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대체 만(慢)이 무엇이길래?
세상의 수많은 말들이
그리고 진리(眞理)에 대한 수많은 글들이
많이 출판되어 나오고는 있으나
사람들이 하염없이 목말라 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스스로가 진실한 본바탕과 조우(遭遇) 해보지 않고
철학적인 논증(論證)과 어쩌다 한 번 힐끗 보는 일별(一瞥)을
삼매(三昧)라 여기며 대단한 축복(祝福)으로 선택(選擇) 되어진 것으로 아는
그 마음이 보리(菩提)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본체(本體)의 그림자이지 절대 진실(眞實)한 것은 아니어서
바로 여러분이 자각하는 지성인 그 보리는
번뇌(煩惱)의 다른 모습이라 그것에 의지하는 순간
여러분은 절대 탈출(脫出)하지 못하게 됩니다.
현대인들은
보리를 지성(知性)이라는 다른 말로 부르며
이 지성의 다섯 종류를
불교에서는 만(慢)이라 불러
바르게 살펴가라 일렀건만
조금이라도 절집에 살고
진실한 불교(佛敎)가 아닌
입에 발린 불교를 접하게 되면
상대가 조금이라 바른 소리하고
자기보다 나은 말과
자신이 깨닫지 못한 진리(眞理)의 언어(言語)를
토해내기라도 하면
다음에 찾아오는 소리는
딱 한 마디입니다.
"아만(我慢)"에 가득 차있다.” 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진실로 보살마하살이고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에 오르신 분인지?
진실함과 함께하는 사람은
어이없고 허무맹랑한 언어로
남을 비방하고
헐뜯는 일을 삼가
결코
하지 않나니
그것이
자신의 살을 베는 행위와 같음을
알기 때문이랍니다.
순수성(純粹性)을 회복(回復)한 수행자(修行者)가
더럽고 추잡해서
악(惡)이라 불리는
하찮은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하늘에 높이 나는
독수리처럼
전체적인 시야를 가지고
놓치지 말고 살펴봐야
부처님 자식이라 불리는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의 머릿속에
각인(刻印) 되어진
고정관념(固定觀念)의 관리자(管理者)인 그 지성이
바로
반야(般若)라 불리는 본바탕의
그림자이기는 하나
그것이
결코 본체는 아니기에
물속의 달일 뿐이지
천공(天空)의 진짜 모습은 아니기에
업(業)의 윤익(潤溺-생사의 고해를 허우적 거림)에 의해서
쉼 없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 쉼 없이 바뀌는
거짓된 것에 믿고 내맡기며
의지하고 살기에
미친 물에 취하여
술 취한 코끼리마냥
법도(法度)를 어지럽히게 되는 것이랍니다.
여러분들이 절집언저리에
머물면서 주워듣게 되는
"아만"이라는 말에
다섯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 자신이 낫다는 것에
자부심과 위안을 느끼며
자신과 동등한 사람을 만나면
다행이다 여겨 무리지어 생활하는 습성이 그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신과 동등한 사람을 만나게 되면
자신이 더 우월하다 여기고
자신보다 우월한 사람을 보면
자신과 동등(同等)하다고 여기는 것이 이렇습니다.
세 번째는
자신보다 나은 사람을 볼 때마다
오히려 자신이 훨씬 났다고 여기는
그 모습입니다.
네 번째는
욕계(欲界)의 무의식(無意識)의 산물(産物)인
집착(執着)이라 불리는
바로 분별심(分別心)인
감정(感情)으로부터
진실(眞實)한 별리(別離)를 이루지도 못해놓고
삼매에 들었다 여기며
색계(色界)의 집단 무의식인
불교에서 진심(瞋心)이라 불리는
삶속에 녹아들어있는
활동성(活動性)과 무기력(無氣力)
긍정성(肯定性)과 부정성(否定性)의
음양(陰陽)의 화합(和合)이라는
근본(根本)도 제대로
갈피를 못 잡아 놓고
법계(法界)에는 전혀 없는
온갖 해괴한 삼매를
읊어대며
무색계(無色界)의 첫 번째인
공(空)의 자리에 이르러야
겨우 성문(聲聞)의 자리에 오른 것이거늘
전혀 구경은 커녕
상상조차 못하고
그저
공을 비어서 공이라 떠들면서
깨달았다고 여기는
이것이
증상만이라 불리는 네 번째입니다.
다섯 번째는
자신보다 월등하게 나은 사람을 보게 되더라도
자신은 조금밖에 뒤처지지 않았다고 여기는
비로 이것이
불교의 언저리에 있는
못난이들이 지니는
비열한 만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다섯 가지의
그림자를 제거하라고
다섯 가지의 수행(修行)법을 말씀하시니
그것이 오종보리(五種菩提)랍니다.
