丹學人物考 (18) 권진인과 남궁두
권진인 : 안동권씨 시조 태사공 권행(權幸)의 증손이라 함.
남궁두 : 생년월일과 죽은 날짜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서기 1555년 과거에 합격한 일이 있고 오늘의 전라북도 옥구군의 임피(臨陂)에서 살았었다고 전해짐.
남궁두는 가정(嘉靖) 을묘(乙卯)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임피(臨陂)에서 살고 있었는데 애첩(愛妾)을 두고 지냈었다. 그런데 이 애첩은 그의 당질(堂姪)과 서로 좋아 지내더니 사통(私通)까지 하는 터라 어느날 둘이 함께 있는 때에 이들 두 사람을 죽이고 죄를 피하여 머리를 깍아 중이 되었다. 법명(法名)을 총지(摠持)라 하고 두류산에 들어가 쌍계사에서 살았다. 그 후 그곳을 버리고 태백산으로 향하다가 의령(宜寧) 들판에 있는 암자에서 살고 있었다.
하루는 예쁘장하고 나이 어려 보이는 젊은 중이 왔는데 두건을 벗고 방에 가린 발을 사이에 두고 들여다 보며 하는 말이, “당신은 사족(士族)인데 어째서 뒤늦게 삭발을 하였소?”하고 한참 있다가 “성품이 참을성이 있군”하더니 또 있다가 “유학을 업(業)으로 살아 한때 이름을 날렸군”하고 말했다. 남궁두는 묵묵히 앉아 있었더니 또 한참 있다가 빙그레 웃으면서 “두 사람을 죽이고 죄를 져서 도망 다니는 사람이로군”하니 모두 맞는 말이라. 두는 크게 놀라 어쩔줄을 모르다가 정신을 차려 정중히 맞아들였다.
그날 밤 남궁두는 그 젊은 중의 침실로 들어가 머리를 조아리며 사실을 고백하고 아울러 매우 간절하게 그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그랬더니 그 젊은 중이 말하기를 “나는 다만 관상만 볼 뿐입니다. 우리 스승께서는 다방면의 재주가 있으셔서 남의 관상을 보고 무슨 재주가 있나 알으시고 그 사람의 재주에 따라 부적이나 혹은 천문, 지리 할 것 없이 그 자질에 따라 직업도 인도하여 주고 앞일도 가르쳐 줄 수 있으나 나는 상법을 배운 것도 아직 정통하지 못하니 어찌 남을 가르칠 수 있겠소”하였다. 두가 ‘그 스승님은 지금 어디 계시옵니까’하니 그 젊은 중은 말하기를 ‘무주 치상산으로 가셨으니 거기로 가면 만날 수 있을 것이요’라고 대답했다. 두는 절을 하고 물러났다. 새벽에 일어나보니 객은 벌써 가고 없었다. 그래서 곧 남궁두는 석장을 돌려 치상산으로 가서 모든 절 수십 구역을 찾았으나 도승은 찾을 길이 없었다.
한 해 남짓을 고심하여 새도 날아갈 수 없는 층암절벽가지 서너 차례나 두루 찾아 보았지만 끝내 찾지 못하고 말았다. 두는 젊은 중이 자신을 속인 것이라 생각하고 실심하여 돌아가려고 하였다. 한 골짜기에 이르렀을 때 숲속에 냇물이 한줄기 흐르는데 큰 복숭아씨가 떠내려 왔다. 두는 이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여 생각하기를 이 골안이 필시 선사(仙師)가 사는 곳이 아닌가 하고 걸음을 재촉하여 개울을 따라 수 리쯤 올라가니 산봉우리 하나가 우뚝 솟아 있는데 소나무와 전나무가 햇빛을 가리우는 곳에 초가삼간이 있었다.
그 초가집은 절벽을 의지하고 지었는데 돌을 쌓아서 토대로 삼고, 위치는 좀 평평하며 깨끗했다. 옷을 걷어 들고 그 길을 올라가니 한 어린 동자가 맞으며 묻기를 “어디서 오는 사람이시오”한다. 두는 읍하고 답하기를 “나는 총지라는 중인데 선사님을 뵈러 왔습니다.”하고 공손히 대답하였다. 그러자 동자가 동쪽에 있는 왼쪽 문을 열어주었다. 그곳을 보니 늙은 중이 있는데 모습이 마치 고목과 같았다.
