丹學人物考.
삼봉 정도전 三峯 鄭道傳 ( 2 )
硏精會報 29, 30호 에서
정도전은 이로부터 15년 후인 1398년(태조7) 즉 그가 죽을 때 까지 변함없이 이성계를 도와 활약했으며 또한 자기의 포부를 이성계의 권력에 의하여 실현했기 때문에 만년에는 이성계 앞에서 “한나라의 고조(高祖)가 장자방(張子房)을 썼을 뿐 아니라 장자방이 또한 한고조를 쓴 것입니다”라고 서슴치 안고 말하여 자기와 태조와의 관계를 태조와 장량(張良)으로 비유했던 것이다.
정도전이 이와 같이 이성계를 찾아갔을 무렵인 1383년(우왕 9) 8월에는 이성계의 유일한 정견 내지는 국방논의라고 볼 수 있는 안변지책(安邊之策:고려사열전 권48)이 상서되었는데 이것이 정도전이 처음으로 이성계에게 헌계(獻計)한 것인지 모른다.
정도전은 그 이듬해인 우왕 10년 여름에도 재차 함주에 가서 이성계의 군료가 되었다가 그해 7월에 전교부령(典校富令)으로 임명 발탁되어, 성절사(聖節使) 정몽주의 서장관(書壯官)으로 보충되어 명나라에 갔다.
이 사신 행차의 목적은 표면으로는 우왕의 승습(承襲)과 공민왕의 시호(詩號)를 청하는 것이었지만 보다 중요한 이유는 우왕 초년에 이인임 등이 친원책을 썼기 때문에 명나라가 우리나라를 경계하여 고려를 정복하겠다고 위협하는 한편 세공(歲貢)을 증정(增定)시키고 또한 사절로 들어간 김수(金廋) 홍상재(洪尙載) 등을 원주(遠州)로 유배시키는 등 까다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으므로 이를 해결하여 여명(麗明)관계에 호전을 기도하려는 것이었다.
정도전과 정몽주는 명을 받은 즉시 남경(南京) 까지의 8천리의 90일 일정을 60일 만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돌아왔다.
명나라에서 돌아온 이듬해(1385) 4월 정도전은 성균관 제주(祭酒) 겸 지제교(智製敎)에 임명되었고 다시 그 이듬해에는 자청하여 남양부사(南陽府使)가 되어 지방관으로서의 일군선정(一郡善政)의 모범을 보이었다.
그 후 우왕 14년(1388)에 이성계가 요동정벌에 나갔다가 군을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여 우왕을 축출하고 최영(崔瑩) 일파의 친원파를 숙청하고 나라 일을 맡아보게 되자 대사성(大司成)에 천거되어 다시 이성계 주위에서 제반정책을 계략하게 되었다.
소위 위화도 회군은 전에 원나라가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두어 지배하던 철령(鐵嶺) 이북 땅에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를 두어 직접 통치하겠다고 고려에 통고함에 우왕과 당시 나라 일을 맡아보던 최영 등은 이에 반발하여 요동을 정벌하여 이 요구를 거절하는 한편 은연중 옛날 고구려의 땅을 찾겠다는 목적에서 정벌군을 보냈던 것인데, 우군도통사로 정벌군을 통솔하여 출정했던 이성계가 좌군도통사 조민수(趙敏修)를 달래어 중도에서 회군하여 중앙 당국자(當國者)를 몰아내고 대신 정권을 잡았던 것이다.
이때는 정도전이 직접 관여한 것 같지는 않으나 그 후 창왕을 옹립 할 때라든지 또는 창왕을 몰아내고 공양왕을 세워 이성계 일파의 정권을 확립하여 나가는 것 등에 있어서는 정도전의 관여가 절대적이었던 모양이다.
이러는 동안 관직도 급진하여 창왕 초년(1389)에 그는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으며 공양왕 즉위 때에는 삼사우사(三司右使)가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고, 동왕 3년(1391)에는 우군총제사(右軍摠制使)를 겸하게 되었다.
