丹學人物考 (26) 송시열(宋時烈)
우암 송시열은 인조(仁祖) 때부터 숙종에 이르는 四대에 걸쳐 벼슬한 주자학의 거유이다. 또한 노론(老論)의 개조(開祖)로서 당쟁의 중추적 존재이기도 했으며 명나라를 존숭하고 청나라를 배격한 정치가이기도 했다.
八八八책으로 된 조선왕조 역대실록의 방대한 책 가운데 한 사람의 이름이 三천 번 이상 나오는 것은 송시열 한 사람 뿐인 것을 보면 설령 큰 사건이든 작은 사건이든 아니면 좋은 일이었든 나쁜 일이었든 간에 이것은 우리 나라의 기본되는 사료(史料)와 연관이 많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만 가지고도 우리는 그의 역사적 위치가 얼마나 컸던 것인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선조 40년(1607) 11월 12일 그의 어머니 곽(郭)씨는 명월주가 입으로 들어오는 태몽이 있은 후 그를 낳았다 한다. 또한 그가 출생할 그 시간쯤에 그의 아버지 송갑조(宋甲祚)는 마침 종가(宗家)의 제사에 참례하기 위해 청산(靑山) 땅에 가 있었는데 전날 밤 꿈에 공자가 제자들을 거느리고 자기 집에 오는 꿈을 꾸어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옥동자를 낳았다는 회보를 받았다 한다. 집에 온 그는 “이 아이는 성인이 주신 것이라.”하여 성뢰라는 이름(兒名)을 지어 주었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기골이 뛰어나게 장대하여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었으며 여덟살 때부터 친척되는 송이창(宋爾昌)에게 글을 배웠다. 송이창은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아버지인데 그 때부터 송시열은 자기보다 위인 송준길과 같이 공부하게 되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 후 일생을 두고 학문과 정치생활에 있어 그와 고락을 같이 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가정에서는 아버지 송갑조가 극히 엄격하였으며 그가 날 때의 몽조(夢兆)로 보아 장래에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여간한 것이 아니었던 모양으로, 그는 가끔 아들을 앉혀 놓고 “주자는 후공자(後孔子)이고 율곡은 후주자(後朱子)이니 공자를 배우려면 먼저 율곡에게서 비롯하라.”하며 율곡 이이의 “격몽요결(擊蒙要訣)”을 가르쳤다.
인조 8년(1630)에 아버지의 三년상을 벗은 송시열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들어가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가례(家禮)’ 등을 배웠는데 김장생은 율곡의 으뜸가는 제자로서 서인(西人) 학자 가운데서도 명망이 높았으므로 송시열은 이로써 율곡의 학통을 그대로 물려받게 되었다. 송시열은 학문을 닦을수록 더욱 더 율곡과 주자에 대한 존경심이 짙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一년 뒤에는 김장생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어 그의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에게 다시 배워 학문을 대성하였다. 아버지와 스승을 잃고도 끈기있게 학문의 길을 닦는 그는 특히 주자에 관한 책들을 많이 읽었으며 모든 생활의 기준도 거기에 따르려고 하였다. 그 뒤에도 송준길의 권유에 따라 회덕(懷德) 송촌(宋村)으로 옮아 와서 그와 한 마을에 살면서 같이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다.
회덕에서 김집이 사는 연산(連山)까지는 50리나 떨어져 있었으나 송시열은 매일같이 책과 도시락을 메고 다니면서 공부에 전념하엿다. 그는 흔히 연산까지 가기 십리 못미쳐서 점심 밥의 절반을 먹고 나머지는 싸서 나무가지에 걸쳐 두었다가 오는 길에 먹곤 하였다.
송시열이 만년에 도보로 산수를 유람할 때면 따라나선 문생들이 미쳐 쫓아갈 수 없을 만큼 잘 걸었던 것이라든가 넓은 개울이나 도랑을 평지같이 걸어다닌 것은 모두 이 때에 익힌 것이었다. 그는 뒤미처 못 따라오는 제자들에게 흔히 “三시마다 한 되 밥을 못먹고 하루에 백리 길도 못가는 사람은 학문도 능히 성취해 내지 못하는 위인이다.”하는 말로 재촉하곤 하였다.
