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편 기자조선(奇子朝鮮)
제 1 세 서여(西余) ―61년간 재위―
기자(奇子)의 성(姓)은 혼(桓)이며 이름은 서여(西余)이다. 전단조(前檀朝) 19세 단제 종년(縱年)의 아우인 청아왕 종선(菁莪王 縱鮮)의 증손(曾孫)이다.
그 성품은 성․철․문․무(聖․哲․文․武)하시며 신지현명(神智賢明)하시고, 덕이 만방을 적시고 인(仁)이 금수에까지 미치고, 모든 백성과 친하며 백성을 사랑하시더니, 전단조 25세 39년에 보위에 오르시어 평양 왕검성(平壤 王儉城)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기자(奇子)라는 뜻은 태양의 아들이며 황손(皇孫)이다.>
첫 해에 미서(微西)에게 명을 내려 정전법(井田法)을 만들어 공포하고 백성들에게 농사일에 힘쓰도록 독려하였으며, 납세의 의무를 알게하여 소득의 9분의 1을 바치게 하였다.
맏아들 아락(阿洛)을 태자로 삼고 운양후(雲養侯)를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삼았다. 그 다음 세 아들에게 각각 성을 내려(賜姓) 한(韓)․선우(鮮于)․기(奇)라 하였다.
4년에 평양에 국립대학을 세우고 백성을 정법(政法)으로 가르쳤다.
5년에 여덟가지 바른 도리를 백성에게 가르치니
1. 살인한 자는 죽이고
2. 사람을 상하게 한 자는 곡식으로 갚고
3. 강도 한 자는 다 그 집에 들어가 노비(奴婢)가 되고
4. 절도한 자는 자기만 노비가 되고
5. 남자는 밖에 나가 농사를 짓고
6. 여자는 안에서 베를 짜고
7. 혼인은, 한 남자가 부인 한 명만을 거느릴 수 있고
8. 명분(名分)을 서로 침해하지 말라.
하시니, 한번 노예가 되면 그 후에 풀림을 받았으나 결혼할 때에는 그것을 수치로 여겼다.
10년에 어질고 착하고 품행이 바른 선비를 뽑아 정사에 참여하게 하여, 인덕(仁德)과 충렬(忠烈)을 가르치니,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지 않았으며 밤에 문을 닫지 않고 살았다.
11년에 전단조(前檀朝) 제5세 단군 능(陵)을 강동(江東)에 개축하였다.
12년에 제1세 국조단군전(國祖檀君殿)을 평양에 세우고 단군의 화상9畵像)을 모셨다.
23년에 처음으로 종실(宗室)을 봉하여 왕후(王侯)로 삼았다.
34년에 평양 서쪽 성에 보통문(普通門)을 건립하고 버드나무와 뽕나무를 많이 심었다.
38년에 은(殷) 나라 상인이 와서 말하기를 “은 나라 정치가 문란하고, 법의 기강이 해이하여 백성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당을 얻을 수 없으니, 조선에 와서 살면 좋겠다.”하여, 이때부터 은 나라에서 이사 오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39년에 소나벌(蘇奈伐)을 수상(首相)으로 삼고 몽득리(蒙得利)를 상장(上將)으로 삼았다.
40년에 후단조(後檀朝) 사절이오니 상국(上國)의 예로써 대우하였다.
41년에 서비리족(叙非利族)이 변경을 침공하니, 몽득리(蒙得利)를 구원병으로 보내어 물리쳤다.
48년에 양병헌(楊兵憲)이 아뢰기를 “만물 중에 사람이 가장 귀한 것은 예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예의가 없으면 짐승에 가까우니 무엇이 귀하겠습니까. 그러기에 모든 성조(聖朝)가 천하를 다스리실 때에, 예의로써 백성을 가르치는 요소를 삼아 천년이 넘도록 길이 복지를 누리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원하옵기는, 전하께서는 예의를 극히 중하게 여기시어 백성들이 이것을 익혀 아름다움을 이루게 하시고, 더욱 나날이 새록베 하여 오래 이어온 이 나라로 하여금 그 명(命)을 유지하게 하옵소서.“하니, 임금께서 그 말을 받아들이시고, 예의로써 백성을 가르치니 이때부터 백성들이 예의에 밝았으며 법을 어기는 자가 적었다.
58년에 세금의 반을 감하고, 백성을 더욱 의와 용맹과 봉공(奉公)하는데 힘쓰게 하니, 백성이 공전(公戰)에는 용맹스럽고 사사로운 다툼에는 겁을 냈다.
61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2세 기자시다.
제 2 세 아락(阿洛) ―40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솔귀(率歸)를 태자로 삼았다.
2년에 대동문(大同門)을 대동강(大同江) 변에 세우고 평양성을 개축하였다.
5년에 토목(土木)공사를 크게 일으켜 신청궁(新淸宮)을 만드니, 많은 사람들이 고역에 눌려 원성이 나라 안에 가득하였다.
10년에 나라의 경계를 정하였는데, 북은 후단조(後檀朝)에 정하고, 동쪽․남쪽․서쪽은 큰 바다가 있었다.
13년에 이선간(李仙干)를 보내어 동북쪽에 있는 오랑캐(胡)를 쳐서 꺾었다.
18년에 마이서(馬以西)를 보내어 북적(北狄)을 쳤다.
20년에 정벌(征伐)에 힘쓰며, 토목(土木)을 크게 일으키니 백성들의 부역이 과중하여지고, 세금을 미납하는 일이 있으므로 엄부․진상(嚴父․陳祥=收金者)을 보내어, 그 미납된 세금을 독촉하여 징수하였다.
36년에 상(商) 나라 사절이 오니, 사자를 보내어 사례하였다
40년에 소문라(召文羅)가 아뢰기를 “중화(中華)의 상(商)나라 임금 수(受=紂王)가 무도(無道)하여 백성들의 신망을 크게 잃었으니, 멀지 않아 망할 것입니다. 원하옵기는, 전하께서는 의사(義師)를 들어 토벌한다면 대업(大業)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하니, 임금께서 “생각하고 있는지 오래되었다.”하시고, 더욱 병사를 훈련하여 각종 병기를 준비하였는데, 그해 8월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3세 기자시다.
제 3 세 솔귀(率歸) ―48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임나(任那)를 태자로 삼았다. 임금께서는 여러해동안 백성들이 궁하고 병력이 약해진 것을 아시고, 나라 안을 다스리는데 힘써 농업과 상업을 권장하며 산업을 장려하며 세금을 낮추니, 그 동안 궁핍하던 백성들이 점점 넉넉해졌다.
43년에 서주(西周) 무왕(武王)이 강자아(姜子牙=姜太公)을 얻은 후에 상(商)의 수(受)를 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 제후(諸侯)를 기산(岐山) 아래에 모으니, 기약없이 모인자가 800명이었다. 다 주(紂)를 치는 것이 옳다는 결의를 하고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백성들이 그 정세를 알고 피난하여 입국하는 자가 많았다. 그러더니 몇 해 만에 주 무왕(周 武王)에게 멸망하였다.
45년에 은(殷) 나라 주(紂)의 친척인 기자(箕子=子胥餘)가 주(周) 나라의 신하될 마음이 없어 동쪽으로 나오니, 강달(姜達)․궁흠(弓欽) 등 50명이 따라와 요수(遼水=西遼河)변에 이르러 머물렀다. 임금께서 그 사정을 가련하게 여기시고 요서(遼西)의 한 모퉁이에 거주하게 하셨다. 은(殷) 백성들 중에는 기자(箕子)를 우러러 받드는 자들이 모여 살면서 기자정(箕子井)과 기자경(箕子畊)이라 하였다.
46년에 주(周) 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우방으로서의 우의(友誼)를 맺었다.
48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4세 기자시다.
제 4 세 임나(任那) ―31년간 재위―
첫해에 맏아들 노단(魯丹)을 태자로 삼고, 선우명(鮮于明)을 태자태부로 삼았다.
4년에 임금께서 선우명(鮮于明)에게 주역(周易)의 오묘한 의미를 묻기를 “주 나라 사람이 역서(易書)를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무극(無極)에서 태극(太極)이 생기고 태극에서 양의(兩儀)[주:兩儀-양(陽)과 음(陰)]가 생기고, 양의에서 사상(四象)[주:四象-음․양의 네가지 상태 곧 태양(太陽)․소양(少陽)․태음(太陰)․소음(小陰)]이 생기고 사상에서 오행(五行)[주:五行-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이 생기고, 오행에서 팔괘(八卦)[주:八卦-건(乾)․태(兌)․이(離)․진(震)․손(巽)․감(坎)․간(艮)․곤(坤)]가 생기니, 만물이 다 음양(陰陽)의 정기(精氣)로 되어 있다 하며, 만물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괘를 맞추어 능히 과거․현재․미래의 일을 어김없이 알아 맞춘다하니 이것이 사실인가.”하셨다.
선우명(鮮于明)이 대답하기를 “소위 주(周)의 역서라는 것은 공간과 시간설에 불과한 것입니다. 대개 음양이라는 것은 해와 달이 비췄다 가렸다 하는 현상에 이름을 붙인 것이니, 곧 밝고 어두운 두 현상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밝고 어두운 두 가지 현상의 자체는 실질(實質)이 없는 것이니, 실질(實質)이 없는 것이 어찌 만물의 생생한 이치가 있겠습니까.
