丹學人物考
매월당 김시습 梅月堂 金時習 ( 1 )
硏精會報 23, 24호 에서
[ 1435(세종17)~1493(성종24), 本貫은 강릉(江陵). 字는 열경(悅卿), 號는 매월당(梅月堂), 동봉(東峰),벽산(碧山). 시호는 청간공(淸簡公). 법호는 설잠(雪岑). ]
매월당 김시습은 고려의 시중(侍中) 태현(台鉉)의 후손인 충순위(忠順尉) 김일성(金日省)의 아들로 세종 17년(1435) 서울의 성균관 뒤에서 태어났다.
시습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세상 사람들이 신동이라 불렀는데 그의 이름이 시습이라 지어진 것도 그가 태어난지 여덟달 만에 글자를 깨쳐 친척이었던 집현전 학사 최치운이 그의 재주를 보고 기이하다 하여 이름을 논어의 맨 처음 구절인 학이시습(學而時習)에서 따다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시습이 태어날 때에 성균관 사람들이 모두 공자(孔子)가 반궁리(泮宮里) 김일성(金日省)의 집에서 태어나는 꿈을 꾸어 이튿날 그 집에 가서 물어보니 매월당이 태어났다고 하였다. 또는 매월당의 어머니 장씨(張氏)가 공자께서 집으로 오신 것을 맞이하는 태몽을 꾸고 시습을 낳았다고도 한다.
해동전도록에 의하면 시습이 태어난 다음해에 훗날 그의 단학 스승이 될 설공 김고운이 매월당을 만나보고 훌륭한 그릇임을 알아 도술 공부하기를 권유했으나 시습은 그때 바야흐로 세상일에 대한 집념이 강하여 능히 깨닫지 못하고 세상일에 더욱 관심을 쏟았기 때문에 단념한 채 돌아갔다고 한다.
김시습은 3세때 한시를 지을줄을 알아
“도홍유록삼월춘 桃紅柳綠三月春
복사꽃 붉고 버들잎 푸르러 춘삼월인데
주매청침송엽로 珠買靑針松葉露
구슬 꿴 푸른 바늘은 솔잎이슬 이어라”
라는 시를 지어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하였고,
또 하루는 유모(乳母)가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무우뇌성하처동 無雨雷聲何處動
비는 오지 않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황운편편사방분 黃雲片片四方分
누런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
라는 시를 읊었다 하니 과연 범인의 재주는 아니라고 하겠다.
5살에는 ‘중용’‘대학’을 통달하여 김오세(金五才)라 불리웠는데 그 음은 오세(傲世)와 같아서 세상을 내려 본다는 뜻이다. 후일 그가 우거하던 암자도 오세암(五歲庵)이라 하였다.
이런 천재적 재능이 온 세상에 떨치자 이 소문을 전해들은 대신 허조(許稠)는 과연 시습의 재주가 어느 정도인가를 시험 해 보려고 했다. 그리하여 하루는 틈을 내어 나이어린 시습을 찾아갔다. 허조는 시습에게 “너는 아직도 나이가 어리어 앞길이 창창하지만 나는 이미 늙어 쓸모없는 사람이니 노(老)자를 넣어 시를 한수 지어보아라. ”하였더니 시습은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시옵니까? 세상일은 모두 마음가짐에 달렸다고 봅니다.” 하고 조심성 있게 아뢰면서 시를 짖기를 ‘노목개화 심불노 老木開花 心不老 늙은나무에 꽃이피니 마음은 늙지 않았구나’라고 하였다. “참 소문 그대로 신동이로군!” 허조는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무릎을 탁 치며 외쳤다.