이로써 그의 젊었을 때의 면학의 고심과 기품의 건장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인조 11년(1633)에 송시열은 27세의 청년학자로서 생원시험에 장원 급제하였다. 그 시험의 문제는 일음일양(一陰一陽)이 위도(謂道)라는 주역의 철학적 문제였으므로 송시열은 태극음양(太極陰陽)의 이치와 천지조화의 근원을 논한 문답식 논문을 제출하였다. 고시관들은 이것이 답안지로 적당한 글이 못된다하여 채택하기를 꺼려하였다. 그러나 대제학 최명길이 “이 글은 명세대유(名世大儒)의 글이니 보통 사람들의 그것과는 비할 수는 없는 것이다.”하여 장원으로 뽑았다. 그 해 10월에 경릉참봉(敬陵參奉)으로 부임하였으나 나이 많은 어머니를 떠나 먼 곳에 있을 수 없다고 하여 곧 돌아오고 말았다.
인조 13년(1635)에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스승이 되었거니와 후에 송시열이 효종(孝宗-봉림대군)과 특별한 관계가 있었던 것도 실로 이 때부터 맺은 정의였다.
다음 해인 1636년 겨울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대군과 비빈들은 먼저 강화로 피란하고 송시열은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으로 들어 갔으나 그 다음해 봄에 인조는 청나라에 치욕의 항복을 하게 되고 효종이 심양에 볼모로 들어가게 되자 송시열은 속리산으로 돌아와 거기서 난을 피하고 있는 어머니를 모셨다.
그러다가 전란이 휩쓴 혼잡한 세상을 떠나려고 황간 냉천리(冷泉里)로 내려가 빈한한 생활을 하면서 독서와 학문을 가르치기에 전념하니 사방에서 많은 학자들이 그에게 모여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그에게 용담현령(龍潭縣令)?세자익위(世子翊衛)?익선(翊善)?진선(進善)?지평 등의 벼슬을 주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인조 27년(1649)에 효종이 왕위에 올라 각별히 입궐하라는 유시가 있자 송시열은 비로소 서울에 올라와 진선(進善)?집의(執義) 등의 자리에 있으면서 매일같이 경연에 나아가 임금을 뵙고 경사(經史)를 강의하는 한편 정책에 대해서도 의견을 진언하는 등 활약을 하였다. 그 때부터 송시열은 효종과 특히 정의가 두터워졌다. 그와 같은 시기에 왕의 총애를 받고 있던 이완(李浣)과 더불어 이완은 무관으로서 송시열은 문관으로서 각각 왕의 고굉(股肱)이 되어 자나깨나 고심거리인 왕의 북벌 계획에 문무합심으로 적극 참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때마침 세도를 부리던 김자점(金自點)의 행패가 나날이 심하여 여러 차례 행패를 막도록 주청을 올렸으나 효종은 그 비행을 모르는 바도 아니지만 선조(先朝)에 공훈이 많았던 신하로서 재상의 자리에까지 있었다는 것 때문에 신중히 다루려 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귀양의 명을 내리고 말았다. 이에 반감을 품은 김자점의 아들 김식(金?)이 부제학 신면(申冕)과 공모하여 효종이 새로운 인재를 많이 등용하여 청나라를 칠 계획을 꾸미고 있다고 청나라의 조정에 밀통하였다. 이 말을 들은 청제(淸帝)는 즉시 병력을 우리 국경에 출동시켜 위압을 더하고 또 특사를 보내어 온갖 방법으로 협박과 공갈을 늘어 놓았다.
뜻하지 않은 사건이 일어나자 송시열은 다시 벼슬의 뜻을 버리고 시골로 돌아가 초야에 묻혔다. 효종은 여러번 소명을 내리고 진선?집의?충주목사(忠州牧使) 등의 내외직을 주었으나 그는 끝내 사양하고 나서지 않았다.
효종 5년(1654)에 다시 집의?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의 벼슬로, 다음해에는 이조참의(吏曹參議), 효종 8년에는 시강원(侍講院)의 찬선(贊善), 9년에는 이조참의?예조참판(禮曹參判) 등의 벼슬을 주는 한편 식찬(食饌)을 내리고 태의(太醫)로 하여금 건강을 돕게 하는 등의 전례없는 은전을 계속 베풀었으나 그때마다 그는 글을 올려 이를 사양하였다.
