丹學人物考 (23) 유형진(柳亨進)
유형진(柳亨進) : 조선 선조 때 사람. 찬성(贊成) 오겸(吳謙)의 사위. 어려서부터 도서(道書)를 좋아하여 항상 <참동계>와 <오진편(悟眞篇)> 등을 지니고 다니며 도가의 말에 매우 밝았다. 나이가 60이 되어서도 안색이 쇠하지 않았다. 정유재란(1597)에 그의 집이 화를 입어 처자가 모두 죽었다. 그래서 그는 집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갔는데 간 곳을 알지 못한다. 일찍이 은진(恩津)의 원을 지낼 때 한 중을 후대한 일이 있었다. 그래서 1598-9년 간에 그 중을 묘향산에서 만나 함께 숨어 버렸다고 한다.
병오년(1606)에 허균(許筠)이 좌막(佐幕: 비장(裨將)을 말한다. 감사(監司)?유수(留守)?병사(兵使)?수사(水使)?견외사신(遣外使臣)들에게 따라 다니는 관원의 하나)으로 있을 때 강가에서 임금의 부름을 받고 우연히 내원암(內院菴)의 주지인 원사리(元?梨)를 의주(義州) 성주사(聖住寺)에서 만나 방장(方丈: 화상(和尙)?국사(國師)?주실(籌室) 등 높은 중이 사는 거소)에서 함께 자게 되었다. 그래서 원사리에게 묻기를, “묘향산은 웅장하고 깊어 꾸불꾸불한 고개와 층이 진 높은 산꼭대기 등이 많고 사람이 갈 수 없는 곳이라, 틀림없이 영검한 신선이 있을 것이요, 이런 신선이 그 가운데를 왕래함을 그대는 만난 적이 있소?”하니 원사리가 대답하기를,
“빈도(貧道)는 오랫동안 두류산(頭流山)에 있었고, 이 묘향산에 있은 지는 겨우 6, 7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천성이 또한 게을러서 절경을 깊이 조사해 보지 않았으므로 아직 만나지 못했습니다. 다만 계묘년(1603) 가을에 이인(異人)을 한 분 만났습니다.”라고 하였다.
허균은 그 분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니, 원사리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해 9월에 빈도는 보현사(普賢寺)에 있었습니다. 그 동쪽에 한 노인이 있어 번지르르한 얼굴에 구레나룻을 날리며 당당한 풍채로 수없이 꿰맨 헌 옷을 입고 나타났는데, 예의가 심히 공손하였습니다. 그 노인이 말하기를, ‘생원 한무외(韓無畏: 조선 중기 사람. 청주(淸州)의 선비였다. 젊어서 임협(任俠)을 좋아하여 청주의 관기(官妓)를 독차지했는데, 하루는 그 기생의 남편을 죽이고 보복을 피하여 평안도 영변(寧邊)으로 들어가 살았다. 그때 희천(熙川)의 교생(校生) 곽치허(郭致虛)를 만나 비방(秘方)을 배워 선교(仙敎)와 불교에 몰입했었다. 그래서 나이가 80이 되어도 두 눈은 반짝거렸고 수염이 칠흑과 같았다. 그때 허균(許筠)은 원접종사관(遠接從事官)으로 있었고, 한무외는 순안(順安)의 훈도(訓導)로 있었다. 허균이 그를 만나자 이인(異人)임을 알고 함께 거주하면서 선학(仙學)을 배웠다. 그때 한무외가 말하기를, “선도(仙道)를 배우려면, 음모를 꾸미지 말 것이고, 무고한 사람을 벌하지 말 것이며, 사람을 속이지 말고, 재물을 모으지 말며, 가난한 사람을 보고 재물을 아끼지 말고, 여색이나 잡기에 가까이하지 말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독신으로 40년을 살다 보니, 집안이 가난하여 욕되게도 하지 않고 훈도가 되어 조석을 이어 나갔다 한다. 그는 병없이 살다 앉아 죽으니 순안에다 장례지냈다. 그런데 그 후 5, 6년이 지나 그의 친구가 그를 묘향산에서 만났는데 용모가 조금도 늙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친구가 “남들이 자네는 죽었다 하던데, 어째서 얼굴이 전보다 젊어졌는가?”하니, 그는 웃으면서 “그것은 거짓말이네.”라고 하였다.) 씨가 어디에 있는가요?’ 하였습니다.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 대답할 수가 없었는데, 금선대(金仙臺)에 일찍이 앉아 있었던 한 중이 그 사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답하기를, ‘한군(韓君)은 덕천(德川)과 개천(价川)사이를 왕래하는데 지금까지 30여년이 되었으나 그의 모습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혹 산에 들어오면 돌아다녀 1, 2년이 경과한 뒤 향로봉 위에 연등(燃燈)하는 곳이 있다고 해서, 올라갈 수가 없는데도, 자신은 능히 올라가 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그 일로 관소(關所)로 갔는데 동짓달에는 꼭 돌아올 것입니다.’라고 하자, 그 노인은 실망하고 돌아갔습니다. 동짓달이 되어 나는 내원(內院)으로 갔는데, 그 곳 중이 한무외가 방금 금선대에 와 있다고 말해 주어 곧 눈보라를 무릅쓰고 찾아가 보니, 깡마른 선비가 있는데 나이는 40세쯤 되어 보이고, 누더기 옷을 입고 엉성한 베이불에 진흙으로 맏든 베개를 베고 누워 있었습니다. 어디에서 오셨느냐고 상세하게 물었더니, 처음에는 서울에서 왔다 하고 다음에는 청주(淸州)에서 왔다 하는 등 말하는 것이 끝내 불분명하였습니다.
