丹學人物考.
삼봉 정도전 三峯 鄭道傳 ( 1 )
硏精會報 28호 에서
[ 1337년~1398, 本貫은 봉화. 字는 종지(宗之). 號는 삼봉(三峯). 시호는 문헌(文憲). 이성계(李成桂)의 조선 건국을 돕고, 군사, 외교, 행정, 역사, 저술, 에 활약, 억불숭유(抑佛崇儒). 문신이자 유학자, 혁명가. ]
정도전(鄭道傳)은 여말 선초(鮮初)의 시대를 인도한 사상가요, 유학자요, 위대한 정치가였다. 형부상서(刑部尙書) 정운경(鄭云敬)의 장남으로 1337년(충숙왕 6)에 태어난 듯 하며 영주(榮州)에서 세거(世居) 하였다. 그는 두뇌가 매우 명민하고 도량이 크며 호탕한 기상이 있었으나 후세사람들로부터 인간을 대함에 있어 편견이 있고 개성이 강하여 정안군 이방원에게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죽었다는 평을 받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유학에 정진하고 많은 서적을 읽어 예악(禮樂), 제도, 음양, 병력, 의학에 이르기까지 조예가 있어 자칭 문무의 재주가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이색의 문하에서 정몽주 이숭인(李崇仁) 권근(權近) 이존오(李存吾) 김구용(金九容) 김제안(金齊顔) 박의중(朴宜中) 윤소종(尹昭宗) 등과 친하여 서로 경사(經史)를 강론하여 문견을 넓혔고 특히 문장에 능하고 성리학에 밝아 모두 그에게 앞자리를 양보하였다.
그는 1362년(공민왕11)에 박실(朴實)의 방하(榜下)에서 진사에 급제하고 그 이듬해에 충주사록(忠州司錄)에 임명되어 태조 7년(1398) 그가 비명에 쓰러질 때 까지 36년 동안의 파란 많은 시회 활동이 시작되었다. 그 이듬해에는 중앙에 전교주부(典校主簿)로 들어왔으며 그 후 승진하여 통례문 지후(通禮門 紙候)로 있을 때인 공민왕 15년(1366) 에는 연이어 부모상을 만나 3년 동안 벼슬을 떠났다. 이어 공민왕 19년(1370)에 다시 벼슬하기까지 영주(榮州)와 삼봉(三峰)에 있으면서 오로지 학문과 후생의 교육을 위해서 정력을 다하였다.
정도전의 학문은 이미 벼슬하기 전에 이룬 것이지만 그 학문을 더욱 전진시켜 후에 그 불씨잡변(佛氏雜辯), 경국전(經國典) 등 불후의 문장을 남기고 또한 이씨왕조를 끌고 간 정치이념은 이때에 자리 잡혔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때 그는 경적(經籍)을 강구하는 한편 제자(諸子)의 각종 서적을 탐독하여 그 이름이 높았기 때문에 남방의 이름 있는 선비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특히 그의 학구적 태도는 대단히 성실하여 정몽주가 보내준 맹자 일부를 읽는데 하루 한 장 또는 반 장을 넘지 않을 정도로 정독하였다 한다. 이와 같이 다시 공부에 열중했던 정도전은 1370년(공민왕 19)에 성균박사(成均博士)에 임명되어 당시 성리학적 학풍 형성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당시 국가에는 홍건적의 침입으로 재해를 입은 성균관을 중영(重營)하고 충렬, 충선왕 이후 수입 된 성리학 중심의 유교를 진흥코자 유종(儒宗)이라 불리우던 이색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삼고 학술이 높은 김구용(金九容), 정몽주, 박상충(朴尙衷), 박의중(朴宜中) 이숭인 등이 정도전과 함께 박사로 임명되어 매일 명륜당(明倫堂)에서 분경(分經)· 수업하고 또 서로 어려운 문제들을 들어 논란하여 학술을 전진시켜 가므로 전국 학지들이 운집하여 장관을 이루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우리나라에는 주자학적 학풍이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정도전은 또 다음해 태상박사(太常博士)를 겸직하게 되어 태묘제향(太廟祭享)의 제의(祭儀)와 종율(鍾律)을 의정(議定)하고, 승진하여 예의정랑(禮議正郞) 겸 성균 태상박사 뿐 아니라 전선(銓選)을 관장하면서 5년을 지냈다. 그 후 1375년(우왕1)에는 더욱 승진하여 성균사예(成均司藝) 예문광교(藝文廣敎) 지제교(智製敎)가 되었으며 경연(經筵)에 들어가 왕에게 대학을 강(講)하고 또한 정치 문제를 논진(論進) 할 수 있게 되었다.
정도전이 이와 같은 벼슬을 하던 때는 마침 중국에서 백년을 두고 강제로 고려를 지배하던 원나라의 세력이 동요하여 남부에서부터 한족인 명나라가 홍기하는 원 명 교체기에 있었다. 이때를 틈 타 고려는 1356년(공민왕 5) 원나라의 지배에서부터 벗어나고 또한 원나라가 지배하여 심하여진 토지소유의 귀족발호를 견제하기 위하여 배원친명책(排元親明策)과 주자학적 유교주의 이념의 중앙집권체제로 전환하던 시기였다.