또한 우왕 창왕은 모두 공민왕의 후손이 아니고 신돈(辛旽)의 자손이라 주장하여 그 폐시(廢弑)를 단행하고 종실 중 가장 무능한 공양왕을 옹립한 것 등은 모두 그의 계략이라 보아 좋을 것이다.
그는 이미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고 위왕을 폐출하고 조민수 이색 등의 주장에 의하여 창왕을 세울 때 윤소종(尹昭宗)과 더불어 이의를 제기하여 창왕을 신(辛)씨라고 배척하고, 왕씨 중에서 다른 사람을 왕으로 만들자고 주장하였다. 창왕을 세우는데 반대하였던 그는 2년이 채 못 되어 기어코 이성계, 심덕부(沈德符) 지용기(池勇奇) 정몽주 등 아홉 사람과 힘을 합하여 창왕을 폐출시키고 공양왕을 영립(迎立)하였던 것이다. 이 공으로 그는 봉화현(奉化縣) 충의군(忠義君)에 봉작(封爵)을 받고 중흥공신(中興功臣)에 훈록(勳錄)되었다.
그로부터 정도전은 이성계의 또 한사람의 우익인 조준(趙逡)과 힘을 합하여 여말 정치의 최대 과제인 전제(田制) 군제(軍制) 등에 손을 대어 그 개혁에 성공하여 이조 성립의 정치 경제 군사적인 기반을 이룩하는 동시에 그의 척불론을 내세워 숭유억불책(崇儒抑佛策)을 쓰게 하여 불교적인 사회이념을 유교적인 사회이념으로 이끄는데 전력을 다 기울였다.
고려 역대의 숭불정책은 불교의 융성을 보게 되었으나 그 반면 승려의 타락과 부패로 말미암아 중기 이후에는 많은 폐해를 국가와 사회에 끼쳤던 것이다. 즉 사원은 막대한 재원을 점유하고 있어 국가 재정을 좀먹는가 하면 승려들은 양주(釀酒) 식리(殖利)를 업으로 하는 자 까지 있었으며 심지어는 일반 민가에 출입하며 음주 육식 음행 격투 등 속인에 못지않는 난행을 범하여 풍기를 어지럽게 하는 승려가 많았으며 그중에는 신돈과 같은 엉뚱한 정치인도 나왔다. 그리고 왕실을 중심으로 각종 불교행사가 성행했으며 사탑의 남설(濫設)과 토지 정재(淨財)의 남시(濫施) 등으로 재정을 어지럽혔다. 이와 같은 폐단을 일소하고 주자학 이념의 새 사회를 건설하려는 것이 정도전의 최대의 염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공민왕 대에 주자학 학풍의 성립이나 그가 서재에서 후생들에게 척불이념을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이루어 질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권력의 추부(樞府)에 참여하게 된 그는 그 권력을 등지고 척불의 제일 기수가 되었던 것이다. 특히 공민왕 3년(1391)에 왕이 회엄사(檜嚴寺)에 행차하여 탄신의 예불행사(禮佛行事)를 함에 이르러서 “인군(人君)이 복리를 스스로 기복(祈福)하는 것은 듣지 못하였다”는 말로부터 시작하여 기회가 있을 때마다 척불론을 주장하여 국가에서 불교행사를 못하게 하는 한편 모든 면에서 승유책으로 일관하도록 이끌었다. 이때 박초(朴礎)는 척불을 위하여 헌신하고 있는 정도전을 추켜세워 “천(天) 인(人) 성(性) 명(命)의 연원(淵源)을 발휘하여 공맹정주(孔孟程朱)의 도를 창명(倡鳴)하고 부도백대(浮屠百代)의 광유(誑誘)를 막아 삼한천고(三韓千古)의 미혹(迷惑)을 열었다. 이단을 배척하고 사담(邪談)을 종식시켜 천리를 밝히고 인심을 바르게 하였으니 우리 동방의 진유(眞儒)는 한사람 정도전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도 그의 척불책의 활약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리하여 우리나라는 유·불 교체의 고갯마루는 넘고 있었던 것이며 이는 정도전이 논리적인 척불론을 가지고 권력의 힘을 빌어 척불승유책을 실천한 것이 아마 제일 큰 계기라 하겠다.
