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학 520

한단고기 의 출기 桓檀古記 出記

한단고기 의 출기  桓檀古記 出記                                                                            임승국 (林承國)   한단고기 범 례 * 고기古記인용의 시작은 저 일연一然(1206~1289)의 《삼국유사三國遺史》로부터라 할 수 있다.그러나 지금 그 고기古記나마 얻어 볼 수 없게 되었으니 이에 《삼성기三聖紀》 《단군세기檀君世紀》 《북부여기北夫餘紀》 《태백일사太白逸史》등을 한 책으로 묶어 《한단고기桓檀古記》라 이름하였다. * 《삼성기三聖紀》는 두 종류가 있어 비슷하나 완전한 것은 아니다. 안함로安含老씨가 찬撰한 것으로 우리 집안에 전해 오는 책을 이제 《삼성기 전 상편 三聖紀 全 上篇》이라 하고 원동중元董仲씨가 찬撰하고 태천泰川의 백진사..

동양학/단학 2025.02.06

丹學人物考. 유형진 柳亨進

丹學人物考.   유형진 柳亨進                                                              硏精會報 31호 에서  [ 조선 선조 때 사람으로 찬성(贊成) 오겸(吳謙)의 사위. 어려서부터 도서(道書)를 좋아하여 항상 참동계(參同契) 와 오진편(悟眞篇) 등을 지니고 다니며 道家의 말에 매우 밝았다. ]  병오년(1606)에 허균이 좌막〈佐幕:비장(裨將)을 말 함. 감사 유수 병사 수사 견외사 들에게 따라다니는 관원〉으로 있을 때 강가에서 임금의 부름을 받고, 우연히 내원암(內院庵)의 주지인 원사리(元闍梨)를 의주(義州) 성주사(聖住寺)에서 만나 방장(方丈:화상 국사 주실 등의 높은 중이 사는 거소)에서 함께 자게 되었다. 그래서 원사리에게 묻기를 “묘향산은 웅..

동양학/단학 2025.02.05

丹學人物考. 삼봉 정도전 三峯 鄭道傳 ( 2 )

丹學人物考.   삼봉 정도전  三峯 鄭道傳  ( 2 )                                                             硏精會報 29, 30호 에서  정도전은 이로부터 15년 후인 1398년(태조7) 즉 그가 죽을 때 까지 변함없이 이성계를 도와 활약했으며 또한 자기의 포부를 이성계의 권력에 의하여 실현했기 때문에 만년에는 이성계 앞에서 “한나라의 고조(高祖)가 장자방(張子房)을 썼을 뿐 아니라 장자방이 또한 한고조를 쓴 것입니다”라고 서슴치 안고 말하여 자기와 태조와의 관계를 태조와 장량(張良)으로 비유했던 것이다. 정도전이 이와 같이 이성계를 찾아갔을 무렵인 1383년(우왕 9) 8월에는 이성계의 유일한 정견 내지는 국방논의라고 볼 수 있는 안변지책(安邊之策..

동양학/단학 2025.02.04

丹學人物考. 삼봉 정도전 三峯 鄭道傳 ( 1 )

丹學人物考.   삼봉 정도전 三峯 鄭道傳  ( 1 )                                                             硏精會報 28호 에서  [ 1337년~1398, 本貫은 봉화. 字는 종지(宗之). 號는 삼봉(三峯). 시호는 문헌(文憲). 이성계(李成桂)의 조선 건국을 돕고,  군사, 외교, 행정, 역사, 저술, 에 활약, 억불숭유(抑佛崇儒). 문신이자 유학자, 혁명가. ]   정도전(鄭道傳)은 여말 선초(鮮初)의 시대를 인도한 사상가요, 유학자요, 위대한 정치가였다. 형부상서(刑部尙書) 정운경(鄭云敬)의 장남으로 1337년(충숙왕 6)에 태어난 듯 하며 영주(榮州)에서 세거(世居) 하였다. 그는 두뇌가 매우 명민하고 도량이 크며 호탕한 기상이 있었으나 후세사..

동양학/단학 2025.02.03

丹學人物考. 의상대사 義湘大師

丹學人物考.   의상대사 義湘大師                                                              硏精會報 27호 에서  [ 625년~702년, 속명은 김일지(金日之). 父는 신라 진골귀족 김한신 장군. 시호는 해동화엄시조원교국사(海東華嚴始祖圓敎國師 고려 숙종). 한국 화엄종(華嚴宗)의 시조, 신라십성(新羅十聖) 중 한 명. ]  법사 의상(法師 義湘)의 아버지는 한신(韓信)으로 서울의 귀족이었으며 성은 김씨 혹은 박씨이다. 의상은 20 이 넘어 집을 떠나 황복사(皇福寺)로 가서 머리를 깎았다. 사문이 된 그는 이 땅에 큰 이익을 주는 승려가 될 것을 결심하고 이왕이면 당나라로 가서 좀 더 넓고 깊게 많이 배우고저 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신라가 백제와 사이가..

