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학/단학

丹學人物考 (11) 정염(鄭?)

검은바람현풍 2012. 2. 23. 19:24

丹學人物考 (11)  정염(鄭?)

 

연 대 : 1506(중종1)~1549(명종4)

본 관 : 溫陽

父 : 鄭順朋

자 : 士潔 호 : 北窓

주요저서 : 龍虎秘訣, 東垣珍珠囊, 劉氏脈訣

 

 

북창(北窓) 정염 선생은 중종 원년(1506) 3월 갑신(甲申)에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백제 탕정현(湯井縣, 오늘의 온양) 사람이며 그의 아버지 순붕은 중종(中宗), 인종(仁宗), 명종(明宗), 세 임금을 섬긴 분이며, 그의 어머니는 태종의 장왕자(長王子) 양녕대군(讓寧大君) 제(堤)의 증손녀이다.

선생은 어릴때부터 신이(神異)하였다 한다.

소시에 산사에서 선가(禪家)의 육통법을 시험해 보려고 삼일동안 정관하였더니 백리밖의 일을 훤히 알았다. 이로부터 천문, 지리, 의약, 복서, 율려, 산수, 한어 및 외국어를 두루 배워서 못하는 바가 없었다. 비록 천리밖의 일이라도 마음을 고요하게하여 집중하면 곧 알아내었다<해동이적에서(海東異蹟)>

14세 때에는 중국을 관광하였는데 봉천전(奉天殿)에서 도사를 만났다. 도사가 묻기를 “귀국에도 도사가 있습니까?”하므로, 선생께서는 거짓으로 대답하기를 “우리나라에는 삼신산이 있어 한 낮에도 신선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도사가 무어 그리 귀할게 있겠소?”하였다. 도사는 크게 놀라 “어찌 그럴 수 있겠소?”하며 되물었다.

이에 선생은 즉시 <황정경>, <참동계>, <도덕경>, <음부경> 등의 도경을 들어 신선이 되는 계제를 밝게 설명하니, 도사는 굽실거리며 슬그머니 피하여 버렸다.

이때 유구에서도 사신이 와 있었는데 역시 이인이었다. 그는 자기 나라에서 역수로 헤아려 중국에 들어가면 진인(眞人)을 만날 줄을 알았다. 그래서 길을 따라 물어가며 북경에 도착해서 여러나라 사신이 머물고 있는 관저를 두루 찾아봤으나 진인을 만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선생을 만나게 되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기도 모르게 절을 하고 지니고 있던 행낭(行囊)에서 조그마한 책자를 꺼내는데, 거기에는 모년, 모월, 모일에 중국에 들어가면 진인을 만날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는 이것을 선생에게 보이면서 “이른바 진인은 선생이 아니면 누구이겠소?”하고 역학(易學)을 배우기를 요청하였다. 선생은 쾌히 승낙하고 곧 유구말로 주역을 가르쳤다. 이에 관저 안에 있던 여러나라 사람들이 그 얘기를 듣고 다투어 와서 그 장면을 구경하였다.

선생은 각국 사람을 대하여 각기 그 나라말로 유창하게 응수하니 모두 놀래어 하는 말이 “사람은 아니오 천인(天人)이라.”하였다. 어떤 이가 선생에게 묻기를 “세상에 새나 짐승의 울음소리를 해독하는 사람이 있으니 다른 나라의 말은 곧 새나 짐승의 소리와 같습니다. 그 말을 해독하는 것은 간혹 있을 수 있겠으나 그 말을 입으로 하는 것은 또한 다르지 않습니까?”하였다. 선생은 대답하기를, “난 듣고서 해독한 것이 아니라, 이미 일고 있은지 오래 되었소.”하였다.

한 사람이 자기 운명을 묻는데 그 앞에 객관에서 품팔이로 땔나무를 나르는 사람이 있었다.

보니 무슨 할 말이 있는 것 같아서, “너도 할 말이 있느냐?”하여 함께 말을 나누어보니, 음양운화의 기이한 술법을 통한 사람이었다. 선생이 “네가 어찌하여 품팔이를 하는가?”하니 “이렇게 살지 아니하면 벌써 죽었을 것입니다”하고 스스로 말하기를 “저는 촉나라 사람입니다.

