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학/단학

丹學人物考 (25) 허난설헌(許蘭雪軒)

검은바람현풍 2012. 2. 23. 19:58

丹學人物考 (25)   허난설헌(許蘭雪軒)

 

 

 

이조 시대에도 역시 여성은 전체 인구의 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자는 얼마 없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족보를 보더라도 여성을 모셔온 쪽에는 그 여성의 본관과 성씨만이 기재되어 있을 뿐이고, 여성의 친정 쪽은 그 남편의 이름만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서 알 수 있다.

물론 그네들에게도 아명(兒名)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도시 이름이 기재되어 있지 않다.

여자의 아명은 보편적인 것으로 수백 가지가 민속적 조사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그 아명조차 기재되어 있지 않다. 죽어서 신주가 되어도 마찬가지이다. 이 얼마나 불합리한 것인가. 이 불합리한 것이 수백년 되풀이되어도 여기에 대하여 어떤 개혁운동이 있었다는 기록도 없다.

이것은 너무도 엄청난 역사의 장난이라고 하겠다. 성(姓)이란 앙상한 굴레 밑에 이름도 없이 사라져간 몰개성적(沒個性的)인 여성의 행렬 그것이었다.

어려서는 어버이를 따르고, 출가해서는 남편을 따르며, 늙어서는 아들을 따르라는 삼종(三從)의 예라는 허울좋은 속임수에 숨져간 것이 여성들이다.

또 허기야, 이름을 가져본들 “어욱새 속새 떡갈나무 숲에 간 뒤에 또 무슨 소용 있으리....”하며 자조(自嘲)에 젖은 숙명론자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행렬 속에 이름있는 여성들이 있다. 당호(堂號)를 가진 귀족여성과 성이 없고 이름만 가진 기생들이 있다. 그러나 당호도 이름은 아니다. 기생, 그 이름은 그늘진 모권사회의 종모법(從母法)의 굴레 속에서 오히려 욕된 이름이고, 기껏 군아(郡衙)의 기생조책(妓生條冊)에 남아 있을 뿐 그들에게도 역시 개성적인 이름은 없었다.

이러한 사실 속에서 이름이나 당호를 가진 여성은 오히려 불행한 여성이었다. 이들은 이름과 더불어 자아(自我)를 가졌고, 이 자아는 그네들 세계에서 분열을 일으켰다.

허난설헌도 그 중의 하나다. 난설헌은 호다. 그녀는 그 호를 가졌기에 이에 못지 않은 불행 속에서 사라진 여성이다. 그저 남편 김성립(金誠立) 옆에 양천(陽川) 허씨로서 사라졌더라면, 그리고 그녀가 울고 웃고 27년의 생애를 그저 이름없이 보내다가 사라졌더라면, 사람들은 그녀를 행복한 여성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녀도 이것을 알고 있었기에 평생에 쓴 시고(詩藁)를 불태워 버린 것이 아닌가. 그러나 짖궂게 그녀의 동생 허균(許筠)은 타고 남은 시고를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에게 벽제관(碧蹄館)에서 내어주었기 때문에 불행한 여성의 상징으로 후세에 등장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그녀도 400년 동안 어느 실없는 도학자들이 자기를 들추고 있다는 것이 싫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도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고뇌와 그녀의 시혼(詩魂)이 기록되어 수백년 내려온 것을 대견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녀는 이조 여성들 가운데 얼마되지 않은 ‘여자의 대열’에 참가하게 되었다. 다음에 그녀의 전기를 더듬어 본다.

그녀는 시인이었다. 그녀는 문벌이 좋은 남편 김성립 가문에 대대로 내려온 만권서(萬卷書)를 쌓아둔 별초당(別草堂)에서 평생을 여도선(女道仙)을 자처하며 읊은 많은 시가 있었으나 그녀가 요절하기 전에 불태워 버렸다 하니 더욱 호한(浩瀚)한 시고를 푸른 연기로 사르고 만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는 시와 더불어 불행을 짊어진 이조 여인의 비애이며, 한국 여성의 전형적 코오스를 밟았다고 하겠다.

