丹學人物考 (24) 김종직(金宗直)
김종직은 문장중심?정치중심인 한당류(漢唐類)의 학풍과, 철학의 이론 부문을 치중하던 송학류(宋學類)의 학풍이 혼합된 시대에 살았다. 이 시기에는 변계량?윤희?정인지?신숙주?서거정?양성지(梁誠之) 등 많은 거유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순유(醇儒)로 보기 어려운 점도 없지 않다. 김균(金鈞)?김말(金末)?김반(金泮) 등의 이른바 경학삼김(經學三金)과 김종직의 부친 김숙자(金叔滋)가 경학에 정통하였다고 하나 이를 뒷받침할만 한 문헌이 없어서 그들의 학문과 사상의 깊이를 뚜렷이 알기는 어렵다. 그러나 사림파(士林派)의 거두인 김종직에 대해서는 그의 문집이나 여러 문헌을 통하여 전반에 걸쳐 대체적인 윤곽을 이해할 수 있다.
그의 부친 김숙자는 길재(吉再)의 학풍을 이어받은 조선 초기의 대유학자다. 김숙자는 비록 선산교수?개령현감?사재감부정?성균관사예 등 관직생활을 한 바 있으나 1455년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축출하고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포기하고 경남 밀양으로 내려가서 후진교육에 전념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러므로 김종직은 다른 학동(學童)들과 함께 아버지를 모시고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가 정식으로 글공부를 시작한 것은 여섯 살 되던 때이다. 부친은 아들을 불러 앉히고 다음과 같은 학습방법과 서책의 순차를 말하였다.
학습에 임하여 반드시 순서가 있는 법이니 순차를 무시하고 무궤도한 학습태도를 갖는 것은 옳지 못하다. ‘동몽(童蒙)’을 주면서 ‘유학자설 정속편(儒學字設正俗篇)’을 완전히 암송한 후에 ‘소학(小學)’을 읽어야 하며, 그 다음 효경?대학?논어?맹자를 탐독하고 그 다음 ‘중용’을 읽어야 한다. ‘사서’를 끝맺은 연후에 시경?서경?춘추?주역?예기의 순차로 학습하되 오경을 끝낸 뒤에 통감 등의 사서류(史書類)와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를 읽어야 한다.
궁술(弓術)을 익히는 것도 잊어서는 안되니, 그것은 때에 따라 자신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의 사대부 집안의 자제들이 배우는 교과과목이 어떠하였던가를 알게 해 주는 것이기 때문에 이에 소개한 것이다.
김종직이 성리학에 뜻을 두게 된 것은 18세 때였고 주역을 읽어가면서 성리학의 근원을 탐구하게 된 것은 23세 되던 해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그후 성균관에 입학, 그곳 유생들과 교류하면서부터였다.
26세 되던 정월 회시(會試)가 임박했다는 소식을 듣고 형과 함께, 병상에 누워있는 아버님에게 고하자 이에 술잔을 들어 축하해주었다.
과거를 치른 결과 형은 합격했으나 김종직은 낙방했다. 형제는 아버지의 병환이 염려되어 귀향길을 재촉하였지만 아버지는 자제들이 귀향하기도 전에 사망하였다. 동리에 이르기 전 황간(黃澗) 노상에서 부음을 듣고 비통함을 참지 못하여 과거응시로 인하여 부친의 임종을 못 본 것을 철천의 한으로 생각했다. 형과 함께 여소(廬所)에서 3년간 지내면서 상복의 요대도 풀지 않고 나무토막을 베개로 삼고 껍질을 벗긴 조밥으로 생계를 꾸렸으며 대상이 끝나기까지 상식곡읍(上食哭泣)을 빼어놓지 않았다. 형제가 곡을 할 때는 지나가던 행인들도 이를 듣고 울지 않는 자 없었다고 하였다.
김종직 형제의 효성에 대해 홍유손(洪裕孫)은 ‘그들의 효성이 능히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키니 그것은 거짓이 아니다’라고 극찬하였다. 그는 또, 여묘에 있는 동안 여가를 내어 조석으로 모친께 문안드리기를 하루도 빼지 않았다.