그 노승은 다 떨어진 장삼을 걸치고 나와서 맞으며 “화상(和尙)의 풍신이 좋은 것을 보니 보통 사람은 아닌데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소”한다. 두는 꿇어 앉아, “우둔한 저는 아무 재주가 없습니다. 노사(老師)께서 많은 재주를 가지셨다는 말씀을 듣고 한가지 재주라도 배워서 세상에 써보고자하여 불원천리 스승님을 찾아 왔사온대 한해 동안을 찾아 헤매다가 이제야 겨우 뵙게 되었습니다. 부디 재주를 가르쳐 주시기 바라나이다”하였다. 그러나 그 장로는 “산속에서 다 죽게 된 늙은 이가 무슨 재주가 있겠소”하고 거절하였다. 두는 애걸하며 백 번이 넘게 절하고 빌었으나 노승은 끝내 거절하고 문을 닫아 나오지 않았다.
두는 돌 아래 엎드려 애소(哀訴)하고 밤이 지나 새벽이 될 때까지 쉬지 않았다. 그러나 장로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부좌(趺坐)하고 입정(入靜)하여 돌아다보지 않았다. 사흘이 되어도 남궁두는 지친 기색없이 더욱 열심히 애걸하며 배우기를 간청하였다. 노인은 그제서야 그 정성의 지극함에 감동되어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였다.
두가 방안에 들어가 보니 방의 크기는 사방 한 길쯤 되는데 다만 목침 한 개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북쪽에는 감실이 여섯 개 있는데 자물쇠로 잠갔고 숟갈 한 개가 감실 기둥에 놓여 있었으며 남쪽으로 낸 창문 위에는 선반이 있고 대여섯 권의 책이 놓여 있었다.
노인이 한참 자세히 보더니 웃으며 말하기를 “너는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다. 우둔하고 소박하니 딴 재주는 가르칠 수 없고, 오직 죽지 않는 법이나 가르쳐 주어야겠다”하였다. 이 말을 들은 남궁두는 벌떡 일어나 절하면서 “그것이면 족합니다. 다른 재주는 배워서 무엇에 쓰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노인은 이어 “모든 방술(方術)은 반드시 먼저 정신을 집중해야 이룰 수 있는 것이니 하물며 혼백을 다스리고 정신을 비상하여 신선이 되려는 자는 말할 것 있겠느냐? 우선 정신을 통일 하여야 하는데 그것은 잠을 자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너는 우선 잠을 자지 않도록 하여라”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두가 여기 온지 사흘이 되었는데 그동안 스승은 음식을 전혀 먹지 않았고 동자만이 하루 한끼에 검은 콩가루 한 홉을 먹고 있었다. 이런 식사를 하고 있는 동자는 배고픈 기색 또한 없었다. 마음속으로 이 일을 이상히 여기면서 스승의 말씀을 받들어 지성으로 큰 소원을 이루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스승이 가르쳐 주시는대로 조용히 앉아 잠을 자지 않고 있었더니 첫날밤 사경쯤에 벌써 눈이 저절로 감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두는 날이 밝을 때까지 참고 버티었다. 둘째날엔 몽롱하고 피곤하여 인사불성이 되다시피 되었으나 마음을 모질게 가다듬고 꿋꿋하게 참아냈다. 셋째날 밤이 되자 머리가 문설주에 부딪치기도 하고, 몸을 벽에 기대어 보기도 하였으나 눈을 뜨고 앉아 있는 것이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만일 자게 되면 천신만고 끝에 찾아온 스승의 가르침을 받을 수 없게 되고 한낱 풀벌레와 같이 일생을 마칠 수박에 없다고 생각하자 참고 견디어 나갈 수 있었다.
