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명 그 밝음을 위하여 (5)
우리민족의 정신 수련법
* 의 의 *
정신수련법은 글자 그대로 정신 곧 마음을 닦는 일체의 방법들을 뜻한다. 정신을 하나로 집중시켜서 비상한 힘과 참다운 지혜를 얻으며 후천에 가려진 선천의 본연지성을 회복하여 밝히는 이치는 동일하지만 그 도계를 얻는 데에는 여러 길들이 있다. 이는 아득한 고대로부터 유구한 세월을 두고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습성과 환경에 따라 자신에 맞는 길을 선택하여 정신수련을 해 왔던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 길을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는데, 길을 떠나는데 필요한 행장의 유무에 따라, 또는 그 길이 지름길이냐 돌아가는 길이냐에 따라 '우도(자동수련법)'와 '좌도(피동수련법)' 및 '피동 반 자동 반'의 수련법인 '좌우양도' 등이 있다.
우도 수련법은 수련의 길을 떠나는 데 있어 아무런 준비물도 필요치 않은, 자신의 성력만으로 헤쳐나가 정상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 우리 전래의 조식법, 원상법 등이 이에 속한다. 즉 자신의 신념과 성력만으로 정신을 수련하는 방법인데, 호흡법 곧 조식법을 근본으로 한다.
이 조식법은 모든 정신수련법 가운데 가장 행하기 쉽고, 이치가 간단하여 예로부터 수도인의 지름길로 통해 왔다. 이 법을 매일 조금씩만 행해도 신체의 기혈을 조화시키고 심신을 건강하게 함으로써 수명의 연장을 가져 올 수 있고, 적극적으로 수련하면 기억력의 획기적인 증진은 물론 인간 본연의 자리, 곧 도의 세계로 귀일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역추공부로서의 호흡 수련이 지향하는 목표이다. 인간의 생명줄인 호흡에 온갖 심력을 집중하여, 이 생명 이전의 근본 자리를 거슬러 올라가 다시금 발견하고 그 참 생명의 뿌리로 되돌아가는 과정이 바로 득도요, 명명이요, 견성이요, 솔성이며, 귀근복명의 도이며, 일무의 태극으로 돌아감이요, '적연부동하여 감이수통천하지고'하며 정일집중하는 심법의 요체인 것이다.
가장 가깝고도 쉬운 곳에 가장 깊고도 높은 정신세계로 진입할 수 있는 대승적 지름길이 있으니, 바로 조식법이다. 이 조식법을 토대로 하여 우리 자신의 본래면목, 원초의 형상을 탐구하는 관법으로서의 '원상법'이 펼쳐진다. 이 책에서는 가장 대표적인 조식법의 원전으로서 '북창 정염' 선생의 "용호비결"을 완역하여 전부 실었으며, 또한 원상수련법에 관한 봉우 선생의 모든 상세한 자료들을 수집 발굴하여 주해하였다.
좌도, 즉 피동수련법은 수행의 전제조건으로서 주문과 부적이라는 자신 외의 준비물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외형적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그 내용으로 들어가 보면, 수련 과정에 있어서 자동수련법과 별 차이가 없는 고차원의 정신수련법에서부터, 도깨비장난 같은 저열한 신술의 세계까지 실로 다양한 길들이 전개된다.
어떻든 주문과 부적을 정신적 매개물로 삼아 정신 집중의 영역으로 들어선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다고 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각종 둔갑술 및 환술들과 오귀법, 이보, 축지, 차력법 등이 이에 속한다.
피동수련법이란 글자 그대로 타력이나, 자기 자신 이외의 외부적인 특정 대상물, 착개체 등을 동반하여 공부하는 형태의 모든 수행 방식들을 지칭한다. 일찍이 백두산겨레의 시조이시자 정신적 스승이셨던 대황조 한배검께서 우주와 만물의 근본 자리인 도를 깨우치는 형이상학을 온겨레에게 가르치실 때, 조식법을 도에 도달하는 가장 정대한 지름길로서 제시하셨었다.
그런데 공자 시절에도 안자와 증자가 있었듯이, 동일한 조식법을 닦아도 어떤 이들은 손쉽게 터득하고 어떤 이들은 아무리 애써도 습득이 잘 안 되어 지지부진하는 현상들이 나타났다. 이러한 수도 학인들의 천차만별한 선천적 기질상의 여러 조건들을 극복하구 조식법이 잘 안 되거나, 체질적으로 그것을 감내해 낼 흥미를 못 느끼는 사람들을 위한 여러 방편문들이 제시되었으니 피동수련법이 그 중 하나인 것이다.
