丹學人物考 (22) 정도전(鄭道傳)
연대 : ?~1398(태조7)
본관 : 奉化 - 父 : 鄭云敬
자 : 宗之
호 : 三峰
시호 : 文憲
주요저서 : 三峰集
정도전(鄭道傳)은 여말?선초(鮮初)의 시대를 인도한 사상가요, 유학자요 위대한 정치가였다.
형부상서(刑部尙書) 정운경(鄭云敬)의 장남으로서 1337년(충숙왕 6년)경에 출생한 듯하며 영주(榮州)에서 세거(世居)하였다. 그는 두뇌가 매우 명민하고 도량이 크며 호탕한 기상이 있었으나, 후세 사람들로부터 인간을 대함에 있어 편견이 있고 개성이 강하여 정안군 이방원에게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었다는 평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그는 학문을 좋아하여 유학에 정진하고 많은 서적을 읽어 예악(禮樂)?제도?음양?병력?의학에 이르기까지 조예가 있어 자칭 문무의 재주가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이색의 문하에서 정몽주?이숭인(李崇仁)?권근(權近)?이존오(李存吾)?김구용(金九容)?김제안(金齊顔)?박의중(朴宜中)?윤소종(尹昭宗) 등과 친하여 서로 경사(經史)를 강론하여 문견을 넓혔고 특히 문장에 능하고 성리학에 밝아 모두 그에게 앞자리를 양보하였다.
그는 1362년(공민왕 11)에 박실(朴實)의 방하(榜下)에서 진사에 급제하고 그 이듬해에 충주사록(忠州司錄)에 임명되어 태조7년(1398), 그가 비명에 쓰러질 때까지 36년 동안의 파란많은 사회활동이 시작되었다. 그 이듬 해에는 중앙에 전교주부(典校主簿)로 들어왔으며 그 후 승진하여 통례문 지후(通禮門紙侯)로 있을 때인 공민왕 15년(1366)에는 연이어 부모상을 만나 3년동안 벼슬을 떠났다. 이어 공민왕 19년(1370)에 다시 벼슬하기까지 5년동안 영주(榮州)와 삼봉(三峰)에 있으면서 오로지 학문과 후생의 교육을 위해서 정력을 다하였다.
정도전의 학문은 이미 벼슬하기 전에 이룬 것이지만 그 학문을 더욱 전진시켜 후에 그 「불씨잡변(佛氏雜辯)」「경국전(經國典)」등 불후의 문장을 남기고 또한 이씨왕조를 끌고간 정치이념은 이 때에 자리잡혔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때 그는 경적(經籍)을 강구하는 한편 제자(諸子)의 각종 서적을 탐독하여 그 이름이 높았기 때문에 남방의 이름있는 학자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특히 그의 학구적 태도는 대단히 성실하여 정몽주가 보내준 맹자 일부를 읽는데, 하루 한 장 혹은 반 장을 넘지 않을 정도로 정독하였다 한다.
이와 같이 다시 공부에 열중했던 정도전은 1370년(공왕 19년)에 성균박사(成均博士)에 임명되어 당시 성리학적 학풍형성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당시 국가에서는 홍건적의 침입으로 재해를 입은 성균관을 중영(重營)하고 충렬?충선왕 이후 수입된 성리학 중심의 유교를 진흥코자 유종(儒宗)이라 불리우던 이색을 대사성(大司成)으로 삼고 학술이 높은 김구용(金九容)?정몽주?박상충(朴尙衷)?박의중(朴宜中)?이숭인 등이 정도전과 함께 박사로 임명되어 매일 명륜당(明倫堂)에서 분경(分經)?수업하고 또 서로 어려운 문제들을 들어 논란하여 학술을 전진시켜 가므로 전국학자들이 운집하여 장관을 이루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우리 나라에는 주자학적 학풍이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정도전은 또 다음해 태상박사(太常博士)를 겸직하게 되어 태묘제향(太廟祭享)의 제의(祭儀)와 종률(鍾律)을 의정(議定)하고 승진하여 예의정랑(禮議正郞) 겸 성균?태상박사 뿐 아니라 전선(銓選)을 관장하면서 5년을 지냈다. 그후 1375년(우왕 1)에는 더욱 승진하여 성균사예(成均司藝)?예문광교(藝文廣敎)?지제교(知製敎)가 되었으며 경연(經筵)에 들어가 왕에게 「대학」을 강(講)하고 또한 정치 문제를 논진(論進)할 수 있게 되었다.
정도전이 이와 같은 벼슬을 하던 때는 마침 중국에서 백년을 두고 강제로 고려를 지배하던 원나라의 세력이 동요하여 남부에서부터 한족인 명나라가 흥기하는 원명 교체기에 있었다.
이때를 틈타 고려는 1356년(공민왕 5)부터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또한 원나라가 지배 한 후 심하여진 토지소유의 귀족발호를 견제하기 위하여 배원친명책(排元親明策)과 주자학적 유교주의 이념의 중앙집권체제로 전환하던 시기였다.
이로 인하여 과도기적인 현상으로 고려 집권층 내부는 외교적인 면에서 친명?친원의 대립 항쟁이 벌어지고 사상적인 면에서는 척불(斥佛)?양유(揚儒)가 전개되었으며 사회?경제적인 면에서는 전제(田制) 개혁론이 대두하는 등 복잡다난하였다. 이러한 정세속에서 정도전은 주자학적인 이론을 구사하여 천명적 정치 색채를 뚜렷이 하였을 뿐만 아니라 천년의 전통을 가진 불교적 관념 사회를 유교적인 현실사회로 이끌어가는 데 기수의 역할을 담당하고 나섰다.
