丹學人物考 (8) 곽재우(郭再祐)
연대 : 1552(명종7)~1617(광해군9)
본관 : 玄風 父 : 郭越
호 : 忘憂堂 자 : 季綏
시호 : 忠翼
임진난 때 홍의장군으로 이름이 높았던 망우당 곽재우장군은 황해도 觀察使 곽월의 아들이다.
어렸을 때에는 文으로 이름이 났으나 자라면서 武를 취하여 병서를 즐겨 읽고, 활쏘기 말타기를 익혔다. 일찍이(3세) 어머니를 여윈 곽재우는 성품이 호탕하고 눈에 광채가 빛나 주위 사람들의 놀라움을 샀다. 8세 때에 동네 앞에 있는 그의 아버지가 지어놓은 용연정에 올라가 글 공부를 시작했으며 15세에는 사굴산 보리사(菩提寺)에 들어가 학문을 익혔는데 이 때 남명 조식선생님 문하에 들어가 단학을 공부하여 그 오묘한 곳까지 깨달아 천문?지리?병법?술수 등 통달하지 않은 바가 없었으며 특히 병법에는 공명도 무색하리 만치 능통한 바가 있었다 한다.
공은 남명(南溟) 조식(曺植)선생의 외손서(外孫?)이기도 하였으며 국난을 예견하고 늘 걱정하신 남명선생인지라 구국을 위하여 단학의 정통을 성의 다하여 전해 주셨는지도 모른다.
어느날 문경 새재의 산마루턱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며 탄식하기를 “흰 기운이 남방에 가득 찼으니 바다에서 오는 악한 기운 때문이로다. 七, 八년 후에는 반드시 바다가 평안하지 않아 우리나라가 전쟁으로 괴로워지겠구나”고 하였다.
홍의장군 곽재우는 그 때 30代로 벼슬을 하지 않은 때였다. 대자연 속에서 낚시로 세월을 보내며 지냈었는데, 과연 임진년이 되자 왜구가 바다를 건너 침략해 들어와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해 진격하였다.
그러나 이 때 조정은 당파싸움에 한창이었고 지방수령들 또한 착취와 사치에 여념이 없었다. 일부 몇몇 장수가 왜군을 막아 싸웠으나 패하고 충청도?경상도?전라도의 10만 연합군까지 패하게 되자 민중이 의병으로 궐기하여 국난 수습을 하기위해 모였다.
지난날 율곡의 10만 양병설을 배척하고 당파싸움에만 골몰했던 조정의 대신들과 왕실은 피난가기에 급급하여 재물을 모으니 민심은 극도로 흉흉하고 백성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왕조에 대한 원한에 앞서 민족을 구하려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이들 의병들은 낙향한 명문거족의 전직 관리나 유학자를 중심으로 모였다.
곽재우도 왜군이 불식간에 김해, 양산, 대구를 점령하는 것을 보고는 조상들의 무덤을 헐어 버리고 통곡하며 그 영전에서 起義할 것을 굳게 맹세했다. 가재를 털어서 하인 10여명을 데리고 의병의 기치를 들자 심대승(沈大承) 권난(權鸞) 박필(朴弼) 등의 장사들이 호응하여 왔다.
“天降紅衣將軍”
곽재우는 붉은 비단으로 지은 군복을 입고 양쪽에 날개를 단 투구를 쓰고 어디서 왔는지 홀연히 나타난 백마를 타고 의병들을 지휘하는 모습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같아서 그로부터 “天降紅衣將軍”이라 불리워지게 되었다.
그가 정암, 함안에서의 첫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자 백성들은 구름같이 모였다.
각지에서 살인, 방화, 약탈을 일삼던 왜군이 전라도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정암나루에 왔을 때이다. 마침 비가 온 뒤라 땅은 질척이고 물은 많아서 진군에 어려움이 따를 것을 안 왜군들은 선발대를 보내 마른 땅을 향해서 나무를 꽂아 표를 했다. 이를 안 곽재우는 밤에 몰래 그것을 뽑아 진흙이 많은 곳으로 바꿔놓고 근처에 군사를 매복시켰다. 새벽에 왜군이
나무 표시를 따라 진군하자 곧 진흙에 빠져 버렸다. 이 때를 이용해 의병을 풀어 기습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장군은 때로 자기와 똑같은 복장과 차림새를 한 10여명의 부하를 각 곳에 매복시켜 왜군의 전선을 혼란시키기도 하고 밤이면 하나의 막대에 다섯 개의 횃불을 달아 서로 연락하게하여 의병전술을 쓰기도 하고 2~30리 마다 정찰병을 두어 100리 밖의 적진상황도 훤히 알아내었다.
그의 용병술은 전과와 함께 경상도 일대에 있는 백성들에게 커다란 힘을 주었으며 부하가 되려는 사람들이 수천명이 모여 들어 그 기세가 더욱 높아졌다. 그가 낙동강 서쪽에 진을 치고 상류에 이르는 곳곳에 의병을 잠복시킨 때문에 경상도와 전라도의 백성들은 평시와 다름없이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있었다.
