丹學人物考 (7) 곽종석(郭鍾錫)
연 대 : 1846(헌종12)~1919
출생지 : 山淸(경남)
본 관 : 玄風 父-郭源兆(곽원조)
자 : 鳴遠(명원)
호 : ?宇(면우), 幼石(유석)
면우 곽종석 선생은 구한말의 대표적 유학자이시다. 선생은 평거에 단정하게 꿇어 않아 글을 읽었는데 그 모양은 고송(孤松)이 절벽 위에 의연히 뻗친 것과 같아 가히 범할 수 없는 위풍이 서렸다고 한다.
선생을 잉태했을 때 아버님이 마을의 진산(鎭山)인 석대산(石臺山)이 방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어 이름을 석산(石山)이라 하였다 한다. 선생의 부친인 도암공(道菴公)은 문학에 조예가 깊고 지조있던 분으로 이름이 났었다.
선생은 4살때부터 벌써 글을 배우게 되었는데 七살에 이르러서는 사서(四書)와 시경(詩經), 서경(書經) 등을 암송할 만큼 글에 출중했다. 이에 그 마을 사람들은 신동(神童)이 태어났다고 기꺼워 하였다 한다.
차차 자람에 따라 어릴 적의 이름 석산을 종석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날카로운 예지를 지닌 채 날로 성숙하고 있었다.
하루는 해질녘에 한 노승이 서당집에 찾아와 자고 가기를 청하였다. 당시만 해도 중은 천시 당하던 때인지라 주인은 머슴사랑에 자고 가도록 하였다. 이것을 보고 있던 도암공이 노승을 딱하게 여겨 도암공의 방에 청하고 저녁을 따뜻이 대접한 후에 재워주었다. 그때 중은 바랑에 책을 한 짐 가득 가지고 있었다. 이튿날 중이 떠나려 할 때 도암공은 바랑의 짐을 대신 지고 10여리 가까이 져다 주었다. 그리고 묻기를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많은 책을 지고 다니십니까?”하였더니 노승은 “우리 절에는 여러 권속이 있는데 먹을 것이 넉넉하지를 못하오. 이 책은 불서(佛書)가 아닌지라 중들은 감히 대면하려고도 하지 않지요. 그런데 실로 이 책은 우리 겨레 전래의 귀중한 단학경전(丹學經典)이오. 혹시 임자라도 만나면 팔아서 양식에 보태려 하오” 하였다.
그 무렵 도암공은 한미한 처지이기는 하지만 단학경전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띄는지라 선뜻 그 노승에게 “그것이 그렇게 귀중한 책이면 제가 사겠오. 그 대가로 내가 10년 동안 받은 사경(요즘의 연봉 같은 것)이 있는데 이것을 모두 드리리다. 그것으로 아들을 가르쳐 보려하오”하였다. 그러자 노승은 “내게 그 사경을 다 주면 무엇으로 아들을 가르치려 하오. 오 년 동안의 사경을 받을 터이니 나머지로 아들을 가르치도록 하오. 그리고 이 책은 더할 수 없이 귀중한 책이니 소중히 간직하시오” 하였다. 그리하여 도암공은 그 노승의 책을 손에 넣게 되었고 그 경전을 아들인 석산에게 물려주어 익히도록 하였다. 이로 인하여 후일 선생께서는 조 선 500년의 유학을 집대성하시는 큰 일을 해 내시었던 것이다.
선생은 숨어서 드러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기른다(自養)는 이 한마디에 일생을 받쳤던 분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기가 거처하는 방을 회와(晦窩), 다시 말하면 어두운 움집이라 생각 했고 또한 그렇게 불렀다. 18세 때에 회와시(晦窩詩)를 지어 주목을 받았는데 곽종석은 그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혀 놓았다.