정도전은 1375년(우왕 1) 4월에 집권자인 이인임(李仁任) 등의 친원파들이,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함을 계기로 다시 명나라와 관계를 끊고 원나라와 관계하려고 종친(宗親)?기로(耆老)?백관(百官)들과 연명하여 원나라 중서성(中書省)에 글을 보내려 함을 알고 박상충(朴尙衷)?임복 등과 함께 이에 불가함을 주장하여 서명을 거부하였다.
또한 그해 5월에, 원나라의 사신이 명나라로 협공하자는 뜻에서 우리 나라에 오자 이인임 등은 이를 맞이하려 하였으나 정도전은 김구용?이숭인?권근 등과 함께 도당(都堂)에 글을 올려 원나라의 사신을 맞이함이 불가하다고 반대하였다. 그러나 경복흥(慶復興)?이인임 등 집권자들이 이를 물리치고 정도전으로 하여금 원나라 사신을 맞이하게 하니 그는 경복흥의
집으로 찾아가서 “나는 마땅히 원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 오리라. 그렇지 않으면 원나라 사신을 묶어 명나라에 보내겠다”고 이해관계를 들어 더욱 반원(反元)을 주장했으며 말까지 불손하였다 한다. 또한 궁중의 어른인 태후(太后)에게까지도 그 불가함을 극력 주장하여 이인임?경복흥 등은 크게 노하여 조정에서는 그를 회진현(會津縣-지금의 羅州)으로 귀양보내도록 하였다.
정도전이 이렇듯 대담하고도 강력하게 배원친명책을 주장한 것은 이 기회에 완전히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야만 우리나라가 살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뒤에서도 말하겠지만 이조 건국 후 명나라가 표전(表箋)문제로 우리나라를 위협할 때 그 실현은 못보았으나, 요동정벌을 기도한 바를 아울러 생각한다면 사대주의론자가 되어서가 아니라 우리나라를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하는 동시에 국가의 독립을 공고히 하려는 뜻에서 배원친명책을 주장하였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그는 귀양길에 염흥방(廉興邦)이 사람을 보내어 “내가 시중(侍中) 경복흥에게 말을 하여 시중의 노여움이 좀 풀렸으니 떠나지 말고 좀 기다리라”고 전하니 그는 술을 마시다 말고 “정도전의 말이나 시중의 노여움은 각각 소견을 달리하는 바이지만 모두 나라를 위하는 뜻에서였고 또한 왕명인데 어찌 안 갈 수 있느냐.”하면서 그대로 떠났다. 이 말을 시중이 듣고 정도전은 아직도 뉘우치지 못하였다고 하여 사람을 보내어 장형(杖刑)을 가하려 하였으나 마침 석기(釋器)의 난이 일어나 중지되었다 한다.
시중(侍中)인 이인임(李仁任) 등에게 배원친명책(排元親明策)을 시행토록 강행하려다 회진현으로 귀양가게 된 정도전은 3년째 되는 우왕 3년(1377)에는 고향 영주(榮州)로 와 그곳에서 4년을 지낸 후 비로소 경외종편(京外從便)이 허락되어 삼각산 밑에 삼봉제(三峰齊)를 짓고 부모의 상을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학문 연구와 후생교육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방으로부터 많은 학자가 삼봉제에 모여들게 되자 그곳 출신인 재상의 미움을 받게 되어 철옥(撤屋)하고 부평?김포 등지로 옮기며 1383년(우왕 9)까지 전후 8년동안 학문연구에 전력하였다.
그 동안에 그가 가장 주력한 것은 불교배척이었다. 그는 귀양가던 그 해에 「심문천답(心問天答)」두 편을 지어 주자학적 이념사회 건설을 위한 논리의 일단을 체계화하였다. 그 내용은 그가 후일 즉 1394년(이조 태조 3)에 지은 「심기리삼편(心氣理三篇)」과 자매편을 이루며 또한 그의 만년인 태조 7년(1398)에 『내가 죽어도 이제는 편안할 수 있다.』고 한 「불씨잡변(佛氏雜辯)」19편과도 같은 것이다. 그 저서내용은 여말?선초의 사회를 끌고 간 사상의 핵심으로 위의 두 책들이 비록 이때에 문자화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의 그러한 사상은 이미 「심문천답」을 저술할 때부터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그는 당시 우리나라 사회의 모든 병폐의 근원을 불교의 비현실적 또는 기타의 관념적 풍조에 있다고 생각하고 이를 치유하기 위하여서는 주자학적 이념으로 사회를 혁신하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무엇보다도 첫째, 성리학적 이념으로 불교의 허망을 비판하고 나아가서는 불교적인 생각과 행동의 일체를 말살하려는 포부에서 이들을 정리하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정도전의 불교배척은 대략 주자학적 견지에서 그 다른 점을 논박한 것인데 특히 그 「관심설(觀心說)」과 「심성론(心性論)」같은 설은 주자의 「관심설」「답정자상서(答鄭子上書)」와 같은 유의 「석씨편(釋氏篇)」에 의지한 바 매우 크다.
그가 비록 이를 받아들였다고 하여도, 여말의 척불?양유의 논은 안유(安裕)이래 많은 사람들이 꾸준히 전개하여 왔지만 그만큼 철두철미하고 이론적 체계가 뚜렷한 주장을 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그의 주장은 불교와 도교의 입장에서 본다면 너무 피상적이고 천박한 것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척불론은 당시 불교?도교의 타락으로 인하여 말기적 증상을 드러내고 있던 때에 있어서 개혁적인 사상적 논리의 준칙이 되었던 것이다.
이단(異端)을 물리치는 것이 나의 임무라고 생각한 정도전은 이와 같은 사상을 항상 후생에게 가르쳤다.