왜군이 군세를 다시 정비하고 영산, 창녕을 넘어 거름강에 이르려하자 곽장군이 먼저 손을 써서 그 곳을 점령하였고 그 때문에 철수하는 왜적들을 성주까지 추격했다. 이 때 곽장군의 의병은 단순한 민병이 아니라 정예군 이상으로 조직적이었다고 한다.
그 해 10월 왜군들은 창원, 부산, 김해의 병력을 모아 정암나루에서 패퇴한 병력과 합쳐 진주성공략에 총력을 기울였다. 진주성은 호남일대의 곡창지대로 들어가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로 진주목사 김시민이 3천 8백여명의 병력과 일반 백성들로 3만의 왜병을 맞아 싸우고 있었다. 왜군의 기습이 치열해지자 곽장군에게 위급한 전황을 알리고 저항했다. 곽장군은 부하 심대승에게 정병 200을 주어 구원하게 하였다. 이들은 곽장군의 계교대로 진주교외에 있는 비봉산에 들어가 어지럽게 나팔을 불고 또 밤에는 다섯 개의 횃불이 달린 막대를 흔들어 공격하는 왜군의 기세를 꺽고 진주성의 군사들에게 사기를 북돋아주었다. 때마침 도착한 전라도 의병대장 최경희의 군사를 곽재우의 군사로 오인한 왜군은 기세가 꺽이어 철수하고 말았다. 이것이 유명한 임진란의 3대 대첩중의 하나로 불리워지는 진주대첩이다.
곽재우장군은 가는 곳마다 신출귀몰한 전략으로 승리하고 왜군들의 간장을 서늘하게 하여 임진란 중에 많은 공을 세웠다. 선조 29년(1596) 10월 하왕산성 전투중에 계모허씨의 상을 당하자 생전에 못다한 효도를 하여야 한다고 3년상을 지내려 강원도 울진으로 갔다. 이 때 조정에서는 여러 가지 직책과 하교를 내려 군무에 돌아올 것을 명했으나 사람의 도리를 지킬 것을 청원하여 나가지 않았다.
조정에서 계속하여 벼슬을 내려 부르던 중 3년상이 끝나 경상좌도 절도사라는 벼슬을 받아 들였으나 이 때는 이미 전란이 끝난지라, “고양이를 기르는 까닭은 쥐를 잡기 위함이다. 지금 왜적이 평정되어 나는 할 일이 없으니 떠나도 되겠구나”하고 사퇴하고 물러났다. 그리고 입산하여 丹공부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대사헌 홍여순이 곽재우를 모함하여 3년간 전라도 영암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유배생활이 끝나자 비슬산(琵瑟山) 산속에 몸을 숨기고 낙동강 강변 청암에 정자를 짓고 글을 읽으며 조용히 솔잎만 먹고 연기법을 수련하였다.
이 때 시를 지었는데,
『朋友憐吾絶火烟 共成衡宇洛江邊
無飢只在?松葉 不渴猶憑飮玉泉
守靜彈琴心澹澹 杜窓調息意淵淵
百年盡過亡羊後 笑我還應稱我仙』
“내가 화식을 끊었다고 친구들이 불쌍히 여기지만 낙동강 가에 집을 함께 지어보세.
배주림이 없으니 다만 솔잎을 먹기 때문이오, 목마르지도 않으니
옥같은 샘물을 마시기 때문이네.
고요함을 지켜 거문고를 타니 마음이 담담하고, 창을 닫고 고른 숨(조식)을 쉬니
뜻이 그윽하네.
한 백년이 다 지나 망양지탄할 적에 나를 비웃던 이들 또한 나를
신선이라 부르지.“
선산 사람 승지 박수홍(朴守弘)이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공을 찾아갔었다. 공은 박수홍에게 “장차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하니 박수홍이 “과거를 보러 갈 따름입니다”고 대답했다. 공은 거듭 묻기를 “이런 때 과거를 보아 무슨 소용이 있소?”하며 술상을 차려 너댓 잔 마시다가 불쑥하는 말이 “술 때문에 괴로와 기분이 평안치 못하군”하고 그릇을 가져오게하여 귀를 기울이고 쏟으니 술이 귓구멍으로부터 모두 나왔다. 공은 본시 술을 좋아했는데 술을 마시고 난 뒤에는 곧 다시 쏟아내는데 먹은 술의 양과 나온 술의 양이 같았다고 한다.【명신록에서】
이렇게 지내는 중에도 조정에서는 여러차례 벼슬을 내리고 조정에 나올 것을 명했으나 병을 이유로 모두 물리치고 조용히 말년을 보냈다. 그는 오직 하루에 송화 한 조각만 먹고 지냈 으나 몸이 가벼워지고 건강해졌다하니 신선의 부류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광해군 9년(1617) 강인한 정신과 신출귀몰한 계략으로 나라가 어지러울 때 백성과 함께 나라를 구하는데 이바지했던 공은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던 날 비바람이 쏟아지고 번개가 치더니 붉은 기운이 하늘로 뻗쳤다고 한다.
숙종 35년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충익(忠翼)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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