천하만국의 위치가 동 혹은 서 그리고 남에도 북에도 있어, 그 위치가 같지 않기 때문에 해와 달이 비치는 각도 또한 같지 않으니, 항상 주야가 평균되는 곳도 있고, 춘하추동 네 계절의 차와 주야의 구별이 생기는 곳도 있습니다. 그 비치고 가리움의 시차는 있을지라도, (반년씩 밤과 낮이 되는 곳도 있음.) 비치고 가리움의 함수는 어떤 지방을 막록하고 다 같으며 춥고 더무의 소유시간 또한 같을 것입니다.
성인(聖人)이 이것을 알고 역(易)을 만들 때에, 음과 양의 상대의 이치(理致)를 천도(天道)에 응하게 하여, 역9易)의 도(道)를 정하여서 일음(一陰)과 일양(一陽)을 이룰 뿐입니다.
그러므로 음양을 만물의 부모(父母)라 할 수 없고 다만 생물의 기온을 조화(調和)하는 작용이 있기 때문에, 만물을 기른다(養成)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음양이 만물의 부모가 되지 못하는데 오행(五行)이 어찌 만물의 원기(元氣)가 되겠습니까.
대개 천지와 일월성신(日月星辰)과 토석금수(土石金水) 등은 다 우주 속에 있는 같은 물질이니, 이미 형성된 물질인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가 어찌 변하여 다른 물질을 이루겠습니까.
하늘이 허다한 원소로써 만물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있을 수 있으나, 이미 몇 개의 원소가 합하여 물질을 형성한 오행 등이 어찌 또 변하여 다른 물질을 형성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이화(理化)의 이치에 이르지 못한 것이며 운수작퐤(運數作卦)라 하는 것은 현공설(懸空說)에 불과합니다. 다섯 수(五數)를 본위로 하고 이것을 대연수(大衍數)라 하여, 대연9大衍)중 가장 적은 50을 기본수로 합니다. 이것을 뽑아 괘를 만들 때에, 먼저 공간설(空間說)의 위치를 알기 위하여 배제여일법(倍除餘一法)을 응용하여 위치의 크고 작음을 알고, 시간설의 시간의 오래고 빠름을 알기 위하여 사사설(四四揲)로 하여 정반비례법(正反比例法)을 써서, 시간이 오래고 빠름을 간략히 아는 예술형식(藝術形式)을 취하여 길흉(吉凶)을 판단하게 되니, 길한 사람이 당하면 길하고, 휴한 사람이 당하면 흉할 것입니다.
전하, 홀로 이웃 은(殷) 주(周)의 전사(戰事)를 보시옵소서. 주(紂)는 갑자일(甲子日)에 망하고 발(發)은 갑자일(甲子日)에 흥하였으니, 이것이 곧 증거입니다.
죄를 하늘에 얻으면 빌 곳이 땅에도 없으며 피할 데도 없으니, 덕 있는 자의 일은 점을 가까이 하지 않아도 길(吉)하고 덕 없는 자의 일은 점을 항상 가까이 해도 흉합니다.
대개 역(易)은 옛날 성인이 군자(君子)와 소인배에게 착한 일을 권하고 악한 일을 징벌하기 위하여, 천지의 상(象)을 취하여 건곤(乾坤)을 주(主)로 하고 괘를 만든 것이나, 이 역획(易畫)이 잇기 전에도 역(易)이 있었습니다. 아득한 하늘이 무한히 비어있는 것을 생각하여 그 오묘함을 헤아리지 못할 때 일어납니다. 비어(虛)있는 것을 비어있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여, 이 가상(假象)을 태초(太初)에서 되어진 것으로 알며, 획(畫)을 긋기 전에 명상(冥想)하여 자연의 변화를 관찰하고, 무(無)로부터 유(有)에 이르러 태초의 조판(肇判)[주:肇判-우주를 창조할 때 사물의 생성 운행질서까지 짜는 것]을 이룸으로써, 존비(尊卑)를 건곤(乾坤)으로 정하고 육합(六合)[주:六合-상․하․동․서․남․북(上․下․東․西․南․北)]을 포함하여 깊은 뜻을 사고, 이의(二儀)를 열어 문을 삼아 가볍고 맑은 것은 위로 올라가 기(氣)가 되고, 무겁고 탁한 것은 아래로 가라앉아 질(質0이 되어 전에도 시작이 없고 후에도 끝이 없어, 육합(六合)이 비록 넓으나 그 안을 떠나지 못하고, 짐승의 털이 비록 작으나 도(道)를 받아들인 후에야 형체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서인(聖人)이 능히 알 수 있었습니다.
중화(中華)의 성인이 이것을 관찰하고 가상적(假想的) 건곤(乾坤)으로 괘를 만들고, 효(爻)를 계산하여 법(法)을 말하나 거짓말을 꾸며내어 만물에 응하게 한 것입니다. 그렇게만 정성이 지극하여 점괘(占卦)에 통달하며, 사리(事理)와 체면을 지켜 천지로부터 그 덕(德)을 합하면 길흉(吉凶)을 가려 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정성이 없고 다만 운수작괘(運籌作卦)에 의하여 길하고 흉한 것을 알고자 하며, 이것은 파도를 헤치고 달을 찾는 것과 같아서 진리를 파악하지 못하고, 도리어 혹세무민(惑世誣民)[주:惑世誣民-사람을 속여 미혹시키고 세상을 어지럽힘.]하는 기구가 되어, 후세 사람들을 미신(迷信)에 사로잡히게 하여 많은 해를 끼치게 될 것입니다.“하니, 임금께서 ”옳다“하셨다.
8년에 천단(天壇)을 동문(東門=長慶門)밖에 세워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고, 천하에 조서를 내려 백성들에게 각기 동네마다 천단(天壇)[주:天壇-여기에서의 천단은 고인돌(支石)을 말한다. 지금 세계 곳곳에 남아 있는 고인돌은 원래 하늘에 제사드리기 위해 세워졌다고 하며 또 거기에 죽은 사람을 매장하였다. 이 풍속은 동북아시아로부터 남방과 유럽가지 퍼져나갔다.]을 세우되 천일지이(天一地二)를 응하게 하기 위하여, 아래에는 돌 두 개를 놓고 위에는 돌 하나를 덮으라 하셧다.
해마다 10월 3일에 천단(天壇)에 모여 하느님께 제사하고 거기에서 북을 치며 노래를 부르기를,
‘정성으로 천단 쌓고 하느님께 축도하세
황운(皇運0이 오래 어이지기를 비오니 만만세로다.
백성을 돌보시니 풍년을 줄거워하도다.“ 하며 춤을 추었다. (滿洲實錄)
10년에 위요(魏堯) 등 뛰어난 인재(俊才) 18명을 주(周)나라 호경(鎬京)에 보내어 견학하게 하였다.
15년에 후단조(後檀朝) 사절이 입경하여 모국(母國)의 예로서 대우하였다.
16년에 수상(首相) 우문술(右文述)이 보필을 매우 잘 하니, 나라를 다스리는 법도가 주 나라와 더불어 서로 같으므로 우의가 점점 두터워 갔다.
31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5세 기자시다.
제 5 세 노단(魯丹) ―13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마밀(馬密)을 태자로 삼았다.
2년에 은(殷)에서 망명한 자서여(子胥餘)의 아들이 입경하니, 임금께서 불러 만나시고 마음속에 한없는 의분을 느끼셨다.
5년에 주(周) 나라 사절이 입조하였다.
6년에 임금께서 동쪽 군(郡)과 현(縣)에 행차하셨는데, 금강산(金剛山)에 이르러 산수(山水)의 아름다움을 보시고 몹시 칭찬하셨다.
10년에 북적(北狄)이 변경에 쳐들어오니 노일돌(路日突)을 구원병으로 보내어 물리쳤다.
13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6세 기자시다.
제 6 세 마밀(馬密) ―18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모불(牟弗)을 태자로 삼고, 고선자(高先子)를 수상으로 삼고, 노일돌(路日突)을 상장으로 삼았다.
2년 7월에 일식(日蝕0이 있었다.
3년에 아우 마립한(馬立罕)을 대마도(對馬島)의 왕으로 삼았다.
8년에 후단조(後檀朝) 사절이 오니 사신을 보내어 사례하였다.
10년에 상장(上將) 노일돌(路日突)을 보내어 유주(幽州) 영주(營州)를 얻고, 셋째 아우 마석간(馬石干)을 제후(諸侯)로 삼았다.
12년에 정법통편(政法通編)과 국민독본(國民讀本)을 편찬하였다.
18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7세 기자시다.
제 7 세 모불(牟弗) ―20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을나(乙奈)를 태자로 삼았다. 주(周) 나라 사람 원호(元昊)가 고시(古詩) 20장(章)을 가지고 와서 임금께 바쳤다.
8년에 장성자(長成子)가 성리학(性理學)을 저술하여 임금께 바쳤다.
9년에 천문대(天文臺)를 세우고 감성관(監星官)을 배치하여 기후에 맞도록 농역(農曆)을 명백9明白)하게 하였다.
10년에 대학(大學)을 세우고 정법(政法)으로 백성을 가르쳤다. (당시 교사 黃日錫은 中華사람이다.)
11년에 교지국(交趾國)사람이 표류하여 남해안에 와 닿았다.
