丹 经
옥추보경 (玉樞寶經) 번역문 4
브로그 대안에서
천존께서 말씀하시되
도(道)는 정성(精誠)으로서 들어가며 묵묵(默言)으로서 지키며 온유(溫柔)로서 사용(事用)한다. 정성(精誠)스러움으로 말미암아 어리석은 것 같으며 묵묵(默默)함을 말미암아 말을 더듬는 듯하며, 온유(溫柔)함을 말미암아 쓸모가 없는 듯하니, 이와 같은 즉 가히 도(道)와 더불어 형상(形象)을 잊고 가히 더불어 나(我)를 잊고 가히 더불어 잊음도 잊나니 도(道)에 들어가고자 하는 자(者)는 정미(精微)함을 알고 능(能)히 정미(精微)함을 알면 지혜(智慧)의 빛이 나(生)오며 능히 삼갈 줄 알면 성현(聖賢)의 지혜(智慧)가 온전하며, 능(能)히 그칠 줄을 알면 태평(泰平)하고 다스려져 안정(安定)이 되며 태평(泰平)하고, 다스려져 안정(安定)되면 성현의 지혜(智慧)가 온전하여지고 성현(聖賢)의 지혜(智慧)가 온전하면 지혜(智慧)의 빛이 나오며 지혜(智慧)의 빛이 나오면 도(道)와 더불어 하나가 되나니 이를 이름하여 진실(眞實)로 잊음이라고 한다.
오직 그 진망(陣忘)이지만 잊은 것이 아니요, 잊은 것이라고 하나 가(可)히 잊음도 없으며, 가히 잊음이 없는 것 곧 이것이 지극한 도(道)이며 도(道)는 천지(天地)에 있는데 천지(天地)도 알지 못한다. 유정(有情)과 무정(無情)이 오직 하나일 뿐 둘이 아니니라.
주에 말씀하시기를
도(道)라함은 삼계(三界)를 소유(所遊)할 수 있는 길이다. 그러나 들어가면 머무름이 있고 지킴에는 반드시 방법이 있으며 사용(事用)함에는 진실로 이치(理致)가 있나니 대게 도(道)라 하면 천지(天地)에서 함이 없음을 일컬음이며 곧 사람의 올바르고 참된 윤상(倫常)이다. 성자(聖者)는 단정(端正)하고 삼가 옮겨 다니지 않고 망령됨이 없는 이치이니 그러므로 오직 망령됨이 없는 정성이니 진상(眞常)의 도(道)에 들어간다. 그러나 진상(眞常)의 도(道)를 깨달음은 스스로 얻느니라. 그러므로 묵묵(默默)히 마음의 융화(融化)를 알게 된 이후(以後)에 능히 지킬 수 있고 화목하고 조용하며 핍박을 받지 않는 이후(以後)에 능히 사용(事用)한다.
대개 도(道)에 들어가서 능히 지키지 못하면 들어갔다고 말할 수 없고 지킴에 능히 사용(事用)하지 못하면 지킬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진실(眞實)로 도(道)를 사용(事用)하는 자(者)는 어리석은 것 같으나 묵묵히 화목하고 온화(溫和)하여 강(剛)하거나 폭(暴)지 않으니 이는 또한 솜씨가 서투르고 재주가 없으며 어리석은 듯하니, 어찌 불가사의하지 않느냐. 그러나 그 어리석고 말을 더듬으며 옹졸한 것처럼 하지만 그와 같다고 하여 또한 어찌 참으로 어리석고 말을 더듬으며 옹졸한 것이겠는가?
사람이 능히 도(道)에 들어가 지키고 사용할 줄 아는...... 이와 같은 것이 곧 가히 더불어 사물(事物)을 잊지 않더라도 또한 가히 나를 잊나니 사물(事物)과 나를 함께 잊음에 이르고 또한 잊음도 잊어야 가히 잊었다 하리라. 이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형상(形像)과 나를 잊어 마음이 동요(動搖)되지 않고 담연(湛然)히 항상 고요하며 피차(彼此)의 사이가 없는 것이다.
지자(知者)는 아는 것이 밝고 보는 것이 올바르고 참됨을 말함이다. 도(道)에 들어가 그칠 줄을 알고 도(道)를 지킴에 삼갈줄 알면 참으로 도(道)에 따라 떠나지 않고 도(道)를 사용(事用)함에 정미(精微)함을 알면 능히 도리어 뜻이 깊고 커서 의혹되지 않으리라.
