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학/단학

丹學人物考 (10) 이 이(李 珥)

검은바람현풍 2012. 2. 23. 19:22

丹學人物考 (10)  이 이(李 珥)

 

연대 : 1536(중종31)~1584(선조17)

출생지 : 江原

본관 : 德水 父-李元秀

자 : 叔獻 호 : 栗谷

시호 : 文成公

주요저서 : 聖學輯要, 격몽요결(擊蒙要訣) 等

 

 

이이의 아버지는 강평공(康平公) 명신(明晨)의 5대손인 이원수(李元秀)로 일찍이 사헌부의 감찰과 의정부의 좌찬성을 지낸 분이며, 어머니는 시?서?화의 3절이라고 격찬받는 사임당(師任堂) 신(申)씨이다.

율곡은 현모이며 스승인 어머니의 슬하에서 글공부를 하였는데 그의 학문의 경지는 유가의 서적은 물론 잡서까지 다 통하게 되었다.

율곡이 8살 때 파주 율곡촌의 화석정 별장에 소풍을 가서 가을 경치를 관상하다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임정(林亭)에는 가을도 이미 저물었는데

시인묵객의 심회 끝간줄 모를러라.

먼물빛은 하늘에 이어 파랗고

시닥나무는 햇빛에 익어 빨갛도다.

높은 산은 둥글고 외로운 달은 토하고

깊은 강은 만리 불어온 바람을 머금었도다.

변방의 기러기 어디로 가는고

기러기 우는 소리만 저문날의 구름속에 끊어지누나.

 

林亭秋已晩, 騷客意無窮,

遠水連天碧 霜楓句日紅

山吐孤輪月 江含萬里風

寒鴻何處去 聲斷暮雲中

 

율곡은 꾸준히 공부하여 13세가 되던 해에 나라에서 시행하는 과거(진사과)에 훌륭한 성적으로 급제하였다. 이때의 사관들은 이이(李珥)를 면접하여 보고 그 영특함에 깜짝 놀랐다고 한다.

율곡은 파주 두문리 자하산(紫霞山) 기슭에서 3년동안 묘막(墓幕) 생활을 하고 상복을 벗자 세상을 등지고 금강산에 들어가 단학수련에 전념하였다. 그때 친구들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주었다.

“기(氣)라는 것은 사람들이 다 한가지로 얻어 받는 것이다. 이것을 키우면 마음의 심부름이 되고 키우지 못하면 마음이 ‘기’의 심부름이 된다. 기가 마음의 심부름이 되면 한몸의 주재(主宰)가 있어 성현이 되는 것도 약속할 수 있고, 마음이 기의 심부름이 되면 희노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慾)의 칠정이 통솔이 없게 되어 미치광이가 된다. 옛날 사람으로서 기를 잘 키운 사람은 맹자다. 궁리진성(窮理盡性)에 뜻을 둔 사람은 이것을 버리고 무었을 구하겠는가?

공자는 말하기를 지자(智者)는 물을 즐겨하고, 인자(仁者)는 산을 좋아한다고 하였다. 산과 물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해서 물이 흐르는 것과 산이 솟아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요, 그 움직임과 고요히 있는 본체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지자(人智者)가 기를 키우는데 있어서 산과 물을 버리고 어디서 구하겠는가?”

율곡은 금강산 선방에 들어간지 1년만에 다시 뜻을 품고 서울로 돌아오던 중에 강릉 외가댁에 들러 외조모의 따뜻한 사랑을 받으면서 1년간 오죽헌에서 유학에 전심치지(專心致知)하였다. 그는 이때 자기를 환성(歡醒)시키는 십일조의 자경문(自警文)을 지었다. 그 자경문의 내용을 적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제1조 : 성인(聖人)의 경지에 도달할 때까지 끊임없이 도덕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제2조 : 마음을 결정하는 데는 먼저 말을 적게 하여야 한다.

제3조 : 놓아버린 마음을 걷어들여야 한다.

제4조 : 계구신독(戒懼愼獨)하여야 한다.

제5조 : 일보다 생각이 앞서야 하며 실천이 없는 독서는 무용의 학문이다.

제6조 : 재리(財理)와 영리(榮利)에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한다.

제7조 : 할 만한 일이면 정성을 다해야 한다.

제8조 : 온 천하를 위해서라도 무고한 사람은 이를 한 사람도 희생시켜서는 안된다.

제9조 : 아무리 횡포한 사람이라도 감화시켜야 한다.

제10조 : 때아닌 잠을 경계해야 한다.

제11조 : 수양과 공부는 완급(緩急)이 없이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율곡은 21세되던 해에 외조모 곁을 떠나 서울로 왔다. 마침 나라에서는 국정의 대책을 물어보는 한성시를 치루었는데 이이는 여기에 응시하여 또 급제하였다.

그해 9월에 성주목사(星州牧使)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례식을 올렸다. 그때 그의 명성은 이미 널리 알려진 상태였었다.

