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학/민족학

단기고사 檀奇古史 (1) 머릿말

검은바람현풍 2012. 3. 5. 10:59

단 기 고 사 檀 奇 古 史

大野勃 저 高東永 역

 

前檀朝鮮

後檀朝鮮

奇子朝鮮

 

 

 

책을 옮기면서

 

《단기고사》는 발해의 대야발이 천통 31년(서기727)에 쓴 책이다. 처음에는 발해문이었으나 겅흥 8년(서기825)에 왕조복이 한문으로 옮겼다. 이 한문본이 긴 세월 전해오다가 광복 후(서기1949) 김두화·이관구 선생 두분이 국한문으로 펴낸 것을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도록 한글로 옮겼다.

이 책이 어떤 책이라는 것은, 저자의 말과 이경직 신채호 선생 등의 설명이 자세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우리 역사를 말살하려는 시도가 그렇게도 집요하게 계속되는 속에서 천년이 넘도록 이 책이 살아남아, 후손된 우리가 볼 수 있다는 것은 하늘의 도움이라고 여겨질 뿐이다. 그러기에 이 책은 어떤 보물에도 비길 수 없는 값진 겨레의 유산이다.

이 책은 대한제국 광무 11년(1907)에 학부에서 출간계획을 세웠다가 중단된 일이 있다. 그 후 임자년(1912)에 만주에서 신채호·이관구 두 분이 펴내려 하다가 역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광복 후 이관구 선생은 김두화 선생과 함께 국한문으로 번역하고 이시영 선생의 교열과 한재용씨의 뒷받침으로 비로소 펴내게 되었다. 그러나 이 책 역시 굳게 절어붙은 사대사학에 눌려 빛을 보지 못한 채 때가 되기만을 기다려 왔다.

이제 겨레의 가슴에는 새로운 기운이 돌고 있다. 할머니 품에서나 들을 수 있었던 아득한 조상의 얘기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등, 커가는 자식들이 우리에 대한 관심이 의외로 높다. 이들이 책을 읽어야겠기에 쉬운 말로 옮길 마을을 먹게 되었다.

황조복의 한문본은 끝내 찾지 못했다. 이책이 어디엔가에 있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지워버릴 수 없다.

단기 4319년(1986) 4월 고 동 영

 

 

 

저자의 말

 

신이 삼가 생각하기로는,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과 설인귀(薛仁貴)를 몹시 원망스럽게 여기는 이유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에 그 국서고(國書庫)를 부수고 단기고사(檀奇古史)와 고구려·백제사를 전부 불태워버렸기 때문입니다.

신이 다시 고대사를 편집하고자 하여 여러 의견과 많은 사기(史記)를 참고하여 그 윤곽을 잡았습니다.

오직 임금께서는 타고난 영특하고 늠름한 자태로써 단기(檀奇)의 계통을 이어 천하의 살만한 곳을 정하시고, 황상(黃裳)을 드리워 입이시며, 천훈(天訓)의 경급(瓊笈)과 신한(宸翰)의 보찬(寶贊)을 받들어 모을 때에, 신에게 명을 내리시어 서문(서문)을 지으라 하셨습니다. 이해에 또 말씀이 계셔서 단기고사(檀奇古史)를 편찬하라 하시니, 신은 황공히 그 말씀을 받들어 사해(四海)에 널려있는 사서를 수집하고, 여러 역사적 평론을 참고하여 의심되는 것은 빼고 있었던 일만을 기록하여 13년이 걸려 비로소 완성하였으니, 오호라! 이 글이 어찌 우연히 되었겠습니까.

대개 신조단제(神祖檀帝)와 기자(奇子)로부터 고구려에 이르도록 상자신손(聖子神孫)이 계승되었으며, 성조(聖朝)에 이르기까지 아주 오랜 새대를 하나의 계통으로 혁혁하게 신정(神政)이 일체가 되어, 천하를 다스리는 큰 경륜과 법이 이 책에 실려 찬연히 세상에 밝게 비치니, 얕은 소견과 적은 지식으로는 감히 이 깊은 학문의 뜻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무릇 신조단제(神祖檀帝)는 천하의 대성(大聖)으로서 천하의 대도(大道)를 닦으시고, 천하의 대정(大政)을 행하시어 천하의 대심(大心)을 얻었으니, 그 마음(心)을 얻고 연구하면 대도(大道)와 대정(大政)을 또한 분명히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개 사람(人)과 사물(物)이 같이 삼진(三眞)을 얻었으니, 이는 성(性)과 명(命)과 정(精)인데, 참된 성(眞性)은 선악(善惡)이 없고, 참된 명(眞命)은 맑고(淸) 탁함(濁)이 없고, 참된 정(眞精)은 후하고(厚) 박한(薄)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이 흐려 거짓되고 허황하여 졌습니다. 단군께서 이에 천하의 대도(大道)로써 기둥을 삼아 가르침을 내리시어, 망령된 것을 돌이켜 참(眞)으로 돌아가게 하시니, 모든 사람들이 교화되어 구족(九族)이 화합하므로 복된 징조가 하늘에 보이며 광명니 대지를 비쳤습니다. 이는 만고에 끝없이 다행한 경사입니다.

