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학/단학

丹學人 龜峰 宋翼弼 선생님

검은바람현풍 2025. 1. 11. 09:25

丹學人  

구봉 송익필 龜峰 宋翼弼  선생님

 

구봉 선생님의 명은 익필(翼弼), 자는 운장(雲長), 호는 구봉(龜峯) 또는 현승(玄繩), 본관은 여산(礪山), 사련(祀連)의 아들로 중종 29(1534)에 현 파주시 교하면 산남리 심악산하 궁동에서 생장하였으며 선생을 잉태 후 심악산에 나무들이 고갈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동생 운곡 송한필(雲谷宋翰弼)도 문학에 이름이 높아 대학자 율곡 이이(栗谷 李珥)가 말하기를 성리학을 알 만한 사람은 오직 익필과 한필 형제뿐이라 말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당시 서출(庶出)로서 벼슬을 하지 못하였으나 이이(李珥), 성혼(成渾)등과 사우교제하면서 성리학에 통달하였고 예학 (禮學)과 문장에 뛰어나 이산해, 최경창, 백광홍, 최입, 이순인, 윤탁연, 하응임 (李山海, 崔慶昌, 白光弘, 崔笠, 李純仁, 尹卓然, 河應臨)등과 함께 8文章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으며 시와 글씨에도 능하였다 한다. 당시 현 고양시 송포동 구봉산 기슭에서 후진을 양성, 문하생으로 김장생, 김집, 정엽, 서성, 정홍명, 김반 등, 많은 학자가 배출되었으며 이중에서 특히 金長生이 그의 예학을 이어받아 대가가 되었다.

1599(선조 32) 임진왜란이 끝난 2년 후 구봉집(후에 제자들이 선생의 글을 모아 놓은 것) 을 남기고 66 세로 죽게 되니 선조대왕께서는 지평으로 추증하는 한편 문경공(文敬公)으로 시호를 내리시었다.

선생님은 천자(天姿)가 투철하고 눈동자가 겹쳐 찬란한 빛이 있어 뭇 사람의 존경을 받아 오던 중 율곡 선생이 이조판서로 있을 때 사람됨과 능력이 특출하여 장차 나라의 큰 동량이 됨 을 알고 선조대왕에게 선생님의 행적을 아뢰니 즉시 입궐케 하라 하시여 율곡은 밤중에 구봉을 불러들였으나 압인지기(壓人之氣)에 임금은 놀라 넋을 잃고 다시는 보려 하지 않았다.

 

그 후 선생님은 학문을 닦고 후진 양성을 낙으로 삼으며 시를 지었다. “한 구절 중에서

진영조무성(盡永鳥無聲)   날이 저무니 새소리가 없고

우여산갱청(雨餘山更靑)   비온 뒤 산은 더욱 푸르도다

사희지도태(事稀知道泰)   사소한 일에도 도의 크기를 알고

거정각심명(居靜覺心明)   고요한 삶은 마음 밝음을 깨닫도다

일오천화정(日午千花正)   해 솟은 대낮에도 많은 꽃이 피고

지청만상형(池晴萬象形)   맑은 연못에는 만상이 나타나는구나

종래언어잔(從來言語淺)   끝내 말이 없으니

묵식차간정(黙識此間情)   잠잠한 사이에 정을 알게 되었네

 

선생님의 이기설은 율곡선생과 일치하며 未動이요 己動인고로 미동과 기동은 모두 이니 을 종합한 것이다. 이것을 물에 비유한다면 심은 물과 같고 성은 물의 고요함과 같으며 정은 물의 파동과 같다 하시었다. , , 성의 상호관계를 요령 있게 비유한 고견이다.

 

 

충무공과 거북선

 

일찍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거북선 연구에 몰두하고 있을 때의 이야기다.

충무공께서 율곡 선생의 소개로 구봉 선생님을 찾아갔다. 마침 구봉선생님은 외출 중이었기에 하인의 안내로 사랑방에서 선생님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런데 방 아랫목에 훌륭한 병풍이 한 폭 쳐져 있는데 그림에는 한 마리의 큰 학이 있었다. 그림속의 학이 앉아있는 모습이 평소에 상상하던 거북선의 모습과 흡사한지라 그만 자신도 모르게 병풍인 것도 잊고 몇 개의 구멍을 뚫고 말았다.

그런 뒤 이내 구봉선생님이 귀가하였다.

하인들에게 손님은 오셨느냐하시니 하인이 큰 일 났습니다 그 아끼시던 병풍에 구멍을 내셨습니다.” 한다.

