丹學人物考 (17) 이지함(李之?)
연 대 : 宋1517(중종12)~1578(선조11)
본 관 : 한산(韓山), 父 : 李穉
자 : 형백(馨伯), 형중(馨仲)
호 : 토정(土亭), 수산(水山)
시 호 : 문강(文康)
주요저서 : 토정유고
한 해가 저물어 새 해가 시작될 즈음이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재미로 보던, 믿고 보던 토정비결(土亭秘訣)을 보는 데 틀린 것도 있지만 맞는 것이 훨씬 더 많다고 하면서 토정 선생의 이인으로서의 행적에 대해 즐거이 담소하는 것을 보게 된다.
흙집에 살고 있다해서 토정 선생이라 불리웠던 이지함, 즉 토정선생은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그의 부친은 판관(判官) 이치(李穉)이다.
선생은 중종 12년(1517)에 태어났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형 이지번에게서 수학했으며 후에 화담(花潭=徐敬德)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선생은 젊어서 방랑을 즐겨 전국 각지에 발이 닿지 않은 곳이 거의 없었다. 후에 오랫동안 서울 마포강변 동막부근에서 살았다. 강으로 조깃배가 드나드는 이 곳은 그 당시 하류층 빈민들이 살던 곳인데 토정 선생이 사는 집은 그 중에서도 가장 초라한 편이었다.
한강 둑에서 남향으로 뚝 잘라 놓은 듯한 언덕이 있어 그 언덕 한쪽을 파서 방과 부엌을 만들고 언덕 이마에다 처마를 달아 비와 이슬을 막게 한 것이 바로 선생의 집이었다.
선생은 이런 흙집속에 살면서 날만 새면 밖으로 나와 언덕위로 올라가는데 사실 언덕위라 하지만 지붕위가 곧 언덕위가 되는 것이다. 이 언덕은 전망이 좋아서 강위로 조깃배가 다니는 것이 훤히 보이고 멀리 관악산 중허리를 감도는 안개며 하늘의 떠다니는 구름의 움직임을 조용히 보고 즐길 수가 있었다.
강가에는 나룻배들이 떠다니고 멀리 관악산이 구름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그린 속에서 떠오르는 태양의 기운을 한껏 마시며 책도 읽고 강물도 살피며 하루종일 보내다가 밤이 되어 해가 지면 다시 흙집 속으로 들어가 잠을 자는 것이 선생의 일과였으리라.
사람들은 이렇게 흙집속에 사는 선생을 토정선생이라 불렀고 그것이 그대로 아호가 되었다.
후에 토정 선생이 사시던 곳을 토정리라하여 지명에까지 그 이름이 남게 되었다.
토정 선생은 당시의 선비들이 백성의 것을 거두어 자신의 생계를 이어가고 부를 축적했던 것과 달리 전혀 민폐를 끼치지 않고 단지 부탁하러온 동리 사람이라던가 친척들의 도움으로 끼니를 잇고 살아 갔다. 그러자니 자연히 집은 가난하고 때로는 끼니를 잇지 못하게도 되었다. 이러한 선생님을 보고 주위사람들은 주변머리가 없다는 둥 한심하다는 둥 하며 선생을 비웃었다. 그러나 선생은 사람들의 말처럼 주변머리가 없어서 못사는 것이 아니었다. 선생은 한 때 배를 타고 제주도로 건너가 장사를 해 크게 흥하여 불과 몇 해만에 많은 재물을 모았었다.
또 한 때는 어느 섬에서 농사를 지어 몇 백석지기를 장만하기도 하였지만 그렇게 해서 모은 재물을 그는 하나도 자기 소유로 하지 않고 서울로 돌아올 때는 모두 도민(島民)들에게 나누어 주고 말았다고 한다.
선생은 서경덕의 수제자였다.
선생은 경서(經書)는 물론이요, 의약, 복서, 천문, 지리, 음양, 술수에 이르기까지 두루 박식 하였으며 특히 주역은 틈만 나면 읽을 정도로 좋아했다.
“선생은 도학과 문장으로도 당대에 명문이 높았지만 기행이적(奇行異蹟)으로 더욱 세상에 잘 알려진 인물이다.”