피동법이 다양한 사람들의 기질만큼이나 많은 여러 형태의 수련법을 제시하고, 그 중 각자 기질에 맞는 것을 선택하여 수련토록 하고, 인간세계의 온갖 일상적, 비상적 상황들에 대처할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제공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배경에 근거한다. 즉 한 사람이라도 더 도의 세계로 귀일시키려는, 성인의 인민에 대한 간절한 사랑이 이 피동문에 담겨 있는 것이다.
정신력을 한 군데로 집중시켜서 비상한 능력과 지혜를 얻는다는 것은 자동법과 동일하나, 자동수련에 비해 성취 기간이 짧고 일반적으로 힘이 덜 든다는 것이 차이점이랄 수 있다. 또한 피동공부로는 대통이 어렵다는, 즉 자동공부로 이를 수 있는 고도의 정신적 단계로 진입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피동의 세계는 인간세계의 모든 일상사들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어서 그 수많은 일상사들 만큼이나 많은 종류의 공부법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노름판에서 돈을 많이 따게 하는 자질구레한 사적 기원에서부터, 국가와 민족을 위해 쓸 체력이나 지력을 얻기 위한 대승적 희구에 이르기까지 다종 다양한 형태의 수련법들이 있다.
또한 피동의 세계는 '주문과 부적의 세계'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주문들과 부적들이 등장하여 온갖 신술들을 빚어낸다.주문이란 한마디로 귀신들과 통하는 말이며, 부적은 그들 세계와의 통신문이라 할 수 있다. 인간세계에서 언어와 문자가 온갖 의사소통을 대신하듯이, 우리와 차원이 다를 뿐, 신들의 세상에서도 그들끼리 향유하는 독특한 말과 글의 체계와 질서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이 수천 년 이상 내려온 우리 조상들의 피동세계에 대한 인식이다.
자동공부의 대요는 다리를 포개고 단정히 앉아서,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입을 다물며 온갖 세상사의 어지러움을 안으로 걷어들여, 일무의 태극으로 돌아가는 것일 뿐, 그 밖의 어떠한 수련상의 준비물도 필요치 않다. 굳이 얘기하자면, 먼저 수련자의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는 정심의 자세 정도를 요구할 따름이다.그러나 피동공부법에는 일조활연관통의 대통법이 없고, 어느 일부분에 국한적으로 통용되는 방법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수련의 자세도 자동법과는 판이하다.
즉 신의 세계, 도의 세계에 존재하는 신력과 도력을 지닌 대상들에게 그 힘을 얻게 해 달라고 자신의 온갖 정성을 동원하여 빌고 소원하는 형국인 것이다. 그 정성을 쏟아붓는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 바로 주문과 부적이다.우리 선현들은 전통적으로 이 피동의 세계를 좌도라 지칭해 왔으며, 타력에 의존하지 않고 순수한 자력으로 자신의 정신력을 함양하고 고양 발전시키는 자동수련법(우도)보다 한 단계 낮은 차의 것으로 여겨 왔다.
그러나 대도무문의 입장에서 득도에 이르는 하나의 방편 내지 길로서 제시되어 온 것은 사실이다. 즉 피동공부를 통해 득력한 사람들도 그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위를 향해 오르다 보면 결국 똑같은 정상의 세계에서 만나게 됨이 필연적 이치라는 인식이 정신계 수련 인사들에게는 상식적인 견해로 통한다.
예를 들어 불교에서 득도를 위한 세 가지 방편문을 정해 놓고, 근기에 따라 최상승법문인 상근기의 지름길로서 참선공부와 중하 근기를 위한 경학 공부와 송경염불 수행을 하는 것처럼 백두산족 정신수련법 역시 도에 접근하는 다양한 문호를 열어 놓고 수많은 학인들을 교화해 온 유구한 역사와 전통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공자는 일찍이 "중용"에서 다음과 같이 갈파했다. "혹 나면서 이를 알기도 하고, 흑 배워서 이를 알기도 하고, 혹 노력하여 알기도 하지만, 그것을 알았다는 점에 있어서는 하나니라. 혹 가만히 앉아서 이를 행하기도 하고, 혹 순조롭게 이를 행하기도 하고, 혹 애써 이를 행하기도 하지만 공을 이룩했다는 점에 있어서는 하나니라."