1377년(우왕 3), 그는 중 찬영(粲英)과의 담론에 다음과 같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즉 고성(固城)의 요민(妖民)인 이금(伊金)이 자칭 미륵불이라하여 “나는 능히 석가불이 될 수 있다. 모든 귀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사람이나 말?쇠고기를 먹는 사람은 재화를 남에게 나누어 주지 않으면 다 죽게 될 것이다. 나의 말을 믿지 않는다면 3월이 되어 일월이 빛을 잃을 것이다. 나의 작용은 풀에서 파란 꽃을 피게 할 수 있고 나무에서 곡식을 열게 할 수 있으며 또한 한 종자로 두 번 수확할 수 있게 할 수 있으며 내가 산천신에 타일러 훈계하면 왜적도 사로잡을 수 있다”고 백성을 속여 그들이 성황(城隍)을 철폐하고 그를 부처같이 섬기게 한다는 소리를 듣고 찬영은 “이금의 말은 모두 황당무계하다. 특히 일월이 빛을 잃는다는 것은 더욱 가소로운 일이며, 나랏 사람이 어찌 이와같이 어리석게 이를 믿느냐”하니 정도전이 이 말을 듣고“이금이나 석가는 그 말이 조금도 다를바가 없다. 단지 석가의 말은 타생사(他生事)를 말하였기 때문에 사람이 그 허망됨을 알지 못하고, 이금은 3월의 일을 말하였기 때문에 그 허망이 나타났을 뿐이다.”라고 하자 찬영은 아무말 못하고 자리를 떴다 한다.
정도전은 친원파와의 투쟁에서 밀려난 후 회진(會津)?영주(榮州)?한양(漢陽)?부평?김포 등지로 옮기면서 당시 사회혁신의 대원리인 주자학적 입장에서의 척불론을 후생에게 정력을 다하여 가르쳤지만 그것만으로는 그가 생각하는 주자학적 이념국가 건설이란 큰 포부가 실현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의 이상을 실현시켜 줄만한 권력을 지닌 인물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대상은 구가세족(舊家世族)으로 당시의 집권층이 아니어야만 했다. 그는 이미 첫 벼슬길에서 자기 소견의 일단을 주장하였지만 용납되지 않고 도리어 쫓기었던 것이다. 그 결과 그가 발견한 것이 당시 왜구와 홍건적의 격퇴로 용맹을 떨치며 안팎으로 신망이 두텁고 또한 구가세족이 아니면서도 잘 훈련된 군사를 지휘하고 있어 외우내환의 난시에는 어느때나 정계에 등장할 수 있는 이성계(李成桂)였다.
1383년(우왕 9) 가을에 그는 드디어 당시 동북면(東北面) 도지휘사(都指揮使)로 활약하고 있는 이성계를 따라 함주(咸州)로 가서 그의 막료가 되어 그와 결연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성계의 군사지휘가 엄숙하고 군사의 조직이 정연한 것을 보고 이만하면 되겠다고 마음먹어 이성계에게 “훌륭합니다. 이 군대만 가지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이 군대는 능히 동남의 왜구를 격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한다. 그러나 그는 군영앞에 서 있는 한 노송(老松)을 보고 다음과 같은 시를 읊어 이성계에게 화가위국(化家爲國)을 암시하고 자기가 그의 우익(羽翼)이 될 것을 다짐했다.
창망한 세월에 한 그루 소나무
청산에 자라서 몇 만 겹이라
다른 해 서로 만나뵐 수 있으리까
사람 사는 서리에서 곧 따라 좇으리오다
蒼茫歲月一株松 生長靑山幾萬重
好在他年相見否 人間府伊使陳從
정도전은 이로부터 15년 후인 1398년(태조 7), 즉 그가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이성계를 도와 활약하였으며 또한 자기의 포부를 이성계의 권력에 의하여 실현했기 때문에 만년에는 이성계 앞에서 “한나라 고조(高祖)가 장자방(張子房)을 썼을 뿐 아니라 장자방이 또한 한고조를 쓴 것입니다”라고 서슴치 않고 말하여 자기와 태조와의 관계를 한고조와 장량(張良)으로 비유했던 것이다. 정도전이 이와 같이 이성계를 찾아 갔을 무렵인 1383년(우왕 9) 8월에는 이성계의 유일한 정견 내지는 국방 논의라고 볼 수 있는 “안변지책-安邊之策(高麗史列傳 卷48)”이 상서 되었는데 이것이 정도전이 처음으로 이성계에게 헌계(獻計)한 것인지 모른다.
정도전은 그 이듬해인 우왕 10년 여름에도 재차 함주에 가서 이성계의 군료가 되었다가 그 해 7월에 전교부령(典校副令)으로 임명?발탁되어 성절사(聖節使) 정몽주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보충되어 명나라에 갔다.
이 사신 행차의 목적은 표면으로는 우왕의 승습(承襲)과 공민왕의 시호(諡號)를 청하는 것이었지만 보다 중요한 이유는 우왕 초년에 이인임 등이 친원책을 썼기 때문에 명나라가 우리나라를 경계하여 고려를 정복하겠다고 위협하는 한편 세공(歲貢)을 증정(增定)시키고 또한 사절로 들어간 김수(金?)?홍상재(洪尙載) 등을 원주(遠州)로 유배시키는 등 까다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으므로 이를 해결하여 여명(麗明)관계에 호전을 기도하려는 것이었다. 정도전과 정몽주는 명을 받은 즉시 남경(南京)까지의 8천리의 90일정을 60일만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돌아왔다.
명나라에서 돌아온 이듬해(1385) 4월 정도전은 성균관 제주(祭酒) 겸 지제교(知製敎)에 임명되었고 다시 그 이듬해에는 자청하여 남양부사(南陽府使)가 되어 지방관으로서의 일군선정(一郡善政)의 모범을 보이었다. 그 후 우왕 14년(1388)에 이성계가 요동정벌에 나갔다가 군을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여 우왕을 축출하고 최영(崔瑩)일파의 친원파를 숙청하고 나라 일을 맡아보게 되자 대사성(大司成)에 천거되어 다시 이성계 주위에서 제반정책을 계략하게 되었다.
