丹學人物考.
유형진 柳亨進
硏精會報 31호 에서
[ 조선 선조 때 사람으로 찬성(贊成) 오겸(吳謙)의 사위. 어려서부터 도서(道書)를 좋아하여 항상 참동계(參同契) 와 오진편(悟眞篇) 등을 지니고 다니며 道家의 말에 매우 밝았다. ]
병오년(1606)에 허균이 좌막〈佐幕:비장(裨將)을 말 함. 감사 유수 병사 수사 견외사 들에게 따라다니는 관원〉으로 있을 때 강가에서 임금의 부름을 받고, 우연히 내원암(內院庵)의 주지인 원사리(元闍梨)를 의주(義州) 성주사(聖住寺)에서 만나 방장(方丈:화상 국사 주실 등의 높은 중이 사는 거소)에서 함께 자게 되었다. 그래서 원사리에게 묻기를 “묘향산은 웅장하고 깊어 꾸불꾸불한 고개와 층이 진 높은 산꼭대기 등이 많고 사람이 갈 수 없는 곳이라 틀림없이 영검한 신선이 있을 것이요. 이런 신선이 그 가운데를 왕래함을 그대는 만난 적이 있소?” 하니 원사리가 답하기를 “빈도(貧道)는 오랫동안 두류산(頭流山)에 있었고, 이 묘향산에 있은 지는 6~7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천성이 또한 게을러서 절경을 깊이 조사해 보지 않았으므로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다만 계묘년(1603) 가을에 이인(異人)을 한 분 만났습니다.”라고 하였다. 허균이 그분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니 원사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해 9월에 빈도(貧道)는 보현사(普賢寺)에 있었습니다. 그 동쪽에 한 노인이 있어 번지르르 한 얼굴에 구레나룻을 날리며 당당한 풍채로 수없이 꿰맨 옷을 입고 나타났는데 예의가 심히 공손하였습니다. 그 노인이 말하기를 ‘생원 한무외(韓武畏①)씨가 어디에 있는가요?’하였습니다. 그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모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는데, 금선대(金仙臺)에 일찍이 앉아 있었던 한 중이 그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답하기를 ‘한군(韓君)은 덕천(德川)과 개천(价川)사이를 왕래하는데 지금까지 30여년이 되었으나 그의 모습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혹 산에 들어오면 돌아다녀 1,2년이 경과한 뒤 향로봉 위에 연등(燃燈)하는 곳이 있다고 해서, 올라갈 수가 없는데도 자신은 능히 올라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그 일로 관소(關所)로 갔는데 동짓달에는 꼭 돌아올 것입니다. ’라고 하자 그 노인은 실망하고 돌아갔습니다. 동짓달이 되어 나는 내원(內院)으로 갔는데 그곳 중이 한무외가 방금 금선대에 와 있다고 말해주어 곧 눈보라를 무릅쓰고 찾아가 보니, 깡마른 선비가 있는데 나이는 40세 쯤 되어 보이고, 누더기 옷을 입고 엉성한 베이불에 진흙으로 만든 베개를 베고 누워있었습니다. 어디에서 오셨느냐고 상세하게 물었더니 처음에는 서울에서 왔다고 하고, 다음에는 청주(淸州)에서 왔다고 하는 등 말하는 것이 끝내 불분명하였습니다. 그대로 며칠 묵게 되어 그를 관찰하니, 아침부터 저녁까지 먹고 자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일을 물어보면 대답할 때도 있고, 대답하지 않는 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10 여일이 지났을 때 번지르르 한 얼굴에 구레나룻을 날리던 노인이 홀연 당도하여 한무외를 보고 절을 하고 손을 부여잡고 통곡을 하였습니다. 잠시 후에 그들은 귀에다 대고 한참 동안 얘기를 하였습니다. 이윽고 우리 세 사람은 한방을 쓰면서 자는데 한달이 넘어도 그 노인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다가 하루는 홀연 떠나려고 하였습니다. 한무외가 어디로 가느냐고 묻자 그 노인이 대답하기를 ‘남쪽에 있을 때 예부터 잘 알고 지내던 중이 지금 북대(北臺)에 있는데 함께 겨울을 나기로 했기 때문에 가서 그 약속을 지키려 합니다’ 하고 떠났습니다. 내가 누구냐고 물어보자 한무외는 답하기를 ‘그 사람은 일찍이 단방(丹方②)을 나에게 배웠는데, 성은 유(柳)씨이며 일찍이 은진(恩津)의 원을 지낸 분이요’ 하였습니다. 내가 다시 묻기를 ‘단월(檀越③)께서는 이술(異術)을 하십니까?’ 하니 한무외가 대답하였습니다. ‘단학(丹學)이란 곧 황노(黃老)의 대도(大道)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 도를 터득하면 장생할 수 있으니 어찌 속세의 법술과 똑같이 말 할 수 있겠습니까? ’ 내가 다시 묻기를 ‘그럼 당신께서는 이미 불사지도(不死之道)를 터득하셨습니까?’하니 한무외가 대답하였습니다. ‘나 역시 우리 스승으로부터 전수 받고 여러 해 동안 수련하였으나 공적과 수행이 아직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며칠 뒤 나는 일이 있어 내원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 들리는 바로는 한무외는 금선대를 떠나 이 북대(北臺)에 와서 기거한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모릅니다.
