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학/단학

丹學人物考 (9) 정희량(鄭希良)

검은바람현풍 2012. 2. 23. 19:19

丹學人物考 (9)  정희량(鄭希良)

 

연 대 : 1469(예종1)~?

본 관 : 해주 父 : 정연경(鄭延慶)

호 : 허암(虛庵) 자 : 순부(淳夫)

주요저서 : 공식적인 기록없음. 해동이적에 의하면 명경수를 지었다고 함.

 

 

허암(虛庵) 정희량은 이조 연산군 때의 문관으로 성격이 강건하고 문장과 시에 능하며 성격이 강건하고 문장과 시에 능하며 또 음양학에 밝았고, 영달에 마음이 없었다.

일찍 생원에 합격하고 1495년(연산군1)에 문과에 급제, 한림이 되어 소장(성종대왕을 위한 불공에 관한 것)을 지은 것이 문제가 되어 귀향갔다가 이듬해 풀려나고 1497년(연산군3) 예문관 대교(待敎)에 보직되어 “임금이 마음을 바로 잡고, 경연에 근면하며, 간언을 받아들이며, 현사(賢邪)를 분별하며, 대신을 경대(敬待)하며, 환관을 억제하며, 학교를 숭상하며, 이단을 물리치며, 상벌을 공정히 하며, 재용을 절제할 것” 등의 소를 올렸다.

이 일로 연산군 측근에서 세도를 부리고 있던 간신들에게 미움을 받던 차에 1498(연산군4)년 무오사화 때에 난언(亂言)을 범하고 난을 고하지 않았다는 혐의를 받고 의주에 귀양갔다가 김해에 옮겨진 후 사면되어 모친상을 당하고 경기도 개풍군 풍덕에서 수묘(守墓)하다가 산책을 나간 후에 돌아오지 않아 사람들은 혹 죽었다고도 하고 살았다고도 하며 죽은 날짜를 알지 못하게 되었다.

해동이적에는 정희량이 37세에 부친상을 당해 풍덕현에다 의려를 짓고, 천체의 운행을 점쳐 살피고 우러러 바라보니 그 때의 일이 장차 어려워질 것을 알아서 탈신(脫身)하여 종적을 멀리할 생각을 하고 평소에 내왕하던 산사(山寺)의 중과 상의하여 계획을 세우고, 때때로 혼 자 산등성이에 올라가 뒷짐을 지고 배회하다가 집에 돌아와서는 눈물을 흘리어 하인들은 모두 그가 선친을 그리어 그러려니 생각하였는데 5월 5일에 산사의 중이 오자 하인들은 물 건너 멀리 땔나무를 해오라고 보내놓고 중과 함께 도망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저녁 늦게 돌아온 사람들이 찾아 나섰는데 조강(祖江) 강변의 언덕에까지 가서 보니 밀짚모자, 신발, 지팡이만 덜렁 남아 있을 뿐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그가 물에 빠져 죽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수십 년 뒤 모제(慕齊) 김안국(金安國. 1478~1543) 선생이 안찰사가 되어가던 중에 역의 누각에 머물고 있었는데, 벽에 이런 시 한 수가 적혀 있었다.

 

『風雨驚前日, 文明負此時

풍우는 지난 일을 놀라게 하고, 문명은 이때를 질 것이다.

孤?遊宇宙, 嫌閘幷休詩

외로운 지팡이는 우주에 노니는데, 시끄러움을 꺼리어 또한 시도 그만 짓노라』

그런데 먹물이 아직도 마르지 않았다. 김안국 선생이 크게 놀라, 역리에게 물으니 역리가 대답하기를 “아까 승의(僧衣)를 입은 늙은 중이 두 사미승을 데리고 누각에 올라가 음영(吟?)하고 조망(眺望)했었습니다. 그래서 역관의 직원이 손짓하며 물러가라고 하는데도 물러가려 하지 않다가 나으리의 행차를 바라보고는 천천히 누각을 내려갔습니다” 하였다.

