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학/단학

丹學人物考 김가기 金可紀

검은바람현풍 2025. 1. 31. 08:22

丹學人物考

   김가기  金可紀

         硏精會報 23및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에서

 

 

[ ?∼859(헌안왕 3). 자는 사원(士元), 는 일구당(一丘堂). 신라시대의 도교가(道敎家문장가. ]

 

김가기는 신라 때 사람으로 당()나라로 건너 가 당시에 외국인을 위해 실시하던 과거제도인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여 진사를 지냈던 사람으로(일설에는 벼슬이 화주참군(華洲參軍)과 장안위(長安慰)에 이르렀다고 함), 성품이 침착하고 사치를 멀리하였으며 도() 탐구하기를 좋아하여 신선의 경지에 이르는 술법의 일종인 복기법(服氣法:폐기와 같음)으로 몸을 단련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는 박학하고 기억력이 뛰어났으며 문장을 잘 지었다. 용모 또한 깨끗하고 아름다웠으며 거동과 언담이 멀리 중화의 멋을 풍겼는데 남들이 자기에게서 무엇을 구하면 거절하는 일이 없이 음덕을 베풀었고 범인(凡人)으로서는 하지 못하는 일을 하였다 한다. 속신선전(續神仙傳)에 승천한 사람 16명 중의 한 사람으로 들어있다.

 

김가기가 벼슬을 그만두고 종남산(중국에 있는 산)에 은거할 때 같은 신라사람인 최승우(崔承祐)와 함께 있었다고 한다. 이 두 사람은 광법사(廣法寺)에서 천사(天師) 신원지(申元之)를 만났는데, 자혜(慈惠:후의 義湘)도 마침 이 절에 머물고 있어서 자혜와 신원지는 친근한 사이가 되었다. 신원지는 김가기와 최승우가 자혜와 친한 사이임을 알고 그 뒤로 서로 친분을 맺었다.

이때 종리 장군(鍾離將軍=정양진인正陽眞人)이 찾아오니, 신원지는 이 세 사람을 종리에게 소개하고 도교의 술법을 전수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종리가 이를 허락하고 말하기를 신라에는 도교의 인연이 없어서 다시 800년이 지난 다음에야 마땅히 환반(還反)의 지결(旨訣)이 있어서 도교가 선양될 것이다. 도교가 크게 성행하여 지선(地仙) 200명이 나와서 도교를 널리 펼칠 것이다.”하고는 도법을 전수하여 그로부터 단() 공부법을 배웠고 신원지(天師)의 도움으로 3년 만에 단의 성공을 보아 신선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당시 종리는 이들에게 청화비문(靑華祕文영보필법(靈寶畢法팔두오악결(八頭五岳訣금고(金誥내관(內觀옥문보록(玉文寶錄천둔(天遁연마법(鍊魔法위백양(魏伯陽)의 참동계(參同契), 황정경(黃庭經용호경(龍虎經청정심인경(淸淨心印經) 등의 책과 구결(口訣)을 전수하고, 따로 연등(燃燈)을 전하였다고 한다.

 

이후 그는 본국에 잠시 들리기 위해 바다를 건넜지만 곧 다시 종남산(終南山)의 자오곡(子午谷)에 은거하여 띠풀로 엮은 집에 살았다. 손수 기화방초(奇花芳草진기한 꽃과 아름다운 풀)를 가꾸고 이상한 과수를 많이 길렀으며, 항상 향불을 피우고 조용히 앉아 수련에 전념했으며 도덕경(道德經)과 신선경(神仙經)을 외는데 중단하지 않았다.

이렇게 지내던 그는 대중 11(AD 867) 12월 느닷없이 황제에게 상주하기를 신은 옥황상제(玉皇上帝)의 조서를 받자와 영문대(英文臺)의 시랑(侍郞)이 되어 내년 225일 하늘로 올라가야합니다고 하였다. (선종)은 매우 기이하게 생각하고 중사(中使)를 파견하여 그를 궁내로 불러들이라고 하였으나, 김가기는 한사코 사양하며 나아가지 않았다. 왕은 옥황상제의 조서라도 보여 달라고 하였으나 그는 다른 신선이 가지고 있어 인간세상에 남아 있지 않다.”고 하여 거절하였다.

그러자 왕은 더 이상 청하지 못하고 향··비단과 함께 궁녀 네 명을 보내어 시중을 들게 하고, 다시 중사 두 명을 보내 동정을 살피게 하였다. 그는 홀로 고요한 방안에만 있어 궁녀와 군사는 접근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밤만 되면 김가기가 거처하는 방안에서 손님들과 담소하는 소리가 들리어 중사가 몰래 들여다보니 선관(仙官)과 선녀(仙女)가 각기 용()과 봉() 위에 앉아서 의젓하게 상대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궁녀와 중사가 감히 놀라게 할 수 없어 조용히 물러나왔다.

마침내 225일이 되자 봄경치가 아름답고 꽃은 만발하여 황홀한 가운데 오색구름이 피어오르면서 학이 울고, 난새鸞鳥와 백곡(白鵠)이 날며, 생황과 퉁소, 금석(金石) 등의 악기소리가 울려퍼지는 중에 깃털 지붕을 한 옥()으로 된 수레와 온갖 깃발이 하늘에 가득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수많은 무리들이 부축하는 가운데 그는 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이때 조정의 관원과 선비·서민 등 구경하는 사람들로 산골짜기를 가득 메웠는데, 모두가 이 기이한 현상을 보고 옷깃을 여미고 바라보며 경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 이후로 김가기가 승천한 날에 모든 도교인 들이 그의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해동이적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사림광기 事林廣記를 참고하면 천하의 도사들이 김가기의 승천일에는 모두 그의 명복을 비는 제사를 올렸다. 그렇다면,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비록 아녀자나 어린아이라도 김가기가 진선(眞仙)임을 모르는 자가 없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김도사를 좋아하지 않아서 도교의 서적이 전해 오지 않아 모두 김가기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중국 사람이 와서 물어 보아도 마침내 대답하지를 못하니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하였다.

해동전도록을 보면, 김가기·최승우·자혜를 신라에 최초로 도교를 전한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종리는 중국 도교의 남종(南宗)에 속하는데 김가기가 그에게서 도를 전수받은 것으로 본다면, 김가기는 중국의 도교와 도교 경전을 신라에 전한 최초의 인물이라 추측된다.

결국 그는 당시 신라의 숙위학생(宿衛學生)으로 당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한 다섯 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또 귀국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내보다 중국에서 더 유명하였다.

택리지에는 김가기가 전라남도 영암군에서 배를 타고 당나라로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