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편 후 단군조선(後檀君朝鮮)
제 1 세 솔나(率那) ―50년간 재위―
후단조(後檀朝) 제 1세단제(第一世檀帝) 솔나(率那)는 전단조 제23세 단제 아홀(阿忽)의 둘째 아들이며, 24세 연나(延那)의 아우이다. 단군 기원 1214년 7월 15일 영고탑(寧古塔)에 도읍을 옮겼다.
임금께서 무(武)에 용맹하시고 명철(明哲)하시며, 강직하시고 공평하시며 정치적 분부가 일관성이 있으며, 법도(法度)가 평탄하시고 어진 정치를 베풀어 백성을 어루만지셨다.
5년 봄에 조서를 내래시어 “임금이 백성이 없으면 누구를 다스리며 백성은 군주가 없으면 누구를 받들겠는가. 백성이 국가의 기본이며 임금은 국가의 중심이니, 기본이 없으면 중심이 소용 없고 중심이 없으면 기본이 의지할 데가 없기 때문에, 오직 군신(君臣) 상하(上下)는 동심일체가 되어야 완전한 국가를 이룰 수 있다. 그러니 나와 백성은 마땅히 함께 힘써 희망찬 내일을 맞이하게 하라.”하셨다.
6년에 국민의 세금을 반으로 감하였다.
7년에 농사가 풍년이 들어 나라 창고에 재물이 여유가 있었으며 큰 창고에는 곡식이 남았다. 노인은 영가9詠歌)를 부르고 아이들은 춤을 추니 봄바람에 꽃 향기가 그윽함과 같았다.
8년에 임금께서 홍운성(洪雲性)에게 묻기를 “바른 신하와 바르지 못한 신하를 어떻게 구별하는가.”하시니, 대답하기를 “이(理)를 잡고 굴하지 않는 자가 바른 신하이며 위엄 앞에 맹종하는 자는 거짓 신하입니다. 이믐은 근원이며 신하는 그 흐름이니, 근원을 흐리게 하고 그 흐름이 맑기를 원하는 자는 얻지 못할 것이니, 임금께서 어진 후에야 신하가 바르게 되나이다.”하니, 임금께서 옳다 하셨다.
9년에 임금께서 홍운성(洪雲性)에게 묻기를 “어떻게 하면 나라가 오래가겠는가.”하시니, 대답하기를 “비로 천하를 얻었다 해도 더욱 인의(人義)를 바로잡아 나간 후에야 나라가 오래도록 이어질 수 있습니다. 만일 거짓을 숭상하고 허위(虛僞)를 행하면 국운이 잛아지고야 말 것입니다. 천하를 손에 넣을 때 혹 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얻을 수도 있으나, 이것을 지켜나가는 데는 순리(順理)를 따라야 하는 법인데, 세습으로 이어 나라를 다스릴 임금께서야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하니, 임금께서 “옳다.”하셨다.
15년에 기자조선(奇子朝鮮) 사절이 왔다.
19년에 황학(黃鶴)이 소나무 밭에 깃들었다.
20년에 밭 곡식이 풍년이 들어 줄기 하나에 이삭이 다섯 개나 되는 것도 있었다.
22년에 조윤국(趙允國)을 수상으로 삼고, 감라덕(甘羅德)을 상장(上將)으로 삼았다.
28년에 임금께서 조윤국에게 묻기를 “어떻게 하면 양신(良臣)이 되며 어떻게 하면 충신(忠臣)이 되느냐.”하시니, 대답하기를 “임금과 신하가 한 마음으로 협의하여 백성과 나라를 다스려 모두 복락(福樂)을 누리게 하면 양신(良臣)이며, 임금의 얼굴을 돌보지 앟고 조정에서 바른 소리를 하며 나라의 위기만 생각하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으면 충신입니다. 사람이 자기 용모를 보고자 하면 반드시 양신을 가까이 하여야 합니다. 현군(賢君)이 있어야 양신이 있고 명군(明君)이 있어야 충신이 있게 되는 법입니다.”하니 임금께서 “옳고 옳다.”하셨다.
50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2세 단제시다.
제 2 세 추로(鄒魯) ―65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두밀(豆密)을 태자로 삼고, 자운(紫雲)을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삼았다.
2년에 강주문(姜周文)이 아뢰기를 “옛날에 팽오(彭吳)가 산을 파고 물을 다스리는데 백성의 원한이 없어진 것은, 사람들에게 함께 공평한 공동이익이 되게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전하께서는 궁궐을 지으니 백성의 원성이 많은 것은, 사사로운 일에 치우쳐 사람을 해하고 자신만을 이롭게 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임금된 분이 사람을 해하고 자기를 이롭게 하는 마음이 있으면, 이것은 아름다운 구슬을 얻어 몸을 가르고 그 속에 구슬을 간직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진 임금은 사람을 이롭게 하고 자기를 이롭게 하지 않으며, 어두운 임금은 자기를 이롭게 하고 사람을 이롭게 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이롭게 듣는 것이 많아지고 듣는 것을 겸하면 듣지 못하는 소문이 없게 되고, 자기를 이롭게 하면 한쪽 말만 듣게 되고 한쪽 말만 들으면 담장을 바라보고 서 있는 것과 같아서, 가까운 소리도 듣지 못하는데 먼곳의 소리는 어떻게 듣겠습니까. 그러므로 명철한 임금은 묻기를 좋아하며 가까이에서 하는 말을 살피기를 좋아하며, 사람을 이롭게 하고 자기를 이롭게 하지 않으므로 모든 간신(奸臣)이 자신을 숨기지 못합니다. 어두운 임금은 한편만 믿고 모든 신하들에게 널리 묻지 않기 때문에, 그 소견이 대통 속으로 하늘을 엿보는 것과 같아서 비록 현명한 신하와 어진 보좌관이 옆에 있어도 버리고 쓰지 않으니, 도리어 사람이 없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그러니 누구와 더불어 천하를 의논하겠습니까. 원하옵기는, 전하께서는 어질고 명석한 선비의 기를 북돋아 주시고, 여러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여 잘못된 것은 버리고, 좋은 것은 취하여 정사를 돌보신다면, 천하는 태평할 것입니다.“하니 임금께서 옿은 말이라고 여기셨다.