소위 위화도 회군은 전에 원나라가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두어 지배하던 철령(鐵嶺) 이북 땅에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를 두어 직접 통치하겠다고 고려에 통고함에 우왕과 당시 나라일을 맡아보던 최영 등은 이에 발하여 요동을 정벌하여 이 요구를 거절하는 한편 은연중 지난날 고구려의 땅을 찾겠다는 목적에서 정벌군을 보냈던 것인데 우군도통사로 정벌군을 인솔하여 출정했던 이성계가 좌군도통사 조민수(曺敏修)를 달래어 중도에서 회군하여 중앙 당국자(當國者)를 몰아내고 대신 정권을 잡았던 것이다. 이 때는 직접 정도전이 관여한 것 같지는 않으나 그 후 창왕을 옹립할 때라든지 또는 창왕을 몰아내고 공양왕을 세워 이성계 일파의 정권을 확립하여 나가는 것 등에 있어서는 정도전의 관여가 절대적이었던 모양이다.
이러는 동안 관직도 급진하여 창왕 초년(1389)에 그는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으며 공양왕 즉위 때에는 삼사우사(三司右使)가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고 동왕 3년(1391)에는 우군총제사(右軍摠制使)를 겸하게 되었다. 또한 우왕?창왕은 모두 공민왕의 후손이 아니고 신돈(辛沌)의 자손이라고 주장하여, 그 폐시(廢弑)를 단행하고 종실 중 가장 무능한 공양왕을 옹립한 것 등 모두가 그의 계략이라 보아 좋을 것이다.
그는 이미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고 우왕을 폐출하고 조민수?이색 등의 주장에 의하여 창왕을 세울 때 윤소종(尹昭宗)과 더불어 이의를 제기하여 창왕을 신(辛)씨라고 배척하고 왕씨 중에서 다른 사람을 왕으로 만들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뜻대로 되지 않으므로 그의 스승인 이색과 사이가 떠서 그 후 그를 배척하게 되었던 것이다.
창왕을 세우는 데 반대하였던 그는 2년이 채 못되어 기어코 이성계, 심덕부(沈德符), 지용기(池勇奇), 정몽주 등 아홉 사람과 힘을 합하여 창왕을 폐출시키고 공양왕을 영립(迎立)하였던 것이다. 이 공으로 그는 봉화현(奉化縣) 충의군(忠義君)에 봉작(封爵)을 받고 중흥공신(中興功臣)에 훈록(勳錄)되었다.
그로부터 정도전은 이성계의 또 한 사람의 우익인 조준(趙浚)과 힘을 합하여 여말 정치의 최대 과제인 전제(田制), 군제(軍制) 등에 손을 대어 그 개혁에 성공하여 이조 성립의 정치, 경제, 군사적인 기반을 이룩하는 동시에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그의 척불론을 내세워 숭유 억불책(崇儒抑佛策)을 쓰게 하여 불교적인 사회 이념을 유교적인 사회이념으로 이끄는데 전력을 다 기울였다.
고려 역대의 숭불책은 불교의 융성을 보게 되었으나 그 반면 승려의 타락과 부패로 말미암아 중기 이후로는 많은 폐해를 국가와 사회에 끼쳤던 것이다. 즉 사원(寺院)은 막대한 재원을 점유하고 있어 국가 재정을 좀먹는가 하면 승려들은 양주(釀酒), 식리(殖利)를 업으로 하는 자까지 있었으며 심지어는 일반 민가에 출입하며 음주, 육식, 음행, 격투 증 속인에 못지않는 난행을 범하여 풍기를 어지럽게 하는 승려가 많았으며 그중에는 신돈과 같은 엉뚱한 정치인도 나왔다. 그리고 왕실을 중심으로 각종 불교행사가 성행했으며 사탑의 남설(濫設)과 토지, 정재(淨財)의 남시(濫施) 등으로 재정을 어지럽혔다.
이와 같은 폐단을 일소하고 주자학 이념의 새 사회를 건설하려는 것이 정도전의 최대의 염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공민왕 대에 주자학 학풍의 성립이나 그가 서재에서 후생들에게 척불이념을 가르치는 것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권력의 추부(樞府)에 참여하게 된 그는 그 권력을 등지고 척불의 제일 기수가 되었던 것이다. 특히 공양왕 3년(1391)에 왕이 회엄사(檜嚴寺)에 행차하여 탄신의 예불행사(禮佛行事)를 함에 이르러서 “인군(人君)이 복리를 스스로 기복(祈福)하는 것을 듣지 못하였다.”는 말로부터 시작하여 기회있을 때마다 척불론을 주장하여 국가에서 불교행사를 못하게 하는 한편 모든 면에서 숭유책으로 일관하도록 이끌었다.
