步(진보)된 理論(이론)이 나오게 된 것이다. 渾天說(혼천설)은 마치 鷄卵(계란) 속의 노른자위같이 둥근 天空(천공) 가운데 地球(지구)가 떠있는 模型(모형)을 提示(제시)하였는데, 이는 蓋天說(개천설)의 半球的(반구적) 空間觀(공간관)을 깨고 全球的(전구적)인 空間觀(공간관)을 定立(정립)한 것이다. 그러나 蓋天說(개천설)과 渾天說(혼천설)을 空間有無限(공간유무한)의 觀點(관점)에서 본다면, 모두 空間有限論(공간유한론)의 立場(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空間有限(공간유한)의 믿음을 깨고 ‘空間無限論(공간무한론)’을 들고 나온 것이 바로 ‘宣夜說(선야설)’인 것이다. 當時(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실로 破格的(파격적)인 理論(이론)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면 과연 空間(공간)은 蓋天說(개천설)이나 渾天說(혼천설)과 같이 끝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宣夜說(선야설)과 같이 정녕 끝이 없는 것인가? 실로 그 누구도 속 시원히 斷定(단정)할 수 없는 不可思議(불가사의)한 問題(문제)가 아닐 수 없다.
<케플러가 설계한 우주의 모형>
(4) 空間有無限槪念(공간유무한 개념)의 實狀(실상)
空間(공간)이 有限(유한)하건 無限(무한)하건 둘 중의 하나는 事實(사실)일 것이 分明(분명)하다. 或者(혹자)는 有限(유한)하며 無限(무한)한 것이라는 二重的(이중적) 態度(태도)를 취할 수도 있겠으나 이것은 二律背反的(이율배반적)인 矛盾(모순)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空間(공간)이 有限(유한)하다면 如何(여하)한가?
有限(유한)한즉, 반드시 그 끝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끝의 다음은 무엇인가 하는 問題(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現代科學(현대과학)을 보면 별들이 더 이상 存在(존재)하지 않는 境界(경계)까지를 宇宙(우주)의 範圍(범위)로 看做(간주)하여 그 끝을 論(논)하는 實態(실태)이나, 事實上(사실상) 별의 存在(존재) 與否(여부)와는 關係(관계)없이 空間(공간)이 四方八方(사방팔방)으로 막힘이 없는 한, 모두 宇宙(우주)의 領域(영역)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宇宙(우주)의 槪念(개념)을 設定(설정)함에 있어서는 物體(물체)의 有無(유무)가 아닌 空間(공간)의 槪念(개념)으로써 把握(파악)해야 合當(합당)한 것이다.
存在(존재)하는 有(유)는 例外(예외)없이 始作(시작)과 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人間(인간)은 누구나 세상이 ‘有(유)’라는 事實(사실)을 믿어 疑心(의심)치 않는다. 이런 觀點(관점)에서 보면 宇宙(우주)는 반드시 그 끝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宇宙(우주)의 끝을 假定(가정)하게 되면 그 境界(경계) 너머의 空間(공간)은 도대체 宇宙(우주)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즉, 이렇게 空間(공간)(宇宙(우주))의 끝을 假定(가정)한즉 풀 수 없는 不可思議(불가사의)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空間(공간)이 無限(무한)하다면 如何(여하)한가? 빛보다 비교할 수 없이 빠른 想念(상념)의 速度(속도)로 永遠(영원)히 나아가도 空間(공간)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 또한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해서, 世上(세상)이 存在(존재)하고 있다는 觀點(관점)에서 볼 때, 반드시 宇宙(우주)(空間(공간))은 끝이 있어야 함인데, 그 끝이 없다 함은 실로 理解(이해)하기에 至難(지난)한 問題(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分明(분명)한 것은 空間(공간)이 有限(유한)하다는 假定(가정)은 矛盾(모순)을 隋伴(수반)한다는 事實(사실)이다. 空間有限論(공간유한론)이 틀리다면 空間無限論(공간무한론)이 合當(합당)한 것이 될 것이나, 問題(문제)는 이 空間無限論(공간무한론)을 人間(인간)의 知識的(지식적) 次元(차원)에서 理解(이해)하기란 容易(용이)치 않다는 데 있음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空間(공간)이 無限(무한)할 수 있는가?
이 問題(문제)의 열쇠는 空間(공간)이 ‘有(유)’인가 아니면 ‘無(무)’인가 하는 점에 있다. ‘空(공)’이란 비어 있는 것으로 어떤 것도 없는 상태, 즉 ‘無(무)’이다. 이 ‘空(공)’에 무엇인가 存在(존재)하는 것(有(유))이 있게 되면 이런 ‘空(공)’을 이름하여 ‘空間(공간)’이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有(유)와 有(유)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空(공)’이라는 意味(의미)에서 ‘間(간)’ 자를 덧붙여 ‘空間(공간)’ 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그런즉, 空間(공간)이란 결국 ‘空(공)’과 다름이 없는 것이며 結局(결국)은 ‘有(유)’가 아닌 ‘無(무)’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無(무)’인 ‘空間(공간)’을 ‘有(유)’란 前提下(전제하)에 始終(시종)을 區分(구분)하려 했음이니 어떻게 矛盾(모순)과 不理解(불이해)가 誘發(유발)되지 않을 수 있으리오! 요컨대, 空間(공간)에 끝을 정하려는 試圖(시도)는 그 自體(자체)가 矛盾(모순)을 內包(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空間有無限 論 (공간유무한론) 自體(자체)가 矛盾(모순)된 試圖(시도)인 것이다. ‘空間(공간)’이라는 槪念(개념)은 그 自體(자체)로 ‘無(무)’를 뜻하는 것인데, 始終(시종)을 지닌 ‘有(유)’의 관점에서 끝을 論(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여하튼, 空間(공간)은 ‘無(무)’이며 그 限界(한계)를 論(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각하는 ‘有(유)의 世界(세계)’는 ‘無(무)’에 터전을 두고 있는 것이 되는즉, 어떻게 ‘無(무)’에서 ‘有(유)’가 創出(창출)되었는지에 대한 問題(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有限空間(유한공간)> <無限空間(무한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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