혜능 스님께서도
우리가 자각하는 보리라 불리는 지성(앎이라는 개인성)이
진실한 것이 아니어서
그것에 의하여
차원이동(次元移動)을 하기는 하나
그것에 매달리게 되면
속게 되는 것을
"보리 무근수(菩提無根樹)"라 말씀하시어
거기에 기대지 말라 하였거늘
오늘 날의 각자(覺者)라 불리는
깨달았다하여
내놓은 그 사람들의
모든 책에는
자신이 증득(證得)하고
깨달았다고 여기는
보리(앎)를 진리라 여겨서
거기에 매달려서
봉을 뽑으라고 이릅니다.
서글프고 서러워서 이르노니
산승(山僧)의 말이 거짓이거든
이 몸 살아서
벼락을 맞을 것이고
짐승의 먹이로 뜯길 것입니다.
그 지성과의 별리(別離)에 의한
차원이동의 방법에
다섯 가지의 차제가 있나니
다음과 같습니다.
정말로
이것은 진실한 것이오니
첫 번째가
이 세상에서
제일 희유한 것이오며
삶의 혁명을 가져오는 것이니
바로
발심보리(發心菩提)로써
여러분의 지성을
여러분의 중심에 있는
반야와 함께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국불교의 여러 책에서는
발심이라 하여
마음 내는 것으로 해석하고
이해되어지나
그러한 뜻은 정녕코 아니나니
이것은
깨어남이라는 뜻으로
바로
우리의 중심에 있는
반야와의 조우(遭遇)를 말하는 것이랍니다.
이것이 발심보리(發心菩提)입니다.
씨앗의 핵(核)에서
새로운 생명(生命)이 깨어나게 되었으면
중간에 휴면기(休眠期)를 맛보지 않게 하기 위해
갈등이라고 일컬어지는
에고의 겉 그림자인
감정으로 부터
간섭받는 것을 물리쳐야 하나니
이것이
복심보리(伏審菩提)라 이르는 것입니다.
복심보리에 의해
감정의 자리인
욕계의 에너지와
생명의 자리인
색계의 에너지를
다스리게 되었다면
반야의 집인
바로 우리들의 고향
무색계에 이르게 되니
여기에서
반야와 진정한 합일이 이루어져
서서히
흙탕물이 가라앉게 되고
무위라 일컬어지는
의도하는 삶이 사라지고
모든 일에 긍정성을 회복하게 되어
바로
지선(至善)이라 불리는 무색계
우리안의 본바탕과 하나를 이루게 된답니다.
이것이 명심보리(明心菩提)입니다.
네 번째는
저도 햇병아리이기에
이 길에 처음 들어선 수행자는
앎으로 해서 장애가 생길까 저어하여
말을 삼가고
전체의 대강만 이르겠나니
이것이 장엄염불(莊嚴念佛)에서 이르기를
"원각산정 생일수(圓覺山頂生一樹)"라 일컫는
출도보리(出到菩提)랍니다.
마지막은
바로
무여열반(無餘涅槃)을 증득(證得)하는
무상보리(無上菩提)랍니다.
보리의 정체(正體)를 이와 같이
밝히나니
말법(末法)의 세상에 머무르는
진실한 수행인들이여
살피고 살피어서
여러분들이 배운
아만이 이와 같나니
우리의 마음에서
"앎"이라 불리우는
지성이
바로 보리가 다섯 개의 반야인
문자반야(文字般若)에 의하여
진리(眞理)에 대한 이해(理解)를 북돋우며
관조반야(觀照般若)에 의하여
진리에 대한 통찰력(洞察力)을
방편 반야(方便般若)에 의하여
실천하는 의지(意志)를 함양(涵養)하는 것이며
하나하나 진실한 깨달음을 깨우쳐나가는 순서가
계(戒), 정(定), 혜(慧), 해탈(解脫), 해탈지견(解脫知見)임
명확(明確)하게 견지(堅持)하고
벗어나지 않고 묵묵히 진화(進化)하여 가는 것을
권속반야(眷屬般若)라 이르며
무너지지 않고 변하지 않는
금강유정(金剛喩定)인
십 차원이라 불리는
십지(十地)에 이르러
전체성(全體性)과 합일(合一)을 이루어
모든 거짓된 것이 떨어질 때를
진리와 완전한 합일을 이루어
"나"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기에
실상반야(實相般若)라 하는 것이랍니다.
이와 같이
진리의 물속에 노닐며
그것과
함께 할 때까지는
되도록 말을 삼가고 아끼며
남을 배려하고
겸손(謙遜)하여
부처님의 자식으로
부끄러움 없는 삶을
영위(營爲)하기를
간곡(懇曲)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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