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 (聖學輯要 序)
율곡사랑 에서
《성학집요(聖學輯要)》는 율곡 선생이 40세 때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던 당시 완성하여, 선조 임금에게 올린 책이다. 그 내용은 유학의 기본 입문서인 대학(大學)의 가르침을 여러 성현의 말을 인용하여 고증하고, 성리학적 입장에서 해설한 것으로, 유학의 가르침을 통해 자기완성을 이루고 나아가 가정, 사회, 국가를 편안하게 하는 데 필요한 것을 간결하게 엮었다. 이 내용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나온 《율곡전서》를 인용하였습니다.
서(序)
신은 살피옵건대, 도(道)는 오묘해서 형상이 없기 때문에 글(文)로써 도를 표현한 것이옵니다. 사서(四書)와 육경(六經)주1)에 이미 밝고 또 구비되었으니, 글로써 도를 구하면 이치가 다 나나탈 것이옵니다. 다만 전서(全書)가 호번(浩繁)하여서 요령을 얻기가 어려우니, 선현(先賢)이 「대학」을 표장(表章)하여 규모를 세웠사옵니다. 성현의 천만 가지 교훈이 모두 여기에 벗어나지 않사오니, 이것이 요령을 얻게 하는 방법이옵니다.
서산 진씨(西山眞氏)주2)가 이 책을 미루어 넓혀서 연의(衍義)를 만들어, 널리 경전(經傳)을 인용하고 겸하여 사적(史籍)을 인용하여, 학문을 하는 근본과 다스리는 차례가 찬연(粲然)히 조리가 있아온데 임금의 몸에 중점을 두었으니, 참으로 제왕의 도에 들어가는 지침이옵니다. 다만 권수가 너무 많고 문장이 한만(汗漫)하여 일을 기록한 글 같고 실학(實學)주3)의 체계가 아니니, 참으로 아름답기는 하나 다 착하지는 못하옵니다.
배움은 마땅히 넓게 하고 첩경으로 요약해서는 아니 되옵니다. 다만 배우는 이가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마음을 굳게 세우지 아니하고서, 먼저 넓히는데 일삼으면 심려(心慮)가 전일하지 못하고, 버리고 취하는 것이 정밀하지 못해서 혹시 지리(支離)하여 진실을 잃을 염려가 있으니, 반드시 먼저 요긴한 길을 찾고 확실하게 문정(門庭)을 열어 놓은 뒤에야 널리 배우기를 한이 없이 할 수 있고, 유(類)를 따라 향상될 것이옵니다.
항차 임금의 한 몸은 만 가지 일이 모이기 때문에 일을 처리하실 때는 많고 글을 읽을 때는 적사오니, 만약에 그 강령을 들며 그 종지(宗旨)를 정하지 않고 오직 넓히는 데로만 힘을 쓰면, 혹 기억하고 외는 습관에 거리끼게 되고, 혹은 사장(詞章)의 화려한 것에 빠져서, 궁리(窮理)주4)· 정심(正心)· 수기(修己)· 치인(治人)의 도에는 참으로 얻는 것이 없을 것이옵니다.
신은 못난 선비로서 좋은 때를 만나 전하를 뵈옵건대 총명하고 지혜로움이 뛰어났으니, 진실로 학문의 공으로써 함양성취(涵養成就)하여 그 기량(器量)을 채우신다면 동방에서 요(堯)· 순(舜)의 다스림을 볼 수 있을 것이오니, 천 년에 한 번밖에 없는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되옵니다.
돌아보건대, 신은 경솔하고 천박하여 재기(才器)가 이미 얕으며, 거칠고 잡되어 학술이 또 보잘 것 없기 때문에 규곽(葵藿)주5)의 정성은 비록 간절하오나 충성을 다할 길이 없사옵니다.
가만히 생각하옵건대, 「대학」은 본래 덕에 들어가는 입문인데, 진씨(眞氏)의 연의(衍義)는 오히려 간결하지 못하니, 진실로 「대학」의 뜻을 모방하여 차례를 따라 나누어서, 성현(聖賢)의 말씀을 정선(精選)하여 거기를 메우고 절목(節目)을 자세하게 하여, 말은 간략하되 이치가 다하게 되면 곧 요령의 방도가 여기에 있사옵니다. 이것을 우리 임금에게 올리면 근폭(芹曝)주6)의 드림이 비록 옆사람의 웃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나 형촉(螢燭)의 빛은 아마 임금을 밝히는데 도움이 있을 것이옵니다.
이에 다른 일을 폐기하고 오로지 요령을 간추리는 것을 일삼아 사서(四書)· 육경(六經)과 선유(先儒)의 설과 역대의 역사에까지 깊이 탐색하고 널리 찾아서, 그 정수만을 채집하여 모으고, 차례를 나누어서 번거로운 것을 줄여 요약하며, 깊이 연구하고 거듭 바로잡아 두 해를 걸려 편성하였사온데 모두 다섯 편이옵니다.
1편의 통설은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을 합하여 말한 것으로서, 곧 「대학」의 이른바 덕을 밝히는 것과,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과, 지극히 착한 데 그치는[止於至善] 것이요,
2편의 수기(修己)는 곧 「대학」의 이른 바 명덕(明德)을 밝히는 것인데, 모두 열세 조목이옵니다. 1장은 총론(摠論)이요, 2장은 입지(立志)요, 3장은 수렴(收斂)이라 한 것은 방향을 정해서 흩어진 마음을 구하여 「대학」의 기본을 세운 것이오며, 4장의 궁리(窮理)는 곧 「대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주7)이며, 5장은 성실(誠實)이요, 6장은 기질을 교정하는 것[矯氣質]주8)이요, 7장은 양기(養氣)주9)요, 8장의 정심(正心)이라는 것은 「대학」의 성의 정심(誠意正心)이요. 9장의 검신(檢身)이라는 곳은 곧 「대학」의 수신(修身)이요, 10장은 덕량(德量)을 넓히는 것이요. 11장은 보덕(補德)이요, 12장의 돈독(敦篤)이라는 것은 거듭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의 남은 뜻을 논한 것이요, 13장은 그 공효를 논한 것으로서 수기(修己)가 지선(至善)에 그친 것이옵니다.
3편은 정가(正家)요, 4편의 위정(爲政)이라는 것은 「대학」의 이른바 신민(新民)인데, 정가라는 것은 제가(齊家)를 말함이요, 위정이라는 것은 치국 평천하(治國平天下)를 이른 것이옵니다.
정가(正家)의 조목이 여덟이니, 1장은 총론이요, 2장은 효경(孝敬)이요, 3장은 형내(刑內)요, 4장은 교자(敎子)요, 5장의 친친(親親)이라는 것은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처자(妻子)에게 모범이 되며, 형제간에 우애하는 도리이오며, 6장은 근엄(謹嚴)이요, 7장의 절검(節儉)이라는 것은 미진(未盡)한 뜻을 미루어 연역(演繹)함이요, 8장은 공효(功效)를 말하였으니, 곧 제가(齊家)가 지선(至善)에 그친 것이옵니다.
위정(爲政)의 조목이 열[十]이니, 1장은 총론이요, 2장은 용현(用賢)이요, 3장의 취선(取善)이라는 것은 곧 「대학」의 이른바 어진 사람이라야 능히 사랑하고 미워한다는 뜻이요, 4장은 시무(時務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요, 5장은 선왕(先王)을 본받음이요, 6장의 천계(天戒)를 삼가라는 것은 곧 「대학」에서 인용한, “마땅히 은(殷)나라에 볼지어다. 준명(峻命:천명을 말함)이 쉽지 않다.”는 뜻이요, 7장의 기강(紀綱)을 세운다는 것은 곧 「대학」의 이른바, “나라를 가진 자는 삼가야 할 것이니 편벽하면 천하의 살육이 된다.”는 뜻이요, 8장은 안민(安民)이요, 9장의 명교(明敎)라는 것은 곧 「대학」의 이른바, “군자 혈구(矩)주10)의 도가 있으니 백성이 효제(孝悌)에 흥기하며 배반하지 않는다.”는 뜻이요, 10장은 공효(功效)로써 매듭을 지어, 치국 평천하(治國平天下)가 지극히 착함[至善]에 그친 것이옵니다.
5편의 성현 도통(道統)이라는 것은 바로 「대학」의 실적(失跡)입니다.
모두 합하여 성학집요(聖學輯要)라 이름하니, 마지막으로 도를 전하는 책임을 성상에게 바른 것이라 해도 너무 지나친 말은 아니옵니다. 전하께서는 5백의 기(期)를 당하시고 군사(君師)의 지위에 거하시어, 착한 것을 좋아하는 지혜와 욕심이 적은 인(仁)과 일을 결단하는 용맹이 있으시니, 진실로 시종 학문을 힘쓰시어 끊이지 않고 계속한다면 무거운 책임을 감내하여 원대한 사업을 이루는 것을 어찌 못하겠사옵니까.
다만 어리석은 신(臣)이 견문이 넓지 못하고, 지식과 생각하는 것이 투철하지 못하와, 차례를 갖추는 데 순서를 잃은 것이 많사오나, 인용한 성현의 말씀은 모두 천지에 세워도 어긋나지 않고, 귀신에게 질정하여도 의심되는 것이 없으며, 뒷 성인이 보더라도 의혹할 것이 없는 것이오니, 어리석은 신이 조리(條理)를 잘못 구분하였다고 해서 성인의 교훈을 경솔히 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옵니다.
혹 어리석은 신이 한 가지 터득한 설(說)을 그 사이에 섞은 것이 있사오나, 모두 삼가 성현의 교훈을 상고하여 거기 의거해서 글을 이룬 것이오며, 감히 방자하게 맹목적인 말을 발하여 종지(宗旨)를 잃지 않았사옵니다. 신의 정력을 여기에 다하였사오니, 만일 열람하시고 항상 상 위[案]에 두신다면, 전하께서는 천덕(天德)과 왕도(王道)의 학문에 아마 다소 도움이 없지 아니 할 것이옵니다.
이 책은 비록 임금의 학문을 주로 하였사오나 실상은 상하에 통하오니, 배우는 이로서 널리 보고 범람하여 귀결(歸結)이 없는 자는 마땅히 여기에 공(功)을 거두어 반약(反約)의 방법을 얻고, 배우지 못하고 고루하고, 견문이 좁은 자는 마땅히 여기에 힘을 들이어 향학(向學)의 방향을 정하여야 할 것이오니, 배움에는 빠르고 늦음이 있으나 모두 유익할 것이옵니다.
이 책은 사서와 육경의 계단이며 사다리[階梯]이오니, 만약 부지런한 것을 싫어하고 간편한 것을 편안히 여겨서, 학문의 공(功)이 여기에서 그친다고 하면, 이것은 그 문정(門庭)만 구하고 그 당실(堂室)은 찾지 못한 것이오니, 신이 책을 엮은 본의가 아니옵니다.
만력(萬曆) 3년 을해(乙亥)11) 가을 7월 16일에 통정대부홍문관 부제학 지제교 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通政大夫弘文館副提學知製敎兼經筵參贊春秋館修撰官) 신(臣) 이이(李珥)는 엎드려 절하옵고 삼가 서(序)를 쓰옵니다.
< 주 >
1) 육경(六經) : 중국의 여섯가지 경서(經書). 곧 주역(周易) 시경(詩經) 서경(書經) 춘추(春秋) 예기(禮記) 악기(樂記). 또는 악기 대신에 주례(周禮)를 넣기도 한다. 육예(六藝) 또는 육적(六籍)이라 부르기도 한다.
2) 서산 진씨(西山眞氏) : 송(宋)나라 포성(浦城) 사람. 이름은 덕수(德秀) 자는 경원(景元) 또는 경희(景希) 서산(西山)은 그의 호 임. 저서로 대학연의(大學衍義) 사서집편(四書集編) 등이 있다.
3) 실학(實學) : 실리(實理)·실용(實用)·실적(實迹)·실심(實心)·실사(實事)를 추구하는 학문을 말한다.
4) 궁리(窮理) : 이치를 탐구하는 일. 대개 경외(敬畏)의 마음으로 이치를 탐구하는 일을 뜻한다.
5) 규곽(葵藿) : 해바라기가 해를 향하여 기울어진다는 뜻으로 아랫사람이 군왕(君王)이나 장상(長上)의 덕을 경앙하는 것을 뜻한다.
6) 근폭(芹曝) : 임금에게 미미한 충성을 바친다는 뜻. 옛날에 미천한 농부가 미나리가 맛있고 등에 쪼이는 봄볕에 좋다고 여겨 임금에게 바치기를 원했다는 고사가 있다.
7) 격물치지(格物致知) : 「대학(大學)의 8조목에 속하는 것으로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여 지식을 극진히 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희(朱熹)는 격물「格物」의 「格」을 「至」, 즉 이르다는 뜻이라 하고 「物」을 사물이라는 뜻이라고 하여 사물의 개별적·경험적 탐구와 인식의 방법으로 풀이하였다. 치지(致知)에 관해서도 지(知)를 이루느냐 지(知)에 이르느냐는 논의가 있으나 주희(朱熹)는 지(知)를 이룬다는 입장에서 해석하였다. 이에 반하여 왕양명(王陽明)은 「格物」의 「格」을 正이라 풀이하여 사물을 바르게 한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왕양명은 격물치기를 「치양지」(致良知)설과 지행합일(知行合一)설의 입장에서 해석하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왕양명의 해석은 선험적·직관적인 방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본래 「대학」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은 주희적인 것과 왕양명적인 것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주희, 왕양명 양자는 그 한 편에 치우쳤다고 할 수 있다.
8) 교기질[矯氣質] : 편벽된 기질(氣質)을 변화시켜 교정한다는 뜻. 이 이론은 송(宋)대의 장횡거(張橫渠)에서 비롯되었다.
9) 양기(養氣) : 기(氣)를 기른다는 뜻으로 맹자(孟子)에서 말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른다는 것을 말한다.
10) 혈구지도(矩之道) : 혈구의 도「대학」의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에 해당되는 조목에서 제기된 것으로 혈구(矩)의 도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이른바 천하를 화평하게 함이 그 나라를 다스림에 있다는 것은 위에서 노인을 노인으로 대접하면 백성들에게 효도가 일어나며 위에서 어른을 어른으로 대접하면 백성들에게 공경함이 일어나며, 위에서 외로운 사람을 불쌍히 여기면 백성이 배반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군자는 혈구의 도를 지녀야 한다. 즉 위에서 싫어하는 바로써 아랫사람을 부리지 말 것이며, 아래에서 싫어하는 바로써 위를 섬기지 말 것이며, 앞에서 싫어하는 바로써 뒤에 먼저 하지 말 것이며, 뒤에서 실어하는 바로써 앞에 따라가지 말 것이며, 오른편에서 싫어하는 바로써 왼편에 건내지 말 것이며, 왼편에서 싫어하는 바로 써 바른편에 건네지 말 것이다. 이것을 혈구지도(矩之道)라 하는 것이다」
11) 만력(萬曆) 3년 을해(乙亥) : 명나라 신종의 연호로 1575년, 선조 8년이다.
2) 성학집요 제1편. 통 설(統說)
신이 살피건대, 성현의 말씀이 횡(橫)으로 말하기도 하고 종(縱)으로 말하기도 하여, 한 마디 말로 체(體)와 용(用)을 다한 것도 있고, 여러 가지 말로 한 실마리만 말한 것도 있사옵니다.
이제 체(體)와 용(用)이 총괄된 말씀만을 취하여 머리 편[首篇]을 말들었사옵니다.
하늘이 명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성을 따른 것을 도(道)라 하고, 도를 닦은 것을 교(敎)라 한다.(「중용」 하동)
주자는 말하기를, “하늘이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으로 만물을 화생(化生)함에 기(氣)로써 형체를 이루고, 이(理)를 또 부여하니 이(理)와 기(氣)는 원래 서로 떠나지 못하는 것이니, 기에 나아가서 이가 그 가운데서 있습니다. 이것은 음양 화생이라는 말을 이었기 때문에, 기로 형태를 이루고 이를 또 부여한다고 한 것이요, 기가 있은 뒤에 이가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말로써 뜻을 해치지 않아야 될 것입니다. 이에 사람과 물(物)이 날 적에 각각 그 부여한 바 이(理)를 얻어서, 건순(健順)과, 오상(五常)의 덕(德)이 되니 이른바 성(性)이다. 〔건(健)은 양(陽)의 이(理)이고 순(順)은 음(陰)의 이(理)입니다. 오상의 덕(德)은 인(仁)·의(義)·예(禮)·지(智)·신(信)이니, 이것은 오행(五行)의 이(理)입니다.〕 솔(率)은 따른다는 뜻이요, 도(道)는 길과 같은 것이다. 사람이나 물(物)이 각각 그 본성의 자연을 따르면, 그 일용하는 사물 사이에 모두 각각 마땅히 행할 길이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도(道)이다. 〔주자는 말하기를, "솔성(率性)은 사람이 솔(率)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나의 본연(本然)의 성품을 따르면 스스로 허다한 도리가 있게 된다. 혹 솔성으로써 성명(性命)의 이를 순하는 것이라고 하니, 그렇다면 이는 도가 사람으로 인하여 비로소 있게 된다.”하였습니다.〕 수(修)는 품절(品節)하는 것이다. 성(性)과 도(道)는 비록 같으나 기품(氣稟)이 혹시 다르다. 그러므로 능히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차이가 생기게 되는 것이니, 성인이 인·물(人物)의 마땅히 행할 바를 인하여 품절해서 천하의 법으로 삼았다. 이것을 교(敎)라 하는 것인데, 예(禮)·악(樂)·형(刑)·정(政) 따위가 이것이다. 대개 사람들은 자기의 성(性)이 있는 것만을 알고, 그것이 하늘에서 나온 줄을 알지 못하며, 일에 도(道)가 있는 것만을 알고, 그것이 성품에서 나온 줄을 알지 못하며, 성인(聖人)의 교(敎)가 있는 것만을 알고, 그것이 나의 고유(固有)한 것으로 인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알지 못한다. 그러기 때문에 자사(子思)가 여기에 맨 처음에 밝힌 것이요, 동자(董子)의 이른바, ‘도(道)의 큰 근원이 하늘에서 나왔다.’ 한 것이 또한 이 뜻이다.”하였사옵니다.
도(道)라는 것은 잠시도 떠나지 못할 것이니 만일 떠날 수 있는 것이라면 도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바에도 경계하며, 남들이 듣지 못하는 바에도 두려워한다.
주자는 말하기를, “도라는 것은 나날이 쓰이는 사물(事物)의 마땅히 행해야 할 이치인데, 모두 성품의 덕으로써 마음에 갖추었으니, 이 이치가 있지 않은 물건이 없고 이 이치가 있지 않을 때가 없다. 그런 까닭에, 잠간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떠날 수가 있다고 한다면 어찌 솔성(率性)이라고 하겠는가. 이러므로 군자의 마음은 항상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비록 <남들이> 보고 듣지 않을 때라도 감히 소홀히 하지 아니하니, 이것이 천리(天理)의 본연(本然)의 성품을 내 마음에 두어서, 잠시라도 떠나지 않게 하는 까닭인 것이다.”하였습니다.
어두운 곳보다 더 나타나는 것이 없으며 미미한 것보다 더 드러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혼자 있을 때에 삼간다.
주자는 말하기를, “은(隱)은 어두운 곳이고 미(微)는 미미한 일이요, 독(獨)은 남이 알지 못하고 자기 혼자만 아는 경지이다. 말하자면 깊숙한[幽暗] 곳과 미미한 일은 자취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으나, 기틀은 이미 동하였고 남들은 아직 알지 못하나 자기 혼자만은 알고 있으니, 천하의 일이 드러나고 나타난 것에 이보다 더 지난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이미 항상 경계하고 조심하되 여기에 더욱 삼간다. 그래서 사람의 욕심이 싹트려고 할 적에 막아서 은미(隱微)한 가운데 가만히 자라나서 도를 멀리 떠나는데 이르지 않도록 한다.”하였습니다.
○ 도향 추씨(道鄕鄒氏)가 말하기를, “독(獨)을 삼가는 것이 가장 도에 들어가는 요령이 되는 것이니, 이른바 독(獨)이라는 것은 비단 한가하고 조용하게 거처(居處)하는 것만이 아니다. 마음에<한 생각>이 싹 트는 것도 독(獨)이라 한다. 능히 여기에 온 힘을 다 한다면 잘못이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중용」에 이 말로써 머리 편(篇)을 삼은 것이다.”하였습니다.
○ 정자는 말하기를,“천덕(天德)이 있으면 문득 왕도(王道)를 말할 수 있으니, 그 요긴한 것은 다만 신독(愼獨)하는데 있다.”하였습니다.(천덕이라 함은 곧 몸을 닦은 공효(功效)이고, 왕도라 함은 곧 집을 바르게 하고 정치를 하는 법도이며, 신독(愼獨)은 이러한 몸을 닦고, 가정을 바루고, 정치를 하는 세 가지의 중요한 핵심[樞紐]이옵니다.)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이 발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하고, 발하여 모두 절도(節度)에 맞는 것을 화(和)라고 하는 것이니, 중이라는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요, 화라는 것은 천하의 통달한 도[達道]이다.
주자는 말하기를, “기뻐하고, 성내고,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정(情)이요, 그것이 발하지 않은 것은 성(性)이다. 편벽되고 기울어짐이 없기 때문에 중(中)이라 이르고, 발하여 모두 절도(節度)에 맞는 것은 정(情)의 바른 것이니, 어긋나고 패려함이 없기 때문에 화(和)라고 이른다. 대본(大本)이라는 것은 하늘이 명한 성이다. 천하의 이치가 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오게 되니 도(道)의 체(體)이다. 달도(達道)라는 것은 성품을 따름을 말함이다. 천하고금에 같이 말미암는 바이므로 도의 용(用)이 된다. 이것은 성정(性情)의 덕(德)을 말하여 〔중(中)은 성(性)의 덕이 되고 화는 정(情)의 덕이 됩니다.〕 도는 떠날 수 없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이것은 성정의 덕의 체단(體段)이 이와 같은 것을 말한 것이고, 공부를 가리켜서 말한 것이 아닙니다. 위 글의 계구(戒懼)와 신독(愼獨)이 독 아랫글의 중화(中和)를 이루는 것의 공부입니다. 하였사옵니다.
