丹學人物考 (3) 崔致遠(최치원)
崔致遠(최치원)(AD857~ ?)의 자는 孤雲(고운), 海雲(해운)이고, 諡號(시호)는 文昌候(문창후)이며 경주의 沙梁部(사량부)사람이라 전한다. 신라의 六頭品(육두품) 출신의 경주 崔(최)氏의 문중에서 태어났다. 원래 신라시대는 엄격한 골품제도에 의하여 사회를 이끌어나간 시대이다. 즉 골품에 따라 벼슬의 한계가 정해져 있던 것이다. 제1위관인 伊伐?(이벌찬)에서 제 5위관인 大阿?(대아찬)까지는 성?진골(聖?眞骨)에 제한되어 있어서 육두품 출신은 제 6 위관인 阿?(아찬)이상으로 올라갈 수가 없었던 때이다.
신라말기에 이르러 육두품의 상당수가 고려왕조의 성립을 정신적으로 지지하여 새로운 사회를 개편해 보겠다는 의욕을 보인 것은 이와 같은 불공평한 제도에 대한 불만의 표시라고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미 육두품의 한계인 阿?(아찬)까지 오른 최고운은 고뇌에 사로잡힌 것이다. 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대운을 육두품인 고운으로서는 막을 길도 없으려니와 그렇다고 해서 다른 왕조를 섬길 만큼 후안무치할 수는 없지 않은가?
최고운은 12세에 혼자 당나라에 건너가 18세에 賓貢科(빈공과)에 金榜(금방=壯元)하여 선주(宣州)의 표수현위(漂水懸尉)가 되어 벼슬길에 올랐다. 학문을 즐겨하던 그는 관계에 나아가서도 끊임없이 학문에 정진하여 선주에 재직할 때는 중산부궤집 (中山覆?集)을 저술하여 문명(文名)을 크게 떨쳤으며, 중국의 육조사적(六朝事蹟)에 오른 쌍녀분기담(?女墳寄談)도 이때에 있었던 일이다. 이어 미구에 승무랑시어사내공봉(承務郞侍御史內功奉) 이란 벼슬에 올라 자금어대 (紫金魚袋)까지 승사(承賜) 받았다.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자 그는 병마도통사(兵馬都統使) 고병(高騈)의 종사관이 되어 황소를 규탄하는 토황소격문 (討黃巢檄文)을 지어 평생에 큰 공을 세웠고 이로써 그의 문장은 천하를 감탄케 하기에 이른 것이다.
또 그는 난중에 계원필경(桂苑筆耕)(20卷)을 저술하여 문단의 혜성과 같은 존재로 등장하였다. 그가 고국에 돌아온 것은 그의 나이 28歲가 되던 해(AD884년) 10월이었다. 그때에 신라는 황혼기여서 국정이 문란하고 기강이 해이하던 때였으나 그는 귀국하자마자 시독 겸 한림학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익현 진현(晋賢)의 도를 펼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주위의 질투와 시기에 견디지 못하고 자원하여 지방장관인 태산군(泰人), 함양(咸陽), 부성(富城=瑞山)태수를 역임 하였다. 그후 진성여왕 8년에 국정의 어지러움과 민생을 도탄에서 구하려는 시무(時務) 10여조를 건의 했는데 이것을 받아들여 왕은 그에게 아찬(阿?) 벼슬을 내렸으나 일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끝내는 세상에 뜻을 버리고 퇴관하여 산천을 소요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가 다닌 명승지는 해인사 (海印寺),쌍계사(雙溪寺)를 비롯하여 월명대(月影臺),와 해운대(海雲臺) 등이며 특히 해운대의 이름도 그의 호인 해운(海雲)에서 비롯됐다는 설이 있다. 말년에는 그의 가족을 모두 이끌고 가야산 (伽倻山)에 들어가 은거하다가 95세로 고려 광종 2년 (AD961년)에 선화(仙化) 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그는 고려가 흥하리라는 예시를 왕에게 보낼 때 “계림은 누렁잎이고 곡령은 푸른 소나무다”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그의 문하생들은 고려 건국초에 많이 출사하여 벼슬을 하였다. 특히 고려의 창업에 은밀한 공이 있었다하여 내시령(內侍令)의 증직과 문창후(文昌候)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그밖에도 그의 발자취가 머문 곳에는 어디에서나 그의 시문에 인연된 많은 기적의 설화로 남기고 있다. 다음은 중국인이 전하는 그의 설화이다.