반만 핀 연화(蓮花) 三?九(27세)송이

꽃은 떨어지누나! 달과 서리찬 날......

芙蓉三九朶 紅墮月霜寒

이 詩讖과 같이 27세의 꽃다운 청춘이 한송이 연꽃이 떨어지듯 여의고 만 것이다. 그녀가 이미 자기의 명이 27살에 끊일 줄을 알고 있었다면 그녀는 이미 진실로 여선(女仙)이 아닌가.

그러나 그녀는 여선은 아니다. 그리고 그녀가 남편 김성립과 금슬이 좋지 않았다고 하지만, ‘곡자(哭子)’시에 나와 있는 바, 三남매의 어머니로서 눈물이 있는 정감의 여인이기도 하였다.

작년에 딸 잃고 올해 아들을 여의다니.

슬프다! 광릉(廣陵) 땅에 두 무덤이 마주서다.

백양(白楊) 나무에 바람 쓸쓸히 불고 소나무 숲에 귀화(鬼火-도깨비불)는 밝나니,

지전태워 네혼을 부르고 찬물놓고 네 혼에 바치노라.

아노라, 오누이 혼이 밤마다 서로 만나는 것을.

배 안에 또 아이 있으나 어찌 장성하기를 바라랴

이제 황대사(黃臺詞)를 읊고 피나게 울어 슬픔을 머금노라.

去年喪愛女 今年喪愛子

哀哀廣陵土 雙墳相對起

蕭蕭白楊風 鬼火明松楸

紙錢招汝魂 玄酒奠汝魂

應知弟兄魂 夜夜相從遊

縱有腹中孩 安可冀長成

浪吟黃臺詞 血泣悲呑聲

이 얼마나 여성답고 애절한 눈물어린 시인가. 그가 여선으로 자처하는 모습보다 여자로서의 이러한 ‘피나게 우는’ 모습에 더욱 마음이 끌린다. 그러니 그가 여선으로 자처하는 것은 그 가슴속에 도사리고 있는 어떤 콤플렉스가 시키는 것에 틀림없다. 그것은 대학자의 딸로 태어나고 명사들의 누이로 있으며, 시렁 위에 만권서를 쌓아 둔 여학자요, 여류시인으로서의 지나친 자부와 녹록한 위인인 남편에 대하여 가지는 현실적인 벽으로 말미암은 콤플렉스가 시키는 일일 것이다. 흔히 현대 지식층의 여성이 겪는 자아분열을 그녀는 몸소 이조대에서 맛본 것이다. 따라서 그녀는 16세기를 살고 간 20세기 여인이라고나 할까.

허난설헌의 가문은 대대로 이름있던 허씨의 일문으로, 부친 엽(曄)은 호를 초당(草堂)이라 하고 서경덕(徐敬德)의 문인(門人)으로 부제학까지 오른 학자이자 문인이었다. 그녀의 형제는 성(筬-岳麓)?봉(?-荷谷)?균(筠-蛟山)들로서 모두 정치가?문장가들이고 그 가운데 균은 성소복부고(惺所覆?藁)’ ‘홍길동전’ 등으로 이름난 이조의 기재이며 선각자이다. 이로써 허난설헌의 어렸을 때의 환경이 그 누구보다도 좋았음을 알 수 있다. 그녀는 또한 천재의 재질과 유달리 아름다운 용모를 타고난 여신동(女神童)이라고까지 불리었으며, 다섯 살 때부터 시를 지었다고 전한다.

여성에게 문필적 교양이 차단됐던 당시여서 아버지 허엽도 오히려 이를 두려워하여 그녀에게 글을 가르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오빠들이 공부하는 데 가서 어깨너머 공부를 하였으니 그 뛰어난 총명은 오히려 오빠들보다 두각을 나타내었다 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몰래 백가서(百家書)를 들추고 크게 대성하려 하였으나 그녀에게 또 하나의 장애가 다가왔다.