즉, 각 개인의 기질과 능력의 차이에 따라 여러 가지로 수련 형태가 달라질 수 있지만 결국 득도라는 하나의 목표에 이른다는 이치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좌우양도는 피동 반, 자동 반의 수련법이라 할 수 있다. 외형적으로 주문과 부적의 피동법적 요소와 순수한 자력의 정신 집중이라는 자동법의 골자가 함께 어우러져 진행되는 특색을 보이고 있다.
주로 역수리를 바탕으로한 각종 산법과 추수의 과정을 통하여 존재의 근원을 파악하고, 그것의 미래를 예측하는 수련법들을 지칭하여 이 범주에 넣었다. 산법에는 사시산을 비롯하여 초정산, 순적산, 승문산, 보허문산, 신척산 등이 있는데, 사시산의 경우 그 산법의 시조인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고대 은상의 문태사를 가리킨다- 의 명자를 붉은 주사로 써넣은 둥근 술정패를 단 위에 세워 놓고 분향을 해 가며 산효을 놓는다. 그 수정패의 겉은 계피로 둘러쌌다고 한다.
수를 놓는 도구는 산대라고 하는 산목을 사용하는데, 원래는 자명죽을 쓰는 것이 원칙이나 구하기 힘들어 보통 대나무를 쓴다. 보통 서너 칸 되는 큰 방에서 산법을 행하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꼬박 걸리거나 며칠씩 계속 놓는 경우도 있다. 수식 계산을 통하여 실용적인 목적에 쓰일 값을 도출해 내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정신 수련 과정의 일환으로서 행해진다.
신척산 같은 것은 소위 을척을 얻는 산법이라 전해지는데, 주문을 외는 힘 정도로는 얻을 수 없고, 대장의 재목이 될 수 있는 우도수련의 득력자라야 가능하다. 그밖에 기문둔갑법의 72둔 종류가 있고, 시해법, 신검-비홍검법이 이에 속한다-, 신궁(정신의 힘으로 활을 쏨)과 신탄(정신의 힘으로 하는 일종의 팔매질) 등이 '피동반 자동반' 수련법에 속한다.
* 연 원 *
지금으로부터 만년 전도 훨씬 넘는 옛날, 만주 장춘을 중심으로 하여 백두산족의 문명권이 태동하였다. 이때 민족은 오족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고성이신 대황조 한배검이 정치와 교화를 통섭하는 제정일치의 사회를 이루었다.이때부터 우리 겨레의 통치자 개념은 인민 가운데 가장 머리가 밝은 사람인 '성통공완자'-성인-를 추대하여 받드는 전통을 갖게 되었으며, 이 전통은 삼국시대까지 지속되었다. 이로 보면 혈연적으로 왕위를 세습하는 것은 우리의 정통적 지도자상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다.
대황조 한배검이 처음 백두산겨레를 다스릴 때, 먼저 금수와 별차이 없이 생활하던 인민들의 의식주를 향상시키는 교육에 힘을 쏟았으며, 인민의 생활수준이 안정되자 이번에는 형이상학으로서의 도를 깨우치고 체득하도록 정신수련법을 가르쳤다. 여기서 맨 처음 나온 것이 조식법으로서, 인간 생명의 근원인 호흡을 고르게 함을 가장 기본적인 골자로 삼는 방법이었고, 그 다음에 추가된 것이 지감과 금촉으로서, 안으로 사악한 감정을 멈추고, 밖으로 사사로운 접촉을 금하는 윤리와 행동규범으로서의 정신수련법이었다.
이렇듯 우리 겨레의 첫출발과 함께 비롯되어진 민족 고유의 정신수련법은 성현이 통치하는 국가사회의 전통 아래 가장 중시되어 온 사상적 근간이었다. 즉 사회적으로 입신하려는 젊은이들에게는 먼저 정신수련법을 통한 극기의 수도 과정이 반드시 요구되었으며, 정신수련은 사회의 통념으로 일반화되어 각계각층의 모든 사람들에게 자연스레 수용되었던 것이다.
삼국시대의 조의선인 국선 및 화랑도 등과 같은 용어는 이 같은 사실의 반증이다. 이러한 전통은 백두산족의 세계관과 민족주의 사상을 내포하고 있어서, 역사적으로 국세의 부침에 아랑곳하지 않고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채, 때로는 흥왕하고 때로는 쇠잔한 대로 모람모람 그 명맥을 유지하여 왔다.
