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학/단학

丹學人物考 (14) 남사고(南師古)

검은바람현풍 2012. 2. 23. 19:31

丹學人物考 (14)  남사고(南師古)

 

연 대 : 1509~1571

본 관 : 의령(宜寧)

호 : 격암(格庵)

자 : 복초(復初)

주요저서 : 격암유록(格庵遺錄)

 

 

격암 남사고(格庵 南師古)는 조선 중기 명종 때의 예언자로 풍수(風水), 천문(天文), 복서(卜書), 상법(相法)의 비결에 도통하여 말을 하면 반드시 들어 맞았다 한다.

격암은 어렸을 때 책을 짊어지고 불영사(佛影寺 ; 蔚珍)를 찾아 가다가 한 중을 만났다. 그 중은 자루를 짊어지고 길가에 서서 남사고에게 말하기를, “빈도(貧道)가 무거운 것을 지고 있어서 걷기가 어려우니, 원컨대 선생께서 져다가 주셨으면 합니다” 하였다.

격암은 기꺼이 그 말을 좇아 그 중과 함께 절에 이르렀다. 며칠 후 그 중과 함께 부용성(芙蓉城)에 가서 노니는데, 중이 말하기를

“빈도는 바둑을 좀 둘 줄 아오니, 선생은 내기해 보겠소?”하여 남사고는 좋다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두 사람은 소나무 아래에서 바둑을 두는데, 내기가 절반도 되지 않아서 중이 갑자기 한 소리를 지르더니,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한참 후에 코 끝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차츰 본래의 모습대로 돌아와 하는 말이 “두렵지 않소?”한다.

이에 격암은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무어 두려울게 있소?”하였다. 그러자 중은 격암의 말을 듣고 기뻐하면서, “빈도가 행장(行裝)을 남에게 맡긴 일이 여러 차례 있었소. 그때마다 매만 맞았는데, 선생께서는 기꺼이 들어 주었소. 그리고 술수로써 남을 놀라게 한 적이 여러 번 있었는데 놀라지 않을 사람이 없었으나, 선생은 두려워 하지 않으니, 가르칠만 하겠소”하고 격암에게 비술(秘術)을 전수하면서 또 말하기를

“선생은 참으로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 도를 수행하면 고상하고 원대해 질 수 있겠으니, 부지런히 힘쓰시오”하고 말을 마치자, 옷소매를 털면서 가버렸다.

격암은 이로부터 현묘한 이치를 밝게 보아 말한 사실이 모두 신통하게 효험이 있었다.

격암이 일찍이 영동(嶺東)을 지나가다가 문득 하늘을 쳐다보고 크게 놀라 말에서 떨어지며 하는 말이, “오늘 조선을 해칠 자가 나타날 것이다.”고 하였다. 이날 풍신수길(豊臣秀吉)이 태어났다고 한다.

또 일찍이 망기(望氣)를 하고 맑은 아침에 동쪽을 향해 “살기가 극성하니 나쁘도다”하고서 다른 사람에게 얘기하기를

“임진년에 왜구가 반드시 대규모로 침범할 것이다. 나는 그 꼴을 못보게 될 것이나 그대들은 조심하라. 임진년에 백마를 탄 자가 남해로부터 오면 나라가 거의 망할 것이다.”하였는데, 훗날 왜장(倭將) 가등청정(加藤淸正)이 과연 백마를 타고 왔다. (이상 해동이적에서)

격암이 강릉에 살 때의 일이다. 하루는 그 고을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금년에 반드시 대병(大兵)이 이를 것이오”하였다. 고을 사람들은 모두 그의 말을 믿는지라 피난을 가고 마을이 텅비게 되었다.

그해에 전염병이 크게 돌아 무수한 사망자가 생기고 한 고을은 사람이 몽땅 죽어버리기까지 하였다.

그러자 격암은 탄식하며 “나의 수업이 조잡하기 짝이 없구나, 전염병을 대병이라 했으니...”라고 하였다.

한 번은 고을 안에 사는 최운부(崔雲溥)가 과거에 급제하여 집에서 축하연회를 차리자 격암이 고을 사람들에 말하기를

“너희들 고을 사람들은 모두 가 보아라. 이 고을에는 앞으로 30년 동안 이런 경사가 없을 것이다”고 하였다.