4년에 임금께서 이사금(尼師今)에게 묻기를 “음악에 흥망(興亡)의 곡조가 있는가.”하시니, 대답하기를 “옛날 성군(聖君)과 명왕(明王)이 세상 것으로 사람을 교화(敎化)하기도 했습니다. 음악은 능히 사람을 감동시키므로 기쁘고 즐거운 사람이 들으면 기쁘고, 걱정과 슬픔이 있는 사람이 들으면 서러워집니다. 그러니 슬픔과 즐거움은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이지 음악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장차 나라가 흉하려면 백성들의 마음이 기뻐 음악을 들으면 즐거워 할 것이며, 나라가 망하려면 백성들의 마음이 우울하여 음악을 들어도 슬퍼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시대의 현상을 보아 흥하고 망할 곡조임을 이룰 따름이니, 사실은 그것이 음악에 있지 않고 사람의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태평시대에는 비록 슬픈 곡을 연주한다 해도, 기쁘고 즐거운 흥이 솟아나게 되는 것입니다.”하니, 임금께서 옳다고 하셨다.
8년에 신하들이 임금께 나아가니, 임금께서 신하들에게 “사람들의 마음을 잘 살피지 않으면 큰 화가 될 것이니 모든 일에 주의하라.”하셨다. 이 분부를 듣고 신하들이 모두 기쁜 마음으로 복종하였다.
15년에 오성원(吳聖源)이 아뢰기를 “오랫동안 평안한 백성은 교만하고 방자하여 가르쳐도 감화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난을 겪은 백성은 고생을 함께 걱정해 주면 감화되기 쉬우니, 비유하면 굶주린 자에게는 음식이 달고 배부른 자에게는 맛있는 음식이 없습니다.
오늘에 이르러 나라가 태평한지 이미 오래되어 백서잉 교만하고 방자하여 가르치기가 매우 어려우니, 전하께서는 민정을 잘 살피시어 교만하고 방자한 관습을 없애기 바랍니다.“하니, 임금께서 그 말을 따르셨다.
20년에 기자조선(箕子朝鮮) 사절이 입조하였다.
28년에 달단(韃靼)의 추장(酋長)이 입조하였다.
39년에 의학원(醫學院)을 세워 국민에게 의학을 가르쳤다.
40년에 고주만(高朱滿)이 글을 올려 아뢰기를 “인재를 잘 살펴서 쓰시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군자(君子) 하나를 쓰면 군자가 다 모이고, 소인(小人)하나를 쓰면 소인들이 다투어 오게 됩니다. 천하가 어지러워 편하지 못하면 재주만 취하고 그 행실은 관계하지 않으나, 천하가 평정되면 재주와 덕을 겸비한 사람이 아니면 써서는 안됩니다. 신이 요즘 모든 관리들의 움직임을 보니 전하 앞에서는 아뢰고자하는 것의 삼분의 일도 아뢰지 못하니, 하물며 간(諫)하는 관리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책망을 받을까 하여 바른 말을 아뢰지 못하오니 전하의 특별한 허락이 없으면 어떻게 정(情)을 다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는 것은, 전하께서는 온화한 표정으로 백성르 사랑하시고, 선비들에게는 몸을 낮추시면 간하는 관리(諫官)가 뜻을 다하여 천하의 사정을 낱낱이 아뢸 것입니다.”하니, 임금께서 그 뜻을 따르셨다.
58년에 위문국(魏文國)이 정치론(政治論) 28권을 지어 바쳤다.
65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3세 단제시다.
제 3 세 두밀(豆密) ―26년간 재위―
첫 해에 해모(奚牟)를 태자로 삼고, 황극명(黃克明)을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삼고, 한진거(韓眞渠)를 수상으로 삼고, 김일황(金日黃)을 상장(上將)으로 삼았다.
3년에 정지선(鄭知先)이 아뢰기를 “임금께 아뢰는 상서(上書)가 격렬하고 절실하지 않으면 임금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고, 아뢰는 말도 절실하지 않으면 임금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없으니, 임금이 그런 실정을 살피지 못하고 가끔 그 신하에게 죄를 묻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옳은 길은 막히고 충성된 마음으로 아뢰는 말은 들을 수 없게 됩니다. 속담에 젖먹이의 말도 성인(聖人)은 듣는다고 했으니, 전하께서는 간절하고 절실한 말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니 임금께서 정말 옳은 말이라고 하셨다.
8년에 심한 가뭄 위에 큰 비가 내려 백성들이 거두어들일 곡식이 없어, 조서를 내리시어 창고에 쌓아 두었던 곡식을 풀어 백성을 구제하였다.
26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4세 단제시다.
제 4 세 해모(奚牟) ―28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마휴(摩休)를 태자로 삼고, 황노명(黃老明)을 태자태부로 삼았다.
3년에 황노명이 아뢰기를 “임금된 자는 시작은 선하게 하는 자가 많으나 끝을 선하게 하는 자가 적으니, 취(取)하기는 쉬우나 지켜나가기가 어찌 힘들지 않겠습니까. 근심되면 정성을 다하여 사람을 사랑하고, 안일해지면 방자하여 사물을 소홀히 여기게 됩니다.
사람을 사랑하면 원수와도 마음이 하나가 될 수 있고, 사물을 소홀히 여기면 친척이라도 헤어지게 되니, 만일 위엄만으로 다스린다면 겉으로는 따르는 척 하나 내심으로는 복종하지 않습니다.
임금의 행실은 가령, 욕심이 일어났을 때는 이미 부족한 것으로 생각하고, 넘침이 보여지면 그쳐야 할 것을 생각하며, 높은 자리에 있으면 아랫 사람에게 겸손할 것을 생각하며, 가득차면 덜 것을 생각하고, 방탕(放蕩)을 만나면 절제를 생각하고, 안락(安樂)하면 음행을 멀리 할 생각을 하며, 그릇된 것과 거짓을 보면 스스로 바르게 할 것을 생각하며, 상 줄 때에는 기뻐서 지나치게 잘난체 하는 마음이 생길 것을 생각하며, 형벌을 줄 때에는 노하여 과격해질까를 생각하시옵소서.