“하늘은 우리에게 밝은 명(明)으로서 품부하였고 나는 그것을 받아 태어났다. 이처럼 이미 밝은 것을 받고 태어난 이상, 그것을 잘 길러야겠는데, 대저 어두움에 있어서 밝히는 것이야 말로 잘 밝히는 것이요, 밝음에 있어서 어둡게 하는 것이야말로 잘 어둡게 함이다. 어두움과 밝음이 서로 뜻대로 된다면 하늘이 품부하고 내가 받은 바가 그로써 온전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그는 20세 때에는 ‘회와삼도-晦窩三圖’를 지었고, 25세 때에는 ‘사단십정경위도-四端十情經緯圖’를 지어 이(理)와 기(氣)를 설명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성(性)과 기(氣)를 합친 것과 같으며 기(氣)라는 것은 화수목금토(火水木金土), 이른바 五行의 ‘기(氣)’요, 성(性)이라 함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이(理)’다. 이러한 이(理)와 기(氣)가 발(發)함에 있어서 이(理)는 그 주인이요, 기(氣)는 발하는 자료이다. 이(理)와 기(氣)가 발할 때 종횡으로 착종(錯縱)하여 그 이가 기를 타(乘)고 바르게 발(發)한 것은 날(經)이 되는 것이니, 이것이 ‘사단-四端’이다. 그 理가 기를 타고 곁으로 난(生) 것이 씨(緯)가 되는 것이니, 이것이 ‘십정(十情)’이다.”라고 하였다.
이외에도 선생은 32세 때에 ‘이결-理訣’에서 이(理)를 여러 각도로 분석하여 체계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54세에 이르러는 ‘이기론(理氣論)’을 짓는 등 이기(理氣)에 관한 탐구는 선생의 일생을 통한 근본적 과제였음을 알 수 있다.
선생은 과거를 보지 않으셨지만 고종때 종1품의 벼슬인 의정부 참찬(議政府 參贊)을 지내셨는데 그 연유는 이러하다.
당시 고종 임금께서는 병서(兵書)를 즐겨 보셨는데 어느날 책을 읽으시다가 모르는 낱말이 있어 측근의 대신들에게 물어 보았으나 모두 모른다고 하였다. 임금은 심히 진노하시면서 “
어찌하여 여러 대신들 중에 아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단 말이오” 하고 꾸짖으셨다. 이때 한 신하가 임금께 “영남 선비에 곽면우라는 이가 있는데 박학하여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이오니 이 사람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옵니다” 하고 아뢰니 임금은 당장 사람을 보내 알아오도록 명하셨다. 그리하여 임금의 명을 받들고 영남으로 곽면우 선생님을 찾아가 책의 낱말을 물어 보았더니 선생께서는 “그것은 이런 뜻이오, 어느 책 어느 구절에 있소”하고 즉석에서 대답하셨다. 이 말을 전해들은 고종은 면우 선생의 해박한 지식에 감격하여 서울로 불러 벼슬을 내리고 빠르게 진급시켜 종1품까지 올랐다고 한다.
이처럼 선생은 학문에 온 정성을 쏟았으며 후진 양성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여기에 선생께서 후학들을 위하여 독서설(讀書說)을 마련하여 학문하는 요결을 명시한 것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사물(事物)을 정심(正審)하고 궁리(窮理)하자면 먼저 책을 읽어 지(知)를 얻는 일이 긴요(緊要)하다. 글을 읽고도 통하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 책 밖을 헤매고 있기 때문이다.
책에는 본의(本義), 정의(正義), 여의(餘義)가 있으니 먼저 글의 정의를 얻은 후에 위로는 본의를 구명(究明)하고 아래로는 여의를 추리(推理)하여야 한다. 이것이 독서하는 요령이다.
겉에만 힘쓰면 진의(眞意)를 파악하지 못하게 되고, 뜻에만 너무 치우치게 되면 고루(固陋)하게 되기 쉬우니 마음가짐을 우유(優游)히하여 용력(用力)하기를 부지런히 하고, 진전(進展)의 효과를 책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독서의 법칙이다.
시서(詩書)는 차라리 뜻을 파지 않고 읽으며, 역예(易禮)는 차라리 상세히 읽고, 사자(四子 : 大學, 中庸, 論語, 孟子)는 한평생을 통하여 아침 저녁으로 읽어야 하니 이와 같은 것을 독서의 권도(權度)라고 한다.
언제나 마음을 편안히 먹고, 기운을 다스리며 흉중(胸中)에 큰 뜻을 품고, 눈은 항상 책에 오로지 하여야 하니 이것이 독서의 근본이다.
