丹學人物考.
국창 박엽 菊窓 朴燁
硏精會報 2호 에서
1570년 (宣祖 3년)에 태어나 1623년 (仁祖 1년)에 卒 하였다. 文官으로 字는 숙야(叔夜), 號는 菊窓, 本貫은 반남이다. 1597년 (宣祖 30년)에 文科에 급제, 內外職을 歷任하여 가는 곳마다 治積을 올렸다. 咸鏡南道兵司가 되어 城池를 수축(修築)하여 北西의 防備를 확고히 했고 黃海道兵史를 거쳐 平安道觀察司가 도어 6년동안에 治積이 나타나서 名聲이 높았다. 北胡들의 動靜을 잘 알고 防備하였으므로 그들이 감히 沿邊을 侵犯하지 못하였다. 당대의 權臣 이이첨(李爾瞻)을 모욕하고도 無事하리 만큼 名聲을 떨쳤다. 仁祖反正 後 그의 夫人이 光海君의 인척이었다는 理由로 그를 두려워하는 勳臣들에게 모함을 받아 死刑 당하였다. 叔夜는 氣運이 絶倫하여 6, 7 歲에 이미 그 오줌줄기가 담장을 넘었다고 하니, 가히 그의 精力을 짐작할 만 하다.
그가 平安道觀察司로 있을 때의 일이다. 每日 밤 초저녁이면 감영을 떠났다가 새벽녘에야 들어오는 일이 자주 있었다. 하루는 그의 첩 소백주(小栢舟)가 참다못하여 한마디 참견을 하였다.
“무슨 재미가 그토록 진진하여 밤새는 줄도 모르고 계시오니까?
“그게 무슨 소리 인고” 그렇지 않으시다면 어인일로 밤마다 出入이 그토록 늦기까지 하시겠습니까?“
숙야는 사랑하는 첩의 영문을 모르고 하는 말에 그저 빙그레 웃으면서 답하는 말이 “아녀자가 참견할 바가 아니니라. 긴한 일이 있어 며칠 늦은 것이니 그리 알라” 하고 달랬으나 소백주는 물러나지 않고 응석부리듯이 “그토록 재미있는 일이라면 소첩도 한번 데려가 주시겠습니까?” 하고 보채었다.
숙야는 엄숙한 안색을 하면서도 그날 밤 소백주를 말에 태우고 질풍같이 어둠속을 달렸다.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뒤에 탄 소백주의 눈에는 먼 곳의 불빛과 귓전의 바람소리만 들릴 뿐이어서 어디를 얼마나 가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였다.
한참이니 달리고 난 후에 숙야는 말을 서서히 멈추며 낮은 소리로 “예가 만주 안동 땅이다. 내 지금부터 하는 일을 너는 예서 조용히 숨어 구경이나 하여라” 고 일렀다.
숙야는 곧 청태조(淸太祖) ‘누루하치’의 군영(軍營)을 찾았다. 누루하치가 조선을 도모(圖謀)코저 안동(安東)까지 진출하여 호시탐탐(虎視耽耽)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숙야장군 단 한사람의 위력에 눌려 오지도 가지도 못하고 있는 판이었다.
숙야는 거침없이 ‘누루하치’에게 말하였다.
“자 오늘은 최후 결판이다. 다시 또 무슨 군말이 있다면 너 누루하치도 대장부가 이니니라.”
그동안 여러날 밤 두 사람은 재주를 겨루어 왔던 것이다. 게다가 누루하치는 재주가 밀릴 때 마다 이러니저러니 구실(口實)을 붙여 다시 對決하기를 請했던 것이다. 누루하치도 염치가 없어 오늘 밤을 결판의 날로 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말없이 대결을 하였으나 내리치고 찌르는 한수 한수는 온갖 기법과 혼신의 정력을 기울인 필살의 일창과 일검 이었다. 처음에는 말을 타고 겨루던 두 사람이 나중에는 창칼만 번쩍일 뿐 사람은 보이지 않고 용호상쟁 하는 신묘를 다하는 기량의 대결이라 숨어 보던 소백주는 숨이 막힐듯 하였다. 부질없는 아녀자의 질투로 사랑하는 이를 잃는가 걱정도 되겠지만 한편 자신이 모시는 어른이 저토록 훌륭한 분인 것을 어찌 감히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다만 침을 삼키고 숨을 죽이고 바라만 볼 뿐이었다. 한참만에야 호령하는 숙야장군의 말소리가 우렁차게 들이었다.
“자 이젠 어쩔텐가, 이래도 감불생심(敢不生心) 이 나라를 넘보겠는가?”
