丹學人物考 (20) 김시습(金時習)
연 대 : 1435(세종17)~1493(성종24)
본 관 : 江陵 父- 金日省
字 : 悅卿
號 : 梅月堂 東峯(淸寒子 碧山淸隱)
주요저서 : 금오신화 十玄談要解 外 多數
매월당 김시습은 고려의 시중(侍中) 태현(台鉉)의 후손인 충순위(忠順尉) 김일성(金日省)의 아들로 세종17년(1435) 서울의 성균관 뒤에서 출생했다.
시습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세상 사람들이 신동이라 불렀는데 그의 이름이 시습이라 지어진 것도 그가 태어난 지 여덟달 만에 글자를 깨쳐 친척이었던 집현전 학사 최치운이 그의 재주를 보고 기이하다하여 이름을 논어의 맨처음 구절인 <학이시습(學而時習)>에서 따다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전해오는 말에는 시습이 태어날 때에 성균관 사람들이 모두 공자(孔子)가 반궁리(泮宮里) 김일성(金日省)의 집에서 태어나는 꿈을 꾸어 이튿날 그집에 물어보니 매월당이 태어났다고 하였다.
또는 매월당의 어머니 장씨(張氏)가 공자께서 집으로 오신 것을 맞이하는 태몽을 꾸고 시습을 낳았다고도 한다.
해동전도록에 의하면 시습이 태어난 다음해에 훗날 그의 단학 스승이 될 설공 김고운이 매월당을 만나보고 훌륭한 그릇임을 알아 도술 공부하기를 권유했으나 시습은 그때 바야흐로 세상일에 대한 집념이 강하여 능히 깨닫지 못하고 세상일에 더욱 관심을 쏟았기 때문에 단념한채 돌아갔다고 한다.
김시습은 3세 때에 한시를 지을 줄 알아
복사꽃 붉고 버들잎 푸르러 삼월도 저무는데
구슬꿴 푸른 바늘은 솔잎의 이슬
桃紅柳綠三月春 珠買靑針松葉露
라는 시를 지어 주위사람을 놀라게 했을 뿐 아니라 하루는 유모가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비는 아니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누런 구름 조각 조각 사방으로 흩어진다.
無雨雷聲 何處動 黃雲片片 四方分
라는 시를 읊었다고 하니 과연 범인의 재주는 아니라고 하겠다.
다섯 살 때에는 “중용” “대학”을 통달하여 김오세(金五才)라 불리웠는데 그 음은 오세(傲世)와 같아서 세상을 내려 본다는 뜻이다.
후일 그가 우거하던 설악산의 암자도 오세암(五歲庵)이라 하였다. 이런 천재적 재능이 온 세상에 떨치자 이 소문을 전해들은 대신 허조(許稠)는 과연 시습의 재주가 어느 정도인가를 시험해 보려고 했다. 그리하여 하루는 일부러 틈을 내어 나이어린 시습을 찾아갔다. 허조는 시습에게 “너는 아직도 나이가 어리어 앞길이 창창하지만 나는 이미 늙어 쓸모없는 사람이니 ‘노-(노(老))’자를 넣어 시 한 수를 지어 보아라”하였더니, 시습은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시옵니까. 세상일은 모두 마음가짐에 달렸다고 봅니다.”하고 조심스럽게 아뢰면서 시를 짓기를,
“늙은 나무에 꽃이 피니 마음은 늙지 않았습니다(老木開花心不老)”라고 하였다.
“참! 소문 그대로 신동이로군!” 허조는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무릎을 탁치며 외쳤다.
세종대왕은 이 이야기를 듣고 승정원 지신사(知申事) 박이창(朴以昌)을 시켜 시험해 보도록 분부를 내렸다. 그리하여 박이창은 “동자의 배움은 백학이 청송 끝에서 춤추는 것과 같도다.(童子之學 白鶴舞靑松之末)” 하는 글귀로서 그 대귀를 재촉했다. 이에 시습은 서슴치 않고 다음과 같은 글귀로서 화답하였다.