이런 여러 생각을 고려하여 어진 사람을 뽑고 능력있는 사람에게 맡기면 빈말이 아니라 정말 잘 다스려질 것입니다.“하니, 임금께서 칭찬하기를 그치지 않으셨다.
8년에 탁암(卓岩)이 돌로 북(鼓)을 만들어 바쳤다.
9년에 기자조선(奇子朝鮮)사절이 입조하였다.
10년에 황노명(黃老明)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선한 것을 좋아하시는 마음(心志)이 옛날에 미치지 못하고, 도(道)를 듣고 허물을 고치는 일은 지난날보다 못하고, 벌을 주실 때는 노하시므로 휴식할 틈이 없습니다.
옛 말에 귀하다고 높은 것을 기대하지 말며, 부해도 많은 것은 것을 바라지 말라 한 것이 엇된 얘기가 아닙니다.
옛날에 하(夏) 나라가 난이 있기 전에는 스스로 난이 없다고 장담하였으며, 난이 일어나니 스스로 망하지 않는다 하였으며, 부역(賦役)이 많고 교만과 사치가 지나쳐 재난이 몸에 이르렀는 데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용모(容貌)를 비추어 보려면 맑은 물이 필요하고, 실패를 알고자 하면 망한 나라 만한 것이 없습니다. 원하옵기는, 전하께서는 하(夏)나라를 거울 삼아 사치를 몰아내고 검소한 생활을 하게 하며, 충현(忠賢)과 친하고 간사한 자들을 멀리하여 현재 무사함으로서 앞으로 닥칠 일을 대비하여 둔다면, 이것은 국가의 철석같은 간성(干城)이 되는 것입니다.“하니, 임금께서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11년 여름에 태풍이 일어나 폭우가 쏟아지니, 육지에 고기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13년에 황노명(黃老明)이 또 아뢰기를 “말하는 것과 동시에 그 말을 믿는 것은 믿는 것이 말하기 전에 있기 때문이며,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행동하는 것은 그 행하는 것이 명령하지 않아도 잇는 것이니, 전하께서 백성을 다스리신지 13년동안에 덕으로써 감화시키는 일이 부족한 것은, 오직 좌우 신하가 정성을 다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지금 입법 행정을 군자와 같은 사람에게 맡겨도 잘되는 때도 있고 잘 안되는 때도 있는데, 가끔 소인(小人)에게 위임하시니……그러므로 군자를 대접할 때에는 공경하며 멀리하고 소인을 대우할 때에는 가볍게 친하게 되니, 친하면 못하는 말이 없고 멀리하면 뜻이 통하지 않습니다. 뛰어나지 못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왜 작은 지혜조차 없겠습니까. 그러나 나라를 경영할 수 있는 인재가 아니면 앞으로의 일을 깊이 헤아리지 못할 것이니, 비록 있는 정성을 다하여 애쓸지라도 실패 하는 때도 있는데, 하물며 간사한 마음을 품고 정사(政事)에 참여한다면 그 화가 어찌 가볍겠습니까.
간혼 군자라도 조그마한 과실이 없을 수 없는 일인데, 그 과실이 정도(正道)를 해치지 않도록 행정을 펴 나가기만 한다면, 이것은 (道)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군자라도 불신하여 의심한다면, 이것은 곧은 나무를 세우고 그 모양이 곧지 않음을 의심하는 것과 어찌 다르겠습니까.
나라에 위태로운 때가 언제 닥칠지 알 수 없는 일인데, 스스로 평안하다 하는 것은 마치 제비가 지붕 위에 있으면서 기둥에 불이 붙는 것을 알지 못하고, 어미와 새끼가 서로 즐기는 것과 같으니, 임금된 분은 반드시 장래 일을 깊이 헤아리시옵소소.“하니, 임금께서 칭찬하시고, 황노명을 국태사(國太師)로 삼으셨다.
18년에 가락(駕洛=弁韓人)이 입조했다.
28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5세 단제시다.
제 5 세 마휴(摩休) ―34년간 재위―
첫 해에 아우 나휴(奈休)를 태제(太弟)로 삼고, 이장선(李長善)을 태자태부로 삼았다.
2년에 주태원(周太元)이 아뢰기를 “옛날 장구한 세월을 이어온 나라는 은혜를 사람들 마음 속에 심었기 때문에 절대로 망하지 않았으며, 그렇지 못한 나라는 은혜를 사람들 마음 속에 심지 못하였습니다. 은혜라는 것은 당장은 아무 이익이 없으나 장래에는 크게 보상이 있는 보화입니다.
뿌리가 깊으면 잎이 무성하고 근본이 단단하면 가지도 번영하는 것이니, 전하께서는 마땅히 선대(先代)임금의 다스림을 이어 자손만대의 터를 견고하게 하옵소서, 그러니 어찌 눈앞의 일만 보겠습니까.
현재의 호구(戶口)가 옛날의 10분의 6도 미치지 못하는 이유는, 백성들이 부역에 급급하여 형이 나가면 아우가 돌아오고, 서로는 길에서나 겨우 만나는 형편입니다. 전하께서는 조서를 내리시어 손해를 덜고자 한, 토목사업을 그치지 않으면 백성들이 휴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이 옛 글을 봤더니, 옛부터 지금까지 백성의 원한이 모여 도적이 되면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습니다. 제왕된 자가 현재의 어질지 못함으로 전의 어질지 못함을 비웃고, 오늘의 덕 없음으로써 전의 덕 없음을 비웃으니, 인덕(仁德)은 옛날과 지금이 같지 않은 듯합니다.
옛날에 9년 홍수가 있었어도 오히려 쌓아둔 것들이 많았고 백성들의 원성이 별로 없더니, 오늘날에는 해마다 풍년이 들어도 창고에 곡식이 없고 백성들의 원성이 있는 것은, 전하께서 급하지 않은 공사를 많이 벌려놓은 때문입니다. 나라의 흥망이 흉년과 풍년에 있지 않고 오직 백성들의 괴롭고 즐거움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괴로움을 돌보는 것이 먼저할 일이며, 백성들이 부해지고 여력이 있을 때가지 기다려 거두어 들일 것이며, 강제로 징수하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전하께서 반드시 나라가 장구하게 이어나갈 수 있는 계획을 세우시려면, 먼저 은혜로써 인심을 묶어 길이 그것을 풀지 못하도록 하옵소서,“하니, 임금께서 칭찬하셨다.