아무 해에 아무 데로 가게 될 것입니다. 선생은 벌써 만물에 신통하여 무궁한 경지에 들어가셨으니, <도덕경>에 문을 나가지 아니하고도 천하의 일을 안다고 한 말이 이를 두고 이르는 말인가 봅니다”하였다.

선생은 유?불?선의 삼교(三敎)를 관통하였으나 근본을 성학(聖學)에 돌려 그의 유훈(遺訓)에도 효제(孝悌)를 오로지 힘쓰게 하였고 <소학>, <근사록>을 초학자의 지름길로 삼았다.

일찍이 선생께서는 “성학은 인륜을 중시한다. 그러므로 긴요하고 오묘한 곳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선불(仙佛)은 오로지 마음을 닦고 본성을 깨닫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상달(上達)한 사람은 아는 것이 많고 하학자(下學者)는 단순하니, 이것으로 해서 삼교가 다르다고 하는 것인데 선불은 대동소이한 것이다”하였다.

선생은 평생 육식을 즐기지 않았으나 술마시기를 즐겨하여 한 자리에서 몇말의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또한 선생은 음율을 잘 알아서 노끈으로 술병을 묶고, 구리 젓가락 하나를 그 속에다 꽂고 다른 하나를 가지고 술병을 두드리면 5음 6율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이 없었다. 또 휘파람을 잘 불었다.

그의 아버지 순붕이 강원 감사로 있던 어느날, 부자는 금강산에 노닐게 되었는데 마하연(摩訶衍) 암자에 이르자 선생의 부친이 뒤를 따르고 있던 아들을 보고 웃으며 말하기를 “사람들이 네가 휘파람을 잘 분다고 하는데 내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이런 절경에 왔으니 한 곡조 불어볼만 하잖느냐?”하고 휘파람 불기를 청하자, 선생은 “고을 사람들이 이곳에 많이 와 있으니 청컨대 내일 비로봉에 올라가 불겠읍니다.”고 여쭈어 그의 아버지 순붕의 허락을 받았다.

다음날은 비가 내렸는데 선생은 비를 무릎쓰고 봉우리로 올라갔다. 순붕도 올라 가려고 하였더니 중이 말리면서 오후가 되면 비가 개일테니 그때에 올라가라고 하였다. 비오는 날 비로봉에 오르는 것은 위험했기 때문이다.

오후가 되니 과연 비가 개어 중은 앞에 서서 순붕을 인도하여 봉우리로 올라갔다. 기암절벽으로 쌓인 산골짜기에 이르니 어디선지 피리부는 소리가 맑고 높게 암석을 울리기 시작하였다. 중은 놀라 순붕을 보며 “이렇게 깊은 산속에 웬 피리소릴까요. 경치가 기가 막히니 신선이 내려왔나 봅니다.”하였다. 순붕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피리소리가 아니라 아들이 부는 휘파람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어우야담에 이르기를 정염의 휘파람소리는 손등(孫登), 완적(院籍), 소문(蘇文)의 휘파람이 따라가지 못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정에선 선생이 천문, 의약, 율려에 능통하다하여 장악원(掌樂院) 주부를 시키더니 그 후 관상감(觀象監), 혜민서(惠民署) 교수(敎授)로 임명하였다.

얼마후 외직으로 포천현감(抱川縣監)을 하게 되었으나 곧 그만두고 양주의 괘라리(掛蘿里)라는 곳에서 두문불출하고 연단화후법(鍊丹火候法)에 몰두하며 살아갔다. 하루는 자신의 만가(輓歌)를 지었는데

 

“일생동안 만 권의 책을 읽고

하루에도 천 잔의 술을 마셨네.

太古적 일에는 소리 높여 담론하나

속된 말은 아예 입에도 담지 않았네.

안자는 30을 살았어도 아성이라 불렸는데

선생(본인을 지칭)의 수는 어찌 그리 긴고.“

라 하였다. 그리고서 앉은 채로 세상을 뜨니 이때 나이 44세였다.