그대로 며칠 묵게 되어 그를 관찰하니, 먹고 자는 일 외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일을 물어보면 대답할 때도 있고 대답하지 않는 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10여 일이 지났을 때, 번지르르한 얼굴에 구레나룻을 날리던 노인이 홀연 당도하여 한무외를 보고 절을 하고, 손을 부여잡고 통곡을 하였습니다. 잠시 후에 그들은 귀에다 대고 한참동안 얘기를 하였습니다. 이윽고 우리 세 사람은 한 방을 쓰면서 자는데 한 달이 넘어도 그 노인은 먹지도 마시지도 않다가, 하루는 홀연 떠나려고 하였습니다. 한무외가 어디로 가느냐고 묻자, 그 노인이 대답하기를, ‘남쪽에 있을 때 예부터 잘 알고 지내던 중이 지금 북대(北臺)에 있는데, 함께 겨울을 나기로 했기 때문에 가서 그 약속을 지키려 합니다.’하고 떠났습니다.
내가 누구냐고 물어보자, 한무외는 대답하기를, ‘그 사람은 일찍이 단방(丹方) 단방(丹方:도가(道家)의 연단술(煉丹術). 곧 도가에서 불사약인 금단(金丹)을 만드는 방법을 말한다.)을 나에게 배웠는데, 성이 유(柳)씨이며, 일찍이 은진(恩津)의 원을 지낸 분이요.’하였습니다. 내가 다시 묻기를,
‘단월(檀越) 단월(檀越:시주(施主)를 말한다. 곧 중 또는 절에 물건을 베풀어 주는 사람. 여기에서는 ‘당신’이란 제2인칭으로 쓴 말이다.) 께서는 과연 이술(異術)을 하십니까?’하니, 한무외가 대답하였습니다.
‘단학(丹學)이란 곧 황로(黃老)의 대도(大道)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 도를 터득하면 장생할 수 있으니 어찌 속세의 법술과 똑같이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다시 묻기를,
‘그럼 당신께서는 이미 불사지도(不死之道)를 터득하셨습니까?’
하니, 한무외가 대답하였습니다.
‘나 역시 우리 스승으로부터 전수받고 여러 해 동안 수련하였으나 공적과 수행이 아직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며칠 뒤 나는 일이 있어 내원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 들리는 바로는, 한무외는 금선대를 떠나 이 북대(北臺)에 와서 기거한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모릅니다.
허균은 이 얘기를 듣고 매우 미심쩍었지만 더 이상 자세히는 알 수 없었다. 훗날 허균이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1556~1618) : 조선 선조때의 명신. 호는 백사(白沙), 본관은 경주. 이조판서, 우의정을 지냈으며,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진봉되고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올랐고, 영의정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의 뒷수습을 잘 처리한 명신이며, 당쟁 속에서도 붕당(朋黨)에 가담하지 않고 그 조정에 힘썼다. 문집에 ‘백사집’ 등이 있다.) 재상을 뵈올 때 우연히 유형진의 얘기를 하게 되자 이항복 재상이 놀라며 이렇게 말하였다.