28세 되던 해 김종직은 보도(譜圖)?기년(紀年)?사우(師友)?훈계(訓戒)?가묘(家廟)?제의(祭儀) 등 선친 김숙자의 언행과 가계(家系)의 행장을 엮어 「이존록」이라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그가 문과(文科)에 급제한 것은 세조 5년으로 그의 나이 29세였다. 연령으로 보아 급제가 빠른 편은 아니나 그 후 관계진출에 있어서 학문의 영향과 덕행으로 왕의 총애를 받았던 까닭에 주위 여러사람에게 많은 질시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관계의 진출에는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걸었다.
문과급제후 잠시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승문원 권지부정자(承文院權智副正字)의 발령을 받고 상경하였으니 이것이 관로의 첫 출발이었다. 다음 해 승문원 저작(著作)으로 승격하여 주위의 많은 촉망을 받았다. 특히 승문원에 먼저 재직한 어세겸(魚世謙)은 시명(詩名)이 높았는데 그가 김종직의 시를 보고 감탄하면서 “나에게 채찍을 가하여 노예로 삼아도 달게 받겠다.”고 말하였다 한다.
그 후 그는 30세까지 한 때 영남 병마평사(兵馬評事)로 외직에 있었던 것을 빼놓고는 승문원 박사(博士)를 거쳐 홍문관 수찬(修撰)?이조좌랑?춘추관(春秋館) 기주관(記注官)?교서관(校書館) 교리 및 예문관 응교(應敎) 등 초입사자(初入仕者)들이 부러워하는 관서에서 문장력을 발휘하여 초지일관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였다.
성종 즉위 초에 경연(經筵)을 열고 학문이 두터운 선비를 선발하였다. 이때 응선된 사람이 19명이었는데 그 중에서 김종직이 가장 특출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왕의 총애와 신임은 더욱 두터워졌다. 이해 6월 예문관 수찬 지제교(知製敎) 겸 경연 검토관(檢討官)과 춘추관 기사관을 겸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해 겨울, 밀양 향제(鄕第)에 계신 노모를 위해 사직 귀양을 청하니 왕은 함양군수로 임명하여 그의 귀양을 응낙했다. 이 시절이야말로 그가 많은 문인 제자를 배출할 수 있는 첫 기회였다.
그가 임지로 부임한 후 여가를 선용하여 경내에 있는 총명한 이들을 모집하여 동몽교유(童蒙敎誘)하니 학문에 뜻을 둔 이는 멀리에서까지 찾아왔다. 그의 문하생 중 가장 유명하여 그의 학통을 계승 발전시킨 사람은 일두(一?) 정여창(鄭汝昌)과 한훤(寒喧) 김굉필(金宏弼)이다.
이들이 그를 찾아 온 것은 함양으로 부임한 다음 해의 일이었다. 이때가 그의 나이 42세로 일생을 통하여 가장 기뻐할 수 있었던 시기라 하겠다.
그는 군민을 다스리는 데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봄과 가을이 되면 향음(鄕飮)을 설행하여 노인들을 대접하였으며 함양성 나각(羅閣)을 수축하는 등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군민들은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생사당(生祠堂)을 창건하고 매월 초하루 보름이 되면 참알(參謁)하였으니 이것은 그의 청덕(淸德)과 선정을 흠모하기 위해서였다.
왕은 군민치적의 공으로 승문원사(承文院事)를 발령하여 중앙으로 불러들였으나 1년이 채 못되어 모친의 귀양을 이유로 또 사직원을 냈다. 이에 왕은 선산부사로 임명하여 외직으로 보내니 그를 아끼는 의도에서였다. 이곳은 그의 선조와 부친이 살던 곳이라 기뻐하며 사양하지 않았다.
그가 외직에 보직을 받을 때마다 영부(迎赴)한 것은 자기 고향이나 연고지라고 해서 그랬던 것만은 아닌 것같다.
다난한 중앙정계를 떠나 소신껏 지방만을 다스려 보겠다는 마음과 함께 후진양성에 이바지하겠다는 이중목적을 생각함에서였다고 추측된다.
