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학/단학

丹學人物考 매월당 김시습 梅月堂 金時習 ( 2 )

검은바람현풍 2025. 2. 1. 08:38

丹學人物考

   매월당 김시습 梅月堂 金時習 ( 2 )

                                                             硏精會報 24, 25 에서

 

 

한번은 자신의 전답을 타인이 빼앗아 농사를 짓는데 갑자기 그 사람에게 내놓으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사람이 듣지 않자 관가에 재판을 제기하여 타두는데 마치 장사꾼이 다투는 것 같았다. 승소를 하여 문서를 받게 되자 그 문서를 품속에 소중히 넣고 문밖에 나서자 앙천대소를 하면서 그 문서를 갈기갈기 찢어 흐르는 개울물에 던졌다. 이것은 아니꼽고 추잡한 현실을 부정하는 비판의식의 발로였는지도 모른다.

높은 벼슬에 있는 자가 혹 인망(人望)에 어긋나는 자로 알려졌을때는 이 백성이 무슨 죄가 있어서 이른 임무를 맡기셨습니까?” 하면서 통곡하였다.

벼슬하는 사람으로서 매월당에게 업신여김을 당한 자가 있었다. 그 사람은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서거정에게 그의 죄를 다스리라고 하니, 서거정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런말을 하지 마소. 이제 이 사람을 형벌하면 백년 뒤 까지 그대의 이름에 누()가 될 것이오하였다.

어느 날 아침 서거정이 조회에 들어가는데 잡인은 물러가라고 하인이 외쳐댈 때 불쑥 누더기를 입고, 새끼 띠를 메고 패랭이를 쓴 시습이 나타나 앞에서 길을 인도하는 자를 헤치고 들어가 딱 버티고 서서 강중(강중)은 편안한가?”하고 서거정의 를 큰소리로 부르자 서거정이 웃으며 초헌(貂軒)을 세워 한참 말을 주고받았으므로 이 광경을 본 온 저자 사람들이 모두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성 안에 매월당이 들어오면 언제나 향교의 사인(詞人:문사) 집에 머물렀다. 서거정이 가서 찾으면 인사를 하지 않고 비스듬히 누어 두 발을 벽에 대고 발장난 하면서 하루 종일 이야기 하였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서상공께서 예를 하지 아니하고 업신여김이 저와 같으니 뒤에는 반드시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고 하였지만 며칠 뒤에 서공은 문득 와서는 만나곤 하였다.

김수온이 지성균 관사(知成均 館事)가 되어 얼마 지난 후에 맹자가 양혜왕을 보았다라는 글귀로 태학(太學)의 여러 선비를 논시하였다. 학생 가운데 한 사람이 삼각산으로 김시습을 찾아가 말하기를 괴애(乖崖)는 심한 것을 좋아합니다. 도대체 맹자가 양혜왕을 보았다는 것이 어찌 논문 제목에 해당합니까?” 하니 시습이 그 늙은이가 아니면 그런 제목을 내지 않을 것이다하고 곧 붓을 들어 한편의 글을 주며 생원이 자작한 것처럼 하여 그 늙은이를 한번 속여보오하였다. 그 말과 같이 하였더니 김수온이 끝까지 읽지도 아니하고 눈에서 불빛이 번쩍 나더니 이내 조용하게 (悅卿)이 어느 절에 있는가?” 하였다. 학생이 숨기지를 못하여 있는 데를 답하였다. 매월당을 알아주는 것이 그와 같았다. 그 논지의 대략은 양혜왕은 참람하게 왕이라 한자였으니, 맹자가 보지 않았어야 마땅하였다고 한다. (이율곡이 한 말 임)

 