선생은 한때 토실 생활을 했으나 나중에는 큰 뜻을 품고 팔도강산을 두루 살펴보려고 길을 떠났는데 옷은 다 떨어진 넝마요, 갓은 쇠로 된 솥이고, 신 또한 짚신으로 이렇게 차리고 다니다가 갓을 벗어 솥으로 이용하곤 했다.
또 한 번은 제주에서 돌아오는 길에 해남사는 이발(李潑1544~1589)의 집에 들른 일이 있었다. 주인은 먼 바닷길에서 고생하며 음식 또한 형편 없었을 거라 생각하고 한꺼번에 몇 말(斗)의 밥을 지어 주었는데 선생은 수저도 치워버리고 손으로 밥을 주먹만큼씩 만들어 잠깐 사이에 그 밥을 다 먹어 치웠다. 그날밤 비단 이부자리에 오줌을 질펀하게 싸놓고는 새벽에 주인 몰래 그 집을 떠나왔다.
<어우야담>에 토정선생은 배젓기를 좋아하여 일찍이 바다에서 노는데 한 노인이 배를 저으며 천천히 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토정은 그 노인을 따라 잡으려고 노인보다 빨리 배를 저어 그 뒤를 쫓아 갔으나, 하루종일 있는 힘을 다해도 도저히 따라 잡을 수가 없었다. 그제서야 노인은 돌아보고 웃으며 “배젓는 솜씨가 겨우 그 정도냐? 내 배 젓는 법을 가르쳐 주지, 내가 하는 대로 따라서 해보게. 광풍이 노한 파도를 몰아와서 땅을 휩쓸고, 하늘을 들먹거리는 비바람과 천둥번개가 치더라도 재난을 당하지 않고 눈깜짝하는 사이에 천리를 갈 수 있을걸세”라고 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선생은 작은배를 타되 배의 네 모퉁이에다 큰 표주박을 붙들어 매고 세 번이나 제주도를 왕래하였는데도 풍파에 휩쓸리는 재난을 당하지 않았다. 이른바 미려라는 것을 보기에 이른 것이다.
일찍이 지은 시 가운데 “萬里行裝雙脚健 百年身世 一瓢輕 6) 만리를 떠도는 몸의 두다리가 튼튼하니 백년의 인생길이 하나의 표주박같이 가볍고나. ”하는 구절이 있는데 그의 일생을 그대로 나타냈다 하겠다.
또 일찍이 한 친구와 함께 마포(당시는 삼개라 부름)나루에서 배를 타고 나가 한 섬에 정박하였다. 그 섬은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토정이 친구를 보고 하는 말이 “여기서 잠깐 쉬고 있게. 내 잠깐 산속에 들어갔다가 올 것이네.”하고는 낭떠러지를 기어 올라가는 것이었다. 친구는 그의 기행을 익히 아는지라 몰래 뒤따라 가보니 10여길이나 되는 깍아지른 절벽위에 서너 명의 미녀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잠시 보고 있으려니까 토정이 껑충 뛰어 절벽위로 오르더니 무었인가 그 미녀들과 환소하더니 이내 어디론가 사라졌다. 친구는 할 수 없이 되돌아와서 하늘만 쳐다보면서 배안에 누워 있었다.
얼마를 지나자 토정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이. 섭섭히 생각지 말게 그럴일이 있었네”하였다. 친구는 갔던 곳을 물어 보았지만 토정은 그저 빙그레 웃기만 할 뿐 끝내 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친구는 토정이 누구를 왜 만났는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토정 선생의 조카에 아계 이산해(李山海)가 있었는데 토정선생을 별로 존경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더러는 비웃기도 하였다. 이러한 조카를 어느 날 뱃놀이 가자고 하며 배를 태워 한강 하구로 나갔다. 때는 음력 7월이라 날씨가 서늘하였으나 상쾌한 밤이었다. 손수 노를 저어 나가다가 합수(合水)를 벗어나자 돛을 올리고 더욱 힘을 내어 노를 젓기 시작했다. 배는 망망대해를 쏜살같이 달리더니 어떤 강 하구를 거슬러 올라갔다. 아계는 숙부의 노젓는 솜씨에 탄복하면서 숙부에게 어디쯤 와 있는지를 묻자 숙부는 양자강이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아계는 크게 놀라 토정 선생의 얼굴을 넋나간 듯이 바라보았다. 배는 계속 달려서 어느 호수로 들어갔는데 아계가 다시 선생에게 어디냐고 여쭈니 선생은 동정호라 하며 노를 저어 갈대밭사이로 계속 나아갔다. 잠시 후 어느 누각아래에 배를 대고 올라가자고 하시는 데 아계가 현판을 보니 악양루(岳陽樓)라고 써 있는 것이 아닌가! 아계는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숙부를 감히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토정 선생은 누각 주위를 한바퀴 돌더니 아계더러 가자고 하며 “내 자네에게 선물할 것이 하나 있네”하고는 천천히 배를 저어 어느 조그만 대나무가 있는 섬에 배를 대고서 아계더러 “저 대나무를 붓만한 굵기로 석자만 꺽어오게”했다.
