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머리말 |
무릇 불교(佛敎)라 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빼어난 가르침이 라고 이 길에 들어선 자는 누구나 읊조리지마는 사람이 옷을 입으면 헤어지고 더러워지듯이 불교 또한 이 땅에 전래된 이래 수많은 우여 곡절을 겪어 그 명맥은 유지하고 있으나, 누구하나 진실로 법계(法 界)로부터 인가(認可)받은 적 없어 추종하는 무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으나, 진실로 그 길에 들어서는 자는 너무 적기에 한탄하여 이 책을 내는 바이다. 세상만물 누구나 불법(佛法)에 귀의하여 살고는 있으나, 깨달음이 라는 개화(開花)현상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리 저리 왔다 갔다 한다고 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경을 읽거나 염 불을 하거나 절을 하거나 또 다른 수행을 한다고 하여도 그 미묘한 중심의 맛은 진실로 얻기 어려워라. 사람들아! 불교인이라 자칭하지 말고, 우선 삶을 충실하게 살아라! 깨달음이란 물질적인 풍요로움과 영혼의 넉넉함이 흘러넘쳐서 꽃 피는 것이어서, 자신의 속에 내재(內在)되어 있는 재물(財物)에 대 한 궁핍(窮乏)현상인 거지근성(根性)으로 인한 쉼 없는 사념(思念) 에 의한 번뇌(煩惱) 증폭증후군(增幅症候群)이 사라지지 않는 한은 결코 그 맛을 알지 못하리라. 무엇이 첫 번째 인가? 사회적으로 어느 길을 가든 무슨 일을 하든 무슨 직업을 갖든 간 에 그 길의 정점(頂點)에 올라 성공한 자만이 다음에 부처님의 가르 침을 받아들여 바로 깨달음이 이루어지는 것이니, 안에 거지와 소란 덩어리인 상념이 남아있는 자여! 사회에 나가 성공(成功)을 거둔 뒤 에 불문(佛門)에 들어서도 결코 늦지 않으리라! 몸의 가장 미묘하고 섬세한 가운데 부분을 마음이라 일컫고, 마음 의 가장 거친 바깥부분을 몸이라 하거니와 목숨의 형상화된 바깥부 분을 재물이라 일컫고, 재물의 가장 잡을 수도 볼 수도 없는 내 안에 내재된 정점을 목숨이라 해서 목숨이 밖에 있으면 재물이요, 재물이 이 안에 들어와서 삶을 영위하는 것을 생명이라 하나니, 재물의 풍 요로움이 그대를 넉넉함과 만족감을 느끼게 해 주듯이 그것이 영혼 의 풍요로움과 만족감을 느끼게 하면서 끝없는 욕망을 분출시켜 미 지(未知)의 세계로 나가게 하는 원동력인 창조의지를 야기 시키나니, 바로 이 힘만이 깨달음의 자양분(滋養分)인 것이다. 산승(山僧)은 사찰과 암자 수많은 재가불자를 수십 년 넘게 보아왔으나 삶의 여유로움과 넉넉함을 지닌 자는 보지 못하였고, 위선과 교만으 로 가득 찬 위군자와 거지들만 보아 왔기에 이를 글로써 경책하는 바 바른 길을 가라 이르는 것이다. 바른길로 가는 첫 걸음은 효(孝)이고, 그 두 번째는 나라를 사랑하 는 마음인 충(忠)인 것이다. 충효라 해서 충을 앞에다 놓는 것은 나 라가 먼저이고 가족이 두 번째가 아니라, 나라가 크고 부모는 작은 것이기에 순서가 뒤바뀐 것뿐이다. 충과 효에 의해서 두려움이 사라지게 되고 에너지가 중심(中心)을 향해 줄달음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을 의인(義人)이라 일컬 어서 가슴에 공포(恐怖)와 한(恨), 원망(怨望)등이 사라짐으로 구름 이 걷혀 수행(修行)이라는 것을 특별히 하지 않아도 그 사람은 중심 에 다다라 있는 것이다. 이 사람의 의식(意識)이 깨어나는 순간에 단박에 반물질(反物質)의 세계인 무색계(無色界)에 이르러, 스스로 보고 닦으며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고 홀로 갈 길을 가게 되는 것이 다. 이것이 인(仁)의 경계(境界)여서 옛 말에 인자무적(仁者無敵)이 라 일컬었던 것이다. 충효의 기본(基本)도 알지 못하면서 불문에 들어와 입을 나불거리 는 것을 부처님께서도 앵무새라 나무랐거니와, 흉내 내는 삶을 살지 말고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살아 그 모습이 본보기가 되어 중생(衆生) 이 따르도록 하는 것을 진실한 불교라 일컫는 것이다. 상념이 사라지는 것은 만족(滿足)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기에 그대 가 삶의 풍요로움을 진실로 구가할 때 밖으로 치달리는 원심력(遠心 力)인 거지근성(또한 하느님의 종)이 사라져서 안으로 구심점을 향 하게 되는 것을 무념(無念)이라 일컬으며 이 무념이 되기 시작하면 그 생각을 만들어 내는 창조자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 창조자들을 하나 둘 물리치면서 무상(無想)을 이루게 되니, 그리 하여야만 에고 가 광란의 춤을 멈추고 본래의 성품인 중심에 다다르게 되나니, 이 를 어리석은 자들은 무심(無心)이라 일컬으나, 그것은 무심이 아니 고 부동심(不動心)에 다다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반야로 된 자성청 정심(自性淸淨心)이니, 모든 세상만물의 근본이 되겠다. 여기에 다다라서야 일곱 개의 탑을 하나 둘 닦을 수 있고 이것이 진실한 수행의 실체(實體)이고 이것만이 진실한 불법의 요체(要諦) 이다. 꿀 병의 겉을 핥고서 달다고 말하는 자를 미치광이 내지 어리석은 자라 하거니와 진실로 통로를 열어 우리의 내면에 있는 탑을 하나, 둘 닦아 나아가려는 자는 이 세상에 맹구우목(盲龜遇木)만큼이나 드 물구나. 그러기에 노자(老子)는 “깨달은 이는 거기에 취해 고요히 머물러 있고, 깨닫지 못한 철학 하는 앵무새만이 이것이 맞다 저것이 옳다고 떠들어 댄다(言者不知 知者不言).”고 힐난(詰難) 했던 것이다. 세상에 수많은 참선(參禪)의 방법이 있다고는 하나(이것을 方便이 라 부르니 다른 이름이 딴뜨라이다.) 마지막은 짐승이 되었든 선인 (仙人)이 되었든 누구나 정선(頂禪)을 닦지 못하면 그 길에 들어서지 못하는 것이어서 이 정선(頂禪)의 이야기를 오직 능엄경에서 드러내 었으나, 이 세상에 정선(頂禪)이 무엇인지 진실로 아는 이를 단 하나 도 알지 못하여서 이를 설워 하노라. 능엄경을 위경(僞經)이라 하는 자와 또 불교의 요체와 그 문에 들 어서지 못하고 갈팡질팡 하는 이들을 위해 능엄경에서 하지 못한 말 들을 이 글을 통해 피력해 보는 바이다. 산승(山僧)은 이 책이 만 명이 읽어서 이해하지 못한대도 어쩔 수 없거 니와, 죽기 전에 단 한 사람 탈출하고 싶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소원 이기에 여기 글로써 남겨놓는 것이다.
걸어 다니는 절(나란타-至人寺) 전윤 慙愧 泣訴 E-mail: santisuraman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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