그런데 구봉선생님께서는 뜻밖에 쓸 곳에 쓰인 것이다. 걱정할 것 없다하시고 사랑문을 열며 충무공과는 수인사도 없이 어디 몇 구멍이나 뚫었는가 보자하신다.

처음 대하는 이충무공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사과 겸 인사를 드리니 그제 서야 정색을 하고 바로 앉아 하는 말이 이 네 구멍만 갖고는 전후좌우로 밖에 더 가겠소? 잠수를 하고 부상을 하자면 적어도 다섯 구멍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 나머지 하나는 내가 뚫어줄 수밖에 없겠군라고 하셨다 한다.

충무공이 당나라 장군 이적이라면 구멍은 몇 개나 뚫겠느냐고 물으니 8개는 낼 것이라 하시고, 또 제갈공명 같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으니 24구멍은 내겠지 하셨으며 다시 그러면 원래는 몇이나 됩니까하고 정중히 물으니 웃으며 조용하게 하시는 말씀이 “48구멍이 전부 일세라 하셨다.

이것으로도 구봉선생님의 계제는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충무공은 당나라의 이적 장군과 아득히 미치지 못 할 분이라면 도대체 이 어른은 어떠한 분일까? 하기는 율곡선생(충무공과 친척 관계)의 소개에도 가이 짐작하기 어려운 분이라 하셨지 않은가? 이제야 진정 훌륭한 스승을 뵙게 되었구나 싶었으리라.

충무공은 그 날 밤늦도록 정치, 경제, 군사 등에 관해서 광 법위 한 가르침을 받고 돌아왔으며 그 후 구봉선생님의 제자로 입문하여 훗날의 국난에 대비하는 많은 수련을 쌓았다.

그 날 밤 선생님은 충무공에게 병법을 가르치시며 두 수의 글을 주시고 유념하도록 하였는데 장군이 임진난 당시 왜적의 섬멸전을 펼 때 신묘한 전략을 세우는데 아주 적절한 글이었으니 다음과 같다.

월흑안비고(月黑雁飛高) 달 밝은 밤에 기러기 높이 나니

전우야순도(戰于夜循道) 전우는 밤에 도망치리라

또한 심심 당부하기를

󰡒독룡이 숨어있는 곳의 물은 편벽되게 맑으리라(毒龍潛處水偏靑)󰡓 하니 이러한 일곱자 글귀를 이순신 장군은 잊지 않고 잘 이용하였다 한다.

 

구봉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 제자 한 분이 제사에 참례하기 위해 시골서 올라오다 구리쇠나루를 건너 남대문 쪽으로 걸어가는데 어떤 귀인의 행차를 만나 비켜섰는데 가마 안에서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구봉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이 󰡒자네 좀 늦었네 난 길이 바빠 그만 가네. 이것이나 받아두게나.󰡓하고 헌 붓 한 자루를 주시기에 얼떨결에 공손히 받아들었다. 땀을 닦으며 정신을 차려 보니 하도 기이한지라 정신없이 급히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 보니 제사 날은 이미 이틀 전에 지났다고 하였다.

그래서 자기가 겪은 일을 여러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면서 받은 붓을 보여주니 제주(祭主)하는 말이 그 붓은 틀림없는 선생님이 쓰시던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모두들 놀라면서 신기한 일 이라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自足境界, 脫俗境地

다음에 소개하려는 시는 足不足이란 작품이다.

모두 40280자에 달하는 장편으로 ''자만을 운자로 사용한, 중국에서도 달리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특이한 작품이다. 그 형식 뿐 아니라 내용 또한 참으로 삶의 귀감으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다. 宋翼弼의 일생 학문이 이 한 수의 시에 무르녹아 있다 해도 조금의 지나침이 없다.

 

君子如何長自足 小人如何長不足 不足之足每有餘 足而不足常不足 樂在有餘無不足 憂在不足何時足 安時處順更何憂 怨天尤人悲不足 求在我者無不足 求在外者何能足 一瓢之水樂有餘 萬錢之羞憂不足 古今至樂在知足 天下大患在不足 二世高枕望夷宮 擬盡吾年猶不足 唐宗路窮馬嵬坡 謂卜他生曾未足 匹夫一抱知足樂 王公富貴還不足

天子一坐知不足 匹夫之貧羨其足 不足與足皆在己 外物焉爲足不足 吾年七十臥窮谷 人謂不足吾則足 朝看萬峯生白雲 自去自來高致足 暮看滄海吐明月 浩浩金波眼界足 春有梅花秋有菊 代謝無窮幽興足 一床經書道味深 尙友千古師友足 德比先賢雖不足 白髮滿頭年紀足 同吾所樂信有時 卷藏于身樂已足 俯仰天地能自在 天之待我亦云足

 

군자는 어찌하여 늘 스스로 족하며

소인은 어찌하여 늘 족하지 아니한가.