이로 인하여 과도기적인 현상으로 고려 집권층 내부는 외교적인 면에서 친명, 친원의 대립 항쟁이 벌어지고, 사상적인 면에서는 척불(斥佛) 양유(揚儒)가 전개되었으며, 사회 경제적인 면에서는 전제(田制) 개혁론이 대두하는 등 복잡다난하였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정도전은 주자학적인 이론을 구사하여 친명적 정치 색체를 뚜렷이 하였을 뿐만 아니라 천년의 전통을 가진 불교적 관념 사회를 유교적인 현실 사회로 이끌어 가는데 기수의 역할을 담당하고 나섰다. 정도전은 1375년(우왕 1) 집권자인 이인임(李仁任) 등의 친원파 들이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함을 계기로 다시 명나라와 관계를 끊고 원나라와 관계하려고 종친(宗親) 기로(耆老) 백관(百官)들과 연명하여 원나라 중서성(中書省)에 글을 보내려 함을 알고 박상충(朴尙衷) 임복 등과 함께 이에 불가함을 주장하여 서명을 거부하였다. 또한 그해 5월에 원나라의 사신이 명나라로 협공하자는 뜻에서 우리나라에 오자 이인임 등은 이를 맞이하려 하였으나 정도전은 김구용, 이숭인 권근 등과 함께 도당(都堂)에 글을 올려 원나라의 사신을 맞이함이 불가하다고 반대하였다. 그러나 경복흥(慶復興) 이인임 등 집권자들이 이를 물리치고 정도전으로 하여금 원나라 사신을 맞이하게 하니 그는 경복흥의 집으로 찾아가서 “나는 마땅히 원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오리다. 그렇지 않으면 원나라 사신을 묶어 명나라에 보내겠다”고 이해관계를 들어 더욱 반원을 주장했으며 말까지 불손하였다 한다. 또한 궁중의 어른인 태후(太后)에게 까지도 그 불가함을 극력 주장하여 이인임, 경복흥 등은 크게 노하여 조정에서는 그를 회진현(會津縣:지금의 나주)으로 귀향 보내도록 하였다.
정도전이 이렇듯 대담하고도 강력하게 배원 친명을 주장한 것은 이 기회에 완전히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야만 우리나라가 살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뒤에서도 말하겠지만 이조 건국 후 명나라가 표전(表箋) 문제로 우리나라를 위협할 때 그 실현은 못 보았으나 요동 정벌을 기도한 바를 아울러 생각한다면 사대주의론 자가 되어서가 아니라 우리나라를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하는 동시에 국가의 독립을 공고히 하려는 뜻에서 배원 친명을 주장하였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그는 귀향길에 염흥방(廉興邦)이 사람을 보내어 “내가 시중(侍中) 경복흥에게 말을 하여 시중의 노여움이 좀 풀렸으니 떠나지 말고 좀 기다리라”고 전하니 그는 술을 마시다 말고 “정도전의 말이나 시중의 노여움은 각각 소견을 달리하는 바 이지만 모두 나라를 위하는 뜻에서였고, 또한 왕명인데 어찌 안갈 수 있느냐” 하면서 그대로 떠났다. 이 말을 시중이 듣고 정도전은 아직도 뉘우치지 못하였다 하여 사람을 보내어 장형(杖刑)을 가하려 하였으나 마침 석기(釋器)의 난이 일어나 중지하였다 한다.
시중(侍中)인 이인임 등에게 배원친명책(排元親明策)을 시행토록 강행하려다 회진현으로 귀향가게 된 정도전은 3년째 되는 우왕3년(1377)에는 고향 영주(榮州)로 와 그곳에서 4년을 지낸 후 비로소 경외종편(京外從便)이 허락되어 삼각산 밑에 삼봉제(三峰齊)를 짓고 부모의 상을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학문 연구와 후생 교육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방으로부터 많은 학자가 삼봉제에 모여들게 되자 그곳 출신인 재상의 미움을 받게 되어 철옥(撤屋)하고 부평 김포 등지로 옮기며 1383년(우왕9) 까지 전 후 8년 동안 학문 연구에 전력하였다.
그동안에 그가 가장 주력 한 것은 불교배척 이었다. 그는 귀향 가던 그해에 「심문천답(心問天答)」두 편을 지어 주자학적 이념사회 건설을 위한 논리의 일단을 체계화 하였다. 그 내용은 그가 후일 1394년(이조 태조3)에 지은 「심기리삼편(心氣理三篇)」과 자매편을 이루며 또한 그의 만년인 1398년(태조7)에 “내가 죽어도 이제는 편안할 수 있다”고 한 「불씨잡변(佛氏雜辯)」과도 같은 것이다. 그 저서 내용은 여말 선초의 사회를 끌고 간 사상의 핵심으로 위의 두 책들이 비록 이때에 문자화 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의 그러한 사상은 이미 「심문천답(心問天答)」을 저술할 때부터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그는 당시 우리나라 사회의 모든 병폐의 근원을 불교의 비현실적 또는 기타의 관념적 풍조에 있다고 생각하고 이를 치유하기 위하여서는 주자학적 이념으로 사회를 혁신하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무엇보다도 첫째 성리학적 이념으로 불교의 허망을 비판하고 나아가서는 불교적인 생각과 행동의 일체를 말살하려는 포부에서 이들을 정리하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정도전의 불교 배척은 대략 주자학적 견지에서 그 다른 점을 논박한 것인데 특히 그 「관심설(觀心說)」과 「심성론(心性論)」 같은 설은 주자의 「관심설. 답정자상서(答鄭子上書)」 와 같은 류의 「석씨편(釋氏篇)」 에 의지한바 매우 크다.
