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학/단학

丹學人物考 (19) 김가기(金可記)

검은바람현풍 2012. 2. 23. 19:41

丹學人物考 (19)  김가기(金可記)

 

연 대 : ~867~?

본 관 : 미상

호 : 미상 자 : 미상

주요저서 : 미상

 

 

김가기는 신라 때 사람으로 당(唐)나라로 건너가 그 곳의 빈공과(貧貢科)에 급제하여 진사를 지냈던 사람으로 성품이 침착하고 도(道)를 좋아하였으며 사치스러운 것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복기(服氣 : 폐기와 같음)로 몸을 단련하는 것을 낙으로 여기며 살았다.

그는 박학하고 기억력이 뛰어났으며 문장을 잘 지었다. 용모 또한 깨끗하고 아름다웠으며 거동과 언담이 멀리 중화의 멋을 풍겼는데 남들이 자기에게서 무엇을 구하면 거절하는 일이 없이 음덕을 베풀었고 범인(凡人)으로서는 하지 못하는 일을 하였다 한다. 속신선전(續神仙傳)에 승천한 사람16명 중의 한사람으로 들어있다.

김가기는 일찍이 종남산(終南山 - 중국의 산이름)에 같은 신라사람인 최승우와 중 자혜와 함께 놀러갔다가 광법사에서 종리장군(鍾離將軍 : 정양진인-正陽眞人)을 만나 그로부터 단(丹) 공부법을 배웠고 신원지(天帥)의 도움으로 3년만에 丹의 성공을 보아 신선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에 그는 본국에 잠시 들리기 위해 바다를 건넜지만 곧 다시 종남산으로 들어가 띠풀로 엮은 집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손수 기이한 꽃을 심고 이상한 과수를 많이 길렀고 항상 향불을 피우고 조용히 앉아 수련에 전념했으며 도덕경(道德經)과 신선경(神仙經)을 외는데 중단하지 않았다.

이렇게 지내던 그는 대중 11년(A. D. 867) 12월에 느닷없이 황제에게 상주하기를 “신은 옥황상제(玉皇上帝)의 조서를 받자와 영문대(英文臺)의 시랑(侍郞)이 되어 내년 2월 25일에 하늘로 올라가야 하옵니다”하였다.

선종은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고, 중사(中使)를 파견하여 그를 궁내로 불러들이라고 하였으나, 김가기는 한사코 사양하며 나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옥황상제의 조서를 보자고 해도 다른 신선이 관장하므로 인간세상엔 없다고 거절했다.

황제는 더 이상 청하지 못하고 다만 궁녀 네명과 향, 약, 금과 비단을 하사하고, 또 중사 두명을 파견하여 시중들게 하였다. 그러나 김가기는 홀로 조용히 방안에만 있어 궁녀와 궁사는 대부분 접근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밤마다 김가기가 거처하는 방안에서 손님들과 담소하는 소리가 들리어, 중사가 창틈으로 몰래 들여다 보니, 선관(仙官)과 선녀(仙女)가 각기 용(龍)과 봉(鳳)위에 앉아서 의젓하게 상대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궁녀와 중사는 감히 놀라게 할 수가 없어 조용히 물러나왔다.

이윽고 2월 25일이 되자 봄 경치가 아름답고 꽃은 만발하여 황홀한 가운데 오색구름이 일고, 학이 울고 난조(鸞鳥)가 날고, 생황, 퉁소, 금석(金石) 등의 악기소리가 울려 퍼지는 중에 깃으로 뚜껑을 한 옥으로 된 수레와 온갖 깃발이 하늘에 가득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수많은 무리들의 부축을 받으며 김가기는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이때 조정의 여러 사대부와 서민들의 구경하는 사람들로 산골을 가득 메웠고 모두가 옷깃을 여미고 바라보며 경탄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사림광기(事林廣記 : 작자미상)에 의하면 천하의 도사들이 김가기가 승천하는 날 모두 천복을 빌었고 아녀자나 어린애들까지도 김가기가 참신선(眞仙)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당시에 불교가 융성하고 도교와 인연이 멀어져 도가 서적을 좋아하지 않아 전하는게 없다.(A. D. 1666년 해동이적 쓸 당시까지의 상황). 그래서 김가기의 이름조차 모르며 중국사람들이 김가기가 신라 사람인지라 묻는 일이 있어도 대답하지 못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