부족하나 만족하면 늘 남음이 있고

족한데도 부족타 하면 언제나 부족하네.

즐거움이 넉넉함에 있으면 족하지 않음 없지만

근심이 부족함에 있으면 언제나 만족할까.

때에 맞춰 순리로 살면 또 무엇을 근심 하리

하늘을 원망하고 남 탓해도 슬픔은 끝이 없네.

내게 있는 것을 구하면 족하지 않음이 없지만

밖에 있는 것을 구하면 어찌 능히 만족하리.

한 표주박의 물로도 즐거움은 남음이 있고

만금의 진수성찬으로도 근심은 끝이 없나니

古今의 지극한 즐거움은 족함을 앎에 있고

천하의 큰 근심은 족함을 알지 못함에 있도다.

秦 二世望夷宮서 베게 높이 했을 젠

죽을 때까지 즐겨도 충분할 줄 알았지.

唐 玄宗馬嵬坡에서 길이 막히었을 때

다른 삶을 산다 해도 족하지 않으리라 말했네.

필부의 한 아름도 족함 알면 즐겁고

왕공의 부귀도 오히려 부족하다오.

天子의 한 자리도 족한 것은 아닐 진데

필부의 가난은 그 족함 부러워라.

부족함과 족함은 모두 내게 달렸으니

외물이 어찌하여 족함과 부족함이 되리오.

내 나이 일흔에 窮谷에 누웠자니

남들이야 부족타 해도 나는야 족해.

아침에 만 봉우리에서 흰 구름 피어남 보노라면

절로 갔다 절로 오는 높은 운치가 족하고,

저물 녁엔 푸른 바다 밝은 달 토함을 보면

가없는 금물결에 眼界가 족하도다.

봄에는 매화 있고 가을엔 국화 있어

피고 짐이 끝없으니 그윽한 흥취가 족하고

책상 가득 經書의 맛이 깊어 있어

千古를 벗 삼으니 스승과 벗이 족하네.

은 선현에 비해 비록 부족하지만

머리 가득 흰 머리털, 나이는 족하도다.

내 즐길 바 함께 함에 진실로 때가 있어

몸에 책을 간직하니 즐거움이 족하도다.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보아 능히 자재로우니

하늘도 나를 보고 족하다고 하겠지

 

20대에 이름을 날리다.

구봉선생님은 7세 때 󰡐산가모옥월참차山家茅屋月參差 - 산 속 초가집에 달빛이 어른거리네󰡑라는 싯구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하였고, 20대에 이미 󰡐8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꼽혔으며, 시와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선생님의 외증조모는 안씨 집안의 종이었다. 그의 아버지 송사련은 자신의 출세를 위해 외삼촌인 안당의 일가를 몰락시켰고, 신사무옥辛巳誣獄이라 불린 이 사건은 가문과 혈연관계를 중시하는 당시 유생들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았다.

송씨 일가의 이러한 약점은 자식인 구봉선생님 대에 이르러, 동인들에 의해 불거지게 된다.

< 선조수정실록 >에는 사노(私奴:남자종) 송익필을 체포하라!’는 요지의 기록이 남아있다. 선생님께서 일찍이 관직을 포기하고 교육자로 나선 것도 이러한 출신상의 배경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선생님은 학문만 대단했던 것이 아니다. 번개가 치는 듯한 안광과 당당한 풍채에서 우러나오는 독특한 기백으로 인해 많은 일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무릎이 꺾여 절을 하고만 사연

당시 조정에서 판서의 직위에 있던 홍가신은 구봉선생님을 흠모하여 자주 서신을 보내 학문과 업무에 관한 대소사에 많은 자문을 구했다. 이런 홍가신에게 경신이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동생 경신은 판서의 직위에까지 오른 형이 한낱 종의 자손에게 굽실거리는 것을 무척이나 못마땅하게 여겨 노골적으로 불만을 나타내곤 했다. 두고만 보던 형은 어느 날 동생을 불러 편지 하나를 건넸다. ", 이걸 가지고 구봉 선생께 전하거라." 평소 가뜩이나 불만이 많은 동생 경신은 길길이 뛰며 화를 내었다. 종놈의 새끼한테 제가 왜 갑니까?