12년에 노문흘(老文屹)을 국사(國師)로 삼았다.
15년에 노문흘이 치국경법(治國經法) 13편을 저술하여 임금께 바치니, 그 내용의 요점은 지․인․용(智․仁․勇)과 궁리․정심․수기(窮理․正心․修己)와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도(道)였는데 임금께서 칭찬하셨다.
20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8세 기자시다.
제 8 세 을나(乙奈) ―40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마휴(摩休)를 태자로 삼았다. 후단조 사절이 오니 사신을 보내어 사례하였다.
6년 여름에 지진이 일어났다.
8년에 주(周) 나라 사절이 입조하였다.
9년에 조자사(曹子史)가 경제원론(經濟原論)을 저술하여 임금께 바쳤다.
15년에 소문한(蘇文翰)이 재정학(財政學)과 상업학(商業學)을 저술하여 임금께 바쳤다.
24년에 황극로(黃克魯)가 백과통서(百科通書)를 저술하여 임금께 바쳤다.
25년에 한문자(韓文子)가 천문학(天文學) 성학(星學)을 저술하여 임금께 바쳤다.
28년에 사상을(師尙乙)이 논리학(論理學)을 저술하여 임금께 바쳤다.
29년에 백아업(白亞業)이 천하여지승람(天下與地勝覽)을 저술하여 임금께 바쳤다.
30년에 주(周) 나라 사절이 입조하였다.
40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9세 기자시다. 재위 40년동안 문화를 향상시켜 주 나라 보다 우월하여 문화의 중흥시대라 하였다.
제 9 세 마휴(摩休0 ―2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등나(登那)를 태자로 삼았다.
2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10세 기자시다.
제 10 세 등나(登那) ―29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해수(奚水)를 태자로 삼고, 진하자(秦何子)를 태자태부로 삼았다. 아우 등로(登魯)를 가락후(駕洛侯)로 삼고, 둘째 아우 등원(登元)을 신주후(神州侯)[주:神州侯-제주도의 제후,]로 삼았다.
3년에 진하자(秦何子)가 철학(哲學)과 윤리학(倫理學)을 저술하여 임금께 바쳤다.
5년에 황운곡(黃雲谷)이 성선설(性善說)을 저술하여 바치고, 노문한(老文罕)은 성악설9性惡說)을 저술하여 바치고, 오공오(吳空悟)는 무성설(無性說)을 저술하여 임금께 바쳤다.
6년에 신자원(申自元)은 형명서(刑名書)를 저술하고, 왕정고(王定高)는 신정론(新定論)을 저술하고, 한나물(韓奈勿)은 신법론(新法論)을 저술하여 임금께 바치니, 이때부터 많은 학자들이 사상(思想)을 발표하였다.
18년에 이극회(李克會)가 글을 올려 부모 삼년상법(父母三年喪法)을 하기 원하니 임금께서 허락하셨다.
19년에 고죽국(孤竹國)[주:孤竹國-중국 은(殷)나라 때의 나라 이름. 하북성(河北省) 노용현(盧龍縣)과 열하성(熱河省)․조양현(朝陽縣)에 이르는 일대] 사람이 와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의리를 지켜 주 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首陽山)에서 고사리를 먹고 살다가 죽은 일을 말하니, 임금께서 들으시고 이르기를 “참 세상에 다시없는 의절(義節)을 지닌 두 장부로다.”하셨다.
29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11세 기자시다.
제 11 세 해수(奚水) ―10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물한(勿韓)을 태자로 삼았다.
5년에 백악산(白岳山=九月山)에 삼성전(三聖殿)을 세우고 환인․환웅․환검(桓仁․桓雄․桓儉)의 신위(神位)에 제사하였다. (唐壯京의 부근에 있는 산.)
7년에 후단조 사절이 입조하였다.
10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12세 기자시다.
제 12 세 물한(勿韓) ―21년간 재위―
첫 해에 아우 오문루(奧門婁)를 태자로 삼았다.
3년에 공손성(公孫成)이 농학(農學)과 종수학(種樹學)을 저술하여 임금께 바쳤다.
8년에 상우문(尙于文)이 의학총서(醫學總書) 48권을 편집하여 임금께 바쳤다.
21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13세 기자시다.
제 13 세 오문루(奧文婁) ―48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누사(婁沙)를 태자로 삼았다.
4년에 조비자(曹丕子)가 신선술(神仙術)에 대하여 아뢰기를 “도(道)의 정(精)은 고요하며 신령하고, 도(道)의 극(極)은 현묘하고 묵묵하며, 신(神)의 정(精)은 고요하고 맑으니, 그 정(精)은 막는 일이 없어야 오래 살(長生) 것이며, 마음에 지(知)가 없고 신(神)이 형(形)을 지켜야 형(形)이 오래 살 것입니다. 안(內)을 신중히 하고 밖(外)을 닫고, 하나(一)를 지켜야 섞이지 않으며, 욕심이 많으면 화가 되는 것이니, 신(神)을 지켜 화평(和平)하게 하는 것이 오래 사는(長生)도(道)입니다.”하니, 임금께서 “이것은 한가한 사람의 일이라.”하셨다.
48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14세 기자시다.
제 14 세 누사(婁沙) ―28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이벌(伊伐)을 태자로 삼았다.
3년에 후단조 태자(太子)가 입경하니, 모국(母國)의 예의로서 후하게 대접하였다.
4년에 임금께서 태자를 영고탑(寧古塔)에 보내시어 서로 같은 조상 같은 자손의 옛 정을 나누었다.
5년에 백태보(白泰普)에게 국사(國史)를 편찬하게 하니 전부 92편이었다.
10년에 봄에 후단조의 임금께서 오시니, 이때가 후단조 제11세 단제 때였다. 두 임금께서 천단(天壇)에 함께 오르시어 조상신령(祖上神靈)께 경배하시고 그해 4월에 귀국하셨다.
11년에 제후(帝后)께서 백성들에게 명을 내리시어 “뒷뜰에 항아리를 묻고 사흘(三日)에 쌀 한 되씩 저장하였다가, 갑자기 쓸 일을 위해 준비하라.”하셨다. 이듬해에 크게 흉년이 들어 밭에서 거둘 곡식이 없어 항아리 안에 있는 쌀로 생명을 구하면서, 제후(帝后)의 올바로 내다보심을 감사하였다.
12년에 임금께서 후단조와 더불어 한 뿌리의 자손임을 감동하여 형제시(兄弟詩)를 지으니,
형은 반드시 그 아우를 사랑하고(兄須愛其弟)
아우는 마땅히 그 형을 공경할지라.(弟必恭其兄)
항상 자그마한 일로(當以毫毛事)
골육의 정을 상하지 말지라.(莫傷骨肉情)
말도 한 구유에서 먹고(馬猶同槽食)
기러기도 또한 한 줄을 이루나니, (雁亦一行成)
방안에서 비록 즐기나(宅室雖云樂)
부인의 말을 삼가 들으라.(婦言愼勿聽)
<이것이 五言詩의 시작이다.>
15년에 돌궐(突厥)의 사절이 입경하니, 국빈으로 후하게 대접하였다.
18년에 임금께서 국정(國政)을 더욱 밝게 살피시니, 천하는 태평하고 사방이 무사하였다. 어진 재상 한문거(韓文渠)가 충성스럽게 보필하니 임금과 신하가 서로 공을 사양하였다.
28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15세 기자시다.
제 15 세 이벌(伊伐) ―26년간 재위―
첫 해에 아륵(阿勒)을 태자로 삼고 한문거(韓文渠)를 국태사(國太師)로 삼고, 왕좌명(王佐明)을 수상으로 삼고 고력합(高力合)을 상장으로 삼았다.
2년에 한문거(韓文渠)가 글로 아뢰기를 “도․덕․인․의․예(道․德․仁․義․禮)의 다섯가지는 일체(一體)이니, 이것이 나라를 다스려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기국입니다.
도(道)란, 사람이 밟는 것이니 만물이 그 까닭을 알지 못하여도 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덕(德)이란, 사람이 얻어야 되는 것이니 만물이 저마다 하고자 하는(欲) 것을 얻(得)되, 끝에는 혼자 얻게(獨得) 되는 것입니다.
인(仁)이란, 사람이 친해야 할 것이니 측은한 마음이 있어, 그 생성(生成)을 구조(救助)하는 것입니다.
의(義)란,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것이니 사업에 성공하여 당연히 선(善)한 상(賞)과 악(惡)한 벌(罰)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禮)란, 사람이 실천해야 할 것이니 일찍 일어나며 밤이 되면 잠을 자는, 인륜(人倫)의 질서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 다섯가지가 구비되면 법률(法律)이 필요없으나, 도(道)가 없어지면 인(仁)이 나고, 인(仁)이 없어지면 의(義)가 나고, 의(義)가 없어지면 예(禮)가 생긴다 하였습니다. 예(禮)라는 것은 사시(四時)의 변천과 같아서 항상 그 시대를 따라서 변하기 때문에, 그 때가 아니면 도리어 폐해가 되는 것이므로, 말세(末世)를 당하면 법률이 없을 수 없습니다.