그러나 이해 유월에는 효종의 밀교까지 전해졌다. 그리하여 송시열은 시강원 찬선의 자리를 받아 일하던 중 9월에는 특지(特旨)로 이조판서에 오르게 되었다. 이때 그는 여섯 번에 걸친 사소(辭疏)를 올리며 사양하였으나 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더욱 강경하게 돈소(敦召)하여 하는 수 없이 그 자리에 앉게 됨으로써 비로소 본격적인 정치생활에 들어가게 되었다.
효종의 신임은 날로 두터워져서 그의 진언과 시책은 왕이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없었고 그의 발언은 곧 정책에 반영되었다. 특히 북벌에 대하여 군신이 계획할 때면 효종은 다른 신하를 멀리하고 종래의 격식을 깨뜨리고 승지와 사관(史官)마저 그 자리에 두지 않고 송시열과 마주앉아 대계를 논하곤 하였다.
이때 다른 신하들과 환시(宦侍)들은 모두 대궐 밖에서 기다리게 하였기 때문에 아무도 그 내용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것을 송시열 자신이 비밀히 기록하여 두었는데 그 내용은 뒤에 숙종의 명에 따른 「효종실록(孝宗實錄)」편찬 때에 사료로 쓰이게 되었다.
효종 5년 겨울의 어느날 효종은 이례적으로 정원(政阮)에 전교를 내리고 『이조판서 송시열이 입시(入侍)할 적에 입은 옷을 보니 너무 엷어 이 추위에 질병이 생길까 근심되니 털옷 한벌을 즉시 하사하라.』하였다. 송시열은 왕이 자기에게 털옷을 주라는 명을 내렸다는 말을 듣고 곧 『지금 우리의 처지로서 누더기를 입으면서라도 참아가면서 국력을 길러야 할 터이니 실오리 한 파람도 허비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이 같은 사치품을 입을 수 없습니다.』라고 왕에게 옷을 받는 것을 사양하였지만 효종은 듣지 않았다. 며칠 뒤에 송시열이 왕을 뵙자 『경은 내가 옷을 주는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장차 요동평야의 눈보라 치는 벌판에서 이 털옷을 입고 같이 달려 보자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효종의 특별한 유시에 송시열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이 뜻깊은 털옷을 받아가지고 돌아와 깊이 간직해 두고 입을 날을 기다렸던 것이다.
뒤에 효종이 끝내 북벌계획을 실현치 못하고 돌아가자 그는 해마다 왕의 기일(忌日)이 돌아오면 이 털옷을 꺼내어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그리고 그가 죽은 뒤 이 털옷의 안을 받쳤던 비단을 뜯어 다시 옷을 만들어 그의 관 속에 넣었다고 한다.
송시열은 앞서 10여년 전에 황간(黃澗)에 묻혀 살 때 백호(白湖) 윤휴가 발표한 「이기설(理氣說)」에 대하여 해명한 일이 있었다. 윤휴의 이기설은 율곡의 학설을 배척하였을 뿐 아니라 성혼(成渾)의 학설 쯤은 논란의 대상에 넣지도 않았다. 송시열은 이 외고집의 학설을 통박하는 글을 써서 직접 윤휴에게 보냈으나 그는 자기 주견을 굽히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윤휴는 그 밖에도 중용?대학?경서 등에 대하여 주해(註解)를 쓴 것이 있었으나 그것에는 주자의 학설과 어긋나는 주장이 많았다.
말하자면 그 주해를 입론하는 태도가 처음부터 주자의 집주(集註)를 생각에 넣지 않고 독자적인 견지에서 자기 주관을 체계화한 것이었다. 주자의 학설을 신명같이 받들던 송시열의 입장으로 볼 때 그러한 독자적인 주장에 혐오와 모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송시열은 윤휴의 주해에 대하여, 이것은 그럴듯하게 꾸민 거짓 학설이며 오랑캐나 짐승의 도이며 공자가 연 유교의 도적이라는 악평을 퍼부었던 것이다.
그 후 효종 4년(1653) 7월(윤7월)에 송시열은 윤선거(尹宣擧)?유계(兪棨) 등과 황산서원(黃山書院)에 모여 시회(詩會)를 열었는데 그날 밤 그 곳에서 묵으며 그는 밤이 새도록 윤선거와 함께 윤휴의 「경전주해(經傳註解)」에 대한 토론을 벌이었다. 송시열과 윤휴는 처음에는 극히 친밀한 사이였고 또 두 사람은 서로 친척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송시열은 자주 윤휴를 찾았고 또 가기만 하면 며칠이고 묵으면서 침식을 잊고 학문토론에 열중한 적이 많았다.
