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학/동양철학

[스크랩] [제1장 태일론] 제2절 태일론 2. 자존체로서의 태일

검은바람현풍 2012. 3. 9. 19:55

2. 自存體(자존체)로서의 太一(태일)

 

永遠不變(영원불변)하며 自存(자존)하는 놈을 太一(태일)이라 하는데, 그렇다면 太一(태일)은 어떻게 自存(자존)할 수 있는가 하는 問題(문제)에 直面(직면)하게 된다.

<우다나 80>에는 自存體(자존체)가 있음을 說明(설명)하는 句節(구절)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 비구들이여! 이러한 곳이 있다. 그곳에는 흙도 없고 물도 없으며, 불도 없고 바람도 없다. 그곳은 虛空(허공)으로 가득 찬 곳도 아니고 識別(식별)이 가득 찬 곳도 아니며, 어떤 것이 아닌 곳도 아니며, ()도 아니고, ()이 아닌 곳도 아니며, 이 世上(세상)도 아니고 저 世上(세상)도 아니고 해와 달도 없다.

(())비구들이여! 그곳에 온다거나 그곳으로 간다고 말할 수 없으며, 그곳에 머문다고도, 그곳에서 죽는다고도, 그곳에서 태어난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곳은 무엇에 의하여 있는 것도 아니며, 무엇으로부터 생겨난 것도 아니며, 무엇에 依支(의지)해 있는 것도 아니다.

(()) 비구들이여! 생겨난 것이 아닌 것, 이루어진 것이 아닌 것, 만들어진 것이 아닌 것, 合成(합성)된 것이 아닌 것이 있다.

(()) 비구들이여! 생겨난 것이 아닌 것, 이루어진 것이 아닌 것, 만들어진 것이 아닌 것, 合成(합성)된 것이 아닌 것이 없다면, 그곳에는 생겨난 것, 이루어진 것, 만들어진 것, 合成(합성)된 것을 싫어하여 떠나는 일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생겨난 것이 아닌 것, 이루어진 것이 아닌 것, 그리고 만들어지지도 合成(합성)되지도 않은 것이 있기 때문에, 생겨나고 이루어지고 만들어지고 合成(합성)된 것을 싫어하여 떠나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에서는 相對的(상대적) 對立(대립)을 超越(초월)하여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어떤 存在(존재)가 있음을 表現(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 (())에서는 이 存在(존재)는 어느 무엇에 의지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어느 무엇으로부터 生成(생성)된 것도 아닌 自存(자존)하고 있는 것임을 具體的(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만일, 自存(자존)하는 것이 없다면 ‘永遠性(영원성)’과 ‘不變性(불변성)’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게 되어 結局(결국) 理想鄕(이상향)에 대한 人間(인간)의 꿈과 努力(노력)은 虛妄(허망)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런데, 多幸(다행)이도 무엇에 의해 생겨난 것도, 合成(합성)된 것도 아닌 自存(자존)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人間(인간)은 消滅(소멸)되고 變質(변질)될 相對的(상대적) 幻有(환유)에서 벗어나 永遠不變(영원불변)하는 絶對的(절대적) 實有(실유)에 到達(도달)하기 위한 努力(노력)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도통(道通)하고 견성성불(見性成佛)하려는 제반(諸般)의 노력(努力), 이렇게 해서 成就(성취)한 경지(境地)가 무의미(無意味)한 것이 아닌 실로 무궁(無窮)한 가치(價値)가 있는 것임을 (())의 구절(句節)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팔천송반야> 31.1에서도 自存體(자존체)인 太一(태일)과 그 성질(性質)에 대한 說明(설명)을 찾아볼 수 있다.

 

여래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며, 또한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진여는 움직임이 없으며, 진여가 곧 여래인 까닭이다. 所産(소산)이 아닌 것은 오고 감도 없는 바, 여래는 所産(소산)이 아니다. 存在(존재)의 궁극(窮極)은 오고 감도 없는 바, 여래는 存在(존재)의 궁극(窮極)이다. 마찬가지로 여래는 공(), 여실함, 부동(不動), 허공(虛空)이라 말할 수 있으니, 이는 여래가 이러한 법()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이러한 법()들의 진여와, 一切(일절) ()의 진여와 여래의 진여는 다만 하나의 唯一(유일)한 진여일 뿐이다. 진여에는 아무런 區分(구분)도 없으니, 이 진여는 다만 唯一無二(유일무이)한 것일 따름이다.