이렇게 네째날, 다섯째날, 여섯째날을 지내고 이레째가 되자 몽롱한 가운데 무슨 보재기를 훌렁 벗는 것 같은 기분이 나더니 정신이 맑아지며 시원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장로는 기뻐하며 말하기를, “너는 인내력이 대단하니 무슨 일을 해내지 못하겠느냐”하였다. 그러고 두가지 경문을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위백양(魏伯陽)의 참동계(參同契)라는 책인데 연단법을 수련하는데 지중한 비결로서, 선가(仙家) 최상의 교본이요, 또 이것은 황제내외옥경경(黃帝內外玉景經)이라는 책이니 이 책은 도기연장(導氣鍊臟)하는 도가의 지중한 묘체(妙諦)이다. 만번을 읽으면 자연히 깨달음이 있을 것이다. 하루에 각각 열번씩만 외우라” 하였다.
또 이르기를 “무릇 신선되기를 배우는 자는 잡념을 버리고 가만히 앉아서 정(精), 기(氣), 신(神)의 삼보(三寶)를 수련하여 감(坎) 이(離) 용(龍) 호(虎)가 서로 섞여서 단(丹)을 이루게 되는 것인데 이것이 연단술(鍊丹術)의 첩경인 것이다. 원래 상지(上智)에 속하는 사람이라도 천래에 영오(穎悟)한 사람이 아니면 좀체로 이루기 어렵다. 너는 순박하고 참을성이 강하여 상승(上乘)의 가르침은 어려우니 먼저 곡식을 먹지 않고 밑에서부터 차차로 올라가는 방법을 써보는 것이 좋겠다. 모든 사람은 오행(五行)의 정기를 타고 났으므로 오장이 각각 오행을 주재한다. 지라(脾臟)는 오행 중에서 토기(土氣)를 받았으므로 사람이 먹는 것은 모두 지라로 돌아가고, 위(胃)는 비록 곡정(穀精)이나 강건하고 무질(無疾)해서 기(氣)를 토(土)에서 끌어내므로 마침내 넋이 땅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옛날에 ?穀곡식을 먹지 않는 도가의 양생법의 하나을 한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했으니 너도 먼저 벽곡을 시험해 보라”고 하였다.
그리고 남궁두로 하여금 하루에 두끼씩을 먹게 하고 七일만에 가서 한끼는 죽을 먹게 하더니, 七일만에 다시 죽 한 그릇을 감하고, 다시 七일만에는 죽으로써 밥을 대신하게 하고, 네번째 七일이 지나자 밥과 죽을 모두 끊게 하였다. 그리고서 열쇠로써 감실의 자물쇠를 열고 칠을 한 찬합 2개를 꺼내니 한 합에는 검은 콩가루, 한 합에는 황정(黃精)가루가 들어 있는데, 한숟갈 떠서 물에 타서 매일 두 번 먹도록 하였다.
두는 원래 양이 커서 이런 식사로는 굶주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몸은 깡마르고 체력은 쇠잔하며 눈은 어지러워 사물을 분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참고 견디며 검은 콩을 삼칠일동안 복용하였더니 갑자기 배가 부른 것 같고 음식 생각이 없어졌다. 그러자 스승은 남궁두에게 잣나무 잎과 깨를 먹게 하였다.
그렇게 수십 일이 경과한 어느날 온몸에 두루 부스럼이 나서 참고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참고 백일동안 계속하여 참깨와 솔잎을 먹으니 부스럼이 낫고 살갗이 고와졌다. 장로는 기뻐하며 하는 말이 “너는 참으로 훌륭한 재목이다. 다만 욕심을 버리고 3년만 머물면서 이 두 경문을 만 번만 읽으면 가슴이 확 트여 마치 신령이 통한 것 같을 것이다”고 하였다.
장로는 두에게 숨을 쉬는 법을 가르치고, 또 기(氣)를 움직이는 법을 가르쳤다. 기가 운용되자 자(子), 오(午), 묘(卯), 유(酉)의 방향으로 육자비결(六字秘訣)의 호흡을 하니 얼굴빛이 점점 윤기가 나고 기운도 더욱 상쾌해지며 온갖 생각이 사라졌다.
이렇게 6년이 지났다. 그러자 장로가 말하기를, “너는 도골(道骨)이 되었으니 이 도법으로 마땅히 신선이 될 것이요, 이대로 하산한다해도 교갱
교는 王子喬를 갱은 방祖를 말한다. 둘다 옛날 신선의 이름.