법이란, 백성을 다스리는 권위이므로 법이 백성에게 신망을 받지 못하면 백성을 다스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라를 다스리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입법(立法)이 제일이며, 신뢰되어야 할 것은 사법(司法)보다 더한 것이 없으며, 좋은 것은 널리 의논하는 것 보다 더 좋은 것이 없고, 화(禍)는 무윤(無倫)한 것 보다 더 화가 없고, 즐거움(樂)은 선하게 사는 것 보다 더 즐거운 일이 없고, 신(神)을 섬기는 일은 지성(至誠)보다 더한 것이 없고, 형세를 잘 살피는 것 이상 더 밝은(明) 것이 없고, 백성을 부하게 하는 것 이상 길(吉)한 일이 없고, 병사를 강하게 하는 것 이상 승(勝)은 없습니다.
이 일을 하고자 하시면 먼저 사람의 뜻(志)를 구해야 하는데 사람의 뜻을 구하는 데는 몇 가지 요점이 있습니다. 즐기는 것을 끊으며 욕심을 금해야 하는 이유는 누(累)를 제거해야 하기 때문이며, 흉(凶)한 것을 누르고 악한 것을 버리는 것은 허물을 책망하는 것이며, 술을 금하며 여색(女色)을 막는 것은 더러운 것을 없애기 위함입니다. 싫은 것은 피하고 의심스러운 것을 멀리하는 것은 착오없게 하기 위함입니다. 학문을 널리 익히기 위해 간절히 묻는 것은 지식을 넓히기 위해서이며, 행동은 고상하게 하며 말을 자상하게 하는 것은 수신(修身)하는 길이며, 공손하고 검소하며 겸손하고 절약하는 것은 자신을 지키는 길입니다. 깊이 헤아리고 앞일을 염려하는 것은 궁하지 않기 위해서이며, 어진(仁)것을 가까이 하고 바른(直) 것을 사귀는 것은 기울어지는 것을 받쳐 세우는 일이며, 악을 숨기고 선을 나타내 주는 것은 사람을 대접하는 일입니다. 재주있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며 능한 사람을 부리는 것은 사물을 잘 경영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간사한 것을 멀리하고 거짓을 물리치는 것은 난을 그치게하는 일입니다. 옛 것을 쌓아 새것을 알게 하는 것은 이치를 가리는 것이며, 변(變)을 일으켜 권(權)에 이르는 것은 맺은 것을 풀기 위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 성제명왕(聖帝明王)께서 겸손한 언사와 후한 예물로 어진 선비를 대우 할 때에, 한번 먹으면서(一飯) 세 번 토했다 씹으며(三吐哺), 한번 목욕(一沐)하는데 세 번 털을 잡으니(三握髮) 누가 감화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 임금되신 분은 깊이 생각하며 힘써 움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이웃나라 주(周) 왕조가 전국(戰國)이 되었으니, 그 영향이 우리 나라에 적지 않습니다. 지금 전하의 좌우에 있는 모든 신하는 다 전(前) 임금의 옛 신하입니다. 전 임금게서 남긴 덕을 생가하여 받들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진심을 다하여 충성스럽게 보좌하고 있으니, 진실로 귀를 기울이시어 열성조(列聖朝)의 유업(遺業)을 견고하게 하시며, 지사(志士)들의 의기(義氣)를 널리 펴게 하시며, 스스로의 긍지를 갖게하여 충성스럽게 하는 바른 말을 막지 마소서.
신(臣)도 역시 전 임금의 신하로서 나이 90이 넘어 오랫동안 병상에 누어 고통스럽게 신음하고 잇사오니, 생명이 조석(朝夕)을 다투고 있습니다. 다시는 천측(天側)을 가까이 할 수 없기에 고통을 억지로 참고 몇 말씀 드리고자 하오나 정신이 혼미하여 고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하였다.
임금께서 끝까지 들으시고 슬프게 여기시며 칭찬하여 감탄하시기를 “새도 죽을 때에 그 우는 것이 슬프고 사람도 죽을 때에 그 말이 선하다 하더니, 이제 한문거(韓文渠)의 말이 선하고 아름답도다.”하시고, 사람을 시켜 문병하게 하였는데, 그 날 바로 한문거가 죽으니 국장(國葬)을 명하셨다.
8년에 진(秦) 사람 범서개(范西開)가 입경하여 진 나라의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설명하였다.
15년에 임금께서 태백산(太白山)에 오르시어 성조(聖祖)의 크신 은혜와 거룩한 덕을 기리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천단(天壇)을 쌓고 하늘에 제사한 후에 환궁하셨다.
26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16세 기자시다.
제 16 세 아륵(阿勒) ―28년간 재위―
첫 해에 마휴(麻休)를 태자로 삼고 석륵상(石勒祥)을 수상으로 삼고, 을병고(乙丙古)를 상장으로 삼았다.
3년에 대동법율(大同法律)을 제정하여 백성들에게 공포하였다.
6년에 주(周) 나라 사절이 오니, 사신을 보내어 사례하였다.
8년에 수상(首相) 석륵상(石勒祥)이 글을 올려 아뢰기를 “대개 일에 따라 알맞게 하는 것을 권(權)이라 하고, 일을 처리하는데 합의(合宜)한 것을 의(義)라 하고, 권(權)으로써 변(變)을 대응하며, 의(義)로써 일을 바르게 하는 것은 다 나라를 위하는 도(道)이며, 도(道)에 같이 있지 못할 것은 시비(是非)이며, 일(事)과 함께 있어서는 안되는 것은 이해(利害)입니다. 다만 이해를 일삼고, 시비를 마음대로 일으키면 일(事)을 바르게 하는 의(義)를 상할 것입니다. 시비(是非)를 주(主)된 요지로 삼고, 이해(利害)를 따지지 않으면 변(變)을 대응하는 권(權)을 어길 것이나, 권(權)은 규정이 없고 꼭 알맞는 것이 귀하고, 의(義)는 상제(常制)가 없고 합의(合宜)가 귀하니, 중(中)을 얻어 합의(合義)하면, 시(是)와 의(義)가 다 그 안(中)에 있습니다.
진실로 나라에 편(便)하고 백성에게 이롭다면 다 할만한 일입니다. 나라를 편안하게 하지 못하고 그 백성을 보호하지 못하면, 이것은 다 행하여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그 권(權)과 의(義)를 알고 처리하면 천하에 어찌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 있겠습니까.
혹시 일을 처리할 때 잘잘못이 자세히 가리기 어렵고, 이해를 분별하기 어려워 취(取)하고 주는데 의아하면, 그 경중(輕重)과 완급(緩急)에 있을 따름이니, 무슨 근심이 있겠습니까. 대개 중하고 급하면 마땅히 얻을 것이며 가볍고 급하지 않으면 마땅히 버릴 것입니다.
그러기에 한 사람을 죽여 모든 백성을 평안하게 할 수 있으면 죽일 수도 있고, 한 푼을 써서 만금을 얻을 수 있다면 써도 되는 것입니다.
지금 나라의 정세가 중하고 급한 것이 많은데 중하고 급한 것을 하지 않고, 중하지 않고 급하지도 않은 일에 힘쓰니, 마치 호랑이가 갑자기 나타났는데 다만 여우인줄 알고 고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천하가 조용해진 듯하나 이웃 여러 나라들이 늘 전쟁을 하고 있으니, 그 혼난의 영향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대개 국가는 천하의 대기(大器)요, 법은 천하의 공물(公物)입니다. 한번 법을 가볍게 여기면 천하의 법을 운용하는 일이 가벼워지므로, 이같이 법이 바르지 못하면 백성이 법을 불신할 것입니다. 백성이 법을 불신하면 장래 무슨 방법으로 천하를 다스리겠습니까.
그러나 법이 가혹하면 백성이 다 법에 눌리게 돕니다. 만일 임금이 그 백성을 아주 하찮게 보면 백성이 그 임금을 원수같이 보게될 것이며, 임금과 신하가 서로 원수가 되면 한 조정 사람이 서로 적국(敵國)과 같이 될 것입니다. 원하옵기는, 전하께서는 형벌(刑罰)을 줄이시고, 덕정(德政)을 너그럽게 베푸시어, 백성들이 법이 가혹하다는 원성이 없고, 공평하고 정직하여 모든 일에 치우침이 없으며, 일을 처리하는데 마음을 모으면, 선대(先代) 임금의 치적(治積)을 다시 부흥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니 임금께서 이 말을 받아들이셨다.
28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17세 기자시다.
제 17 세 마휴(麻休) ―27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다두(多斗)를 태자로 삼았다. 후단조 사절이 입경하니, 사신을 보내어 사례하였다.
3년에 영견갑(英堅甲)을 수상(首相)으로 삼고 홍문선(洪文善)을 상장(上將)으로 삼았다.
5년에 조명성(趙明星)이 글을 올려 아뢰기를 “땅이 기름지지 못하면 큰 나무를 볼 수 없고, 물이 얕으면 고기가 놀 수 없고, 나무가 없으면 큰 새가 깃들지 않으며, 수풀이 우거지지 않으면 짐승이 살지 않고, 산이 뽀족하면 무너지고, 못에 물이 차면 넘치고, 옥을 버리고 돌을 취하는 자는 장님의 눈이며, 땅을 보지 않고 달리는 자는 넘어지고, 기둥이 약하면 집이 무너지고, 보좌(輔佐)가 약하면 나라가 기울어지고, 발(足)이 차면 심장이 상하고, 사람들이 원망하면 나라가 망하고, 뿌리가 마르면 가지가 죽고, 백성이 고달프면 나라가 약해지고, 넘어지는 수레바퀴와 같이하는 자는 넘어지고, 망국(亡國)과 더불어 일을 같이 하는 자는 멸망하게 되니, 이것은 다 눈으로 똑똑히 봐온 실증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이웃 상(商) 나라가 망한 것은 사람들이 고달프고 나라가 약해졌기 때문이며, 주(周) 나라가 흥하는 것은 백성이 평안하고 나라가 부하기 때문입니다.