세종대왕은 이 이야기를 듣고 승정원 지신사(知申事) 박이창(朴以昌)을 시켜 시험해 보도록 분부를 내렸다. 그리하여 박이창은 ‘동자의 배움은 백학이 청송 끝에서 춤추는 것과 같도다 童子之學 白鶴舞靑松之末 ’하는 글귀로써 그 댓귀(對句)를 재촉하였다. 이에 시습은 서슴치 않고 다음과 같은 글귀로 화답하였다. ‘성주의 덕은 황룡이 푸른 바다 속에서 뒤척이는 듯 하구나 聖王之德 黃龍飛碧海之中’ 이때 시습의 나이는 불과 다섯 살 이었으니 보통 사람으로써는 참으로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박이창은 그의 천부적인 문재(文才)에 경탄하면서 한편으로는 너무 귀여워 친히 시습을 이끌어 무릎위에 앉혀놓고 수차에 걸쳐 시험하여 보았으나 역시 시를 잘 지었다.
이러한 사실을 전해들은 세종은 크게 경탄하며 장차 크게 쓸 것을 약속하고 명주 50필(혹은 100필이라고도 함)을 하사하며 시습에게 가져가라 하였다. 시습은 서슴치 않고 명주필의 끝과 끝을 이어서 끌고 나갔다. 어린나이에 이처럼 슬기로웠으니 그 이름은 전국에 떨치게 되었다. 참으로 대성(大成)이 기약되는 천재 김시습 이었다.
그러나 세상일은 뜻한 대로만 되지는 않았다. 시습은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예기치 않던 일들이 속출하여 불행스런 사태가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는 15세 되던 해에 모친상을 당하여 부득이 외가에 내려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3년 상을 마치기도 전에 외조모가 사망하였다. 김시습은 곧 귀경하였으나 그의 부친이 병들어 있어 집안 형편은 말할 수 없는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이처럼 집안의 우환으로 인해 인간적으로 고뇌에 빠진 시습에게 또 다른 고통이 중압 해 왔으니 계유정난(癸酉政亂)과 단종애사(端宗哀史)로 인한 시대적인 번민에의 길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시습은 당시(21세)에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세조가 패권을 잡았다는 소식을 듣자 비분강개한 나머지 대성통곡을 하면서 책을 불사르고 그길로 삭발하고 중이 되어 정처 없이 유랑의 길을 떠났다.
맨 처음 도착 한 곳은 고려의 옛 서울 송도였으니 인세의 흥망성쇠에 느끼는바가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하나의 돌, 한알의 모래가 모두 옛일을 말하는 듯하였고, 가고 없는 사람에 대한 희한을 어떻게 풀 수 있었으랴. 그는 술에 취해 언제나 말하기를 “우리 영릉(英陵:세종대왕의 묘호)을 보지 못하였느냐?”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한다. 발길을 옮겨 흐르는 강물을 건너고 준령을 넘을 때 마다 아름다운 경치에 도취되어 벼슬을 하였던들 이러한 좋은 경개는 맛 볼 수 없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달래었다. 그는 방랑중에 한계산(寒溪山)에서 설공 김고운을 만나게 되었다. 설공은 그가 태어난 다음해에 그를 만나 道 공부하기를 권했던 사람으로 그의 앞일을 이미 알고 그를 다시 기다렸던 것이다. 세상일에 이미 실망했던 시습은 설공을 쫓아 道의 요지를 전수받고 丹을 일년 만에 이루고 설공은 물로 化하여 상계(上界)로 올라가고 시습은 금강산에 들어가 丹을 더욱 수련하였다.
단을 수련한지 9년 만에 인간세상에 내려와 다시 속인이 되었는데 세상은 시습의 마음을 격하게 할 뿐이었다. 그러나 마음을 가라앉히고 책을 사기 위하여 서울로 올라왔다. 때마침 효령대군의 권유로 세조의 ‘불경언해(佛經諺解)의 사업을 도와서 교정을 맡아보았다. 시습은 조정이 평소에 못 마땅히 여기던 사람들로 혼란한 것을 보자 31세 되던 해에 금오산에 들어가 산실(金鰲山室)을 짓고 필묵을 벗 삼아 평생을 보내려고 생각하였다.