대체로 삼국 정립의 시대까지는 우리의 뿌리사상인 한배검의 홍익인간 이념과 정신수련법들이 왕성하게 전해 내려왔으나, 통일신라 이후 민족이 발해와 신라로 분단된 이후로는 외세(중국)의 사상적, 물리적 간섭과 침략으로 빚어진 민족사상의 분열 및 사대주의의 극성 등으로 말미암아 대황조 이념에 토대를 둔 정신수련법들은 표면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고, 아예 밑으로 숨어들거나 외래사상-유교, 불교 도교-에 기대어 겨우 명맥을 보존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통일신라 말엽의 정신수련가이며, 학자, 정치가, 문인이었던 '고운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은 이 같은 정황 아래 있던 우리 정신수련법의 본질을 간명하게 드러내 주는 유일한 증좌이다. 즉 우리 민족 고유의 도체가 있음을 설명하면서-국유현묘지도 왈풍류-당시 중국과 인도 등 서역에서 물밀듯이 들어오던 각종 사상과 종교들의 종지를 빌려야만 하는 그 시대의 실정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하겠다.
아무튼 역사의 부침 속에서도 우리의 고유한 정신수련법들은 조선조 말엽과, 일제 식민지시대까지 그 본질을 상실하지 않았으며 수많은 수양사들의 피나는 극기 과정을 통해 전국 각지에 수양파의 계통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 계 보*
다음은 대한제국 멸망 전후의 시기에 정립되었던 각 수련파들의 계보이다.
백두산파백두산은 민족의 성산으로서 정신수련파의 조종이 되며, 가장 깊은 연원의 정신수련 역사를 지니고 있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왼쪽의 만주지역, 즉 장백산맥을 따라 좌파를, 오른쪽의 함경도 지역이 중심이 된 우파를 형성해 왔다. 고대로부터 수많은 성현, 달사, 영웅들의 배출지이며, 청태조 누르하치가 태어나서 성장, 수련한 곳도 이 백두산 바로 아래인 한생성이란 곳이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 건국초 명장 퉁두란 역시 이곳에서 출생, 수련하였다. 근세 조선 말엽, 당대의 명의이며 역학자인 '동무 이제마' 선생 역시 명의이며, 당시 한성의 북촌 재상가에 대현으로 통했던 강홍로 선생 등이 백두산파에 속한다.
지리산파지리산은 삼남 지방에서 가장 크고, 유서 깊은 명산으로서, 고대로부터 많은 정신수련사들의 중심지가 되어 왔다. 신라시대까지는 큰 공부자리로서 유명하였고 많은 성공자들을 배출하여 왔으나, 그 이후 지금까지는 거물급 성공자들이 나오지 못하고 있다. 간혹 성공자가 있어도 세상에 나오는 이들이 적다. 역사적으로 신라 말엽 최치원 선생이 이곳에서 수련한 대표적인 인물이며, 조선조의 거물급 선비요 학자였던 '남명 조식' 선생, 그 제자 '망우당 곽재우', 정기룡 장군, 손제자인 김덕령 장군 등을 꼽을 수 있다.
소백산파역사적으로 정신수련법 가운데 좌도공부의 중심지이다. 특히 조선조 말엽 전국에서 수천 명의 수련자들이 몰려들던 곳이었으며, 당시 128장사들의 배출지로 유명했다. 차력 축지법등의 성공자들이 중심을 이루었으나 우도공부 방면으로의 성공자 배출은 아주 희소하였다. 예전에는 우도 수련자들도 많이 배출해 왔다고 한다.
소백산파의 대표적 수련 인물로는 조선중기의 명재상 '동고 이준경' 선생을 들 수 있다. 근대에 들어와 일제 식민지시대 경북 대구 지방에서 실존했던 김익수씨는 당대의 역사요 술객으로서 유명하였다. 그에 대한 일화들은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 의해 강원도와 경북 소백산을 중심으로 전해져 내려 오고 있다.
태백산파소백산파와 같은 부류로서 취급하나, 성공자 배출이 상대적으로 미미하다.
