丹學人物考.
구봉 송익필 龜峯 宋翼弼
硏精會報 5호 에서
구봉 송익필 (宋翼弼 1534년 중종29년~1599년 선조32년) 선생님은 부 송사련(宋祀蓮1496-1575)의 사남일녀 중 삼남으로 字는 운장(雲長), 號는 구봉(龜峯), 諡號는 문경(文敬), 본관은 여산(礪山)이다.
학문과 식견. 문장. 재략이 뛰어났으며 그의 형제 인필. 부필. 한필 등도 학문과 문장에 뛰어났는데, 특히 아우 한필은 백미였다. 그러나 그의 조모가 전 성균관 사례 안돈후의 비첩 출신 첩(중금)의 소생인 甘丁이라는 것에서 신분적 제한이 많았다.
이조시대는 성리학에 이념을 두고 이로써 과거시험을 쳐서 출사(出仕)하는 사대부 정치새대로서 사대부가 아닌 사람들은 많은 차별을 받고 관직에 나가는 길이 거의 막힌 시대였다. 이때의 서자(庶子)들은 아무리 사대부의 자식이라 하더라도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였고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못하였으며 사회 진출도 법적으로 막혀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 단학계의 거목(巨木)인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 선생이 서자로 태어났으니 선생의 일생이 평탄치 못하였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선생은 학식(學識)이 풍부하고 도계(道堦)가 높아 감히 누구도 근접하지 못하였고 임금까지도 구봉선생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선생은 당시에 이율곡(李栗谷)과 성우계(成牛溪)와 가까이 교류 하였는데 하루는 율곡이 선조대왕께 구봉선생의 학식과 사람됨을 아뢰고 장차 나라의 큰일에 쓰일 인물이 된다고 추천하였다. 그러자 임금은 당장 만나고 싶으니 함께 어전에 들라 명하였다. 그리하여 율곡은 밤중에 구봉과 함께 어전에 부복하였다. 임금은 여러 가지로 질문을 하며 구봉선생의 대답을 듣다가 부복하여있는 구봉선생에게 “고개를 들고 짐을 보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구봉선생은 “소신에게는 압인지기(壓人之氣)가 있어 성상께서 혹 옥체에 손상이 있을까 두렵사옵니다” 고 아뢰니, 왕은 괜찮다고 하면서 재촉하였다. 구봉선생은 잠시 주저하였으나 어명을 어길 수 없어 서서히 고개를 들어 임금을 보는 순간 왕은 용안이 창백하여지고 온 몸이 사시나무 떨 듯 하였다. 눈빛이 호랑이 눈과 같이 번쩍하고 불을 일었기 때문이다. 이후에 왕은 송구봉선생 이야기가 나오기만 하면 ‘그사람 애기는 이제 하지도 말라. 어디 그게 사람의 눈이더냐?’ 고 하였다 한다.
또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그 당시에 쟁쟁한 선비로 제자백가에 통달하고 시문과 필법이 뛰어났던 만전당(晩全堂) 홍가신(洪可臣)과 가까이 지냈었다. 홍가신은 뒤에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사람인데 그의 동생에 참의 홍경신(洪慶臣)이 있었다. 홍경신은 형이 서얼출신인 송구봉에게 경대(敬待)하는 것을 항상 못 마땅히 생각하고 그의 형에게 “어찌하여 송익필과 벗을 하십니까? 내가 반드시 욕을 주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홍가신이 웃으면서 “송구봉선생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며 하는 말이 “그는 비록 사비(私비)의 소생이라고는 하나 그의 학식이나 인품이 존경할 만 한 분이니라. 네가 그렇게 해보고 싶거든 한 번 해 보아라. 너는 반드시 하지 못 할 것이다.” 하였다.
홍경신은 송익필이 오기를 기다려 욕을 뵈주려고 벼르던 차에 어느날 송익필이 자신의 집에 이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뜰에 내려가 절하였다. 이 얘기를 전해들은 홍가신이 까닭을 물었더니 그 아우의 말이 “내가 절을 하려고 하였던 것이 아니라 무릎이 저절로 굽혀졌습니다” 하였다.
이후부터 홍경신도 형과 더불어 구봉선생을 스승으로 존경하며 따랐다 한다.