어느 날 세조가 운수천인도량(雲水千人道揚)을 원각사(圓覺寺)에서 베푼 일이 있었다. 여러 스님들이 “이번 모임에 설잠이 빠질 수 없다”고 하여 세조가 설잠을 부르라고 명했다. 절 안을 두루 찾아보아도 설잠의 행방은 알 길이 없었는데 김시습이 변소에 빠져서 얼굴만 내놓고 있을 뿐이었다. 세조는 설잠이 곧 김시습 임을 깨닫고 자기를 놀린 것으로 단정하여 격노하였으나 신하들이 광인이라고 아뢰었으므로 불문에 붙였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었지만 매월당의 공부는 더욱 깊어지고 명성도 더욱 멀리까지 퍼져 도를 묻고자 찾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시습은 배우러 오는 사람들을 때로는 돌로 치려고 하여 쫒아버리기도 하고 화살을 쏘려고도 하여 문하생들을 두려고 하지 않았으며 혹 받는다고 하여도 김을 매게 한다던가 험한 일을 하게 하여 내쫒기가 일수였다. 이처럼 문하생을 받지 않고 미친 행동을 하여 당시로서는 용납 못할 행동을 예사로 하고 다녔지만 실은 단종에 대한 충정과 절개로 살으려고 한 때문이지 진짜 미쳤던 것은 아니었다.
시습은 단학(丹學) 전수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정희량 윤군평 홍유손 등을 은밀히 불러 단을 수련시키고 스승에게 전수받은 비법들을 함께 각자에게 전수하였다. 이때 홍유손 에게는 천둔검법(天遁劍法)과 연마진결(硏磨眞訣)을, 정희량에게는 옥함기(玉函記)와 내단요법(內丹要法)을 윤군평 에게는 참동계(參同契)와 용호비결(龍虎秘訣)을 전수하였고 이들은 후일 스승의 공부법을 후배에게 착실히 전수하여 우리나라 丹學의 맥을 잇게 하는데 커다란 공을 세웠다.
선생의 저작물인 ‘금오신화(金鰲新話)’는 현실세계에서 이루지 못 한 이상을 상상의 세계에서 그려내고 있는 소설로서 우리 문학사상 불후의 명작으로 손꼽히고 있는데 작중 인물은 선생의 자유사상과 인간성의 승리를 예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남염부주지(南炎浮州誌),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등의 3편에서는 지옥 천국 수궁의 이질적인 상계의 여러 양상을 그려놓고 있음을 볼 수 있다.‘어쨌던 시습은 현실을 부정하고 항거하면서 때로는 시로 현실을 꼬집고 때로는 괴팍한 행동으로 고관대작의 허위를 비웃고 때로는 세인이 이해 못할 기이한 행적으로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시습은 중이 되어 돌아다닐 때 머리는 깎고 수엽은 남겨두었는데 그 뜻을 시로 지어 “머리를 깎은 것은 세상의 더러운 것을 도피함이요, 수염을 있게 한 것은 대장부를 표시함일세” 하고 하였다.
시습의 시는 멀리 중국도 감복시켰는데 그 연유는 이러하다.
정사룡이 중국에 들어가 여러 사찰을 돌아보며 유랑하던 중 한 시승(詩僧)을 만났다. 정사룡은 4운율시 두어 수를 써서 시승에게 보이면서 자기 딴에는 잘 지은 것으로 자부하고 있었으나 중은 도무지 칭찬의 말 한마디 없었다. 정사룡은 중이 해석할 줄 모른다고 생각하고 이번에는 다시 김시습의 4언율시 네 수를 써보였다. 중은 한 번 읽어본 후 몸을 일으켜 안으로 들어가 향료와 제기를 씻어가지고 나오더니 의관을 정제하고 향을 피워 상위에 올려놓고는 김시습의 시를 다시 읽었다. 그리고는 “이것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신선 같은 사람이 지은 것이지 그대가 능히 지을 수 있는 시가 아니오” 한다. 정사룡은 얼굴이 붉어져 김시습이 지은 것임을 말하였다. 중이 시를 감식하는 눈이 이처럼 귀신같으니 보통 세속의 사람으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일이라고 어우야담 에서는 적고 있다.
