丹學人物考 (5) 서경덕(徐敬德)
서경덕은 송도의 화담 서간정(花潭 逝間亭)에 집을 짓고 살았기 때문에 그를 사람들이 화담이라 불렀다. 서경덕의 아버지는 수의부위(修義副尉) 호번(好蕃)으로서 대대로 풍덕에 살았으나 송경(松京)사람 한(韓)씨를 부인으로 맞이하게 되면서부터 개성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그리하여 1489년 (성종20)에 송경 화정리에서 서경덕을 낳았다. 일찌기 서경덕의 어머니는 孔子廟에 들어가는 태몽이 있은 후에 그를 잉태했다 한다. 화담선생은 선천적으로 총명하고 정직하여 연장자의 말을 경신하였으며 14세 때에는 이웃의 서당에 가서 스승에게 상서(尙書)를 배우다가 서경(書經)의 어떤 대목에 이르러서는 스승이 구두법만을 가르치고 그 장을 넘기려 함에 서경덕이 반문하여 그 까닭을 물으니 스승이 이르기를 “이 장의 글은 세상에 아는 이가 없으니 읽지 않는 것이 좋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어린 그였지만 ‘알 수 없는 글을 무슨 이유로 경전에 올렸을까?’ 하면서 집으로 돌아와 수천 번을 읽고 또 읽어 15일 동안을 생각한 끝에 마침내 스스로 그 뜻을 깨달았다 한다.
열 여덟 살 되던 해에는 大學을 읽다가 격물치지(格物致知)의 대목에서 크게 깨닫고 모르는 사물의 이름들을 벽에다 써붙여 놓고 밤낮으로 그것을 보면서 원리를 깨닫게 될 때까지 사색 하였다. 서경덕의 학문하는 태도는 선사후독(先思後讀)의 방식에 따라 사색에 치중하므로써 도리를 체득하고 그런 연후에야 독서하여 그 도리를 확인하려는 태도로서 이는 범인으로서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치밀하고 깊은 연구와 격물치지를 좇아 사색하는 태도였던 것이다.
서경덕은 어떤 때에는 연구와 사색에 지나치게 열중한 나머지 침식을 잃어 건강을 해친 일도 있었으며 21세 되던 해에는 영남지방과 호남지방의 명산을 찾아 3년 동안이나 사색에 묻힌 수덕생활(修德生活)을 하기도 하였다.
서경덕은 19세때 태안(泰安) 이씨를 부인으로 맞이 하였다. 그리고 20세가 되자 “내 나이 스물에 두번 다시 과오를 범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였던 것이다. 화담의 집은 몹시 가난하여 끼니를 잇지 못함이 연일 계속되는 때가 많았으나 그는 식량이 없어도 걱정하는 기색을 전혀 나타내지 않았으며 조정에서는 여러 번 그를 천거도 하고 벼슬도 내려서 세상에 나올 것을 청했으나 끝내 나가지 않고 오직 사색을 통한 학문의 연구에 올바른 몸가짐을 지키면서 일생을 조용히 지냈다.
단 한번 그는 어머니의 명에 의해 사마시(司馬試)에 응시 급제하였으나 다시 대과(大科)에 응시하지 않고 돌아와서 일생동안 생원(生員)으로서 지내니, 그가 죽은 후 그의 묘비 표제에 “生員 徐敬德之墓” 라고만 기록하였는데 선조7년(1574)에 우의정겸경연?춘추관사(春秋館事)를 추증(追贈)하고 시호를 문강(文康)이라 하였다.
이처럼 서경덕은 집이 가난하고 벼슬길에도 오르지 않았으나 그의 학문과 덕망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여러 곳에서 많은 유생(儒生)들이 모여들었다. 그 중에서도 이름있는 門人들로는 민순(閔純), 박순(朴淳), 허엽(許曄), 이지함(李之?),박지화(朴枝華), 남언경(南彦經), 박민헌(朴民헌), 홍성민(洪聖民), 서기(徐起) 등이 있다.
이들 문인들외에 문무장상(文武將相)과 수도하던 산중 명사를 찾아 다니던 당대의 명기요, 희대의 국색(國色)이며 여류시인으로서도 유명한 개성의 황진이(黃眞伊)도 언제나 서경덕을 연모하여 가무와 금주(琴酒)로 그를 자주 찾았으나 그는 도학자의 자세에서 조금도 벗어남이 없어다. 서경덕은 이처럼 화담이라는 아름다운 고장에서 조용히 살면서 산수가 수려한 곳을 자주 유람하였고 언제나 명쾌한 눈빛으로 사물을 관찰하였으며, 속리산이며 지리산 등의 여러 명산을 탐승(探勝)하여 기행문과 여러 편의 시를 썼다. 또한 농부들과도 항상 도를 담교(談交)하여 환락하였다. 근처의 촌민들은 무슨 송사나 분쟁이 일어나면 관헌에게 가기에 앞서 서경덕에게 와서 판결을 물었다고 한다.
화담 선생은 일찍이 말씀하시길 “천하에는 삼도(三道)가 있는데 유도(儒道)가 최상이고, 불도(佛道)가 그 다음이고, 선도(仙道)가 또 그 다음이다. 배우는 것도 또한 그렇다”라고 하셨다.