“성주의 덕은 황룡이 푸른 바다속에서 뒤척이는 듯하오.(聖王之德 黃龍飛碧海之中)”
이때 시습의 나이는 불과 다섯 살이었으니 보통사람으로서는 참으로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박이창은 그의 천부적인 문재(文才)에 경탄하면서 한편으로는 너무 귀여워 친히 시습을 이끌어 무릎위에 앉혀놓고 수차에 걸쳐 시험하여 보았으나 역시 시를 잘 지었다.
이러한 사실을 전해들은 세종은 크게 경탄하며 장차 크게 쓸 것을 약속하고 명주 50필(혹은 100필이라고도 함)을 하사하며 시습에게 가져가라 하였다. 시습은 서슴치 않고 명주필의 끝과 끝을 이어서 끌고 나갔다. 어린 나이에 이처럼 슬기로왔으니 그 이름은 전국에 떨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신동 김오세-神童 金五歲” 얘기로 꽃을 피웠다.
참으로 대성(大成)이 기약되는 천재 김시습이었다. 그러나 세상일은 뜻한대로만 되지 않았다. 시습은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예기치 않던 일들이 속출하여 불행스런 사태가 그칠 줄 모르고 계속 되었던 것이다.
그는 15세 되던 해에 모친상을 당하여 부득이 외가에 내려가 있게 되었다. 그러나 3년상을 마치기도 전에 외조모가 사망하였다. 김시습은 곧 귀경하였으나 그의 부친이 병들어 있어 집안 형편은 말할 수 없는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이처럼 집안의 우환으로 인해 인간적으로 고뇌에 빠진 시습에게 또 다른 고통이 중압해 왔으니 계유정난(癸酉政亂)과 단종애사(端宗哀史)로 인한 시대적인 번민에의 길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시습은 당시에 삼각산 중흥사(中興寺)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세조가 패권을 잡았다는 소식을 듣자 비분강개한 나머지 대성통곡하면서 책을 불사르고 그 길로 삭발하고 중이 되어 정처없이 유랑의 길을 떠났다.
맨처음 당도한 곳은 고려의 옛서울 송도였으니 인세의 흥망성쇠에 새삼 느끼는 바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하나의 돌 한 알의 모래가 모두 옛일을 말하는 듯 하였고 가고 없는 사람에 대한 회한을 어떻게 풀 수 있었으랴! 그는 술에 취하여 언제나 말하기를 “우리 영릉(英陵 : 세종대왕의 묘호)을 보지 못하였느냐?”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한다.
발길을 옮겨 흐르는 강물을 건너고 준령을 넘을 때마다 아름다운 자연의 경치에 도취되어, 벼슬을 하였던들 이러한 좋은 경개는 맛볼 수 없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달래었다.
그는 방랑중에 한계산(寒溪山)에서 설공 김고운을 만나게 되었다. 설공은 그가 태어난 다음 해에 그를 만나 도 공부하기를 권했던 사람으로 그의 앞일을 이미 알고 그를 다시 기다렸던 것이다. 세상일에 이미 실망했던 시습은 설공을 좇아 道의 요지를 전수받고 丹을 일년만에 이루고 설공은 물로 化하여 상계(上界)로 올라가고 시습은 금강산에 들어가 丹을 더욱 수련하였다. 丹을 수련한 지 9년만에 인간세상에 내려와 다시 속인이 되었는데 세상은 여전히 시습의 마음을 격하게 할 뿐이었다.
그러나 마음을 가라않히고 책을 시기 위하여 서울로 올라왔다. 때마침 효령대군의 권유로 세조의 “불경언해(佛經諺解)”사업을 도와서 교정을 맡아 보았다.
시습은 조정이 평소에 못마땅히 여기던 사람들로 혼란한 것을 보자 31세 되던 해에 금오산에 들어가 산실(山室)을 짓고 필묵을 벗삼아 평생을 보내려고 생각했다.
