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無形(무형)의 作用(작용)이 있는 ‘無(무)’
有(유)에서 有(유)가 비롯되었다는 主張(주장)은 第一原因(제일원인)을 設定(설정)함에 있어서 矛盾(모순)을 誘發(유발)하게 된즉, 萬物(만물)이 ‘有(유)’가 아닌 ‘無(무)’에서 비롯되었다는 說明(설명)만이 이 矛盾(모순)을 克服(극복)할 수 있다. 또한 空間(공간)의 有無限論(유무한론)에 있어서 有限論(유한론)은 결코 成立(성립)될 수 없는 것인바, 空間(공간)이 ‘有(유)’가 아닌 ‘無(무)’임을 들어 始終(시종)을 論(논)할 수 없음을 밝혔다.
以上(이상)의 두 가지 究明(구명)은 우리가 存在(존재)한다고 의심하지 않는 만물이 결국은 ‘無(무)’에서 비롯된 것이고, 또한 ‘無(무)’의 바탕 안에서 存在(존재)하고 있다는 事實(사실)을 立證(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과연 ‘無(무)’에서 어떻게 ‘有(유)’가 創出(창출)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問題(문제)가 擡頭(대두)하게 된다.
‘無(무)’란 ‘無(무)’일진대 어떻게 ‘有(유)’를 創出(창출)할 수 있는가? 실로 아무 것도 없는 것이 ‘無(무)’라면, 여기서 있는 것(有(유))이 만들어질 不等(부등)의 理由(이유)가 없는 것이다.
或者(혹자)는 ‘無(무)’라는 것이 絶對的(절대적) ‘無(무)’가 아닌 ‘潛在的(잠재적) 無(무)’라는 前提(전제)를 깔아 ‘無(무)’에서 ‘有(유)’가 비롯될 수 있음을 說明(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潛在的(잠재적) 無(무)’란 무엇인가가 內在(내재)하고 있다는 意味(의미)로써 이것은 結局(결국) ‘無(무)’가 아닌 ‘有(유)’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굳이 ‘潛在的(잠재적) 無(무)’라는 모호한 表現(표현) 대신 ‘有(유)’라고 함이 簡明(간명)할 것이며, 이는 結局(결국) 萬物(만물)이 有(유)에서 創出(창출)되었다는 것이 되어 다시 原點(원점)으로 돌아가고 만다.
그렇다면 ‘無(무)’를 어떻게 把握(파악)해야 되는가?
문제는 ‘有(유)’, ‘無(무)’의 槪念(개념)을 論(논)하고 있는 人間(인간) 모두의 固定觀念(고정관념)에 基因(기인)하는 것이다. 人間(인간)의 모든 思惟作用(사유작용)은 생각하는 主體(주체)인 나와, 내가 知覺(지각)할 수 있는 萬物(만물)은 存在(존재)하고 있다는 不變(불변)의 前提下(전제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前提下(전제하)에서의 ‘無(무)’란 存在(존재)하지 않는 絶對無(절대무)의 槪念(개념)이 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 것도 存在(존재)하지 않는 ‘無(무)’에서 ‘有(유)’가 創出(창출)될 수 있다는 理論(이론)은 결코 納得(납득)할 수 없는 것이다.
‘次元論(차원론)’을 보면 자신이 속해있는 次元(차원)에서 그 以上(이상)의 次元(차원)을 理解(이해)하는 것은 絶對的(절대적)으로 不可能(불가능)하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主體(주체)가 存有(존유)하고 있는 領域(영역)안에서만 모든 思惟作用(사유작용)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므로 그 領域(영역)을 超越(초월)한 더 높은 次元(차원)으로까지 생각이 미치기란 不可能(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차원에서 그 이상의 次元(차원)을 알 수 없듯이 人間(인간)의 思惟(사유)가 有形(유형)의 世界(세계)라는 限定(한정)된 틀 안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에, 形(형)을 超越(초월)한 境界(경계)를 理解(이해)하기란 至難(지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無(무)’를 把握(파악)하는 것은 ‘次元(차원)의 차이’에서 誘發(유발)되는 것과 같이 그렇게 不可能(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만일 ‘存在(존재)하는 모든 것은 形(형)을 가지고 있으며 形(형)이 없으면 存在(존재)하지 않는다’라는 固定觀念(고정관념)을 깨뜨릴 수만 있다면 ‘無(무)’의 理解(이해)에 接近(접근)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論據(논거)로써 ‘形(형)과 存在(존재)는 必滅(필멸)’이라는 前提(전제)를 깨뜨릴 수 있는가?