중 가운데 조우(祖雨)란 이가 있었다. 일찍이 장자를 노사신(盧思愼)에게서 배우기를 청했던 사람이 어느 종실(宗室)의 집으로 찾아가는 것을 보고, 공이 뒤따라가 모르는 체 하고 “조우란 놈은 노사신에게 수학하였으니 그놈이 어찌 사람 축에 들겠소? 만약 이곳에 그놈이 왔다면 내가 꼭 죽이고 말 것이오.” 하니 조우가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펄펄뛰어 나오며 말하기를 “공이 감히 드러내놓고 대재상(大宰相)을 꾸짖을 수 있소? 만약 나를 죽일 수 있거든 마음대로 죽여 보시오” 하였다. 공이 조우를 움켜잡고 때리려 하자 좌객들이 함께 싸움을 말려 조우는 겨우 빠져 달아날 수 있었다. 그 후 조우가 수락산(水落山)으로 공을 찾아가 뵈니 공이 혼연히 맞이하여 말하기를 “네가 즐거이 나를 보러 왔구나!” 하며 일하는 아이에게 밥을 지으라 하였다. 이윽고 조우가 밥을 떠서 먹으려 하자 그때마다 숟갈이 입에 닿기도 전에 발로 땅을 차서 먼지가 숟갈에 앉아 밥을 한 숟갈도 먹지 못하고 말았다. 그리고 “너는 노사신에게 글을 배웠으니 네가 어찌 사람이냐” 고 하였다.
또 한 번은 시습이 삼각산 승가사 북쪽 바위로 올라가서 큰소리로 절간의 중을 불렀다. 중은 “이는 오세의 소리이다” 하고 급히 일어나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달려갔다. 정말 시습이 온지라 서로 인사를 나눈 후 이윽고 시습은 소매 속에서 죽은 생선 한 마리를 꺼내어 중에게 권하였다. 중이 받지 않자 시습은 억지로 고기를 먹이려하니 중은 마침내 화를 내고 가버렸다. 시습의 처사가 이처럼 비뚤고 괴상했으나 실은 그의 뜻은, 중이 도리를 다하지 않고 몸 만 이롭게 하려는 것을 밝히려 한 것이다.
매월당의 제자 사미(沙彌) 한 사람이 있었는데 목소리가 깨끗하여 상성(商聲: 5음의 하나, 강하고 맑고 깨끗하게 들림)을 잘 내었다. 글이나 시를 길게 내뽑으면 메아리가 창공 멀리까지 울려 퍼져 청아한 여운을 남겼다.
휘황한 달밤이면 매월당은 홀로 앉아 그 사미에게 이소경(離騷經:중국 전국시대) 초(楚)나라 굴원(屈原)을 한차례 읊게 하고는 흐르는 눈물로 옷깃을 적셨다.
비온 후에 계곡물이 불어나면 백지를 백여장을 만들고 필기도구를 갖추어 물살이 급한 곳을 골라 앉아 중얼거리며 절시, 율시, 또는 오언고풍 등의 시를 지어 벽지에 써서 물에 띄어 보내곤 하였다. 또 산에 올라 나무껍질을 벗겨 거기에 시를 쓰고서는 외고 읊기를 한참 하다가 곧 통곡하고는 깎아버렸고, 혹은 종이에 썼어도 사람에게는 보이지 아니하고 물이나 불에 던져 버렸다. 때로는 나무 조각으로 농사꾼이 밭 갈고 김매는 형상을 다듬어 하루 종일 관상하다가 역시 통곡하고 태워버리곤 했다. 어떤 때는 심은 곡식이 잘 되어 이삭이 졌는데도 낫을 휘둘러 눈 깜빡 할 사이에 쓰러트려 버리고는 목을 놓아 또 통곡하였다. 이런 행동은 보통 사람들은 이해 못하고 비웃기가 예사였다. 시습은 언제나 시를 읊으며 마음 내키는 대로 떠돌아다니며 세상을 희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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