동양학/단학 2025.02.02

丹學人物考. 매월당 김시습 梅月堂 金時習 ( 2 )

丹學人物考   매월당 김시습 梅月堂 金時習 ( 2 )                                                              硏精會報 24, 25 호 에서  한번은 자신의 전답을 타인이 빼앗아 농사를 짓는데 갑자기 그 사람에게 내놓으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사람이 듣지 않자 관가에 재판을 제기하여 타두는데 마치 장사꾼이 다투는 것 같았다. 승소를 하여 문서를 받게 되자 그 문서를 품속에 소중히 넣고 문밖에 나서자 앙천대소를 하면서 그 문서를 갈기갈기 찢어 흐르는 개울물에 던졌다. 이것은 아니꼽고 추잡한 현실을 부정하는 비판의식의 발로였는지도 모른다. 높은 벼슬에 있는 자가 혹 인망(人望)에 어긋나는 자로 알려졌을때는 “이 백성이 무슨 죄가 있어서 이른 임무를 맡기셨습..

동양학/단학 2025.02.01

丹學人物考. 매월당 김시습 梅月堂 金時習 ( 1 )

丹學人物考   매월당 김시습 梅月堂 金時習 ( 1 )                                                              硏精會報 23, 24호 에서  [ 1435(세종17)~1493(성종24), 本貫은 강릉(江陵). 字는 열경(悅卿), 號는 매월당(梅月堂), 동봉(東峰),벽산(碧山). 시호는 청간공(淸簡公). 법호는 설잠(雪岑). ]  매월당 김시습은 고려의 시중(侍中) 태현(台鉉)의 후손인 충순위(忠順尉) 김일성(金日省)의 아들로 세종 17년(1435) 서울의 성균관 뒤에서 태어났다.시습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세상 사람들이 신동이라 불렀는데 그의 이름이 시습이라 지어진 것도 그가 태어난지 여덟달 만에 글자를 깨쳐 친척이었던 집현전 학사 최치운이 그의 재주..

동양학/단학 2025.02.01

丹學人物考. 김가기 金可紀

丹學人物考   김가기  金可紀          硏精會報 23호 및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에서  [ ?∼859(헌안왕 3). 자는 사원(士元), 號는 일구당(一丘堂). 신라시대의 도교가(道敎家)·문장가. ]  김가기는 신라 때 사람으로 당(唐)나라로 건너 가 당시에 외국인을 위해 실시하던 과거제도인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여 진사를 지냈던 사람으로(일설에는 벼슬이 화주참군(華洲參軍)과 장안위(長安慰)에 이르렀다고 함), 성품이 침착하고 사치를 멀리하였으며 도(道) 탐구하기를 좋아하여 신선의 경지에 이르는 술법의 일종인 복기법(服氣法:폐기와 같음)으로 몸을 단련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는 박학하고 기억력이 뛰어났으며 문장을 잘 지었다. 용모 또한 깨끗하고 아름다웠으며 거동과 언담이 멀리 중..

동양학/단학 2025.01.31

丹學人物考. 권진인 과 남궁두

丹學人物考   권진인과 남궁두                                                           硏精會報 20, 21, 22 호 에서  [ 권진인 : 權眞人(1069~?) 본명은 권청(權淸), 고려 때 사람, 조선시대까지 500년 이상 살면서 후학들을 지도. 안동권씨 시조 太師公 權幸의 증손. 남궁두 : 출생과 사망 기록은 없고 1555년 과거에 급제한 일이 있고 오늘의 전북 옥구군 임피에서 살았다고 전해 짐 ]  남궁두는 가정(嘉靖) 을묘(乙卯)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임피(臨陂)에서 살고 있었는데 애첩을 두고 지냈었다. 그런데 이 애첩은 그의 당질(堂姪)과 서로 좋아 지내더니 사통(私通)까지 하는 터라 어느 날 둘이 함께 있는 때에 이들 두 사람을 죽이고 죄..

동양학/단학 2025.01.30

丹學人物考. 토정 이지함 土亭 李之菡

丹學人物考   토정 이지함 土亭 李之菡                                                           硏精會報 18, 19 호 에서  [ 1517~1578, 本貫은 한산. 號는 토정(土亭)·수산(水山). 조선 중기의 학자. 1713년(숙종 39)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 ]  한 해가 저물어 새 해가 시작 될 즈음이면, 많은 사람들이 재미로 보던, 믿고 보던 토정비결(土亭秘訣)을 보는데 틀린 것도 있지만 맞는 것이 훨씬 더 많다고 하면서 토정 선생의 이인으로서의 행적에 대해 즐거이 담소하는 것을 보게 된다. 흙집에 살고 있다고 해서 토정 선생이라고 불리었던 토정 이지함 선생은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그의 부친은 판관(判官) 이치(李穉)이다. 선생은 1517년(중..

동양학/단학 2025.0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