8년 여름에 지진이 일어났다.
9년 가을에 남해(南海)의 조수가 석자(三尺)나 물러났다.
15년에 고문술(高文述)이 아뢰기를 “군신(君臣)이 함께 천하를 얻으려면 수많은 생명을 죽여야 하기 때문에 창업의 어려움을 알아야 하고, 천하를 함께 다스리는 군신은 나라의 교만과 사치가 부귀에서 생겨나고, 재앙과 난리는 소홀히 하는데서 생겨나는 것을 현실에서 봤기 때문에 왕조를 지켜나가는 일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군신된 자가 창업의 어려움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군신된 자가 창업의 어려움을 알고, 때와 정세를 따라 국가를 안전하게 보전한다면 훌륭한 임금, 좋은 신하가 될 수 있습니다.”하니, 임금께서 “옳다”하셨다.
29년에 훌륭한 재상인 신운선(申雲善)이 임금을 잘 보좌하여 나라가 태평하였다.
34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6세 단제시다.
제 6 세 나휴(奈休) ―35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등을(登乙)을 태자로 삼았다.
2년에 기자조선(奇子朝鮮)사람 40명이 입경(入京)하여 관광하였다.
5년에 북흉노(北凶奴)가 사신을 보내어 우호하기를 원하여 허락하였다.
10년에 동돌궐(東突厥)이 사신을 보내어 수호조약을 청하므로 이를 허락하였다.
20년에 박달마(朴達摩)가 아뢰기를 “백성의 문화향상과 발전은 오직 정치와 학문이 일치되어야 가능합니다. 대개 정치는 개념이며 학문은 구체적인 것입니다. 정치의 위신은 백성으로 하여금 법을 준수하게 하려면 준수하게 하고, 친밀하게 하려면 친밀하게 해야 하나, 정치는 승진(昇進)할 경로가 있고 학문은 향상 할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실정에 맞도록 구체적인 생활을 통하여 서로 형상화(形象化)하면, 이것이 정치와 학문이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곧 백성의 윤리가 그 실행하는 정치의 사정에 따라 실생활에 통하는 것이 마치 육체의 혈액순환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개념적 정치 이념이 구체적이 생활에 용해되면, 생활이 곧 이념이 되고 이념은 곧 생활이 됩니다. 요컨대 이념이 개인의 실사정(實事情)에 용해되어 문화로써 생활을 삼고 문화로써 행동을 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구체적(具體的)인 작품화(作品化)라 할 것입니다. 그래야 학문은 정치의 선구자가 되고 정치는 학문을 기르는 자가 될 것입니다. 때문에 정치와 학문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데, 지금 사람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정치의 권위에 황홀하여 정치에 흡수되어 학문의 삼여을 잊고, 주체(主體)를 잃은 학문과 합하고자 하였다. 이에 은(殷) 나라 학문이 이 기회를 타고 들어와 오히려 백성의 생활에 해가 되었습니다.
엎드려 비오니, 전하께서는 쓸데없는 학문을 멀리 하시고, 필요한 학문은 바로 세우시어 백서의 실생활을 도우소서.“하니, 임금께서 ”옳다“하시고 쓸데없는 학문을 멀리 배척하셨다.
28년에 주태보(周太甫)가 신주역서(新周易書) 13권을 임금께 바쳤다. 그 편집내용은 태양 태음설(太陽太陰說)과 현공설(懸空說)과 복서(卜書)와 천문설(天文說)과 지수설(地水說)이다. 임금께서 훑어보시고 불쾌하여 이르시기를 “후세에 이 글로써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자가 있으리라.‘하셨다.
30년에 부분석(扶芬錫)이 정법원리론(政法原理論)을 임금께 바쳤다.
35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7세 단제시다.
제 7 세 등을(登乙) ―25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추밀(鄒密)을 태자로 삼았다.
2년에 조자문(曹子文)이 아뢰기를 “정치와 법률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으나, 행정관(行政官)과 사법관(司法官)은 각각 그 직책이 달라야 서로 권한을 빼앗지 않고, 그렇게 해야 정치와 법률이 명백하여 공정하게 시행될 것입니다.”하니, 임금께서 옳다 하시며, 입법(立法)과 사법(司法)과 행정(行政) 기관을 각각 세워 다스리니, 정치와 법률이 공평하였다.
5년에 오개(吳介)를 상장(上將)으로 삼으니, 오개가 용병(用兵)을 잘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병선(兵仙)이라 불렀다.
16년에 기린(麒麟)이 상림원(上林苑)에 와서 놀고 있었는데, 그 성품이 선량하여 생초(生草)를 밟지 않았다.
20년에 고삼도(高三道)․복승자(卜承子)․양화상(楊花相)등 훌륭한 신하들이 임금을 보좌하였다.
25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8세 단제시다.
제 8 세 추밀(鄒密) ―30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감물(甘勿)을 태자로 삼고, 고삼도(高三道)를 태자태부로 삼았다.
기자조선(奇子朝鮮) 사절이 입조하였다.
3년에 선비족(鮮卑族)의 하나인 문고추장(們古酋長)이 입조하였다.
4년에 북적(北狄0이 쳐들어오자 곧 물리쳤다.
6년에 주(周) 나라 망명객 호선(胡先)이 입국하였다.
9년에 진(秦) 나라 사람 원회(原檜)가 입경하였다.
12년에 초대부(楚大夫) 이문기(李文起)가 입경하였다.
13년 3월에 일식(日蝕)이 있었다.
15년에 농작물이 크게 부족하여 굶주렸다.
26년에 손흥렬(孫興烈)이라는 권세가 대단한 신하가 난을 일으키자, 군사를 보내어 토벌하여 물리쳤다.
30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9세 단제시다.