신이 명을 받은지 13년 동안 주야로 근심과 걱정을 하며, 부탁을 어길까 두려워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석실(石室)에 있는 장서와 옛 비와 흩어져 있던 사서를 참고하다가, 돌궐국(突厥國)에까지 두 번 들어가 고적을 탐사하여 이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그 원본은 임금께 올려 목팡에 글자를 파서 국서고에 두고 또 그것을 베껴서 백성을 가르침으로 국민의 역사의식의 만분의 일이라도 도왔습니다.

 

천통(天統) 31년 3월 3일 반안군왕(盤安郡王) 신(臣) 야발(野勃)은 명을 받들어 삼가 서문(序文)을 쓰나이다.

 

 

 

중간서(重刊序)

 

내가 일찍이 조선의 옛 역사를 읽을 때에 단기고사(檀奇古史)라는 문헌을 구하지 못하여, 혹 단군일세(檀君一世)의 나이가 1,048세라 하기도 하고, 권양촌(權陽村)의 말에 의하면 왕세(王世)가 몇 대를 이어왔는지 알 수 없고, 역년(歷年)은 천년이 넘는다고 하니, 책을 덮고 통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 우리 부여민족(扶餘民族)으로서 중국의 요순(堯舜)의 사기(史記)는 대개 알지만 단기(檀奇)의 옛 역사는 알지 못하며, 한(漢)과 당(唐)의 문화는 능숙하게 담론(談論)하나, 고구려의 대무정신(大武精神)과 신라의 화랑도는 설명할 수 없게 된 것은 다 우리의 문헌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학부(學部) 편집국장이 되면서부터 힘써 조선역사를 널리 구하였으나 아직까지 실사(實史)를 얻어보지 못하므로 더욱 갈망하는 한(恨)이 있었다. 전에 만국사략(萬國史略)을 편찬할 때에 조선편(朝鮮篇)에는 역사를 기록하지 않고 “따로 명기할 것이 있어 아직 기입하지 않노라.” 한 이유는 장차 조선의 옛 역사(歷史)가 출현하기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그 동안 김부식(金富軾)과 일연(一然)등이 쓴 역사는 얻어 봤으나 별로 상고할만한 것이 없고, 오직 대야발(大野勃)이 지은 사서가 있다는 말은 듣기는 했으나 구해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중국인 왕상춘(王常春)이 책 한권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내놓으며 말하기를 “이 책이 귀국의 역사임에 틀림없는 듯하니, 혹 참고가 된다면 그리하라.”하였다. 이 책을 상세히 살펴보니 책 모양이 너무 오래 된데다가 앞 뒷장이 떨어졌으며 다만 남아있는 것은 가운데 부분 몇 장뿐이므로 저술자와 저술연대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기사로 보아 조선의 역사인 것이 틀림없었다.

그 후 동지 이윤규(李允珪)군이 또한 한 책을 가지고와서 “이것이 단기고사(檀奇古史)이니, 학부에서 출간하여 세상에 공포하라.” 하기에, 내가 상세히 고찰해보니 저술자는 대야발(大野勃), 중간(重刊)한 사람은 황조복(黃祚福), 주역(註譯)한 사람은 장상걸(張上傑)인데, 그 책의 모양이 먼저 왕상춘(王常春)이 가지고 왔던 것과 서로 같으므로 몹시 이상하게 여겨 차례로 자세히 읽어보았다. 그 단전(檀典)의 문체는 서전(書傳)의 요전(堯典)과 비슷하고, 그 전후 단조(檀朝)와 기자사(奇子史)의 제법(制法)은 사마(司馬)의 통감(通鑑)과 비슷하며, 그 정신은 조선을 높이고 외족을 물리치는 대의(大義)가 두드러지게 서 있었으니, 정말 그 웅대하고 건전한 문세(文勢)가 고려·이조시대의 유학자(儒學者)로서는 도저히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오 ! 이 책이 비록 수천년 후에 저술하였다 할지라도 그 참고한 바가 넓고, 기록한 것이 정확하고, 그 연구한 것이 깊고, 그 증명한 것이 틀림없으니, 어찌 얕은 견문과 적은 지식으로 된 대수롭지 않는 소사(小史)와 겨룰 수 있겠는가.

