丹學人物考 (2) 권진인(權眞人)
권진인(權眞人)은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시조(始祖) 태사공(太師公) 행(幸)의 증손이라고 전하나 안동권씨의 족보엔 전혀 기록된바 없다.
홍만종(洪萬宗1643~1725)이 1666년에 탈고한 <해동이적(海東異蹟>과 허균(許筠1569~1628)의 <사부고(四部稿)>, 이수광(1563~1629)의 <지봉유설(芝峯類說>, 또 허균의 단학스승인 한무외(韓無畏1507~1610)가 저술한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 등을 참고하여 보면 호를 치상(雉裳=赤裳의 와전인듯함)이라 하고 상락(上洛=지금의 상주)대성(大姓)의 아들이라고 한다. 송나라 회녕(熙寧) 2년(1069)에 태어났는데 14세에 문둥병에 걸려 부모들이 고치지 못할 것으로 체념하고 숲속에 내다 버렸다한다.
그런데 밤에 호랑이가 물고 가서 석실 속에 갔다 놓고 옆에는 두 마리의 새끼를 젖 먹여 기르는데 끝내 그를 해치지 않았다.
그러나 고통은 점점 가중하여 한시도 견디기 어려운 지경인데도 시장기를 어찌 할 수 없어 낭떠러지에 퍼져 자라는 풀을 뜯어 먹어보니 배가 불러왔다. 몇 달을 먹으니 부스럼이 점점 없어지고 차차 혼자 일어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많이 캐서 끼니마다 먹으니 그 산의 풀을 거의 반이나 먹게 되었다.
이렇게 수 백일을 지내니 신병은 거뜬히 나아지고 온몸에 푸른 털이 자라났다. 기뻐서 억지로 더 먹으니 또 백일 만에 몸이 절로 날을 듯이 산꼭대기에도 오를 수가 있었다.
그런데 병은 이미 나아 집에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지만 고향에서 호랑이에게 물려오던 길과 살던 곳을 분간할 수가 없어서 갈 바를 전혀 몰랐다.
오랫동안 고민에 싸였던 차 산봉우리 밑을 지나가는 중을 보았기에 달려가서 불문곡직하고 앞길을 가로막고 물었다.
“이 산 이름이 무엇이오?” 하니 중은 놀라서 어쩔 줄을 모르다.
한참만에야 대답하기를 “이곳은 태백산으로 땅은 진주부 (眞珠府=강원도 삼척땅)에 속해있소”하였다.
“이 근처에 절이 있소?”하니 그제서야 안심이 되는 듯 “서쪽 봉우리에 절이 있는데 길이 가파라 기어오르기가 쉽지 않을 것이오” 한다.
그 중과 헤어진 뒤 나는 듯 절에 당도해보니 참선(參禪)하는 집인데 대낮에도 문이 닫혀있고 고요하여 사람이라고는 없는 듯하였다.
손으로 문을 열고 걸어서 중간채에 이르니 뜰에는 잡초가 우거져 너구리가 새끼를 칠 지경이고 지붕에는 풀이 나고 마루에는 몇 해 동안이나 먼지가 쌓였는지 발목이 빠질 정도라 가히 대낮에도 도깨비가 나올 듯하였다. 행랑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놀라웁게도 캄캄한 방구석에 희끄무레한 사람의 형상이 누워있는 것 같았다. 가까이 가보니 과연 고목같이 깡마른 송장이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웬일인지 따뜻한 감이 돌아 자세히 보니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그러자 살아있는 송장은 우렁찬 목소리로 “과연 나타났구나 ! 네가 오기를 기다렸다” 한다 .
그토록 야윈 몸의 어느 곳에 그런 힘이 숨었는지? 실로 기막힐 일이다. “노장님은 누구시며 저를 어째서 기다리셨습니까?” 하니 “놀랄 것은 없다. 실은 간밤에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우리 스승님의 비서(秘書) 를 전해 받을 사람이 오늘 올 것이라 하더니 과연 너의 상을 보매 참으로 그 사람이다” 하고서 일어나 나무함을 열더니 책을 주섬주섬 꺼내면서 “이것들은 이제부터 모두 네것이니라.