제 9 세 감물(甘勿) ―24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오루문(奧婁門)을 태자로 삼았다.
2년에 주(周) 나라 상인 한직(韓直)이 호랑이 가죽과 코기리 가죽을 많이 가지고 와서 임금께 바쳤다.
3년에 송(宋) 나라 사람 우문술(宇文述)이 와서 주(周) 나라 제후(諸侯)의 전란사(戰亂事)를 말하였다.
4년에 황선문(黃先文)이 유황발사총(硫黃發射銃)을 만들었다.
7년에 시조 단군묘(檀君廟)를 영고탑(寧古塔) 서쪽에 건립하였다.
8년에 순길(舜吉)이 약을 만들었는데, 장생불노단(長生不老丹)이라 불렀다.
9년에 임금께서 고삼도(古三道)에게 묻기를 “나라 재상9宰相)의 자격은 어떠한 사람이라야 하는가.”하시니, 대답하기를 “사는(居)데 화목한가를 보며, 통달 해도 그 처신을 보며, 부(富)해도 남에게 주는 것을 보며, 가난해도 그 취하는 것을 보고, 궁(窮)해도 그 하지 않는 바를 보고, 평안해도 음행하지 않음을 보며, 난(難)이 있어도 그 구(救)하는 바를 보며, 급(急)해도 그 들어가지 않음을 보며, 귀(貴)해도 그 자랑하는 바를 볼 것이니, 이 아홉가지(九條)로써 택하시면 됩니다.”했다.
16년에 임금께서 조용히 고삼도(古三道)에게 묻기를 “현인(賢人)을 잘 택하는 방법에 무엇부터 먼저 하면 좋겟는가.”하시니, 대답하기를 ‘가까이 하여 그 겸손함을 보고, 멀리하여 그 신용을 보며, 갑자기 물어 그 말재주를 보며, 급히 주어 어떻게 처리하는가를 보며, 난(難)을 말하여 그 용맹을 보며, 술에 취하게 하여 그 태도를 보며, 색(色)을 시험하여 그 몸가짐을 보며, 재물로써 시험하여 그 청렴함을 보며, 글(書)을 통하여 그 학문을 보며, 말로 물어 그 변론을 보며, 잡사람과 같이 있게 하여 그 절개를 관찰하여야 합니다. 이 열한가지(十一徵)가 구비되었으면 현자(賢者)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임금께서 웃으시며 이르기를 ”그 방법외에는 모르느냐“하셨다.
18년에 조(趙) 나라 사람 염선관(廉先官)이 보옥(寶玉)을 가지고 조정에 왔다.
19년에 위(魏) 나라 사람 범문(范文)이 망명하여 입국하였다.
20년에 환관(宦官=내시) 조석(趙錫)이 형벌을 받아죽었다.
24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10세 단제시다.
제 10 세 오루문(奧婁門) ―23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사벌(沙伐)을 태자로 삼고, 서정년(徐正年)을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삼았다. 황태명(黃太明)을 승상(丞相)으로 삼고, 강자삼(姜子三)은 상장으로 삼았다.
4년에 오곡이 풍년이 들어 백성이 노래하기를 “하늘에는 해가 떠서 밝은 빛을 비추고, 나라에는 임금이 계셔서 덕이 빛나니, 우리 쌀알 같은 백성들은 그 은혜의 창파에 목욕하느니라.”하였다.
8년에 채(蔡) 사람 을보천(乙普天)이 복술서(卜術書)를 가지고 입경하였다.
9년에 노(魯) 나라 문인(文人) 공명지(孔明之)가 중화서적(中華書籍)을 가지고 입조하였다.
10년에 두 해(兩日)가 함께 떠오르듯 왕무(黃霧)가 사방을 덮었다.
21년에 백건적(白巾賊)의 난이 있어, 임금께서 견적(遣迪)으로 피난가셨다가 이등해 8월에 다시 환궁하셨다.
23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11세 단제시다.
제 11 세 사벌(沙伐) ―68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매륵(買勒)을 태자로 삼았다.
제(齊) 나라 사람 누경(屢景)이 하은고서(夏殷古書)를 가지고 입국하였다.
3년에 한(韓) 사람 주태후(周太候)가 신농(神農)의 약방(藥方)을 가지고 입조하였다.
4년에 위대부(魏大夫) 백측(伯則)이 입조하였다.
6년에 황충(黃虫)과 홍수가 있었다.
8년 4월에 일식(日蝕)이 있었다.
11년에 오(吳)나라 태사(太史) 서춘문(徐春文)이 입국하였다.
14년에 큰 호랑이가 궁궐 담장을 넘어왔다.
16년에 좌복야(左僕射) 조태국(趙太國)의 집 뒷뜰 땅 위에 연(連)이 돋았는데, 태국(太國)이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육연(陸連)이라 하였다.
28년에 위(衛) 나라 사람 적인문(狄人問)이 신천문학(新天文學)을 가지고 입경하였다.
36년에 송(宋) 나라 사람이 악기를 가지고 입경하였다.
40년에 주(周) 나라 사절이 입조하였다.
45년에 홍수가 있어 산이 무너지고, 골짜기가 메워지는 변이 생겼다.
48년에 진(晋) 사람 명문병(明文柄)이 와서, 주공(周公)의 전장법도(典章法度)가 빛나게 구비되었다고 하니, 임금께서 좋다고 하셨다.
50년에 초(楚) 나라 문인(文人) 문술(文術)이 입경하였다.
60년에 견융(犬戎)[주:犬戎-중국 은 나라 주 나라시대 섬서성 부근에 살던 족속]이 변경을 침범하여, 군사를 보내어 물리쳤다.
61년에 임금께서 기자조(奇子朝)에 행차하시어 한달이 지나서 황궁하셨다.
62년에 조육련(趙陸蓮)을 승상(承相)으로 삼았다.
68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12세 단제시다.
제 12 세 매륵(買勒) ―58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마물(麻勿)을 태자로 삼았다. 여름에 주(周)나라 사절이 왔다.
3년 봄에 연(燕) 왕이 사절을 보내어 국정을 관찰하고 돌아갔다.