저 상수(商受=紂王)의 사람됨을 보면, 말을 많이 하여 그릇된 일을 꾸미며 힘이 좋아 쇠고랑이를 펼 수 있으니, 그 말재주와 주먹의 힘이 보통사람을 훨씬 넘었으나, 나라가 망하여 불에 타 죽는 화를 당한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윗자리에 앉아 항상 지조가 없으며 아랫사람을 쓸 때에 의심이 많으며, 높은자에게는 의지하나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친하고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어, 믿어야 할 사람은 의심하며 믿어서는 안될 사람을 믿으며, 여색(女色)에 유혹되어 주견이 없고, 간신에게 권력이 농간되니 정치적 명령이 자유롭지 못하고, 제왕(帝王)의 몸으로 하찮은 필부(匹夫)의 대열에 스스로 서니, 몸이 필부가 되어 천자의 일을 하고자 하는 것은 마치 모기가 태산을 짊어지는 것과 같아서 스스로 멸망하고야 맙니다.
앞 차가 넘어지는 것은 뒷 차의 경계가 되고, 이웃 나라가 망하는 것은 남은 나라들의 거울이 되는 것입니다. 위험을 두려워 할 줄 하는 자는 몸을 안전하게 하는 길이 있고, 망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는 몸을 보존할 방법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는 일에 도(道)가 있으면 길(吉)하고 도(道)가 없으면 흉하니, 길하면 모든 복이 모여들고 흉하면 만가지 화가 따릅니다.
원하옵기는, 전하께서는 전에 있었던 일을 거울 삼아 잘 살피시며 시급한 일을 자세히 의논하시고, 도(道)로써 백성을 다스리면, 천하의 백성이 도(道)를 따르는 것이 마치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 같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난관(難關)이 있겠습니까.“하니, 임금께서 칭찬을 그치지 않으셨다.
6년에 강을 건너가실 때에 황룡(黃龍)이 출현하였다.
10년에 크게 풍년이 들어 콩 한 줄기에 두되(二升)를 수확하니 일승두(一升豆)라 하였다.
15년에 백두산(白頭山) 꼭대기에 초목이 다 말라 백두(白頭)와 같았다. (滿洲散史)
27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18세 기자시다.
제 18 세 다두(多斗) ―43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나이(奈伊)를 태자로 삼고, 마속량(馬粟糧)을 수상으로 삼고, 개서문(蓋西文)을 상장으로 삼았다.
4년에 장일병(張一炳)이 상서(上書)를 올리니 “임금이 천하를 다스리는 도(道)는 하늘의 형상을 본 받을 따름입니다. 하늘의 도(道)는 사시(四時)가 운행하여 만물이 생장하는데, 봄과 여름에는 나서 자라며 가을과 겨울에는 잎이 떨어져 죽으니, 그 기(氣)를 열고 닫으며 조화(造化)를 베풉니다.
옛 성제명왕(聖帝明王)은 이 도를 본받아, 혜택(惠澤)과 어진 정치는 봄과 여름을 본받고 법령과 형별은 가을과 겨울을 본받아 법을 삼았습니다. 나는 죽는 것과 당기고 늦추는 것을 굳게 확신하고 정확하게 판단하여, 이것으로 교화(敎化)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만일 죽을 죄인도 살려주시는 제왕의 덕으로 인간을 어루만져 주시지 않고 살기띤 징계로써 다스린다면, 이것은 하늘에 사시(四時)가 없는 것과 같은 것이므로 어찌 조화(造化)가 이를 이루겠습니까.
한 나라를 몸에 비유하면, 임금은 머리이며 신하는 손과 발입니다. 평상시에 무사하여 마음과 정신이 한가로우면 손과 발의 운동이 게을러지나 갑자기 환란을 만나면 손과 발의 동작이 민첩해집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천하 만사에 더러운 일은 안일한데서 생기고, 맑고 깨끗한 것은 나쁜 폐단을 뜯어고치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위로는 천시(天時)를 본받으며 아래로는 사람의 일을 살피고, 안일함을 조심하며 그 쇄신(刷新)을 생각하시어 앞 뒤와 급하고 급하지 않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급하고 급하지 않는 것을 모르면 충성스러운 말과 좋은 의견도 정치에 도움을 주지 못하며, 앞과 뒤가 어긋나면 경론(經論)과 모fir(謀略)도 효력을 얻지 못하게 되니, 조정에서 해야 할 급선무는 먼저 기강을 세워야 모든 일을 바르게 돌이킬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왕도(王道)와 패도(覇道)는 크고 작은 차이를 말하는 것인데, 왕도는 인(仁)으로써 근본을 삼기 때문에 능히 천하를 다스리고도 남음이 있고, 패도는 이익을 으뜸으로 삼으니 나라를 다스려도 다스려지지 않습니다. 왕도는 일어나는 것이 더디기 때문에 오래 다스려 나갈 수 있으나 패도는 그 일어나는 것이 빨라 급하게 패합니다. 왕도의 마지막은 유약(柔弱)하고 패도의 마지막은 강폭(强暴)합니다.
대개 하늘의 운수(運數)가 옛날과 지금이 달라, 국가의 치안(治安)도 또한 옛날과 지금이 같지 않습니다. 왕도는 경(經)과 법(法)으로 하고 패도는 권모술수(權謀術數)에서 생겨났으나, 권무술수도 지나치지 않고 알맞으면 성인(聖人)의 도(道이니, 왕도와 패도를 함께 쓰는 것이 후세의 법이 될 것입니다. 문(文)과 무(武)를 아울러 쓰는 것은 오래도록 이어갈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요즘에 이르러 살펴보면 세상 형편이 많이 달라진 것은 알지 못하고, 입으로는 패도를 물리치고 왕도를 행한다 하여, 성세(聖世)의 다스림과 가까운 듯 선전하나, 그 치적(治積)을 보면 실효는 하나도 없고 경거망동(輕擧妄動)에 불과합니다.
조정에서는 관리의 계급만 논하며 인재의 어질고 어리석음을 묻지 않으며, 녹봉(祿俸)이 많고 적음으로 득실을 계산하며, 문사(文士)들은 조정을 비웃으며, 먹을 것과 지위만 공론하다가 요행히 관직을 얻으며 공(公)을 빙자하여 사(私)를 행합니다. 과격한자는 무례(無禮)하고 무법(無法)하여 자포자기하고 스스로 잘난체하여 흉한 짓을 마음대로 하며, 풍속을 말하자면 윤리가 무너지고 부끄러움을 모르니, 풍습이 사치스럽고 주색잡기(酒色雜技)가 민간에 널리 성행하여 원대한 뜻이 없습니다.
무인(武人)은 군국주의로서 군비는 강화하나 만국의 협동과 화합은 말과 글뿐입니다. 경제는 창고에 저장된 쌀이 없고 백성들이 쌀을 살 돈이 없어 사리(私利)만 음모하니, 어찌 국운의 보전을 바라겠습니까.
아! 모든 백성의 즐겁고 괴고움이 다 전하께 달려 있는데 어찌 한가로이 느긋하게만 계시고 용단을 내리지 않습니가.
옛글에 나라를 다스리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기강이니, 기율을 세우며 기강을 잡아야 법령이 먹혀 들며 교화가 이루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기강의 필요를 말하는 것입니다. 조정은 국가의 기강이며 임금은 모든 백성의 기강입니다. 전하께서 천하를 다스리고자 하시면 임금의 기강을 잊지 마시옵소서.
장군된 자는 백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적진에 나아가 적과 싸울때에 반드시 상과 벌을 베풀고 병권(兵權)의 주인이 되어 삼군(三軍)을 장악한 후에 크게 공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전하께서는 억만의 백성을 거느리시고 천하를 다스려 태평하게 하고자 하시는 이 때에, 살리고 죽이는 것과 주고 빼앗는 권세에 밝지 못하시면, 일의 중요한 기틀이 마음과 더불어 서로 어긋나며 경륜과 뜻은 더불어 설 틀려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기강을 어떻게 바로 잡으며 풍속을 어떻게 선하게 만들며, 찌든 폐단을 어떻게 그치게 하며 많은 신하들을 어떻게 감독하겠습니까.
우리 대대로 이어 내려온 단제(檀帝)는 하늘에 순응하시며 사람을 유순하게 대하시어, 개국 이래로 왕위가 계승되어 전하에 이르도록 나라가 태평함이 오래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관료들이 전례를 따르니 자연이 마음이 안일해지고 사상이 해이해진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는 이치입니다.
원하옵기는, 전하께서는 깊은 못에 계시는 것처럼 하시며, 얇은 얼음을 밟는 듯 하시어 옛 성제의 넓은 은혜와 크신 덕을 이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깊이 생각하옵소서.“하니, 임금께서 그 말을 받아들이시고 국정을 쇄신하시니 4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려 강병(强兵)을 이루시어 중흥(中興)시대가 되었다.
43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19세 기자시다.
