丹學人物考.
고운 최치원 孤雲 崔致遠
硏精會報 4호 에서
최치원(崔致遠 AD 857~?), 자는 고운(孤雲) 해운(海運), 시호(諡號)는 문창후(文昌侯), 경주의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라 전한다.
신라의 육두품(六頭品) 출신의 경주최씨(崔氏)의 문중에서 태어났다. 원래 신라는 엄격한 골품제도에 의하여 사회를 이끌어 나간 시대이다. 즉 골품에 따라 벼슬의 한계가 정해져 있던 것이다. 제1위관인 이벌찬(伊伐湌)에서 제5위관인 대아찬(大阿湌) 까지는 성, 진골(聖 眞骨)에 한하게 되어있고, 따라서 육두품 출신은 제6위관인 아찬(阿湌) 이상으로는 올라갈 수가 없었던 때이다. 신라 말기에 이르러 육두품의 상당수가 고려왕조의 성립을 정신적으로 지지하여 새로운 사회를 개편하여 보겠다는 의욕을 보인 것은 이와 같은 불공평한 제도에 대한 불만의 표시라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미 육두품의 한계인 아찬까지 오른 최고운은 고뇌에 사로잡힌 것이다. 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대운을 육두품인 崔公으로써는 막을 길도 없을 뿐이려니와 그렇다고 해서 다른 왕조를 섬길 만큼 후안무치(厚顔無恥) 할 수는 없지 않는가?
최고운은 12세에 혼자 당나라에 건너 가 18세에 빈공과(賓貢科)에 금방(金榜=壯元)하여 선주(宣州)의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되어 벼슬길에 올랐다. 학문을 즐겨하던 그는 관계에 나아가서도 끊임없이 정진하여 선주에 재직 할 때는 중산부궤집(中山覆簣集)을 저술하여 문명(文名)을 크게 떨쳤으며 중국의 육조사적(六朝事蹟)에 오른 쌍여분기담(双女墳奇談)도 이때에 있었던 일이다. 이어 미구에 승무랑시어내공봉(承務郞侍御內功奉) 이란 벼슬에 올라 자금어대(紫金魚袋) 까지 승사(承賜) 받았다. 황소(黃巢)의 난 이 일어나자 그는 병마도통사(兵馬都統使) 고병(高騈)의 종사관이 되어 황소를 규탄하는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평생에 큰 공을 세웠고, 이로써 그의 문장은 천하를 감탄케 하기에 이른 것이다.
또 그는 난 중에 계원필경(桂苑筆耕) 이십권을 저술하여 문단의 혜성과 같은 존재로 등장하였다.
그가 고국에 돌아온 것은 그의 나이 28세가 되던 해(AD 884년) 10월 이었다. 그때 신라는 황혼기여서 국정이 문란하고 기강이 해이하던 때였으나 그는 귀국하자마자 시독겸 한림학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얻은 보현(普賢)의 도를 펼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주위의 질투와 시기에 견디지 못하고 자원하여 지방장관인 태산군(泰仁) 함양(咸陽) 부성(富城=瑞山) 태수를 역임하였다.
그 후 진성여왕 8년에 국정의 어지러움과 민생을 도탄에서 구하려는 시무(時務) 10 여조를 건의했는데 이것을 받아들여 왕은 그에게 아찬(阿湌) 벼슬을 내렸으나 일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끝내는 세상에 뜻을 버리고 퇴관하여 산천을 소요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가 다닌 명승지는 해인사(海印寺), 쌍계사(雙溪寺)를 비롯하여 월영대(月影대)와 해운대(海雲대) 등이며, 특히 해운대의 이름도 그의 號 인 해운(海雲)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말년에는 그의 가족을 모두 이끌고 가야산(伽倻山)에 들어가 은거하다가 95세로 고려 광종 2년 (AD 961)에 선화(仙化) 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그는 고려가 흥하리라는 예시를 왕에게 보낼 때 “계림은 누렁잎이고 곡령은 푸른소나무다” 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문하생들은 고려에 많이 출사하여 벼슬하였다. 특히 고려의 현종(顯宗)은 최치원이 고려의 창업에 은밀한 공이 있다하여 내시령(內侍令)의 증직과 문창후(文昌候) 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그 밖에도 그의 발자취가 머문 곳에는 어디에서나 그의 시문에 인연 된 많은 기적의 설화로 남기고 있다.