다음 전제(田制)에 있어서는 원나라가 지배한 이래 더욱 문란하여져 권신(權臣) 귀족이 다투어 광대한 전장(田莊)을 만들고 사원이 또한 넓은 토지를 점유하고 각기 국가에 대하여 조세를 모면함은 물론 경작 농민에게 각종 방법으로 2중 3중으로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추구하여 국가의 재정도 기울어졌고 농민의 생활도 차차 빈곤해져서 고려사회는 경제적으로 거의 파탄지경에 다다랐던 것이다. 그는 이를 보고 “ 전체가 파괴된 후 부터는 호강(豪强)이 겸병하여 부자는 땅이 더욱 불어나게 되고 가난한 자는 입추(立錐)의 땅도 없다. 가난한 자는 부자의 땅을 차경(借耕)하여 일년 내 고생하여도 먹을 것도 부족 할 지경이고 부자는 가만히 앉아 전객(田客)을 부려 그 수입의 태반을 먹는다. 국가는 아무 대책 없이 바라보고 있을 뿐 그 세(稅)를 받지 못한다. 따라서 백성은 더욱 고생하게 되고 국가는 더욱 가난해진다.” 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형편임에 전제(田制)에 대해 일찍부터 논의되어 내려왔고 공민왕 초기만 하여도 이색(李穡)의 개혁안이 제안된 바 있었으며 그 후에도 여러 사람이 각기 개혁을 주장 해 왔다. 그러나 이것은 집권세력과 구가세족(舊家世族) 과의 사이에 큰 이해관계가 얽힌 것이어서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것을 드디어 창왕 초(1389)부터 정도전과 조준(趙浚)의 강력한 주장에 의하여 마침내 공양왕 2년(1390)에 그 개혁을 보게 되었다.
그는 개혁의 첫 방안으로써 「경내(境內)의 모든 전지를 국가에 귀속시키고 계민(計民)하여 고루 전지를 분배함으로써 옛날의 바른 전제(田制)로 복구하려 한다」라고 하고 또한 「옛날 전제(田制)에는 田地가 관에 있어 백성에 나누어 주므로 경작하는 백성은 누구나 전지가 있고 따라서 천하의 백성은 누구나 전지를 받았고 경작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빈부의 차가 그리 심하지 않았으며 또한 그 전지의 세(稅)도 다 나라에 수납되었으므로 나라도 또한 富하였다」라고 말하여 경작유전(耕作有田)의 이상을 실현시켜 여말(麗末) 전체를 일대 혁신하려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구가세족의 반대와 참원(讒怨)이 심하고 또한 여러가지 정치 사회적인 제약이 있으므로 그의 이상대로 되지 못하고 과전법(科田法)이라 불리우고 또한 그의 입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당시 구가세족이 그들에게 불편하다 하여 입을 모아 참원하고 여러 가지로 저훼(沮毁)하여 마침내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지치(至治)의 은택을 입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 어찌 탄식할 일이 아니냐. 그러나 두 세명의 대신과 함께 전대의 전법을 연구 토의하고 오늘의 시의(時宜)를 참작하여 경내의 전지를 헤아려 전지의 결수(結數)를 알아가지고 얼마는 상공전(上供田) 국용군자전(國用軍資田) 문무역과전(文武役科田) 으로 하고 또한 나머지는 한량(閑良)으로 경성에 살며 왕실을 시위하는 자, 과부로서 수절하는 자, 향역진도(鄕驛津渡)의 이(吏)로부터 서민 공장(工匠)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역(公役)을 맡은 사람은 전지가 있게 하였다. 백성에게 전지를 나누어 준 것이 비록 옛날같이 되지는 못하였으나 전법(田法)이 정제(整齊)하여 일대의 전장(典章)이 마련되어 고려의 폐법을 내려다보게 되었으니 만만 다행이 아니랴” 이와 같이 그는 과전체제를 마련하였다.