그것은 결혼이었다. 다만 벌족(閥族)이 비등하다는 이유로 안동 김씨 성립의 처가 된 것이다. 김성립의 집안은 김성립까지 합하여 5대동안 문과를 한 집안이고, 김성립의 조부 김홍도(金弘道)는 진사장원과 문과장원을 하였고, 그의 부친 첨(瞻)도 문과를 하여다 호당(湖堂)에 출입한 문벌가였으니, 그 당시로는 일류에 속하는 문벌이라 할 수 있다. 김성립도 문과를 거쳐 뒤에 승지(承旨)까지 오른 것을 보면 결코 녹록한 선비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난설헌은 재주가 너무 비상하여 평범한 아내로서 지나기에는 콤플렉스가 앞섰을 것이다. 전설에는 김성립이 추남인데다가 방탕성이 있었다고 하나, 그가 그렇게 된 데에는 역시 난설헌의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아내에게서 받는 압박감과 욕구불만이 외부 여인에게 발산된 것이 아닐까.

한 사람의 아내가 되어 그녀도 딸과 아들을 낳았다. 그러나 모두 요절하고, 배 안에 들었던 아이마저 죽었다. 모두가 허난설헌의 체질이 유약했음을 짐작하게 하는 사실들이다. 그 때 읊은 시가 앞에 든 ‘곡자’시다.

여기에 곁들여 설상가상으로 허씨 일문의 옥사가 있었다. 허봉이 율곡 이이에 관련된 일로 당론으로 몰려 갑산(甲山)으로 귀양을 가게 된 것이다. 허봉도 시인이었다. 그는 5년만에 풀려 나와 백운산, 춘천 등지로 방랑하다가 1588년 금강산에 숨어버렸다. 본래 술이 과하던 그는 폐를 앓아 의원에게 보이려고 서울로 오다가 금화군(金化郡)에서 그만 죽었다. 허난설헌 보다 먼저 죽은 것이다.

그녀가 오빠 하곡(荷谷-봉의 호)에 부친 시가 있다.

어둠 깃든 창에 은촛대 낮추고

반딧불 고각을 지나쳐 여름 가고

근심스레 차가운 밤 깊었는데

쓸쓸히 가을잎은 떨어지네

산하 막혀 음신 드무니

시름은 풀길 없고

멀리 청련궁을 생각하니

적막한 산에 달빛은 홀로 밝구나

暗窓銀燭低 流螢度高閣

??深夜寒 蕭蕭秋葉落

關河音信稀 端憂不可釋

遙想靑蓮宮 山空蘿月白

이밖에도 갑산으로 귀양가는 하곡에게 붙인 시가 또한 마음을 울린다.

 

강물은 가을되어 잔잔하고

구름은 석양에 막혔구나

서릿바람에 기러기 울고 가니

차마차마 떠나지 못하네

河水平秋岸 關雲欲夕陽

霜風吹雁去 中斷不成行

- 送荷谷謫甲山

 

이 때 이별한 하곡을 먼저 여의고 영영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 시는 더욱 마음을 울려준다.

이러한 허씨 일문의 옥사와 더불어 남편 김성립의 방탕도 있어, 다감한 허난설헌은 생에 대한 의욕을 상실하고, 우울한 심정에서 도피하기 위하여 뒷 초당에서 만권서를 벗삼아 신선과 교령(交靈)하고, 때로는 무당을 불러 무당굿도 하면서 소일하게 된 것은 오히려 인간적 거리에서 동정할 만도 하다.

이리하여 신비의 시인으로서 꿈을 그리고 상계(上界)를 동경하는 ‘유선사(遊仙詞)’ 87수, ‘동선요(洞仙謠)’ 기타의 작품을 남겨놓게 되었으니 생의 비애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되는 동양적 명상의 세계를 20여세의 그녀는 벌써 체험하고 있엇던 것이다.