일찍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거북선 연구에 몰두하고 있을 때의 얘기다.
율곡선생의 소개로 충무공께서 구봉선생을 찾아갔다. 마침 구봉선생은 외출 중이었으나 하인의 안내로 사랑채에서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런데 사랑방의 아랫목에는 훌륭한 병풍이 한 폭 쳐 있었는데 그 속의 그림이 한 마리 큰 학 이었는지라 그 앉아있는 모습이 평소에 상상하던 거북선의 모습과 흡사하여 그만 자신도 모르게 병풍인 줄도 잊고 몇 개의 구멍을 뚫고 말았다. 그러자 바로 구봉선생이 귀가하였다. 하인들에게 “손님이 오셨.0느냐” 하시니 하인이 “큰일났습니다, 그 아끼시는 병풍에 구멍을 내셨습니다” 한다. 그런데 구봉선생께서는 뜻밖에도 “쓸 곳에 쓰인 것이다. 걱정 할 것 없느니라” 하시고 사랑문을 열며 충무공과는 수인사도 없이 “어디 몇 구멍이나 뚫었는가 보자” 하신다. 처음 대하는 이충무공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사과 겸 인사를 드리니 그제서야 정색을 하고 바로 앉아 하는 말이 “이 네 구멍만 갖고는 전후좌우로 밖에 더 가겠소? 잠수를 하고 부상을 하려면 적어도 다섯 구멍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 나머지 하나는 내가 뚫어줄 수밖에 없겠군! ” 라고 하셨다 한다. 충무공이 말하기를 “당나라의 이적(李勣)장군 이라면 몇 개를 뚫겠읍니까” 물으니 “8 구멍은 낼 것 일세” 하고 또다시 “제갈공명 같으면 어떻게 하겠읍니까” 하니, “24구멍은 내겠지” 하신다. 그래 또 다시 묻기를 “원래 완전하게 만들려면 몇 구멍이 되겠습니까” 하고 정중하게 물으니 웃으며 조용히 하는 말이 “48 구멍이 전부 일세” 하셧다 한다. 이것으로도 구봉선생의 계제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제갈공명 하면 중국의 삼국시대 때 유비를 도와 천하를 횡행할 때 신출귀몰한 용병과 작전으로 조조의 간을 서늘케 한 대도인 이었는데 그도 크게 미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충무공은 생각하기에 당나라의 이적장군이나 제갈공명 마저도 아득히 미치지 못 할 분이라면 도대체 이 분은 어떠한 분일까? 하기는 율곡선생(충무공과는 친척 간)의 소개에서도 가이 짐작하기 어려운 분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제야 진정 훌륭한 스승을 뵙게 되었구나 싶었으리라. 충무공은 그날 밤 늦도록 정치, 경제, 군사 등에 관해서 광범위한 가르침을 받고 돌아왔으며 그 후 구봉선생의 제자로 입문하여 훗날의 국난에 대비하는 많은 수련을 쌓았다.
그날 밤 구봉선생은 충무공에게 두수의 글을 주셨는데 장군이 임진난 당시 왜적의 섬멸전을 펼 때 신묘한 전략을 세우는데 아주 적절한 글이었다 한다.
일찍이 고청 서기(徐起)는 그의 문하생들에게 항상 말하기를 “너희들이 제갈공명을 알고자 한다면 구봉 송익필 선생을 보면 될 것이니라. 나는 제갈공명이 구봉선생과 같을 것으로 생각한다.” 는 기록이 있다.
구봉선생은 서얼로 태어나 한평생 방랑생활을 하시면서 시를 많이 지어 남기셨으며 김시습, 남효온과 더불어 산림삼걸(山林三傑)로 불리운다.
선생은 65세 때 면천의 김진려의 집에서 8월 8일 세상을 떠났다.
선생의 제자로는 김장생(金長生), 박엽(朴燁), 서성(徐渻), 정홍명(鄭弘溟), 서기(徐起), 김반 등 많은 문인들이 있으며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율곡 이이(栗谷 李珥)도 구봉선생님을 외우(畏友)로 하였다 한다.
선생의 구봉집은 뒷날 제자들이 흩어진 시문을 모아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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