그가 이곳으로 부임하자 학동들은 또 모여들기 시작했다. 양준(楊浚)?양침(楊沈) 형제가 동학 홍유손(洪裕孫)을 따라 서울에서 천리길을 머다 않고 도보로 내려왔다. 김일손도 부친 김맹(金孟)의 주선으로 그의 형 김기손과 함께 배움을 청하러 왔다.
김종직의 문인을 ‘영남학파’라고 하는 이유는 대부분 외직에 있을 때 그를 찾는 인근 사람들을 많이 가르쳤고 그 곳 출생이라는 데 연유한다. 그의 제자들이 후에 정계에 끼친 영향은 다대하였다. 또한 그의 후진 육성이 후대 유학사상에 기여한 것은 불후의 업적으로 빛나는 것이니, 이는 그 자신의 영광이라 하겠다.
김종직의 문인들을 살펴보면 그가 가장 사랑하던 애제자 지지당(止止堂) 김맹성(金孟性)은 그와 더불어 시를 수창(酬唱)하며 내왕이 가장 잦았고 그의 시풍을 이어 받은 사람이었다.
정여창과 김굉필은 그의 성리학통을 이어받아 도학을 일으켰다.
그의 문장을 이어받았다 할 태허(太虛) 조위(曺偉)는 성종의 명을 받들어 김종직의 문집을 편찬할 때 의제(義帝)를 추모하는 서문을 실어 무오사화의 원인이 되게한 사람이다. 생육신(生六臣)의 한사람으로 평생을 초로에서 지낸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무오사화때 피해를 입은 제일의 장본인이며 그의 문장을 이어받은 탁영 김일손도 애제자다.
또한 한원(翰苑) 옥당(玉堂)에 있으면서 김일손과 막역한 사이였던 타헌(?軒) 권오복(權五福), 충효?시명?필력이 뛰어났으며 문장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임계(林溪) 유호인(兪好仁), 문과급제하여 연산군 때 간관(諫官)으로 왕의 실정을 주간하다 화를 당한 우졸자(迂拙子) 박한주(朴漢柱), 사육신 박팽년의 외손으로 시문에 능했고 김종직에게 문충(文忠)의 시호를 주려고 주장하다 화를 입은 재사당(再思堂) 이원이나, 문장으로도 유명하고 기절(氣節)이 있어 갑자사화 때 궐내에 대간청(臺諫聽)을 설치할 것을 주장하였다는 이유로 화를 당한 망헌(忘軒) 이주(李?), 응용절륜하며 경사(經史)에 관통했던 이승언(李承彦)도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사람들이다.
임사홍(林士弘)의 아들로서, 아버지와는 달리 당대의 고절(高節)과 문장을 이루었던 임희재(林熙宰)도 그의 제자였다. 임희재는 일찍이 병풍에 “요순은 태평세대를 이루었는데 진시황은 무슨 일로 백성을 괴롭히는가.
화가 자기 집에서 일어날 것을 알지 못하고 부질없이 만리성을 쌓는구나
祖舜宗堯自太平 秦皇何事苦篒生
不知禍起蕭墻內 虛築防胡萬里城“
라는 시를 썼다가 연산군에게 화를 당했던 것이다.
그외에도 그의 제자들은 많았다. 중요한 사람들만 꼽아봐도 이철(李鐵)?곽승화(郭承華)?강흔(姜?)?권경유(權景裕)?이목(李穆)?강경서(姜景敍)?이수공(李守恭)?정희량(鄭希良) 등과 또한 강희맹(姜希孟)?이계맹(李繼孟)?강겸(姜謙)?홍한(洪翰)?정승조(鄭承祖)?이총(李摠)?강백진(姜伯珍)?강중진(姜仲珍)?김흔(金?)?김용석(金用石)?홍유손(洪裕孫)?이종준(李宗準)?최부(崔溥)?표연말(表沿沫)?안우(安遇)?허반(許磐)?유순정(柳順汀)?정세인(鄭世麟)?신영희(辛永禧)?손효조(孫孝祖)?김기손(金驥孫)?강혼(姜渾)?주윤창(周允昌)?방유녕(方有寧)?양준(楊浚)?조익정(趙益貞)?이의형(李義亨)?박형달(朴亨達)?이인형(李仁亨)?박수견(朴守堅)?하충(河沖)?민구령(閔九齡) 등과 그밖에도 당대에 명성을 날리던 이름들이 많다.