어느날 세조가 운수천인도량(雲水千人道場)을 원각사(圓覺寺)에서 베푼 일이 있었다. 여러 스님들이 “이번 모임에 설잠이 빠질 수 없다”고하여 세조가 설잠을 부르라고 명하였다.
집안을 두루 찾아 보아도 설잠의 행방은 알길이 없었는데 김시습이 변소에 빠져서 얼굴만 내놓고 있을 뿐이었다. 세조는 설잠이 곧 김시습임을 깨닫고 자기를 놀린 것으로 단정하여 격노하였으나 신하들이 광인이라고 아뢰었으므로 불문에 붙였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었지만 매월당의 공부는 더욱 깊어지고 명성도 더욱 멀리까지 퍼져 道를 묻고자 찾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없이 많았다.
시습은 배우러 오는 사람들을 때로는 돌로 치려고하여 쫓아 버리기도 하고 화살을 쏘려고도 하여 문하생들을 받지 않으려고 하였으며 혹 받는다 하여도 김을 매게 한다던가 험한 일을 시켜 내쫓기가 일쑤였다.
이처럼 문하생을 받지 않고 미친 행동을하여 당시로서는 용납못할 행동을 예사로 하고 다녔지만 실은 단종에 대한 충정과 절개로 일생을 살으려고 한 때문이지 진짜 미쳤었던 것은 아니었다.
시습습은 단학(丹學)전수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정희량, 윤군평, 홍유손 등을 은밀히 불러 단을 수련시키고 스승에게 전수받은 비법들을 함께 각자에게 전수하였다.
이때 홍유손에게는 천둔검법(天遁劍法)과 연마진결(硏磨眞訣)을, 정희량에게는 옥함기(玉函記)와 내단요법(內丹要法)을, 윤군평에게는 참동계(參同契)와 용호비지(龍虎秘旨)를 전수하였고 이들은 후일 스승의 공부법을 후배에게 착실히 전수하여 우리나라 단학의 맥을 잇게 하는데 커다란 공을 세웠다.
선생의 저작물인 “금오신화(金鰲神話)”는 현실세계에서 이루지 못한 이상을 상상의 세계에서 그려내고 있는 소설로서 우리 문학사상 불후의 명작으로 손꼽히고 있는데 작중 인물은 선생의 자유사상과 인간성의 승리를 예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등의 3편에서는 지옥, 천국, 수궁의 이질적인 상계의 여러 양상을 그려놓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어쨌던 시습은 현실을 부정하고 항거하면서 때로는 詩로 현실을 꼬집고 때로는 괴팍한 행동으로 고관대작의 허위를 비웃고 때로는 세인이 이해못할 기이한 행적으로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시습은 중이 되어 돌아 다닐 때 머리는 깍고 수염은 남겨 두었는데 그 뜻을 시로 지어, 머리를 깍은 것은 더러운 세상을 도피함이요, 수염을 있게한 것은 대장부를 표시함일세.
削髮逃塵世 有須表丈夫 라고 하였다.
시습의 시는 멀리 중국에도 감복시켰는데 그 연유는 이러하다.
정사룡이 중국에 들어가 여러사찰을 돌아보며 유랑하던 중 한 시승(詩僧)을 만났다. 정사룡은 4운 율시 두어 수를 써서 시승에게 보이면서 자기 딴에는 잘 지은 것으로 자부하고 있었으나 중은 도무지 칭찬의 말한마디 없었다. 정사룡은 중이 해석할 줄 모른다고 생각하고 이번에는 다시 김시습의 4언율시 네 수를 써서 보였다.
중은 한 번 읽어본 후 몸을 일으켜 안으로 들어가 향료와 제기를 씻어 가지고 나오더니 의관을 정제하고 향을 피워 상위에 올려 놓고는 김시습의 시를 다시 읽었다. 그리고는 “이것은 이세상 사람이 아닌 신선같이 높은 사람이 지은 것이지, 그대가 능히 지을 수 있는 시가 아니오”한다. 정사룡은 얼굴이 붉어져 김시습이 지은 것임을 말하였다. ‘중이 시를 감식하는 눈이 이처럼 귀신같으니 보통 세 속의 사람으로는 흉내낼 수 없는 일이다’고 어우야담에서는 적고 있다.