그의 이와 같은 주장을 뒷받침한 사람은 김자수(金子粹), 김초(金貂), 박초(朴礎) 등으로 그들은 모두 정도전의 이론을 본받았고 과격한 척불소(斥佛疏)를 올렸던 것이다. 이때, 박초는 척불을 위하여 헌신하고 있는 정도전을 추켜 세워 “천(天)?인(人)?성(性)?명(命)의 연원(淵源)을 발휘하여 공맹정주(孔孟程朱)의 도를 창명(倡鳴)하고 부도백대(浮屠百代)의 광유(?誘)를 막아 삼한천고(三韓千古)의 미혹(迷惑)을 열었다. 이단을 배척하고 사담(邪談)을 종식시켜 천리를 밝히고 인심을 바르게 하였으니 우리 동방의 진유(眞儒)는 한 사람(정도전)뿐이다.” 라고 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도 그의 척불책의 활약(活躍)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리고 척불의 방법으로 “불도(佛徒)들은 고향에 돌려 보내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함으로써 병(兵)?부(賦)에 충용하고, 그 집에 살게 함으로써 호구(戶口)를 증식케 하고, 그 서(書)를 불사름으로써 길이 그 근본을 끊을 것이며 소급(所給)된 전지(田地)는 군자사(軍資寺)에 맡겨 군량을 담당케 하고, 소속노비는 도관(都官)에게 맡겨 각 사(司)?관(官)에 분배케 하고 그 동상 동기는 군기시(軍器寺)에 속하게하여 갑병(甲兵)을 만들게 하고 그 소용의 그릇은 예빈시(禮賓寺)에 속하게 하여 각 사?관에게 나누어 쓰게 한 뒤 예의로써 가르치고 도덕으로써 기르자”는 것 등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나라는 사상사(思想史)상으로 볼 때 유?불 교체의 고갯마루를 넘고 있었던 것이며 이에는 정도전이 논리적인 척불론을 가지고 권력의 힘을 빌어 척불숭유책을 실천한 것이 아마 제일 큰 계기라 하겠다.
다음 전제(田制)에 있어서는 원나라가 지배한 이래 더욱 문란하여져 권신(權臣)귀족이 다투어 광대한 전장(田莊)을 만들고 사원이 또한 넓은 토지를 점유하고 각기 국가에 대하여 조세를 모면함은 물론, 경작 농민에게 각종 방법으로 이중 삼중의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취하여 국가의 재정도 기울어졌고 농민의 생활도 차차 빈곤해져서 고려사회는 경제적으로 거의 파탄지경에 다다랐던 것이다. 그는 이를 보고 “전제가 파괴된 후부터는 호강(豪强)이 겸병하여 부자는 땅이 더욱 불어나게 되고 가난한 자는 입추(立錐)의 땅도 없다. 가난한 자는 부자의 땅을 찬경(借耕)하여 일년내 고생하여도 먹을 것도 부족할 지경이고 부자는 편안히 앉아 전객(佃客)을 부려 그 수입의 태반을 먹는다.
국가는 아무 대책 없이 바라보고 있을 뿐 그 세(稅)를 받지 못한다. 따라서 백성은 더욱 고생하게 되고 국가는 더욱 가난해진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형편임에 전제에 대한 개혁은 일찍부터 논의되어 내려왔고 공민왕 초기만 하더라도 이색(李穡)의 개혁안이 제안된 바 있었으며 그 후에도 여러 사람이 각기 개혁을 주장해 왔다. 그러나 이것은 집권세력 및 구가세족(舊家世族)과의 사이에 큰 이해 관계가 직접 얽힌 것이어서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것을 드디어 창왕 초(1389)부터 정도전과 조준(趙浚)의 강력한 주장에 의하여 마침내 공양왕 2년(1390)에 그 개혁을 보게 되었다.
그는 개혁의 첫 방안으로써 “경내(境內)의 모든 진지를 국가에 귀속시키고 계민(計民)하여 고루 전지를 분배함으로써 옛날의 바른 전제로 복구하려 한다.”라고 하고 또한 “옛날(田制)에는 전지가 관에 있어 백성에게 나누어 주므로 경작하는 백성은 누구나 전지가 있고 따라서 천하의 백성은 누구나 다 전지를 받았고 경작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빈부의 차가 그리 심하지 않았으며 또한 그 전지의 세도 다 나라에 수납되었으므로 나라도 또한 부하였다.”라고 말하여 경작유전(耕作有田)의 이상을 실현시켜 여말(麗末) 전제를 일대 혁신하려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구가세족의 반대와 참원(讒怨)이 심하고 또한 여러 가지 정치, 사회적인 제약이 있으므로 그의 이상대로 되지 못하고 ‘과전법(科田法)’이라 불리우고 또한 그의 입으로 이렇게 말했다.
“당시 구가세족이 그들에게 불편하다하여 입을 모아 참원하고 여러 가지로 저훼(沮毁)하여 마침내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지치(至治)의 은택을 입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 어찌 탄식할 일이 아니냐. 그러나 두 세명의 대신 동지와 함께 전대의 전법을 연구 토의하고 오늘의 시의(時宜)를 참작하여 경내의 전지를 헤아려 전지의 결수(結數)를 알아 가지고 얼마는 상공전(上供田)?국용군자전(國用軍資田)?문무역과전(文武役科田)으로 하고 또한 나머지는 한량(閑良)으로 경성에 살며 왕실을 시위(侍衛)하는 자, 과부로서 수절하는 자, 향역진도(鄕驛津渡)의 이(吏)로부터 서민?공장(工匠)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역(公役)을 맡은 사람은 전지가 있게 하였다. 백성에게 전지를 나누어 준 것이 비록 옛날과 같이 되지는 못하였으나 전법(田法)이 정제(整齊)하여 일대의 전장(典章)이 마련되어 고려의 폐법을 내려다 보게 되었으니 만만 다행이아니랴.”
이와 같이 그는 새로운 과전 체제를 마련하였다.
그 다음에는 군제(軍制)는 무인 집권이후 고려 전기의 부병제(府兵制)가 거의 무너지고 장군들이 각각 군기와 장비 및 국가의 군적(軍籍)에 들지 않는 군사를 거느리는 사병제가 발달하였다. 이 제도는 몽고족 지배밑에서도 그 일부가 그대로 잔존하여 고려말까지 내려와 전투력만을 따질 때는 그 우열을 단언할 수 없으나 국왕 중심의 중앙 집권체제의 정권 확립에는 많은 위협을 주었다.