다음은 중국인이 전하는 그의 설화이다.
육조사적(六朝事蹟)에 나오는 쌍녀분이라는 시와 더불어 얽힌 기담으로써 그 줄거리를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최치원이 선주의 표수현위로 재직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때 남쪽으로 백십여리 되는 지방에 있는 초현관에서 쉬고 있는데 그 앞에 쌍녀분 이라는 고총(古塚)이 있어 사람들에게 물은 즉 아는 이가 없어 그가 시를 지어 조(弔) 하였다. 그랬더니 그 남방 여인들이 와서 사례하여 말하기를 그녀들은 형제로써 어려서부터 자색이 아름답고 글재주가 있어 장래의 행복을 꿈꾸어오던 터에 재물에 눈이 어두웠던 부모들의 강요로 소금장수에게 출가하게 됨을 비관하고 자살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당나라 현종(玄宗)때 이곳에 묻힌 뒤로 아무도 찾는 이가 없어 항상 외롭게 지내더니 오늘 그대가 좋은 시로 조문해주니 감사하다는 것이며 밤새도록 함께 놀다가 새벽녘에야 돌아갔다고 한다. 이 기담 또한 최치원의 시가 능히 한을 품고 죽은 이의 혼마저 감응시킬만한 놀라운 솜씨임을 말해주는 한 토막의 일화인 것이다.
그는 시, 문장에 재질이 뛰어나 어려서부터 중원천지를 놀라게 했을 뿐 아니라 그 고매한 성품은 또한 오묘한 문학의 세계를 이룩하게 하였다. 그러면서도 심산에 묻혀 속세를 등졌던 동기는 당시의 사회상이 그토록 만들었다고 보겠으나 고매한 성향과 동양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선(仙) 사상에서 그 연유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에 의하면 최치원이 전했다는 환반지학(還反之學) 중에서도 참동계16조구결(參同契十六條口訣)은 특히 뛰어난 것이라고 한다. 동시에 시해법(尸解法)을 해설해 놓았는데 金, 木, 水, 火, 土, 5 가지의 법이 있음을 말했다.
또한 그의 외숙(外叔) 현준(玄俊) 에게서 보사유인지술(步捨遊引之術)을 배워서 가야보인법(伽倻步引法)을 저술했다는 것이다. 이것 또한 선도(仙道)의 오묘한 경지 인 시해에 관한 저술임이 틀림없으리라.
그리고 화랑 난랑(鸞郞)의 비서(碑序)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 나라에 오묘한 道가 있으니 그것을 풍류라고 한다. 그 가르침을 마련한 근원은 선사(仙史)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지마는 실로 여기에는 세가지 교(儒,佛,仙)가 모두 포함되어 있어 뭇사람을 도와서 교화하여 준다, 이를테면 들어와서는 부모님께 효도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라는 것은 노나라 사구(공자)의 취지이고, 무위(無爲)한 일에 처하고 말하지 않는 가르침을 행한다고 하는 것은 주나라 주사(老子)의 주장이고, 모든 악은 저지르지 않고 모든 선은 받들어 실행하라는 것은 축건태자(석가)의 교화이다.
미루어 보건대 나라에 있는 현묘한 도 풍류는 삼교(유불선)의 어느 것 보다도 더욱 특색이 있고 오히려 삼교의 장점을 고루 갖추어놓은 것이라고 볼 때 더구나 그 근원이 仙史의 상세한 기록에 있다고 한다면 우리민족 고유의 신선사상은 세계에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뛰어난 정신적 지주임이 틀림없으며 이런 모든 점을 익히고 전한 최고운 선생은 명실상부 한 우리 단학의 비조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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