이 되기에 손실이 없을 것이다. 혹 물욕이 움직이더라도 참아야 한다. 비록 식(食)과 색(色)에 관한 욕심이 아니라도 일체의 망상은 수련에 해가 되니 모름지기 정(靜)에서 공(空)하게하여 수련을 쌍아야 한다” 말을 마친 스승은 둘째 방을 비워 남궁두를 앉히고서 기(氣)의 승강(昇降), 전도(顚倒)하는 법과 구결(口決)을 정성껏 가르쳤다.
남궁두는 그 가르침에 따라 단정히 앉아 움직이지 않고 눈을 감고 수련을 하였다. 스승은 때때로 두의 춥고 따뜻함과 배고픔과 배부름을 보살펴 주었다.
어느날 두가 입을 다물고 수련하고 앉아 있는데, 입천장에서 작은 자두만한 것이 생기더니 단물이 혀 뒤로 쏟아짐을 느꼈다. 이 사실을 스승에게 고했더니 스승은 두로 하여금 그것을 천천히 뱃속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리고는 기뻐하여 “기장 알만한 구슬이 나오고 화기(火氣)가 움직일 징후가 있다”하면서 삼방경(三方鏡)을 벽에 걸고 칠성검(七星劒) 두자루를 좌우에다 세우고 천천히 걸으며 주문을 외워 마귀를 물리치고 도가 이루어지기를 기구했다.
이렇게 거의 6개월을 수련하자 단전(丹田)이 꽉 차 오면서 배꼽 밑에서 금빛이 발산되는 것 같았다. 두는 도가 이루어지려는 징후로 알자 기쁜 나머지 빨리 이루어보려는 욕심이 갑자기 생겼다. 그래서 황아(黃芽도가에서 금단을 만들 때 쓰는 鉛華와 白粉을 말함) 가 차녀(차女도가에서 쓰는 말로 수은)를 제압하지 못하여 흩어진 불길이 위로 올라가 이환(泥丸상단전) 을 태워 두는 소리를 지르며 뛰어 밖으로 나왔다.
이를 본 스승은 지팡이로 머리를 치며 “슬프도다, 성공치 못했으니!”하고서 두를 편안히 앉히고 기를 내리게 하였다. 그리하여 기는 제압되었지만 두는 가슴이 울렁거리고 불안하여 종일 안정을 찾지 못하였다. 스승은 탄식하며 말했다. “세상에 드문 사람을 만나 가르침을 다하지 않은 것이 아니나 전생의 업보가 다하지 않아 결국 실패하였으니 이것은 너의 운명이다. 난들 무슨 힘이 되겠느냐”하고 소차(蘇茶)를 먹이었다. 七일이 되자 겨우 마음이 안정되고 화기도 가라앉았다.
그러자 스승은 “너는 비록 신선은 되지 못하였으나 지상선은 될 것이다. 조금더 눌러앉아 수양하면 팔백 수(壽)는 할 것이다. 너의 운명을 보니 자식이 있는데 정액이 나오는 구멍이 이미 막혀버렸으니 약을 먹어 나오게 하여야겠다”하고서 적동자환(赤桐子丸) 두 알을 꺼내 주며 삼키게 했다.
두는 “제가 용렬하고 어리석어 가르침대로 해내지 못했으니 제 운명이 스스로 기박함이라, 무었을 한탄하겠습니까? 단지 제가 스승님을 모신 지 지금까지 칠년이 되었으나 아직도 스승님의 내력을 모르오니, 상세히 일러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래서 후일에 스승님을 향모하는 정성을 위로하게하여 주심이 어떻겠사옵니까?”하고 청하였다.
노인이 웃으며 말하기를, “다른 사람이 물으면 굳이 대답지 않겠지만 너는 참을성이 있어서 말할 터이니 들어보라. 나는 상락대성(上洛大姓)의 자손인 태사(太師) 행(幸)의 증손이다. 송나라 희녕(熙寧) 2년에 태어났는데 열네살 때에 문둥병에 걸려 부모님은 나를 거두지 않고 숲속에다 내버리셨다. 그런데 밤에 호랑이가 물고가서 석실(石室)속에다 갖다 놓고, 옆에 두 마리 새끼를 젖 먹여 기르는데, 끝내 나를 해칠 뜻이 없었다.