오직 우리 단기(檀奇) 강역(疆域)의 어느 흙이 그 옛 땅이 아니며, 어느 물건이 그 고적(고적)이 아니리오. 새의 지저귐과 벌레 소리도 그 마음을 전하는 오묘한 뜻이며, 꽃과 풀의 색깔도 그 덕을 덮는 영화로운 빛이로다. 더듬어 보라. 탱석단(撐石壇)이 백두산에서 처음으로 일어나 서쪽으로 구주(歐洲) 발칸반도, 동쪽으로 일본, 남쪽으로 남양군도까지 한결같은 제도로 전파되어 있는 것이 대야발(大野勃)이 쓴 역사의 내용과 어긋나지 않으니, 누가 이 물적 증거를 부인할 수 있겠는가.

위로 단군성조의 거룩한 덕을 사모하고, 아래로 부여민족(扶餘民族)의 계통을 잇는 마음이 이 책을 읽을수록 더욱 두터워지기에, 이를 인쇄하게 하여 세상에 널리 알리겠노라.

학부(學部) 편집국장(編輯局長) 이경직(李庚稙) 識

 

중간서(重刊序)

 

천하의 성덕(盛德)과 대업(大業)이 누가 애국자 보다 도한이가 있으리오. 참된 애국자는 국사(國事) 이외에는 뜻을 둘것이 없기 때문에 국사를 버리고는 즐기고 좋아할것이 없고, 희망할 것도 없고, 우환(憂患)도 없고, 경쟁도 없고, 환희도 없고, 분노도 없도다.

참된 애국자는 나라 일을 할 때에 어렵고 곤란할 것도 업고, 위험하다 할 것도 없고, 성공했다 할 것도 없고, 실패했다 할 것도 없고, 지금 그만두자 할 것도 없는 것이다.

또 참된 애국자는 그 애국하는 방법과 기술이 같지 않으니, 혹은 혀로 하고, 혹은 피로써 하며, 혹은 붓으로 하며, 혹은 검으로 하고, 혹은 기계로써 하되 앞에서 부르면 뒤에서 따르는 도다. 활을 잘 쏘는 자는 서로 모순은 있을지라도 그 향하는 과녘은 마침내 하나의 목적으로 합하지 아니함이 없을 것이다.

대개 동서의 국가와 고금의 민족이 수천 수백이 되나, 영특하게 이를 보전하는 자는 백의 하나에 불과하도다. 저를 고취(鼓吹)하며, 주성(鑄成)하며, 체결(締結)하며, 장엄(莊嚴)하며, 노래하고 춤을 주는 것을 누가 감복하지 않으리오.

애국자가 심혈(心血)과 뇌력(腦力)과 필검(筆劍)으로써 활동한 것은 우리나라 건국 이래 반만년 역사상 가히 노래할만하며 울만하며 즐거워할만한 사실이 수 만 번에 그치지 않고, 애국의 영웅호걸과 충의열사가 수천을 넘는다. 그러나 단기사적(檀奇史蹟)에 대하여는 역년(歷年)이 자세하지 않다 하고,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였다 하며, 김부식(金富軾) 같은 썩은 선비는 망언하기를 “이(夷)에 관한 일은 상고할 수 없고 항간의 말은 그 뜻을 모른다”고 하였다.

저 중화인(中華人)의 많은 글에는 자기만 높이고 남은 업신여기며, 동족은 찬양하고 외족은 좋지 않게 말하며, 자기나라 이외에는 모두 야만스러운 오랑캐라 하였으니, 그런 서적은 아무리 많을지라도 우리 역사의 바른 자취(實蹟)로 참고하기는 어려우니, 정말 이같은 일을 생각할 때에 책을 덮고 통탄하지 않을 수 없도다.

임자(壬子)년에 내가 안동현(安東縣)에 이르렀을 때에 뜻을 같이한 화사(華史) 이관구(李觀求) 동지가 한 권의 고사(古史)를 가지고 와서 장차 출간할 마음으로 나에게 머리말을 써줄 것을 청하기에 몹시 이상히 여겨 그 책을 받아 두 세 번 읽어보니, 발해(渤海)의 반안군왕(盤安郡王) 야발(野勃)이 편찬한 것인데, 발해의 대문인(大文人) 황조복(皇祚福)이 다시 발간(重刊)한 책이었다. 책 모양은 비록 오래되어 얼었으나 진본(眞本)임이 의심할 여지가 없기에 그 유래를 물었다. 그가 대답하기를, 문인(文人) 유응두(柳應斗)는 고금의 일을 널리 통하여 아는 것이 많은 석학(碩學)인데, 일찍이 중국의 여러곳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한 서점에 들어가서 이 책을 얼핏 보고 마음에 기쁜 감동을 느끼기를 천금을 얻은것이나 같았다. 곧 이 책을 사가지고 와서 문하(門下) 용암(庸菴) 이윤규(李允珪) 등에게 수십권을 베껴 쓰게 하여 장차 다시 출간할 예정이라 했다.