주강 남효온(南孝溫)이 일찍이 매월당을 스승으로 하였는데 매월당이 그에게 이르기를 나는 영릉의 은혜를 받았으니 이런 고생이야 마땅하겠지만 공은 나와는 다르거니 어찌 세도(世道)를 위하여 꾀하지 아니하는가?”하니 남효온이 소릉(昭陵:단종 모후의 능, 세조가 파내버렸음)의 일은 천지의 큰 변괴이니 소릉을 복구 한 뒤에 과거(科擧)에 나아가도 늦지 아니 합니다하자 매월당이 다시 그에게 강요하지는 아니하였다. 추강이 어느 날 묻기를 저의 보는 바가 어떠합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창에 구멍을 뚫고 엿보는 격이오하였다. “동봉(東峯)이 보시는 바는 어떠하십니까?”하고 다시 물으니 나는 넓은 마당에서 하늘을 보는 격이지하였다. 효온이 보는 바는 작고 자기가 보는 것은 높으면서도 그에 따르지 못한다는 뜻이라 하겠다.

 

김시습이 장차 풍악(楓岳:금강산)에 가서 놀고자 하였는데 하루 앞두고 여러 남효온의 무리가 용산(龍山)의 수정(水亭)으로 찾아왔다. 공이 상대하여 웃으며 이야기 하다가 갑자기 몸이 몇 길 되는 정자 아래도 떨어져 부상이 심하여 숨도 쉬지 못했다. 여러 손님들이 바삐 구원하여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손으로 온 사람이 말하기를 이같이 중상을 입었으니 내일 어떻게 출발하겠소?”하니 공이 말하기를 그대들은 누원(樓院)에 가서 나를 기다리시오. 내 마땅히 병을 이기고 길을 떠날 것이오.”하였다. 이튿날 아침 여러 사람이 누원으로 가 보니 공은 벌써 먼저 와 있었는데, 떨어져 부상당한 흔적이 조금도 없었다.

매월당이 어느 날 술을 마시고 거리를 지나다가 영상(領相) 정창손(鄭昌孫)을 만나자 큰소리로 말하기를 네놈은 이제 그만하고 쉬어라하였다. 정창손은 듣지 못한 체 하였다. 사람들은 이런 기행(奇行) 때문에 그를 위태롭게 여겨 일찍이 그와 교류하던 이들도 모두 절교하니, 홀로 거리의 미친 자 들과 어울려 놀다가 취하여 길가에 쓰러지는 등 언제나 웃음거리로 지냈다.

그 뒤로 혹은 설악산에도 들어가고 혹은 춘천산에도 들어가곤 하여 가고 오는 것이 때가 없으니 사람들이 그의 거처를 모르게 되었다.

신숙주(申叔舟)는 어느 날 매월당이 입경(入京)하였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그에게 술을 권하여 쓰러지게 한 다음, 자기 집으로 가마를 태워 실어갔다. 술이 깨자 그는 속임을 당했음을 알고 일어나서 돌아가려 하였다. 신숙주가 그의 옷깃을 잡고 말하기를 일경 어찌하여 한마디 말도 아니하오?” 하니, 공은 입을 굳게 다물고 붙잡힌 옷깃을 끊어버리고 돌아갔다. 이로부터 매월당의 종적이 더욱 묘연해 졌다.

공의 일족으로서 중이 된 사람으로 학조(學祖)라는 중이 있었는데 공보다 못하지 않은 터이라 늘 공과 서로 맞서 왔다.

하루는 산중으로 동행하게 되었는데 때마침 내리던 비가 개었다. 길가에 멧돼지가 칡뿌리를 파내느라 구덩이가 패인 곳이 있었는데 퍽 깊은 그 구덩이 속에 빗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공이 말하기를 내가 이 장마구덩이 속에 들어갔다 나오려고 하는데 그래도 나를 따라 갈 수 있겠는가?” 하고 곧 함께 흙탕물 속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그러나 공의 의복과 몸은 조금도 젖은 데가 없었는데 학조는 흐린 물이 얼굴에 가득하고 의복에 흙탕물이 흠뻑 젖어 있었다. 공이 웃으며 네가 어찌 능히 나를 본받을 수 있겠느냐?” 고 하였다.