김안국 선생은 그 중이 정희량임을 알고 황급히 말탄 군사들을 분산시켜 주변을 뒤지게 했으나 찾지를 못하였다.

김안국 선생은 그 후 또 어느 절에 놀러 갔다가 벽에 시를 써놓은 것을 보았는데,

 

『鳥窺頹垣穴 새는 무너진 담구멍을 엿보고

僧汲夕陽泉 중은 저물녘에 샘물을 짓네』

라는 싯구가 있었다. 이것도 또한 정희량이 아니면 쓸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의 모습과 거동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니 마치 당나라 때의 낙빈왕(駱賓王. 640~684)과 같았다.

정희량은 일찍이 상?중?하, 삼원(三元)으로 사람의 운명을 추리하여 여러 책을 만들었는데, 가는 글씨는 털끝과 같고 큰 글씨는 모발과 같은 것이 백여 권으로서 이름을 명경수(明鏡數)라 하였다.

하루는 밤중에 산방(山房)에 조용히 앉아 제자인 김윤(金倫)과 함께 현학(玄學)을 담론하고 있는데 갑자기 산 밖에 여우가 심하게 울부짖는 것이었다. 정희량은 한참 한숨을 쉬더니 산을 향해 몇마디 주문을 외고 손가락을 퉁겼는데, 이튿날 아침 김윤으로 하여금 앞산으로 가서 그 여우를 찾아보게 하였더니 여우는 혀를 내밀고 죽어 있었다. 김윤은 크게 놀라 뜰 아래로 내려가 절하면서 “선생님을 따라 오랫동안 수학(數學)의 조박을 전수받았으나, 부적과 주문에 관한 신묘한 방법을 아직 들어보지 못했사오니, 그 대강이라도 배우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정희량은 “네가 나의 수학을 전수받으면 일생동안 의식(衣食)이 절로 여유가 있을 터인데 어째서 이런 것을 배우려고 하느냐?”하였다. 김윤이 한사코 배우려고 하자 정희량은 또 말하기를 “내가 너로 하여금 아직껏 마음을 다스리지도 못할 정도로 가르쳤으면서 이런 일에 먼저 종사하게 하면 반드시 남을 해치고 사물을 방해하게 될 것이다”하고 끝내 가르쳐주지 않았다.

이퇴계(退溪 李滉. 1501~1570)가 삼가현에서 한 중을 만나 그와 주역을 담론하는데, 응대하는 것이 유수(流水)와 같고 보는 바가 매우 투철하였다. 퇴계는 의아하게 생각하고 그 중에게 “ 정희량은 중이 되었다던데, 지금쯤은 틀림없이 늙었을 것이오. 지금의 세상 일을 보면 걱정이 없을 것인즉, 어찌 다시 벼슬길에 나서지 않을까요?”하니 그 중이 대답하기를 “정희량은 비록 죽지 않았더라도 부모상을 끝마치지 않았으니 불효이고, 임금을 버리고 달아났으니 불충입니다. 불효하고 불충하면서 어떻게 감히 세상에 나타날 수 있겠습니까?”하고는 떠나가며 “

장차 뒷산의 초막에서 묵으리라”고 하였다. 퇴계는 깨달은 바가 있어 사람을 시켜 초막을 찾게 하였으나 그가 이미 짐을 싸들고 은둔한 뒤였다.

김정국(金正國. 1485~1541)의 사제척언(思齊?言)에 의하면, 김윤이 젊었을 때 평안도 묘향산 등지를 유람하다가 이천년(李千年)이라는 한 술사를 만났는데 김윤은 그를 따라 다니면서 여러 산을 유력하고 거의 6~7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술수를 전수 받았다고 한다. 그 후 김윤은 부모님을 뵈오러 고향을 왔을 때에 스승이 가르쳐 준 술수를 그대로 써서 사람들의 길흉화복을 점치는데 백의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다 한다.