중 가운데 조우(祖雨)란 이가 있었다. 일찍이 장자(莊子)를 노사신(盧思愼)에게 배우기를 청했던 사람이 어느 종실(宗室)의 집으로 찾아가는 것을 보고, 공이 뒤따라가 모르는 체 하고, “조우란 놈은 노사신에게 수학하였으니 그 놈이 어찌 사람 축에 들겠소? 만약 이곳에 왔다면 내가 꼭 그놈을 죽이고 말것이오.”하니 조우가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펄펄 뛰어 나오며 말하기를
“공이 감히 드러내놓고 대재상(大宰相)을 꾸짖을 수 있소? 만약 나를 죽이고 싶거든 마음대로 죽여 보시오.”하였다. 공이 조우를 움켜잡고 때리려 하자 좌객들이 함께 싸움을 말려 조우는 겨우 빠져 달아날 수 있었다. 그 뒤에 조우가 수락산(水落山)으로 공을 찾아가 뵈니 공이 흔연히 맞이하여 말하기를 “네가 즐거이 나를 보러 왔구나!”하며 일하는 아이에게 밥을 지으라 하였다. 이윽고 조우가 밥을 떠서 먹으려 하자 그때마다 숟갈이 입에 미처 닿기도 전에 발로 땅을 차서 먼지가 숟갈에 앉아 밥을 한숟갈도 먹지 못하고 말았다. 그리고는 “너는 노사신에게 글을 배웠으니 네가 어찌 사람이냐?”고 하였다.
또 한 번은 시습이 삼각산 승가사 북쪽 바위로 올라가서 큰소리로 절간의 중을 불렀다. 중은 “이는 오세의 소리이다.”하고 급히 일어나 신발도 신지 않은채 달려갔다. 정말 시습이 온지라 서로 인사를 나눈후 이윽고 시습은 소매 속에서 죽은 생선 한 마리를 꺼내어 중에게 권하였다. 중이 받지 않자 시습은 억지로 고기를 먹이려하니 중은 마침내 화를 내고 가버렸다.
시습의 처사가 이처럼 비뚤고 괴상했으나 실은 그의 뜻은, 중이 도리를 다하지 않고 몸만 이롭게 하려는 것을 밝히려 한 것이다.
매월당의 제자 사미(沙彌 : 수행중인 미숙한 승) 한 사람이 있었는데 목소리가 깨끗하여 상성(商聲 : 5음의 하나로 강하고 맑고 깨끗하게 들리는 소리)을 잘 내었다. 글이나 시를 길게 내뽑으면 메아리가 창공 멀리까지 울려 퍼져 청아한 여운을 남겼다.
휘황한 달밤이면 매월당은 홀로 앉아 그 사미에게 이소경(離騷經 : 중국 전국시대) 초(楚)나라 굴원(屈原)을 한 차례 읊게 하고는 흐르는 눈물로 옷깃을 적셨다.
비 온 후에 계곡물이 불어나면 백지를 백여장을 만들고 필기 도구를 갖추어 물살이 급한 곳을 골라 앉아 중얼거리며 절귀, 율시, 또는 오언고풍 등의 시를 지어 백지에 써서 물에 띄워 보내곤 하였다.
또 산에 올라 나무껍질을 벗겨 거기에 시를 쓰고서는 외고 읊기를 한참 하다가 곧 통곡하고는 깍아버렸고, 혹은 종이에 썼어도 사람에게는 보이지 아니하고 물이나 불에 던져 버렸다.
때로는 나무조각으로 농사꾼이 밭갈고 김매는 형상을 다듬어 하루종일 관상하다가 역시 통곡하고 태워버리곤 했다.
어떤 때는 심은 곡식이 잘 되어 이삭이 졌는데도 낫을 휘둘러 눈깜짝할 사이에 쓰러뜨려 버리고는 목을 놓아 또 통곡하였다. 이런 행동은 보통 사람들은 이해못하고 비웃기가 예사였다.