○ 또 말하기를, “마음은 몸의 주재가 되어 동정(動靜)의 간격이 없다. 정(靜)할 때는 사물이 이르지 않고 생각이 싹트지 않아서, 일성(一性)이 혼연(渾然)하여 도의(道義)가 완전히 갖추니 이른바 중(中)이다. 이것은 마음의 체(體)로서 적연(寂然)히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동(動)하게 되면 사물이 서로 이르고 생각이 싹터서, 칠정(七情)이 서로 작용하여 각각 주(主)된 바가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화(和)이다. 이것은 마음의 용(用)으로서 감동하여 통하는 것이다.”하였습니다.
○ 호계수(胡季隨)는 말하기를, “계구(戒懼)라는 것은 희(喜)·노(怒)·애(哀)·락(樂)이 발하기 전에 함양(涵養)하는 것이고, 신독(愼獨)이라는 것은 희·노·애·락이 이미 발한 뒤에 성찰(省察)하는 것이다.”하였습니다.(함양(涵養)과 성찰(省察)의 말이 비로소 이에 나타났는데, 아래 정심장(正心章)에 자세히 나옵니다.)
중(中)·화(和)를 이루면 천지(天地)가 안정되며 만물이 생육한다.
주자는 말하기를, “치(致)라는 것은 미루어 지극하게 한 것이다. 위(位)라는 것은 <있는>그 곳에서 편안한 것이요, 육(育)이라는 것은 그 생(生)을 완수하는 것이다. 계구(戒懼)로부터 요약하여 지극히 정(靜)한 가운데에, 편벽되고 기울어진 바가 없고 그 지키는 것을 잃지 않는 데까지 이르면, 그 중을 극진히 하여 천지가 안정될 것이요, 신독(愼獨)으로부터 정밀히 하여 사물에 응하는 곳에, 조금도 어긋나는 것이 없고, 가는 데마다 그렇지 않은 것이 없는 데까지 이르면, 그 화(和)가 지극하여서 만물이 <다> 생육할 것이다. 대개 천지와 만물은 본래 나와 한몸[一體]이니, 나의 마음이 바르면 천지의 마음도 또한 바루어지고, 나의 기(氣)가 순하면 천지의 기도 또한 순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 효험이 이와 같은 데 이르는 것이니, 이것은 학문의 지극한 공효요, 성인의 가능한 일이다. 처음부터 외부의 도움은 필요로 하지 않는 것으로서, 도를 닦는 교(敎)도 또한 이 가운데 있는 것이다. 이것이 비록 하나는 체(體)이고 하나는 용(用)이 되어 동정(動靜)의 다른 것은 있으나, 반드시 그 체가 선 뒤라야 용이 행하게 되는 것이니, 그 실제는 또한 두 가지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합쳐 말하여 윗글의 뜻을 맺은 것이다.”하였습니다.
○ 서산 진씨(西山眞氏)는 말하기를, “중화(中和)를 이루는 공부는 경(敬)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계구(戒懼)하는 것은 정(靜)한 때의 경이요, 신독(愼獨)하는 것은 동(動)한 때의 경이다. 정한 때 경하지 아니함이 없는 것은 중(中)을 극진히 하는 것이요, 동한 때 경하지 아니함이 없는 것은 화를 지극히 하는 것으로서, 자연히 천지가 안정되고 만물이 생육되는 것이다. 동중서(董仲舒)의 이른바, ‘임금이 마음을 바르게 하여 조정과 백관과 만민을 바르게 하면, 음양이 화하고 풍우(風雨)가 때에 맞춰서 모든 복이 이른다.’ 한 것은 이러한 이치이다.”하였습니다.〔 이 책에서 경(敬)을 맡으니, 실상은 몸을 닦고 사람을 다스리는 강령(綱領)입니다. 〕
○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위는 자사가 도를 전수한 뜻을 서술하여〔 공자가 도를 증자에게 전하고, 증자는 <도를> 자사에게 전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전한 뜻을 기술한 것입니다. 〕 말을 세운것[立言]이니, 첫머리에는, 도의 본원은 하늘에서 나왔기 때문에 바꿀 수 없음과, 그 실은 몸에 갖추어졌기 때문에 떠날 수 없음을 밝힌 것이요, 다음은 존양(存養)하고 성찰(省察)하는 요령을 말한 것이요, 끝에는 성신(聖神)의 공화(功化)의 극진한 것을 말한 것이니, 대개 배우는 이들로 하여금 자신에 돌이켜 구하여, 스스로 체득해서 외부에서 유혹하는 사사로움을 버리고, 그 본연의 착한 것을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하였습니다.
○ 「대학」의 도(道)는 명덕(明德)을 밝히는 데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하는 데 있으며, 지극히 착한 데에 그침에 있다.(「대학」하동) 정자는 말하기를, “친(親)자는 마땅히 신(新)자로 보아야 한다.”하였습니다.
○ 주자는 말하기를, “「대학」이라는 것은, 대인(大人)의 학문이다. 명(明)은 밝힌다는 뜻이요, 명덕(明德)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것으로 허령(虛靈)하여 어둡지 않아서[不], 모든 이치를 갖추어 만사에 응하는 것이다. 〔 주자는 말하기를, "허령(虛靈)해서 어둡지 않은 것은 마음이요, 이 이치가 마음에 갖추어 흡족해서 조금이라도 결함이 없는 것은 성(性)이요, 감촉하는 것을 따라 감동하는 것은 정(情)이다." 하였습니다. 옥계 노씨(玉溪盧氏)는 말하기를, "명덕(明德)이라는 것은 다만 이 본심(本心)이라." 하였습니다. 〕 다만 기품(氣)의 구애(拘碍)와 인욕(人欲)의 가린 바가 되어서 가끔 어두워지는 수가 있으나 그 본체(本體)의 밝은 것은 일찌기 쉴 때가 없다. 그러므로 배우는 이는 마땅히 그 발하는 바로 인하여 끝내 밝혀서 그 처음을 회복하여야 한다. 〔 주자는 말하기를, "명덕(明德)은 쉬지 않고 나날이 생활하는 사이에 때때로 나타난다. 가령,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는 것과, 의(義)가 아닌 것을 보고 부끄러워하는 것과, 어진 사람을 보고 공경하는 것과, 착한 일을 보고 기뻐해서 사모하는 것은 모두 명덕의 발현이다. 비록 아주 악한 사람이라도 또한 때로는 착한 생각이 발하는 수가 있으니, 마땅히 그 발한 실마리로 인하여 계속하여 그것을 빛나게 밝혀야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新)이라는 것은 옛것을 개혁함을 이름인데, 말하자면 스스로 그 명덕(明德)을 밝혔으면 그것을 또 마땅히 미루어 남에게 미치게 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역시 옛날의 잘못을 버리게 하는 것이다. 지(止)라는 것은 반드시 이에 이르러 옮기지 않는다는 뜻이요, 지선(至善)이라는 것은 사리(事理)의 당연한 극치이다. 〔 주자는 말하기를, "지선(至善)이란 지극히 좋은 도리란 말과 같으니, 충분히 다한 <최상의> 선(善)이 그 속에 있다." 하였습니다. 〕 말하자면 명덕(明德)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을 다 마땅히 지극히 착한 경지에 그쳐서 옮기지 않는 것이니, 대개 반드시 그 천리(天理)의 지극한 것을 다하여 한 오라기만한 인욕(人欲)의 사사로움도 없게 하는 것이다. 〔 어떤 사람이 묻기를 "지선(至善) 이라는 것은 이 명덕(明德) 밖에 따로 선이 있다는 것이 아니고, 다만 명덕(明德) 가운데에서 극처(極處)에 이른 것이 바로 이것 아니겠습니까." 하니, 주자는 대답하기를, "명덕 가운데도 지선이 있고 신민(新民) 가운데도 지선이 있으니, 모두 그 극처에 이름을 요한다. 다만 이해하기를 극처에까지 이르러야 할 뿐 아니라, 역시 행하기를 극처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하였습니다. 〕 이 세 가지는 「대학」의 강령(綱領)이다." 하였습니다.
옛날에, 명덕을 천하에 밝히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나라를 다스리고, 그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가정을 다스리고, 그 가정을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몸을 닦고, 그 몸을 닦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하고, 그 마음을 바르게 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뜻을 성실하게 하고, 그 뜻을 성실하게 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지식을 극진히 하였으니, 지식을 극진히 함은 사물을 궁구하는 데에 있다.
주자는 말하기를, "명덕을 천하에 밝힌다는 것은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그 명덕을 밝히게 하는 것이다. 〔 주자는 말하기를, "그 체(體)와 용(用)의 전체를 극진히 하여 한 마디로 말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은 살피건대, 자기의 덕을 밝히는 것은 체요, 백성의 덕을 새롭게 하는 것은 용인데, 명덕을 천하에 밝힌다는 것은 체와 용을 합하여 말한 것입니다. 〕 마음이라는 것은 몸을 주재하는 것이다. 성(誠)은 진실한 것이요, 의(意)는 마음의 발하는 바인데, 그 마음의 발하는 바를 성실히 하는 것은 반드시 스스로 유쾌하여 속임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치(致)는 미루어 극진히 함이요, 지(知)는 식(識)과 같은 것이니, 나의 지식을 미루어 극진히 하여 그 아는바가 다하지 않은 것이 없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격(格)은 이른다는 뜻이요, 물(物)은 일[事]과 같으니,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그 극진한 곳에 도달하지 않은 것이 없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 격(格)자는 궁(窮)과 지(至)의 두 가지 뜻이 있는데, 격물(格物)의 격(格)은 궁(窮)자의 뜻이 많고 물격(物格)의 격(格)은 다만 이 지(至)자의 뜻입니다. 〕 이 여덟 가지는 「대학」의 조목(條目)이다." 하였습니다. 〔 위는 역(逆)으로 미룬 공부입니다. 〕
○ 또 말하기를, "격물(格物)은 몽(夢)과 각(覺)의 관문[關]이요, 성의(誠意)는 이 인(人)과 귀(鬼)의 관문[關]이니, 이 두 관문의 공부를 마치면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더욱 쉬워져서,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에 이르러서는 그 걸음이 더욱 쉬워질 것이니, 모름지기 돌아보면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치지(致知)와 격물(格物)은 이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요, 성의(誠意)와 정심(正心)과 수신(修身)은 이 이치를 체득하는 것이요, 제가(齊家)와 치국과 평천하는 이 이치를 미루어 나아가는 것이니, 3절로 나누어 보아야 한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격물(格物)로부터 평천하(平天下)에 이르기까지는, 성인이 대략 선후를 나누어서 사람에게 주어 보게 한 것이요, 일건(一件)을 깨끗이 다하여 남음이 없는 뒤라야 비로소 일건을 행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이렇게 하면 어느 때에 성취(成就)를 하겠는가." 하였습니다.
물(物)이 궁구된 뒤에 아는 것이 지극하고, 아는 것이 지극한 뒤에 뜻이 성실하고, 뜻이 성실한 뒤에 마음이 바루어지고, 마음이 바른 뒤에 몸이 닦아지고, 몸이 닦아진 뒤에 가정이 다스려지고, 가정이 다스려진 뒤에 나라가 다스려지고, 나라가 다스려진 뒤에 천하가 태평해진다.
주자는 말하기를, "물격(物格)이라는 것은 사물의 이치의 극진한 곳에 이르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이고, 〔 이 구절은 아랫 구절과 상대하여 말한 것이기 때문에 글을 만든 것이 이와 같으나, 그 뜻은 사물의 이치가 그 지극한 곳에 이르지 않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 지지(至)라는 것은 나의 마음의 아는 바가 다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이다. 〔 물격(物格)과 지지(知至)는 다만 이 한 가지 일이지마는 사물의 이치로써 말하면 물격(物格)이라 하니, 사물의 이치가 각각 그 지극한 곳에 도달한 것을 말함이요, 나의 마음으로써 말하면 지지(知至)라 하니 나의 마음이 가는 바에 따라서 극진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 아는 것이 이미 극진하면 곧 뜻이 성실하게 될 것이며, 뜻이 이미 성실하면 곧 마음이 바르게 될 것이니, 수신(修身) 이상은 명덕(明德)을 밝히는 일이요, 제가(齊家) 이하는 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이다." 하였습니다. 〔 위는 순(順)으로 미룬 공효(功效)입니다. 〕
○ 정자는 말하기를, "치신(治身)과 제가(齊家)로부터 평천하(平天下)에 이르기까지는 다스리는 도(道)요, 치강(治綱)을 세우고 백 가지 직책을 나누어 바르게 하여 천시(天時)를 따라 일을 제재하고, 제도와 법도를 만들어서 천하의 일을 다하는 것은 다스리는 법(法)이니, 성인이 천하를 다스리는 도는 오직 이 두 가지뿐이다." 하였습니다. 〔 건안 섭씨(建安葉氏)는 말하기를, "도(道)라는 것은 다스리는 근본이요, 법이라는 것은 다스리는 도구이니 편벽되게 폐지하지 못한다. 그러나 또한 반드시 근본이[立] 뒤에 그 도구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 하였습니다. 〕
신이 살피건대, 성현의 학문은 몸을 닦고 사람을 다스리는 데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이제 「중용」과 「대학」 첫 장의 설을 모아 엮게 되니, 실제로 서로 표(表)가 되기도 하고 이(裏)가 되기도 하여, 몸을 닦고 사람을 다스리는 도가 갖추어 다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대개 천명(天命)의 성(性)은 명덕(明德)의 갖춘 바이요, 솔성(率性)의 도는 명덕의 행한 바이며, 수도(修道)의 교(敎)는 신민(新民)의 법도(法度)입니다. 계구(戒懼)라는 것은 정존(靜存)하여 마음을 바르게 하는 유요, 신독(愼獨)이라는 것은 동찰(動察)하여 뜻을 진실하게 하는 유이며, 중화(中和)를 이룩하여 위육(位育)한다는 것은 명덕(明德)·신민(新民)이 지극히 착한 데에 그쳐 명덕을 천하에 밝히는 것을 말함입니다. 다만 미치는 바가 많고 적음이 있으며, 공효(功效)가 넓고 좁음이 있습니다.
치중화(致中和)의 공이 한 가정에 그치면 곧 한 가정의 천지가 안정하고, 만물이 생육하여 명덕(明德)이 한 가정에서 밝을 것이고, 〔 한 가정에 어찌 따로 천지와 만물이 있겠습니까? 다만 이 부자(父子)와 부부(夫婦)와 형제(兄弟)가 각각 그 분수를 바르게 하면, 이것이 천지가 안정된 기상이며, 자효(慈孝)와 우공(友恭)과 창수(唱隨)하는 것이 각각 그 정(情)을 다하면 이것이 만물이 생육하는 기상입니다. 〕
한 나라에 그치면 한 나라의 천지가 안정되고 만물이 생육하여 명덕이 한 나라에 밝아질 것이며, 천하에 미친다면 곧 천하의 천지가 안정되고 만물이 생육하여, 명덕이 천하에 밝을 것입니다.
3대 이후에 한 집안이 위육(位育)한 것은 세상에 간혹 있었지마는, 한 나라와 천하가 위육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으니, 그래서 깊이 전하께 바라옵니다.
3) 성학집요 제2편. 수 기 (修己)
신이 살피건대 「대학」에 이르기를, "천자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한결 모두 몸을 닦는 것[修身]을 근본으로 삼을 것이니, 그 근본이 어지러우면 지말(枝末)이 다스려지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같이 제왕의 학문에는 몸을 닦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사옵니다.
제1장. 수기 총론(修己總論)
신이 살피건대, 몸을 닦는 공부에는 지식을 넓히는 것도 있고, 행하는 것도 있사옵니다. 지식은 착한 것을 밝히는 것이요, 행하는 것은 몸을 성실하게 하는 것이니, 이제 지식과 행하는 것을 합하여 말한 것을 취하여 첫머리에 드러내었습니다.
군자는 덕성(德性)을 높이고 학문을 닦을지니, 광대한 것을 이루고 정미한 것을 다하며, 높고 밝은 것을 지극히 하고 중용을 행하며 옛 것을 익혀서 새것을 알고, 두터운 것을 돈독히 하여 예의를 높여야 한다. (중용)
주자는 말하기를, 존(尊)은 공경하여 받든다는 뜻이다. 덕성(德性)은 내가 하늘에서 받은 바른 이치이다. 도(道)는 말미암는다[由]는 뜻이다. 온(溫)은 심온(溫)의 온과 같은 것이니 〔 불[火]이 물건을 익히는 것을 심이라고 합니다. 〕 앞에 배운 것을 또 다시 때때로 익히는 것을 말한다. 돈(敦)은 두터운 것을 더하는 것을 말한다. 존덕성(尊德性)은 마음을 보존하여 도의 체(體)의 큰 데까지 극진히 하는 것이요, 도문학(道問學)은 지식을 극진히 하여 도의 체의 세밀한 데까지 다하는 것이다. 한 오라기의 사사로운 뜻으로써 스스로 가리지 않고, 〔광대를 이루는 것입니다.〕한 오라기의 사사로운 욕심으로써 스스로 더럽히지 않으며, 〔고명(高明)을 지극히 하는 것입니다.〕 그 이미 아는 바에 함영(涵泳)하고 〔옛 것을 익히는 것입니다.〕 그 이미 능한 바를 돈독히 하는 것 〔돈후(敦厚)의 뜻입니다.〕 은, 모두 마음을 보존하는 등속이다. 이치를 분석하면 호리(毫釐)의 차이도 있지 않게 하며, 〔정미(精微)함을 다한 것입니다.〕 일을 처리하면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잘못이 있지 않게 하며, 〔도중용(道中庸)의 뜻입니다.〕 이의(理義)는 날마다 그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지신(知新)입니다.〕 절문(節文)은 날마다 그 삼가지 못한 것을 삼가는 것〔숭례(崇禮)입니다〕은, 다 지식을 이루는 등속이다. 대개 마음을 존함이 아니면 지식을 극진히 하지 못하며, 또 마음을 보존하면 지식을 극진히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다섯 구절은 크고 작은 것이 서로 연관되고, 처음과 끝이 서로 응한다. 〔동양 허씨(東陽許氏)는 말하기를, "큰 것은 위의 5절을 말한 것이요, 작은 것은 아래의 5절을 말한 것이며, 처음은 존덕성(尊德性)과 도문학(道門學)의 한 구절을 말한 것이요, 끝은 아래의 4귀절을 말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성현이 보여 준 '덕에 들어가는 방법'이 이보다 더 자세한 것이 없으니 배우는 이들은 마땅히 마음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가 글에서 널리 배우고 예로써 요약하면 또한 도에 배치되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논어〕
주자는 말하기를, "약(約)은 요약의 뜻이요, 반(畔)은 배(背)치 〔배(背)는 음이 패(佩)입니다.〕된다는 뜻이다. 군자는 학문은 넓히고자 하기 때문에 글에 상고하지 않는 것이 없고, 도를 지킴은 요령을 취하려고 하므로, 움직일 때는 반드시 예로써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하면도리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면재 황씨(勉齋黃氏)는 말하기를, "박(博)은 넓게 취하여 그 넓은 것을 지극하게 하는 것이요, 약(約)은 돌이켜 단속하여 그 요령을 지극히 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 정자는 말하기를, "글을 널리 배우고 예로써 요약(要約)하지 않으면 반드시 한만(汗漫)한 데 이를 것이니, 널리 배우고 또 능히 예를 지켜 규범[規矩]을 따르게 되면 도리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몸을 닦는 공부는 거경(居敬)과 궁리(窮理)와 역행(力行)의 세 가지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 장에서는 그 실마리를 간략하게 드러내었으며, 자세한 것은 다음에 있습니다.
4) 성학집요 제5편. 성현 도통(聖賢道統)
신이 살피건대, 상고(上古)의 성신(聖神)이 하늘을 이어 만민의 준칙을 세우니, 이로부터 도통(道統)의 전승이 시작되었습니다. 문자가 생기기 전은 막연하여 상고해 볼 수 없고, 8괘(卦)가 처음으로 그어지니, 인문(人文)이 비로소 선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삼가 모훈〔謀訓: 뒷 임금에게 모범이 될 교훈〕에 의거하고 겸해서 사적을 고람하여, 대략 여기에 기술하였습니다. 복희씨〔伏羲氏)주252〕로부터 주자에까지 몸을 닦고 사람을 다스리는 실적을 나타내었으니, 먼저 공효를 살피고 뒤에 실적을 고람하면 가히 따를 바에 어둡지 않을 것입니다.
◆ 다음은 도통(道統)의 복희씨(伏羲氏)로부터 주공(周公)에 이른 것입니다. 성인(聖人)의 덕으로 군사(君師)의 지위에 앉아 자기 몸을 닦고 남을 다스림이 각각 지극하였습니다. 〔주공(周公)은 비록 임금의 지위에 있지는 않았으나 역시 천하를 다스리는 도(道)를 다하였습니다.〕
옛날 포희〔包犧: 포( )입니다.〕씨가 천하를 다스릴 적에는 우러러 하늘의 형상을 보고, 구부려 땅의 법도를 보며 조수(鳥獸)의 무늬[文]와 땅의 마땅한 것을 관찰하며, 가까이는 몸에서 취하고 멀리는 사물에서 취해서, 이에 비로소 8괘를 만들어 신명(神明)의 덕을 통하고, 만물의 정을 분류하였다. 〔역계사(易繫辭) 하동〕 왕소소(王昭素)는 말하기를, "여지(與地)라는 글자 사이에 다른 본(本)에는 천(天)자가 많이 있다." 하였습니다.