이천년과 김윤은 기유년에 평안도 강서현의 구룡산에서 김정국을 기다리겠노라고 약속하면서 손수 시를 써주었다.

 

『八十山中老 三彭已掃除

人間應不夢 鶴伴意無餘

雪榻蟾光冷 雲窓日影?

誰知無累鑑 萬代自淸虛

여든의 산중의 늙은이 삼팽 사람의 몸 속에 있으면서 해를 끼치는 세 가지 벌레. 팽은 성이고, 큰 것이 팽거(?), 가운데가 팽질(質), 막내가 팽교(矯)임. 삼시(三尸)라고도 함.

은 이제 말끔히 쓸어냈네

인간 세상은 꿈꾸지 않고 학을 벗 삼으니 뜻에 여한이 없네

눈 내리는 침상엔 달빛만 차고 구름낀 창엔 해 그림자 성긴데

뉜들 알랴 누 해를 입고 괴로워 함.

없는 본보기임을 만대에 스스로 청허하도다』

 

그때 그를 받들어 모시는 어린 종의 나이가 겨우 13, 4세쯤 되었는데 그도 손으로 시를 써서 주었다.

 

『天地無家山水客 生涯一句意何如

苔痕山路白雲鎖 月影淸冷竹影?

천지간에 집없는 산수의 나그네는

생애가 한 글귀인데 뜻이 어떠한고?

이끼 낀 산길에는 흰구름이 서려있고

달 그림자 맑고 찬데

대 그림자는 엉성하네』

 

이천년의 시는 격이 높고 예스러우며 필치의 자취가 기이하고 굳건하며, 시중드는 아이까지도 시재(詩才)와 필법이 또한 보통이 아니니 비범한 술객임이 분명하였다.

또 서쪽의 산승(山僧)의 말로는 이상한 중이 여러 산을 왕래하는데, 일찍이 정희량의 얼굴을 아는 어떤 사람이 있어 분명히 알아 보았다고도 한다. 혹은 중들에게 싯귀를 주어 세상에 그 시가 전파되어 사람들이 다투어 왼다고도 하였다.

정희량의 제자 김윤은 스승을 오래 따라 다니어 스승의 생년월일시를 아주 상세히 알고 있었는데 그가 서울에 오자 판사 신경광이 점치기를 좋아해서 선비나 고관의 오행을 적어 놓고 항상 스스로 점을 쳐서 시험해 보곤 하였다. 정희량의 오행 또한 그 가운데에 들어 있었다.

김윤이 하루는 신경광을 찾아가 좌담을 하다가 기록을 열람하게 되었는데 도중에 정희량의 오행을 보고 갑자기 크게 놀라며 “이건 우리 스승 이천년의 팔자인데요” 하고 외쳤다.

이로써 정희량이 죽지 않고 살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겠다.

명신록에 따르면 정희량은 일찍이 자기 운명을 헤아려 보고, 시기의 위치가 정해지지 않아 탄식하기를 “만약 어떤 간지(干支)에 있으면 마땅히 크게 귀하고, 어떤 간지에 있으면 흉하나, 말할 수는 없다” 하고 항상 세상을 도피할 생각을 하여 평소에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갑자년의 화는 무오년보다 더 심할 것이니, 나아갈 생각은 하지도 마라”고 하였다.

후일 정희량의 예언대로 연산군은 무오사화에 이어 갑자사화를 일으켰는데 이때 어찌나 포악하고 살생을 많이 했는지 이 화를 면한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허암 정희량은 이때 이미 몸을 피한 뒤라 화를 면하고 산수간에 유람하며 단학공부에 전념하고 제자를 길러 단의 전수에 힘쓰며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때때로 인간 세상에 나와 세상을 지그시 바라보고 돌아가는 등 비록 도피하여 연하(煙霞)를 먹으며 산수를 배회했어도 오히려 인간 세상에 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