이는 그 도체(道體)의 본원(本原)이 이에 있으니 일심(一心)에서 신묘(神妙)한 작용(作用)이 말미암아 나(生)는 지라. 그래서 말하기를 통(通)하지 않음이 없고 알지 못하는 바가 없다 하였으니 이에 본래(本來)의 성품(性品)에 갖추었으며, 이에 이르러서는 나를 온전하게 회복(回復)함이며, 자기(自己)에 근원(根源)하며, 또한 모든 것이 근본이다.
모든 것에 그칠 줄 알고 그칠 줄을 안후에 안정(安定)이 있고 안정이 있은 후(後)에 안정(安靜)하나니 안정(安靜)이 날로 오래하며 총명(聰明)함이 날로 온전하면 하늘의 빛이 안으로 마음을 비추어 온전하리니 이렇게 되면 도(道)와 함께 하며 도(道)는 진(眞)과 함께되어 문득 누가 도(道)가 되고 누가 나(我)가 되는지 알 수 없으며, 다만 그 도(道)가 곧 나이며 내가 곧 도(道)임을 깨달아 피차(彼此)가 서로 잊고 잊음도 없이 가히 잊은 가운데의 모습을 이를 지극한 도(道)라 한다.
지도(至道-지극한 도)는 천지(天地)의 사이에 있나니 도리어 그 도(道)의 있는 곳을 알지 못하는구나. 도(道)를 알고자 하면 무릇 유정(有情)의 사물(事物)과 나와 움직이는 벌레까지 무정(無情)의 산(山)과 흐르는 물, 풀, 나무가 어찌 지극히 순결하여 잡(雜)되지 않은 밖에서 벗어나 있으리오.
그것은 오직 하나로 껴안았고 천하(天下)에 꾸며진 모든 것이 된다.
이를 알면 뭇사람이 참됨을 닦아 도(道)를 연마(練磨)할 것이며 오직 하나를 지켜 번잡하지 않으리니 덕(德)에 나아가 삿된 마군을 없애 솟아오르는 해(日)가 있을 뿐이다.
뜻에 말씀하시기를
이 장(章)은 이에 옥청진왕(玉淸眞王)께서 도(道)에 들고 도(道)를 지키며 도(道)의 단서(端緖-일의 실마리)를 체(體)로 삼았다. 옥추(玉樞)의 큰 가르침의 뜻을 받들어 선비들은 이를 새삼 자세하게 밝히고 궁구하면 스스로 얻는바가 있으리니 옥청진왕(玉淸眞王)의 말씀이 헛된 말씀이 아니니라.
해석하여 말씀하시기를
대도(大道)는 말이 없으며 말이 있으면 도(道)가 아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의 천존께서 말씀하신 앞의 글을 보면 지극한 도(道)는 뜻이 깊고 절묘하여 가히 얻어듣기가 어렵다고 하셨다. 이 뜻을 말한다면 후인(後人)들은 모두 천존의 교화(敎化)를 입지 못하였으니...... 그 도(道)는 일어남이 있고 그침이 있고 보임이 없고 들음도 없나니. 일어나고 그치고 듣고 보는 것이 다 마음을 말미암아 만들어지느니라. 옛적에 우리의 천존께서 아홉가지 기운(九氣)에서 나오며 아홉가지 기운(九氣)에서 이루어지느니 무엇을 본 것이 있으며 무엇을 들은 것이 있었겠는가?
이 장(章)은 천존께서 도(道)를 배우고 진(眞)을 닦는 방법과 공력(功力)을 사용(事用)하고 지키고 이루는 길을 가르쳐준 것이니 반드시 자기(自己)가 정성(精誠)스럽고 진실하여 천지(天地)의 참됨(誠)과 합(合)할 수 있나니, 대개 참된 성(誠)은 하나일 뿐이니 천도(天道)의 하나가 둘이 되었고 둘에서 셋이 나오고 셋에서 만물(萬物)이 나왔나니 진실로 하나로부터 오지 않음이 없느니라.
사람이 능히 진실하고 정성스러움을 사용하면 도(道)에 들고 묵묵(默默)함을 사용하면 지켜지며, 사용(事用)함에 부드러움을 사용한 후에 정성스러움을 얻으며, 어리석은 것 같아야 묵묵(默默)함을 얻으며, 눌변(訥辯)같아야 부드러움을 얻나니. 옹졸하고, 참되고, 묵묵하고, 부드러운 것 같음이 체(體)가 되고 용(用)이 되며, 어리석고 말을 더듬으며 옹졸함 같아야 도(道)가 되고 신묘(神妙)함이 되어야 이에 바야흐로 도(道)와 더불어 혼연(混然)하여 모습을 잊고 나를 잊으며 잊음도 잊어 이에 도(道)의 실(實)이며 참됨의 묘함이라 도(道)에 들어감에 반드시 그칠 줄 아는 것을 원하며 도(道)를 지킴에는 반드시 삼갈 줄 아는 것을 원하며 도(道)를 사용함에 반드시 정미(精微)함을 아는 것을 원하나니 정미(精微)함을 알면 구기(九氣)의 빛이 나타나고 능히 삼갈 줄 알면 모든 정기(正氣)가 성(聖)스러워 온전하리라.