시습은 언제나 시를 읊으며 마음 내키는 데로 떠돌아 다니며 세상을 희롱하였다.
한 번은 자신의 전답을 타인이 빼앗아 농사를 짓는데 갑자기 그 사람에게 내 땅이니 내놓으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사람이 듣지 않자 관가에 재판을 제기하여 다투는데 마치 장사꾼이 다투는 것 같았다. 승소를 하여 문서를 받게 되자 그 문서를 품속에 소중히 넣고 문밖에 나서자 앙천대소하면서 그 문서를 갈기갈기 찢어 흐르는 개울물에 던졌다. 이것은 아니꼽고
추잡한 현실을 부정하는 비판의식의 발로였는지도 모른다.
높은 벼슬에 있는 자가 혹 인망(人望)에 어긋나는 자로 알려졌을 때는 “이 백성이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런 임무를 맡기셨습니까?”하면서 통곡하였다.
벼슬하는 사람으로서 매월당에게 업신여김을 당한 자가 있었다. 그 사람은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서거정에게 “그의 죄를 다스리자”고 하니 서거정이 머리를 설래설래 흔들며 “그런 말을 하지 마소. 이제 이 사람을 형벌하면 백년 뒤까지 두고 두고 그대의 이름에 누(陋)가 될 것이오.”하였다.
어느날 아침 서거정이 조회에 들어가는데 “잡인은 물러가라”고 하인이 외쳐 댈 때 불쑥 누 더기를 입고 새끼 띠를 매고 패랭이를 쓴 시습이 나타나 앞에서 길을 인도하는 자를 헤치고 들어가 떡 버티고 서서 “강중(剛中)은 편안한가?”하고 서거정의 자를 큰 소리로 부르자 서거정이 웃으며 초헌(貂軒)을 세워 한참 말을 주고 받았으므로 이 광경을 본 온 저자 사람들이 모두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성 안에 매월당이 들어오면 언제나 향교의 사인(詞人 : 문사(文士))집에 머물렀다. 서거정이 가서 찾으면 인사를 하지 않고 비스듬히 누워 두발을 거꾸로 벽에 대고 발장난하면서 하루 종일 이야기하였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서상공께 예를 하지 아니하고 업신여김이 저와 같으니 뒤에는 반드시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고 하였지만 며칠 뒤에 서공은 문득 와서는 만나곤 하였다.
김수온이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가 되어 얼마 지난 후에 “맹자가 양혜왕을 보았다”라는 글귀로 태학(太學)의 여러 선비를 논시하였다. 학생가운데 한 사람이 삼각산으로 김시습을 찾아가 말하기를 “괴애(乖崖)는 심한 것을 좋아합니다. 도대체 맹자가 양혜왕을 보았다는 것이 어찌 논문제목에 합당합니까?”하니 시습이 “그 늙은이가 아니면 그런 제목을 내지 않을 것이다.”하고 곧 붓을 들어 한편의 글을 주며 “生員이 자작한 것처럼 하여 그 늙은이를 한 번 속여보오.”하였다.
그 말과 같이 하였더니 김수온이 끝까지 읽지도 아니하고 눈에서 불빛이 번쩍 나더니 이내 조용하게 “경(悅卿)이 어느 절에 있는가?”하였다.
학생이 숨기지를 못하여 있는 데를 답하였다. 매월당을 알아주는 것이 그와 같았다. 그 논지의 대략은 <양혜왕은 참람하게 왕이라 한 자이었으니, 맹자가 보지 않았어야 마땅하였다>고 한다.(이율곡이 한 말임)
추강 남효온(南孝溫)이 일찍이 매월당을 스승으로 하였는데 매월당이 그에게 이르기를 “나는 영릉의 은혜를 받았으니 이런 고생이야 마땅하겠지만 공은 나와는 다르거니 어찌 세도(世道)를 위하여 꾀하지 아니하는가?”하니 남효온이 말하기를 “소릉(昭陵 : 단종 모후의 능, 세조가 파내버렸음)의 일은 천지의 큰 변괴이니 소릉을 복구한 뒤에 과거(科擧)에 나아가도 늦지 아니합니다.”하자 매월당이 다시 그에게 강요하지는 아니하였다.