○ 주자는 말하기를, "구부려보기도 하고 우러러보기도 하며 멀리도 취하고 가까이도 취하는 것이 한결 같지 않으나, 이것은 다 음양(陰陽)의 기운이 소식(消息)하는 두 끝[兩端]에 체험할 뿐이다. 신명의 덕이란 것은 건(健)·순(順)·동(動)·지(止)의 성(性)이요, 건(乾)은 건(健)하고, 곤(坤)은 순(順)하며, 진(震)은 동(動)하고, 간(艮)은 지(止)합니다. 만물의 정(情)이란 것은 우레[雷]·바람[風]·산(山)·못[澤]과 같은 현상이다." 하였습니다. 진(震)은 우레가 되고, 손(巽)은 바람이 되며, 간(艮)은 산이 되고, 태(兌)는 못이 됩니다.
○ 사략(史略)에 이르기를, "태호(太昊) 복희씨의 성은 풍씨(風氏)인데, 처음으로 여덟 괘(卦)를 획정(劃定)하고 문자를 만들어서 결승의 정[結繩之政]주253)을 개혁하고, 시집가고 장가드는 제도를 만들어, 여피〔儷皮:한 쌍의 가죽인데 혼례의 납폐(納幣)로 쓰인다.〕를 납폐(納幣)의 예로 삼고 그물을 만들어서 사냥하고 고기 잡는 것을 가르치고, 짐승을 길러서 이것을 희생하여 <신에 제사하기 위하여> 포주〔廚:여기서는 희생물을 요리하는 요리장〕를 만들었기 때문에 이것을 포희〔犧:복희씨임〕라고 한다." 하였습니다.
포희씨가 돌아가자 신농(神農)씨가 일어났다. 나무를 깍아 보습[]을 만들고 나무를 구부려 쟁기[]를 만들어 밭을 갈고 김매[]는 이로움으로써 천하를 가르쳤다. 절재 채씨(節齋蔡氏)는 말하기를, "보습은 쟁기의 날이요, 쟁기는 보습을 지탱하는 <기구>이다." 하였습니다.
○ 한상 주씨(漢上朱氏)는 말하기를, "염제(炎帝) 때에는 백성들이 물고기나 짐승을 잡아먹는 것을 싫어하였기 때문에 비로소 쟁기와 보습을 만들어 천하 사람들을 가르쳤다. 그러므로 그를 신농씨(神農氏)라고 한다. 누()는 김맨다는 뜻이다." 하였습니다.
○ 사략(史略)에 이르기를, "염제(炎帝)인 신농씨의 성은 강씨(姜氏)인데, 처음으로 밭가는 것을 가르치고, 여러 가지 풀을 맛보아 처음으로 의약(醫藥)을 만들며, 또 낮에 시장을 만들어 물건을 서로 교환하여 가기를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하였습니다.
신농씨가 돌아가고 황제(黃帝)와 요(堯)·순(舜)이 일어났다. 그 변화를 통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게으르지 않게 하였으며, 신통한 것으로써 교화하여 백성들에게 모든 것을 편이하게 하니, 옷을 늘어뜨리고 있어도 천하가 다스려졌다. 건안 구씨(建安丘氏)는 말하기를, "복희씨와 신농씨 때에는 사람들이 피해를 입은 일은 비록 없었으나, 인문(人文)이 나타나지 아니하였고, 의식은 비록 족하였으나 예의가 일어나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여기에 세 성인 황제·요(堯)·순(舜)입니다.〕 이 천지를 살펴서 건곤(乾坤)의 형상을 체득하되, 의상(衣裳)을 바르게 하고, 군신의 분의(分義)를 천지(天地) 사이에 그 구별을 분명하게 하였으니, 어찌 천하가 잘 다스려지지 아니하겠는가. 이 때는 세상이 일신할 기회였고 백성들이 변하여 화하게 될 기회였다." 하였습니다.
○ 사략(史略)에 이르기를, "황제 헌원씨(軒轅氏)의 성은 공손씨(公孫氏)라고도 하고 희씨(姬氏)라고도 한다. 그는 일월(日月)과 성신(星辰)의 형상을 보고 비로소 천문(天文)의 관직을 두었고, 대요(大撓)에게 명하여 북두(北斗)의 가리키는 것을 점쳐서 갑자(甲子)주254)를 만들게 하며, 용성(容成)에게 명하여 책력을 만들게 하고, 예수(隸首)에게 명하여 산수(算數)를 만들게 하며, 영륜(伶倫)에게 명하여 6률(律)과 6려(呂)주255)를 만들게 하였다." 하였습니다.
○「역경」의 계사전(繫辭傳)에 이르기를, "나무를 쪼개어 배를 만들고, 나무를 깍아 노[楫]를 만들어, 통하지 못하던 곳을 건너게 하고, 소와 말을 사용하여 무거운 것을 끌고 멀리 이르게 해서 천하를 이롭게 하였으며, 문을 겹으로 하고 딱딱이를 쳐서 난폭한 사람을 못 오게 대비하며, 나무를 잘라 절구의 공이를 만들고, 땅을 파서 절구를 만들어 절구와 공이의 이로운 것을 가지고 만민을 구제하였으며, 나무를 휘어서 활을 만들고,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어, 활과 화살의 이로운 것을 가지고 천하를 위압하였으며, 옛날에는 굴이나 들판에서 거처하고 있었는데, 후세의 성인은 이를 바꾸어 집과 방을 만들되 들보를 올리는 집을 지어서 비바람을 막았으며, 옛날에는 장사를 지낼 적에 두터운 나무 섶으로 시체를 덮어 들 가운데 두고는, 봉분도 안 만들고 나무도 심지 않았는데, 후세의 성인은 그것을 관[棺槨]으로 바꾸어서 땅에 묻었으며, 또 옛날에는 결승(結繩)의 정(政)으로 다스렸는데 후세의 성인은 문자(文字)로써 이를 바꾸어, 백관에게는 그것으로 다스리게 하고 백성에게는 그것으로 살피게 하였다."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황제의 뒤에 소호(少昊)·전욱(頊)·제곡(帝)의 삼제(三帝)가 있어서 다 성스러운 임금인데, 계사(繫辭)에서는 다만 황제와 요·순만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신도 여기서 요(堯)로써 황제(黃帝) 다음에 붙였습니다. 〔 선현들이 도통의 전승을 논함에도 역시 삼제(三帝)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공자는 말하기를, "크도다, 요의 임금됨이여, 높고도 높구나. 오직 홀로[惟] 저 하늘이 클 뿐인데 요임금만이 이와 평등[則]하니 그 넓은 덕을 백성들은 무엇이라 이름짓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논어」하동〕
주자는 말하기를, "유(惟)는 홀로라는 뜻이오, 칙(則)은 준칙이란 뜻이다. 탕탕(蕩蕩)은 광원(廣遠)한 것을 일컫는 것이니, 물건이 아무리 높고 크다 하더라도 하늘보다 더 높고 큰 것이 없지마는, 홀로 요임금의 덕만은 하늘에 준(準)하기 때문에 (준(準)한다는 말은 하늘과 더불어 평등하다는 뜻이다.) 그 덕의 광원한 것은 역시 하늘과 같아서 말로서는 형용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하였습니다.
○ 사략(史略)에 이르기를, "제요(帝堯) 도당씨(陶唐氏)의 성은 이기(伊祁)씨인데, 〔제곡(帝)의 아들이고 황제(黃帝)의 현손입니다.〕 그의 어진 것은 하늘과 같고, 그의 지혜로운 것은 신과 같아서 백성들이 해[日]를 따르듯 하고 백성들이 구름을 바라듯 하였다." 하였습니다.
아, 높고 높구나, 그가 이룩한 공적[成功]이여. 아, 빛나누나[煥], 그가 성취한 문장(文章)이여. 주자는 말하기를, "이룩한 공적이란 사업(事業)이요, 환(煥)이란 빛나고 밝은 모양이며, 문장(文章)은 예(禮)·악(樂)·법(法)·도(度)이다." 하였습니다.
○ 윤씨(尹氏)는 말하기를, "천도(天道)의 위대한 것은 하는 것 같지 않으면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오직 요는 이것을 본받아서[則]이 칙(則)자는 법칙의 칙자 입니다. 천하를 다스린 까닭에 백성들은 그것을 무어라고 말로써 이름 지을 수 없고, 다만 이름 지을 수 있는 것은 그 공업(功業)과 문장이 위대하고 빛난다는 것뿐이다." 하였습니다.
요(堯)는 말하기를, "아[咨], 순(舜)아, 하늘의 역수(曆數)가 그대에게 있으니, 진실[允]로 그 적중함을 잡아 정사를 보살필 것이다. 사해가 곤궁해지면, 하늘에서 내린 복록이 영영 끊어질 것이다." 하였습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이것은 요가 순에게 명하여 왕위를 선양(禪讓)하는 말이다. 자(咨)는 감탄하는 소리요, 역수는(曆數)는 제왕(帝王)들이 서로 계승해 나가는 그 차례가 마치 해마다 다가오는 기절(氣節)의 선후와 같은 것을 말한 것이며, 윤(允)은 진실로 라는 뜻이요, 중(中)은 지나치거나 불급(不及)한 것이 없는 중도(中道)를 말한다." 하였습니다.
○ 사략(史略)에 이르기를, "순(舜) 유우씨(有虞氏)의 성은 요씨(姚氏)인데, 그가 역산(歷山)에서 밭을 가니 백성들이 다 서로 밭두덕을 양보하고, 그가 뇌택(雷澤)에서 고기를 잡으니 백성들이 다 고기잡는 자리를 양보하며, 하빈(河濱)에서 질그릇을 구으니 그릇이 하나도 추하거나 비뚤어진 것이 없고, 그가 사는 곳에는 어디든지 1년이면 촌락을 이루었고, 2년이면 읍(邑)을 이루었으며, 3년이면 도회(都會)를 이루었다. 그는 요(堯)를 도와 섭정하면서 환두(驩兜)주256)를 추방하고 공공(共工)주257)을 유배하였으며, 곤()주258)을 죽이고 삼묘(三苗)주259)를 내쳤으며, 지혜와 재능이 뛰어나 팔원(八元)과 팔개(八凱)주260)를 기용하였다." 하였습니다.
공자는 말하기를, "몸소 일하지 않고 나라를 잘 다스린 사람은 순(舜)이시다. 대체 무엇을 하셨겠는가. 그는 자기의 몸을 공손히 하여 임금의 자리에 있었을 뿐이었다." 하였습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일을 하지 않고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성인의 덕이 성하여 백성들이 감화되어 무슨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오직 순만을 칭찬한 것은 요의 뒤를 이어서 인재들을 등용하고는 많은 직책을 위임한 까닭에, 더욱 몸소 일한 자취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몸을 공손히 한다고 한 것은 성인의 공경하는 덕의 형용인데, 이미 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 이 같을 뿐이다." 하였습니다.
순이 우(禹)에게 명하여 말하기를, "땅이 평(平)하고 하늘이 이루어지니 육부(六府)와 삼사(三事)가 진실로 잘 다스려져 만세토록 길이 의지하게 되었는데, 이는 그대의 공이라." 하였습니다. 〔우서(虞書) 대우모(大禹謨)〕
채씨(蔡氏)는 말하기를, "수(水)·토(土)가 다스려지는 것을 평(平)이라고 하는데, 수·토가 이미 다스려져서 만물이 이루어지게 된 것을 말한다. 육부(六府)는 곧 수(水)·화(火)·금(金)·목(木)·토(土)·곡(穀)인데 이 여섯 가지에서는 재용(財用)이 나오므로 부(府)라고 한다. 그리고 삼사(三事)는 정덕(正德)·이용(利用)·후생(厚生)의 세 가지 인데, 이는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인 까닭에 사(事)라고 한다. 이 글은 순이 우(禹)의 공을 미루어 아름답게 여긴 것이다." 하였습니다.
○ 사략(史略)에 이르기를, " 하후씨(夏后氏)인 우(禹)의 성은 사씨(氏)인데, 곤()의 아들이다. 곤은 홍수를 다스리는 일을 맡았으나 도리어 막히어 다스리지 못하므로' 순이 우(禹)를 기용하여 이에 대체하니, 그는 전심전력하여 외지(外地)에 거처한 지 8년만에 자기의 집 앞을 지나도 집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9주(州)주261)를 개척하고 9도(道)를 통하게 하였으며, 9택(澤)주262)에 재방을 하고 산(山)을 측량하여 마침내 공업을 이루었다. 이것을 순에게 고하였는데 순은 그 사업을 칭찬하여 모든 관리들을 통솔하게 하고 천자의 일을 돕게하니, 그의 말은 곧 법이 되고 그의 몸은 곧 모범이 되어, 마치 왼손에는 준승(準繩)을 가지고 오른 손에는 그림쇠[規矩]를 들고 있는 것 같았다." 하였습니다.
인심(人心)은 오직 위태하고 도심(道心)은 오직 미묘하니 정밀(精密)하게 하고 한결같이 하여야 진실로 그 중(中)을 잡으리라.
이에 대한 주는 이미 위에서 말했습니다.
○ 채씨(蔡氏)는 말하기를, "옛성인은 천하를 전수할 때 그 치법(治法)도 겸하여 전하였다. 그 경전에 나타난 것이 이와 같으니 후세의 임금은 어찌 깊이 생각하고 공경히 지키지 아니하겠는가." 하였습니다.
공자는 말하기를, "아, 높고 거룩하구나[巍巍], 순(舜)과 우(禹)의 천하를 가지고도 불여(不與)함이여." 하였습니다. 〔논어(論語)〕
주자는 말하기를, "외외(巍巍)는 높고 큰 모양이요, 불여(不與)는 상관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으니, 이 말은 왕위에 있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지 않았음을 말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 신안 진씨(新安陳氏)는 말하기를, "순과 우는 천하를 가지고서도 그 마음을 동요하지 않았으니, 즐거움으로 살지 않았다는 것으로도 높고 거룩한 모습을 엿볼수 있다." 하였습니다.
성탕(成湯)은 크게 만방에 고하기를, "그대들이 선을 한다면 짐(朕)은 은폐해 두지 않을 것이요, 죄가 짐의 몸에 있다면 감히 내 스스로가 사(赦)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직 이것을 열람[簡]하는 것은 하느님의 마음에 있는 것이다. 그대를 만방 백성에게 죄가 있다면 그 책임은 나 한 사람에게 있으나, 나 한 사람에 죄가 있다면 그대들 만방 백성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없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상서(商書) 탕고(湯誥)〕
채씨는 말하기를, "간(簡)은 열람한다는 뜻이다. 잘하고 못하는 것을 한결같이 하늘에서 열람하고 있으나, 하늘이 천하를 내게 맡겼으니, 백성들에게 죄가 있다면 실로 임금이 한 죄요, 임금에게 죄가 있다면 이것은 백성들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란 것이다. 특히 성인은 자기의 잘못 책망하기를 엄히 하고 남의 잘못 책망하기를 가볍게 할 뿐 아니라, 이는 이(理)의 소재(所在)인 것이며, 군도(君道)의 당연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 사략(史略)에 이르기를, "은왕(殷王) 성탕(成湯)의 성은 자(子)씨이고, 이름은 이(履)이다. 그 선조는 설(契)이라는 사람인데, 제곡(帝)의 아들이다. 탕은 처음에 박()이라는 땅에 도읍을 정하고, 사람을 보내어 폐백을 가지고 이윤(伊尹)을 신(莘)의 땅에서 초빙하여, 그를 걸(桀)에게 다섯 번이나 나아가게 하였으나, 한 번도 기용(起用)하지 않았다. 걸은 탐욕하고 포악하여 나라가 크게 붕괴되었으므로 이윤이 탕의 재상이 되어 탕을 도와 걸을 토벌하여 남소(南巢)에 추방하니, 제후들이 탕을 높여 천자로 삼았다." 하였습니다.
시(詩)에 이르기를, "그윽한 [穆穆] 문왕이여, 아[於], 끊임없이[緝] 밝고[熙] 공경에 머물렀네[敬止]." 하였으니, 남의 임금이 되어서는 인(仁)에 머물렀고 남의 신하가 되어서는 경(敬)에 머물렀으며, 남의 아들이 되어서는 효(孝)에 머물렀고, 남의 아비가 되어서는 자(慈)에 머물렀으며, 나라 사람들과 사귐에는 신(信)에 머물렀다." 〔대학(大學)〕
주자는 말하기를, "시는 시경(詩經)의 대아(大雅) 문왕(文王)편이요, 목목(穆穆)은 그 덕이 그윽하다 덕(德)의 용태(容態)를 말한다는 뜻이요, 오(於)는 탄미(歎美)하는 말이요, 즙(緝)은 계속의 뜻이요, 희(熙)는 광명의 뜻이요, 경지(敬止)는 공경하지 않는 것이 없고, 머무를 데에 머무른다는 말이다. 이시를 인용한 것은 성인의 머무름이 지선(至善)이 아닌 것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다섯 가지는 바로 그 조목의 큰 것들이다." 하였습니다.
○ 사략(史略)에 이르기를, "주(周)나라 고공(古公) 후직(后稷)의 후손입니다. 의 막내아들인 계력(季歷)이 태임(太任)에게 장가들어서 창(昌)을 낳으니, 성덕이 있어서 추대하여 서백(西伯)으로 삼았는데, 제후들이 모두 귀복하여 천하의 3분의 2의 땅을 차지하였다. 무왕(武王)이 천자가 되고 나서 추존(追尊)하여 문왕(文王)으로 삼았다." 하였습니다.
공자는 말하기를, "천하를 삼분(三分)하여 그 둘을 두었는데도 은(殷)나라에 복종하였으니, 주나라의 덕은 지극한 덕이라 하겠다." 하였습니다. 〔논어(論語)〕
춘추전(春秋傳)에 이르기를, "문왕은 상(商)나라에 반기를 든 나라들을 거느리고 주(紂)를 섬겼다." 하였습니다.
○ 범씨(范氏)는 말하기를, "문왕의 덕은 상(商)나라를 대신할 만하여 천인(天人)이 귀속(歸屬)하였으나, 공격[功取]하지 않고 오히려 복종하였으니 그래서 <주나라>의 덕은 지극한 덕이라 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 주자는 말하기를, "문왕이 주(紂)를 섬긴 것은 오직 신하로서 임금을 섬기는 것을 알았을 뿐이요, 그 이외에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은 것이니 이것이 그 지극한 덕이다." 하였습니다.
무왕(武王)이 문왕의 왕업[統緖]을 계승[纘繼]하여 한 번 융의(戎衣)를 입고서 천하를 차지하였지마는, 그래도 천하에 드러난 명성을 잃지 않았다. 〔중용(中庸) ○ 역시 공자의 말씀입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찬(纘)은 잇는다는 뜻이요, 서(緖)는 왕업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융의(戎衣)는 갑옷과 투구 등속이니, 한 번 융의를 입는다는 것은 한번 갑옷과 투구를 입고서 주(紂)를 토벌한다는 말이다." 하였습니다.
○ 사략(史略)에 이르기를, "주(紂)는 달기(己)를 사랑하여 그 말이면 무엇이든지 다 좇아서, 부세를 과중하게 하고, 원대(苑臺)를 넓혀서, 많은 술과 안주를 차려 놓고 밤이 새도록 마셨으며, 형벌을 엄중하게 하여 쇠를 달구어 단근질하는 형[烙之刑]을 행하니, 제후가 모두 반기를 들었다. 서백(西伯)이 죽고 아들 발(發)이 서니 이가 무왕이다. 무왕이 서백의 왕업을 계승하여 닦으니 13년 동안에 제후들이 서로 기약하지 않고도 이에 모여든 이가 8백명이었다. 그들이 모두'주(紂)는 토벌해야 한다.' 해도 무왕은 '옳지 못한 일이다.' 하니 이끌고 돌아갔는데, 주는 끝내 죄악을 뉘우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왕은 토벌하였다. 주는 목야(牧野)에서 패하여 보옥(寶玉)을 몸에 지니고 스스로 분신자살한지라, 무왕은 은(殷)나라를 멸하고 천자가 되었다." 하였습니다.
맹자(孟子)는 말하기를, "요(堯)와 순(舜)은 본성대로 한 임금이요,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은 본성을 되찾은 임금이다." 하였습니다.〔「맹자」〕
주자는 말하기를, "본성대로 하였다는 것은 태어날 때 하늘로부터 온전한 것을 부여(賦與)받아, 이것을 더럽히는 일이 없을 뿐더러, 조금도 몸을 닦을 필요가 없는 것이니 이것은 성(聖)의 지극한 것이요, 본성을 되찾았다는 것은 몸을 닦아 그 본성을 돌이켜서 성인에 이른 것을 말한다." 하였습니다.
○ 정자는 말하기를, "요(堯)와 순(舜)은 두 분 간에 우열(優劣)이 없고, 탕(湯)과 무(武)는 <우열의>분별이 있다. 맹자는 '본성대로 하고 본성을 되찾았다.' 하였으니, 예로부터 사람들이 이와 같은 말을 한적이 없다. 오직 맹자가 이렇게 분별한 이래로 요와 순은 나면서부터 알던 이이고, 탕과 무는 배워서 안 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왕의 덕은 요와 순에 비슷하고 우(禹)의 덕은 탕과 무에 비슷하니, 요컨대 이분들도 다 성인이다." 하였습니다.
우(禹)는 맛 좋은 술을 싫어하고, 착한 말을 좋아하였다.
전국책(戰國策)에 이르기를, "의적(儀狄)이라는 자가 술을 만들었는데 우왕이 마셔보고 심히 감미(甘美)롭다고 느끼고는 '후세에 반드시 이 술로 인하여 그 나라를 망칠 자가 나올 것이다.' 말하고, 그 뒤로는 의적을 멀리하고 이 맛 좋은 술을 끊어버렸다." 하였습니다.
○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우왕은 좋은 말을 하는 이에게 절을 하였다." 하였습니다.
탕왕(湯王)은 중(中)을 지키고[執], 어진 이를 기용하는 데는 그 귀천의 유를 가리지 않았다.
주자는 말하기를, "집(執)은 지켜서 잃지 아니하는 것을 말하고, 중(中)은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일이 없는 것을 말하며, 방(方)은 유(類)의 뜻이요, 어진 이를 기용하는 데는 귀천의유를 가리지 않는다는 것은 오직 어질기만 하면 벼슬자리에 기용하고, 그 귀천의 유를 묻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이 탕왕의 집중(執中)은 자막(子莫)의 집중(執中)주264)과는 다르니, 탕왕은 다만 일마다 흡족하여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일이 없을 뿐이다." 하였습니다.