아계는 숙부가 시키는대로 대나무를 꺽어왔더니 숙부는 하늘을 한 번 쳐다보고서 “이제는 바삐 돌아가세”하고 말하기를 “이대가 소상반죽(蘇湘班竹)일세. 궐내에 들어가게 되거든 한자 길이로 다듬어 언제나 소중하게 간직하게. 훗날 꼭 요긴하게 쓸일이 있을걸세”하였다. 숙부의 목소리는 여늬 때와 달리 엄숙하여 아계는 명심하겠노라며 두 손으로 공손히 대나무를 받아들고 품속에 넣었다.
배는 다시 쏜살같이 달려 망망대해로 나오더니 한참 후에 어느 조그마한 돌무더기 같은 섬에 다달았다. 그러자 숙부는 아계를 보며 “저기 잠시 올라가 조심석을 보고 가겠나?”하였다.
아계는 조심석이란 말을 난생처음 듣는지라 숙부에게 “조심석이란 어떤 물건이오니까?”하고 물었다. “‘조심석(照心石)’이란 마음을 비춰보는 돌일세. 그 앞에 서면 그 사람의 마음을 비춰볼 수 있네. 마음 공부의 정도에 따라 염통의 그림자가 보이는 데 혹은 흐리기도 하고 혹은 진하게 검기도 한데 진하고 검은 사람은 공부가 모자란 사람이지. 그래서 조심석이라 부르지“하였다. 두 사람은 배를 섬가까이에 대고 바위가 많은 곳을 지나 정상 가까이로 오르니 이상한 빛이 은은히 흐르는 흰색의 자연석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 두 사람이 그 조심석이란 곳에 이르러 서 있었더니 과연 두 개의 모양이 비치는 데 숙부의 것은 약간 흐리고 아제의 것은 아주 새까만 것이었다. 자리를 바꾸어 서 봤으나 여전히 같은 형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입니까?“하고 아계가 물어보니 숙부는 ”이런것이 있네.
이제 그만 돌아가세.“하고 더 이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서는 배를 저어 한참을 가다
보니 눈에 익은 모습이 보였다. 바로 한강에 온 것이었다. 마포나루에 닿았을 때 하늘을 보니 묘시 즉 새벽 5시경이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아계는 숙부를 마음으로부터 존경하게 되었고 자신의 공부가 미진함을 깨달아 더욱 열심히 정진하게 되었다. 아계가 이때 가지고 온 소상반죽은 훗날 임진란 때 명장 이여송의 고집을 꺽는 데 한몫 하였다고 전한다.
선생은 평생 벼슬길에 나서기를 꺼려 하였지만 1573(선조6)년 탁행(卓行)으로 추천되어 6품 벼슬에 임명되었고 포천현감을 거쳐 아산현감으로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처음 벼슬길에 오를 때 친구들의 권고에 못 이겨 6품이 되고 또 포천현감으로 제수가 되어 도임하게 되었다.
포천고을에 처음 도임하는 날 선생은 여전히 짚신과 베옷 다해진 갓으로 부임하였다. 저녁에 새 원님이 오셨다고 갖은 진미를 골고루 갖추어 상을 올렸으나 선생은 먹을 것이 없다며 수저도 들지 않고 물리셨다. 아전들은 당황하여 다시 더 큰 상에 산해진미를 더욱 푸짐히 차려 올렸으나 역시 물리시는 것이었다. 그러자 아전 하나가 “저희 고을은 서울과 달라서 더 이상의 상은 차릴 수 없사오니 용서 바라옵니다”라고 엎디어 빌었다.