속리산파옛날부터 많은 성공자를 배출한 명산이지만, 근대에 들어와서는 지지부진하다. 오히려 옆에 붙은 작은 청화산에서 꾸준히 많은 성공자가 나왔다. 피동공부는 안 되고 그나마 자동공부라야 성공이 가능한 산으로 알려져 있다. 동고 이준경 선생은 처음에 소백산에서 수련한 후, 이곳에서 끝마무리를 하였다 한다.
계룡산파계룡산은 동자미 구성의 천상이 조응하는 원혈이 있는 명산으로서 일찍이 나라의 중악자란으로 알려져 왔다. 국가적으로 중시되었을 뿐만 아니라 백제시대 이래 민중적 차원의 각종 전통신앙과 무속 및 풍수도참설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삼국시대 이래로 많은 정신수련자들을 배출해 왔으며, 조선 왕조 오백 년 이래 최고의 정신수련 고단자가 나온 곳으로서 특기할 만하다.
그가 바로 구봉 송익필 선생으로서 수련의 경지가 성인에 도달하였다고 한다. 이 분이 주로 수련하여 성도한 곳은 계룡산 내의 수정봉으로, 바로 아래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도력으로 봉안하였다는 천진보탑이 자리하고 있다. 수정봉의 수정이란 이름은 성인 성자를 상징한다. 하여 예부터 성인이 나을 자리로 전해져 왔다.
구봉 선생이 계룡산에 계실 당시, 지리산의 조식 선생이 자주 뵈러 왔으며, 제자로는 고청 서 기, 토정 이지함, 중봉 조 헌, 기허당 영규대사 등이 있었는데 모두 여기서 수련하여 득도한 것으로 유명하다.이들 가운데 조헌이 가장 말재였으며, 영규대사는 임진왜란에 대비해 차력을 전공하였다 한다. 그가 임진왜란 초기에 갑사에서 승병을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승려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여 잘 호응을 안 하는지라, 수십 미터 되는 당간지주 꼭대기에 단숨에 뛰어올라 일장 호령을 하였더니 모두들 따랐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때 영규대사가 내려오면서 당간지주의 원통 세개를 떼어내는 바람에 현재 세 개가 없어진 상태 그대로 남아 있다. 구봉 선생의 다른 제자로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박엽 장군을 들 수 있고, 율곡 이이 선생과는 평생을 교유하였다 하나, 율곡이 늘 스승처럼 모시던 사이였다.
'삼현수간'이란 책에는 송구봉, 이율곡, 성우계 세 사람이 주고받은 친필 서한들이 담겨져 있는데, 율곡이 구봉 선생께 보낸 편지에는 당시의 시국을 걱정하며, 나라의 앞날에 대한 방책을 구하는 내용들이 보인다. 이 친필 서한집은 구봉 선생께서 작고하시기 바로 전에 아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을 후일 우암 송시열 선생이 보관하다가, 다시 사계 김장생 선생 집안에서 소장해 왔으며 최근 이를 소장한 학고재 미술관에 의해 공개 전시된 바 있다.
다음은 구봉 선생과 퇴계 이 황 선생에 얽힌 일화이다.
퇴계 선생의 장례 때 생긴 일로서, 출상하는 날인데 상여가 도무지 꼼짝도 안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상여가 들리지 않으니, 반드시 고인을 만족시키지 못한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들이 미쳤지만, 정확한 이유를 알아내지 못하던 차에 퇴계 선생의 한 제자가 다른 제자들이 밖에 내다버린 송구봉 선생의 만사를 다시 주워다 세우니 비로소 상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퇴계의 제자들에 의해 내동댕이쳐졌던 만사의 내용은 이러하다. '공적과 명예는 삼대의 원로이고 도덕과 문장은 백세의 스승이로다.'
변산파전라북도의 절승지인 변산반도를 중심으로 수련을 행해 왔다. 토착 주민들보다 경상도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많이 수련하여 성공자를 계속 배출해 왔다고 한다.
삼각산파서울 근교의 명산으로서 백운대 뒤편으로 예부터 내려온 공부자리가 몇 군데 있다. 이율곡 선생이 초기에 이곳에서 수련하였다.
송악산파고려의 수도였던 경기도 개성의 명산으로서 고려 때에는 많은 성공자를 배출하였으나, 이후로 큰 인물들이 잘 나오지 않고 있다.
설악산파설악산은 예부터 많은 정신수련 학인들이 있었던 산이지만 중고단자들은 배출하지 못했고, 저단자들의 성공이 여러 번 있었다.