4년에 서세모(徐世謀)가 아뢰기를 “지금 제후(諸侯) 중에는 전하의 명을 따르지 않는 자가 많고 또 이웃 주(周) 나라가 미약하며, 그 봉한 자제(子弟)가 서로 원수같이 다투고 있습니다. 신이 지난 봄에 국명(國命)을 띠고 주 나라에 들어가 그 대세를 보았는데, 서로 전쟁할 기미가 있으므로, 제가 주태재(周太宰)에게 중앙정부를 충실히 하고 강하게 하여야 할 것을 말하였더니, 주태재가 신의 말을 들었습니다.
귀구하여 우리의 형편을 깊이 생각하니 주 나라와 나라 사정이 매우 흡사합니다 엎드려 바라오니, 전하께서는 밝히 살피시옵소서.“하였다.
임금께서 그 말을 받아들여, 다시 주 나라에 사절을 보내어 협약을 맺었다.
6년에 초(楚) 사람 오자도(吳子度)가 목면(木棉) 종자를 가지고 입국하였다.
10년에 화(華) 사람 설삼덕(薜三德)이 말하기를 “사람은 죽어도 영호는 없어지지 않는다.”는 말을 전하였다.
13년에 채저명(蔡著明)이 정치형법서(政治刑法書)를 전하였다.
20년에 당장경(唐莊京) 학사(學士) 두 사람이 입경하였다.
25년 오경박사(五經博士) 우문충(宇文忠)이 토지를 측향하고, 지도를 만들며 유성설(遊星說)을 저술하여 바쳤다.
26년에 몽고대부(蒙古大夫) 환선(桓善)을 명하여 제후로 삼았다.
28년에 지진과 해일이 있었다.
30년에 우세숙(虞世叔)이 성리학(性理學)과 심리학(心理學)을 지어 임금께 바쳤다.
32년에 서쪽 민가에서 소가 발이 여덟게 달린 송아지를 낳았다.
35년에 동해변에 용마(龍馬)가 나타났는데, 등에 별이 새겨져 있었다.
38년에 한(韓) 사람 장세덕(張世德)이 미녀(美女)와 진주를 바치니, 임금께서 이르기를 “언약없이 바치는 것은 반드시 그 속에 간사한 계략이 있다.”하시고 물리치셨다.
40년에 북적(北狄)[주:北狄-중국 사람들이 중국 북쪽에 있는 종족을 이렇게 불렀다.]이 반란을 일으켜, 군사를 보내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55년에 손숙문(孫叔文)이 의학(醫學)과 화학(化學)을 저술하여 바쳤다.
58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13세 단제시다.
제 13 세 마물(麻勿) ―56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다물(多勿)을 태자로 삼았다. 진(秦) 나라 사절이 입조하였다.
4년에 토목(土木)을 크게 일으켜 궁궐을 중건(重建)하였다.
5년에 방공전(方孔錢)을 부어(鑄) 만들었다.
8년에 모문후(毛文候) 유례(有禮)가 반란을 일으켜 군사를 보내어 토벌하였다.
10년에 주(周) 나라 공주를 왕비로 삼았다.
13년에 진(秦) 사람 석무득(昔無得)이 천리마(千里馬)를 가지고 와서 임금께 바쳤다.
15년에 열성제(列聖帝)의 송덕비를 동문(東門)밖에 세웠다.
18년에 이선량(李善良)을 승상으로 삼았다.
19년에 어떤 자가 종묘(宗廟)의 기물(器物)을 도적하여 갔는데, 형(刑)을 감하여 유배를 보내니 이때부터 형정(刑政)이 너그럽고 공평하여 백성이 다 그 덕을 기리었다.
25년에 궁궐 동산(苑)에 큰 뱀이 들어와 죽었다.
궁액기(宮掖記)
<궁궐 뜰안에 큰 거미가 있었는데 큰 뱀이 와서 거미를 잡아먹으려 하자, 거미줄 아래 엎드려 위를 향해 입을 열고 독기를 토하였다. 몇날 못되어 뱀이 죽고 거미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뱀의 배를 가르고 검사해 보니, 배 안에 큰 석웅황(石雄黃) 한뭉치가 있는 것을 보고 거미가 복수하고자, 뱀을 죽이는 유일한 독약이 석웅황을 구하여 묘한 계책으로 먹여 죽인 것을 알게 되었다.>
38년에 성(城) 북쪽 땅이 내려앉아 큰 연못이 된, 큰 샘이 솟아나 배를 띄울 수 있는 정도였다.
48년에 도인(道人) 황학노(黃鶴老)가 신술(神術)이 있어, 풍력(風力)으로 40리를 오고 가니 용사(龍師)라 하였다.
50년에 장백산(長白山)에 양선자(養仙子)라는 숨어사는 사람이 있었는데, 나이 160살에 이르렀어도 피부가 어린아이와 같았다.
56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14세 단제시다.
제 14 세 다물(多勿) ―45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두홀(豆忽)을 태자로 삼았다.
3년에 기자조선 사절이 입조하였다.
8년에 위(魏) 나라 박사 진덕기(陳德基)가 입경하였다.
10년에 정(鄭) 나라 사람 신도회(申屠懷)가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와서 살았다.
15년에 흰 학(鶴)이 궁궐 안의 소나무에 와서 살더니, 음악 소리를 듣고 내려와 춤을 추었다.
18년에 문인(文人) 표상술(表相述)을 오성판윤(五城判尹)으로 삼았다.
20년에 조(趙) 나라 사람 염관(廉冠)이 가족을 거느리고 입국하였다.
26년에 송(宋) 나라 사람 황노술(黃老述)의 딸이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입국하여 태자궁(太子宮) 안에서 함께 살아싿.
30년에 문해광(文海廣)의 필법(筆法)이 매우 뛰어나서 대부열(大夫烈)에 올랐다.
32년에 오추정(吳秋亭)이 그림을 잘 그리므로 문원상서(文院上書)로 삼았다.