그러나 고통이 극심해져 그 호랑이 이빨에 한시라도 빨리 물려 죽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그때 한 포기 풀이 있어 낭떠러지에 퍼져 자라고 있었는데 , 잎은 넓고 뿌리가 컸었다. 시험삼아 그 풀을 썻어 먹어보니 배가 불렀었다. 몇 달을 먹자 부스럼이 점점 없어지고 차차로 혼자 일어 설 수 있게 되었었다. 드디어 많이 캐내어 끼니마다 먹으니 그 산의 풀을 거의 반이나 먹고 말았다. 이렇게 수백일을 지내니, 부스럼이 모두 떨어져 나가고 온몸에 두루 푸른 털이 자라났었다. 기뻐서 억지로 더 먹으니 또 백일만에 몸이 절로 날아서 순식간에 산꼭대기에 오를 수가 있었다.
병이 이미 낫자 고향에서 오던 길과 사는 곳을 더듬어 고향을 찾아가려 했으나 어디가 어딘지 찾을 수가 없어서 방황하고 있는데 마침 한 중이 산 밑을 지나가고 있었다. 쫓아가 중의 가는 길을 막고 몸을 굽혀 인사하고 묻기를 ”이 산은 무슨 산이라 합니까?“하니 중이 대답하기를 ”이곳은 태백산으로 땅은 진주부(眞珠府강원도 삼척의 옛 이름)에 속해 있소“하였다. 또 근처에 절이 있느냐고 물으니 ”서쪽 봉우리 밑에 절이 있는데 길이 가파라 기어오르기가 쉽지 않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나는 곧 날아 그 암자에 도착해 보니, 참선(參禪)하는 집인데 대낮에도 문이 닫혀 있고, 고요하여 사람이라고는없었다. 손으로 행랑의 문을 열고 걸어서 중간채에 이르니 한 늙고 병든 중이 있어 누더기 옷을 끼고 책상에 기대어 있는데 거의 죽을 지경이었다. 겨우 눈을 떠서 나를 보며 “간밤 꿈에 한 노인이 우리 스승님의 비서(秘書)를 전해 받을 사람이 오늘 올 것이라 하더니 너의 관상을 보매 참으로 그 사람이다”하고서 일어나 주머니를 열고 한 함 속의 책을 꺼내주면서 말했다.
“이 책을 만 번 읽으면 그 뜻이 저절로 나타날 것이다. 노력하여 게을리 하지 말라” 내가, 누구에게서 그 책을 전해 받았는가 묻자 대답하기를, “신라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중원(中原)에 들어가 정양진인(正陽眞人)을 만나 그 책을 전수(傳授)받았는데, 그가 돌아가실 때 내게 부탁하기를, 이백년 후에 그 책을 전할 사람이 나올 것이다 하더니, 네가 그 예언을 맞힌 사람이다. 받아 지니고서 힘써 노력하라. 나는 이제부터 가야 한다”하고 조용히 가부좌하고 서거했다.
나는 곧 다비례(茶毗禮-火薺)로 모시었는데 감색(紺色)의 사리(舍利)가 일백개가 나왔다. 그래서 이 사리를 탑속에 안장(安藏)하였다. 그리고 책함을 열어 책을 내어보니 황제음부경(黃帝陰符經)과 금벽용호경(金碧龍虎經), 참동계(參同契), 황정내외경(黃庭內外經), 최공입약경(崔公入藥經), 태식경(胎息經), 심인경(心印經), 동고경(洞古經), 정관경(定觀經), 대통경(大通經), 청정경(淸淨經) 등 여러 경이 나왔다. 나는 노승이 남겨준 암자에서 수련을 쌓는데 마귀들이 사방에 와서 둘러쌌으나 들은 체도 본 체도 않으니 모두 저절로 없어졌다. 이렇게 십일년의 수련후에 신태법(神胎法)을 이루어 마땅히 풀려 나가게 되었으나 옥황상제께서 나더러 이곳에 남아 동국(東國: 우리나라) 삼도(三道)의 여러 신들을 통괄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여기에 머문지 오백 년이 되었다. 그러나 기한이 찼으니 마땅히 하늘로 올라갈 것이다.