그러자 선생은 준엄한 목소리로 “나라에 흉년이 들어 굶는 백성이 다수인데 이런 조그마한 고을에 원님이라고 해서 그런 큰 상을 차린다면 어찌되겠느냐? 그 상은 나를 욕보이는 상이니 차후로는 그런 음식은 일체 상에 올리지 않도록 하여라.”라고 하고는 국 한그릇과 밥 한 사발로 식사를 마쳤다.
율곡이 일찍이 토정에게 성리학을 권한 일이 있다. 그 때 선생은 “욕심이 많아서 잘 안된다” 며 웃었다.
이따금 선생은 율곡의 집에 놀러 가기도 하였는데 하루는 당대의 명사들이 모여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율곡이 임금께서 청을 잘 들어주지 않는다고 불평한 일이 있었다. 그러자 그에 동조한 선비들이 병을 핑계로 벼슬을 물러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이런 얘기를 옆에서 듣고 있던 선생이 “옛날 성인이란 형식과 체면 덩어리가 잔뜩 후폐(後弊)만 남겨 놓고 말았군”하였다.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얼른 알아듣지 못하고 그중 율곡이 “또 무슨 기담이 계시오?”하니 선생은 “공자는 병이라 일컬어 유비(儒非)를 보지 않았고, 맹자는 제선왕(齊宣王)이 부를 때 역시 병들었다고 가지 않았는데 후세에 소위 선비라는 사람들이 걸핏하면 병이 있다는 핑계로 그것을 본받는 것이 우습지 않은가, 병이 들었다고 핑계하는 것은 게으른 종놈의 행습(行習)이지 어찌 선비로서 할 짓이란 말인가? 맹자가 그러했는데 우리가 그러기로서 무었이 나쁘겠는가 하겠지만 공?맹자는 무슨 심술로 후세 사람들에게 이런 좋지않은 형식을 시범했단 말인가?”하니 모두 함께 웃으며 말을 못하고 말았다.
토정 선생은 또한 제갈량과 비교되기도 했는데 황강 김계휘(1526-1582)가 이율곡에게 “형중이 제갈량에 비해 어떠하냐”했더니 “토정은 직용할 인재는 아니나 물질에 비하면 기화이초(奇花異草)나 진금기수(珍禽奇)와 같아서 놓고 구경이나 할 것이지 포금(布錦) 숙속(菽粟)같이 긴요한 것은 못된다”하였다. 후에 토정은 이 말을 듣고 웃으며 “내가 콩이나 조가 못된다면 도토리나 밤은 될 것이니, 어찌 전연 쓸 곳이 없으랴”하였다.
이때는 주자학 이외는 행세 못하던 시절이라 율곡마저도 선생의 재주를 기화이초나 진금기 수에 비했으니 애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당시에 선생이 광객(狂客)행세를 하며 벼슬도 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은 실은 당시 사회환경이 사화(士禍)와 난정(亂政)으로 어지러워 이에 부동하지 않으려고 가난하게 지내면서 자기를 잃지 않고 세상을 내려다 보면서 살아가려 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토정집>에 이르기를
“사람은 누구나 안으로는 신성스럽고 굳세기를 원하며, 밖으로는 부귀를 원한다. 귀하기란 벼슬을 안하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이 없고, 부(富)하기란 욕심내지 않음보다 더 굳셈이 없고, 신령스럽기는 알지 않음보다 더 신령스러움이 없다. 재물이란 흉한 물건이 아니나, 나라의 재앙이 재물에서 많이 생기고, 권세 또한 흉한 물건이 아니나 벼슬아치의 재앙은 권세에서 많이 생기고 보배를 지니는 것은 흉한 것이 아니나 필부의 재앙은 보배를 많이 지니는 데서 많이 생기고, 나를 알아준다는 것은 나쁜일이 아니나 선비의 재앙이 나를 알아 주는 데서 많이 생긴다”고 하였다.
얼마 후 선생이 아산고을 현감으로 추천되어 가게 되었는데 부임하자 첫 공사(公事)로 걸인들을 모아들여 읍내에다가 걸인청을 만들고 관아에 있는 곡식을 내다가 먹이고 각자의 기능에 따라 일을 시켰는데 일부는 둔전과 구황지(舊荒地)를 일구어 농토를 개간하도록 하였고, 더러는 기술에 따라서 배를 타고 고기를 잡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도 저도 못하는 늙은 이나 병약자는 짚신을 삼게 하였다. 이리하여 거지들에게 살길을 열어준 것이다.