이 중에는 도학을 창조한 이도 있고 문장을 숭상한 이도 있으며 기절(氣節)을 숭상한 이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세속의 이해와는 거리가 멀고 의리를 생명으로 하는 공통성을 띠고 있어 당시 권가(權家)에 아부하여 출세하려던 속학(俗學)과는 구별되는 사류층을 형성하였으니 김종직은 일생을 통하여 여러 가지 정치적인 업적도 많았으나 문인을 다수 배출하였다는 것이 후세의 문화 유산에 더 큰 업적이라 하겠다. 김종직의 문인들에 의하여 후일 사내부 정치가 이루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김종직이 선산부사에서 다시 중앙정계로 나오게 된 것은 성종이 그를 사랑하고 있어 측근에 있게 하려는 뜻에서였다. 그에게 홍문관 응교(應敎)?지제교(知製敎) 겸 경연 시강관(侍講官) ?춘추관 편수관(編修官) 등의 요직을 주고 이듬 해 통정대부(通政大夫)의 계를 주어 승정원(承政院) 부승지로 임명하고, 이어 우부(右副)?좌부(左副) 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임명되었으며 곧 이조참관에 임명되었다. 조정의 훈구(勳舊)대신들은 김종직의 연속 승진과 그의 문인들이 계속 진출하고 있어 불안을 느끼고 두려워하였다.
김종직이 훈구파 세력과 최초로 사이가 벌어지게 된 것은 성종 2년 함양군수로 부임되어 갔을 때, 일찍이 유자광이 이곳을 노닐다가 시를 지어 누벽(樓壁)에 걸어 놓은 것을 김종직이 이를 불살라 없앤 데서 시작한다.
유자광은 서자출신으로 남을 모함해서 출세하였고, 또 시문에 능하지도 못한 터이므로 그는 이 액판을 철폐한 것이었다. 이 당시는 성종 즉위 초라 유자광은 세력이 꺽이어 이에 보복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 않았으나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또한 서거정은 평소 김종직의 시성(詩聲)?문명(文名)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물론 이는 개인적인 감정의 차원을 넘어서, 훈구세력과 신진사류 세력간의 은근한 경계 대립의 양상에서 생긴 것이었다. 성종이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55권을 김종직에게 증수(增修)케하매 훈구파들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서거정은 26년간 대제학(大提學)을 지내 평판이 좋지않음을 알았으나 그 자리를 내놓으면 김종직이 차지할 것이 명확하다는 중의에 따라 계속 버티고 있었다. 그러다가 자리를 내놓게 될 때, 대제학은 전임자가 후임자를 천거한다는 전례를 들어 홍귀달(洪貴達)에게 물려주었다. 김시습(金時習)은 시로써 평하기를“평생 웃음거리는 홍귀달이 문장(대제학)이 된 것이다 平生可笑事 貴達爲文章.“라고 서거정의 소행과 홍귀달이 대제학이 된 것을 비웃었다. 여하튼 김종직은 이로 인해서 만백관이 선망하는 대제학을 하지 못하고 제학(提學)에서 그쳤으나 왕의 총애는 계속되었다.
그 후 전라도 관찰사 겸 순찰사에 임명되어 동요하던 호남 민심을 가라앉히고 이듬 해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그가 형조에 있는 기간 모든 송사(訟事)를 공정하게 판결하여 모든 사람이 감복했다고 한다. 그후 병으로 본직을 사퇴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체직했다. 김종직이 노환으로 고향에 내려가자 그곳 사람들이 물었다.
“상감은 영명(英明)하신데 선생은 어찌하여 벼슬을 사양하고 내려오셨습니까?”
“새로 왕이 될 분(연산군)의 눈동자를 보니 노신(김종직)의 목(首)이 보전된다면 다행으로 생각하겠다.”
그 후 연산군이 즉위하자 모두 영주(英主)라 칭하였는데 오래지 않아서 사화가 일어나니 향인(鄕人)들은 김종직의 선견에 감복하였다 한다.