제 19 세 나이(奈伊) ―20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차음(次音)을 태자로 삼았다. 봄에 일식(日蝕)이 있었다.
3년 봄에 나이 많은 분들을 찾아가서 80세 이상은 쌀과 고기를, 90세 이상은 비단을 내리시었다. 그 때에 140살의 노인이 있었는데 피부의 윤택이 어린아이와 같았다.
10년에 후단조 사절이 오니, 모국(母國)의 예로 대우하였다.
16년에 주(周) 나라 사람 30명이 입경하여 경치를 구경하였다.
20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20세 기자시다.
제 20 세 차음(次音) ―10년간 재위―
첫해에 맏아들 불리(不理)를 태자로 삼고, 위문숙(魏文叔)을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삼았다.
2년 여름에 안남(安南) 나라 사람 여리득9黎利得)이 표류하여 남해안에 이르렀다. (金國征宋記)
5년에 동쪽 수풀 가운데서 밤에 흰 학이 울어 왕비께서 가보니 금궤(金櫃)가 있었다. 열어보니 한 동자(童子)가 있었는데 이름은 호박이었다. 왕비는 이를 데려다 길렀다.
10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21세 기자시다.
제 21 세 불리(不理) ―36년간 재위―
첫해에 맏아들 여을(余乙)을 태자로 삼았다.
2년에 도기9陶器)와 석기(石器)가 제조되니, 매우 아름다웠다.
8년에 상유후(尙留侯)가 반란을 일으키니, 물리쳐 평정하였다.
16년에 동해에서 인어(人魚)를 잡았다. 그 모양이 사람과 흡사하고, 말은 통하지 않았으나 사람을 보고 눈물을 흘리므로 명하여 물에 놓아주었다.
28년에 신독국(身毒國)의 사람이 야광주(夜光珠)를 가지고 와서 바쳤다.
36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22세 기자시다.
제 22 세 여을(余乙) ―29년간 재위―
첫해에 맏아들 엄루(嚴婁)를 태자로 삼았다.
2년에 서북쪽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사람마다 많이 캤다. 이 소문이 나라 밖에까지 알려져, 동방에 황금국(黃金國)이 있어 소의 머리에까지 금으로 장식한다 하였다.
5년에 강동(江東)에 석토(石土)공장을 세웠다. 석토를 모래와 물을 혼합하여 말리면 돌과 같이 단단해졌다.
19년에 청류벽(淸流壁) 위에 읍강루(挹江樓)를 세우고, 성안에는 버드나무를 많이 심었다.
29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23세 기자시다.
제 23 세 엄루(嚴婁) ―28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감위(甘尉)를 태자로 삼았다.
3년에 평양성(平壤城)을 개축하고, 1세 기자묘(一世奇子墓)를 고쳐 쌓았다.
5년에 몽고 사절이 입경하니, 후하게 대접하였다.
8년에 대학을 세워 백성을 정법(政法)으로 가르쳤다.
11년에 후단조 사절이 입경하니, 특별히 사신을 보내어 사례하였다.
28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24세 기자시다.
제 24 세 감위(甘尉) ―6년간 재위―
첫해에 맏아들 술리(述理)를 태자로 삼고, 해문관(海文官)을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삼고, 서내벌(徐乃伐)을 수상(首相)으로 삼고, 김력(金力)을 상장(上將)으로 삼았다.
2년에 을달(乙達)이 반란을 일으키니, 김력(金力)을 보내어 물리쳐 평정하였다.
6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25세 기자시다.
제 25 세 술리(述理) ―10년간 재위―
첫해에 맏아들 아갑(阿甲)을 태자로 삼았다. 임금께서 북쪽에 행차하시어 달안군(達安郡)에 이르니, 말을 파는 사람(賣言者) 하나가 있었다. 임금께서 불러 말 파는데 얼마냐고 물으시니 천금(千金)이라 하였다. 임금께서 한마디 사기를 원하셨다. 말 파는 자가 말하기를 “모든 일을 시작할 때에 마땅히 장래의 일을 생각하라.”하니, 임금께서 왕궁에 돌아가시어 이 말을 좌우명으로 삼고 모든 그릇에 이 말을 새겨넣었다가 후일에 죽음을 면하고, 그 말로써 종신토록 잠언(箴言)[주:箴言-가르쳐서 훈계가 되는 말]을 삼았다.
<고사(古史)에―임금의 숙부가 임금을 암살하고자 하여 독약을 찻잔에 넣어 시자(侍子)를 시켜 임금에게 드리라 했다. 시자가 찻잔의 글을 보고 마음이 두렵고 송구스러워 손을 떼니, 임금께서 보시고 이유를 물으시기에 시자가 사실대로 고백했다. 임금께서 시자의 죄를 특별히 용서하기고 숙부를 멀리 보냈다.>
10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26세 기자시다.
제 26 세 아갑(阿甲) ―15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고태(固台)를 태자로 삼고, 원한삼(元漢三)을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삼았다.
2년에 임금께서 제사(祭祀)와 신이 네리는 이치를 원한삼(元漢三)에게 물으시니, 대답하기를 “사람이 죽으면 혼(魂)은 올라가고 넋(魄)은 내려오며, 정기(精氣)는 비록 흩어지나 곧 소멸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의 정성과 공경이 지극하면 돌아가신 분을 오게 합니다. 옛 사람의 말에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였는데, 제사 지내는 사람의 정성이 없으면 하지 말아라 하는 것이니, 만일 정성이 있으면 그 신(神)이 마음의 줄을 따라 내려오게 됩니다. 이미 흩어진 혼백(魂魄)은 진실로 듣고 보며 생각할 수 없으나, 제사하는 사람이 그의 있던 곳과 이야기와 음성과 그가 즐겨하던 것을 묵념하여 영(靈)과 영(靈)이 감응하여 친히 보이는 듯 할 때에 신령(신령)이 반드시 감동하여 내려오게 됩니다.”하였다.
임금께서 “경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도다. 대개 신(神)은 음양(陰陽)과 이기(理氣)를 초월한 한 신(神)이 자유로이 혼자 있는 것이니, 어찌 사람의 마음을 의뢰(依賴)한 후에야 나타나겠는가, 우주 안에 참 신(神)이 있고, 사람 몸에 영혼이 있으니 산다(生)는 것은 영혼의 빛이니라.
생명이 우주 안에 흘러 항상 물체를 따라 생리작용이 밀접한 곳에 드러나 보일 따름이니, 참 신이나 영혼은 영영 없어지지 않는 것인데 언제 흩어져 없어지겠는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것은 사람의 신령스러운 마음으로써 신이 내리는 기를(機)를 삼아, 신과 영이 밀접할 때에 정성으로 원하면 혹 감응하는 도리(道理)가 있으리라.“하시었다.
13년에 후단제 사절 고유선(高維先)이 단군의 화상(畵像)과 단군실기(檀君實記)를 가지고 입경하였다. (全國 黃子雲의 探古史에도 있다.)
15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27세 기자시다.
제 27 세 고태(固台) ―14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소태(蘇台)를 태자로 삼았다.
3년에 주(周) 나라 사람 옥사성(玉謝成)이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을 가지고 왔다.
6년에 주(周) 나라 유생(儒生) 20여명이 평야에 와서 학문(學文)과 팔교(八敎)[주:八敎-1 .살인하지 말며 2. 사람을 상하게 하면 곡식으로 갚고 3. 강도한 자는 그 집의 노비가 되며 4. 절도한 자는 자기만 노비가 되며 5. 남자는 밖에 나가 농사짓고 6. 여자는 안에서 베를 짜고 7. 혼인은 한 남자가 부인 한명만 거느리고 8. 명분을 서로 침해하지 말라. 이는 제1세 기자(奇子) 서여(西余) 임금 5년에 백성들에게 내린 8가지 바른 도리이다.]를 견학하였다.
8년에 대학(大學)을 세워 예(禮)와 악(樂)으로써 백성을 교화(敎化)하였다.
14년에 임금께서 세상을 뜨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28세 기자시다.
제 28 세 소태(蘇台) ―18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마간(馬干)을 태자로 삼았다.
3년에 주(周) 나라 감나(甘奈)가 입국하여 정전법(井田法)을 견학하고 돌아갔다. 이때부터 두 나라의 정전제도(井田制度)가 서로 비슷하였다.
5년에 입법․사법․행정을 시행하니,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평안하였다.
18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29세 기자시다.
제 29 세 마간(馬干) ―11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천한(天韓)을 태자로 삼고, 조정국(趙正國)을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삼고, 오선용(吳先龍)을 수상(首相)으로 삼고, 기문한(奇文韓)을 상장(上將)으로 삼았다.
4년에 임금께서 실천도덕(實踐道德)을 조정국(趙正國)에게 물으시니, 대답하기를 “도덕이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속에 제일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경험을 초월하여 순수한 이성(理性)에 존재하는 것이니, 사람으로는 전연 알지 못하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실천도덕(實踐道德)에 이르러서는 확실한 실재(實在)로서 세계에 실재하여 도덕세계(道德世界)를 육성하기 때문에, 도덕의 률(律)은 가장 높은 명령이며, 실천윤리(實踐倫理)는 명령하는 법칙입니다. 때문에 도덕률(道德律)은 다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대개 자연률(自然律)은 필연(必然)의 형식으로 표현하고, 도덕률은 당위(當爲)의 형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니, 도덕률이라는 것은 그 의지(意志)가 항상 자기의 자율법칙(自律法則)과 함께 생기는 것입니다. 이 자율법칙은 목적과 결과가 어떻든 당연히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덕은 그 인과관념(因果觀念)을 초월하여 실체(實體)를 따라서 온 것이며, 선(善)이라는 것은 도덕률에 의하여 결정한 것이니, 자신(自身)의 유일한 목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실행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며, 가장 높은 명령에 의하여 이기적(利己的)인 사욕(私慾)을 금지하여야 합니다.