문왕은 백성들을 보기를 다친 사람을 보고 마음 아파하듯 하였고, 도를 바라보고도 아직 못 본 듯이 하였다. 이(而)는 여(如)로 읽습니다. 이(而)와 여(如)는 고자(古字)에는 통용됩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백성들이 이미 평안해졌는데도 이들을 보기를 다친 사람을 보고 마음 아파하듯 하고, 도가 이미 지극하였는데도 이것을 사모하고 바라기를 아직 못 본 듯이 하였으니, 성인의 백성을 아끼는 것이 깊고 도를 구하는 절실함이 이와 같아서 스스로 만족하지 않고 종일토록 쉬지 않아서 마음을 부지런히 한다." 하였습니다.
무왕(武王)은 가까운 데를 함부로 친근[泄]하지 않았고, 먼 데를 함부로 잊지도 않았다.
주자는 말하기를, "설(泄)은 친근하여 함부로 하는 것이다. 사람이 가까운 데는 친근하기가 쉬운데 <함부로> 친근하지 않았고, 먼 데는 잊기가 쉬운데 잊지 아니하였으니, 이것은 덕의 성한 것이요, 인(仁)의 지극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주공(周公)은 이 삼왕〔三王: 삼대(三代)의 왕〕의 장점을 겸하여 네 가지의 일을 다시 행하려고 생각하였으되, 그 마음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이것을 생각하였는데, 밤을 잊어버렸다. 다행히 좋은 도리를 깨닫게 되면 앉아서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주자는 말하기를, "3왕은 우왕·탕왕·문무(文武)이요, 네 가지 일은 위에 열거한 네 왕의 네 조항의 일이다. 그 일이 혹시 때가 다르고 형세가 다르므로 합당하지 않은 것이 있는 것을 생각해서 얻는다면 비로소 그 이치가 다른 것이 없게 된다. 안자서 날이 새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이것을 빨리 실행하자는 급한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이 글은 여러 성인들에 대한 것을 서술하여 그분들의 일을 각각 하나씩 들어서 그 근심하고 부지런하며, 두려워하고 위태로와 하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대개 이것이 천리(天理)는 항상 보존되고 인심(人心)은 죽지 않는 까닭이다." 하였습니다.
○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맹자가 말한 것은 그분들의 한 일 중에 각각 그 하나씩 만을 들어서 말한 것이지, 무왕이 중용을 지키고 어진 이를 기용하지 못했다거나 탕왕이 가까운데를 친근하지 않았다거나 먼 데를 잊었다는 것을 말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각각 그 성한 일을 열거하였다.' 하나 이것도 역시 아니다. 성인은 또한 성하지 아니한 일이 없다." 하였습니다.
공자는 말하기를, "무왕과 주공(周公)은 정말 달효(達孝)로다." 하였습니다. 〔「중용」하동〕
주자는 말하기를, "달(達)은 통(通)한다는 뜻인데, 천하 사람들이 모두 효(孝)라 이르는 것이다. 맹자의 말에 달존(達尊)이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하였습니다.
대저 효란 선인(先人)의 뜻을 잘 계승하고 선인의 사업을 잘 발전시키는 것이다.
신안 진씨(新安陳氏)는 말하기를, "조부(祖父)께서 하고 싶어 하던 뜻을 미처 이루지 못하였을 때는, 자손이 그 뜻을 잘 계승하여 이것을 성취시키는 것이요, 또 부조께서 이미 해놓은 사업이 가히 본받을 만할 때는 자손이 그 사업을 잘 이어받아 발전시키는 것을 말한다." 하였습니다.
○ 서산 진씨(西山眞氏)는 말하기를,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을 지키는 것은 진실로 이어서 발전시키는 것이요, 마땅히 변통해야 할 것을 변통하는 것도 역시 이어서 발전시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 위(位)를 밟으면〔踐〕선왕이 행하던 예법을 행하고, 선왕이 연주하던 음악을 연주하며, 선왕이 높이던 이를 공경하고, 선왕이 친애하던 이를 친애하여, 죽고 안 계신 선왕을 섬기기를 마치 살아 있을 때 섬기듯 하는 것이 효의 지극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주자(朱子)는 말하기를, "천(踐)은 밟는다는 뜻이요, 기(其)는 선왕을 가리키는 것이며, 높일 데와 친애할 데는 선왕의 조고(祖考)·자손·신서(臣庶)를 말하는 것이다. 처음 죽는 것을 사(死)라 하고, 장례를 지내면 돌아가 없다고 하는 것이니, 다 선왕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글은 뜻을 계승하고 사업을 발전시키는 것을 말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주(周)나라는 2대(代)를 보아 절충하니〔監〕그 문화가 대단히 찬란하다〔郁郁〕.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다. 〔「논어」○ 역시 공자의 말씀입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감(監 )은 본다는 뜻이요. 2대는 하(夏)나라와 상(商)나라인데, 2대의 문물제도를 보고 이에 손익(損益)을 하였다는 말이다. 욱욱(郁郁)은 찬란하고 성한 모양이다." 하였습니다.
○ 윤씨(尹氏)는 말하기를, "3대의 문물제도는 주나라에 와서 크게 완비하였으므로, 공자는 그 문화를 아름답게 여겨 이에 따른 것이다." 하였습니다.
◆ 다음은 도통이 공자에 와서 집대성(集大成)되어 만세의 스승이 되신 것인데, 공자 이후로는 도가 자기 몸에만 이루어지고 그 시대에는 행해지지 못했습니다.
○ 공자는 말하기를, "나는 15세가 되어서 학문에 뜻을 두었다." 하였습니다.〔「논어」하동〕
주자는 말하기를, "옛 사람들은 15세가 되면 대학(大學)에 들어갔는데, 여기서의 소위 학문이란 곧 대학의 도〔大學之道〕이다. 이 대학의 도에 뜻을 두었다는 것은 생각이 늘 여기에 있고 이것을 공부하는데 싫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30세가 되어서 자립을 하였다.
주자는 말하기를, "자립을 하면 지키는 것이 확고하므로, 여기에서는 뜻을 두는 것을 일삼을 필요가 없다." 하였습니다.
40세가 되어서는 마음에 의혹되는 일이 없었다.
주자가 말하기를, "사물의 당연한 이치에 의혹되는 일이 없으면 아는 것이 밝아서 여기에서는 지키는 것을 일삼을 필요가 없다." 하였습니다.
50세가 되어서는 천명(天命)을 알았다.
주자는 말하기를, "천명은 곧 천도의 유행(流行)으로서 사물에 부여한 이(理)인데, 이것은 바로 사물이 당연히 그렇게 되는 소이연(所以然)이다. 이것을 알면 아는 것이 지극히 정밀하여 여기에서는 의혹되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하였습니다.
60세가 되어서는 귀로 들으면 저절로 그 뜻을 알았다.
주자는 말하기를, "소리가 마음에 들어가면 통하여 조금도 거슬림이 없는 것인데, 이것은 아는 것이 극진한 데 도달하므로 생각하지 않고서 저절로 얻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70세가 되어서는 마음의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從〕법도〔矩〕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주자는 말하기를, "종(從)은 따르는 것이요, 구(矩)는 법도가 되는 기구로서 모난 것을 만드는 것이다. 마음의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스스로 법도에서 지나침이 없으니, 이것은 편하게 행하여지고 힘쓰지 않아도 맞는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성인은 나면서 알고 편안히 행하여 본래 하나 둘 쌓아 올라가는 일이 없다. 그러나 그 마음으로는 일찌기 이미 여기에 이르렀다고 하지 않는다. 위에 말한 것은 성인이 일상생활에 있어서 반드시 자기만이 그 나아간 곳을 깨닫고, 남들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하므로 여기에 그 근사한 일을 가지고 스스로 말한 것이다. 배우는 이가 앞으로 이것을 법으로 삼아서 스스로 힘쓰게 하려고 한 것이요, 마음은 실상 스스로 성인이면서 아직 이것을 실행하는 데 사양한 것이 아니라." 하였습니다.
○ 호씨(胡氏)는 말하기를, "성인의 가르침에는 역시 술(術)이 많다. 그러나 그 요령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 본심을 잃지 않게 하는 것뿐이다. 그 본심을 얻으려고 하는 자는 오직 성인이 제시한 학문에 뜻을 두어 그 차례를 따라 나아가면서 허물이 하나도 없고 일만가지 이치가 다 밟아지면 일상생활에서 본심이 환하게 밝아져 하고싶은대로 하여도 지리(至理) 아닌 것이 없을 것이다. 대개 마음은 곧 체(體)요, 욕(欲)은 곧 용(用)이며, 체는 곧 도(道)요, 용(用)은 곧 의(義)다. 성(聲)은 율(律)이 되고, 몸은 법도가 된다."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성인이 이것을 말한 것은 첫째로는 배우는 사람에게 이것을 보여서 마땅히 마음이 누그러워서 함양(涵養)하는데 차례를 건너뛰지 못하게 한 것이요, 둘째로는 배우는 사람에게 이것을 보여서 마땅히 날로 달로 진취하여 중도에서 그만두는 일이 없게 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 사기 세가(史記世家)에 말하기를, "공자의 이름은 구(丘)요, 자(字)는 중니(仲尼)인데 그 조상은 송(宋)나라 사람이었다. 부친은 숙량흘(叔梁紇)주265)이요, 모친은 안씨(顔氏)였다. 공구는 어릴 때 놀면서 늘 조두(俎豆)를 늘어놓고 예모를 차리더니 자라서 주나라에 가서 노자(老子)에게 예(禮)를 물었고, 돌아오니 제자들이 더욱 많이 모여들었다. 제(齊)나라에 갔다가 노(魯)나라에 돌아오니 정공(定公)이 중도재(中都宰)를 시켰는데, 1년이 되자 사방에서 모두 그를 본받게 되어 마침내 사공(司空)이 되었고, 또 대사구(大司寇)가 되어 국상(國相)의 일을 섭행(攝行)하여, 국정에 참여한 지 3개월 만에 노나라가 매우 잘 다스려졌다. 제나라 사람들이 여악(女樂)을 보내어 <노나라를> 혼란시키려 하였는데, 계환자(季桓子)가 그 여악을 받고, 교사(郊祀 : 천재天祭)를 지내고도 대부(大夫)에게 음복(飮福)을 보내지 않아서 공자는 노나라에서 다른 데로 가버렸다. 위(衛)나라로 갔다가 진(陳)나라로 갔으며, 또 채(蔡)나라와 섭(葉)나라로 갔다. 초(楚)나라 소왕(昭王)은 공자를 봉하려 하였으나 영윤(令尹) 자서(子西)가 반대하여서 그만두었다. 그리하여 위나라로 되돌아갔다가 또 노나라로 돌아왔다. 그때 나이는 68세였다. 노나라는 마침내 공자를 등용하지 못하였고, 공자 역시 벼슬하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이여 서경(書經)을 서술하였고, 예기(禮記)를 전술하였으며, 시경(詩經)을 산정(刪定)하였고, 악기(樂記)를 교정하였으며, 역경(易經)의 단전(彖傳)·계사전(繫辭傳)·상전(象傳)·설괘(說卦)·문언(文言)을 서술하고 춘추(春秋)를 지었다. 제자는 대개 3천 명이었고, 그 중에 자신이 육예(六藝)에 통한 이가 72명이었다." 하였습니다.
봉(鳳)새가 오지 않고, 황하(黃河)에서 그림이 나오지 않으니, 나는 그쳐야〔已〕겠다.
주자는 말하기를, "봉(鳳)은 신령스러운 새로서 순(舜)임금 때 와서 거동하였고, 문왕 때에는 기산(岐山)에 와서 울었다. 하도(河圖)는 복희씨(伏羲氏) 때에 황하 속에서 용마(龍馬)가 그림을 지고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다 성왕의 상서(祥瑞)이다. 이(已)는 그친다는 뜻이다." 하였습니다.
○ 장자(張子)는 말하기를, "봉이 날아오고 하도가 나타난 것은 문화가 찬란해질 좋은 징조이다. 복희씨와 순(舜)·문왕의 상서가 이르지 않으니 공자의 문장은 끊어지고 말았을 줄 안다." 하였습니다.
중니(仲尼)는 요(堯) · 순(舜)을 조술(祖述)하고 문왕 · 무왕을 헌장(憲章)하였으며, 위로 천시(天時)의 운행을 법하고, 아래로 수토(水土)의 이치를 좇았다. 〔「중용」하동〕
주자는 말하기를, "조술(祖述)한다는 것은 멀리 그 도(道)를 존숭한다는 뜻이요, 헌장(憲章)한다는 것은 가까이 그 법도를 지킨다는 것이다. 천시를 법한다는 것은 그 자연의 운행을 법한다는 뜻이요, 수토를 좇는다는 것은 수토의 일정한 이치를 따른다는 뜻이니, 이것은 다 내외(內外)를 겸하고 본말(本末)을 갖추어서 말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진씨(陳氏)는 말하기를, "정밀한 도리는 근본이 되고 안이 되며 소원한 도리는 끝이 되고 바깥이 된다." 하였습니다.〕
비유하면 마치 땅이 받쳐 실어주지 않음이 없고, 하늘이 덮어 감싸 주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으며, 4철이 번갈아〔錯〕행하고 일월(日月)이 번갈아 비치는 것과 같다.
주자는 말하기를, "착(錯)은 질(迭)의 뜻과 같다. 이 네 가지는 성인의 덕을 말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만물이 병육(育)되어 서로 방해되지 않고, 도가 병행(行)되어 서로 어긋나지〔悖〕않는다. 소덕(小德)은 시내가 흐르는 것과 같고, 대덕은 교화가 돈독한 것과 같으니 이것이 천지가 위대한 소이이다.
주자는 말하기를, "패(悖)는 어긋난다는 뜻이다. 하늘이 덮어주고 땅이 실어주기 때문에 만물이 그 사이에서 병육하여 서로 어긋나지 않으니, 방해되지도 않고 위배되지도 않는 까닭은 소덕이 시내의 흐르는 것과 같기 때문이요, 병육되고 병행되는 까닭은 대덕의 교화가 돈독하기 때문이다. 소덕은 전체가 온갖 다른 것으로 나누는 것이요, 대덕은 온갖 다른 것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시내의 흐르는 것과 같다는 것은 시냇물의 흐름과 같이 흐르되 맥락(脈絡)이 분명하여 지식(止息)되지 않는 것이요, 교화가 돈독하다는 것은 그 화육(化育)을 돈후(敦厚)하게 하는 것으로서 근본이 <대덕이> 성대하게 작용하여 무궁한 것을 말한다. 이 글은 천지의 도를 말하여 위에 비유한 글의 뜻을 나타낸 것이다." 하였습니다.
○ 황씨(黃氏)는 말하기를, "천명의 성〔天命之性〕은 바로 대덕의 교화가 돈독한 것이요, 솔성의 도〔率性之道〕는 바로 소덕이 시내와 같이 흐르는 것이다. 대덕의 교화가 돈독하다는 것은 체(體)요, 소덕이 시내와 같이 흐른다는 것은 용(用)이다." 하였습니다.
자공(子貢)은 말하기를, "부자(夫子)가 만약 집정의 기회를 얻어 나라를 다스렸다면야, 그야말로 세우면 서고, 이끌면 따라오고, 편안케 하면 모여들고, 움직이면 화응하여, 살아 있을 때는 사람마다 영광으로 여겨 받들고 돌아갔을 때는 누구든지 슬퍼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논어論語)
주자는 말하기를, "세운다는 것은 백성들의 살 방도를 세운다는 것을 말하고, 도(道)는 이끈다는 것이니 가르친다는 것을 말한다. 행(行)은 따른다는 뜻이요, 수(綏)는 편안하게 한다는 뜻이다. 내(來)는 돌아와 부속 된다는 뜻이요, 동(動)은 고무(鼓舞)시킨다는 뜻이다. 화(和)는 소위 「오변시옹〈於變時雍 : 「서경」에 나오는 말로 변하여 화목하다는 말〉」이니, 그 감응하는 묘미의 신속한 것이 이 같은 것을 말한다. 영(榮)은 높이고 친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없음을 말하고, 애(哀)는 부모를 잃은 듯이 슬퍼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성인의 신화(神化)는 상하로 천지와 더불어 동류이다." 하였습니다.
그 예(禮)를 보면 그 사람의 정치를 알게 되고, 그 음악을 들으면 그 사람의 덕을 알게 되는데, 백세 뒤에 백세의 왕들을 견주어보면 그 표준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사람이 생겨난 이래로 부자〔孔子〕같은 이는 아직 없다. 〔맹자(孟子)하동 ○역시 자공(子貢)의 말〕
주자는 말하기를, "대개 그 사람의 예를 보면 그 사람의 정치를 알 수 있고, 그 사람의 음악을 들으면 그 사람의 덕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백세 뒤에 지나간 백세의 왕들을 견주어보면 그 실정을 숨길 수 없으니, 그들을 다 비교해 보아도 부자〔夫子〕같이 성한 이는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재아(宰我)주266)는 말하기를, "내가 보는 견지로서는 부자〔孔子〕는 요(堯) · 순(舜)보다 훨씬 더 훌륭하다." 하였습니다.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성(聖)으로 말하면 다름이 없으나, 그 한 일과 공을 가지고 말하면 다름이 있다. 부자가 요·순보다 어질다는 것은 일과 공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대개 요·순은 천하를 다스렸고, 부자는 또 그 도를 미루어서 가르침을 만세에 떨치었다. 만약 요·순의 도가 공자를 얻지 못하였으면 후세의 사람들이 어디에 근거를 하였겠는가." 하였습니다.
맹자는 말하기를, "공자 같은 분을 가리켜 집대성(集大成)한 이라고 하는 것이다. 집대성했다는 것은 금속 소리를 울려 내고 옥(玉) 소리를 떨쳐 내어 조화를 이룬 것이다. 음악에 있어서 금속 소리는 처음에 조리있게 시작하는 것을 말하고, 옥 소리는 조리있게 끝맺는다는 것이다. 조리있게 시작한다는 것은 지(智)의 하는 일이요, 조리있게 끝맺는다는 것은 성(聖)의 하는 일이다." 하였습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성(成)이라는 것은 음악이 한 번 끝나는 것이니 서경(書經)에 소위「소소구성(簫韶九成」의 성(成))과 같은 것이다. 악(樂)에는 8음(八音)주267)이 있으니 만약 그 8음 중에 한 음만을 독주할 때는 그 한 음이 독자적으로 한 곡의 시종(始終)을 이루므로, 이것이 하나의 소성(小成)이요, 8음 중에 금(金)과 석(石)이 중요한 음이므로 8음을 합주(合奏)할 때는 먼저 쇠북을 쳐서 그 성음을 펴고, 뒤에 경옥을 쳐서 그 성운(聲韻)을 거두어들인다. 펴는 것은 처음에 하고 거두어들이는 것은 끝에 한다. 이리하여 처음과 끝 사이에 음들이 합주되어 맥락(脈絡)이 관통되어 갖추지 않는 것이 없다. 여러 소성(小成)을 합하면 하나의 대성(大成)이 되는데, 이것은 마치 공자의 지혜가 극진하지 아니한 것이 없고 덕이 온전하지 아니한 것이 없는 것과 같다." 하였습니다.
◆ 다음은 도통의 전함이 맹자에 와서 중절된 것입니다.
○ 안연(顔淵)이 크게 감탄〔〕하여 말하기를, "<공자의 도는> 우러러보면 볼수록 더욱 높고, 뚫으면 더욱 견고하여 들어 갈 수 없고 앞에 있는 듯하더니 어느 틈에 뒤에 있도다." 하였습니다. 〔「논어」하동〕
주자는 말하기를, "위( )는 감탄하는 소리이요, 우러러보면 볼수록 더욱 높다는 것은 거기까지 미칠 수가 없다는 것이요, 뚫으면 더욱 굳다는 것은 거기까지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앞에 있다는 말과 뒤에 있다는 말은 황홀하여 무엇이라고 그 형상을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글은 안연(顔淵)이 부자의 도가 무궁무진하여 방체(方體)가 없음을 깊이 알고 감탄한 것이다. 성인은 다만 한 개의 중(中)의 도리인데, 높고 여물고 앞에 있다가 뒤에 있다는 것은 다만 행동에 있어서 중용(中庸)이므로 능히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부자는(夫子)는 사람을 순순(循循)히 잘 인도〔誘〕한다. 글로 나의 지식을 넓혀주고, 예(禮)로 나의 행동을 단속하여 준다.
주자는 말하기를, "순순(循循)은 차근차근 차례가 있는 모양을 말하고 유(誘)는 인도하여 나아가게 하는 것이며, 박문 약례(博文約禮)는 가르치는 순서이다. 이 글은 부자의 도가 비록 고묘(高妙)하나 사람을 가르치는 것은 차례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 후씨(候氏)는 말하기를, "글로 나의 지식을 넓혀 준다는 것은 치지(致知) 격물(格物)이요, 예(禮)로 나의 행동을 단속하여 준다는 것은 극기복례(克己復禮)이다." 하였습니다.
○ 정자는 "이 글은 안자(顔子)가 성인을 칭송하는데 가장 적당한 말이니, 성인이 사람을 가르치는 데는 오직 이 두 일뿐이다." 하였습니다.
내가 이제는 배움을 그만둘래야 그만둘 수 없어서 내 재주를 다했더니 무엇인지 앞에 우뚝 서 있는〔卓〕것이 보이는 것 같았지만 아무리 따라가려고 하여도 따라갈 수가 없다〔末〕.
주자는 말하기를, "탁〔卓〕은 우뚝 서 있는 모양이요, 말(末)은 없다는 뜻이다. 이 글은 안자가 스스로 자기의 학문의 도달한 바를 말한 것이니, 대개 즐겨하는 바가 깊고 힘쓰는 것이 극진하여 보이는 바가 더욱 친근해졌으나 또 그 힘을 쓸 바가 없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 오씨(吳氏)는 말하기를, "이른바 탁이(卓爾 : 우뚝하게 서있는 모양)라는 것은 역시 일용 행사 사이에 있는 것이지, 소위「요명 혼묵(窈冥昏默)」같은 것은 아니다." 하였습니다.