과연 이로부터 과거에 급제하는 사람이 31년 동안 없다가 이오(李?)라는 사람이 31년 만에 과거에 급제 하였다 한다.

당시에 참판 정기원(參判 鄭期遠)이 일찍이 서울에서 어른을 따라 갔다가 격암을 뵌 일이 있었다. 훗날 다시 격암을 찾아가자 안으로부터 큰 소리로 정수재가 왔느냐 소리치며 뛰어 나와 맞이하였다. 정기원은 괴이쩍게 여겨 어떻게 내가 온 줄 알았느냐고 묻자 격암이 대답하기를 “저기를 보게”하고 벽을 가르켰다. 벽 가까이 다가가 보니, 거기에는 어느 달 어느 날에 정기원이 온다고 씌어 있었다.

가정(嘉靖) 정묘년에 격암은 남산에 올라가 멀리 바라보면서 “왕기(王氣)가 흩어져 사라지는구나. 사직동으로 옮겨질 것이다”며 탄식하였다. 이로부터 오래지 않아 공헌대왕(恭憲大王)이 죽고 아들이 없어 사직동에 있는 소경대왕(昭敬大王)이 왕이 되었다. (이상 어우야담에서)

젊을 때, 고향에서 누차 과거를 보았으나 급제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친구들은, “자넨, 남의 운명은 점칠 줄 알면서 자기의 운명은 헤아리지 못하여 해마다 허송세월만 하니 어찌된 일인가?”하였다. 이에 격암은 웃으며 “내 뜻이 움직이는 곳은 술수(術數)가 남몰래 이루어지는 것이네”하였다.

말년에 천문교수(天文敎授)로서 서울에 있을 때, 태사성(太史星)이 흐려지므로 관상감정(觀象監正) 이번신(李藩臣)은 바야흐로 자기가 그 징조에 해당된다고 하니, 격암은 웃으며 “제 자신에 그 징조가 해당될 것입니다.”하였다. 과연 그는 그 해에 병으로 죽었다. (이상 해동이적에서)

임종 때 자손이 읍소하기를 “평일에 다른 사람을 위해 장지를 마련하신 일이 많은데 어찌하여 자신을 위한 일은 아니하셨습니까?”하였다. 이에 격암은 웃으며

“세상의 모든 지관들이 오직 지리만 알고 천상을 모르니 어찌 가하다 하겠는가? 내가 천상을 보니 우리집의 앞일은 세세히 바른 일로 하면 되겠거늘 어찌 망녕되이 소술을 사용하여 천명을 거역하겠느냐?”하였다.

전해오는 말에는 격암이 일찍이 명당에 부모의 시신을 모시고저 수년을 찾아 헤매어 고생 끝에 비룡승천(飛龍昇天 :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형국)하는 자리를 잡아 쓰고 내려오는데 지나가는 한 걸승(乞僧)이 이를 보고 노래 부르기를 “비룡승천은 어디가고 사사괘목(死蛇掛木) 이 웬말이냐?”하기에, 남사고는 괴아하게 여기며 돌아보니 진정 비룡승천혈인줄 알았던 것이 사사괘목(死蛇掛木 : 죽은 뱀이 나무에 걸려 있다는 뜻)이었다. “아뿔싸! 사사괘목을 헛보았구나!” 하고 다시 시신을 짊어지고 산을 내려왔다. 그 후 남사고는 명당잡기를 포기하였다 한다. 그도 그럴것이 길인이 봉길지(吉人이 逢吉地)라 평생에 선행을 많이 한 사람만이 명당에 든다는 말이 있으니 말이다.

후대에 남구만 정승이 젊은 시절 어느 고을 살이를 할 무렵의 이야기이다. 길가던 중 우연히 덤불속에 한 비석을 발견하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격암 남사고의 묘비이다. 헌데 비석에는 구대방손 남구만 과차지(九代傍孫 南九萬 過此地)라고 써 있는게 아닌가!

남구만은 저으기 놀라 인사 드리고 그 묘비를 손질하고 제사 드렸다 한다. 격암은 혈손이 없을 것을 미리 알고 훗날 방손의 손이나마 미칠 곳을 가려 신위지지로 잡은 것이다. 그 후 남정승의 알선으로 격암의 봉사손을 정해줌으로써 지금도 그 손이 이어진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