23세 되던해 봄, 율곡은 처가에서 강릉 외조모 댁으로 가던 도중에 당세의 석학인 退溪 李滉을 만나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었다. 율곡은 이틀 동안 머물면서 퇴계의 성학십도(聖學十圖)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후일 퇴계는 조사(趙士) 경목(敬穆)에게 보낸 편지에 율곡을 칭찬하여 “후생가외(後生可畏)라고 하더니 선성(先成)이 참으로 나를 속이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해 겨울, 율곡은 강릉에서 서울로 올라와 별시에 응시 급제하는 등 이로부터 29세 되던해까지의 아홉번의 시험에 아홉번의 장원을 하며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율곡은 1564(명종19)년에 호조좌랑이 된 것을 시초로 관계에 나서서 1569(선조1)년에는 서장관(書壯官)으로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1570년(선조3)에는 해주 야두촌(海州野頭村)에 돌아가 학문의 터를 닦았다. 이후에도 율곡은 여러 관직을 역임하면서 자의로 혹은 타의로 여러번 사직도 하고 복직도 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임금에게는 성군이 되는 길로 나아가기를 청했고 신하들에게는 사리사욕과 당파싸움을 지양하고 좀더 높은 차원에서 하나로 뭉쳐 나라와 백성이 살길을 도모하는데 주력케 하도록 노력하였다.

어느날 율곡은 경연 석상에서 10만의 병력을 길러 불의의 변에 대비할 것을 임금께 주장하였다.

“국세의 부진함이 극심합니다. 10년을 넘지 못하여 토붕(土崩)의 화가 있을 것이니 바라건대 미리 10만 병력을 길러 두심이 옳은 듯 하옵니다. 도성에는 2만을 두고 각 도에는 일만을 두되 복호연재(復戶鍊才)하여 이것은 6개월에 나누어 시행하고 체번(替番)하여 도성을 지키고 있다가 변을 들으면 10만을 합하여 파수함으로써 완급(緩急)의 비(備)를 삼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조의 변이 일어났을 때 백성을 몰아 전쟁함을 면할 수 없으니 그때는 이미 대사는 늦습니다”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유성룡은

“무사하고서 양병(養兵)하는 것은 양화(養禍)하는 것이다”고 반박하여 그 계책의 불가함을 아뢰었다. 그러자 율곡은 물러나와 유성룡에게 “속유(俗儒)는 본래 시의(時宜)에 통달하지 못하거니와 공도 그런 말을 하는가?”라고 꾸짖고는 쓸쓸한 표정으로 오랫동안 앉아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였다.

율곡이 죽은지 9년 되던 해에 과연 임진란이 일어났다. 이때 유성룡은 조당(朝堂)에서 말하였다. “이율곡은 참으로 성인이다”하며 그가 없음을 탄식하며 “후세에 나는 소인이라는 이름을 면치 못할 것이다. 우리 무리들은 죽어도 부끄러움을 씻지 못하리라. 애석하다. 당시 나는 그의 말에 찬동하지 않았으니.....”

율곡은 학문,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면에서 탁월한 식견과 통찰로 앞일을 예견하고 현실의 부정부패와 모순의 개혁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율곡 당시의 학계를 살펴보면, 정주학파(程朱學派)를 너무 숭상한 나머지 격물치지(格物致知)의 학문에만 치우치고,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학문에는 등한시 하는 경향이 있었다.

기묘사화 이후로 유학자들은 사기가 꺽여 정치계를 떠나 산림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대부분 학설에 있어서 정주의 이기론(利氣論)과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에만 치우쳐 현실에 맞지 않는 공리공론만을 일삼았다.

율곡도 정주(程朱)를 배우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정주의 학을 비판없이 따라가지 않고 주자의 이기이물설(理氣二物說)과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을 부정하였다.

그리하여 율곡은 이기비일비이설(理氣非一非二說)을 주장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무릇 이(理)라는 것은 기의 주재요, 기라는 것은 이가 타는(乘) 것이다. 이가 아니면 기가 근저할 데가 없고, 기가 아니면 이가 의착할 데가 없다. 이미 이물도 아니오 또 일물도 아니다. 일물이 아니므로 일이면서 이요, 이물이 아니므로 이면서 일이다. 일물이 아니라는 것은 이와 기가 비록 서로 떠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묘합(妙合)하는 가운데서 이는 이요, 기는 기로서 서로 섞이지 않으므로 일물이 아니다. 이물이 아니라는 것은 비록 이는 이요, 기는 기라고 할지라도 혼륜하여 간격이 없어서 선후도 없고 이합도 없어 그것이 이물임을 보지 못하므로 이물이 아니다”

또한 율곡은 주자가 사단칠정(四端七情)을 구분하여 “인의예지”의 4단은 성(性) 즉, 이(理)에서 생기고 惻隱羞惡辭讓是非(측은수오사양시비)의 7정은 정(情) 즉, 기(氣)에서 생긴다고 하는 설을 부정하고 4단과 7정은 본시 두갈래가 아니고 이미 7정속에 4단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았다. 바꾸어 말하면 이성과 감정의 작용을 둘로 가르지 않고 감정의 작용속에는 이성이 이미 내재하여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율곡은 말하기를 “七정은 벌써 4단을 그 가운데 포함하였으니 4단은 7정이 아니라던가. 7정은 4단이 아니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고 하였다.