○ 양씨(楊氏)는 말하기를, "가히 하고자 함이 선이란〔可欲之謂善〕데에서 확충하여 큰 데에 이르는 것은 역행(力行)을 쌓은 것이요, 대하여 화하는〔大而化之〕것은 역행의 미칠 곳이 아니다. 이것이 안자의 일간(一間)이 미달한 곳이다." 하였습니다.
○ 호씨(胡氏)는 말하기를, "안자는 학문을 이미 얻었기 때문에 성인의 학문에 들어갈 때 그 도가 어렵다는 까닭과 학문을 하여 뒤에 얻은 그 연유를 기술하여 공을 성인에게 돌려보낸 것이다. '높고 여물고 앞에 있다가 뒤에 있다.' 하는 것은 도체(道體)를 말 한 것이요, 앙찬(仰鑽)과 첨홀(瞻忽)은 그 요긴한 것을 포착하지 못하겠다는 뜻이다. 오직 부자〔孔子〕는 순순히 잘 인도하여 먼저 내게 글로써 지식을 넓혀 주어서 나로 하여금 고금을 알게 하고, 사물의 변화에 통탈케 한 연후에 내게 또 예(禮)로써 행동을 단속하여 나로 하여금 들은 것을 높이게 하고 아는 것을 행하게 하니, 마치 길가는 사람이 집으로 가거나, 밥 먹는 사람이 배부르기를 구하는 것과 같았다. 이러므로 배움을 그만둘래야 그만둘 수 없어서 진심진력하여 조금도 쉬거나 그만두는 일이 없으니 마침내 부자(夫子)가 앞에 우뚝 서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렇지만 따라가려고 하여도 따라갈 길이 없다는 것이니, 이것은 대개 따르는데 게을리 하지 않고 반드시 탁연히 우뚝 서는 경지에 이르기를 구하는 말이다. 아마 이 감탄은 안자(顔子)가 '청컨대, 이 극기복례〔克己復禮 : 자기의 사욕을 극복하고 예로 돌아간다는 것〕의 말을 받들어 실천하겠습니다.' 한 뒤이요, '석달 동안을 인(仁)을 어기지 않는다.' 하던 때에 있은 일이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공자는 말하기를, "회(回)는 그 마음이 석달 동안을 인(仁)을 어기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안연(顔淵)이 방국(邦國)을 다스리는 일에 관해서 물었다.
주자는 말하기를, "안자는 왕을 보좌할 재능이 있었던 까닭에 천하를 다스리는 방법을 물은 것인데, 방국(邦國)을 다스리는 것이라고 한 것은 겸사해서 한 말이다." 하였습니다.
공자는 말하기를, "역법(曆法)은 하(夏)나라의 역법을 쓸 것이다." 하였습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 하(夏)나라의 역법은 두병(斗柄 : 북두칠성의 국자 모양의 자루에 해당되는 세 개의 별)이 초저녁에 인(寅)의 방향(方向)을 가리키는 달을 정월로 삼았다. 하늘은 자시(子時)에 열리고 땅은 축시(丑時)에 열렸으며, 사람은 인시(寅時)에 난 까닭에, 두병이 자·축·인의 방향을 가리키는 달은 다 정월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역법은 사람이 농사짓기에 편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니, 세월은 당연히 사람을 위주하여 시작해야 한다. 대개 이것은 역법(曆法)의 바른 것과 시령(時令)의 착한 것을 취하여 안자(顔子)에게 고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수레는 은(殷)나라의 수레를 탈 것이다.
주자는 말하기를, "상(商)나라의 수레는 나무로 만든 수레인데 노(輅)는 큰 수레를 이른다. 옛날에는 수레를 나무로써 만들었을 뿐이나 상나라에 와서는 노(輅)의 이름이 있게 되었다. 대개 처음으로 그 제도를 달리한 것이다. 주(周)나라 사람들은 수레를 금과 옥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으므로 너무 사치스러우며, 또 부서지기 쉬웠으니, 이것은 상나라 수레의 검박하고 튼튼하며 등위가 이미 분변되어 질에 있어서 그 중정(中正)을 얻은 것만 못하였다." 하였습니다.
면류관(冕旒冠)은 주(周)나라의 면류관을 쓸 것이다.
주자는 말하기를, "주나라의 면류관은 다섯 가지 등위가 있었으며, 이것은 제복(祭服)에 쓰는 갓이다. 황제(黃帝) 이래로 이미 있었던 것이나 그
제도와 의용(儀容) 그리고 등급은 주나라에 와서 비로소 완비되었다. 공자가 이것을 취한 것은 대개 문(文)이 역시 그 중정(中正)을 얻었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음악은 소무(韶舞)로써 할 것이다.
주자는 말하기를, "선(善)을 다하였고 미(美)를 다하였기 때문에 이것을 취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 어떤 이가 주자에게 묻기를, "안자가 나라의 다스림을 물으니 공자가 다만 이 사대(四代)의 예악(禮樂)만을 가지고 말해 주고,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안자가 평일에 본래 강구(講究)한 것으로 공자의 재언(再言)을 기다리지 아니한 것인가?" 하니, 주자가 대답하기를, "사실 그렇다." 하였습니다.
정(鄭)나라의 음악은 금지할 것이고, 아첨하는 사람을 멀리할 것이니, 정나라의 음악은 음란한 까닭이고 아첨하는 사람은 위태한 까닭이다.
이 말의 주는 이미 위에서 말하였습니다.
○ 정자(程子)는 말하기를, "정사에 대해 묻는 이가 많았으되, 오직 안연에게만 이것을 가지고 말해 주었다. 대개 삼대의 제도는 다 시대를 따라 손익(損益)이 있었는데, 세상이 오래 됨에 이르러 폐가 없을 수 없었다. 주나라가 쇠하니 성인이 일어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공자는 여기에 선왕의 예를 짐작하여 만세상행(萬世常行)의 도를 세우고 이를 발설하여서 징조를 보인 것이니, 이것으로 말미암아 구하면 다른 것도 다 알 수 있다." 하였습니다.
안연이 죽자 공자는 말하기를, "아〔噫〕, 하늘이 나를 망치는 구나, 하늘이 나를 망치는구나." 하였습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희(噫)는 슬퍼서 통탄하는 소리이다. 도를 전해 줄 이가 없음을 슬퍼하여, 마치 하늘이 자기를 망치는 것과 같구나 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 운봉 호씨(雲峰胡氏)는 말하기를, "공자가 위로 문왕(文王)의 전하는 것을 이어받았음을 말할 때는 '하늘이 아직 이 글을 없애버리려고 하지 않는다.' 하였으며, 아래로 안연에게 전할 것을 잃었음을 말 할 때는 '하늘이 나를 망치는구나'라고 하였으니, 이렇다면 도통(道統)을 끊거나 하는 것은 다 하늘이다." 하였습니다.
○ 애공(哀公)이 묻기를,"제자들 중에 누가 배움을 좋아하느냐." 하니, 공자는 대답하기를, "안회(顔回 : 회는 안연의 이름입니다.)라는 이가 있었는데, 그는 배우기를 좋아하여 변덕스럽게 화를 잘 내지 않고 허물을 두 번 저지르지 아니하였는데 불행히도 명이 짧아 일찍 죽고 지금은 없으니, 배움을 좋아하는 사람을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하였습니다.
○ 증자(曾子)가 말하기를, "유능하면서 무능한 사람에게도 물어보며, 견문이 넓으면서도 견문이 좁은 사람에게 물어보며, 있어도 없는 것같이 하며, 꽉 차 있어도 빈 것같이 하며, 자기를 욕하여도 용서해 주는 일은 옛날 내 벗이 이렇게 하였다." 하였습니다. 여기서 친구란 마씨(馬氏)는 안연(顔淵)이라고 하였습니다.
삼〔參 : 증자의 이름〕은 둔〔魯〕하다. 공자의 말
주자는 말하기를, "노(魯)는 둔(鈍)이다." 하였습니다.
○ 정자는 말하기를, "증삼(曾參)은 필경 노둔한 것을 가지고 성취하였다." 하였고, 또 "증자(曾子)의 학문은 성실하고 독실한 것뿐이다. 성문(聖門)의 학도들 중에 총명하고 변재(才辨)있는 이들이 많았지마는, 마침내 그 도를 전승한 이는 바로 이 자질이 둔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배움이란 성실을 귀한 것으로 삼는다." 하였습니다.
○ 윤씨(尹氏) 왈, "증자의 재주가 둔한 까닭에 그 배움이 확고하였다. 이것이 도에 깊이 들어갈 수 있게 된 소이(所以)이다." 하였습니다.
증자는 말하기를, "나는 날마다 나 자신을 세 가지로 반성하는데 즉 남을 위해 일을 도모하는데 마음을 다하지〔忠〕않았는가, 벗들과 사귀는데 신용〔信〕없이 하지는 않았는가, 스승으로부터 가르쳐 받은 것(傳)을 익히지(習)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자기를 다하는 것을 충(忠)이라 하고, 진실하게 하는 것을 신(信)이라 한다. 전(傳)은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는 것이요, 습(習)은 몸에 이것을 익히는 것이다. 증자는 이 세 가지로써 날마다 그 자신을 반성하여 이런 일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욱 힘썼는데, 그가 스스로 자기를 다스리는 정성이 이와 같았으니 정말 학문을 하는 바탕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세 가지의 순서로는 또 충(忠)·신(信)을 전습(傳習)의 근본으로 삼는다." 하였습니다.
○ 윤씨(尹氏)는 말하기를,"증자는 자기를 제약하기 때문에 행동하면 반드시 자기를 반성하여 잘못이 없는가 추구한다." 하였습니다.
○ 사씨(謝氏)는 말하기를, "제자(諸子)의 학문은 다 성인에게서 나왔으나, 그 뒤에 시대가 점점 멀어짐에 따라 그 참된 것을 더욱 잃어버렸는데, 다만 증자의 학문만이 안으로 용심(用心)하는데 전력하였으므로, 그 학문이 폐단 없이 전해졌으니, 이에 대한 것은 자사(子思)와 맹자(孟子)에게서 보면 잘 알 수 있다. 아, 애석하구나. 그 아름다운 말과 착한 행실이 세상에 다 전하지 못함이여, 그러나 다행히 현존하여 인멸되지 않은 것이야 배우는 이들이 마음을 다하여 공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공자는 말하기를, "삼(參)아, 나의 도(道)는 하나로써 관통하였다." 하니, 증자(曾子)는 대답하기를, "예, 그렇습니다." 하였습니다.
이 글의 주는 이미 위에서 말하였습니다.
공자가 밖으로 나가자 제자들이, "무슨 말씀입니까"하고 물으니, 증자는 말하기를, "선생님의 도는 충(忠)·서(怒)뿐〔而已矣〕이다" 하였습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자기를 다하는 것을 충이라 하고, 자기를 미루어 남에게 미쳐 나가는 것을 서(恕)라 한다. 이이의(而已矣)라는 것은 다하고 남음이 없다는 말이다. 공자의 일리(一理)는 혼연(渾然)하여 널리 응해도 꼭꼭 들어맞았는데, 이것은 비유하면, 마치 천지가 지성무식(至誠無息)하여 만물이 각각 그 마땅한 바를 얻는 것과 같다. 이 이외에는 본래 다른 이법(理法)이 없고 또 미루어볼 수도 없다. 증자는 이런 것을 알았으나 말로써 표현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배우는 이는 자기를 다하고, 자기를 미루어 남에게 미쳐 나가는 것을 가지고 이것을 밝혀서,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깨닫게 하였다. 대개 지성무식(至誠無息)이라는 것은 도(道)의 체(體)인데, 일만 가지 현상의 근본이 되는 것이며, 만물이 각각 그 마땅한 바를 얻는 것은 도의 용(用)인데, 한 근본이 일만 가지 현상으로 되는 것이다. 이것으로 본다면, 하나로써 관통한 것이라〔一以貫之〕는 실상을 가히 알 수 있다.
○ 정자는 말하기를, "성인이 사람을 가르치는 데는 각각 그 재질을 따라서 하는데 '나의 도는 하나로써 관통하였다.'는 것은 오직 증자만이 통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공자는 이렇게 말한 것이요, 증자는 또 문인에게 고하여, '선생님의 도는 충(忠)·서(恕)뿐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역시 공자가 증자에게 고한 방법과 같다." 하였습니다.
자사(子思)는 증자에게 배워서 중용(中庸)을 지었다. 〔사기(史記)〕
사기(史記)에 이르기를, "공자가 이(鯉)를 낳으니 자(字)는 백어(伯魚)이다. 백어는 공자보다 먼저 죽었는데, 아들 급(伋)을 낳으니 자(字)가 자사(子思)이다." 하였습니다.
○ 주자는 말하기를, "중용은 무엇 때문에 지었는가. 자사(子思)가 도학(道學)의 전통이 끊어질까 우려하여 지었다. 상고(上古)에 성신(聖神)이 하늘을 이어 만인의 준칙을 세우면서부터 도통의 전승이 시작되어 왔는데 그 경서(經書)에 나타난 것으로는 '진실로 그 중(中)을 잡아라.' 하여 요(堯)가 순(舜)에게 전수하였고, 인심(人心)은 오직 위태하고, 도심(道心)은 오직 미미하다. 오직 정밀히 하고 한결같이 하여야 진실로 그 중을 잡을 것이다.' 하여 순이 우(禹)에게 전수하였다. 요의 한 마디가 지극하고 극진하였는데, 순이 다시 그것에다가 세 마디를 더한 것은 요의 한 말이 반드시 이렇게 해야만 거의 실천해 낼 수 있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요·순·우는 천하의 대성(大聖)들이요, 천하로써 서로 주고받는 일은 천하의 대사이다. 천하의 대성으로서 천하의 대사를 행하되 그 수수(授受)의 즈음에 정녕코 고계(告戒)한 것은 이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 천하의 도리가 어찌 이에 더할 것이 있겠는가. 이 뒤로 성인과 성인이 서로 이어왔으니, 성탕(成湯)·문왕·무왕 같은 이의 임금 됨과 고요(皐陶)·이윤(伊尹)·부열(傅悅)·주공(周公)주268)·소공(召公)주269) 같은 이의 신하됨은 이미 다 이것으로써 도통의 전승을 접하였고, 우리 부자〔孔子〕같은 이는 비록 그만한 지위를 얻지는 못하였으나, 왕성(往聖)을 이어주고 내학(來學)을 열어 준 것은 그 공이 도리어 요·순보다 훌륭하다. 그러나 당시에 보고서 안 이는 오직 안자(顔子)·증자(曾子)의 전승한 것이 정통을 얻었고, 증자(曾子)를 거쳐 재전되어, 또 부자의 손자 자사(子思)를 얻음에 미쳐서는, 성인의 시대에서 멀어져 이단(異端)이 일어났다. 여기에 자사는 시대가 오래면 오랠수록 더욱 도통의 진수를 잃게 될까 두려워하여, 이에 요·순 이래로 전승되어 내려온 뜻을 미루어 바탕으로 하고 평일에 들었던 사부(師父)의 말씀을 가지고 질정(質正)하여 번갈아 연역(演繹)해서 이 중용의 책을 만들어 후세의 배우는 이들에게 알려 주었다." 하였습니다.
맹자는 말하기를, "요(堯)와 순(舜) 때로부터 탕왕(湯王) 때까지는 그 간오백 년인데, 우왕(禹王)이나 고요(皐陶) 같은 분은 보고서 알았고, 탕왕 같은 분은 듣고서 알았다.' 하였습니다. 〔「맹자」하동〕
조씨(趙氏:조기(趙岐))는 말하기를, "5백 년마다 성인이 나오는 것은 천도(天道)의 떳떳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역시 느리고 빠른 것이 있어 꼭 5백 년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여년(餘年)이라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 윤씨(尹氏)는 말하기를, "안다는 것은 그 도를 안다는 것을 말한다." 하였습니다.
탕왕 때부터 문왕(文王) 때까지 그간 5백여 년인데, 이윤(伊尹)과 내주(萊朱) 같은 분은 보고서 알았고, 문왕 같은 분은 듣고서 알았다.
조씨는 말하기를, 내주(萊朱)는 일설에 중훼(仲)라고도 하는데 탕왕의 좌상(左相)으로 있었다." 하였습니다.
또 문왕 때부터 공자 때까지 그 간 5백여 년인데, 태공망(太公望)과 산의생(散宜生) 같은 분은 보고서 알았고, 공자는 듣고서 알았다.
주자는 말하기를, "자공(子貢)이 '문무(文武)의 도가 아직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사람에게 있다. 어진 이는 그 큰 것을 기록하고, 어질지 못한 이는 그 작은 것을 기록하여, 문무의 도를 보유(保有)하지 않은 이가 없으니, 공자가 어찌 배우지 아니하였겠는가.' 하였으니, 이것은 소위 듣고서 안 것이다." 하였습니다.
공자 때부터 지금까지는 백여 년밖에 안 된다. 성인이 살던 세대에서 이토록 가깝고, 성인의 살던 곳에서 이토록 가까운데도 공자의 도를 아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니, 아마 앞으로는 들어서 알 사람도 없을 것이 아니겠는가.
임씨(林氏)는 말하기를, "이 말은 맹자가 지금이 공자 때에서 멀지 않고, 추(鄒) 땅과 노(魯)나라가 거리가 가깝지마는 공자의 도를 보고 아는 사람이 없으니, 앞으로 5백여 년 뒤에 또 어찌 도를 들어서 알 사람이 있겠는가 하는 말이다." 하였습니다.
○ 주자는 말하기를, "이 말은 맹자가 비록 스스로 공자의 도를 전수(傳受)하였다고는 하지 않았지마는, 후세에 마침내 그 도의 전하는 것을 잃게 될 것이라고 근심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스스로가 그 도를 얻었음을 자임〔自任〕하여 사양하지 아니한 것이 있음을 보인 것이요, 또 천리(天理)와 민리(民理: 백성들이 지켜야 할 떳떳한 도리)가 절대로 인멸 할 수 없는 것이니, 아마 앞으로 백세(百世) 뒤에는 반드시 신회(神會)하여 이것을 마음에 터득하는 이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보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 성인의 도통을 역력히 서술하여 그 결론을 맺었으니, 이것은 그 전하는 것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밝히고, 또 뒷 성인을 무궁하게 후세에 기다리는 소이(所以)로서 그 뜻이 심히 깊도다." 하였습니다.
나는 공자의 문도(門徒)가 되지는 못하였지마는 현인들을 통해서 공자의 도를 사숙(私淑)하였다.
주자는 말하기를, "사(私)는 혼자서 가만히 란 뜻이요, 숙(淑)은 선(善)이란 뜻이다. 이씨(李氏)는 말하기를, '사숙(私淑)이란 말은 방언(方言)이다' 하였다. 사람이란 것은 자사(子思)의 문도(門徒)를 말한다. 맹자가 말하기를, 내가 비록 직접 공자의 문하에서 수업을 하지는 못하였으나 그래도 그 학문을 전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그 사람들에게 공자의 도를 얻어 듣고 혼자서 가만히 몸을 착하게 하였다.' 하였으니, 대개 이것은 공자를 추존하고 자기를 겸사하는 말이다." 하였습니다.
○ 사기(史記)에 이르기를, "맹가(孟軻 : 자(字)는 자거(子車), 일설에는 자여(子與)입니다.)는 추(鄒)땅의 사람이다. 그는 자사의 문인에게 수업(受業)하였는데 도가 이미 통하자, 제 선왕(齊宣王)·양혜왕(梁惠王)을 만나 왕도(王道)를 펼쳤다. 그들은 맹자를 인견하여 말을 듣고서 현대의 실정에 너무 멀고 또 사정에 어둡다고 생각 하였다. 당시에 천하는 바야흐로 합종(合從)주270)과 연횡(連衡)에 전력을 기울여 싸움하고 치는 것을 현명한 일로 알았다. 그런데 맹가는 오로지 당(唐)·우(虞)·삼대(三代)의 제왕의 덕을 찬술하였으니, 이로써 가는 곳마다 용납되지 않았다. 물러와서 만장(萬章)의 무리들과 시경(詩經)·서경(書經)을 서술도 하고 중니(仲尼)의 뜻을 강술하여 맹자 7편을 지었다." 하였습니다.
옛날에 우(禹)는 홍수를 다스려〔抑〕서 천하를 평온하게 하였고, 주공(周公)은 이적(夷狄)을 병합〔兼〕하고 맹수를 몰아내어 백성을 편안하게 하였으며, 공자께서는 춘추(春秋)를 완성하여 난신(亂臣)·적자(賊子)가 두려워하였다.
주자는 말하기를, "억(抑)은 그치게 하는 것이요, 겸(兼)은 병합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 맹자는 말하기를, "주공이 무왕(武王)을 도와서 주(紂)를 쳐 없애고, 엄(奄)나라를 정벌한 지 3년 만에 그 임금을 주살(誅殺)하고, 비렴(飛廉)을 바다 구석으로 몰아다가 죽였으니, 나라를 멸망시킨 것이 50번이나 되는데다가 범·표범·외뿔소·코끼리 등 맹수를 멀리 쫓아버리니 천하가 크게 기뻐했다." 하였습니다.
나도 역시 사람들의 마음을 바로 잡고, 사설(邪說)을 없애고, 치우친 행동을 막고, 음탕한 말을 몰아내어 세 성인을 계승하려고 한다.
한씨(韓氏)는 말하기를, "요(堯)는 이것을 순(舜)에게 전하고, 순은 이것을 우(禹)에게 전하였으며, 우는 이것을 탕(湯)에게 전하고, 탕은 이것을 문(文)·무(武)·주공(周公)에게 전하였으며, 문·무·주공은 이것을 공자에게 전하고, 공자는 이것을 맹가에게 전하였으나, 맹가가 죽은 뒤로는 전해지지 못하였다." 하였습니다.