추강이 어느날 묻기를 “저의 보는 바가 어떠합니까?”하니 대답하기를, “창에 구멍을 뚫고 하늘을 엿보는 격이오.”하였다.
“동봉(東峯)이 보시는 바는 어떠하십니까?”하고 다시 물으니 “나는 넓은 마당에서 하늘을 쳐다보는 격이지.”하였다.
효온이 보는 바는 작고, 자기가 보는 것은 높으면서도 그에 따르지 못한다는 뜻이라 하겠다.
김시습이 장차 풍악(楓岳 : 금강산)에 가서 놀고자 하였는데 하루 앞두고 여러 이름난 남효온의 무리가 용산(龍山)의 수정(水亭)으로 찾아왔다. 공이 상대하여 웃으며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몸이 몇길 되는 정자 아래로 떨어져 부상이 심하여 숨도 쉬지 못했다. 여러 손님들이 바삐 구원하여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손으로 온 사람이 말하기를 “이같이 중상을 입었으니 내일 어떻게 출발하겠소?” 하자 공이 말하기를, “그대들은 누원(樓院)에 가서 나를 기다리시오. 내 마땅히 병을 이기고 길을 떠날 것이오.”하였다. 이튿날 아침 여러 사람이 함께 누원으로 가보니 공은 벌써 먼저 와 있었는데, 떨어져 부상한 흔적이 조금도 없었다.
매월당이 어느날 술을 마시고 거리를 지나다가 영상(領相) 정창손(鄭昌孫)을 만나자 큰 소리로 말하기를 “네 놈은 이제 그만하고 쉬어라.”하였다. 정창손은 듣지 못한 체 하였다.
사람들은 이런 기행(奇行) 때문에 그를 위태롭게 여겨 일찍이 그와 교류하던 이들도 모두 절교하니, 홀로 거리의 미친자들과 어울려 놀다가 취하여 길가에 쓰러지는 등 언제나 웃음 거리로 지냈다.
그 뒤로 혹은 설악산에도 들어가고 혹은 춘천산에도 들어가곤하여 가고 오는 것이 때가 없으니 사람들이 그의 거처를 모르게 되었다.
신숙주(申叔舟)는 어느 날 매월당이 입경(入京)하였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그에게 술을 권하여 취해 쓰러지게 한 다음, 자기 집으로 가마를 태워 실어갔다. 술이 깨자 그는 속임을 당했음을 알고 일어나서 돌아가려 하였다. 신숙주가 그의 옷깃을 잡고 말하기를, “열경! 어찌하여 한마디 말도 아니하오?” 하니 공은 입을 굳게 다물고 붙잡힌 옷깃을 끊어 버리고 돌아갔다. 이로부터 매월당의 종적이 더욱 묘연해졌다.
공의 일족으로서 중이 된 사람으로 학조(學祖)라는 중이 있었는데 공보다 못하지 않은 터이라 늘 공과 서로 맞서 왔다. 하루는 산중으로 동행하게 되었는데 때마침 내리던 비가 개었다.
길가에 멧돼지가 칡뿌리를 파내느라 구덩이가 패인 곳이 있었는데 퍽 깊은 그 구덩이 속에 빗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공이 말하기를 “내가 이 장마 구덩이 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려고 하는데 그래도 나를 따라 들어갈 수 있겠는가?”하고 곧 함께 흙탕물 속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그러나 공의 의복과 몸은 조금도 젖은 데가 없었는데 학조는 흐린 물이 얼굴에 가득하고 의복이 흙탕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공이 웃으며 “네가 어찌 능히 나를 본받을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공은 일찍이 그 세대의 문장을 저만큼 낮추어 보았다. 성종이 노두시(老杜詩)를 해석하라 하니 공이 껄걸 웃으며 말하기를 “어떤 늙은 놈이 노두(老杜 : 당나라 시인 두보)를 감히 해석할 것이냐?”고 하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점필재(占畢齋) 김종직(金宗直)의 주장이오.” 하니
공이 말하기를 “종직이 한 이레(七日)나 되어야 겨우 눈을 뜰 것이다”고 하였다.