능히 그칠 줄 알면 삼원(三元)의 정신(精神)이 편안해지며 정신(精神)이 편안하면 지혜(智慧)가 반드시 갖추어지고 지혜를 갖추면 신령(神靈)스러운 빛이 나오며 신령스러운 빛이 나오면 본원(本元)의 기(氣)와 합(合)하리라. 그러므로 이름 하기를 진망(眞亡)이니 오직 그 잊음이, 잊음이 아니며 잊어도 가히 잊은 것이 없나니 곧 이것이 올바른 하나의 크나큰 도(道)니라.
찬에 말씀하시기를
하나를 지킴이여. 하나를 지킴이여. 마땅히 도(道)를 사용(事用)함에 삼가고 묵묵(默默)하면 나(我)도 없고 남(他)도 없다. 한 도둑이 있는데 만약에 도리어 붙잡아 머물게 한다면 담연(湛然)히 푸르름을 의심하는 도다.
천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제 세상에 무엇으로 이생(利生)과 모든 하늘과 사람들을 위할까...? 이제 묘한 보배를 널리 펴리니 깨달음을 얻는 자는 신선의 보위(寶位)에 오르리라.
도(道)를 배우는 선비는 기(氣)와 수(數)가 있음을 믿을지니라. 대저 기후(氣候)와 토지(土地)가 같지 않으면 타고난 성품(性品)도 다르나니. 그러므로 우주만물을 형성하는 시원(氣)이라고 하며, 지혜(智慧)와 우질(愚疾)이 같지 않으니 현인(淸性)과 우인(濁人)이 다르나니 그러므로 헤아린다(數)라고 하나니. 수(數)는 명(命)에서 다스리고 기(氣)는 하늘에서 다스림이니 기(氣)와 수(數)가 얽매인 바는 천명(天命)이 막기 때문이니라.
크나큰 도(道)를 얻으면 어리석은 듯하나 지혜롭고 흐린 듯하나 맑아서 오직 명(命)을 따르게 되느니라. 어리석음에 더욱 어둡고 흐림에 더욱 어두움도 또한 기후와 토지의 타고난 성품의 옮김이니라......
천지(天地)의 그 기틀은 신비스러워 사람으로서는 알지 못하나니 이를 자연(自然)이라고 하며, 그 알지 못한 것을 안다고 하면 자연이라고 할 수 있느니라.
자연(自然)의 미묘함이 비록 아는 것이 미묘할지라도 자연은 미묘한 그 자체를 알지 못하나니, 자연의 도(道)는 처음부터 어리석음과 흐림이 있는 것이 아니니라.
모든 하늘은 듣고서 천인(天人)과 사람과 천룡(天龍)과 귀신(鬼神)이 모두 기뻐하였느니라.
주에 말씀하시기를
무릇 사람이 태어나는 곳이 만일 흙이 살찌고 물이 깊어 땅의 기운(氣運)이 차가우면 만물(萬物)이 늦게 이루어지나니 조화(造花)의 공(功)이 두터워서 수명(壽命)이 길다. 만일 흙이 엷고 물이 얕으면 땅의 기운이 열(熱)이 많아 만물(萬物)이 빨리 이루어지나니. 조화(造花)의 공(功)이 엷어 요절(夭折)함이라 일찍 죽느니라.
이는 기후와 토지(土地)가 같지 않아 타고난 성품(性品)이 다르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이 태(胎)의 기운(氣運)이 맑은 것을 받으면 사람됨이 자비(慈悲)스럽고 착하며 용모가 단정(端正)하고 충성(忠誠)하고 효도(孝道)하며 지혜(智慧)있고 총명(聰明)하며 선(仙)을 즐기고 도(道)를 연모(戀慕)하는 사람이 되며, 탁(濁)한 기운을 받으면 사람됨이 흉악(凶惡)하고 삿되고 망령되며 표독스럽고 독(毒)하며 어리석고 패역(悖逆)하며 무도(無道)하고 어질지 못하며 의(義)롭지 못한 사람이 되나니. 지혜(智慧)롭고, 어리석음이 같지 않으며 맑고 탁함이 다르니라.