나는 그동안 수십 사람을 겪어 보았는데 혹은 기가 너무 예민하기도 하고 혹은 너무 둔하기도 하고 혹은 인연이 천박(淺薄)하기도 하고, 혹은 인내력이 적기도 하고 혹은 욕심이 많기도 하여 모두 성공할 수가 없었다. 만약 도를 이룰 사람이 있으면 나는 마땅히 그에게 나의 일을 맡기고 옥경(玉京)으로 돌아갈 터인데 긴긴 천년을 두고 한 사람도 얻지 못했으니 이는 나의 전세인연이 다하지 않은 때문이다“하였다.
두는 스승과 함께 여러 해를 같은 잠자리에서 보냈으나 배꼽 밑 한 치 되는 곳은 남에게 보이지 않았다. 두가 그 까닭을 묻고 보여주기를 간청하자 스승은 웃으며 “무엇이 어려울 것이 있겠느냐. 그러다 보면 놀랄까 두려울 뿐이다”하므로 두는 “어찌 놀라겠습니까? 한 번만 보여주시기를 바랍니다”하였다. 스승은 어둠속에서 아랫배의 덮개를 벗기니 금빛이 백여 줄기로 지붕위 대들보까지 내쏘는데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어 침상에 엎드려 버렸다. 그러자 스승은 배를 도로 가렸다.
이튿날 장로는 두를 불러 말했다.
“너는 이미 인연이 천박하여 이곳에 오래 머물기에 합당하지 않으니 하산하여 머리를 기르고, 황정(黃精)을 먹고 북두칠성에 절하며 살생, 간음, 도둑질을 하지 말며 훈채(薰菜파, 마늘처럼 냄새가 나는 채소), 개고기, 쇠고기를 먹지 말고 몰래 남을 해치지 않으면, 이 지상의 신선이 될 것이요. 수행(修行)을 멈추지 않으면 또한 승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황정내외경과 참동계는 도가의 최고 경전이니 외기를 게을리하지 말라. 그리고 도인경(度人經)은 노군(老君:老子)이 도를 전한 책이고, 또 옥추경(玉樞經)은 뇌부(雷府)의 여러 신을 존경하고 있는 것이니 이것을 지니고 있으면 귀(鬼)가 두려워하고 신이 흠모할 것이다.
이밖에 마음을 닦는 요결은 오로지 속이지 않는 것이 최상이니 무릇 사람의 한 생각의 선악(善惡)도 귀신이 좌우에 늘어서 있어 모두 먼저 알고 있다. 옥황상제께서는 매우 가까운 곳에 강림해 계시어 한가지 일을 저지르면 바로 북두성(北斗星)에 기록되어 보응(報應)의 효과가 재빨리 나타난다. 그러나 우매한 사람은 잘못을 저지르고도 어리석어 두려워 할 줄을 모르니, 그들이 어찌 저 푸른 하늘위에 참으로 주재하는 이가 있어 그 심판의 힘을 쥐고 있는 줄을 알겠는가? 너는 참을성이 강인하나 욕심이 없어지지 않아 만약 삼가지 않으면 이상한 취미에 빠져 영겁(永?)의 고초를 받을 것이니 삼가지 않으면 안되느니라“ 하였다.
두가 울면서 스승의 가르침을 받고 곧 작별 인사를 한 후에 하산하다가 산상을 돌아보니 자기가 거처하던 곳의 집과 터가 모두 흔적이 없어졌다. 두는 예전에 살던 임피에 도착하여 보니 옛 집은 터전조차 없고 논밭도 주인이 몇차례나 바뀐 뒤였다.
오갈 데가 없어 가만히 생각해보니 예전에 자기집 노복으로 진실하던 사람이 해남에서 부호로 전답을 많이 가지고 살고 있음이 생각났다. 그래서 그리로 찾아가니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하다가 한참만에야 자기 주인임을 알고서 서로 부둥켜 안고 통곡하고서 빈땅에 거처하게하여 주고, 민가의 여자와 결혼을 시켜주어 아들, 딸을 각기 하나씩 낳았다.