어느날 서강을 지나다가 한명회(韓明澮)의 별장에 있는 판상시(板上詩)에
청춘엔 사직을 붙었고
백발이 되어서는 강호에 누웠노라
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
고 하였는데 공께서 부(扶)자를 위(危)자로 고치고, 와(臥)자를 오(汚)자로 고쳐 놓고 갔다.
뒤에 한명회가 그것을 보고 바로 없애 버렸다고 한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선사(禪師) 현치(縣治 : 울진읍)의 남쪽 10리 지점에 주천대가 있다.
그전 성화년간(成火年間 : 명나라 현종의 연호 1465~1487)에 매월당이 주천대 곁에와 주천과 성굴 사이에서 살았었다. 사람들이 그 의리를 높이 우러러 그의 지팡이와 발자취가 지나간 곳을 지나면 반드시 경의를 표했다. 주천대의 남쪽 몇리쯤 떨어진 지점에 굴이 있는데 그 기과함이 신령스럽다. 매월당이 그 곳에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성류굴이라 하였다.
일찍이 매월당이 설악산에 은거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강릉 사람 최연(崔演)이 나이 어린 동지 대여섯 사람과 함께 그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였다. 그는 모두 거절하고 최연만을 가르칠 만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머물게하여 반년을 지냈다. 그동안 최연은 사제의 도리를 다하여 자나깨나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시중을 들었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것은 달이 밝은 밤중에 깨어보면 스승이 간 곳이 없고 잠자리가 텅비어 있는 일이 종종 있게 되는 것이다.
최연은 이상하게 생각되었으나 감히 간 곳을 뒤쫓아 가보지는 못하였다. 어느날 최연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뒤를 밟아보려고 생각하고 있다가 달이 밝은 밤중에 또다시 정장을 하고 소리없이 나가시는 뒤를 최연도 살짝 따라갔다. 골짜기를 넘고 재를 넘어 초목이 우거진 숲속에 이르니 고개 밑에 큰 반석이 있고 어디서 왔는지 두 사람이 서로 읍하고 얘기를 하는데 최연은 멀어 잘 들을 수가 없었다.
한참 지나자 두 사람이 헤어지는 것 같아 최연은 먼저 돌아와 시침을 떼고 태연히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시습은 최연을 불러 “나는 너를 가르칠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비로소 네가 번거롭고 조잡한 데가 있음을 알았으니 더 이상 가르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최연은 그날 밤에 함께 얘기를 나눈 사람이 누구인지 물어보지도 못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매월당 김시습이 세상에 항거하여 살기를 거의 4반세기나 넘긴 성종 12년(1481), 그동안 세상도 많이 변하고 그의 나이도 50줄에 가까운 47세 때에 그는 머리를 기르고 글을 지어서 조부와 아버지에게 제사지냈는데 그 제문(祭文)에 “순(舜)임금이 오교(五敎)를 베푸셨는데 부모 있다는 것이 맨 앞에 있고 죄 되는 일 3천가지 중 불효가 가장 큰 것이었습니다. 하늘과 땅 안에 살면서 누가 부모님의 은혜를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소자가 본집 작은 집을 이어 받들어야 할 일이오나 이단에 빠져 혹하게 되었다가 말로에 이르러 겨우 뉘우쳐 이에 예전을 상고하고 선경을 찾아보아 조상에 따르는 큰 의식을 베풉니다. 청빈한 생활을 참작하여 간략하면서도 깨끗하게 힘썼으며 많이 차리는 것을 정성으로 대신했습니다. 한무제(漢武帝)는 일흔 살에야 전승상(前丞相)의 말뜻을 깨달았고 원덕공(元德公)은 일백살에야 허노재(許魯齋)의 풍도(風度)에 화했다고 합니다. 늦게 불효를 깨달음을 용서하소서”하였다.