기(氣)와 수(數)의 얽매인 바는 꽃과 나무의 널리 폄이 또한 각각 때가 있는 것과 같나니 모두 천지(天地)의 기운(氣運)을 받음도 하늘(命)에 매인바라 이에 하늘에서 영(令)을 폄이 사물(事物)의 중요(重要)한 것이라. 착하지 않은 사람은 길이 악취(惡趣)에 빠져 참다운 도(道)를 얻지 못하느니라.
어리석은 이는 지혜의 문(門)으로 교화(敎化)하고 흐린 이는 청정(淸淨)의 문(門)으로 교화(敎化)하나니라. 어리석은 이는 항상 스스로 어둡고 어리석으며 흐린 이는 스스로 어둡고, 이는 자연(自然)의 이치니라. 풍토(風土)의 타고난 성품이 고르게 나누어 정(定)해졌느니라. 대개 천지(天地)의 만물(萬物)을 살리고 죽임도 또한 사시(四時) 사철의 기후(氣候)에 따름이다.
만일 뜻을 가진 선비가 오행(五行)의 기운(氣運)을 얻고 음(陰)과 양(陽)의 근본(根本)을 닦아 연마(硏磨)하면 진실로 그 몸과 명(命)이 보전(保全)되어 문득 천지(天地)와 더불어 오래하며 일월(日月)과 함께 같이 밝으니라 어리석은 사람은 다만 소리(聲)와 색(色)의 맛을 알아서 도리어 그것이 명(命)에 해(害)가 됨을 알지 못하나니 이제 도(道)를 배우는 사람은 마땅히 묵묵(默默)히 생각할지어다.
뜻에 말씀 하시기를
천지(天地)의 만물(萬物)이 생겨남이 모두 이기(二氣)의 형상 이룸을 얻음에서 나니라. 맑은 기운이 많으면 어질고 맑으며 흐린 기운이 많아 무거우면 간사(姦詐)스럽고 악독(惡毒)하니 어찌 기후와 토질의 같지 않음이 아니겠는가. 타고난 성품(性品)이 스스로 다르니라.
해석하며 말씀하시기를
기후(氣候)와 토지(土地)가 같지 않나니 실로 기(氣)와 수(數)에 매인 바니라. 그러므로 우리의 천존(天尊)께서 이 일장(一章)을 들어 대도(大道)를 열었나니 우리들이 어찌하리오. 대개 세상 사람들이 조양(調養)함을 잃어 뜻을 폄에 거리낌 없이 하여 삶을 가벼이 하니 누구라도 가볍고 맑은 기운은 하늘이 되고 흐리고 무거운 기운이 땅이 됨을 알지 못하느니라.
무릇 사람 몸이 되는 것이 하늘의 기(天氣)를 얻어 정기(精氣)를 이루고 피,땀, 침, 눈물 등의 정액(精液)을 이루며 땅의 기(地氣)를 얻어 뼈를 이루고 근육(筋肉)을 이루나니. 이렇게 이기(二氣)를 받아 나니라. 어떤 까닭인가 닦음이 있으면 어질고 어리석음의 나눔을 알게 되니 어찌 기후와 토지의 두텁고 엷음과 음(陰)과 양(陽)의 치우치고 막힘이 아니리요.
하늘의 명(命)은 가둠과 같고 기(氣)의 수(數)는 얽매임과 같나니. 말씀하시기를 사람과 사람마다 천명(天命)을 피(避)하거나 기수(氣數)를 뛰어넘지 못하니. 오직 우리의 도(道)를 배우는 선비들은 이 경(經)을 존경하고 숭배하면 천명(天命)이 나오고 기수(氣數)의 밖을 벗어나느니라.
우리 천존께서 말을 마치심에 양반(兩班)과 경사(卿師) 그리고 모든 하늘의 천제(天帝)와 임군들과 뇌사호옹(雷師晧翁)께서 일어나 춤추며 찬탄(讚嘆)하시고 천룡(天龍)과 귀신(鬼神)들도 손으로 춤추고 발을 구름을 그칠 줄을 모르고 기뻐하였다.
찬하여 말씀하시기를
풍토(風土)의 마땅함은 기(氣)와 혈(血)의 말미암음이니 물마다 모두 근원(根源)이 있으며 삶은 모두 오랜 시간이 있나니, 가볍고 맑음은 현묘(玄妙)함에 돌아가고 무겁고 흐림은 마무리되지 못하나니 도(道)는 본래(本來) 둘이 없으니 이 마음이 달과 같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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