그가 비록 이를 받아들였다고 하여도 여말의 척불 양유의 논은 안유(安裕) 이래 많은 사람들이 꾸준히 전개하여 왔지만 그만큼 철두철미하고 이론적 체계가 뚜렷한 주장을 한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그의 주장은 불교와 도교의 입장에서 본다면 너무 피상적이고 천박한 것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척불론은 당시 불교·도교의 타락으로 인하여 말기적 증상을 드러내고 있던 때에 있어서 개혁적인 사상적 논리의 준칙(準則)이 되었던 것이다. 이단(異端)을 물리치는 것이 나의 임무라고 생각 한 정도전은 이와 같은 사상을 항상 후생에게 가르쳤다.
1377년(우왕3) 그는 중 찬영(粲英)과의 담론에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고성(固城)의 요민(妖民)인 이금(伊金)이 자칭 미륵불이라 하여 “나는 능히 석가불이 될 수 있다. 모든 귀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사람이나 말·쇠고기를 먹는 사람은 재화를 남에게 나누어주지 않으면 다 죽게 될 것이다. 나의 말을 믿지 않는다면 3월이 되어 일월이 빛을 잃을 것이다. 나의 작용은 풀에서 파란 꽃을 피우게 할 수 있고, 나무에서 곡식을 열게 할 수 있으며 또한 종자로 두 번 수확할 수 있게 할 수 있으며 내가 산천신에 타일러 훈계하면 왜적도 사로잡을 수 있다.”고 백성을 속여 그들이 성황(城隍)을 철폐하고 그를 부처같이 섬기게 한다는 소리를 듣고, 찬영은
“이금의 말은 모두 황당무계하다. 특히 일월이 빛을 잃는다는 것은 더욱 가소로운 일이며, 나랏 사람이 어찌 이와 같이 어리석게 이를 믿느냐” 하니 정도전이 이 말을 듣고
“이금이나 석가는 그 말이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단지 석가의 말은 타생사(他生事)를 말하였기 때문에 사람이 그 허망됨을 알지 못하고 이금은 3월의 일을 말하였기 때문에 그 허망됨이 나타났을 뿐이다.” 라고 하자 찬영은 아무 말 못하고 자리를 떴다고 한다.
정도전은 친원파와의 투쟁에서 물러난 후 회진(會津) 영주(榮州) 한양(漢陽) 부평 김포 등지로 옮기면서 당시 사회 혁신의 대원리인 주자학적 입장에서의 척불론을 후생에게 정력을 다하여 가르쳤지만 그것만으로는 그가 생각하는 주자학적 이념국가 건설이란 큰 포부가 실현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이상을 실현시켜 줄 만한 권력을 지닌 인물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대상은 구가세족(舊家世族)으로 당시의 집권층이 아니어야만 했다. 그는 이미 첫 벼슬길에서 자기 소견의 일단을 주장하였지만 용납되지 않고 도리어 쫓기었던 것이다. 그 결과 그가 발견한 것이 당시 왜구와 홍건적의 격퇴로 용맹을 떨치며 안팎으로 신망이 두텁고 또한 구가세력이 아니면서도 잘 훈련 된 군사를 지휘하고 있어 외우내환의 난세에는 어느 때나 정계에 등장할 수 있는 이성계(李成桂)였다.
1383년(우왕 9) 가을에 그는 드디어 당시 동북면 도지휘사(東北面 都指揮使)로 활약하고 있는 이성계를 따라 함주(咸州)로 가서 그의 막료가 되어 그와 결연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성계의 군사 지휘가 엄숙하고 군사의 조직이 정연한 것을 보고 이만하면 되겠다고 마음먹어 이성계 에게 “훌륭합니다. 이 군대만 가지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이 군대는 능히 동남의 왜구를 격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한다. 그리고 그는 군영 앞에 서 있는 한 노송(老松)을 보고 다음과 같은 시를 읊어 이성계에게 화가위국(化家爲國)을 암시하고 자기가 그의 우익(羽翼)이 될 것을 다짐했다.
창망세월일주송 蒼茫歲月一柱松
창망한 세월에 한그루 소나무
생장청산기만중 生長靑山幾萬重
청산에 자라서 몇 만 겁이라
호재타년상견부 好在他年相見否
다른 해 서로 만나뵐 수 있으리까
인간부이사진종 人間府伊使陳從
사람사는 서리에서 곧 따라 좇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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