그러나 형은 이런 동생을 잘 달래 기어이 보냈다. 가서 서신만 전하라는 형의 명을 끝내 어길 수는 없어 동생은 단단히 벼르며 송구봉의 집을 찾아갔다.

집에 당도해 사람을 부르니, 마침 밖에 아무도 없었는지 마중을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홍경신은 흥분하여 소리를 질렀다. "종의 새끼가 이럴 수 있다니, 게 익필이 있느냐!" 방안에서 글을 읽고 있던 선생님은 낯선 사람이 함부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고 이상하게 여겨 직접 마루로 나와 손님을 맞았다.

"그 뉘시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구봉선생님을 욕보이겠다고 기세등등하던 홍경신이 갑자기 깍듯이 절을 하며 예절을 차리는 것이었다.

"편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이리로 가지고 오시오"

"아닙니다. 그냥 여기 놓고 가겠습니다" 그리고는 얼굴도 제대로 보지 않고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돌아온 동생에게 홍가신이 물었다.

"편지는 전했느냐?" "아뇨, 못 전했어요. 정신이 아득해져서 놓고만 왔습니다". 그러자 형이 웃으며 말했다.

정신이 아득한 것만 아니라, 너 오줌쌌지? 구봉 선생과 마주 앉아 쳐다보는 건 율곡 한명 뿐이고, 성우계는 나하고 곁에 앉아 얘기하는데 구봉선생과 마주 앉으면 벼락 치는 것 같아서 나도 마주 앉지는 못하느니라. ”

훗날 홍경신은 자초지종을 묻는 세인들에게 '절을 하는 게 아니라 갑자기 무릎에 힘이 빠져 넘어진 것'이라며 변명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임금을 바라보지 않는 신하

구봉선생님을 알아주는 몇 안 되는 지기였던 율곡선생은 다가오는 국가의 환란을 짐작하고 선조에게 구봉선샌님을 끊임없이 천거했다고 한다.

당시 율곡은 성우계와 함께 송구봉이 병조판서라도 하면 왜놈은 공격할 마음조차 못 먹는다며 여러모로 선조를 설득하였다.

율곡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던 선조는 마침내 그를 만나보기에 이르렀다. 우여곡절 끝에 구봉선생님과 대면하게 된 선조는 그의 학식과 경륜에 찬탄을 금치 못하였다.

그런데 선조가 보니 구봉선생님은 눈을 감고서 말을 하지 않는가. 그래서 그 까닭을 물어보았다.

"경은 왜 눈을 뜨지 않소?"

"제가 눈을 뜨면 주상께서 놀라실까 염려되어 이리 하옵니다".

"그럴 리 있겠소? 어서 눈을 뜨시오. 어명이오".

이에 할 수 없이 눈을 뜨니, 선조는 그만 그의 눈빛에 놀라 기절하고 말았다. 결국 눈도 제대로 쳐다볼 수 없는 신하를 조정에 둘 수가 없다 하여 이 일은 무산되었다고 한다.

선생님에 관하여 전해지는 정사나 야사에는 꼭 율곡 이이가 함께 등장한다. 구봉선생님을 알 만한 이는 율곡 정도였고, 관직에 등용될 수 없는 신분인 구봉선생님은 자신의 뜻을 율곡을 통해 펴고자했다. 선생님께서 나중에 동인의 미움을 받아 노비가 된 것도, 율곡과의 친교로 서인의 정책 자문 역할을 많이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후 율곡선생은 십만양병설을 건의하지만 당파싸움에 여념이 없던 당시 중신들의 반대로 무산되고, 그는 임진왜란이 닥치기 전에 죽고 만다.

하지만 율곡선생은 쉽게 눈을 감지는 않았다. 앞으로 일어날 전란을 예상하고 임금이 피난 가는 길목에 화석정을 세워 갈 길을 밝혀, 죽어서도 군주를 구한다.

이러했던 율곡선생이 백성들을 생각하지 않았을 리 없을 것이다. 이에 율곡선생이 구봉선생님을 찾아가 앞날을 준비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율곡 선생이 세상을 뜨자, 그의 죽마고우이던 구봉선생님은 애도의 시를 지어서, "그대와 나는 합해서 하나인데, 반쪽만 남은 나는 사람 구실 못하겠네" 라는 애절한 슬픔을 토로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