이성계의 신흥 세력이 위화도 회군 후에 정권을 장악하게 된 것도 사병에게 힘입은 바가 절대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왕?창왕을 주자학의 대의명분론을 들어 축축했을뿐 아니라 그들의 의사대로 움직이고 군림만 하는 공양왕을 옹립한 후부터는 자가(自家)들의 새 왕조를 위하여 또는 중앙 집권체제의 정비를 위하여 전제개혁과 아울러 필요하였던 과제였다. 때문에 정도전은 이 개혁을 단행할 당시에 “제장(諸將)들이 군사를 쓰고 사속(私屬)하는 것은 그 내력이 오래되었는데 이를 하루아침에 개혁하고 더군다나 구가세족이 군역을 지지 않고 전지를 갖고 그것을 먹는 것도 또한 오래 되었는데 하루아침에 그 이름을 군적(軍籍)에 올려 몸으로 군역을 치르게 하면 크고 작은 원망이 모두 신에게 돌아옵니다.”라고 변명하고 또한 “원수(元帥-이때 재상들이 각기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들을 원수라고 불렀다)를 파하고 3군을 만들어 신으로 하여금 충제사를 삼게 하면 떨리어나간 사람들이 반드시 앙앙(怏怏)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전제개혁을 단행하고 난 직후인 공양왕 3년(1391) 1월에 여러 원수를 파하고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를 두어 내외의 군사를 총령(摠領)케 하고 도총제사로 이성계를, 중군총제사로 배극렴(裵克廉)을, 좌군총제사로 조준(趙浚)을, 우군총제사로 정도전을 임명하고 2월에는 삼군부에서 군사를 열병(閱兵)하고 분번숙위(分番宿衛)케 하고 사병제는 일단 폐지하였다. 이 삼군도총부의 설치로 말미암아 모든 군사지휘권은 이성계에게 완전히 통합되었고 이 도총부를 이조 건국후에는 의병삼군부(義兵三軍府)라 개칭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조 개국 초에는 아직 새왕조가 안정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만약에 있을 장졸의 변에 대응코자 개국공신 및 왕자 등에게 병권(兵權)을 분산시켜 마치 여말의 군제로 복구하는 듯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정종(定宗)때 권근(權近)의 사병을 폐지하자는 상소를 계기로 폐지되어 여말의 분산된 사병군제의 개혁을 완전히 끝낸 것이다.
정도전은 위와 같은 여러 가지 개혁을 주장하고 추진하여 이성계 중심의 신병세력을 더욱 확장하여 가는 동안, 이에 반대하는 구가세족 또는 장차 방해된다고 생각되는 인물은 누구를 막론하고 가차없이 축출토록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이색?권근?이숭인(李崇仁)?정몽주?우현보(禹玄寶) 등 친소(親疏)와 지위에 상관없이 무자비하게 탄핵하였던 것이다.
이들을 탄핵할 때의 죄목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 중요한 것만 들더라도, 첫째는 우왕?창왕을 신씨라는 전제 밑에서 이들을 세워 一五, 六년 동안이나 왕씨 사직(社稷)을 끊게 하였다는 것으로 이색?조민수(曺敏修) 등이 이에 해당되고, 둘째로서는 윤이?이초옥(李初獄)에 관련되었다는 것으로 이에는 권근?이숭인?이색?우현보 등 이성계파에 속하지 않는 인물은 거의 총망라하리만큼 광범위하게 해당되었다. 셋째는 김저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것으로 변안렬(邊安烈)?이임(李琳)?우현보?이색 등 허다한 인물이 해당되었다.
이듬해 봄에 그는 사면되어 고향 영주(榮州)로 돌아갔다가 정몽주가 이방원(李芳遠-이조 태종)에 의하여 피살되고 정몽주 일파 50여명이 함출(咸黜)된 후인 6월에 소환되어 복작(復爵)되었는데 그는 한때 보주(甫州-지금의 예천)옥에 갇히어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하였다.
그 이유는 정몽주?김진양(金震陽) 등이 이성계 일파의 반심(反心)을 알고 그들을 숙청하여 고려 사직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하여는 먼저 조준(趙浚)?남은(南誾) 등과 아울러 이성계파의 가장 우수한 책객(策客)인 정도전을 먼저 제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성계의 도움으로 공양왕 4년(1392) 6월에 영주(榮州)에서 소환되어 올라온 정도전은 서둘러 남은?조준?배극렴 등 50여명과 힘을 합하여 그 다음달인 七월에는 기어코 공양왕을 몰아내어 고려왕조를 쓰러뜨리고 이성계를 받들어 왕을 삼아 새 조선왕조를 건국하였다. 건국하자 그는 분의좌명개국공신(奮義佐命開國功臣-開國一等功臣)에 녹훈(錄勳)되고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판호조사(判戶曹事)?판상서사사(判尙瑞司事)?보문각태학사(寶文閣太學士)?지경연(知經筵)?예문춘추관사(藝文春秋館事)겸 의병친군위절제사(義兵親軍衛節制使)에 임명되고 봉화백(奉化伯)의 봉작을 받았다.
그는 개국공신 중에서 태조에게 가장 신임을 받아 태조의 아들 방석(芳碩)을 세자로 책봉한 후에는 그를 보양하는 책임을 맡고 또한 그의 관직명만 보아도 알수 있듯이 행정?재정?군사?인사?문교 등 모든 면의 새왕조 권력의 핵심을 쥐고 개국 초의 새왕조의 방향을 제시하는 왕의 교서를 선진(選進)하는 것을 비롯하여 건국초창사업의 대소를 가리지 않고 획책하였다.