그리고, 또 말씀하시길 “달자(達者)는 삶과 죽음에 대해 아침과 저녁의 상리 (常理)로 생각한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귀화(歸化)하는 날이 하루가 급하니, 세상에서 하루를 보내는 것이 1년을 보내는 것 같다”고 하셨다. 또 말씀하시길, “내 나이는 틀림없이 장횡거(중국 송나라의 학자:1020 - 1077)와 똑같을 것이다”하고 하셨는데, 선생은 58세에 세상을 떠났다.
수암 박지화가 가장 오랫동안 수업을 받아 제법 화담 선생의 도를 터득하였다.(이상 五山說林에서)
화담 선생은 아우 숭덕공과 개울을 사이에 두고 살고 있었다. 선생의 아우 숭덕공은 매일 형님이 계시는 곳을 들려가곤 하였는데 한번은 며칠 동안 들르는 일이 없었다. ‘무슨 일이 생겼나 보다’하고 친히 아우 집으로 찾아 갔더니 아우는 어떤 책을 손에 들고 있는데 형이 찾아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우가 며칠 들리지 않은 것이 그 책에 있음을 아신 선생은 책을 손에 들고 죽 훑어 본 후, 부싯돌을 탁탁 쳐 불사르고 말았다. 아우가 놀라 “형님! 왜 이러십니까?”하니 대답이 “형제간의 의를 상하게 하는 이런 책은 없어지는 것이 낫지!” 했다.
형이 하시는 일이라 동생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두 형제가 함께 길을 걸은 일이 있었다. 길가의 주막집에 들러 술을 마시다가 안주가 모자라 마늘 몇 쪽을 달라고 청했더니 주막집 주인이 하는 말이 술 한잔에 마늘 한쪽이면 충분하다면서 끝내 내놓지 않았다. 화담이 “마늘 몇 쪽 덜 먹으면 어떻고 또 안 먹으면 어떠랴”하며 일어났다. 길을 가다가 쑥이 무성히 있는 곳을 지나게 되자 선생은 아우에게 ‘자네 저 쑥대를 뽑아 주게!’하여 주었더니 선생은 쑥잎을 모두 따버리고 한끝을 뾰족하게 깎아 주문을 외고 던지셨다
얼마 후 볼일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또 다시 주막에 들렀더니 집 앞의 마늘밭이 다 망가져 있었다. 숭덕공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주인이 말하기를 하늘에서 커다란 절구공이가 내려와 짓쪄놓아 저렇게 됐다고 하였다. 다시 길을 가며 아우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선생은 ‘내가 불사른 자네의 그 책이 있었지. 하도 서운해 하기에 그 책 안에 써 있던 글 생각이 나서 그 진부를 한 번 시험해 본 걸세’ 하였다. 이 얘기는 화담선생의 능력이 하도 특출해서 사람들이 살을 붙여 놓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도 어른들께서 선생을 회상하실 때 언제나 들려주시는 기이한 설화이다. 선생은 돌아가시기 두 해 전(56세)에 이미 불치의 병을 앓게 되었는데 이런 와중에서도 ‘원리기’ ‘이기설’ ‘태허설’ ‘귀신사론’ 四편의 초고(草稿)를끝내고 “성현의 말은 이미 모든 선유들에 의하여 주석(注釋) 되었으니 다시 할 필요는 없으나 내 이제 아직 설파하지 못한 것을 위하여 四편을 초고하노라” 술했다. 그 후에 극론(極論)을 초소(草疏)하고 다음해인 명종 원년 7월 7일 향년 58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병상에 누워 계실 때 어느 날 병이 달리 호전된 것 같아 마음을 놓은 시인(侍人)이 개울에 갔다가 돌아와 식사를 하려는데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현인의 죽음이란 실로 기이한 것이라 하겠다. 임종때 한 문하생이 선생에게 “선생님 오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하고 물으니
선생이 답하기를 “삶과 죽음의 이치는 이미 안지가 오래라 마음이 편안할 뿐이다”고 하였다 한다. 천하 제반 사물의 이치를 얼마나 깊이 체득한 말인가?
일생을 영화(榮華)와 영달(榮達)에 구애치 않고 화담에 은거하여 사색에만 전력한 그의 학설은 이이(李珥)의 사상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고 이지함, 박지화 등은 기풍까지도 닮아 산수를 좋아하고 명산에 은둔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해동이적에는 화담선생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치제(恥濟) 홍인우(洪仁祐)는 늘 말하기를 천하의 진리는 한 푼의 차이뿐이니, 진실로 큰 것을 아는 자는 작은 것에 대하여 능하지 않은 것이 없다 하였다. 서화담은 평생토록 학문을 업으로 삼아 방기(方技)나 잡술(雜術)에 이르기까지 모두 통달하였으니, 어찌 큰 것을 아는 자의 극치가 아니겠는가? 세속에서 전하기를, 화담선생은 이술(異術)이 있어 선방(禪房), 비기(秘記) 에 이르러서도 탈발꿈하여 잃지 않았다고 하니, 이설이 비록 허황되나 화담선생이 평소 논의하던 기량으로 보아 틀림없이 근사하기 때문이라 하였다.(이상 해동이적에서)
선생의 자손으로는 아들에 관한 기록은 명확하지 않으나 손자인 우신(佑申)은 무과에 급제, 남도절제사 (南道節制使)를 지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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