그녀의 한시(漢詩)에는 ‘궁사(宮詞)’가 상당한 양을 차지한다. 궁사란 한나라 성제(成帝) 때 장신궁(長信宮)의 고사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는 무제(武帝)의 총희 반첩여(班??)가 용모와 숙덕이 뒤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뒤에 요희 조비연(趙飛燕)의 미움을 받아 태후의 궁인 장신궁에서 일생을 마친 것을 제재로하여 여성의 운명적 비극을 노래하는 것이다.

허난설헌의 궁사는 그의 규방의 처지를 궁사를 빌어 읊은 것이 아닐까.

허균도 ‘궁사’를 지었으나 그의 궁사는 리얼한 것이었다. 그러나 허난설헌의 궁사는 관념적인 것이다. 그런대로 그녀는 같은 불행에 우는 여인에게 눈물어린 동정을 보냈음을 엿볼 수있다.

그러나 허난설헌이 뭇 여인에게 품은 동정은 궁인뿐만이 아니었다. 청루(靑樓)에 우는 미희를 노래한 ‘청루곡(靑樓曲)’에도 그의 감정이 가득 담겨져 있다.

집을 끼고 청루 십만 집

집집마다 문앞에 七향차 있건만

동풍은 상사버들을 꺽고

말은 가면서 낙화를 짓밟네......

來道靑樓十萬家 家家門巷七香車

東風吹折相思柳 細馬驕行踏落花

 

낙화! 꽃은 꽃이나 낙화의 신세가 된 청루의 미녀! 그것도 그녀 자신의 감정의 이입(移入)이 아닌가.

또한 가난한 여인을 노래한 ‘빈녀금(貧女?)’도 고시의 모방이라 하지만 절절한 동정이 흐르고 있다.

꽃같은 얼굴로

바느질 길쌈에 세월 보내네

어려서 가난 속에 자라

고은 임 오실 뜻 없고

밤깊도록 짜고 또 짜네

짤깍 짤깍 차거운 베틀소리

틀 속에 한필 비단

누구 옷이 될지 모르네

손에 가위를 잡으면

추운밤 열손이 어네

시집갈 남의 옷 짓고

해마다 난 홀로 자네

豈是乏容色 工鍼復工織

少小長寒門 良媒不相識

夜久織未休 ??鳴寒機

機中一匹練 終作阿誰衣

毛把金剪刀 夜寒十指直

爲人作嫁衣 年年還獨宿

어느 누구의 옷이 될지도 모르는 것을 밤새어 짜는 길쌈, 시집가는 신부들의 찬란한 비단 옷을 짓기에 밤을 새우는 여인의 노래다. 얼음장같이 손에 스며드는 가위의 차가운 촉감, 나뭇개비같이 감각을 잃어가는 꼿꼿한 열 손가락, 빈곤한 여인의 눈물어린 모습을 실감있는 표현으로 그리고 있다.

허난설헌은 조선이란 이 조그만 사회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시야를 가진 여성이다. 아니 그보다 광대한 우주에 창해일속(滄海一粟)과 같은 미미한 자기자신을 놓고 조물주에게 끝없는 원망도 해 보는 것이다.

그 세 가지 한이란 첫째, 하필이면 이 넓은 세계에서 왜 조선의 땅에서 태어났으며 둘째, 하필이면 왜 여자로 태어났으며 세째, 하필이면 허구 많은 남성중에서 왜 김성립의 아내가 되었던가 하는 것이었다.

현재의 자기의 좌표를 돌아보는 데 있어 그 연원에서부터 따져본 것이다. 체념해 버리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당연히 부정이 나올 것을 염두에 두면서도 그녀는 근본적인 데서 오는 생의 권태를 저울질 해 보는 것이다.