미(美)라는 것은, 모든 욕구를 초얼하여 우리 인간의 무관심한 쾌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입니다.
진(眞)이라는 것은, 안도 없고 바깥도 없으며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것입니다. 인생이 이 진(眞)과 선(善)과 미(美)를 구비하여야 덕(德)이 몸에 윤택하여지며, 능히 도덕을 행한다 할 것입니다.“하니, 임금께서 ”옳다“하셨다. (突厥史 참고)
6년 여름에 큰 바람이 일어나 농작물이 큰 피해를 입어 창고의 곡식을 풀어 백성을 구제하였다.
11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30세 기자시다.
제 30 세 천한(天韓) ―10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노물(老勿)을 태자로 삼았다.
8년에 임금께서 동쪽 군현(郡縣)에 행차하시다가, 산수(山水)의 경치가 아름답고 맑아 칭찬하시고 기뻐하셨다.
10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31세 기자시다.
제 31 세 노물(老勿) ―15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도을(道乙)을 태자로 삼았다.
2년에 주(周) 나라 사람 노진선(魯進善)이 춘추(春秋)와 예기(禮記)를 임금께 바쳤다.
8년에 제(齊) 나라사람 공안명(孔安明)이 공자교(孔子敎)를 들여와 전하고, 조(趙) 나라 사람 인명선(茵明善)은 황노서(黃老書)를 들여와 전하였다.
15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32세 기자시다.
제 32 세 도을(道乙) ―15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술휴(述休)를 태자로 삼았다. 월9越) 나라 사람이 갖가지 색깔의 비단을 가지고 와서 황금과 바꿔갔다.
2년에 노달국(老達國) 사절이 입조하였다. (高句麗留記)
4년에 인구(人口)를 조사하니 그 수가 4천 3백여만명이나 되었다.
10년에 아우 도경(道景)을 안봉후(安奉侯)로 삼았다.
15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33세 기자시다.
제 33 세 술휴(述休) ―34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사량(沙良)을 태자로 삼았다.
5년에 성지(城址)를 순찰하니, 동쪽은 문수봉(文秀峰)․남쪽은 파장(坡長)․서쪽은 서제산(西祭山)․북쪽은 대성산(大聖山)이었다.
25년에 천단(天壇)을 남문 밖에 쌓고, 하느님과 국조(國祖)께 제사하였다.
34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34세 기자시다.
제 34 세 사량(沙良) ―18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지한(地韓)을 태자로 삼았다. 위9魏) 사람 연우술(延于述)이 음양서(陰陽書)를 가지고 입경하였다.
5년에 서정국(徐定國)을 수상으로 삼고 곽상보(郭相輔)를 상장으로 삼았다.
18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35세 기자시다.
제 35 세 지한(地韓) ―15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인한(人韓)을 태자로 삼았다.
2년에 백숭희(白崇喜)가 아뢰기를 “유자(儒者)는 진취적(進取的)이 되지 못하니, 더불어 옛 그대로를 지켜나가야 할 것이기에, 전하께서는 유생을 부르시어 예법(禮法)과 음악을 일으키시기 바랍니다.”하니, 임금께서 그대로 따르셨다.
8년에 임금께서 글씨 쓰기를 좋아하시니, 5년동안에 훌륭한 글씨체를 이루시어, 이것을 용호체(龍虎體)라 하였다.
15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36세 기자시다.
제 36 세 인한(人韓) ―38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서위(西尉)를 태자로 삼았다. 그 해 가을해 정부기관을 개편하여 입법․사법․행정․고시(考試)와 감찰(監察)의 오원제(五院制)를 조직하고, 최고정치 자문처를 개조하였다.
5년에 법정대학(法政大學)을 설립하여 백성에게 법정(法政)을 가르쳤다.
6년에 의학(醫學)과 농학교(農學校)를 증설하였다.
15년에 북부여(北扶餘) 사절이 입경하여 정부기관의 개편을 보고 부러운 마음으로 우러러 사모하며 귀국하여 그 사실을 임금께 아뢰니, 임금께서 이르시기를 “나도 정부기관을 개조하고자하여 깊이 생각한지 오래 되었는데, 오늘 돌아온 사신의 말을 들으니 바로 나의 생각과 같다.”하시고, 다시 기자조선에 사절을 보내어, 개조한 정부기관을 모범으로 삼고자 기록하여 가지고 귀국하였다.
26년에 주(周) 나라가 쇠약해져서 봉건제후(封建諸侯)가 된 자제(子弟)들이 서로 원수같이 전쟁을 하니, 모든 백성들이 병역(兵役)에 눌려서 피해 들어오는 사람이 많았다.
35년에 일식(日蝕)이 있었다.
38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37세 기자시다.
제 37 세 서위(西尉) ―25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가색(可索)을 태자로 삼고, 심무경(沈無競)을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삼고, 황성(黃成)을 수상으로 삼고, 조선(趙先)을 상장으로 삼았으며, 염인상(廉仁相)을 좌보(左輔)로 삼고, 이락(李洛)을 우보(右輔)로 삼았다.
3년에 가락국(駕洛國) 제후가 반란을 일으키니, 조선(趙先)을 보내어 물리쳐 평정하였다.
5년에 북부여(北扶餘) 사절이 들어오니, 사신을 보내어 사례하였다.
10년에 법령을 개정하였다.
16년에 지방자치제도(地方自治制度)를 실시하였다.
18년에 김유국(金有國)이 동의대감(東醫大鑑)을 편찬하였다.
23년에 강자문(姜子文)이 아뢰기를 “본래 사람의 마음은 선한데 마음이 악한 것은, 아득한 옛날부터 어리석고 어두운 종자의 뿌리가 깊이 박힌지 오래되어 깊은 곳에까지 절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생명을 받을 때에는 숨어 있는 악한 뿌리에 잠복하였다가, 세상을 왕래하게 되면서 사람의 악한 행위에 물들게 되며, 버릇으로 굳어진 사회적 습관과 서로 어울리므로 나날이 거듭되어 점점 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비록 선한 뿌리가 있다해도, 항상 악한 뿌리가 이기게 되므로 커나갈 수가 없으니, 도덕을 가까이 하고자 하는자는 옛 습관을 단호히 잘라버리는 것을 으뜸으로 삼아야 합니다.”하였다.
25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38세 기자시다.
제 38 세 가색(可索) ―58년간 재위―
첫해에 맏아들 산한(山韓)을 태자로 삼고, 아우 가진(可眞)을 안평후(安平侯)로 삼았다.
2년에 한윤국(韓允國)이 도덕요람(道德要覽) 32권을 지어 임금께 바치며 아뢰기를 “복(福)은 맑고 검서한데서 생기고, 덕(德)은 검소하고 낮추는데서 생기고, 도(道)는 평안하고 고요함에서 생기고, 명(命)은 온화하고 맑은데서 생기고, 근심(憂)은 많은 욕심에서 생기고, 허물(過)은 경솔하고 교만한데서 생기고, 화(禍)는 몹시 가난한(多貧)데서 생기고, 죄(罪)는 어질지 못한(不仁)데에서 생기니, 이것을 알고 행하는 자는 실천도덕자(實踐道德者)가 될 것입니다.”하니, 임금께서 "옳다“하셨다.
3년 봄에 방사(方士) 노식(盧植)이 단서(丹書=術書) 40종류를 바치며 아뢰기를 “복기(伏氣)․태식(胎息)․잠신(潛神)․유술(柔術)․기합술(氣合術)․연단(鍊丹)․복사(辟邪) 등이 다 호신술(護身術)입니다.”하니, 임금께서 “이것은 제왕의 할 일이 아니다. 일시적으로 위급을 면하기 위한 술(術)이니라.”하시고, 장군부(將軍府)에 보내어 참고하여 쓰라 하셨다.
6년 이때에 철학사상(哲學思想)이 대두하여 우주의 진리를 각자 의식으로써 해석하였다. 풍론사(風論師)․화론사(火論師)․공론사(空論師)․유신론(有神論)․무신론(無神論)․유심론(惟心論)․유물론(惟物論) 등 학설이 각기 나와 세상 사람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였다.
14년에 북부여(北扶餘) 사절이 입경하였다.
16년에 연(燕) 나라에서 망명한 서문중(徐文仲)이 입국하여 지방의 낮은 관리가 되어 영해(寧海)에 살았다. 이때 연(燕) 나라로부터 와서 사는 사람이 많았다.
24년에 위(衛) 사람 이세성(李世成)이 칠서비지(七書備旨)를 가지고 입경하였다.
28년에 초(楚) 사람 오광(吳廣)이 제자서(諸子書)를 가지고 입국하였다.
36년에 공신(功臣)인 색정(索靖)을 정평후(定平侯)로 삼았다.