마음을 관하여 보건대, 마음은 有形(유형)인가 無形(무형)인가?
形狀(형상)이 있는데 아직까지 科學(과학)이 발전하지 못하여 人間(인간)이 把握(파악)할 수 없는 것인가? 아니면 원래가 마음은 아무런 形狀(형상)도 없는 無(무) 그 自體(자체)인 것인가?
이 問題(문제)에 대한 답은 지금의 科學的(과학적) 水準(수준)으로는 究明(구명)의 限界(한계)가 있는 것이 事實(사실)이다. 그러나 잘 생각하여보면 누구나 어느 것이 옳은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은 아무런 形狀(형상)도 없는 無形(무형)으로, 마음이 일으키는 생각도, 꿈도 그 어떤 것도 있는 것처럼 보이는 幻有(환유)일 뿐이지 결코 形(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은 形(형)이 없은즉 存在(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으나 分明(분명)히 作用(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없는 것이 어떻게 作用(작용)을 할 수 있겠는가 라는 疑問(의문)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나 無形(무형)의 마음이 作用(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은 明白(명백)한 事實(사실)이다. 作用(작용)이 있다는 것은 結局(결국) ‘存在(존재)한다’는 뜻이 되는 바, 無形(무형)도 有形(유형)과 마찬가지로 非存在(비존재)가 아닌 存在(존재)의 領域(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無形(무형)이 어떻게 存在(존재)하며 作用(작용)할 수 있는가 라는 問題(문제)에 逢着(봉착)하게 된다. 世上(세상)은 無形(무형)과 有形(유형)이 對稱(대칭)으로 맞물려 存在(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色卽是空(색즉시공) 空卽是色(공즉시색)]의 理致(이치)이며, 太極(태극)의 原理(원리)인 것이다.
人間(인간)이 形界(형계)만을 認識(인식)하고 나머지 반쪽인 無形界(무형계)를 形而上(형이상)이라 하여 그 存在(존재)를 否定(부정)한다고 解決(해결)될 問題(문제)가 아닌 것이다. 形(형)과 無形(무형), 物質(물질)과 非物質(비물질), 色(색)과 空(공), 有(유)와 無(무)가 서로 맞물려 共存(공존)하는 것이 世上(세상)인 것이다.
요컨대, 有無(유무)의 槪念(개념)은 形(형)의 有無(유무)에 의해 區分(구분)되는 것으로 無(무)란 無形(무형)을 말하는 것이다. 無形(무형)이므로 物質(물질)만을 다루는 科學的(과학적) 도구로는 그 實體(실체)를 결코 把握(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無形(무형)이라고 해서 存在(존재)도 아니고 作用(작용)도 없는 것은 아니다. 無形(무형)도 有形(유형)과 같이 存在(존재)하는 것으로서, 능히 作用(작용)을 일으켜 ‘有形(유형)’을 創出(창출)할 수 있는 것이다.
이 無形(무형)의 世界(세계)를 象界(상계), 有形(유형)의 世界(세계)를 形界(형계)라 하며, 萬物(만물)이 運行(운행)하고 있는 世上(세상)은 形界(형계)이지만 그 根源(근원)은 象界(상계)에 있는 것이다. 그런 緣由(연유)로 象界(상계)의 秩序(질서)를 把握(파악)한다면 ‘形界(형계)’의 變化原理(변화원리)의 究明(구명)을 期(기)할 수 있는 것이며, 象(상)을 捕捉(포착)하여 形(형)의 變化(변화)를 가히 銳智(예지)할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無(무)’란 絶對的(절대적) 無(무)가 아닌 ‘無形(무형)의 存在(존재)’를 意味(의미)하는 것으로 萬有(만유)의 根源(근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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