○ 정자는 말하기를, "중니(仲尼)는 천기(天氣)이요, 안자(顔子)는 봄의 생육하는 기상이며, 맹자는 가을에 사멸하는 기상이 아울러 보인다. 중니는 전체를 포괄하지 않는 것이 없고, 안자는 어김이 없고 어리석은 것같이 하는 학문을 후세에까지 전하시니, 자연스러운 화기(和氣)가 말없이 화하는 이요, 맹자는 그 재질을 드러냈으니, 대개 이것은 또한 시대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중니는 천지(天地)요, 안자는 화한 바람과 좋은 구름이요, 맹자는 태산의 높고 높은 기상이다. 이것은 그 말을 보면 다 알 수 있다. 중니는 자취가 없고, 안자는 조금 자취가 있으며, 맹자는 그 자취가 드러났으니 공자는 참으로 명쾌(明快)하고 안자는 참으로 개제(愷悌)하며, 맹자는 참으로 웅변(雄辯)한 이라." 하였습니다. 〔섭씨(葉氏)는 말하기를, "부자는 천명한 것이 몸에 있음이 마치 청천백일과 같은 까닭에 그 명쾌함이 지극하였고, 안자는 있어도 없는 것 같이하고, 차있어도 빈 것 같이하며, 자기를 욕하여도 용서해 주는 까닭에, 그 개제(愷悌)함이 지극하였고, 맹자는 사설(邪說)을 없애고 치우친 행동을 막고 방자한 말을 몰아냈기 때문에, 그 웅변(雄辯)이 지극하였습니다. 이 글 한 단(段)은 대성(大聖)과 대현(大賢)의 기상을 반복 형용하여 각각 그 진묘한 과에 이르렀으니, 고금을 통하여 성현에 대해 언급한 것이 이보다 더 나은 것이 없습니다. 배우는 이들은 여기에 마음을 잠기게 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도통이 전한 것은 복희씨(伏羲氏)로부터 시작하여 맹자에 와서 그치고, 드디어 전하지 않았습니다. 순경(荀卿)·모장(毛)·동중서(董仲舒)·양웅(楊雄)·제갈량(諸葛亮)·왕통(王通)·한유(韓愈)의 무리들이 입언(立言)하고 입사(立事)하여 세상을 교화하는데 보충한 것은 있었지마는, 순경과 양웅은 다 편박(偏駁)하였고, 모장은 공을 나타낸 것이 없었고, 왕통은 견해가 좁은데다 속성하려 하였으니, 다 볼 만한 것이 적었습니다. 그 중에서 오직 동중서는 정의(正誼)와 명도(明道)의 의논이 있었으며, 제갈량은 유자(儒者)의 기상이 있었으며, 한유(韓愈)는 불노(佛老)를 배척하였으니, 제자(諸子)보다는 우수합니다. 그러나 동중서는 재이설(災異說)에 흘렀고, 제갈량은 신한(申韓)의 익힘에 가까왔으며, 한유는 실천 궁행의 학에 소홀하였는데, 이것은 맹씨(孟氏)의 전통을 이어 받지 못한 까닭입니다.
◆ 다음은 끊어졌던 도통이 주자(周子)에 와서 이어지고 크게 나타난 것입니다.
○ 주무숙(周茂叔)주271)은 인품이 매우 고결하여 흉중이 쇄락(灑落)한 것이 마치 광풍제월(光風霽月)과 같다. 〔황정견(黃庭堅)의 염계(濂溪) 시(詩) 서문에 있음.〕
연평 이씨(延平李氏)는 말하기를, "이 말은 도(道) 있는 이의 기상(氣象)을 잘 형용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 염계선생의 사장(事狀)에 이르기를, "선생은 대대로 집이 도주 영도현(道州營道縣)에 있었다. 성은 주씨(周氏)이요, 이름은 돈실(惇實)인데, 뒤에 영종(英宗)의 구명(舊名)을 피하여 이름을 돈이(惇)라고 고쳤다. 박학역행(博學力行)하여 일찌기 도를 알았고, 일에 임하면 강하고 과단성이 있어서 옛 사람의 기풍이 있었으며, 정사를 하는데는 정밀하고 엄하였으며, 도리를 다하였다. 일찌기 태극도(太極圖)주272)와 역설(易說)과 역통(易通) 수십 편을 지었다." 하였습니다.
도를 잃은 지 천년 동안에 성인이 난 지 오래되어 옳은 말은 다 없어졌다. 여기에 선각자가 없다면 누가 우리를 열어 주겠는가. 글로써 말을 다하지 못하고 그림으로써 그 뜻을 다 나타내지 못한다. 풍월(風月)은 끝이 없고 뜰 앞의 풀은 번갈아 푸르니 여기에 그 기상을 보겠구나.〔주자가 지은 염계선생의 화상찬(畵像贊)입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선생은 아무에게도 배움도 없이 도체(道體)를 알아 그림을 만들고 글을 엮어서 그 요령을 끝까지 하였다. 당시에 보고서 안 사람은 정씨(程氏)였다. 정씨는 마침내 이것을 확대하고 미루어 밝혀서, 천리(天理)의 미묘한 소이(所以)와, 인륜의 현저한 소이와, 사물의 중다(衆多)한 소이와, 귀신의 유심(幽深)한 소이를 명백하게 다 일관하여 주공과 공자·맹씨의 도통을 다시 세상에 환하게 밝혔다. 뜻있는 선비가 이것을 얻어 하나하나 더듬어 토론하고 몸소 행하여 그 바른 것을 잃지 않는것을 마치 삼대 전에 나온 것과 같이하니, 아, 참으로 성하도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선생의 말에 있어서 그 높은 것은 태극(太極)주273)과 무극(無極)의 묘리에 극진하되, 그 실제는 일용의 사이를 떠나지 않고, 그 깊숙한 것은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에 대한 조화의 미묘한 곳까지 탐지하되, 그 실제는 인(仁)·의(義)·예(體)·지(智)와 강(剛)·유(柔)·선(善)·악(惡)의 사이를 떠나지 아니하니, 그 체(體)·용(用)의 일원(一源)과 현미(顯微)의 사이가 없는 것이 진한(秦漢) 이래로 이러한 이치에 도달한 자가 없으나, 그 실상은 육경(六經)과 논어(論語)·대학(大學)·중용(中庸)·맹자 7편의 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 또 말하기를, "선생은 위로 공(孟)·맹(孟)에게 천 년의 도통을 이어받고, 아래로 정씨(程氏)에게 백세의 전함을 열어 준 것은 맥락이 분명하고 규모가 원대하다. 제유(諸儒)들의 전수한 차례를 두루 뽑아, 처음으로 열어 시작하고 옛과 같이 일으켜 회복하며 이단(異端)의 학문을 널리 쓸어버리고 평정한 공효를 논한다면 이보다 더 높은 이가 없다." 하였습니다.
하남(河南) 정씨(程氏) 두 부자〔夫子: 여기서는 명도(明道) 정호(程顥)와 이천(伊川) 정이(程) 두 형제에 대한 존칭〕가 출현하여 맹씨의 전함을 이어 받았다. 〔주자(朱子) 대학 서(大學序)〕
주자는 말하기를, "왕단명(汪端明)이 일찌기, '두 정자(程子)의 학문이 오로지 주(周)선생에게서 이어 받은 것은 아니다.' 한 말은 대개 통서(通書)를 사람들이 소홀하게 여겨 일찌기 이것을 연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지금 통서를 보니, 다 이것은 태극도를 부연하여 밝힌 것인데, 글이 비록 많지는 않으나 강령을 이미 다하였으니, 두 정자는 대개 그의 전함을 얻은 것이며, 단지 이정(二程)의 공업(功業)이 넓을 뿐이다." 하였습니다.
온화〔揚休〕하고 엄숙〔山立〕하며 옥같은 빛이요, 금 같은 소리로다. 원기(元氣)가 모임이여, 혼연히 자연으로 이루었도다. 좋은 날씨와 상서로운 구름이요, 화한 바람과 감미로운 비로다. 용덕(龍德)이 정히 중(中)에 나타나니 은택이 넓도다. 〔주자(朱子)의 명도(明道) 선생의 화상찬(畵像贊)〕
명도(明道) 선생의 행장〔行狀: 이천(伊川)선생이 지은 것〕에 이르기를, "선생의 이름은 호(顥)요, 자(字)는 백순(伯淳)인데, 하남인(河南人)이다. 자질(資質)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고 도(道)를 따라 공부를 해서 정금(精金)과 같이 순수하였고, 양옥(良玉)같이 부드러웠다. 관대(寬大)하되 절제가 있었으며, 화락하되 음란한 데 흐르지 않았다. 충성은 금석(金石)을 꿰뚫었고 효제(孝悌)는 신명에 통하였다. 그 얼굴빛은 봄볕처럼 따뜻하게 사물(事物)을 접하였고, 사람에 대한 말씨는 마치 내리는 비처럼 부드럽게 들렸다. 가슴에 품은 뜻이 깊어서 사물을 환히 보았으니, 그 쌓인 것을 헤아리면 마치 넓고 넓은 바다처럼 가없는 것 같았고, 그 덕을 다 표현하려면 아름다운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선생이 몸소 행한 것을 보면, 안으로는 경(敬)으로 주재하였고, 밖으로는 서(恕)를 행하여, 남의 착한 일을 보면 마치 자기가 한 것처럼 좋아하였으며,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은 남에게도 베풀지 아니하였다. 넓은 곳에 거하고 대도(大道)를 행하였으며, 말에는 실상〔物〕이 있었고, 행동은 떳떳하였다. 선생이 공부한 것을 보면 5·6세 때부터 여남(汝南)의 주무숙(周茂叔)이 도를 논하는 말을 듣고는 드디어 과거의 업을 싫어하고 구도(求道)의 뜻이 있었는데, 도의 요령은 알지 못하여 제가의 학문을 널리 탐구하고 노석(老釋:노장학과 교학)에 출입한 지 수십 년에 다시 6경에서 구하여 도를 얻었다. 〔주자는 말하기를, "돌아와 6경에 구하여 도를 얻었다는 것은 특별히 그 공용(功用)이 크고 온전하다는 것을 말한 것이요, 명도 선생이학문에 들어간 곳이 염계(濂溪)로 부터라는 것은 속일 수 없는 일이다." 하였습니다〕모든 사물에 대해서 밝았고, 인륜을 살펴서 성(性)을 다하고 명(命)에 이르는 것은 반드시 효제에 근본한다는 것을 알았으며, 궁신지화(窮神知化)가 예악에 의해 통하는 것을 알았다. 사이비(似而非)한 이단적(異端的)인 의논을 분별하였고, 백대 동안 밝히지 못했던 의혹을 해명하였으니, 진한(秦漢) 이래로 아직 이러한 바른 의논에 도달한 이는 없었다. 선생은 '맹자가 몰한 뒤에 성학(聖學)이 전하지 않았다.'하여 사문(斯文)을 다시 일으키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하였으며, 나아가서는 세상 사람들을 깨닫게 하려 하였고 물러가서는 경전(經典)의 뜻을 밝히려 하였는데,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떠나 다 미치지 못하고 말았다. 선생이 정묘하게 변석(辨析)한 것이 지금 세상에 조금 보이는 것은 그에게 배운 학자들이 전한 것이다. 선생의 문하에서 배운 이가 많았는데, 선생의 말이 평이하여 알기 쉬워서, 어진이나 어리석은 이 할 것 없이, 다 그 유익한 것을 얻었으니, 이것은 마치 많은 무리가 목이 말라 강물을 마시는데 각각 자기 양대로 채울 수 있는 것과 같았다. 선생이 사람을 가르치는 데는, 치지(致知)로부터 지지(知止)에 이르기까지, 성의(誠意)로부터 평천하(平天下)에 이르기까지 쇄소응대(灑掃應對:물 뿌려 쓸고 응하고 대하는 것)로부터 궁리진성(窮理盡性:이치를 궁구하고 본성(本性)을 다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정연히 질서가 있었다. 세상의 학자들이 인간에 가까운 것은 버리고 요원한 것을 추구(追求)하며, 아래에서 공연히 높은 것만 엿보고 경솔하게 스스로를 크게 여겨 마침내 아무 소득도 없게 되는 것을 병통으로 여겼다. 선생은 사물을 접하면 분별해서 환하게 잘 알았고, 남도 느끼도록 해서 통하게 해 주었다. 사람들을 가르치면 그들이 쉽게 따랐고 성을 내도 그들이 원망하지 않았으니, 어진 이·어리석은 이, 착한 이·악한 이 할 것 없이 모두 그 심성(心性)을 받아서 교활하고 거짓된 자도 정성을 바쳤고, 포악하고 거만한 자도 공경을 다하였으며, 그 명성을 듣는 이는 진실로 열복하고, 그 덕을 보는 이는 마음으로 취하였으며, 비록 소인으로서 이해(利害)를 추향(趨向)하는 자라도 눈앞에서는 배척하였으나 물러가 혼자서 사사로히 반성해 보고는 선생을 군자라고 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선생의 정사(政事)한 것을 보면, 악을 다스리는 데는 관대하게 하였으며 번잡한데 처하여도 여유가 있었다. 일찍이 번잡한 법령(法令)에 당하여도, 군중을 좇아 조문(條文)에 응하여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으며, 사람들은 다 구애(拘) 받는 것을 병폐라 여겨도 선생은 여유 있는 마음으로 작연(綽然)히 이에 처하였고, 뭇 사람이 심히 어렵다고 근심하는 것도 선생은 패연(沛然)히 해치웠으며, 비록 창졸한 일을 당하여도 조금도 성색(聲色)을 변하지 않았다. 선생이 만든 강조 법도(綱條法度)는 사람들이 본받아 할 수 있으나 인도하면 따랐고, 움직이면 화하였으며, 물(物)을 구하지 아니해도 물이 응하였고, 믿음을 베풀지 아니해도 백성들이 믿었던 것은 보통 사람들은 미칠 수 없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 묘표(墓表)에 이르기를, "노국태사〔潞國太師:문언박(文彦博)입니다〕가 그 묘비의 제(題)를 써서 명도(明道)선생이라 하였고, 아우 이( )는 이에 서문을 써 말하기를, "주공(周公)이 세상을 떠나자 성인의 도가 행하지 아니하고, 맹자가 돌아가자 성인의 학이 전하지 아니하였다. 도가 행하지 않으면 백세토록 세상이 잘 다스려지지 않으며, 학이 전하지 아니하면 천 년토록 세상에는 진유(眞儒)가 없어진다. 세상이 잘 다스려지지 않는 것은 그나마 선비가 앞 현인을 통해 그 잘 다스리는 도를 사숙(私淑)하여 후세에 전할 수 있지마는, 세상에 진유가 없으면 천하 사람들이 아무 것도 몰라서 자기의 갈 바를 알지 못하며, 인욕(人欲)이 방자해지고 천리(天理)가 인멸해질 것이다. 선생은 1천 4백년 뒤에 나서, 전하지 못하였던 학문을 전성(前聖)이 남긴 경서(經書)에서 얻어 이 도로써 백성을 깨우치려고 뜻하였다. 그리하여 이단(異端)을 분별하여 배척하고 사설(邪說)을 막아서 성인의 도가 환하게 다시 세상에 밝게 하였으니, 대개 맹자 뒤로 진유는 오직 이 한 분뿐이다. 그러나 배우는 이들이 도(道)에 대하여 그 지향할 바를 알지 못한다면 누가 이 분의 공을 알겠으며, 이 분의 학문이 어디에까지 도달하였는가를 알지 못한다면 누가 이 이름이 실정에 합당하다는 것을 알겠는가." 하였습니다.
선생은 규〔規: 둥근 원을 그리는 기구, 즉 콤파스〕처럼 둥글고, 구〔矩: 직각 자〕처럼 모나며, 승〔繩: 먹줄〕처럼 곧고, 준〔準: 평행 저울〕처럼 평평하니 진실로 군자이구나. 참으로 크게 이루었도다. 비단 같은 문장이요, 숙속〔菽粟: 콩과 좁쌀〕 같은 맛이로다. 이 덕을 아는 이가 드문데 누가 그 진귀한 것을 알겠는가. 〔주자(朱子)가 지은 이천(伊川)선생의 화상찬(畵像贊)〕
이천선생의 연보(年譜)에 이르기를, "선생의 이름은 이()요, 자는 정숙(正叔)인데, 명도선생의 아우다. 어릴 때부터 식견이 높아서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더니, 4·5세가 되면서 명도선생과 같이 주무숙선생에게 수학하고, 18세에 나라에 글을 올려 인종(仁宗)에게 왕도를 행하고 생령(生靈)을 돌보며 세속의 속된 말을 물리치고, 비상한 공을 세우기를 권유하였으나, 인종이 듣지 않았다. 철종 초에 사마광(司馬光)·여공저(呂公著)가 공동으로 올린 차자(箚子)에, '하남(河南) 처사 정이(程)가 학문에 힘쓰고 옛 도를 좋아하며, 가난에 안분(安分)하고 절개를 지키며, 말은 언제나 충신(忠信)을 말하고 행동은 반드시 예의를 좇습니다. 나이 50이 넘도록 벼슬에 나아가기를 구하지 아니하니 참으로 이는 진실한 선비의 높은 자취〔高蹈〕이며, 성세(聖世)의 드러나지 않은 백성입니다.' 하였고, 간관(諫官) 주광정(朱光庭)은 말하기를, '이()는 도덕을 순수하게 갖추었고, 학문이 넓고 깊으며 재질이 굳세고 발라 중립 불의(中立不倚)의 기풍이 있고 알고 생각함이 명철하여 거의 신묘한 곳에까지 이르며, 언행이 서로 합하여 선택할 것이 없고, 인의(仁義)가 몸에 있어도 스스로 자랑하지 않습니다.' 하였으며, 또 그는, 이()는 선왕의 심오(深奧)한 도리를 연구하고, 당세의 시무(時務)에 통달하였으니, 이는 바로 천민(天民)의 선각자이요, 성대의 진실한 선비입니다.' 하였으며, 또, '천지를 경위(經緯)하는 재주가 있고 예악을 제작하는 학식을 갖추었으며, 도를 말하면 삼재(三才:천天·지地·인人)를 관철하여 한 오라기의 틈도 없고, 덕을 말하면 뭇 아름다움을 다 포괄하여 하나의 선이라도 빠지지 않으며, 학을 말하면 고금을 널리 통하여 하나라도 알지 못하는 것이 없고, 재주를 말하면 개물성무(開物成務:만물의 이치를 개통하고 천하의 임무를 성취하는 것)하여 하나의 이치라도 거느리지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성인의 도가 여기에 전하고 있으니, 하물며 천자께서 진학의 처음을 당하여 만약 진실로 선비로 하여금 경연(經筵)을 전담하게 한다면 어찌 성하지 않겠습니까.' " 하였습니다.
○ 송사(宋史)에 이르기를, "이()는 글에 대해서는 읽지 않은 것이 없고, 그 학문은 성에 근본 하여 대학·논어·맹자·중용을 목표로 삼아 6경에 통달하였고, 동지(動止)·어묵(語默)은 한결같이 성인을 스승으로 하여 성인에 이르지 않으면 그치지 않았다. 일찍이 그는 이르기를, '지금 농부들이 혹독한 추위와 무더운 장마 비에도 깊이 갈고 김매어서 오곡을 파종한 것을 내가 얻어먹고 있으며, 기예(技藝)가 있는 백공(百工)들이 기물을 만든 것을 내가 얻어 사용하고 있으며, 투구 쓴 군사들이 갑옷을 입고 병기를 들어서 강토를 방위하기 때문에 내가 편안히 살고 있는데, 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공택(功澤)도 미치지 못하고 세월만 허랑하게 보내고 있으니, 천지간에 하나의 좀〔〕이다. 오직 성인의 남긴 글을 엮어서 이것을 세상에 전한다면 그래도 조금의 도움이 될 것이다.' 하고는, 역전(易傳)과 춘추전(春秋傳)을 지었다. 그는 평생 동안 사람을 가르치는데 게으르지 아니한 까닭에 배우는 사람들이 그 문하에서 가장 많이 나왔다. 그리하여, 그의 학문의 연원(淵源)이 점점 배어서 다 명사가 되었는데, 유현(劉絢)·이유(李)·사량좌(謝良佐 )·유작(遊酢)·장역(張繹)·소병(蘇昞)·여대림(呂大臨)·여대균(呂大鈞)·윤순(尹焞)·양시(楊時) 등은 덕이 성한 이로서 저명하였다." 하였습니다.
횡거(橫渠)주274)의 학문은 고심하여 얻은 것이므로 이것은 바로 치곡(致曲:곡진히 이룬 것)이다. 〔주자 어록〕
주자는 말하기를, "횡거와 정자(程子)를 비교하면, 마치 백이(伯夷)·이윤(伊尹)을 공자에 비유하는 것과 같다." 하였습니다.