그리고 환속하여 안씨 딸과 혼인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벼슬을 권했으나 끝내 나가지 않고 방랑 또한 별로 다를 것 없이 지내다가 얼마 안 되어 아내가 죽으니 산으로 다시 들어가 머리를 눈썹까지 내려오게 하는 두타형 중이 되었다.
성종 14년(1483)에 윤씨 폐비론이 대두하자 다시 관동으로 방랑길을 떠나 강릉과 양양근처에서 지내는 것을 좋아하여 설악산, 한계산, 청평산 등지에서 거처하였다.
어느날 양양의 수령으로 있는 유자한(柳自漢)이 예절로 김시습을 대접하고 “가업을 회복하고 세상에 행세하라”고 권했더니 김시습은 편지로 사례하고 말하기를 “장차 긴 꼬챙이를 만들어 복령(茯笭)과 삽추(求)를 캐고 가을철이 되어 서리가 내리게 되면 다 떨어진 수삼 옷이나마 수선하여 입고, 겨울철이 되어 눈이 쌓이면 왕공(王恭)의 학창의(鶴?衣)를 정돈하겠습니다. 세상에 낙오되어 사는 것과 마음대로 오락가락하며 일생을 메인데 없이 보내는 것과 어느 것이 나을는지? 천년 뒤에 나의 본 뜻을 알아주기 바랄 뿐입니다”고 하였다.
매월당은 성종 24년(1493) 홍산(鴻山 : 충남 부여군) 무량사(無量寺)에서 병들어 누웠다가 죽었다. 이 때 그의 나이 59세로, 세상에 보기드문 신동으로 태어나 학업에 정열을 바치던 10대를 지나고 천하를 유랑하고 정사수도(靜思修道)하던 젊은 날과 또한 현실을 부정하고 항거하며 일생을 충열(忠烈)과 의협심(義俠心)으로 유랑과 방랑으로 마친 것이다.
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화장하지 않고 3년간 절옆에 관꾸껑을 열어보니 안색이 살아있는 것 같아 중들이 모두 경탄하며 그가 부처가 되었다고 하면서 화장하여 그 뼈를 모아 부도(浮屠)를 만들어 세웠다고 한다.
지금 부여 박물관에는 화장할 때 나왔다는 김시습의 사리가 진열되어 있다.
시습은 살아 있을 때에 늙고 젊은 두 화상을 손수 그리고 또 스스로 찬을 지어 남겼는데 찬에 말하기를
너의 몰골은 한눈에도 굉장히 왜소하고, 너의 말은 크게 지각이 없으니, 마땅히 언덕과 골의 가운데에 두어야 하겠구나.
爾形至?(이협지묘) 爾言大?(이언대통)
宜爾置之(의이치지) 丘壑之中(구학지중)
라고 지었다.
시습의 단학제자중 윤군평이 시습이 입적한 7년 뒤에 송경에서 시습을 만났는데 시습이 하는 말이
“단학을 서경덕에게 가르쳐 주고자 왕래함이 이제 이태가 되었다”고 하였다 한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상국 윤춘년(尹春年)은 매월당전에 “세상에는 선생의 화술(幻術)이 많아서 능히 맹호를 부리고, 술을 피로 변하게 하고 기운을 토해서 무지개가 되게 하고 오백나한을 청해 온다고 하니 그것은 괴이하도다”라고 하였고, 율곡 이이는 왕명을 받들어 지은 김시습전에서도 “동봉(東峯)은 홍치(弘治) 6년에(1493) 홍산 무량사에서 향년 59세로 일생을 마쳤다. 유언에 따라 화장하지 않고 절 옆에 가매장 하였다가 3년 후에 안장하기 위해서 관뚜껑을 열어보니 안색이 살아 있는 것같아 중들이 모두 경탄하며 부처가 되었다고 생각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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