그렇게 친밀하던 사이가 윤휴의 이기설과 경전주해 발표를 계기로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으며 이것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심각해지고 확대되어 원수같이 생각할 정도로 악화되고 말았다. 그러나 윤휴는 자기의 재주와 학문을 믿고 선현들의 학설을 마구 비평하였다. 자기의 견해만 고집하는 것은 선현에 대한 존경의 예의와 유학적인 겸양이 부족하였던 탓이라고도 볼 수 있으나 그 반면에 윤휴의 경전주해의 내용은 입론(立論)의 요지가 뚜렷하고 해석의 방법도 또한 참신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해박한 식견과 유려한 문제에 경탄을 금치 못하게 하였다.
또한 그 시대와 환경 속에서는 만만한 자신을 갖지 않고는 감히 무슨 학설이고 내놓을 수 없다는 시대적 상황을 생각할 때 이처럼 독단적인 학설을 당당하게 발표하는 윤휴의 기개와 역량을 장하게 여기는 이도 적지 않았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가장 윤휴에게 많은 성원을 보냈고 또 그 때문에 송시열의 미움을 사게 된 사람이 미촌(美村) 윤선거였다. 그리하여 이 황산담론에서도 송시열은 윤선거의 이 점을 비판하면서 『하늘이 공자의 도(道)를 이으려고 주자를 낳았으니 실로 만세의 도통(道統)이라. 주자 이후부터는 어떤 진리도 뚜렷하지않은 것이 없고 어떤 경전도 밝혀지지 않은 것이 없거늘, 윤휴가 감히 자기 소견을 세워 제 마음대로 억측을 부리는데 공은 어찌하여 그것을 조력하여 주자에게 배반하는 무리가 되려 하는고.』라고 다그쳐 물었다. 이에 윤선거는 『우리는 경전의 정온(情蘊)을 다 알지 못하오. 그러나 의리는 천하의 공물(公物)인데 공은 지금 윤휴에게 감히 말도 못하게 함은 무엇 때문인고. 주자 이후에도 경전에 대하여 많은 설화를 조금씩 주해한 것이 있지 았았는가.』라고 오히려 항변하였다. 이에 송시열은 다시 「공은 윤휴의 재주와 기지가 특히 고명하다고 탄복하였는데 옛날 중국의 역적들인 왕망?동탁?조조 같은 무리가 다 그러했으니 윤휴도 그들과 같은 글도둑이다. 공도 그와 협조했으니 이후에 만일 대의에 좇아 죄를 다스릴 때에는 공이 윤휴에 앞서 죄를 받을 것이니라.」하며 객노에 찬 쟁론을 반복하여 밤이 깊어가는 것조차 모르고 열을 올렸던 것이다.
뒤에 이 문제가 점차 당쟁의 감정으로 확대 발전되었고 또 기해년 이후에 이르러 방례문제(邦禮問題)가 일어나고부터 송시열과 윤휴 사이의 대립과 반목은 한층 격화되어 결국에는 숙종 6년(1680)의 경신환국(庚申換局)에 이르러 윤휴는 사사(賜死)의 비참한 말로를 걷고 말았다.
‘경전주해’에 대하여 송시열 이후의 유학자들이 취한 태도를 보면, 성호 이익(李瀷)은 그의 저서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이렇게 논술하고 있다.
경서 읽기는 실로 어렵다. 주자 이후에 주해가 갖추어진 것이 중용과 대학보다 나은 것이 없는데, 그 중에서 주해가 틀리는 것이 있어도 고금이 모든 유학자들이 이것을 찾아내지 못하면서 다만 옛날 주해를 의심하면 망해(妄解)로 하고 다른 서적과 비교하여 고증을 하면 죄과로 돌린다. 이런 버릇이 있으니 우리나라 학문이 뒤떨어짐을 면할 수 없다. 그래도 중기에는 이언적이 ‘대학보유서(大學補遺書)’도 내었고 율곡은 중용주해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여 “성학집요(聖學輯要)”에 게재하여 그것을 간행한 후 경연에서 강의까지 하였으나 지금보다는 더 자유로웠던 편이다.
그런데 후세로 내려오면서부터 유학자들은 다른 학설을 막는 법을 더 굳게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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