초년에는 손·오(孫吳)에서 빠져나오고, 만년에는 노·불(老佛)에서 도망쳤다. 용감하게 고비(皐比 : 호랑이 가죽. 여기에서는 종전에 노불 계통의 스승을 가리킴)를 걷어치우고 일변하여 도에 이르렀다. 정밀하게 생각하고, 힘써 실천하며, 신묘하게 깨달은 것을 빨리 표현하였는데, 서명(西銘)의 훈계가 우리에게 광거(廣居:맹자에 仁을 광거廣居라 함)를 보였다. 〔주자(朱子)가 지은 횡거(橫渠)선생의 화상찬(畵像贊)에 있습니다〕
송사(宋史)에 이르기를, "장재(張載)는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운암령(雲巖令)이 되어서 근본을 독실히 하고, 풍속을 착하게 하는 것을 먼저 힘썼다. 임금〔신종(神宗) 입니다〕이 처음에 즉위하여, 여러 가지 제도를 일신하고 재주 있고 명철한 선비를 얻으려고 꾀하였다. 여공저(呂公著)가 장재를 옛 도학이 있다고 추천하므로, 임금이 인견(引見)하여 치도(治道)를 물었는데, 장재가 대답하기를, '정치를 하는데 3대를 본받지 않는 자는 마침내 도에 구차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기뻐하여 숭문 교서(崇文校書)로 삼았다. 왕안석(王安石)과 같이 신법(新法)을 논의하여 이에 의견이 맞지 않았으므로 병을 핑계하고 남산(南山) 아래에 은거하였다. 그의 학문은 예를 존중하고 덕을 귀히 여기며, 낙천안명(樂天安命)하여 역(易)을 종(宗)으로 삼고, 중용(中庸)을 체(體)로 삼았으며, 공(孔)·맹(孟)을 법으로 삼아 괴망(怪妄)한 것을 물리치고 귀신을 분변하였다. 그의 가례(家禮)의 혼상장제(昏喪葬祭)는 다 선왕의 뜻을 좇아 쓰되 지금의 예를 참작하였다. 저서로는 정몽(正蒙)과 서동명(西東銘)이 세상에 행한다." 하였습니다. 〔어떤 이가 정자(程子)에게 서명(西銘)은 어떠한가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이것이 횡거(橫氣)의 글 중에 가장 순수한 것이다." 하자, "그 뜻대로 다 확충하면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성인(聖人)이 된다." 하자 "횡거가 능히 확충하였습니까." 하니, "말이 여러 가지다. 유덕(有德)한 말도 있고 조도(造道)한 말도 있다. 유덕한 말이란 것은 자기의 일을 말한 것이니, 성인이 성인의 일을 말하는 것이요, 조도한 말이란 것은 그 지혜가 족히 이것을 아는 것이니, 현인(賢人)이 성인의 일을 말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 행장에〔여여숙(呂與叔)이 찬하였습니다〕 말하기를, "선생의 휘(諱)는 재(載)요, 자는 자후(子厚)인데, 대대로 대량(大梁)에서 살았다. 강정(康定)이 용병(用兵)할 때에 선생의 나이 18세였는데, 개연히 공명으로써 자허(自許)하여 글을 올려 범문 정공〔范文正公 : 인종仁宗〕을 뵈오니, 공이 그 원기(遠器)인 것을 알고 성취시키고자 해서 이에 선생을 책망하여 말하기를, '유자(儒者)는 스스로 명교(名敎)가 있는데 어찌 병사를 일삼는가.' 하고, 중용(中庸)을 읽기를 권하였다. 선생이 중용을 읽고 비록 이것을 아꼈으나 그래도 부족하다고 여기어, 또 노불(老佛)의 책을 탐구하여 여러 해 만에 그 학설을 다 연구하고는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음을 알고, 다시 돌아와 6경에서 도를 구하였다. 가우〔嘉祐 :인종(仁宗)의 연호이다〕 초에 정백순(程伯淳)·정정숙(程正叔)을 경사(京師)에서 보고 같이 도학의 요령을 논하고, 선생은 깨달은 바 있어서 환연(渙然)히 자신을 가지고 말하기를, '우리 도가 스스로 족한데 어찌 방구〔旁求 : 옆으로 구하는 것〕를 일삼겠는가.' 하고는, 이로부터 이학(異學)을 다 버리고 순수하게 되었다.〔송사(宋史)에 이르기를, "장재(張載)가 일찌기 호피에 앉아 역(易)을 강하니, 듣고 좇는 자가 심히 많았다. 하루 저녁에는 정호(程顥)와 정이(程)가 와서 같이 역(易)을 논하였는데, 그는 그 다음날 사람들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요즈음 보니 두 정자는 역도(易道)에 심히 밝아 나의 미칠 바가 아니더라. 너희들은 그분 들을 스승으로 삼아 배우는 것이 가할 것이다.' 하고는, 곧 자리를 걷어버리고 강의를 폐하였다." 하였습니다.〕선생은 만년에 숭문(崇文) 벼슬로부터 병을 핑계하고 서쪽으로 횡거에 돌아와서 날마다 종일토록 한 방에 꿇어 앉아 책을 좌우에 두고, 구부려서 읽고 우러러서 생각하여 터득하는 대로 기록하였다. 때로는 밤중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앉아서 촛불을 밝히고 이것을 썼는데, 그 도를 지향하고 생각하는 것이 정밀하여 조금도 쉬지 않았으며, 또 조금도 잊지 않았다. 배우는 이들이 물을 때는 항상 예를 알고 성(性)을 이루어서 기질(氣質)을 변화시키는 도로써 말해 주고, 또 배움이란 반드시 성인이 되어야만 그만둔다고 하였으니 듣는 이가 감동하여 정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선생은 일찍이 문인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학문이 이미 마음으로 얻어졌다면, 그 사명(辭命)을 잘 닦아서 사명에 어긋남이 없어야만 일을 잘 결단할 수 있고, 일을 결단하는데 실수가 없으면, 내가 이에 패연(沛然)히 되는데, 정의(精義)가 신묘해지는 것은 미리 준비하는 것뿐이다.' 하였다. 선생은 기질이 강의(剛毅)하고 덕이 성하며 용모가 위엄스러우나 사람과 더불어 거할 때는 오래될수록 점점 더 친해진다. 그 치가(治家)와 접물(接物)하는 대요는 자기 몸을 바르게 함으로써 남을 감동하게 하고, 남이 이것을 믿지 않을 때도 스스로 반궁(反躬)하여 자기를 다스릴 뿐, 남에게는 말하지 아니했다. 비록 사람이 깨닫지 못하는 것이 있더라도 편안히 행하면서 아무 후회를 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아는 이나 모르는 이나 할 것 없이 그 명성을 듣고 두려워하여,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옳지 않은 일은 선생에게 언급하지 못하였다."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강절(康節)주275) 소씨(邵氏)는 내성 외왕(內聖外王:안으로는 성인이요 밖으로는 왕이란 뜻인데, 즉 유교의 수기〔(修己) 치인(治人)이다〕)의 학문은 안이(安易)하게 이루어졌으나, 선현들이 일찌기 그를 도통의 정맥으로 허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감히 여기에 싣지 못했습니다. 정문(程門)의 제자들 가운데는 사도(斯道)에 보탬이 된 사람은 많았지마는, 도를 전하는 임무를 질 수 있는 사람은 역시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두 정자(程子)와 장횡거 뒤에는 주자(朱子)로써 이었습니다. 그러나 단지 귀산(龜山)이 정자에게 수업하였고, 예장(豫章:나중소(羅仲素))은 귀산에게 수업하였으며, 연평(延平)은 예장에게 수학하였는데 이들 세분 선생은 업은 비록 넓지 않다 하더라도, 이 분들은 주자의 연원이 되는 까닭에, 간략하게 그 행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귀산(龜山)선생 양시(楊時)의 자는 중립(中立)인데, 천성이 인후(仁厚)하고 관대하여, 모든 것을 잘 용납하며, 남보다 별다른 초세속적인 행동을 해서 세상의 명예를 구하는 일이 없었으며, 사람들과 사귐에는 시종 그 행동이 한결 같았습니다. 또 효도가 지극하여 어려서 모친을 여의었을 때 그 슬퍼하는 것이 성인(成人)과 같았습니다. 하남(河南)의 두 정선생의 도를 듣고 곧 가서 종학(從學)하였는데, 이 때 두 선생에게 종학하는 학자가 심히 많았지만, 선생만이 유독 여러 해 경서(經書)에 파고 들어, 스승의 학설을 널리 미루어 궁구하고 탐구하여 힘껏 찾아서 그 취의가 극진하여, 함축성(涵蓄性)이 있고 광대(廣大)하였으나, 감히 경솔히 스스로 방자하지 않았습니다.
○ 예장(豫章)선생 나종언(羅從彦)의 자는 중소(仲素)인데, 어릴 때부터 남보다 총명하여 언어 문자의 학문을 하지 않았으며, 장성해서는 견고 각려(堅苦刻)하여 뜻을 독실히 하고 도를 구하였습니다. 처음에 오국화(吳國華)에 종학하다가 조금 뒤에 귀산선생이 이락(伊洛)의 학을 〔정이천의 학문을 말합니다.〕얻었음을 듣고 가서 배웠는데, 이로부터 지난 날 배운 학문이 그르다는 것을 알고 3일 간이나 놀래어 등에 땀을 흘리면서 '거의 일생을 그르칠 뻔하였다.'고 하며 탄식하였습니다. 귀산이 도를 동남으로 창도하니 따르는 자가 천여 명이나 되었으나, 깊이 생각하고 힘써 행하되 무거운 짐을 지고 극진한 데 나아간 이는 선생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 연평(延平)선생 이동(李)의 자는 원중(愿中)인데 나면서부터 뛰어난 천품을 가졌고 어릴 때부터 영리하고 민첩하였습니다. 조금 자라니 효우(孝友)가 근독하였습니다. 같은 고을 사람인 나중소(羅仲素)선생이 이락(伊洛)의 학을 얻었음을 듣고 가서 배웠습니다. 나공(羅公)은 맑은 절개로써 세속과 인연을 끊었으므로 마을사람들이 알지 못하였는데, 선생이 종유하여 업을 받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비난하였습니다. 선생은 들은 체하지 않고 이에 종학한 지 수년에, 특히 춘추(春秋)·중용(中庸)·논어·맹자의 설을 배워서 조용히 완미하여 이것을 마음으로 체득해서 그가 전하는 심오한 뜻을 다 얻었습니다. 나공은 좀처럼 남을 칭찬하지 않았는데 선생만은 심히 칭찬하였습니다. 선생은 물러나와 산전(山田)에 은거하여 초옥(草屋)과 산수(山水)간에 살면서 세고(世故)를 사절한 지 40여 년 동안에 곤궁하여 끼니가 다 떨어져도 기꺼이 스스로 즐겼습니다. 선생은 천품이 굳세고 특이하여 기질이 호매하였으나 수양이 완수(完粹)하여 모난 데가 없었습니다. 가을달 같이 맑고 깨끗하여 한 점의 티도 없어 그 정순(精純)한 기질이 얼굴에 달하여, 안색이 온화하고 말이 엄정하였으며, 정신이 안정되고 기운이 화하였으며, 어묵동정(語默動靜)이 바르고 상세하였으며, 한가하고 태연하였습니다. 젊은 나이에 도를 듣고 초연히 벼슬을 단념하고 멀리 숨었기에 마치 당세에 아무 뜻이 없는 것 같았으나, 시국을 근심하여 일을 논함에는 그 사람을 감격하게 움직였고, 치도를 말함에는 반드시 천리를 밝히고 인심을 바르게 하며, 절의를 숭상하고 염치를 힘쓰는 것을 먼저 하여 처음과 끝을 구비하였으니, 이 점은 가히 들어서 행할 만한 것이었으며, 공연히 말만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방자(李方子)가 주자를 칭찬하여 말하기를, "공(孔)·맹(孟) 이래로 박문약례(博文約禮)가 그 극진한 데 이른 이는 선생 한 사람뿐이다." 하였습니다. 〔이락연원속록(伊洛淵源續錄)〕
주자 행장〔면재 황씨(勉齋黃氏)가 지었습니다〕에 말하기를, "선생의 성은 주씨(朱氏)요, 이름은 희(熹)이며, 자는 중회(仲晦)이다. 주씨는 무원(源)땅의 드러난 성인데 선비로써 이름 있는 집이요, 대대로 위인이 있었다. 이부공(吏部公: 주자의 부친. 이름은 송(松)입니다)은 문장과 행의(行義)가 학자의 사표가 되었는데, 호는 위재(韋齋)선생이다. 주자는 어릴 때 영리하고 민첩하며 장중하였다. 스승에게 나아가 배우는데 효경을 가르쳐주니, 한 번 보고는 덮고 그 위에 글을 쓰기를, '이와 같이 아니하면 사람이 아니다.' 하였다. 일찌기 여러 아이들과 놀다가 모래 위에 단정히 앉아 손가락으로 모래를 긋는데 보니, 팔괘(八卦)였다. 조금 자라서는 뜻을 성현의 학문에 두고 널리 경전의 뜻을 구하고 두루 당세의 유식한 선비를 교우하였다. 연평(延平) 이선생은 위재와 동문의 친구였는데, 선생은 연평에게 배우기 위해 수백 리를 멀다고 여기지 아니하고 걸어 다니면서 종학하였으니, 이로부터 여러 해 정밀히 생각하고 체험해 배워서, 조예(造詣)가 더욱 깊어졌다. 선생이 공부하는 것을 보면 궁리(窮理)하여 치지(致知)하고, 반궁(反躬)하여 실천(實踐)하되 거경(居敬)으로 처음과 끝을 이루었다. 이르기를, '치지를 경으로 하지 아니하면 의혹에 빠져 분란이 생겨 의리로 돌아가는 것을 살피지 못하고, 궁행을 경으로 하지 아니하면 태만하고 행동에 절제가 없어서 의리의 실상을 이루지 못한다.'하여 제장정일(劑莊靜一)한 가운데 이 마음을 보존하고, 학문을 사변(思辨)할 즈음에 이 이치를 궁구하였다. 다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소당연과 바뀔 수 없는 소이연을 알았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데서 경계하고 두려워하여 더욱 엄숙하고 더욱 공경하였다. 은미하게 그윽히 홀로 있을 즈음에 반성하고 살피어 더욱 정일하고 엄밀하였으며, 생각이 일어나지 아니하되 지각(知覺)은 어둡지 아니하고, 사물에 이미 접하였으되 품위와 절도가 어긋나지 아니하였다. 사사로운 인욕(人欲)을 용납하지 아니하였고, 천리(天理) 바른 것을 온전하게 하여 편견(偏見)을 불안 해 하였으며, 작은 것을 이루는데 조급하지 아니하였으니, 도의 정통이 여기에 있었다. 그 도에는 태극(太極)에서 음양이 나누어지고, 음양에서 오행(五行)이 갖추어졌다. 하늘이 부여한 것은 명(命)이요, 사람이 부여 받은 것은 성(性)이다. 사물에 감동되는 것은 정(情)이요, 성정을 통괄하는 것은 마음이다. 사람에게 구하면 사람의 이치가 자기와 다른 것이 없고, 물(物)에 참조하면 물의 이치가 사람과 다른 것이 없어서 분석하면 지극히 정밀하여 혼란이 없고, 합하면 지극히 커서 남김이 없었다. 선생의 도에 대해 말한 것은 천지에 세워 보아도 패역(悖逆)하지 아니하고, 성현에 대조해 보아도 의심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그 자신의 덕을 얻어서 한 마음으로써 조화의 원리를 궁구하고 성정(性情)의 묘리를 다하여 성현의 심오한 뜻에 통달하였으며, 한 몸으로써 천지의 운행을 체득하고 사물의 이치를 갖추어, 강상(綱常)의 책무를 다하였다. 그리고 총명(聰明)은 그 세미(細微)한 것을 살폈고, 그 강단(剛斷)은 무거운 책무를 맡았으며, 넓은〔弘〕뜻은 그 광대한 것을 이루었고, 굳센〔毅〕뜻은 그 떳떳한〔常〕것을 극진히 하였다. 그 마음은 비워서 고요하였고, 그 발(發)하는 데는 과감하고 확실하였다. 그 쓰는 데 있어서는 일에 응하고 물(物 )에 접하여서 궁하지 아니하였고, 그 지키는 데 있어서는 변고를 지나고 험난한 것을 밟아도 바뀌지 아니하였다. 본말(本末)과 정추(精粗)를 그 잃는 것을 보지 못하였고, 표리(表裏)와 시종(始終)이 달라지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수양(修養)을 깊이 이루고 두텁게 싸았으되 긍지(矜持)는 순수하게 익었고 위엄은 화평하여서, 마음은 잡아주지 않아도 존(存)하고, 의리는 찾지 않아도 정(精)하였다. 그런데 선생은 세월이 한도가 있어서 의리를 다 궁구할 수 없다하여 항상 겸연(慊然)히 부족하게 여겼다. 대체로 날로 새롭고 새로운 것이 있어서 스스로 그만둘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뒤 학자들이 모방하거나 의논해 볼 수 없다.
그 볼 만한 행실로는, 몸을 닦는 데는 그 모습이 장엄하고 그 말이 엄정하였으며, 그 행동은 여유가 있고 공손하였으며, 그 앉은 모습은 단정하고 곧았으며, 한가한 사이에는 밝기 전에 일어나 심의(深衣)와 복건(幅巾)과 모난 신〔方履〕을 신고 가묘에 가서 배례하여 선성(先聖)에까지 미쳤으며, 물러나서는 서재에 앉아 책상을 반드시 바르게 놓고 서적과 기물(器物)을 반드시 정리하였으며, 음식을 먹을 때는 국과 밥을 놓는 위치가 정해져 있었고, 수저를 들고 놓는 데도 정한 곳이 있었으며, 피곤해서 쉴때는 눈을 감고 단정히 앉아서 쉬다가, 일어나면 몸을 바르게 하고 서서히 거닐었다. 밤중이라도 자다가 깨면 이불을 안고 앉아서 간혹 아침이 되도록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 거동이 규칙적인 것은 소시 때부터 노경에 이를 때까지, 추울 때나 더울 때나, 역경에 이르렀을 때도 잠간동안이라도 조금도 규칙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집에서 행하는 것으로는 어버이를 봉양하여 효도를 극진히 하였고 아랫사람을 자애로써 극진히 어루만졌으며 집안에서는 안과 밖의 분간이 엄격하였으되 은의(恩義)가 두터워 화락하였다. 제사를 지낼 때는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반드시 정성껏 공경하되 조금이라도 예에 맞지 않으면 종일토록 즐거워하지 아니하였고, 제사가 끝나도록 예에 어긋남이 없으면 유연(油然)히 기뻐하였다. 상사(喪事)에는 슬퍼하고 통곡하였으며, 음식이나 상복은 각각 그 정(情)을 다하였고, 빈객이 왕래할 때는 가정의 형편에 맞도록 대접하되 항상 그 기쁨을 다하였으며, 친한 사이에는 비록 멀리 있어도 반드시 그 사랑을 다하였고, 향려(鄕閭)에서는 비록 미천한 이라도 반드시 공손하게 하였다. 그래서 길흉·경조의 일에는 예에 빠진 일이 없었으며, 주휼문유(問遺:가난한 사람이나 가엾은 사람을 구하고 동정하는 것을 주휼이라 하고, 안부를 묻고 물건을 보내고 하는 것을 문유(文遺)라고 한다.)하는 일에도 은혜가 빠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자신의 생활로는, 옷은 몸을 가리울 정도였고, 음식은 배만 채울 정도였으며, 거처는 비바람을 막을 정도로서 다른 사람은 견딜 수 없었으나 여유가 있어 하였다. 그가 조처한 사업으로는 주현(州縣)에서의 시설〔施設〕과 조정에서의 언론(言論)에서, 경륜(經綸)과, 규획(規劃)이 정대하고 위대한 것을, 가히 볼 수 있다. 벼슬에 나아가 비록 당대에 도를 행하지는 못하였으나, 물러나서 밝힌 도는 족히 만대에 전할 수 있었다. 선생은 이르기를, '성현들이 도학을 전한 것이 책에 산재(散在)되어 있는데 성현의 경훈(經訓)이 밝혀지지 않았으니, 도학의 정통이 비로소 어두어 졌다.' 하면서 정력을 다하여 성현의 경훈을 깊이 궁구하였다. 그 깊은 것을 탐구하고 은미한 것을 찾아서 그 뜻을 남김없이 발현하였다. 선생이 사람을 가르치는 데는 대학·논어·맹자·중용의 순서로써 도에 들어갔으며, 글을 읽는 데는 음운(音韻)과 해석으로 변파하게 하였고, 그 장구(章句)를 바르게 하였으며, 말을 완미하게 하여 뜻을 구하되 정밀하게 연구하게 하였다. 그리고 알기 어려운 곳은 생각을 오래하여 궁구하고, 심기(心氣)를 평이하게 하여 스스로 얻기를 기다리게 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자기를 위하여 실상에 힘쓰고 의(義 )와 이(利)를 분별할 것이며, 자기를 속이지 말고 홀로 있을 때를 경계하라.'고 재삼 말하였다."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공자는 모든 성인들을 종합하여 이를 대성하였고 주자는 모든 현인들을 종합하여 이를 대성하였다고 봅니다. 성인은 나면서부터 알아서 안이하게 행하여 혼연히 아무 행적이 없기 때문에, 갑자기 배울 수가 없습니다. 오직 주자는 공부를 쌓아서 취할 모범이기 때문에, 먼저 주자를 배워야만 공자를 배울 수 있으므로 여기에, 행장(行狀)을 상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 명도(明道)의 행장을 보면 자품이 고명한 것을 상상해 볼 수 있고, 주자의 행장을 보면 공부의 정밀한 것을 깊이 체찰할 수 있습니다.
공자 이후에는 증자(曾子)와 자사(子思)가 그 심미(深微)한 것을 이었는데 맹자에 이르러 비로소 환하게 드러났으며, 맹자 이후에는 주자(周子)·정자(程子)·장자(張子)가 그 끊어진 학통(學統)을 이었는데 선생에 이르러 비로소 환하게 드러났다. 행장(行狀)중의 말
면재 황씨(勉齋黃氏)는 말하기를, "천여 년 동안에 공·맹의 학도가 이도를 미루어 밝힌 것이 이미 불에 타버리고, 남은 것도 산산이 흩어지고 쪼개졌으며, 구멍이 뚫어져 미묘한 말이 거의 끊어졌다. 주자(朱子)와 정자·장자가 사문이 인멸된 나머지 인심이 좀먹고 무너진 뒤에 우뚝 일어나서 이것을 부지식립(扶持植立)하였으니, 그 공이 위대하나, 이로부터 백년이 못되어 회박(晦駁)이 더욱 심하였다. 선생이 나와서 비로소 주(周)나라 이래로 성현이 서로 전하던 도가 하루 아침에 활연(豁然)히 밝은 태양이 중천(中天)에 뜬 것 같아서 환하게 드러났고,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배우는 이로서 그 글을 전하고 그 도를 믿는 이가 더욱 많았으니, 또한 의리가 사람을 감동하게 하는 것이 깊었음을 보겠다. 지난 성현들의 미미해진 단서를 이어 전현(前賢)의 발견치 못하였던 기미를 열고, 제유(諸儒)들의 득실을 분별하며, 이단(異端)의 그릇된 것을 물리쳐서 천리를 밝히고 인심을 바르게 하였으니, 사업의 큰 것이 이보다 더한 것이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 북계 진씨(北溪陳氏)는 말하기를, "선생은 도가 높고 덕망이 있었으며, 의(義)가 정일(精一)하고 인(仁)이 성숙하였다. 언어가 바르고 온화하여, 인심과 천리에 통철하였다. 군철(哲)에 통달하고 백성(百聖)을 이해하여 수(洙)·사(泗)·이(伊)·낙(洛)의 학업에 정(精)하여 무릇 앞날의 단서만 있고 결론이 없었던 것을 다 이제 완비하였으며, 종전에 분별하기에 의심이 있어서 밝히지 못한 것이 이제는 더욱 확실해져서 그 대강(大綱)과 대의(大義)가 마치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같이 분명해졌다. 1천 1백 년 동안의 오류를 씻고, 뒤 학자들이 함부로 바꿀 수 없는 준칙을 정하였으니, 말은 간략하되 이(理)는 극진하였고 취지는 밝고 의미는 깊었다. 그 심도(心度)는 밝고 명랑하여 아무 티도 없었으며, 공부는 치밀하여 물샐 틈도 없었으니, 그 말과 기운 사이에서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공(孔)·맹(孟)·주(周)·정(程)의 도가 선생에 이르러 더욱 밝아졌으니, 소위 이 세상에서 종주(宗主)하기를 맹세했다고 할 만한 사람은 오직 선생 한 분일 뿐이다." 하였습니다.