공은 일찍이 그 세대의 문장을 저 만큼 낮추어 보았다. 성종이 노두시(老杜詩)를 해석하라 하니 공이 껄껄 웃으며 말하기를 어떤 늙은 놈이 노두(老杜:당나라 시닌 두보)를 감히 해석 할 것이냐?”고 하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점필재(占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주장이요하니, 공이 말하기를 종직이 한 이레(七日)나 되어야 눈을 뜰 것이다하였다.

어느 날 서강을 지나다가 한명회(韓明澮)의 별장에 있는 판상시(板上詩)청춘엔 사직을 붙었고 백발이 되어서는 강호에 누었노라 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고 하였는데 공께서 부()자를 위()자로 고치고, ()자를 오()자로 고쳐놓고 갔다. 뒤에 한명회가 그것을 보고 바로 없애버렸다고 한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선사(禪師) 현치(縣治:울진읍)의 남쪽 십리 지점에 주천대가 있다. 그전 성화년간(成火年間:명나라 현종의 연호 1465~1487)에 매월당이 주천대 옆에 와 주천과 성굴 사이에서 살았었다. 사람들이 그 의리를 높이 우러러 그의 지팡이와 발자취가 지나는 곳을 지나면 반드시 경의를 표했다. 주천대의 남쪽 몇 리 쯤 떨어진 지점에 굴이 있는데 그 기괴함이 신령스럽다. 매월당이 그곳에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성류굴이라 하였다.

일찍이 매월당이 설악산에 은거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강릉 사람 최연(崔演)이 나이 어린 동지 대여섯 사람과 함께 그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였다. 그는 모두 거절하고 최연 만을 가르칠 만 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머물게 하여 반년을 지냈다. 그동안 최연은 사제의 도리를 다하여 자나 깨나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시중을 들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달이 밝은 밤중에 깨어보면 스승은 간곳이 없고 잠자리가 텅 비어 있는 일이 종종 있게 되는 것이다. 최연은 이상하게 생각이 되었으나 감히 간곳을 뒤 쫒아 가보지는 못하였다. 어느 날 최연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뒤를 밟아보려고 생각하고 있다가 달이 밝은 밤중에 또다시 정장을 하고 소리 없이 나가시는 뒤를 최연도 살짝 따라갔다. 골짜기를 넘고 재를 넘어 초목이 우거진 숲속에 이르니 고개 밑에 큰 반석이 있고 어디서 왔는지 두 사람이 서로 읍하고 얘기를 하는데 최연은 멀어 잘 들을 수가 없었다. 한참 지나자 두 사람이 헤어지는 것 같아 최연은 먼저 돌아와 시침을 떼고 태연히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시습은 최연을 불러 나는 너를 가르칠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서 비로소 네가 번거롭고 조잡한데가 있음을 알았으니 더 이상 가르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최연은 그날 밤에 함께 얘기를 나눈 사람이 누구인지 물어보지도 못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매월당 김시습이 세상에 항거하며 살기를 4반세기나 넘긴 성종 12(14821), 그동안 세상도 많이 변하고 그의 나이도 50줄에 가까운 47세 때에 그는 머리를 기르고 글을 지어서 조부와 아버지에게 제사 지냈는데 그 제문(祭文)() 임금이 오교(五敎)를 베푸셨는데 부모 있다는 것이 맨 앞에 있고 죄 되는 일 삼천 가지 중 불효가 가장 큰 것이었습니다. 하늘과 땅 안에서 살면서 누가 부모님의 은혜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소자가 본집 작은 집을 이어 받들어야 할 일이오나 이단에 빠져 혹하게 되었다가 말로에 이르러 겨우 뉘우쳐 이에 예전을 상고하고 선경을 찾아보아 조상에 따르는 큰 의식을 베풉니다. 청빈한 생활을 참작하여 간략하면서도 깨끗하게 힘썼으며 많이 차리는 것을 정성으로 대신했습니다. 한무제(漢武帝)는 일흔 살에야 전승상(前丞相)의 뜻을 깨달았고 원덕공(元德公)은 일백살에야 허노재(許魯齋)의 풍도(風道)에 화했다고 합니다. 늦게 불효를 깨달음을 용서하시오소서.” 하였다. 그리고 환속하여 안씨 딸과 혼인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벼슬을 권했으나 끝내 나가지 않고 방랑 또한 다를 것 없이 지내다가 얼마 안 되어 아내가 죽으니 산으로 다시 들어가 머리를 눈썹까지 내려오게 하는 두타형 중이 되었다.