 

이상의 구절은 어느 무엇의 所産(소산)이 아닌 自存體(자존체)가 곧 진여(太一(태일))이고, 이 진여는 모든 相對的(상대적) 對立(대립)을 超越(초월)하여 하나로 통일(統一)되어 있는 唯一無二(유일무이)한 存在(존재)임을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太一(태일)이 自存體(자존체)임을 가르치고 있는 구절(句節)은 비단 以上(이상)의 例文(예문) ()에도 여러 文獻(문헌)들에서 적잖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問題(문제)는 어떤 이유로 太一(태일)이 自存性(자존성)을 띠게 되었는가 하는 점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느 무엇의 原因(원인), 影響(영향)도 받지 않고 어떻게 스스로 存在(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存在(존재)하는 모든 것은 存在(존재)하게 된 原因(원인)을 必然的(필연적)으로 隋伴(수반)하는 것은 秋毫(추호)의 疑心(의심)도 없는 事實(사실)이다. 그렇다면 太一(태일) 역시 存在(존재)하는 것이 여실함인데, 어찌하여 太一(태일)만 유독 存在(존재)하게 된 근원(根源)도 原因(원인)도 없단 말인가?

그러나 아쉽게도 이 疑問(의문)에 대한 說明(설명)은 東西古今(동서고금)의 어떤 文獻(문헌)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自存體(자존체)를 理解(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有無(유무)의 槪念(개념)과 存在(존재)와 非存在(비존재), 그리고 心()에 관한 理解(이해)를 先行(선행)해야 한다. 이것들을 파악(把握)하지 않고는 人間(인간)의 言語(언어)와 思惟體系(사유체계)로써는 도저히 論理的(논리적)으로 풀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有無(유무)의 槪念(개념)은 익히 앞에서 說明(설명)한 바 있듯이 有形(유형)과 無形(무형)의 槪念(개념)으로 區分(구분)되는 것으로, 둘 다 存在(존재)하는 것이다. 즉 存在(존재)의 領域(영역)에는有形( 유형)과 無形(무형)이 共存(공존)하는 것이다. 그런데, 無形(무형)과는 달리 非存在(비존재)란 곧 形狀(형상), 作用(작용)도 그 어떤 것도 없는 ‘絶對的 無(절대적 무)’인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世上(세상)은 存在(존재)인가 非存在(비존재)인가’의 問題(문제)를 짚어보자. 둘 중의 하나는 옳은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만일 世上(세상)이 非存在(비존재)라며 如何(여하)한가?

이 假定(가정)대로라면 幻像(환상)이건 幻有(환유)건 그 어떤 作用(작용)도 일어나서는 안 된다. 非存在(비존재)는 絶對的(절대적) ‘無()’이기 때문에 그 어떤 作用(작용)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世上(세상)은 꿈이건 生時(생시)건 어떤 ‘作用(작용)’이 있다는 것만은 分明(분명)한 事實(사실)이다. 고로, 非存在(비존재)라는 假定(가정)은 그릇된 것이고, 世上(세상)은 어찌 되었건 ‘存在(존재)’의 領域(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無形(무형)과 非存在(비존재)가 一致(일치) 하는가 하는 점을 짚어볼 必要(필요)가 있게 된다. 科學的(과학적) 唯物論(유물론)의 見地(견지)에서 본다면 形體(형체)가 없는 것은 存在(존재)하지 않는 ‘絶對的(절대적) ()’라는 結論(결론)이 나온다. 形界(형계)에서 살아가며 意識(의식)하는 人間(인간)들에게 있어서는 無形(무형)으로 存在(존재)하는 象界(상계)란 실로 三次元(삼차원)에서 四次元(사차원)을 생각할 수 없는 것과 같이 도저히 納得(납득)할 수 없는 限界(한계)가 아닐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無形(무형)의 存在(존재)에 대한 疑問(의문)은 有史(유사) 이래 繼續(계속)되어온 哲學的(철학적) 課題(과제)였으며 아직까지도 제대로 究明(구명)을 못하고 있는 實情(실정)이다. 실로 形而上(형이상)의 不可思議(불가사의)한 問題(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다시 原點(원점)으로 돌아가서 ‘自存體(자존체)’가 成立(성립)될 條件(조건)을 짚어보자.

‘形狀(형상)’ 있는 모든 것은 분명히 그 ‘形()’을 이루게 한 原因(원인)이 있게 마련인즉, 有形(유형)은 ‘自存體(자존체)’가 될 수 없다. 그러나 ‘無形(무형)’은 어떤 形狀(형상)도 없는 것이기에 일단 ‘原因隋伴(원인수반)’의 問題(문제)에서 벗어나게 된다. 다시 말해서 ‘無形(무형)’은 그것이 存在(존재)하게 된 原因(원인)이 불필요하게 되는바, 自存體(자존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問題(문제)는 無形(무형)이 非存在(비존재)가 아니라 存在(존재)라는 데 있다. 非存在(비존재)라면 絶對的 無(절대적 무)인지라 ‘原因(원인)’을 따질 下等(하등)의 必要(필요)도 없겠지만, 無形(무형)은 어떻든지 存在(존재)의 한 면이고 여기서 萬象(만상)과 萬物(만물)이 비롯된 것인바, 어떻게 存在(존재)하는 것이 ‘無形(무형)’일 수 있는가에 대한 難關(난관)에 부딪치게 되는 것이다.