유교적 테두리에 얽매인 부패된 사회, 아무리 뛰어난 문재(文才)가 있더라도 여자이고 보면 길가의 엉겅퀴와 같이 저주어린 자아(自我)만 발산하고 홀로 시들어 버려야 하는 사회, 삼종의 예와 칠거지악(七去之惡)으로 여성을 매어놓은 사회, 그가 가지고 있는 섬세한 시상과 파흉(波?)치는 경륜(經綸)도 여자이기 때문에 쓸모없는 불합리한 원칙에 얽매이게 되고 여기에 그녀는 현실을 부정하고, 도피하고 신선계에의 향수를 느낀다. 또 콤플렉스를 갖게 되고 남편에의 불만을 의식한다.

그의 남편 김성립이 당대 명문임은 이미 말한 바이다. 그러나 허난설헌 형제 네 사람의 시를 따르지는 못하였다. 갑산으로 귀양가는 그의 오빠 허봉에게 시로써 회포를 말하는 그녀가 자기 남편에 대하여 한수의 시도 남기고 있지 않다는 것은 너무나 이상하다. 그의 남편 김성립은 그녀에게는 범상한 남성이었고 외경(畏敬)으로써 대할 수 있는 남편은 아니었다.

이런 것은 당시의 조혼의 여파로 빚어진 비극이기도 하였다. 더구나 두 내외가 금슬이 좋지 않은 데다가 남편 김성립은 방탕하였다.

김성립이 접(接-젊은 선비들이 모여 공부하던 곳)에 공부하러 다닐 때의 일이다. 매일 공부하러 가는 남편에게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즉 접에 가서 공부는 안하고 매일 애첩과 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듣고 그녀는 편지를 써 보냈다.

옛 접에 재(才) 있더니

오늘 접엔 재(才) 없더라

古之接有才 今之接無才

즉 옛날에는 글 잘하는 자가 많더니 오늘의 접에는 무능한 자만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속에는 풍자가 있다. ‘접-接’에 옛날에는 재방변‘才’이 있더니 오늘의 ‘접’에는 재방변이 없어 ‘첩-妾’이 되어 ‘오늘의 접은 첩이다’라는 뜻이다.

그는 남편의 방탕함을 듣고도 보통의 여성들이 그럴 때에 갖게 되는 질투의 불길 대신 이런 파자(破字)풀이를 들어 남편을 비롯한 남성들을 경멸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도 역시 여성이기에 남편의 사랑을 그리워하여 ‘규원(閨怨)’이란 시를 지었다.

비단띠 비단치마 눈물자국

한해 풀이 우거져도 왕손은 안 오네

구슬 비파 비껴 안고 강남곡 켜 보았네

비에 진 이화 위에 낮은 한결 밝았네

錦帶羅裙積淚痕 一年芳草恨王孫

瑤箏彈盡江南曲 雨打梨花晝掩門

 

월루에 가을져도 옥병은 비었네

서리친 갈잎에 외기러기 나리고

구슬 비파 한 번 켜도 사람은 안 오네

연못 속에 연꽃조차 시들었네

月樓秋盡玉屛空 霜打蘆洲下暮鴻

瑤瑟一彈人不見 藕花零落野塘中

얼마나 한스럽고 원망에 찬 시인가! 그녀의 시 ‘추한(秋恨)’도 또한 이 ‘규원’과 같다.

 

붉은 깁 너머로 등잔불 붉은데

꿈 깨 보니 비단 이불의 한 편이 비었네

찬서리 옥초롱엔 앵무만 속삭이고

뜰앞에 우수수 서풍에 오동잎 지네

絳紗遙隔夜燈紅 夢覺羅衾一半空

霜冷玉籠鸚鵡語 滿階梧葉落西風

- 秋恨 -

 

꿈에서 깨니 비단이불 한쪽은 비었고, 옥초롱에 선 앵무새의 정담이 들여오는데, 홀로 임이 올까 기다리는 뜰앞에 서풍에 떨어지는 오동잎 소리만 스산하니...... 그도 결국 한 여성으로서 남성을 그리워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三남매의 어머니였음을 생각하면 남편에게 여성으로서의 자세를 가다듬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리고 남편을 도와준 일화도 있다.