그가 만년에 고향으로 돌아올 때 충청도 진천 노상에서 눈을 맞으며 걸어가다 읊은 시 한 구절은 그의 심사(心事)를 잘 나타내고 있다.
마음이 착잡하여 섣달도 못되어 돌아가는데
진천가는 길엔 흰눈이 오는구나
나귀에서 내려 걸어가는 길손 몸에
한송이 두송이 내린 눈이 흰옷을 만드네
心事悤悤未臘歸 鎭川路上雪霖微
縱然不是騎驢客 點綴從敎作白衣
김종직은 관직생활 30년에 초옥 한간 마련하지 못했다. 현사(賢士)들은 그의 청절(淸節) 검소한 것을 알고 숭모했으며, 와병 중엔 사관(史官)을 보내어 문병을 하고 약을 계속 보냈다.
왕은 종 15명과 논 7섬지기를 사패(賜牌)로 내렸으나 끝내 받지 않았다.
그는 62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부음을 들은 문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원근에서 사대부 유생과 하류 신분에 있는 이들까지 모여 회장객(會葬客)이 5백여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왕도 선비가 갔으니 그 강(綱)을 잃었다고 애통해하면서 예관(禮官)을 보내서 치제(致祭)하였다.
김종직이 학문을 고구하는 기본 목적을 어디에 두었느냐 하는 것을 이론적으로 성찰한 글은 없다. 그의 문집 10권 중에는 대부분이 시요, 문장에 있어서도 대개가 서(序)?기(記) 등이며 학문에 관한 내용을 기술한 것은 없다. 그러나 그가 부친에게 훈학할 때 소학의 중요성을 인식했고, 효제충신(孝悌忠信)에 입각해서 일생을 지내왔던 것이다. 그가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했고 왕을 섬기는 데 있어서도 의(義)로써 행했으니 그가 비록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후 관직을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기는 하였으나 세조의 비행을 뇌리에 새기었다.
그가 성종께 ‘사육신 성삼문?박팽년 등은 충신이다’라는 계(啓)를 올려 왕이 변색하자 천천히 말을 계속하되 ‘불행히 또 변고가 있다면 신도 성삼문이나 박팽년과 같이 되겠다’고 하여 성종이 노기를 풀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이것을 어디까지나 왕에게 아부하기 위해서 사육신을 들춰낸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되며,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유교이념에서 우러나온 것이라 생각된다.
김굉필이 배움을 청했을 때 그는 소학을 주면서 “군이 학문에 뜻을 두면 이 책으로부터 시작하라.” 하매 그 뜻을 받들어 30세까지 열심히 이 책만을 읽었다고 한다. 김종직의 문하생이 모두 소학을 중시하였으니 이는 그의 가르침에서 기인했다 할 것이다.
밀양향교제자(密陽鄕校諸子)에게 주는 글 중에서도 그는 다음과 같이 기본적 학문이야말로 도리어 혼탁한 사회에 있어서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향리 풍속이 엷은 것은 조정의 정화(政化)가 막힌 때문이다. 그 병원(病源)은 오로지 학교 강학(講學)이 불명하기 때문이다. 강학을 밝힘은 효제충신의 교(敎)뿐이다. 이것을 익히면 모든 사람이 그 업에 편안히 할 수 있으며 희미했던 풍속도 뚜렷하게 된다.”
또한 안음현(安陰縣) 신창 향교기(新創鄕校記)에 “학의 근본은 효제로써 집에는 가묘(家廟)의 일이 있고 학교에는 전채(奠采)의 예가 있다.
집에는 부모가 있고 학교에는 스승이 있으니 잘 공경하라. 또 집에는 형제가 있고 학교에는 친우가 있으니 우애공순(友愛恭順)해야 한다.”고 말한 것을 종합하여 보면 그의 학문경향은 효제충신을 주안으로 하는 실제면에 치중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상적 표방이며 주장이었고 그가 평생을 통하여 힘을 기울인 것은 시문이었다고 하겠다.
퇴계 이황(李滉)은 그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학문이 정심(精深)하여 도덕 문장으로 일세 유종(儒宗)을 이루었고,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아 전후 명사가 그의 문하에서 많이 나왔으며 그로 인해서 ”점필재-김종직의 호“선생이라 칭한다......(中略).