두는 비록 살림을 다시 차렸으나 스승의 교훈을 마음깊이 새기어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고 용담(龍潭) 땅에 숨어 심산유곡을 골라 사니, 치상산을 가까이 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선사(仙師)를 만날 계획으로 수십 년 동안 황정과 솔잎을 따서 먹으니 몸이 더욱 건강해지고, 머리털과 수염이 희어지지 않으며 걸음걸이도 나는 듯이 가벼웠다.
만력 무신년(1608) 가을 홍만종이 공주(公州)의 관직을 그만두고 부안(扶安)에 와 살 때에 남궁두는 고부(古阜)로부터 걸어서 여관으로 찾아와 사경(四經)의 오묘한 뜻을 가르쳐 주고 또한 그가 스승을 만난 전말을 위와 같이 상세히 말하여 주었다. 남궁두는 당시 83세였으나 용모는 마치 40여세 같아 시력이나 청력, 정력이 조금도 쇠퇴하지 않았다. 또 난새(鸞)의 눈동자와 검은 머리털은 소연(소然)하여 마치 마른 학과 같았다.
때로는 몇 달씩 음식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으며 참동계와 황정경을 외우더니, 문득 말하기를 음행(陰行)을 하지 않으면 험함이 없을 것이요, 귀신을 없다고 말하지 말라. 선을 행하고 덕을 쌓으며 욕망을 끊고 욕심을 없애면 신선이 되어 하늘에 오를 수 있다. 난조와 학이 며칠 안으로 맞으러 올 것이다“하였다. 그리고 수십일을 지나더니 의관을 차리고 작별을 한 후 어디론지 가버렸다. 사람들은 그가 용담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무명씨(허균)는 말하기를
“전하는 말에 동방(우리나라) 사람들은 불교를 숭상하고 도교를 숭상하지 않아 신라 때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 동안, 한 사람도 도를 터득하여 신선이 되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으니, 이 이야기로 과연 증명이 되겠다”하였다.
그러나 홍만종이 들은 두의 말은 이상한 데가 있다. 두의 스승이란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인데 의상대사 에게서 도를 전수하였는지, 반드시 적절하다고 할 수 없으며 두의 말도 또한 그렇다고는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신의 조화가 그림자나 소리와 같이 빠른 것임을 생각할 때 두의 나이와 그 용모가 참으로 도에 달통한 이가 아니면 어찌 80고령으로 그같이 건강할 수가 있는가? 이는 또한 실지로 이런 일이 결코 없다고도 할 수 없으니, 아! 이상도 하도다.
우리나라는 해외에 치우쳐 고상하고 원대한 선비인 선문(羨門옛날선인의 이름. 이름은 자고(子高)과 안기생(安期生중국 진나라때 방야 후현사람, 바닷가에서 약을 팔다가 하상문인에게 학문을 배워 장수하여 천세옹이라 불리었다.)같은 이는 없으나 암혈(巖穴)에 이런 이인이 있어, 수천 년만에 남궁두로 하여금 만나게 하였으니, 누가 좁은 땅이라 그런 사람이 없다고 하겠는가?
도를 통달하면 신선이 되고, 도를 깨우치지 못하면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말한 바를 전하는 자와 남의 말을 믿고 맹종하는 자와는 어떻게 다른가? 만약 남궁두가 속히 득도하기를 바라지 않고, 장기간 수련하여 마침내 신선이 되었다면, 저 선문이나 안기생과 어깨를 겨루어 같아지기가 어찌 어려웠겠는가? 오로지 참지를 못하여 다 이룬 공을 실패케 했으니 아아 애석하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서도 말하기를 “남궁두는 함열 사람으로 을묘년(1555)에 진사가 되었다.
젊었을 적에 무슨 일로 인하여 망명했다가 이인을 만나 비결을 전수받고, 산수 사이를 노닐었다. 나이가 90이 되어도 얼굴빛이 쇠하지 않았으므로 지선(地仙)이라고 불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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