대저 어부의 아들은 고기 이름을 알게 되고, 관청의 하급관리의 아들은 먼저 관계되는 장부를 배우게 되니, 이는 다 세상에 알맞게 쓰기 위해서다.
학문도 그 목적이 세상 수용에 있는 것인데 오늘날의 문장하는 사람들이 크게 말하고 허세를 부려 도를 소홀히 여김은 참으로 천한 일이다. 이렇게 독서하는 것은 차라리 안하는 것만 못하다.
그리고 독서에는 형독(形讀), 유독(油讀), 심독(心讀)이 있다. 형독이란 책 속의 점과 획까지 따지고 자음(子音)의 발음에 특별히 유의하면서 읽는 것이고, 유독이란 일구의 단사(單辭)를 적결(摘抉)하여 화문(華文)을 꾀하고 그 골자는 구하지 않으면서 매끄럽고 번지르하게 읽는 것을 말하고, 심독이란 자기 마음으로 책의 사실에 응하고 책 속의 도를 얻어 자기 마음의 덕(德)으로 삼으면서 읽는 것이다. 형독은 진실로 말할 것이 없거니와 유독은 명리를 위하고 괴서(怪書)를 꾀하게 되므로 그 공이 비록 형독보다 깊을지라도 자기를 해침에 있어서는 백 배나 되므로 차라리 형독을 할지언정 유독은 말아야 한다. 명리(名利)를 버리고 괴서를 없이 한 뒤라야 마음이 온전하게 되어 사물에 응할 수 있으니 진실하고 역행(力行)한 다음 순차적으로 향상을 꾀해야 한다. 성현의 말을 송하면서 그 사람을 몰라서 되겠으며 그 책을 읽으면서 그 이치를 몰라서 되겠는가!”
여해 선생께서 면우 선생님을 알게 된 것은 13세 때 아버님의 편지 심부름을 한 때였다. 그 때 면우 선생께서 글 쓰시는 것을 보고 있노라니 종이 위로 한줄기 빛이 쏟아지더니 그대로 붓을 써내려 가셨다고 한다.
훗날 여해 선생께서 우리 겨레의 발상지를 답사하시고 궁금한 것이 있어 경남 거창 가북산(伽北山)의 다전(茶田)으로 선생을 찾아 가셨다. 선생을 모시고 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한밤중에 면우 선생께서 조용히 일어나 앉으시더니 하루종일 아무 말도 없으시던 분께서 “천지(天地)! 천지는 성지(聖地)지!” 하며 감격어린 목소리로 말하셨다. 그리고 잠시 후 “백두산은 성산(聖山)이지!”하시고는 “보았지!” 하셨다. 이 말씀은 여해 선생께서 백두산 천지 가에서 한밤중에 휘황찬란한 달빛이 비치는 인적 없는 태고로부터의 못 가운데에서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하늘로 거대한 물줄기가 솟아 올라 물기둥이 까마득하게 되더니, 비가 되고 구름이 되어 하늘을 덮고 땅으로 내려오는 신비로운 광경을 보신 것을 알고 하시는 말씀이셨다. 이런 광경이 펼쳐지는 일은 드문 일이었다. 면우 선생은 “잊어서는 안돼! 우리가 백두산족 이라는 것을!”하고 말씀하신 후 여해선생께서 궁금하게 생각했던 우리 민족의 장래에 대한 말씀을 심중을 꿰뚫어 보듯이 소상히 말씀하시었다.
“안동 북쪽 요동 반도를 이루는 산맥과 백두산에서 뻗어 내려온 산맥으로 이루어지고, 압록강을 남으로 한 대분지(大分地)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계관산(鷄冠山)과 오룡배(五龍背)에 둘러 싸이고 자그마한 금석산(金石山)을 중심으로하여 이루어질 미래의 대도시, 백두산족의 수도가 될 곳! 나는 이제 늙어서 볼 수 없지만 자네들은 볼테지”
7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 여해 선생께서는 국내에서 그만한 분을 만나보지 못하셨다고 하신다.