그러나 선생의 학문은 후전(後傳)되지 않고 있으며 선생의 종신 사업이라면 사장(詞章)에 뛰어난 데 있다.”
이렇게 그의 학문경향을 평한 것을 보면 도학의 실제적인 학술적 전개는 제자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그는 사장의 전개를 제자들에게 열어주었다고 하겠다.
김종직을 중심하여 그의 문인으로 구성된 소위 사림파의 중앙 정계 진출은 세조 때 공을 세운 훈구파의 세력과 충돌하기에 이르렀다. 새로 진출한 사림파의 신진세력은 훈구파를 가리켜 소인 속배(俗輩)라 배척했고, 기성의 훈구파는 자파와 교류하지 않는 사림파를 가리켜 경박하고 야심적인 무리라고하여 서로 헐뜯었다.
대개 사림파는 대간(臺諫) 홍문관에 직을 가진 인물로서 진보적 경향을 가졌음에 비추어, 훈구파는 사장(詞章)을 주로 하는 세조의 총신들로서 노성한 정치인들이었다. 사림파의 인물이 김종직의 문인이라는 점에서, 훈구파의 질시 증오의 대상은 궁극적으로는 김종직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죽은 후에까지 화를 입게 되었다.
김종직과 유자광사이의 반목원인은 위에서 말한 바 있지만, 사림파가 훈구파를 계속 비판한 것은 사림파의 전면적인 파국을 초래케 되는 결과로 나타났다.
일찍이 훈구파의 거두인 이극돈이 전라감사로 있을 때 성종의 상(喪)을 당하자 상경하여 진향(進香)하지 아니하고 기생을 데리고 놀아난 일과, 재임기간에 부정축재한 사실을 김종직의 문인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기재했다. 이것을 본 이극돈은 고쳐줄 것을 청했으나 김일손이 거절한 일이 있었다.
김종직과 유자광, 김일손과 이극돈의 불화는 결국 성종이 승하하고 연산군이 등위하자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사단이 되어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파의 거개가 화를 입는 참사가 발생했다.
‘조의제문’이란 성종 대에 김종직이 초회왕(楚懷王)을 단종에, 그리고 서초패왕(西楚覇王-項羽)을 세조에 비유해, 은밀한 가운데 세조를 비방하고 단종을 동정한 내용의 글인데,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사관이 되어 그 조문(弔文)을 성종실록에 편입시켰다. 사혐이 있던 유자광?이극돈은 연산군이 문사(文士)의 간쟁(諫諍)을 싫어하는 틈을 이용해서 ‘조의제문’을 들고나와 “이러한 사실은 선왕을 무훼(誣毁)한 처사이니 이는 대역부도(大逆不道)요.”라하여 일대 사화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서 이미 죽은 김종직의 무덤을 파서 부관참시(剖棺斬屍)하였고 김일손은 능지처참되었으며, 김굉필?정여창 이하 문인 40여명은, 현직이나 재야에 있는지를 불문하고 참(斬)하든가 아니면 유배를 보냈다. 이 사건은 선비들이 화를 당했다하여 사화(士禍)라 하며 사초와 관련되었다하여 사화(史禍)라고도 하는데, 이해가 무오(戊午)년이라 ‘무오사화’라 칭한다.
이와같이 김종직은 사화로 인하여 한때 관직을 박탈당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되찾게 되었고, 이조 유사(儒士)의 조종(祖宗)으로 숭앙받기에 이르렀다.
그의 고향인 밀양의 예림서원(禮林書院)을 비롯하여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栢淵書院), 금산(金山)의 경렴서원(景濂書院), 개령의 덕림서원(德林書院)에 제향(祭享)하여 그의 공덕은 후학들에 의하여 길이 추모되고 있는 것이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이 유교적 이념에 의한 이상사회를 이룩하기 위하여 나래를 펴고자 하다가 급기야 이조의 폐쇄적이고 정체적인 사회 현실에 부딪쳐 좌절되었으므로, 후일의 유학자들이 그를 높이 받들어 존중했던 것이니, 김종직이야말로 도학(道學)의 이념을 정치에 실천코자 했던 이조 성리학의 조종(祖宗)으로 추모함을 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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