이 책들을 한번만 읽으면 그 뜻이 저절로 나타날 것이다. 기필코 노력하 여 게을리 하지 말라”
위엄에 눌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겨우 하는 말이 “어느 어른으로부터 이 책을 전해 받으셨읍니까?”하고 물으니 “신라의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중원에 들어가 정양진인(正陽眞人=鍾離眞人)을 만나 이 책을 전수받았는데 그가 돌아가실 때 내게 부탁하기를 200년 후에 이 책을 전해 받을 사람이 나올 것이라 하셨는데 네가 그 예언을 맞힌 사람이다.
나는 이제부터 그만 떠나가야만 한다” 하며 가부좌(跏趺坐)를 하고 조용히 서거하였다.
‘아...실로 이 어른은 나를 기다리려고 200여년을 보내셨으니 ....
그리고 몇 마디 말씀으로 책이 전해진 내력과 힘써 노력하는 부탁뿐이고 글 솜씨도 넉넉치 못 한 사람에게 무엇을 어떻게 공부하라는 것인가?’
우선 조용히 그를 화장했는데 감색(紺色)의 사리(舍利)가 100개나 나와 사리탑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나서 함을 열어보니 그 속에는 황제음부경(黃帝陰符經), 금벽용호경(金碧龍虎經) 참동계(參同?), 황정내외경(黃庭內外經), 최공입약경(崔公入藥經), 태식경(胎息經), 심인경(心印經), 통고경(洞古經), 정관경(定觀經), 대통경(大通經), 청정경(淸淨經) 등의 경문이 들어있었다.
그는 암자에서 홀로 거하며 이들 책을 오랜 시간에 걸쳐 섭렵하고 스스로 터득한 요령에 따라 먼저 수련에 들어갔다.
단전(丹田)에 신기상주(神氣相住)하여 조식하기를 불철주야하니 조식은 점점 오묘한 경지에 드는데 돌연 마귀들이 사방에서 나와 둘러싸고 갖은 짓을 다했으나 들은체도 본체도 아니하니 마귀들은 저절로 모두 사라졌다.
이렇게 11년을 고생한 끝에 신태(神胎)를 이루고 태식경(胎息經)은 물론, 청정경(淸淨經), 음부경(陰符經), 황정경(黃庭經), 심인경(心印經) 등에 크게 통하여 이제는 하산코자 하였으나 옥황상제(玉皇上帝)께서 명하시기를 그곳에 남아 동국(東國=우리나라) 삼도(三道)의 여러 신들을 통괄하라시기에 그곳에 500년간이나 머물러 소임을 다하였다고 한다.
이상은 장주 홍만종(長洲 洪萬宗)선생이 AD1666년에 집필한 해동이적(海東異蹟)의 대강 줄거리이다.
만력(萬曆)무신년(戊申年=AD1608년)가을 홍만종이 공주의 관직을 사퇴하고 전북 부안(扶安)에 살 때 도인 남궁두가 고부(古阜)로부터 찾아와 4경(四經)의 오묘한 뜻을 가르쳐주고 또한 그가 스승 권진인을 만나게 된 전말을 이야기할 때 스승 권진인 스스로가 밝힌 자신의 내력이라면서 전해준 말이다.
남궁두는 스승과 오랫동안 같은 방에서 지냈으나 이상하게도 배꼽 아래 한 치의 곳을 늘 감추고 남에게 보이지 않았다.
남궁두가 그 까닭을 물으며 보고 싶어하니 권진인은 웃으면서 말 히기를 “어찌 보기 어렵겠는가만 보고 놀랄까 두려울 뿐이다” 하므로 남궁두는 “어찌 놀라겠습니까? 한번만 보여주시기를 뵙니다” 하였다. 스승은 어둠속에서 아랫배의 덮개를 푸니 금빛이 백줄기로 지붕의 대들보까지 쏘아 비치는데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어 침상에 엎드려 버렸다 한다. 또한 조석으로 스승을 대하나 전혀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볼 길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이미 조식수련에 상승의 경지에 들어 정, 기, 신(精, 氣, 神)삼보를 단련하고 감리 용호(坎리?龍虎)로 하여금 서로 섞여 단(丹)을 이루게하여 수백년간 불사의 몸이 되고 가고 옴을 자재하였으니 어찌 신선이 아니라고 말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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