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학/단학

봉우 권태훈 鳳宇 權泰勳 선생님

검은바람현풍 2025. 1. 11. 09:33

丹學人  

봉우 권태훈 鳳宇 權泰勳 선생님의 생애와 사상

                                                                                                         鄭 在 乘

 

 

봉우 권태훈(1900-1994) 선생은 국조(國祖) 한배검의 정신적 뿌리에서 비롯한 민족선가(仙家) 즉 상고현풍(上古玄風)20세기 마지막 종장(宗匠)이었다.

선생은 1900년 서울 재동(齋洞)에서 출생, 6세때 어머니로부터 정신수련의 근간(根幹)인 조식법(調息法)을 배웠다. 8세에 이미 사서삼경(四書三經)과 수 백권의 경서(經書)들을 독파하였으며 10세때 민족종교인 대종교(大倧敎 : 당시 단군교)의 창시자인 나철(羅喆) 대종사를 만나 가르침을 받고 입교(入敎)했다. 19세에는 당시 민족선가의 거인(巨人)이며 우도방주(右道坊主)였던 김일송(金一松)선생을 따라 황해도 구월산에 입산하여 상고(上古)시대 이래 내려온 민족고유의 정신수련법을 연마했으며, 그 오지(奧旨)를 심법으로 전해 받았다.

이후 국내의 온 산하대지(山河大地)를 주유(周遊)하고 밖으로 중국, 일본, 만주, 몽골, 시베리아 등지를 편력하면서 수많은 정신계의 도인(道人), 이사(異士)들과 정치인, 학자, 민족운동가 들을 접하며 자신의 학문을 절차탁마 하였다.

20대 초기에는 만주에서 열렬한 무장독립군으로서 항일투쟁의 선봉에 서기도 했는데, 이때 애국지사 동천(東川) 신팔균(申八均)선생과 혈맹(血盟)의 의()를 맺었다. 30대와 40대 초반 해방 전까지는 계룡산 아래 신소(莘沼) 우거(寓居)에서 머물며 산중수련(山中修鍊)을 계속하였다.

일제 관헌(官憲)의 불령선인(不逞鮮人) 요시찰(要視察) 리스트에 올라 수 십차 예비검속으로 투옥당하는 상황에서도 틈틈이 북경, 상해, 일본등지를 왕래하며 해외 민족운동가 들과의 연계를 유지하였다. 해방 후에는 김구(金九)선생 영도하(領導下)에 상해 임정(臨政) 세력이 주축이 되어 만든 한국독립당에 투신하여 중앙집행위원과 계룡산 특별당부 위원장을 지냈다.

또한 단군기원동지회(檀君紀元同志會)를 만들어 각계각층의 인물들을 동지로 규합하는 등 해방정국에서 적극적으로 사회현실에 참여하여 비좌비우(非左非右)의 민족국가 재건에 헌신하였으나, 김구선생 암살과 연이어 발발한 625전쟁으로 좌절하고 만다.

 

50세이후 약 30년간 은둔의 세월을 보내다가 1982년 민족종교 대종교 제12대 총전교(總典敎)에 취임하고 2년 후 소설()을 통해 선인(仙人)으로서의 면모를 세상에 드러내기 시작했다.

소설()은 발간되자마자 수 십만권이 팔리는 폭발적인 독자들의 호응 속에 80년대 초반 "() 열풍"이라는 독특한 사회문화 현상을 몰고 왔다. 이로 인해 그간 고도성장 개발론의 대세에 억눌려왔던 민족정신문화 전반에 대한 새로운 조명과 관심이 극도로 증폭되었고, 특히 단절되었던 민족전통 선도(仙道)의 맥을 중흥시키는 심대한 동인(動因)으로 작용하였다. 1986년 서울에 한국단학회 연정원(硏精院)을 개설함으로써 그가 해방 후 1948년 계룡산에서 정신수련을 통한 민족정신의 함양과 자아(自我)의 각성을 위해 동지들을 규합, 수행했던 '용산 연정원'의 이념을 계승하였다.

 

선생은 민족선도의 부흥과 단군정신의 중광(重光)을 다 같은 것으로 여겼으며, 자신이 맡고 있던 大倧敎도 단순한 종교 신앙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 민족정신의 뿌리로서, 정체성의 근간으로서 종교를 초월하는 전 국민적 공감대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한 전국 유교인(儒敎人)들의 단체인 사단법인 유도회(儒道會)이사장에 취임하여 공자사상의 진작(振作)에도 많은 관심과 후원을 아끼지 않았는바 이는 우리네 고유 현풍(玄風)내지 현묘지도(玄妙之道)의 유불선(儒彿仙) 삼교포함(三敎包含) 정신이 봉우선생에서도 계승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봉우선생의 사상과 사회적 활동이 우리 현대사에 끼친 영향을 평가해본다면 무엇보다도 1980년대 이후 오랫동안 억압되고 왜곡 당했던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었고 서양에 대한 민족적 열등감을 상당부분 해소시켜 주었으며 나아가 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불러 일으켜 주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황백전환론(黃白轉換論)백산대운론(白山大運論)등을 통해 한민족의 정체성을 민족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는 물론 인류문명 차원의 전환이라는 거시적 입장에서 생각하게 한 점은 우리 인식의 폭과 범주를 몇 차원 넓힌 매우 의미 있는 일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선생은 한민족 정신사의 근간을 밝혀줄 귀중한 자료와 정보들을 후학들에게 대중강연과 대담, 저술 등의 형태로 전해주었는데, 정신세계사에서 출간된 백두산족에게 (1989), 천부경의 비밀과 백두산족 문화(1989),민족비전 정신수련법(1992), 봉우일기(1998)등이 그것들로서 여기서 그가 제시한 한민족의 뿌리와 정신세계의 광활하고도 심오한 자료들은 현세 학자들의 정밀한 연구를 기다리고 있다. 아직은 심도 깊은 연구결과들이 나오지 않고 있는 형편이다.

 

선생은 91세 되던 1990년 백두산을 등정(登頂), 천지(天池)에서 전래되어온 민족 고유의 양식으로 천제(天祭)를 봉행(奉行)하는 등 노익장(老益壯)으로 여생을 보내다가 1994516일 향년 95세를 일기로 계룡산 자택에서 환원(還元) 하시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