1392년(태조2) 한양 천도 때 그는 궁궐과 종묘의 위치 및 도성(都城)의 기지(基地)를 심정(審定)하고 경복궁과 각 궁전 및 궁문의 칭호, 도성?팔대문(八大門) 및 성내(城內) 四八방의 명호를 제정하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태조3)에는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찬진(撰進)하여 치국의 대요와 관제 등 모든 제도와 그의 운영방침을 제정하여 이조일대의 법제의 기본을 이루었다(經國典은 태종 때에 하륜의 經濟六典으로 增損되었다가 성종 초에 經國大典으로 완성되어 이조의 기본 법전이 됨).
이 경국전에는 뒤에 정리되는 경국대전에서 찾아볼 수 없는 다분히 이론적이고 나아가서는 역사적인 정치?경제?군사 등 국정 전반에 관한 정도전의 해박한 견해도 아울러 들어있다.
이와 같은 점은 정도전의 주자학적 이념에 기초를 둔 정치?경제론의 온축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조의 국가체제는 전제적(典制的)인 유교주의의 체제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 편제(篇制)는 중국 고대의 육전사상(六典思想)으로 체계화되었고 특히 개혁기의 새 국가에서는 새로운 제도의 정립을, “군주는 천(天)을 대리하여 통치하며 군주가 치정(治政)을 하는데는 설관분직(設官分職)한다.”라고 하여 중국적인 자연사상에 근거를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개혁하려는 데는 당시의 우리나라 현실에 반드시 발붙이고 있고 또한 그의 혁신적인 사상은 성리학적 이론으로 잘 분석하여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 경국전과 아울러 태조 5년(1396)에는 경제문감(經濟文鑑) 상하권을 저술하고 또 그 다음 해에도 경제문감별집(經濟文鑑別集) 상하권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것들도 모두 경국전과 자매편을 이루는 것으로 군도(君道)?재상(宰相)?대간(臺諫)?위병(衛兵)?주목(州牧)?현령(縣令) 등의 편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리고 각편에서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적인 연혁을 논술하여 가며 새국가의 정치와 행정을 말한 것이어서 경국전과 마찬가지로 이조 국가의 한 법원(法源)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밖에도 그는 이와 같은 자매편으로 태조 4년(1395)에 감사요약(監司要約)을 저술하였는데 이것은 주로 지방관(地方官)에 대한 내용이다.
태조 5년(1396)에 그는 우리나라와 명나라와의 사이에 표전문제(表箋問題)가 발생하여 요동 정벌의 계획을 세웠다. 표전문제는 태조 4년(1395) 말에 하정사(賀正使) 유순(柳珣)?정신의(鄭臣義) 등이 명나라에 가지고 간 왕조표전(王朝表箋) 가운데 명나라를 경박희모(輕薄戱侮)한문구가 있다하여 이를 가지고 간 유순 등을 명나라의 태조가 그곳에 억류하고 이 표전(表箋)을 지은 정도전을 보내라는 것이었다. 이를 우리나라에서 알게 된 것은 태조 5년 2월에 하정사(賀正使) 타각부(打角夫)?김을진(金乙珍) 등이 가지고 온 명나라의 예부자문(禮部咨文)에 의해서였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우선 통사(通事) 곽해융(郭海隆)을 명나라에 보내어 표전에 경박희 모한 문구가 있는 것은 우리나라의 언어가 중국과 다르고 학문이 천박한 때문이며 결코 고의로 그렇게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해명하는 한편 곧 이어서 표전의 찬자(撰者)라 하여 중추원 첨사(詹事) 김약항(金若恒)을 정도전 대신 보냈다. 그러나 명나라의 태조는 표전의 저자는 유순의 말로 정도전임을 알고 있던 터이므로 이를 극히 못마땅히 여겨 장차 정도전을 죽이려고 그를 재차 요구해 온 것이다. 뒷날 사은사(謝恩使) 설장수(?長壽)가 가지고 온 예부(禮部)의 자문중에 “조선 국왕이 가장 신임하는 문사 정도전은 국가의 화근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명나라의 태조가 얼마나 정도전을 미워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도전은 태조가 가장 신임하는 개국의 원훈(元勳)일 뿐 아니라 조선왕조의 기초를 확립하기 위한 정책을 수립하고 또 세자 방석(芳碩)을 보호하는 당대 일류의 중신이므로 도저히 보낼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에 관련하였던 김약항을 보냈던 것인데 명나라에서는 꼭 정도전을 보내라고 하여 우리나라를 곤란케 하였던 것이다.
이 때에 예문관학사(藝文館學士) 권근(權近)이 나서서 자기도 ‘정조표전(正祖表箋)’제작에 관계한 일이 있으므로 명나라 태조가 부르기 전에 먼저 가서 해명하겠다고 지원하여 7월에는 권근을 명나라에 보냈던 것이다. 권근은 명나라에 가서 그의 문재(文才)로써 잘 활약하여 정도전을 보내라는 어려운 문제와 아울러 처음 표전에 관한 문제들을 잘 해결하는 동시에 자신의 문명도 중국에까지 날리고 돌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명나라는 그 이듬해 또 다시 천추사(千秋使) 유호(柳灝)가 가지고 간 ‘계본(啓本)’가운데 중국을 업신여기는 문구가 있다하여 유호 등을 억류하고 저작자인 사성(司成) 공부(孔府)?윤순(尹順) 등을 보내라고 하였다. 이에 분노한 우리나라에서는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정구(鄭矩) 등이 백관회의(百官會議)에서 공공연히 명나라의 횡포를 규탄했고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변중량(卞中良) 등은 별도로 상소하여 반명태도를 취하였다. 이 때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반명태도를 취한 사람은 정도전이며 그는 명나라의 요동을 정벌할 계획을 세우고 군사를 양성하도록 태조에 말한 후 실천에 옮겼다.