1918년 3월 하순에서 4월까지 여해 선생께서는 병으로 의식불명이 되는 등 사경(死境)을 헤매다가 소생하시기를 여러 번 하였다. 이를 보기가 딱하셨던 선친께서는 “늙은 나는 생각지 말고 편안하게 가거라” 하고 돌아 앉으셨다. 그리고 얼마후 선생은 심장이 멈추고 몸이 싸늘히 식어 식구들이 얼굴을 덮고 방 웃목에 밀어 놓았다.
바로 그날 오후 2시경 영남에서 한 선비가 찾아와 선생님을 뵙고저 왔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미 선생의 몸은 식어 있는지라 돌아가셨다고 대답하자 “면우 곽종석 선생님께서 죽은 사람을 오늘 꼭 찾아 뵈라고 했을 리가 없습니다. 만나 뵈올 일이 있으니 뵙게 해주십시오” 하고 청했다. 이에 접대하는 사람이 우선 사랑방으로 들게 하여 인사를 치르고 나자 영남 선비의 말이 자신은 영남 사는 장인근(張仁根)이라는 사람인데 공부하던 중 모르는 것이 있어 면우 선생님을 찾아뵈었더니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충청도 계룡산 밑 무슨 마을에 권 아무개가 있는데 나보다 더 잘 설명해 줄 터이니 그리로 가서 말씀해 보라 하시면서 그 물음에 대해 이 나라에서는 그만이 대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당부하시기를 “몇월 몇일 몇시를 넘기면 안되네” 하셨다 한다. 그러면서 그 선비는 자기가 좀 늦게 온 것 같다고 하였다. 그런데 마침 접대하던 이가 다른 손님을 맞이하러 가서 방이 비었을 때 영남 선비는 윗방 웃목으로 가서 이불을 벗겨 보았다. 그러자 죽어있던 여해 선생께서 신음소리를 내는 것이 아닌가! 이로부터 집안 사람들과 영남선비의 극진한 간호로 쾌차하시고 그 선비도 공부를 하여 돌아갔다고 한다. 만일 면우 선생님께서 그 선비를 보내지 않았다면 이미 죽어 있던 사람에게 누가 관심을 가졌겠는가?
1905년(광우9) 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면우 선생께서는 조약을 폐기하고 국적(國賊)을 죽일 것을 상소하였다. 그리고 1910년 한일 합방이 되자 고향에서 울분의 나날을 보내다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유독 유학자가 없음을 알고 아쉬워하던 중 일제가 강요한 소위 독립불원서에 유림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있음을 알자 대노하여 일흔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파리 강화회의에 2674자의 긴 글을 지어 137명의 서명을 받고 문인 김창숙(金昌淑)을 시켜 상해로 보냈다. 이 글은 상해에서 영문으로 번역하여 원본과 더불어 인쇄되어 파리에는 물론 중국과 기타 우방 국가에 우송되었고 국내의 모든 향교(鄕校)에도 우송되었다. 이로써 3?1운동에 민족 대표 33인에서 제외되었던 유림들이 민족운동에 참여케 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선생은 그해 4월 거창 헌병대로 끌려가 이어서 대구 감옥에 수감되었으며 2년 형을 선도받았다. 이때 선생께서는 “나는 살아서 돌아갈 기약을 하지 않고 여기에 왔다. 왜 종신 징역을 선고하지 않고 하필 2년이냐”고 항의하였다. 그리고 왜경에게는 무슨 말이거나 절대 경어를 쓰지 않으셨다. 공소를 하라는 주위의 권고가 있자 ‘원수도적에게 빌 붙는 짓이라’하며 일축하였고 ‘내가 공소할 데는 하늘 밖에 없다’고 하였다.
옥중에서도 선생은 주역 한 부를 사들이게 하여 잠시도 책을 놓지 않고 꼿꼿이 정좌하여 읽었다고 하니 때와 곳을 가리지 않고 호학(好學)했음을 알 수 있다. 그해 7월에 선생은 병환으로 보석되어 나왔으나 병이 악화되어 같은달 24일 오전 10시에 다전(茶田)의 여재(如齋)에서 七二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선생께서 감옥에 계실 때 읊은 시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꿈에 새능길 오르니 봄풀은 사람의 창자를 다 끊어놓네.
깨어보니 옥중은 깜깜하고 처마 끝에 빗소리만 요란하구나“
夢上新陵道 春草斷人腸
覺來南冠暗 ?雨夜淋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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