관아의 이속(吏屬)하나가 토정에게 “사또! 가난 구제는 나라에서도 못한다고 하는데 관청공사를 거지들 위주로 해서 되겠습니까?”하자 토정 선생은 “여러 소리마라. 백성을 다스린다는 것은 백성을 잘 살게 하는 데 있다. 그 밖에 더 큰 일이 무었이란 말이냐?”고 대답하였다.
또 한 아전은 어찌나 흉물스러운지 백성의 등을 치고 사또 속이기를 밥먹듯이 자행하는지라, 선생은 그에게 “너같은 놈은 늙었으나 마음은 못난 어린애 같으니 어린애 대접을 할 수 밖에 없다”하고는 아전의 갓을 벗기고 흰머리를 총각머리로 땋아 내리게 하고 벼루를 들려 통인(通人)처럼 종일 세워 두었다. 이 후에 그 아전은 뉘우치기는커녕 속으로 항상 앙심을 품고 뽁하려고 벼르게 되었다. 이 무렵 선생은 병이 나서 오송즙을 하루 한사발씩 먹고 제독하려고 약사발을 떼면서 바로 날(生)밤을 씹는 버릇이 있었다. 하루는 약을 마신 뒤 날밤을 입에 넣고 깨물었더니 그것은 밤이 아니라 밤과 똑같이 깍아 다듬은 버드나무 조각이었다.
아뿔싸 하였지만 어느 인연으로 인해 업보의 인과응보를 피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무참히 생을 마치게 된 것이다. 그 때가 바로 선조11년(1609) 7월 17일이었다.
선생은 아산고을 재직중에 바다의 해일을 미리 예고하여 많은 인명피해를 줄이신 적도 있지만 자신이 사랑했던 고을의 수하사람으로 인해 일생을 마치는 비운은 피하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율곡 이 토정 선생의 제문에 “나무들이 빽빽이 늘어섰는데, 그 사이에 대춘(大春)이 우뚝 솟아있고, 풀잎이 띄엄 띄엄 나고 있는데 혹은 영지(靈芝)가 빼어났네, 이상하도다, 공을 또한 수선(水仙)이라고 부른다”하였으며, 조중봉은 토정을 스승으로 섬겼을 뿐 아니라 토정 선생이 세상을 떠난 다음 임금께 상소하여 돌아가신 분에게 벼슬을 추증(追贈)하고 시호(諡號)를 내려 주기를 청하였다. 그 글가운데, 선생은 청백(淸白)하기로 천고에 둘도 없으며 학문이나 행실은 동방의 이윤(伊尹)이요 백이(伯夷)라 하였다.
택당 이식의 문집에는 “토정 선생은 세상을 피해 조용히 살았는데, 퇴계가 그의 기풍을 높이 여겨 벗으로 삼았다. 일찍이 아산의 현감이 되어 간사한 관리를 엄하게 단속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을 당하였다. 그 사람들은 그가 독살당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토정은 남을 알고 기미를 알아 뜻과 기운이 신과 같았으니 그런 흉측한 일은 응당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토정선생은 죽기전에 자기가 묻힐 자리를 정해놓아 그 자리에 묻혔는데 훗날 증손자되는 이가 감사를 지내면서 당시 유명하다는 지관(地官)의 말을 듣고 이장을 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파고 보니 안에서 글씨가 새겨진 빗돌이 나오는데 그 빗돌에는 <모년 모월 모시에 불초손이 이묘를 파고 개봉축 하리라>고 적혀 있었다. 그제서야 깨달은 바가 있어 이장을 멈추고 선생의 묘 밑에다가 조그맣게 자기 묘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구봉집>에 송구봉(1534~1599)이 이율곡에게 보낸 글 가운데 토정의 아들이 시묘하던 중 호식(虎食)을 당한 사실을 알리고 옛날에는 호랑이를 길들여 복종하게 한 효자가 있는데 요사이는 범이 묘를 지키는 자식을 잡아 먹다니 하고 애도하고 있다.
<명신록>에는 <조부모를 장사지낼 때에 장례 모실 산을 보니 자손들 중에 두 재상이 나오게 되어있고 막내는 불행하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공이 스스로 그 재앙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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