33년에 표상술(表相述)이 아뢰기를 “새의 둥지를 뒤집어 놓으면 알이 떨어져 성할 리 없고, 나라가 망한 속에서는 평안한 백성이 있을 수 없습니다. 타는 집과 새는 배에서 근심을 같이 하지 않을 사람이 없고, 음식이 떨어져 여러날 굶주리면 병이 나지 않을 몸이 없으니, 국가는 천하의 대기(大器)입니다. 만일 한번 기울면 사람의 힘으로 갑자기 바로 세우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기에 훌륭한 왕이 기울기 전에 힘쓰는 것은 앞으로 기울어질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는 밝게 살피시기 바랍니다.” 임금께서는 이 말을 따라, 국정을 밝히 살피셨다. 표상술(表相述)의 시(詩)에
외로운 등불은 밤바다를 밝히고 가을비 내리는데 병서만 읽네.
칼을 씻어 석벽에 거니 우레 소리 천지를 진동하도다.
孤燈滄海夜 秋雨讀兵書 洗劍掛石壁 雷聲動天地
35년에 진(晋) 나라 사람 김일선(金日善)이 천문지리학(天文地理學)을 가지고 조정에 참여하였다.
40년에 제(齊) 나라 상인(商人) 노일명(老一明)이 고급 비단을 싣고와 임금께 바쳤다.
42년 초(楚) 나라에서 망명한 번석문(樊釋文)이 황금(黃金) 40근을 가지고 입국하였다.
45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15세 단제시다.
제 15 세 두홀(豆忽) ―36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달음(達音)을 태자로 삼았다. 연(燕) 나라 사절이 입조하였다.
2년에 초(楚) 나라 사절이 입조하였다.
4년에 슬후(膝侯)의 아들 섭이(攝珥)가 입조하였다.
10년에 송(宋) 사람 정상충(鄭尙忠)이 자기 나라 사람 50명을 거느리고 입국하였다.
11년에 크게 가뭄이 들었다.
13년에 위(魏) 나라와 제(齊) 나라 사절이 왔다.
15년에 진(晋) 나라와 조(趙) 나라 사절이 왔다.
21년 8월에 일식9日蝕)이 있었다.
30년에 진충노(秦忠老)가 아뢰기를 “천하를 다스리는 도(道)는 풍속을 바르게 하며, 어진 인재를 얻는 것에 있는 것이니, 가장 시급한 일은 각종 학교를 설립하여 영재들을 공부하게 하여, 각 부문에 적합한 인재를 양성하여 그중에서 뽑아쓰면, 나라를 다스려 천하가 태평하게 될 날을 기다리시옵소서.”하니, 임금께서 그렇다 하시고 각종 학교를 많이 세워 백성을 교육하였다. 외국 사람도 와서 유학하는 자가 많았다.
36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16세 단제시다.
제 16 세 달음(達音) ―18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음차(音次)를 태자로 삼았다. 진(晋) 나라 사절이 왔다.
3년에 윤복지(尹卜地)가 도덕경(道德經)을 저술하여 임금께 바쳤다.
5년에 초(楚) 나라 사절이 입조하였다.
6년에 견융(犬戎)이 와서 복종하였다.
10년에 진개(秦開)가 치국요람(治國要覽)을 저술하여 임금께 바쳤다.
18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17세 단제시다.
제 17 세 음차(音次) ―20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을우지(乙于支)를 태자로 삼았다.
2년에 연(燕) 나라 사절이 입조하였다.
4년에 공상의(孔尙義)가 종교론(宗敎論)을 저술하여 임금께 바쳤다.
15년에 한(韓) 나라 사절이 왔다.
20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18세 단제시다.
제 18 세 을우지(乙于支) ―10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물리(勿理)를 태자로 삼았다. 정(鄭) 나라 사절이 왔다.
3년에 철인(哲人) 이일선(李一善)이 천리경(天理經)을 저술하여 임금께 바쳤다.
5년에 백호돈(白好敦)이 지리학(地理學)과 광물학(鑛物學)을 저술하여 임금께 바치고, 아뢰기를 “우리나라 안에 가는 곳마다 지하에 황금이 있습니다.”하였다.
8년에 임금께서 이일선(李一善)에게 묻기를 “지금 이웃나라와 교류가 전보다 복잡하니, 어떻게 하면 한 눈에 바르고 바르지 앟음을 알아서, 원만하게 교제할 수 있겠는가.”하시니, 대답하기를 “사람을 안다는 것은 하늘을 아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하늘에는 음양풍운(陰陽風雲)의 변화가 있기 때문에 사실을 잘 경험해 보면 대강 예측할 수 있으나, 사람의 마음은 아침 저녁으로 변하기 때문에 알기 어렵습니다. 사람의 성질은 각기 다르니, 상대방의 성질을 확실히 알아내어 교제하면 착오가 없을 것입니다.”하였다.
10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19세 단제시다.
제 19 세 물리(勿理) ―25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구물(丘勿)을 태자로 삼았다. 제 대부(齊大夫) 전굉(田宏)이 망명하여 입국하였다.
2년에 조(趙) 나라 사람 형필(荊泌)이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살았다.
4년에 기자조선(奇子朝鮮) 사절이 입조하였다.
8년에 장자학(張子學)이 논리학(論理學=原本 說明學)을 저술하여 임금께 바쳤다.
15년에 북적(北狄)이 사자를 보내어 입조하였다.
18년에 오곡이 풍년이 들어 정치가 밝아지고 인심이 화목하여짐으로 내외학문이 몰려들어와, 새로운 사상이 많이 일어나 다사(多事)한 시대가 되었다.
25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20세 단제시다.
제 20 세 구물(丘勿) ―40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여루(余婁)를 태자로 삼았다.
2년에 정(鄭) 나라 사절이 입조하였다.
3년 2월에 일식(日蝕)이 있었다.
5년에 최화덕(崔和德)이 동물학(動物學)과 식물학(植物學)을 저술하여 임금께 바쳤다.
7년에 위(魏) 나라 박사(博士) 소문경(蘇文卿)이 입조하였다.
10년에 서백원(徐伯元)이 태야․태음․소양․소음(太陽 太陰 小陽 小陰)의 사상의학(四象醫學)을 저술하여 임금께 바쳤다.