이 사실을 태조 6년 6월 14일? 실록 기사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정도전?남은(南誾)?심효생(沈孝生) 등이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칠 계획을 하고 ‘오진도(五陣圖)’와 ‘수수도(蒐狩圖)’를 지어 태조에게 바치고 훈도관(訓導官)을 두어 각절제사(各節制使)?군관(軍官) 및 서반(西班) 각품(各品)의 성중애마(成衆愛馬)로 하여금 진도(陣圖)를 강습케 하고 또 사람을 각 도에 보내어 이것을 가르쳤다.”
정도전이 이 계획을 한 이유는 명나라와 태조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이 있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명나라가 표전문제로 우리나라에 대하여 횡포한 요구를 하였을 때에 계획한 것이므로 개인적인 감정보다도 실은 국민전체의 의사를 대표한 것이며 또 은연중 고구려의 옛땅을 찾으려는 우리의 민족적 염원에서 기인하였을 것이다.
여하튼 이 계획에 의한 군사훈련은 정도전이 태조 말년에 쓰러질 때까지 맹렬하였던 것이나 정도전의 죽음과 함께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것은 정도전이 죽자 그를 신임하던 태조도 정종에게 양위(讓位)하였고 또한 이보다 4개월 앞서서 우리나라를 괴롭히던 명태조도 사망하여 양국이 다 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도전의 이 요동정벌 계획은 그가 애써 이룩한 새왕조가 맹목적으로 사대주의만 취한 것이 아니고 항상 독립정신을 가지고 명나라와 교제하였다는 것을 단적으로 표시하는 것이며 또한 정도전이 생각한 주자학적 이념에 입각한 이조외교에 중요한 의의가 나타나 있는 것이다.
정도전은 새왕조에 들어와서는 물론 그 이전에도 위에 쓴 여러 업적과 저술외에 허다한 발자취를 남겼다. 문학으로는 당대의 우수한 시문집으로 꼽을 수 있는 “삼봉시문집(三峰詩文集)”8편을 현재까지 남기고 있으며 또한 “국초군영진적(國初群英眞蹟)”을 만들어 선초 명신들의 시문과 필적을 후세에 전하려 했고, 유학에서는 “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 “채집정씨역전오신효상-採輯程氏易傳五信爻象” 등이 있으며 역사에서는 “고려사” 37권을 찬술하여 후에 정인지의 고려사의 테두리를 잡았으며 군사학에서는 “오행진출기도(五行陣出奇圖)” “강무도(講武圖)” “팔진삼십육변도보(八陣三十六變圖譜)” “태을칠십이국도(太乙七十二局圖)” 등을 지어 군사훈련을 시켰으며 정치에서는 “경제론의(經濟論議)”를 지어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경제문감(經濟文鑑)” 등과 함께 국초문물에 이바지하였던 것이다.
일생을 한결같이 성리학적 이념의 새로운 사회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만난을 무릅쓰고 심혈을 다하여 폭넓게 활약한 여말?선초의 거인 정도전은 1398(태조 7) 8월 26일 밤 세자 방석에게 당부(黨附)하여 먼저 난을 일으켰기 때문에 군사를 일으켰다 하여 왕위 쟁탈을 목적으로 군사를 일으킨 정안군(靖安君) 방원(芳遠-太宗)의 습격을 받아 아무것도 모르는 사이에 불의의 습격을 당하고 억울하게 역적으로 몰려 비명에 가고 말았다.
그렇지만 이는 정도전에게 있어 애매한 누명에 틀림없는 것이다. 그가 죽은 이후 왕위에 올라선 이방원(태종)은 정도전의 뛰어난 공적을 삭감시키기에 애를 썼으며, 소위 제일차 왕자의 난에 있어서 그가 전실 왕자들을 죽이려고 먼저 들고 일어났다고 하는 설을 확정시키기 위해 사실(史實)을 돌려놓기까지 했다.
세차례에 걸친 유배와 감옥살이, 강력한 숭유억불 정책과 이성계를 도와 고려를 멸하고 이조를 세우기에 솔산한 탓으로 고려에서 충성을 맹세하는 인사들로부터의 생사 존망의 위협도 여러번 받은 그가, 개국한 이조로부터 받은 보답이 역적죄에 의한 피살이었다는 것은 정치 세계의 무정과 비리(非理)를 느끼게 한다. 이는 마치 한고조를 도와 온갖 힘을 기울였던 한신(韓信)에게 돌아온 운명을 방불케 하는 바가 있다.
정도전 개인은 이와 같이 비극적 풍운의 생을 살았지만, 아무튼 그는 고려의 쇠망원인이 불교의 타락에 관계된다고 보아 성리학의 이념을 내세워 이를 강력히 실천, 반영시킴으로써 이조사회의 기본적 이데올로기를 뚜렷이 하였고, 군제(軍制)?전제를 개혁함으로써 고려의 말기적 사회를 척결(剔決)케 하였던 것이다. 그런가하면 평시에 존경해마지 않던 목은(牧隱)
이색이 이성계의 역성혁명(易姓革命)에 대한 저항세력으로 등장하자 총애를 받았던 과거일을 접어두고, 목은을 탄핵하는 등 이조 개국에 있어 그의 활약은 비상하였다.
또한 그가 배원친명(排元親明) 정책을 표방한 것은 당시의 국제역학관계에 민감, 이에 적응하여 구국(救國)의 활로를 개척하려는 그의 조국애에서 나왔던 것이다. 이는 후일 명나라의 요동을 정벌하여 자주?자립의 기틀을 마련하려다가 불의의 죽음으로 실현을 못 본 그 사실만 보아도, 그가 맹목적인 사대주의자가 아님을 알게 하는 것이다. 정도전은 비록 비명에 갔으나, 그는 정치?경제?사상면에 있어서 가장 뚜렷한 “근세 지성”의 효시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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