실로, 自存體(자존체)에 관한 問題(문제)는 ‘無形(무형)의 存在(존재)’가 實有(실유)하고 있음을 밝혀내면 解決(해결)될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人間(인간)의 意識(의식)은 形界(형계)의 次元(차원)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그 以上(이상)의 境地(경지)를 理解(이해)의 次元(차원)으로 끌어내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여기서 뭇 聖賢(성현)들이 들고 나온 것이 곧 ‘不立文字論(불입문자론)’이다. 그 一例(일례) <道德經(도덕경)> 첫머리에 나오는 [道可道非常道(도가도비상도) 名可名非常名(명가명비상명)]을 들 수 있는데, 이는 곧 形而上(형이상)인 깨달음의 境地(경지)를 言語언어()나 論理(논리)로써는 도저히 說明(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果然(과연) ‘不立文字(불입문자)’라는 모호한 表現下(표헌하)에 完全(완전)한 知()에 대한 渴望(갈망)을 抛棄(포기)해야만 하는가! 學問的(학문적) 接近(접근)의 限界(한계)를 切感(절감)하고 깨달음을 向()한 ‘修行(수행)’의 길로 旋回(선회)해야만 하는가!

만일, 三次元(삼차원)의 人間(인간)에게 四次元(사차원)의 眞理(진리)를 理解(이해)시키는 것이라면, 이것은 미련 없이 抛棄(포기)하는 것이 上策(상책)일 것이다. 三次元(삼차원)의 人間(인간)에게 四次元(사차원)을 理解(이해)할 수 있는 餘地(여지)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는 곧 三次元(삼차원)을 벗어난 것이 된즉, 三次元(삼차원)과 四次元(사차원)의 區分(구분) 自體(자체)가 無意味(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런데 人間(인간)은 形界(형계)라는 可視的(가시적) 次元(차원)안에서 思惟(사유)하고 있지만 多幸(다행)이도 無形(무형)인 ‘心()’을 지니고 있어 ‘無形(무형)의 存在(존재)’에 대한 理解(이해)가 完全(완전)히 不可能(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아무런 形狀(형상)도 없지만 分明(분명)히 作用(작용)하고 있는 ‘心()’을 詳察(상찰)한다면 無形(무형)이 ‘存在(존재)’가 될 수 있음을 理解(이해)하게 될 것이다. 혹자는 ‘心()’은 無形(무형)이 아닌, 有形(유형)의 어떤 要件(요건)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反問(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科學(과학)이 아무리 發展(발전)하여 쪼개고 分析(분석)한다고 해도 결코 心()을 構成(구성)하고 있는 有形(유형)의 要素(요소)를 發見(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無形(무형)적 主體(주체)인 ‘心()’이 有形的(유형적) 客體(객체)인 肉體(육체)에 接木(접목)하여 相互(상호) 密着關係(밀착관계)를 이루며 形界(형계)의 삶을 形成(형성)하는 것이다. 主體(주체)인 ‘心()’의 本質(본질)은 ‘無形(무형)’이지만, 보고 듣는 모든 情報(정보)가 ‘有形(유형)’의 世界(세계)에 局限(국한)되는 理由(이유), 有形(유형)만이 存在(존재)라는 固定觀念(고정관념)이 생기게 된 것이다. 生命體(생명체)는 무엇을 막론하고 無形子(무형자)와 有形子(유형자)의 結合(결합)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有無(유무)가 共存(공존)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無形(무형)인 자신의 ‘心()’을 觀()하여 有形(유형)만이 存在(존재)라는 固定觀念(고정관념)을 脫皮(탈피)할 수 있다면 가히 無形(무형)의 存在(존재)를 糾明(규명)할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自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無形(무형)이어야만 하며, 이 無形(무형)은 非存在(존재)가 아닌 분명한 存在(존재)이다. 太一(태일)은 ‘無形(무형)’이기 때문에 自存(자존)할 수 있는 것이며, ‘自存(자존)’하는 것이기 때문에 萬象(만상)을 일으켜 幻有(환유)인 萬物(만물)을 創出(창출)할 수 있는 것이다.

無形(무형)의 存在(존재)! 이것이야말로 太一(태일)의 본모습이며, 秋毫(추호)의 疑心(의심)도 없이 自存(자존)하고 永遠(영원)하고 不變(불변)하는 眞理(진리) 그 自體(자체)인 것이다.

출처 : 태극선법 현동선원
글쓴이 : 바람파란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