40년에 노을문(老乙文)이 상서를 올려 아뢰기를 “천하대세의 가장 크고 웅장하고 격렬한 것은 사리(事理)가 그렇지 않을 수 없는데서 나온 것입니다. 혹 나라가 중화(中華)와 대립하여 수 천년 동안 우호국으로 지내온 것은, 서로의 문화수준이 같기 때문입니다. 주(周) 나라가 통일한 후, 그 나라의 예악법도(禮樂法度)의 제도와 문물이 훌륭히 구비되어 점점 우리 나라를 초월한 점이 있으므로, 천하백성들의 마음이 중화(中華)를 희망하여 중화의 전성시대가 우리 나라에 두려운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周) 나라 무왕(武王)이 제후로 봉한 자제(子弟)들이 매우 많았는데, 대(代)를 이을 자가 탐탁치않아 서로 공격하기를 원수같이 하고, 제후가 왕호(王號)를 함부로 일컬으니, 그 가운데 패권을 잡은 자는 진(晋)․초(楚)․연(燕)․제(齊)․한(韓)․위(魏)․조(趙)의 일곱 영웅들입니다. 이들은 날마다 전쟁만 일삼으니, 편할 날이 없어 전국시대(戰國時代)가 되었습니다. 그 반면에 주의(主義)와 사상(思想)이 극도로 팽창하여 학자마다 제각기 날뛰니, 그 중에 으뜸으로 꼽힐만한자는 공학(孔學)․노장학(老莊學)․양묵학(楊墨學)등입니다.
그러나 그 작품에는 간략하고 정직하다가 끝에 가서는 번거럽고 어려워 궤변학(詭辯學)․명리학파(名利學派)가 많이 생겨 이단종횡공리(異端縱橫功利)의 설(說이 성행하여 백성은 진정한 애국심이 없어지고, 국가는 강하고 견고한 기초가 이루어지지 못하여 왕풍(王風)이 땅을 다 쓸어버리고, 살기(殺氣)가 하늘을 찌를듯하여 배타사상(排他思想)이 열렬하여, 이것이 민족사상으로 바뀌어 다른 종족은 배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평안한 세상이 오래 계속되어 오니, 민심이 해이해져서, 자기 나라의 정신을 잊어버리고, 맹목적으로 중화를 추아하는 습관이 심하니 안타깝습니다.
사람은 보편적으로 옛 것은 누르고 새것을 좋아하며, 근본은 버리고 끝을 취하는 일을 능사로 여겨 정신까지 하나가 되지 못하니, 신은 이것이 근심이 되고 두려울 뿐입니다.
국가의 큰 환란(大患)은 백성의 애국심이 죽은 것 이상 더 큰 것이 없으며, 애국심이 없는 민족은 죽어서 재된 나무와 같아서 활기가 없고 활기가 없는 민족은 국가를 보전할 수 없으니, 어찌 병력이 강한 다른 민족과 경쟁할 수 있셌습니까.
중화민족은 우리나라에 많이 들어 올지라도 교육과 산업을 진흥하면 부강하게 될 것은 능히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 백성들에게 민족사상을 일깨워 실행시키지 않으면 한족(漢族)이 피난(避亂)하여 울뿐 아니라, 동화(同化)될 우려가 없지 않습니다.
우리 백성들에게 민족사상을 갖게 하면 필연 민족전쟁이 일어날 날이 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민족으로서 한족(漢族)을 상대로 만반의 준비를 하여야 하겠으며, 한족과 대립한 후에야 우리 민족의 지위가 명랑해질 것이니, 지금은 민족사상을 환기(喚起)시켜야 할 때입니다. 지연되면 자연이 뒤떨어질 염려가 있으니 어찌 편안히 앉아 있겠습니까.
옛 단조(檀祖)께서 구이(九夷)의 추대를 받아 보위에 오르신 후 구족(九族)이 한 가족처럼 되어, 사람들은 오래살고 꽃냄새가 풍기는 속에서 태평가를 부르며 지내더니, 후손들이 탐탁치 않아 각기 나라의 분봉(分封)을 받아가지고 흩어져, 각각 다른 족속과 같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통일하는 일에 깊고 세밀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중화(中華)는 이와 반대로 통일의 업적이 잘 되어, 민족사상이 통일되고 유교가 어김없이 지켜졌으니, 우리나라에 비하면 미족정신의 통일은 뚜렷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몽고 돌궐(蒙古 突厥)과 흉노(匈奴)와 서이(西夷)는 분산되었다 할지라도, 우리 동방의 부여족(扶餘族)은 사상이 하나가 되었으니, 이 민족만이라도 화합하여 한족(漢族)을 대항하게 하여도, 능히 우리나라의 독립자주정신(獨立自主精神)을 보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하니, 임금께서 ”옳다“하시고 민족사상을 백성에게 일으키게하니, 이 정신이 불멸(不滅)하여 우리 부여문명(扶餘文明)을 일으켰다.
42년에 임금께서 구월산(九月山)에 오르시어 서해(西海)의 해지는 광경을 보시고 시를 지으셨다.
늙은 소나무 차라리 죽어도 가을 빛이 없는데
떨어지는 노을은 비록 쇠잔해도 햇빛보다 나으네.
(老松寧死無秋色, 落照雖殘勝月光)
58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39세 기자시다.
제 39 세 산한(山韓) ―18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수한(水韓)을 태자로 삼고, 신전신(申專信)을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삼고, 홍농(洪農)을 수상으로 삼았으며, 한운(韓雲)을 상장(上將)으로 삼고, 연(燕)나라 사람 장선세(張先世)를 좌보익(左輔翼)으로 삼았다. (張先世는 입국하여 오래된 후에 우리 백성이 되었다.)
4년 5월에 서북(西北)으로부터 큰바람이 일어나 모래와 돌을 날리며 진흙비가 내렸는데, 계란같은 우박이 쏟아져서 곡식이 모두 먹을 수 없게 되었고, 소와 말의 피해도 많았다.
8년에 서관(西關)에 도적이 벌떼같이 일어나, 군사를 보내어 토벌하였다.
10년에 진(秦)에서 망명한 황보노(皇甫老)가 입국하였다.
18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40세 기자시다.
제 40 세 수한(水韓) ―50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기부(奇否)를 태자로 삼았다.
2년에 연(燕)에서 망명한 위민(衛民)이 장선세(張先世)의 주선으로 임금을 뵈었다.
5년에 중화(中華)의 진9秦) 나라는 부강하고, 산동육국(山東六國)은 전쟁이 그치지 않으니, 피난하여 입국하는 자 많았다.
49년에 월남(越南) 사람이 동해빈(東海濱)에 도착하였다.
50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41세 기자시다.
제 41 세 기부(奇否) ―46년간 재위―
첫 해에 맏아들 마한(馬韓)을 태자로 삼았다.
2년에 제(齊) 사람 원술(元術)이 입조하였는데, 원술은 묵덕파(墨德派)와 같은 파이며, 염애주의(兼愛主義)로 천하를 횡행하였다.
5년에 조(趙) 사람 황노명(黃老明)이 입경하니, 황노명은 양주파(楊朱派)와 한패인데, 머리칼 하나를 뽑으면 천하가 이롭게된다 해도 안하는 무리이다.
25년에 진채지(陳蔡地)의 사람들이 줄을 이어 입국하였다.
46년에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제42세 기자시다.
제 42 세 마한(馬韓) ―25년간 재위―
첫 해에 아들 기준(奇準)을 태자로 삼았다. 진(秦)에서 망명한 한덕(閑德)이 입국하였다.
21년에 장서운(張瑞雲)이 유묵선(儒墨仙)의 삼합도(三合道)를 주장하다가 형벌을 받았다.
25년에 중화(中華)의 진승(陳勝)과 항량(項梁)이 병사를 일으켜 천하에 큰 난을 일으키니, 연․제․조(燕․齊․趙) 백성들이 피난하여 입국하였다. 임금께서 서쪽 모퉁이 한쪽을 주어 살게하니, 한(漢)이 노관(盧)을 왕으로 삼았으나, 노관이 한을 배반하고 흉노(凶奴)로 도망하였다.
연(燕)사람 위만(衛滿=원래 조선인으로 연 나라에 망명하여 들어갔기 때문에 연이라고 한다는 전설이 있다.)도 망명객으로 호복(胡服)을 입고 동쪽으로 건너와 조선에 입국하여, 태자(太子) 기준(奇準)에게 항복하고 임금께 절하며 있을 곳을 구하였다. 임금께서 허락하시어 박사(博士)로 삼고, 서족 변방 백리땅을 주어 살게 하였다.
위만은 기자조(奇子朝)가 허약한 것을 엿보고, 사람을 보내어 급하게 아외기를 “한(漢)나라 병사들이 갑자기 들어오니, 바라옵기는 임금님을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하고, 연나라 망명자 수천명을 거느리고 와서 습격하였다.
임금께서 불의의 변을 막을 수 없어서, 궁인(宮人)과 좌우 신하를 거느리고 배를 타고 피신하여 목지국(目支國=마지)[주:目支國-삼한시대의 마한에 있던 작은 나라. 지금의 직산에 해당된다.] 금마군(金馬郡)에 머물러 나라 이름을 마한(馬韓)이라 하였다.
― 제 1 세 기자부터 42 세 기자까지 역년(歷年), 1,052년이었다 ―
※ 역대 임금의 재위기간을 정확히 계산해보면 위 1052년은 1097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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