16년에 국학박사(國學博士) 황운원(黃雲元)이 백과서(百科書)를 저술하여 임금께 바쳤다.
18년에 유종득(柳宗得)이 이재학(理財學)을 만들어 바쳤다.
21년에 적우순(狄于順)이 심리학(心理學)을 저술하여 임금께 바쳤다.
25년에 홍수가 일어나 밭농사가 크게 흉년이 들었다.
38년에 기자조선(奇子朝鮮) 사절이 입조하였다.
40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21세 단제시다.
제 21 세 여루(余婁) ―55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보을(普乙)을 태자로 삼았다. 제(齊) 나라 사절이 입조하였다.
4년에 법령을개정하여 천하에 공포하엿는데, 이것을 대동율령(大同律令)이라 한다.
6년에 큰 흉년이 들어 창고의 쌀을 다 풀어 빈민을 구제하였다.
10년에 감천(甘泉)이 대묘(大廟=종묘)앞에서 솟아나왔다.
12년에 곽태원(郭太原)이 양생론(養生論)을 저술하여 임금께 바쳤다.
15년에 마자은(馬子隱)이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저술하여 임금께 바쳤다.
18년에 온천이 성(城)의 남쪽 삼사(三舍=90里)쯤 되는 곳에서 새로 솟아났다.
20년에 정(鄭) 나라 사람 누경(屢景)이 누시계(漏時計)를 가지고 입조하였다.
21년에 기자조선(奇子朝鮮) 사절이 입조하였다.
23년에 대부례(大夫禮)를 대산후(大山侯)로 삼았다.
25년에 크게 가물어 초목이 말랐다.
28년에 장소부(莊召夫)가 의학대방(醫學大方)을 저술하여 임금께 바쳤다.
30년에 홍문선(洪文善)이 태학조문(太學條文)을 저술하여 임금께 바쳤다.
35년에 송(宋) 나라 학사(學士) 오문은(吳文偃)이 입경하였다.
40년에 조문휴(趙文休)가 자본론(資本論)을 저술하여 임금께 바쳤다.
42년에 노(魯) 나라 학자 소문술(蘇文述)이 예기(禮記)를 가지고 입조하였다.
45년에 노(魯) 나라 사람 안사득(顔思得)이 주역(周易)을 가지고 입경하였다.
48년 8월에 두 개의 해(兩日)가 함께 떴다.
50년에 북견융(北犬戎)이 쳐들어와 군사를 보내어 물리쳤다.
52년에 임금께서 중화(中華)에 행차하시어 열국(列國)의 형세(形勢)를 관찰하시고 환궁하였다.
55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22세 단제시다.
제 22 세 보을(普乙) ―46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고열가(古列加)를 태자로 삼았다. 기자조선(奇子朝鮮) 사절이 입조하였다.
4년에 백두산(白頭山)이 밤에 울고, 천지(天池)의 물이 넘쳤다.
6년에 혼서경(混西經)이 쳐들어 왔으나 물리쳤다.
10년에 오성계(吳成桂)가 반역하다가 죽었다.
13년에 장노술(張老術)이 아름다운 옥과 미녀(美女)를 바치니 임금께서 매우 총애하셨다.
15년에 황충(黃虫)이 밭곡식을 다 먹어 버렸다.
20년에 정(鄭) 나라 사람 정발(鄭拔)이 음악을 가지고 입국하였다.
23년에 북풍이 크게 불어 나무가 꺾어지고 집이 무너졌다.
28년 4월에 적토우(赤土雨)[주:赤土雨-붉은 흙이 섞인 비]가 쏟아졌다.
30년에 국정이 문란하여 정권이 외척(外戚) 환윤(桓允)에게 돌아갔다.
34년에 궁전이 저절로 무너져 깔려죽는 자가 많았다.
38년에 도성에 큰 불이 일어나 집 5천여 호가 타버렸다.
46년에 5월에 반역하는 신하 한 개(韓介)가 임금을 죽이고 자립했다. 태자 고열가(古列加=시호는 寧禀離王)가 군사를 이끌고 한개를 쳐 죽이고, 8월 15일에 왕위에 오르니 제23세 단제시다.
제 23 세 고열가(古列加) ―58년간 재위―
2년에 임금께서 국정을 친히 집행하시니, 외척의 권위를 물리치고 어진 이를 기용하며, 능한 사람에게 일을 맡겨 백성을 다스리셨다.
5년에 견융(犬戎)이 불복(不服)하므로 군사를 보내어 물리쳐 평정하였다.
10년에 기자조선(奇子朝鮮) 사절이 입조하였다.
16년에 위(衛) 나라 사절이 입조하였다.
20년에 풍년이 들고 동해에서 많은 고기가 잡혔다.
22년에 소정국(蘇定國)이 건축학(建築學)을 저술하여 임금께 바쳤다.
25년에 구노선(歐老先)이 종수학(種樹學)을 저술하여 임금께 바쳤다.
31년에 각처에 신원함(申寃函)을 설치하여, 억울한 일을 당한자들이 투서하도록 하였다.
40년에 어서(御使)를 시켜 백성들의 사회를 몰래다니며, 부정한 사건을 비밀리에 탐지하여 바로 잡았다.
45년에 연9燕) 나라 대부(大夫) 형운(荊雲)이 망명하여 입국하였다.
48년에 선단제묘(先檀帝廟)를 성의 남쪽에 세웠다.
58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대를 이을 후사가 없으므로, 종친(宗親) 해모수(解慕漱)[주:解慕漱-북부여의 첫 임금.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와의 사이에서 고구려시조 주몽을 낳았다.]가 옛 도음지 부여9扶餘)에서 반기를 들어 나라를 세우니, 북부여(北扶餘)라 하였다.
- 후단제(後檀帝)는 이것으로 대가 끊기니, 1세 솔나(率那)로부터 고열가(古列加)에 이르기까지 23대 875년간이다.
전단조(前檀朝) 1214년, 후단조(後檀朝) 875년 모두 2809년간이다.
※ 위 본문은 전단조 1214년은 1222년이다. 이를 후단조 875년과 합치면 2809년이 아니라 2096년이다. 이는 환단고기의 단군조선 역년과 일치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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