또한 이성을 포함한 감정의 작용에 대하여 율곡은 이렇게 말했다.

“무릇 사람의 정이 마땅히 기뻐할 만할 때 기뻐하고, 상사(喪事)를 당하여서는 슬퍼하고, 친한 이를 사랑하고, 진리를 보고서는 끝까지 탐구하려고 하고, 어진 이를 보고서는 그와 같이 되려고 하는 것은 ‘인’의 ‘단’이요. 노할 자리에서 노하고, 미워하여야 할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의’의 ‘단’이요, 존귀한 이를 보고 외구(畏懼)하는 것은 ‘예’의 ‘단’이요. 희노애구가 일어날 때를 당하여 그 마땅히 노하여야 할 것을 알며, 또 마땅히 기뻐하지 않을 것과 마땅히 노하지 않을 것과 마땅히 슬퍼하지 않을 것과 마땅히 두려워하지 않을 것을 아는 것은 지(智)의 ‘단’이다.”

이리하여 율곡은 당시 학계에 있어서 말끝마다 ‘정자왈’ ‘주자왈’이라고 하여 정주(程朱)의 학설이라면 덮어놓고 금과옥조같이 생각하는 유학자들의 사상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게 되었다.

이밖에도 율곡은 일반 민중을 위한 향약을 만들고 구제도의 악습을 시정하고 살기좋은 이상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제도를 만들어 건의하는 등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584년 정월 16일 서울 대사동의 우사(寓舍)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사흘전 병석에서 순무북로(巡撫北路)의 명을 받고 길을 떠나는 서익(徐益)에게 “임금의 인덕을 선양하여 번부(藩部)를 편안케 하고 왕위(王威)를 신장하여 반호(叛胡)를 섬멸하며 사명(使命)의 공급을 생략함으로써 민력을 완화하고 미리 장재(將才)를 살핌으로써 완급에 대비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이때 문병 온 정철의 손을 잡고 ‘사람을 채용하는데 편중하지 말라’고 부탁하였다.

이튿날 새벽, 머리를 동쪽에 두고 의건(衣巾)을 바로 잡은 뒤에 세상을 뜨니 향년 49세였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집에 여유가 없어 염할 때에도 친구의 수의를 사용하였다 한다. 이때 임금도 3일 동안 조회를 보지 못하고 원근의 사자(士子)들은 친상을 당한 듯이 슬퍼하였다.

뿐만 아니라 군민(軍民)까지도 울고 태학생(太學生)을 비롯하여 삼의생도(三醫生徒)들과 각 관청의 관리들도 다 문상을 드리거나 혹은 모여 앉아 슬퍼하였다. 발인하는 날에는 장송하는 사람이 거리마다 가득 차서 목메인 소리와 곡성이 진동하였고, 금군(禁軍)과 시민들도 모두 나와서 횃불을 잡으니 그 불빛이 성문 수십리 밖까지 비치었다. 이날 우계 성혼(成渾)은 고인의 영전에서 곡하며 술회하였다.

“율곡은 도에 있어서 대근원을 통견하였다. 그가 말한 인심의 발(發)은 이원(二元)이 없고, 이기(理氣)는 호발(互發)할 수 없다함은 모두 실견(實見)하여 성(誠)을 얻은 것이다. 참으로 산하간(山河間)의 정기(精氣)요, 3대의 인물이며 진실로 나의 스승이다. 하늘이 일찍 빼앗아가니 이 세상에서는 유위(有爲)할 수 없다.”

율곡은 제자들에 의해 동방지성인(東方之聖人)이라는 칭호를 받고 기호학파를 형성, 후세의 학계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그가 죽은 후 1682년(숙종8)에는 문묘(文廟)에 모셨고, 황해도 백천(白川)에 문회서원(文會書院)이 건립되어 그를 제사하였다. 율곡(栗谷)은 당시 단학계의 제1봉(峯)인 구봉 송익필(龜峯 松益弼)을 외우(畏友)로 하며 항상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고 단(丹)의 수련에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우계 성혼(牛溪 成渾)을 가까이 벗하여 학문에 전력을 다하신 분이다. 단학의 계제가 높아지면 일반적으로 은둔생활을 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던 당시에 오직 이 어른만은 끝까지 나라의 정치에 간여하여 현실에 입각한 민본주의를 주장하고 정당파쟁에 있어서는 보합조제책(保合調劑策)을 주장하고 원리적 왕도정치를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율곡은 사상에서 사회제도에 이르기까지 고식책(姑息策)을 버리고 혁신책과 경장법(更張法)을 주장하였다.

그는 아마 이때에 국가민족이 한걸음 한걸음 붕괴기에 들어가는 것을 불을 보는 것보다 더 명백하게 직시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대다수의 정치가들은 어찌 율곡과 같은 거인의 안목을 감히 추측인들 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