남편의 친구 송도남(宋圖南)이란 자가 늘 남편을 찾아와서 부를 때엔 이렇게 놀려댔다.

“명성립이 덕성립이 김성립이 있느냐.”

이런 때 주변없는 남편은 한마디 대꾸도 못하고 얼굴만 붉히고 나오는 것이다. 이를 보고 남편을 딱하게 여긴 그녀는 응수할 말을 일러 주었다. 다음날 송이 오자, 김성립은 전에 없이 의기양양해 하면서 “오 귀뚜라미 맨드라미 송도남이 왔구나.” 이렇게 응수하니 송이 웃고 “부인에게 배운 모양이군!” 하고 넘겨잡았다는 일화가 남겨지고 있다.

허난설헌은 27세의 청춘을 그의 세 자녀를 앗아간 사마(死魔)에 또 빼앗기니 이는 1589년(선조 22) 3월 19일이었다. 유체는 광주군(廣州郡) 초창면(草昌面) 요수산(饒水山)에 묻히었고 남편 김성립도 3년후 임진란 때 왜병의 칼 끝에 사라지니 그의 운명 또한 기구하다 하겠다.

지금 전해지는 ‘허난설헌집’은 목판으로 된 ‘난설헌집’과 활자판으로 된 ‘허부인난설헌집경란집(‘許夫人蘭雪軒集景蘭集)’의 두 책이 있다. ‘허난설헌집’은 전기한 바 허균이 주지번에게 준 허난설헌의 시고를 그가 명나라에 가지고 가서 출간한 것이고(萬歷丙子孟夏甘日朱之蕃書於碧蹄館中), 뒤의 것은 주지번이 출간한 그녀의 시집에 허경란(許景蘭)의 작품을 차운(次韻)으로하여 병재한 것이다.

허경란은 선조 때 중국으로 건너간 역인(譯人) 허지(許紙)의 딸이다.

고독했던 그녀는 고국의 한 줌 흙을 대하는 양, ‘난설헌집’의 시들을 탐독하고, 난설헌의 비범한 시재에 놀란 그녀는 그 시 하나하나에 화운(和韻)하였는데 그것을 양백아(梁伯雅)라는 이가 편찬하여 ‘해동란(海東蘭)’이라는 표제를 붙여 시집이 된 것이다. 아울러 그녀의 심취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전한다. 즉 그녀가 27세 되던 해 집사람들에게 “내가 금년에 죽을 것이다.”라고 예언을 했다. 그녀는 자기가 난설헌의 환생(還生)이라 믿고 자기도 꼭같은 운명을 밟으리라고 믿었기 때문인데 행인지 불행인지 그 해를 무사히 넘기자 그녀는 실망하고 마침내 여산(廬山)에 들어가 여관(女冠)이 되었다고 하며 그 후 생사가 아득하다는 이야기다.

허난설헌에 대하여는 후세에 평어(評語)가 두갈래로 갈라진다. 하나는 여류시인으로 대접하여 찬사를 아끼지 않는 인사와, 또 하나는 그녀의 시가 위작(僞作)이라는 평이다. 그녀의 작품에는 위작이나 허균의 차작(借作)도 있겠지만 그녀의 시가 확실한 것이 많고 또 평생의 시를 거의 불태워 버렸다 하니 그녀를 폄가(貶價)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평범한 아내를 맞아 평생을 아내의 시 한줄 듣지 못하는 후세 남편들의 시기에 찬 평가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4백년 동안 그녀에게 대한 찬사는 오히려 부족함이 없다.

더욱이 국문학사에서는 ‘규원가(閨怨歌)’의 작가로 그녀를 지목하고 있는데 여기에도 의문은 남지만, 그만큼 그녀의 시재를 신화화(神話化)한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