오호라 ! 나 또한 생각하기를, 단기(檀奇) 2천년사가 반드시 실사(實史)가 있을 터인데 아직 상고할 데가 없는 것은, 여러번 병화(兵火)를 겪으면서 역사를 보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므로 어찌 통탄하지 않으리오 하였더니, 밝은 하늘은 사실로써 헛되이 돌아가게 아니 하심으로 유(柳)씨로 하여금 이 원본을 얻어 세상에 드러나게 하였다. 유씨가 가져온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며, 그가 평생에 갈망하던 열성 중에서 얻어온 것이므로 누가 기쁘게 읽지 않으며 누가 말하며 전하지 않겠는가. 실로 우리 단기 2천년사가 다시 이 세상에 밝혀지게 됨은 참으로 천고의 기이한 일이로다.

원저(原著) 주인공 야발(野勃)선생은 13년 성상을 노력하여 친히 고적을 박람하며, 모든 역사를 참고하여 정선(精選)하여 편찬하고, 그 백여년 후에 발해 대 문인 황조복(皇祚福)이 다시 펴내어 세사에 널리 전하였으니, 이 두 선생이 우리 민족에게 끼친 공이 대단히 크다. 이것을 다시 전한 일에 관하여는 유·이(柳·李) 두분의 공도 또한 적지 않다.

오호라 ! 대야발(大野勃)·황조복(皇祚福)선생은 마음과 붓으로써 국가를 위하여 뇌력(뇌력)과 혈성(혈성)을 다한 참 애국자요, 유·이(柳·李) 두분도 심력(심력)과 필력으로써 애국하기에 정성을 다한 분이니, 후에 사람들이 번역하고 계속 간행하여 세상에 널리 펼치면 역시 만고에 없어지지 않을 공이 되리로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識

 

 

 

출간 경로 (출간경로)

지금으로부터 1천3백여년전 고구려가 나당군(羅唐軍)에게 패망한 후 국서고(國書庫)까지 타 버렸으나, 영걸스러운 옛 신하 대조영(大祚榮)장군이 30년 후에 고구려의 옛 땅에 발해국(渤海國)을 세우고 왕이 되었다. 그 후 타버린 단기고사(檀奇古史)를 문호(文豪) 대야발(大野勃:王弟)에게 다시 편찬하게 하여 수백년간 전해 내려왔다. 고려조에 이르러 모화(慕華) 선비 김부식(金富軾)과 일연(一然)등이 단기고사(檀奇古史)와 삼국사(三國史) 등 119권을 5권으로 축소하여, 우리나라가 영광될만한 사실은 전부 지워버리고 중화에 예속국이 될 만한 문구만 추려 내어 좋지 않게 역사를 기록하였다. 그 후 오늘까지 우리 국민은 시조부터 정치·문화·산업·경제등 각방면에 중화(中華)보다 낙오된 약소국으로만 지내왔다고 잘 못 인식해왔다. 이로써 성조(聖祖)의 실사(實史)까지 알지 못하게 되었으니,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다행히 하늘이 도와 우리성조의 역사를 바로잡기 위하여 깊이 감추어 두었던 야발(野勃)의 역사가 천만 뜻밖에 출현되어 대한광무(大韓光武)시대 학부(學部)에서 출간하려다가 일본의 내정간섭으로 간행되지 못하고, 그 후 신채호(申采浩) 이관구(李觀求)가 중국지방에서 출간하려다가역시 간행하지 못했다. 또 해방 후 김두화(金斗和) 등이 번역 출간하려다가 역시 펴내지 못하고 미뤄오다가, 이번에 유지(有志) 한재용(韓在龍)씨의 찬조로 펴내게 되었다. 이책이 우연이 된 것이 아니라 우리 성조를 다시 찾아뵙게 된 기회이니, 사해(四海)의 여러분께서는 잊지 마시고 애독하시어 정확히 시조의 역사를 아시기 바랍니다.

이 책은 오자가 많으니 정오표를 보시기 바랍니다, 문구에 근대술어가 많은 것은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한자가 많은 것은 한문을 직역했기 때문이니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단기 4282년(1949) 번역 출판인 : 김해암(金海菴) 이화사(李華史) 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