선생은 스승이 없다고 전하지만 해동전도록을 보면 정희량에게서 도를 전수받은 중 대주(大珠)에게서 사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제자도 없다고 전하나 용호결(북창결)을 내놓아 많은 사람을 가르쳤으니 후세에 이를 보고 단을 익힌 사람은 누군들 제자가 아니겠는가?

선생의 무덤은 양주 사정산(砂井山) 선영 아래 있으며 비석이 있다. 선생에게는 지복(之復), 지임(之臨), 두 아들이 있었으나 둘다 요절하였고 조카 지승(之升)의 아들 시(時)가 북창의 가계를 잇게 되었다. 세상에서는 북창 선생이 시해선(尸解仙)이 됐다고들 한다. 선생의 아우 고 옥(정작)의 만시(輓詩)에

 

“修文繼亞聖

厭世化胎仙

寂寞三生話“

“글을 닦아 아성을 이었으나

염세 끝에 태선으로 화했네

적막하구나 삼생의 얘기여“

라는 싯귀가 있다.

고옥은 북창 선생의 막내 아우로서 이름을 작(?)이라 하고, 호를 고옥(古玉)이라 하는 이인이다.

일찍이 형 북창선생으로부터 단학(丹學)을 배우고 후에는 수암(守庵) 박지화를 따라 금강산에 들어가 수련하였다. 수암 박지화는 본관이 정선이며, 화담 서경덕의 제자로 북창과 친했다.

수암은 어려서부터 명산을 찾아 놀았으며, 솔잎을 먹고 생식을 하였던 인물로 이분 역시 유?불?도 삼교에 조예가 깊었고, 예서에도 정통하여 문명(文名)이 높았던 분이다. 나이 70여세에 금강산을 유람할 때 여러 길 되는 물을 뛰어넘고 걸음이 나는 듯하여 중들이 놀라기도 하였지만 임진란에 친구와 함께 피난가다가 “내가 금년까지 무슨 소용이 있어서 이렇게 구차하게 사는가”하고서 날짜를 정해 스스로 수해(水解)했다고 한다.

고옥은 성정이 맑고 깨끗하여 여색을 멀리하고 책 읽기를 좋아했으며 시에 능하고 의술, 방술(方術) 등 모두 능통한 사람으로 평생에 명리(名利)를 구하지 않았다.

고옥은

“白首參同契

紅顔麴米酒“ 라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고옥은 선조 29년(1596) <동의보감>편찬에 참여하고 벼슬은 사평(司評)까지 지냈으나 그의 부친이 을사사화(乙巳士禍)에 가담하자 벼슬을 버리고 방랑생활을하여 일생을 금단의 비술 연마에만 마음을 쏟았다. 그의 벗으로는 임진란의 의병장 이순(而順), 고경명(高敬命)이 있으며 선배로는 격암(格庵), 남사고(南師告)가 있다.

고옥은 늙어 갈수록 큰형 북창선생과 함께 단학을 공부하며 시를 짓던 때가 눈에 선연한 듯 시를 주어 형을 추모하였다.

작은 선조 갑진년(1603)에 하찮은 병으로 71세에 앉은 자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다.

그리고 고옥의 사촌형인 계헌(桂軒) 정초(鄭礎)는 수붕(壽朋)의 아들로 자는 정수(靜?)이며, 중종 17년(1552)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28년(1553)에 대과에 합격하여 벼슬이 교리에 이르렀으나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또한 단학 공부에 정성을 다한 이인이라 전한다. 정초의 방에는 신선이 내려와서 시를 선사한 일이 있는데 그 시는

“桂香方馥郁

仙馭自天來“

“계수나무 향내가 자욱하니

선어가 하늘에서 내려왔네.“

로 이로부터 그의 호에 계(桂)자를 썼다 한다. 이분 역시, 연산 을묘년(1493)에 태어나고 중종기해(1539)에 선화(仙化)했다고 전한다.

한집안에 이처럼 세 사람의 이름난 단객(丹客)이 같은 시대에 태어난 것은 드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