금강산파
산은 국토 최대의 절경이나, 역대로 수많은 수련 학인들에 비해 큰 성공자는 없었다. 망군대 쪽으로 공부자리가 좋다.
묘향산파서북지방의 명산으로서, 좌도공부의 중심지이다. 산주(산신)가 넉넉하고 인자하여 학인들을 잘 보살펴 주었기 때문에 역대로 좌도 방면의 잔 공부로 성공한 수련자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나, 대인은 안 나왔다.
오대산파산이 좋은데 비해 성공자들이 적었다. 승려들의 득도가 많았다.
구월산파구월산은 황해도의 명산으로서, 예부터 대황조 한배검의 유풍이 드센 곳이다. 우도공부 수련자의 성공이 매우 많았으며, 적잖은 좌도공부 성공자를 배출하였다.
* 삼비팔주(三飛八走) *
위와 같이 전국 각지의 명산들을 중심으로 한 정신수련계 분포 외에, 구한말 출현한 삼비팔주를 특기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삼비는 박학래, 박양래, 이홍몽 세 사람을, 팔주는 주회인, 주기악, 김경두, 윤신거, 이석렬, 이화암, 이우석, 강경도의 여덟 사람을 지칭한다.
이들의 숱한 기사와 경천 동지의 일화들은 소설 (단)에 언급되어 있거니와, 봉우 선생의 증언처럼 하늘은 어째서 이런 뛰어난 인재들을 잠시 선보이기만 하고 곧 데려가 버렸는지 모를 정도로 당시 정신계의 중진들이 모여 있었다. 이들은 각기 개인적으로 지니기엔 너무도 아까운 초인적 정신력과 체력을 습득하고 있었으나, 거의 모두가 당대의 사회적 현실과 접맥되지 못한 채, 스러져간 비운의 인물들이란 공통점을 가진다.
삼비팔주 열한 명은 하나의 모임을 형성할 정도로 정신적 공감대를 지니고 있었으며, 잦은 회합과 접촉을 해 왔는데 그 중 주축을 이루는 세력은 충북 족비산(당시 족비산파는 족비산에서 좌도수련으로 성공한 팔무자생으로서 성공자 여덟 명이 모두 무자년 태생의 동갑내기들이다. 이 밖에 세 사람이 더 있다. 이들은 동시대의 소백산파 128장사들보다 실력이 월등하게 뛰어났다고 한다. 족비산의 현재 지명은 충북 음성, 진천 쪽에 걸쳐 있는 두타산이다)에서 수련한 박양래, 주회인, 주기악, 윤신거, 이화암 등 다섯 사람이었고 모임의 좌장(우두머리)은 박학래가 맡았다.
박학래는 당시 백두산족 정신계의 우도방주(자동수련계의 총책임자, 우두머리)이신 일송 선생님의 손제자였으며, 박양래, 주회인, 주기악, 윤신거, 이석렬 등도 같은 손제자에 속했다.박학래는 어디서 와서 누구에게 배웠는지가 불분명하고 늘 말이 없으며, 뚜렷한 행동도 보이지 않았으나, 삼비팔주 모두를 정신적으로 압도하는 우두머리 위치에 있는 특이한 존재였다.
단 한번 조선 검법의 최고 정화라는 '비홍검'을 실연해 보였기 때문에, 단지 우리나라 전래의 검법 달인이 확실하다는 정도의 인식 외에는 아무도 그의 정체를 아는 이가 없었다. 삼비팔주에 속한 다른 사람들 가운데 관심, 관물을 밥먹듯이 한다는 정신계 중단자들이 여럿 있었지만, 그들도 박학래만은 관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즉 도력이 중단 이상인 고단자급의 인물로 추정된다.
박양래는 충북 진천 태생으로서 족비산파의 우두머리격이다. 족비산에 들어가 좌도공부에 진력하여 크게 성공한 후 잇따라 여덟 사람의 동갑내기들이 성공했다는 일화의 처음을 이루어낸 장본인이며, 나중에 우도공부에도 장족의 발전을 하여 문무를 겸비한 도계 중단 이상의 실력을 길렀다.
경기도안성에서 조금 떨어진 양성 땅의 이인이라는 김좌숙-늘 앉아서 잔다 하여 붙여진 별명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나중에는 스승을 앞지를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삼비팔주 가운데에서도 가장 비운의 주인공으로서, 제갈량을 능가하는 실력을 지니고서도 시운을 타지 못 한 잠룡이었다. 그는 시정의 은사로 평생 가난을 달갑게 받아들이며 살다 죽었다.