육조사적(六朝事蹟)에 나오는 쌍녀분이라는 시와 더불어 얽힌 기담으로서 그 줄거를 추려보면 대충 다음과 같다. 최치원이 선주의 표수현위로 재직하고 있을때의 일이다. 어느때 남쪽으로 백십여리 되는 지방에 있는 초현관에서 쉬고 있는데 그앞에 쌍녀분이란 고총(古塚)이 있어 사람들에게 물은즉 아는 이가 없으므로 그기 시를 지어 조(吊)하였다. 그랬더니 그날 밤 여인들이 와서 사례하여 말하기를 그녀들은 형제로서 어려서부터 자색이 아름답고 글재주가 있어 장래의 행복을 꿈꾸어오던터에 재물에 눈이 어두웠던 부모의 강요로 소금 장수에게 출가하게 됨을 비관하고 자살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당나라 현종(玄宗)때 이곳에 묻힌 뒤로 아무도 찾는이가 없어 항상 외롭게 지내더니 오늘 그대가 좋은 시로 조문해주니 감사하다는 것이며 밤새도록 함께 놀다가 새벽녘에야 돌아갔다고 한다. 이 기담 또한 최치원의 시가 능히 한을 품고 죽은이의 혼마저 감동시킬만한 놀라운 솜씨임을 말해주는 한토막의 일화인 것이다. 그는 시, 문장에 재질이 뛰어나 어려서부터 중원천지를 놀라게 했을 뿐 아니라 그 고매한 성품은 또한 오묘한 문학의 세계를 이룩하게 하였다. 그러면서도 심산에 묻혀 속세를 등졌던 동기는 당시의 사회상이 그토록 만들었다고도 보겠으나 고매한 성향과 동양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선(仙)사상에서 그 연유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에 의하면 최치원이 전했다는 환반지학(還反之學)중에서도 참동계16조구결(參同?十六條口訣)은 특히 뛰어난 것을 해설해 놓았는데 금,목,수,화,토 五가지의 법이 있음을 말했다.
또한 그는 외숙 현준(玄俊)에게서 보사유인지술(步捨遊引之術)을 배워서 가야보인법(伽倻步引法)을 저술했다는 것이다. 이것 또한 선도(仙道)의 오묘한 경지인 시해에 관한 저술임이 틀림없으리라. 그리고 최치원선생이 지은 것으로 신라의 화랑 난랑(鸞郞)의 비서(碑序)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이는 화랑도의 정신사적인 측면을 천명하고 있어 화랑도 연구의 진중한 자료의 하나로 여겨져 있다. 불과 76자에 불과한 짧은 글이다.
“나라에 오묘한 도가 있어 그것을 풍류도라고 한다. 그 가르침을 마련한 근원은 선사(仙史)에 상세히 실려있지만 실로 여기에는 세가지 교(敎)(유, 불, 선)가 모두 포함되어 있어 뭇사람들을 도와서 교화하여준다. 이를테면 들어와서는 부모님께 효도하고 나가서는 나라에 충성하라고 하는 것은 노나라 공자(孔子)의 취지이고, 무위(無爲) 한 일에 처하고 말하지 않는 가르침을 행한다고 하는 것은 주나라 노라(老子)의 주장이고,, 모든 악은 저지르지 않고 모든 선은 받들어 실행하라고 하는 것은 축건태자(釋迦=석가)의 교화이다.”
국유현묘지도(國有玄妙之道), 왈풍류(曰風流), 설교지원(設敎之源), 비상선사(備祥仙史), 실내 포함삼교(實乃包含三敎), 접화군생(接化群生), 구여입칙효어가(具如入則孝於家), 출칙충어국(出則忠於國), 노사관지지야(魯司冠之旨也), 처무위지사(處無爲之事), 행불언지교(行不言之敎), 주주사지종야(周柱史之宗也), 제악막작(諸惡莫作), 제선봉사(諸善奉行) 축건태자지화야(竺乾太子之化也).
미루어 보건대 나라에 있는 현묘한 도 풍류는 삼교(유?불?선)의 어느것보다 더욱 특색이 있고 오히려 삼교의 장점을 고루 갖추어 놓은 것이라고 볼 때, 더구나 그 근원이 선사(仙史)의 상세한 기록에 있다고 한다면 우리민족 고유의 신선사상은 세계에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뛰어난 정신적 지주임이 틀림없으며 이런 모든 점을 고루 익히고 전한 최고운 선생은
명실상부한 우리 단학의 비조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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