“유씨의 이름은 형진이며, 찬성(贊成) 오겸(吳謙; 1496~1582) : 조선 중기 사람. 자는 경부(敬夫), 호는 지족암(知足庵), 본관 나주. 부사(府使) 세훈(世勳)의 아들. 서봉(西峯) 유우(柳藕)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1522년에 진사에 합격, 1532년에 문과에 합격했다. 1550년 금양군(錦陽君)에 진봉되었고, 벼슬이 좌찬성(左贊成) 우의정에 이르렀다.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의 사위라네. 어려서부터 도서(道書)를 좋아하고, 호흡조절과 침 삼키기를 수련하여 60이 되었어도 모습이 쇠하지 않았었지. 정유재란(丁酉再亂:1597)때 왜적에게 가족을 잃고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네. 일찍이 은진의 원이 되었을 때 한 중을 후하게 대접했었네. 무술년(1597)과 기해년(1599) 사이에 그 중이 묘향산에서 유형진을 만났는데, 유형진 혼자만이 왜적에게 죽음을 면하고 갈 곳이 없어 이 산에 은신하고 있다고 말하더라네. 나는 일찍이 그 말이 허황된 거라고 생각 했으나, 내 아들도 또한 그런 얘기를 들었다니, 실로 이상할 뿐이네. 그런데 고산(高山) 권곤(權?) 역시 말하기를,
‘외숙인 유현진 공은 도가의 말에 깊고 밝아 항상 <참동계(參同契)>?<오진편(悟眞篇: 오진편주소(悟眞篇注疎)의 준말. 3권. 중국 송나라 張伯端 지음. 옹보광(翁?光)이 주를 달고, 원나라 대계종(戴啓宗)이 소를 붙였다. 시사(詩詞) 백편(百篇)으로 금단(金丹)의 본지(本旨)를 설파했는데, <참동계>와 더불어 표리(表裏)가 되는 책이다. <직지상설(直指詳設)> 1권이 부록으로 붙어 있다.) 등의 도서를 가지고 다니며, 다른 사람을 보면 문득 수련하기를 권했는데, 늙어서도 얼굴이 번지르르하게 쇠퇴하지 않다가 난리 통에 처자를 모두 왜적에게 잃고 집을 버리고 입산하니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하였네.“
이로써 전날 원사리가 만났다는 사람은 확실히 유형진이며, 그는 도를 배워 수명을 연장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변헌(卞獻; 1570~1636) : 조선 중기의 문인. 자는 시재(時哉), 호는 삼일산인(三一山人)?팔계후인(八溪後人)?우용(寓傭), 법명은 쌍익(雙翼), 본관은 초계(草溪), 직제학 효문(孝文)의 6대손. 임진왜란 때 승군(僧軍)에 종군하여 공을 세웠고, 1610년에 문과에 급제했으나 간관(諫官)의 탄핵을 받아 취소되었다. 시서에 뛰어나 명나라에 사신을 따라 들어가 글씨로 명인이 칭찬을 받았다. 시는 명나라 <황화집(皇華集)>에 실려 있고, 문장은 <동국필원(東國筆苑)>에 들어있다.)이 묘향산에서 이른바 한생원(韓生員)이란 사람을 만났는데 10일 동안 먹지도 않고, 찬 우물에서 벌거벗고 목욕을 하기도 하는데, 나이는 자기 말로 80이라 하나 소년처럼 강장(强壯)하였다. 그리고 <노자>와 <주역>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후에 석용원(石龍遠) 화상(和尙)에게 들으니, 한무외는 이미 신선이 되어 떠나버렸다 하였다.
또 한 중이 말하는데, 얼굴이 번지르르하고 구레나룻을 날리는 사람이 어디에서 온지는 알 수 없으나, 방금 두류산에 와 있다 하니, 바로 유은진(柳恩津=柳亨進)일 것이다. 유형진은 항상 처자에게 얽매어 출가하지 못함을 한탄했는데, 이미 그의 가족을 잃어버리자 문득 산으로 들어가 성명(性命)을 수련하여 하나의 큰 일을 마치니, 진실로 그가 바라던 바였다. 아 참, 그것 이상도 하다. 어떻게 하면 공의 소매를 선대(仙臺) 위에서 잡아 천명의 이치를 이야기 듣고 마침내 훌훌 날아갈 수 있을까?
(<무명씨집>에서 인용함. 아래에도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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