이홍몽은 삼비팔주의 주류는 아니었으나, 정신계 중단급의 역량을 지닌 사람으로서 도계의 감찰 역할을 맡고 있었다. 삼비팔주 안에서 별로 인기가 없던 사람으로서 여러 사람에게 환영받지 못하면서도 모임에는 꼭 얼굴을 내밀었다고 한다. 한번은 박양래와 검을 들고 대결하다가 빈손의 박양래에게 검을 빼앗긴 적도 있었다고 한다.
주회인은 경기도 태생으로 천성이 호방하고 활달하였으며, 역시 족비산에서의 좌도수련에 성공하여 을척을 지니고, 축지, 이보, 차력 또한 입신의 경지에 있었다. 그가 경복궁에 있는 일만 이천 근짜리 무쇠솥을 들어올렸다는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문무겸전의 인재로 도계 4단의 실력을 갖고 있었다.
주기악은 충북 진천 사람으로서 얌전한 성품의 소유자이며, 족비산파의 한 사람이다. 차력을 전공하였고, 나중에 우도로 정근하여 도계 2~3단은 되었을 정도로 문무를 겸비한 선비이다.
김경두는 전남 순창 사람으로 얼굴이 까마귀같이 시커멓다 하여 호가 오운이다. 삼비팔주 가운데 제일 나중에 합류한 사람으로서 차력이 전공이었다. 점술에도 밝았으며, 문학, 철학, 역사학에도 깊은 학문적 조예가 있었다. 해방 후 무주 덕유산에서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윤신거는 경기도 수원 태생으로 족비산파의 한 사람이며, 차력을 약간 하고 산주 박양래 밑에서 사시산을 전공하였다. 사시산법만은 산주의 수제자가 되었으며, 자신도 나중에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도계 초단은 족히 되었다고 한다.
이화암은 충북 청주 사람으로서 족비산파의 한 사람이며, 차력이 전공이다. 뒤에 자동수련도 겸하여 도계 1-2단은 되었다.
이석렬은 전라도 사람으로서 일송 선생의 손제자가 되며, 역시 차력이 전공이었다.
이우석은 전라도 태생인데 피동공부에 성공하여 신차에 능했고 을척을 지녔었다. 취물에도 능하였는데, 을척을 사사로이 쓰다가 신벌을 받아 횡사하였다고 한다.
강경도는 경상도 사람으로서 축지가 전공이며, 우도수련도 하였으나, 계제가 있을 정도는 못되었다. 독립운동에 깊이 간여하였으며 자신의 축지술을 십분 활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비팔주 가운데 가장 용모가 뒤어났다고 한다.
이상이 삼비팔주에 대한 개략적인 설명이다. 물론 그들만이 당시 우리나라 도계의 모든 정황을 대변한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백두산파를 조종으로 하여, 우리 정신수련계는 오랜 세월을 두고 국토 전체로 퍼져 나갔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유명, 무명의 도인들을 배출해 온 것이며, 삼비팔주 또한 이 범주 내에서 볼 때 뚜렷한 족적을 남긴 수련정사들로서 손색이 없기 때문에 뒷날 역사적 자료로 활용되리라 믿으며 기록하는 것이다.
끝.
이 글을 쓰신 님께
저는 96년도부터 수도생활을 해본다고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몇 년 전 정신없이 이것저것 자료를 구해 보던 중 인터넷을 통하여 님께서 쓰신 글을 보고 소중하게 간직하여 오다가 저의 브로그를 정리하며 귀한 자료라 사료되어 이곳에 올려놓았습니다. 수시로 탐독하며 공부해 나가는데 마음을 다스르며, 차후에라도 인연이 있는 분들이 게시면 수행에 참고하실 수 있게 하고 싶은 욕심에서입니다. 귀중한 글을 담아오며 아무런 양해의 말씀도 드리지 못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곳을 통하여 사죄의 말씀을 드리오며 이곳에 이 글을 올려둘 수 있도록 선처하여 주시기를 간청 올립니다. 만약 저작권 관계로 불허하신다면 글을 남겨주십시오.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재삼 너그러우신 아량으로 용서하여 주시기를 간청 올림니다. 현풍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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