허균은 얘기를 듣고 매우 미심쩍었지만 더 이상은 자세히 알 수 없었다.
훗날 허균이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④) 재상을 뵈올 때 우연히 유형진의 얘기를 하게 되자 이항복 재상이 놀라며 이렇게 말하였다.
”유씨의 이름은 형진이며, 찬성(贊成) 오겸(吳謙⑤)의 사위라네. 어려서부터 도서(道書)를 좋아하고 호흡조절과 침삼키기를 수련하여 60이 되었어도 모습이 쇠하지 않았었지.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때 왜적에게 가족을 잃고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네. 일찍이 은진의 원이 되었을 때 한 중을 후하게 대접했는데 무술년(1597)과 기해년(1599) 사이에 그 중이 묘향산에서 유형진을 만났는데 유형진 혼자만이 왜적에게 죽음을 면하고 갈 곳이 없어 이 산에 은신하고 있다고 말 하더라네. 나는 일찍이 그 말이 허황된 거라고 생각했으나 내 아들도 또한 그런 얘기를 들었다니 실로 이상 할 뿐이네. 그런데 고산(高山) 권곤(權鵾) 역시 말하기를 ‘외숙인 유현진 공은 도가의 말에 깊고 밝아 항상 참동계(參同計) 오진편(悟眞篇) 등의 도서를 가지고 다니며, 다른 사람을 보면 문득 수련하기를 권했는데 늙어서도 얼굴이 번지르르하게 쇠퇴하지 않다가 난리통에 처자를 모두 왜적에게 잃고 집을 버리고 입산하니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하였네"
이로써 전날 원사리가 만났다는 사람은 확실히 유형진이며 그는 도를 배워 수명을 연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변헌(卞獻⑥)이 묘향산에서 이른바 한생원(韓生員)이란 사람을 만났는데 10일 동안 먹지도 않고, 찬 우물에서 벌거벗고 목욕을 하는데 나이는 자기말로 80이라고 하나 소년처럼 강장(强壯)하였다. 그리고 노자와 주역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후에 석용원(石龍遠) 화상(和尙)에게 들으니 한무외는 이미 신선이 되어 떠나버렸다 하였다. 또한 중이 말하는데 얼굴이 번지르르하고 구레나룻을 날리는 사람이 어디에서 온지는 알 수 없으나 방금 두류산에 와 있다 하니 바로 유은진(柳恩津:柳亨進) 일 것이다.
유형진은 항상 처자에게 얽매여 출가하지 못함을 한탄했는데 이미 그의 가족을 잃어버리자 문득 산으로 들어가 성명(性命)을 수련하여 하나의 큰일을 마치니 진실로 그가 바라던 바였다.
아 참 그것도 이상도 하다.
어떻게 하면 공의 소매를 선대(仙臺) 위에서 잡아 천명의 이치를 이야기 듣고 마침내 훌 훌 날아갈 수 있을까?
《 무명씨집에서 인용 함 》
① 한무외(韓武畏) : 조선 중기 청주(淸州)의 선비. 젊어서 임협(任俠)을 좋아하여 청주의 관기(官妓)를 독차지 했는데 하루는 그 기생의 남편을 죽이고 보복을 피하여 평안도 영변으로 들어가 살았다. 그때 희천(熙川)의 교생(校生) 곽치허(郭致虛)를 만나 비방(秘方)을 배워 선교(仙敎)와 佛敎에 몰입했었다. 그래서 나이가 80이 되어도 두 눈은 번쩍거렸고 수염이 칠흑과 같았다. 그때 허균은 원접종사관(遠接從事官)으로 있었고, 한무외는 순안(順安)의 훈도(訓導)로 있었다. 허균이 그를 만나자 異人임을 알고 함께 거주하면서 仙學을 배웠다. 그때 한무외가 말하기를 “仙道를 배우려면 음모를 꾸미지 말 것이고, 무고한 사람을 벌하지 말 것이며, 사람을 속이지 말고, 재물을 모으지 말며, 가난한 사람을 보고 재물을 아끼지 말 것이며, 여색이나 잡기에 가까이 하지 말 것이라” 하였다.
그는 독신으로 40년을 살다보니 집안이 가난하여 욕되게도 하지 않고, 훈도가 되어 조석을 이어나갔다. 그는 법 없이 살다 앉아 죽으니 순안에다 장례 지냈다. 그런데 그 후 5,6년이 지나 그의 친구가 그를 묘향산에서 만났는데 용모가 조금도 늙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가 “남들이 자네는 죽었다 하던데 어째서 얼굴이 전보다 더 젊어졌는가 ?”하니 그는 웃으면서 “그것은 거짓말이네”라고 하였다.
② 단방(丹方) : 도가(道家)의 연단술 즉 불사약인 금단(金丹)을 만드는 방법
③ 단월(檀越) : 시주(施主) 불가에 물건을 주는 사람을 말 함
④ 이항복(李恒福) : 1556~1618, 조선 선조 때의 명신. 號는 白沙. 이조판서 우의정 영의정에 올랐다. 문집에 백사집이 있다.
⑤ 오겸(吳謙) : 1496~1582, 조선 중기의 사람 벼슬이 좌찬성 우의정에 오름.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
⑥ 변헌(卞獻) : 1570~1636, 조선 중기의 문인. 임진왜란때 승군(僧軍)에 종군 공을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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