그 다음 군제(軍制)는 무인 집권 이후 고려 전기의 부병제(府兵制)가 거의 무너지고 장군들이 각기 군기와 장비 및 국가의 군적(軍籍)에 들지 않고 군사를 거느리는 사병제가 발달하였다. 이 제도는 몽고족 지배 밑에서도 그 일부가 그대로 잔존하여 고려 말까지 내려와 전투력만을 따질 때는 그 우열을 단언할 수 없으나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세력의 정권 확립에는 많은 위협을 주었다.
이성계의 신흥 세력이 위화도 회군 후에 정권을 장악하게 된 것도 사병에게 힘 입은바가 절대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작학의 대의명분론을 들어, 우왕 창왕을 축출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의사대로 움직이고 군림만 하는 공양왕을 옹립한 후 부터는, 자가(自家)들의 새 왕조를 위하여 또는 중앙 집권세력의 정비를 위하여 田制개혁과 아울러 필요하였던 과제였다. 때문에 정도전은 이 개혁을 단행 할 당시에 『제장(諸將)들이 군사를 쓰고 사속(私屬)하는 것은 그 내력이 오래되었는데 이를 하루아침에 개혁하고, 더군다나 세족이 군역을 지지 않고 전지를 갖고 그것을 먹는 것도 또한 오래되었는데, 하루아침에 그 이름을 군적(軍籍)에 올려 몸으로 군역을 치르게 하면, 크고 작은 원망이 모두 신에게 돌아옵니다.』 라고 변명하고 또한 『원수(元帥:제당들이 각기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들을 말 함)를 파하고 3군을 만들어 신으로 하여금 총제사를 삼게 하면 떨리어나간 사람들이 반드시 앙앙(怏怏) 합니다.』 하였다.
그러나 전제개혁을 단행하고 난 직후 인 공양왕 3년(2391) 1월에 여러 원수를 파하고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를 두어 내외의 군사를 총령(摠領)케 하고, 도총제사로 이성계를, 중군총제사로 배극렴(裵克廉)을, 좌군총제사로 조준(趙浚)을, 우군총제사로 정도전을 임명하고 2월에는 삼군부에서 군사를 열병(閱兵)하고 분번숙위(分番宿衛)케 하고 사병제는 일단 폐지하였다. 이 삼군도총부의 설치로 말미암아 군사지휘권은 완전히 이성계에게 통합되었고 이 도총부를 이조 건국 후에는 의병삼군부(義兵三軍府)라 개칭하였다.
그러나 이조 개국 초에는 아직 새 왕조가 안정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만약에 있을 장졸의 변에 대응코자 개국공신 및 왕자 등에게 병권(兵權)을 분산시켜 마치 여말의 군제로 복귀하는 듯 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정종(定宗) 때 권근(權近)의 사병을 폐지하자는 상소로 폐지되어 여말의 분산 된 사병군제의 개혁을 완전히 끝 낸 것이다.
정도전은 위와 같은 여러 가지 개혁을 주장하고 추진하여 이성계 중심의 신병세력을 더욱 확장하여 가는 동안, 이에 반대하는 구가세족, 또는 장차 방해된다고 생각되는 인물은 누구를 막론하고 축출토록 주장하였다.
그는 정몽주 김진양 등이 이성계 일파의 반심을 알고 그들을 숙청하여 고려 사직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하여는 먼저 조준 남원 등과 아울러 이성계파의 가장 우수한 책객인 정도전을 먼저 제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한때 보주(甫州:지금의 예천)옥에 갇히어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는데 정몽주가 이방원(李芳遠:이조 태종)에 의하여 피살되고 정몽주 일파 50여명이 함출(咸黜)된 후인 6월에 소환되어 복작(復爵) 된 정도전은 서둘러 남은 조준 배극림 등 50여명과 힘을 합하여 그 다음 달 인 7월에는 기어코 공양왕을 몰아내어 고려왕조를 쓰러트리고 이성계를 받들어 왕을 삼아 새 조선왕조를 건국하였다.
일생을 한결같이 성리학적 이념의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만난을 무릅쓰고 심혈을 기울여 활약했던 그는 1398년(태조7) 정안군(芳遠 太宗)에 의하여 역적으로 몰리어 비명에 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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