성종 14(1483)에 윤씨 폐비론이 대두하자 다시 관동으로 방랑길을 떠나 강릉과 양양근처에서 지내는 것을 좋아하여 설악산, 한계산, 청평산 등지에 거처하였다.

어느 날 양양의 수령으로 있는 유자한(柳自漢)이 예절로 김시습을 대접하고 가업을 회복하고 세상에 행세하라고 권했더니, 김시습은 편지로 사례하고 말하기를 장차 긴 꼬챙이를 만들어 복령(茯笭)과 삽추()를 캐고 가을철이 되어 서리가 내리게 되면 다 떨어진 수삼 옷이나마 수선하여 입고, 겨울철이 되어 눈이 쌓이면 왕공(王恭)의 학창의(鶴氅衣)를 정돈하겠습니다. 세상에 낙오되어 사는 것과 마음대로 오라 가라 하며 일생을 매인데 없이 보내는 것과 어느 것이 나을는지? 천년 뒤 나의 본뜻을 알아주기 바랄뿐입니다.” 고 하였다.

 

매월당은 성종 24(1493) 홍산(鴻山:충남 부여군) 무량사(無量寺)에서 병들어 누웠다가 죽었다. 이때 그의 나이 59세로 세상에 보기 드문 신동으로 태어나 학업에 정열을 바치던 10대를 지나고, 천하를 유랑하고 정사수도(靜思修道)하던 젊은 날과 또한 현실을 부정하고 항거하며 일생을 충열(忠烈)과 의협심(義俠心)으로 유랑과 방랑으로 마친 것이다.

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화장하지 않고 3년간 절 옆에 관을 모셨는데 3년 후 안장하기 위해 관 뚜껑을 열어보니 안색이 살아있는 것 같아 중들이 모두 경탄하며 그가 부처가 되었다고 하면서 화장하여 그 뼈를 모아 부도(浮圖)를 만들어 세웠다고 한다.

지금 부여박물관에는 화장할 때 나왔다는 김시습의 사리가 진열되어 있다.

시습은 살아있을 때에 늙고 젊은 두 화상을 손수 그리고 또 스스로 찬을 지어 남겼는데 찬에 말하기를 너의 몰골은 한눈에도 굉장히 왜소하고 너의 말은 크게 지각이 없으니 마땅히 언덕과 골의 가운데에 두어야 하겠구나. 이협지묘 이언대통 구학지중 爾形至眇 爾言大侗 丘壑之中 라고 지었다.

시습의 단학 제자 중 윤군평이 시습이 입적 한 7년 뒤에 송경에서 시습을 만났는데 시습이 하는 말이 단학을 서경덕에게 가르쳐 주고 왕래함이 이제 이태가 되었다고 하였다 한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상국 윤춘년(尹春年)은 매월당전에 세상에는 선생의 환술(幻術)이 많아서 능히 맹호를 부리고, 술을 피로 변하게 하고, 기운을 토해서 무지개가 되게 하고, 오백나한을 청해 오게 한다고 하니 그것은 괴이하도다하였고, 율곡 이이는 왕명을 받들어 지은 김시습전에서도 동봉(東峯)은 홍치(弘治) 6(1493)에 홍산 무량사에서 향년 59세로 일생은 마쳤다. 유언에 따라 화장하지 않고 절 옆에 가매장 하였다가 3년 후에 안장하기 위해서 관뚜껑을 열어보니 안색이 살아있는 것 같아 중들이 모두 경탄하며 부처가 되었다고 생각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