땅에 떨어진 ‘누루하치’의 목에 칼을 겨누고 하는 一喝이다. “알았소이다. 이제 다시는 ...” 누루하치는 끝을 맺지 못하였다. 그 또한 장정 만 명이 당해내지 못 할 용맹을 자랑하던 將軍 일 뿐 아니라 數年을 計劃한 大事를 말 한마디 못하고 포기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 허탈감은 또 어떠했으랴.
결국 淸太祖 누루하치는 전군을 이끌고 回軍하였다.
한 번의 접전도 해보지 못하고 敗戰 한 것이다.
그러나 이게 웬 일 인가? 回軍하던 淸軍은 캄캄한 칠야에 진퇴유곡(進退幽谷)에 빠지고 말았다. 分明 어제까지 훤하게 나 있던 길은 간데없고 앞에는 층암절벽(層岩絶壁)에 그 밑에는 퍼런 江물이 출렁이고 있으며 뒤에는 千軍萬馬를 거느린 大將軍 숙야가 버티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누루하치는 고개를 떨구고 숙야 앞에 섰다.
“回軍하라 하시면 길이라도 열어 주시기를...”
숙야는 말없이 손짓 하였다. “어서 가 보아라”
청의 대군은 소리 없이 회군하고 말았다. 이제는 절벽도 강물도 이미 다 사라지고 없었다. 그 後로 淸國의 軍士들은 숙야장군을 軍神처럼 우러러 보았다고 한다.
이처럼 비범한 술수는 어디에서 누구에게 배웠던가?
그는 어려서부터 타고 난 絶倫의 精力을 살려 스승 宋龜峯 先生을 따라 丹學의 左右兩道를 아울러 닦은 분이다. 또한 그 계제(階梯)가 상당히 고계(高階)까지 올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뒷날 仁祖反正으로 光海君이 王位에서 물러났을 때 바로 그 한 사람의 副將이 나타나 숙야장군께 아뢰기를 “小將 問安드림니다” “그대가 웬일인고?” “나라에는 反正이 있었습니다” “나도 알고 있느니라” “將軍은 장차 어찌하시렵니까? 小將이 3기지 計策을 아뢰올까 하옵는데 들어주시렵니까?”
숙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아뢰겠습니다. 이제 大監이 거느리는 휘하의 十萬 軍卒을 휘몰아 中原을 들이치신다면, 天下는 가히 뉘 손에 들어갈지 알 수 없는 일이니 한 번 꾀할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上策이 올시다. 다음은 淸人과 힘을 합하여 天下의 일을 꾀하신다면 天下는 비록 兩分은 될지언정 더욱 확실(確實)한 일이 아니겠사옵니까. 바로 中策이올시다.” 그러나 숙야는 아무런 응답(應答)이 없었다. 마치 명상(冥想)에 잠긴 듯 눈을 감은채 말이 없는 것이다.
부장(副將)은 말을 이었다.
“그러면 마지막 下策을 아뢰겠습니다. 평양의 軍卒을 이끌고 주야(晝夜)로 길을 달려서 서울로 向하신다면 前王을 다시 뫼시는데 3日 까지야 걸리겠습니까?
숙야는 조용히 눈을 떴다.
“부당한 일이다. 혼군(昏君 광해군을 지칭)이 아니시드냐? 數많은 百姓들이 도탄(塗炭)에 빠지는 줄 알면서 어찌 홀로 나만의 안녕과 영달(榮達)을 위하여...”
그는 말을 잊지 않았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른다면 그의 말대로 준마 비껴타고 千軍萬馬를 호령呼令하여 한번 천하를 도모하여 보고 싶기도 하지만 이제 민족의 운은 쇠(衰)하여 대륙의 한 귀에 몰리고 그 체통마저 이어가기 어려운 형편이 아닌가? 너무나 훤히 내대 보이는 앞날 이었다.
“물러가거라”
“하오면 좌이대사(座而待死) 하시렵니까?”
그는 말없이 눈을 감았다.
과연 그 후 어명에 依하여 숙야장군은 사형이 되었고 휘하 몇 몇 장사들은 편협한 조정의 처사에 반발하여 청나라로 亡命하였다. 그 때 계책을 올리던 부장이 바로 청나라의 용골대(龍骨大) 이다. 숙야장군 없는 朝鮮은 텅 빈 성과도 같았다. 역시 박엽의 수하 부장 중의 하나였던 임경업장군(林慶業將軍) 의 용맥(勇猛)도 淸軍의 智略과 武力 앞에는 속수무책(束手無策)이 되고 말았다.
그는 조선 오백년을 통하여 가장 출중한 文武 兼全의 英傑이었고, 八道의 재사(才士), 술객(術客), 장사(壯士)들이 그에게로 雲集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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