○ 초려 오씨(草廬吳氏)는 칭찬하여 말하기를, "의리가 현미(玄微)한 것이 명주실이나 소털 같고, 가슴 속이 넓은 것은 넓은 바다나 높은 산 같으니, 호걸의 재사(才士)요, 성현의 학문이다. 빛나는 별이요, 상서로운 구름이며〔景星慶雲〕, 태산(泰山)이요 교악(喬嶽)이로다."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주자(朱子) 뒤에 도통의 정맥을 얻은 이는 꼭 누구라고 지적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봅니다. 장남헌(張南軒)은 주자와 더불어 도의(道義)의 교우로 강론의 공이 있었고 채서산(蔡西山) 이하 제공(諸公)은 다 주자의 학문에서 얻었기 때문에 간략하게 그 행적을 아래와 같이 나타냈습니다.
송사(宋史)에 이르기를, "장식(張)의 자는 경부〔敬夫:남헌선생(南軒先生)입니다.〕인데 정승 장준(張浚)의 아들이다. 영리하고 민첩하였기 때문에 성숙하여 준(浚)이 아꼈다. 어릴 때부터 글을 배우는데 가르치는 것이 인(仁)·의(義)·충(忠)·효(孝)의 실용이 아닌 것이 없었다. 자라서 호굉〔胡宏:오봉(五峰)선생입니다.〕을 스승으로 삼으니 굉이 한 번 보고는 곧 공자가 문인에게 인(仁)을 논하는 친절한 취지로써 가르쳤는데, 식()이 물러가 사색(思索)하여 얻은 바가 있었기 때문에 굉은 칭찬하여 말하기를, '성문(聖門)에 사람이 있다.' 하니, 식이 더욱 스스로 분발하고 힘써서 옛 성현과 같이 되겠다고 스스로 기필하여 희안록(希顔錄)을 지었습니다. 주자는 말하기를, '공은 어려서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집안에서 나오지 않고 공부하여 진실로 충효의 전함을 얻었고, 또 오봉(五峯)의 문하에 강학하여 그 뜻의 귀취를 알았으니, 마음으로 묵묵히 안 것이 남들은 알아내지 못할 것이었다. 그 논설에 나타난 것으로는 의(義)와 이(利) 사이를 세밀하게 분별해서 대개 전철(前哲)들이 말하고 싶었으나, 미처 연구하지 못한 것에서 나왔고, 사업에 있어서는, 그 대강(大綱)과 대용(大用), 그리고 거(巨)·세(細)·현(顯)·미(微)가 흉중에 환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한 오라기도 공리(功利)의 잡된 것이 없었다. 이러므로 집에서 도를 논하니, 사방의 학자가 서로 다투어 모여와서 배웠고, 또 임금을 모시고 글을 가르쳤으며, 외임(外任)에 나가니 천자가 또한 그가 말한 것을 음미하고 그 공적을 치하하였으며, 또한 장차 크게 기용(起用)하려고 하였는데, 경부(敬夫)가 불행히도 죽었다.' 하였다." 하였습니다.
○ 채원정(蔡元定)주276)의 자는 계통(季通)인데(아래는 다 송사(宋史)에 나오는 말입니다.)나면서 영민하고 민첩하였습니다. 부친 발(發)은 뭇 책을 널리 열람하였는데, 호는 목당노인(牧堂老人)입니다. 그는 정씨(程氏)의 어록과 소씨〔邵氏:소강절(邵康節)〕의 황극 경세(皇極經世)와 장씨〔張氏:장횡거(張橫渠)〕의 정몽(正蒙)을 원정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공·맹의 정맥이다." 하니, 원정이 읽어서 그 뜻을 깊이 연구하였는데, 자라서 변석(辨析)을 더욱 정밀하게 하였습니다. 서산(西山) 꼭대기에 올라 굶주림을 참고 냉이〔薺〕를 씹으면서 독서하다가 주희(朱熹)의 이름을 듣고 가서 스승으로 삼으니, 주희가 그 학문의 정도를 알아보고, 크게 놀라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나의 노우(老友)이지 제자의 열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하고는 마침내 한 자리에 앉아 모든 경전의 심오한 뜻을 강론하였는데, 매일 밤까지 이렇게 계속하였으며, 사방에서 학자가 오면 주희는 반드시 먼저 원정에게 물어보라고 하였습니다. 원정이 죽자 희는 글로써 애통하여 말하기를, "정예(精詣)한 학식과 탁월한 재질과 불굴의 뜻과 무궁한 변론을 다시 얻어 볼 수 없도다." 하였습니다. 배우는 이들이 그를 높여 서산(西山)선생이라고 하였습니다.
○ 황간(黃)의 자는 직경(直卿)입니다. 유청지(劉淸之)를 만나니 청지가 그를 기특하게 여겨 말하기를, "자네는 바로 원기(遠器)이다." 하고, 곧 명하여 주희에게 수업하게 하였는데, 간()은 주희를 만난 후로 밤에 자리를 깔지 않고, 허리띠도 풀지 않고 앉아서 공부를 하면서, 조금 피곤하면 편하게 앉아 의자에 몸을 기댔다가 다시 하였는데, 간혹 새벽까지 이렇게 하였습니다. 주희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직경(直卿)은 뜻이 굳고 생각이 독실하므로 같이 있으면 심히 유익하다." 하였습니다. 주희가 병이 위독하니 심의(深衣)와 지은 책을 간에게 전수하고 손수 글을 써서 주면서 영결하여 말하기를, "우리의 도(道)가 여기(황간을 가리킴)에 있으니 나는 아무 유감이 없다." 하였습니다. 간의 제자가 날로 성하여 파촉(巴蜀)과 강호(江湖)의 선비들이 다 와서 의문되는 것을 묻고 유익한 것을 청하는 것이 주희 때와 같았습니다.
○ 이번(李燔)의 자는 경자(敬子)입니다. 주희에게 학문을 배우자 희가 증자(曾子)의 홍의(弘毅)란 말로써 가르치니, 번(燔)이 물러가서 홍(弘)이란 글자를 넣어 자기 서재〔劑〕의 이름을 지어 스스로 경계하였습니다. 주희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번의 교우(交友)함이 유익하고 학문이 두렵도록 나아가며 또 솔직하고, 믿을 만하며, 순박하고 착실하며, 처사하는 것이 구차하지 아니하니 뒤에 사도(斯道)를 맡을 이는 반드시 번이다." 하였습니다. 사미원(史彌遠)이 황자 횡()을 폐하니, 번은 삼강(三綱)에 관계된다고 하고는 이로부터는 다시 그 세상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자기 집에서 도를 강하니 배우는 이들이 그를 높여 황간(黃)과 병칭하여 황리(黃李)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살피건대, 주자의 뒤에는 진덕수(眞德秀)와 허형(許衡)이 선비로서 세상에 이름이 났으나, 살펴볼 때, 그 출처의 절도에 있어서 논의할 소지가 있음으로 여기에 감히 수록하지 않았으며, 또 명(明)나라의 이름 있는 신하들에 이르러서도 역시 대부분 이학(理學)에 파고 들어간 이는 많으나 도통의 정맥에 접할 만한 이는 볼 수 없으므로, 감히 여기에 기록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신은 그윽히 이르기를, 태초의 생민들은 풍기(風氣)가 처음으로 열리어 새처럼 거처하고 혈식(血食)하여 생활의 도리가 구비되지 못하였으며, 머리를 풀어 헤친 채 발가벗고 있었으며, 인문(人文)이 구비되지 못하여 임금도 없이 모여 살고 있었으므로 물어 뜯고 손톱으로 움켜쥐어 먹고 살았는데, 소박한 생활은 이미 흩어지고 대란이 일어나려고 할 때에, 여기에 성인이 여러 중물 가운데서 뛰어나, 총명과 지혜로써 그 성품을 온전하게 하니, 억조의 백성들이 자연히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다툼이 있으면 해결해 주기를 구하였고, 의문이 있으면 가르쳐 주기를 구하여 <백성들이>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는데, 민심의 향하는 바가 바로 천명(天命)의 돌아오는 바이라, 이 때문에 성인은 억조의 백성이 스스로 돌아온 것을 알고 군사(君師)의 직책을 맡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천시(天時)에 순하고 지리에 따라서 백성을 기르는 기구를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궁실과 의복과 음식과 기용(器用)이 점차로 구비되고 백성들이 필수품을 얻어서 생을 즐기면서 업에 편안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또 안일하게 지내면서 가르치지 않으면 금수에 가까와짐을 근심하여 인심에 따르고 천리에 근본하여 교화의 기구를 만들었습니다. 부자(父子)·군신(君臣)·부부(夫婦)·장유(長幼)·붕우(朋友)가 각각 그 도리를 얻으니, 하늘의 질서가 이미 밝아지고 또 시행되었습니다. 또 시대가 같지 않기 때문에 제도를 마땅히 하여야 하고, 현우(賢愚)가 같지 않기 때문에 교치(矯治)하는 방법을 고려하여, 인정을 절제하고 시무(時務)를 촌탁해서, 이에 더하고 줄이는 규범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문질(文質)과 정령(政令)과 작상(爵賞)과 형벌이 각각 마땅하게 되었는데, 그 과한 것은 억제하고 그 미치지 않은 것은 끌어 올려서, 착한 이는 일으키고 악한 자는 징계하여 마침내 대동(大同)으로 돌아 왔습니다. 성인이 하늘을 이어 준칙을 세워 일세를 다스린 것도 이러한 것에 불과하였고 도통의 이름은 여기서 생기었습니다. 성인이 능히 대군(大君)으로 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도덕이 능히 일세를 복종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요, 세력을 빌렸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인이 이미 세상을 떠나면 또 다른 성인이 나와서 대신 천하에 군림하여, 수시로 변통하면서 백성으로 하여금 궁하지 않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소위 인심에 따르고 천리에 근본한다는 도리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변치 않는 것은 천지의 상경(常經)이요, 변통하는 것은 고금의 통의(通誼)입니다. 시대가 점차 내려오면서 풍토가 옛날과 같지 않고 성인이 드물게 나서 성군(聖君)으로써 성군을 이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대통(大統)이 정해지지 않아서 도리어 간웅이 이것을 엿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인이 이것을 근심하여 바로 아들에게 전하는 법을 세웠는데, 아들에게 전한 뒤에는 도통이 반드시 임금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반드시 아래에 있는 성현(聖賢)들이 도와서 재결(裁決)하고, 보필(輔弼)하는 도를 이루어서 사도(斯道)의 전통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러므로 3대 이상은 임금이 반드시 성스럽지 않아도 천하가 치평된 것입니다.
시대가 더욱 내려가면서 풍기가 혼란하고 백성들의 거짓이 날로 더하여 가서 교화가 이루어지기 어려웠고, 임금은 이미 자기 수양의 덕이 없으며 또 현인을 좋아하는 성의가 결핍되어, 천하를 자기의 오락으로 삼고는 천하를 근시하지 않았으며, 사람을 덕으로써 쓰지 않고 세상을 도로써 다스리지 않았으니, 이래서 아래에 있는 성현은 스스로 조정에 설 수가 없어서 그 재능을 깊이 간직하여 팔지를 아니하였고, 보물을 쌓아 두고 일생을 그냥 마치게 되었습니다. 의(義)를 버리고 이(利)를 따르는 자들은 서로 배척하면서 다투어 나아가 상하가 제각기 이익만 취하니, 도학의 전통이 비로소 항간이 필부에게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도통이 군상(君相)에게 있지 않는 것은 참으로 천하의 불행입니다. 이 뒤로부터는 교화가 무너지고 풍속이 퇴패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단(異端)이 횡행하고 기만하는 계책이 치열하여, 나날이 어두워지고 점점 고질이 깊어 삼강이 윤락되고, 구법(九法)이 괴멸되니, 도학의 전통이 항간에서도 끊어지게 되었는데, 천지의 암흑이 여기서 극도에 달했습니다. 간혹 임금이 재지(才智)로써 소강(小康)을 이루었으나, 대개는 공리설(功利說)에 빠져서 도덕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는데, 비유하면, 이것은 마치 어둡고 긴 밤에 반짝이는 불빛과 같을 뿐이니, 어찌 우주를 지탱하고 일월을 밝게 하여 도통을 전하는 책임을 맡겠습니까.
아, 도는 고원한 것이 아니요, 다만 일용의 사이에 있을 뿐인데, 일용의 사이와 동정(動靜)의 즈음에 사리를 정밀히 관찰하여 진실로 그 중(中)을 체득한다면 이것이 바로 도에 어긋나지 않는 방법입니다. 이것으로 덕을 이루는 것을 수기(修己)라 하고 교(敎)를 베푸는 것을 치인(治人)이라 하며, 수기·치인의 실상을 다하는 것을 전도(傳道)라 합니다. 그러므로 도통이 군상(君相)에게 있으면 도가 그 시대에 행해져서 혜택이 후세에 흐르고, 도통이 필부에게 있으면 도가 그 세상에 행해질 수 없고 다만 후학들에게 전하여 질 뿐인데, 만약 도학의 전통을 잃고 필부까지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천하는 어두워 그 좇을 바를 모르게 됩니다. 주공(周公)이 세상을 떠난 지 백세(百世)가 되어서도 잘 다스려지지 않고, 맹가(孟軻)가 돌아간 지 천 년이 되어서도 세상에 진유(眞儒)가 없었다는 것은 이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이제 신은 삼가 선유(先儒)들의 말에 의하여 도통의 전함을 역력히 서술 하였습니다. 복희씨(伏羲氏)에서 시작하여 주자(朱子)에서 끝을 맺었는데, 주자 이후에는 또 확실한 전통이 없으니, 이것을 신은 길이 한탄 하는 바이며, 깊이 전하에게 총망하는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도학(道學)이 고원하여 행하기 어렵다고 하고, 또 옛날과 지금은 마땅히 해야할 일이 다르다는 것을 가지고 바꿀 수 없는 정론으로 삼고 있습니다. 대개 천지가 처음 열린 이래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몇 천 년이 되었는지 모르나, 천지의 혼륜(混淪)한 것과 광대한 형상은 그래도 옛 모습과 같고, 산천이 솟아 있고 흐르는 형상도 옛 모습과 같으며 초목과 금수의 형상도 옛 모습과 같고, 궁실(宮室)과 의복·음식·기용에 이르기까지도 성인의 제작에 의하여 그 생명을 길러 폐하지 못하면서, 오직 하늘의 질서에 있어서는 인심을 따르고, 천리에 근본하여 만고에 걸쳐서 변할 수 없는 것인데, 퇴패한 것을 편안히 여기고 마침내 복고(復古)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무슨 생각이겠습니까. 아, 그 역시 생각하지 않을 뿐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도에 뜻을 두어, 게으르게 하지 마시고, 멀리 요(堯)·순(舜)을 본받아 학(學)으로써 선을 밝히고 덕으로써 몸을 성실하게하여, 수기의 공부를 다하시고 치인의 교화를 베풀어서 물러서려는 생각에 흔들리지 마시며, 이해(利害)에 관한 말에 움직이지 마시며, 묵은 인습(因習)을 지키자는 말에 구애되지 마시고 반드시 사도(斯道)를 크게 밝고 크게 행하게 하셔서 도학의 전통을 이으신다면 만세토록 매우 다행할 것입니다.
< 주 >
252) 중국 고대의 임금. 처음으로 백성에게 고기잡이 사냥·목축 등을 가르치고, 8괘(八卦)와 문자(文字)를 만들었다고 한다.
253) 문자가 없었든 때 새끼로 매듭을 맺어 일을 표시하였든 일. 중국의 유사(有史)이전의 간이(簡易)한 정치를 말한다.
254) 갑(甲)은 십간(十干), 자(子)는 12지(十二支). 즉 간지(干支)의 총정이다.
255) 12율 가운데에 음성(陰聲)에 속하는 여섯 가지의 소리. 대려(大呂)·중려(仲呂)·임종(林鐘)·남려(南呂)·협종(夾鐘)·응종(應鐘).
256) 중국 고대(古代) 요(堯) 임금 때의 악인(惡人). 순(舜)임금 때에 숭산(崇山)으로 추방되었다.
257) 중국 고대(古代) 순(舜)임금 때에 백공(百工)의 일을 맡아 보았던 관리.
258) 중국 고대(古代)의 우(禹)임금의 아버지.
259) 중국 고대 요순시대의 나라 이름. 「竄三苗于三危」≪書舜典≫
260) 여덟 사람의 선량한 사람과 여덞 사람의 화합(和合)한 사람. 판원(八元)은 고실씨(高辛氏)의 재자(才子)·백분(伯奮)·중감(仲堪)·숙헌(叔獻)·계중(季仲)·백호(伯虎)·중웅(仲熊)·숙표(叔豹)·계리(季狸)등이며, 팔개(八凱)는 고양씨(高陽氏)의 재자(才子)인 창서(蒼舒)·퇴고(鼓)·도연()·대림(大臨)·방강(尨降)·정견(庭堅)·중용(仲容)·숙달(叔達)등이다.
261) 중국 전토(全土)를 아홉으로 나눈 명칭. 즉 기주(冀州)·연주(州)·청주(靑州)·서주(徐州)·형주(荊州)·양주(梁州)·예주(豫州)·양주(梁州)·옹주(雍州)이다.
262) 중국에 있는 아홉 개의 연못, 곧 대륙(大陸)·뇌하(雷夏)·맹제(孟諸)·하택(荷澤)·영택(榮澤)·대야(大野)·팽려(彭)·진택(震澤)·운몽(雲夢).
263) 옛날 중국에 구주(九州)의 명산 회남자(淮南子)에는 회계(會稽)·태산(泰山)·수산(首山)·태화(泰華)·기산(岐山)·태행(太行)·양장(羊腸)·맹문(孟門)의 아홉 산을 들었다.
264) 맹자에 "자막(子莫)은 집중(執中)하나 집중만 하고 권도(權道)가 없으니 이것은 역시 일편을 잡은 것과 같다"고 하였다.
265) 공자의 아버지로 추읍(鄒邑)의 대부(大夫)를 지냈으며 키가 십척(十尺)이고 무력(武力)이 출중하였다. 일찌기 시씨(施氏)에게 장가들었으나 딸만 아홉을 낳고 남자가 없었다. 뒤에 다시 안씨(顔氏)의 어린 딸 징재(徵在)에게 장가들어 이구산(尼丘山)에 빌어 공자를 낳았다고 한다. 공자가 세살 때 숙량흘이 돌아갔다.
266) 춘추전국 시대의 노(魯)나라 사람으로 공자의 문인(門人)·언어(言語)에 뛰어났음.
267) 여덟 가지의 악기 또는 그 소리. 금(金-鍾)·석(石-磬)·사(絲-絃)·죽(竹-管)·포(匏-笙)·토(土-壎)·혁(革-鼓)·목(木-枳).
268) 중국 고대 주(周)나라의 문왕(文王)의 아들이며 무왕(武王)의 아우. 이름은 단(旦). 시호는 원(元). 문왕과 무왕을 도와 주(紂)를 치고, 성왕(成王)을 도와 왕실의 기초를 세우고 제도와 예악(禮樂)을 발전시켜, 주(周)의 문화발전에 기여한 바 공로가 지대하였다.
269) 주(周)의 공후(公侯). 이름은 석(奭). 시호는 강(康). 문왕(文王)의 서자(庶子). 무왕이 주(紂)를 멸하고 북연(北燕)에 봉(封)함. 성왕(成王) 때 주공(周公)과 함께 삼공(三公)이 되어 섬서성(陝西省) 이서(以西)를 다스림·선정(善政)을 베풀었다고 한다.
270) 동맹의 뜻. 전국시대(戰國時代)에 한(韓)·위(魏)·조(趙)·연(燕)·초(楚)·제(齊) 여섯 나라가 동맹하여 진(秦)나라에 대항하자는 소진(蘇秦)의 계책을 합종(合從)이라고 하고, 여섯 나라가 모두 진(秦)나라에 복종할 것을 주장한 장의(張儀)의 계책을 연횡(連衡)이라고 한다.
271) 북송(北宋)의 대유학자(1017∼1073). 자(字)는 무숙(茂叔). 호는 염계(廉溪). 시호는 원공(元公). 정이천 정명도의 스승이며, 송학(宋學)의 비조(鼻祖)가 됨. 저서로는 「통서」(通書)「태극도설」(太極圖說) 등이 있다.
272) 성리학서(性理學書). 무극(無極)·태극(太極)에서부터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원리, 곧 우주 및 인류 만물의 생성(生成)의 원리와 발전과정을 도해(圖解)하고 설명을 달았다.
273) 천지가 개벽되기 이전의 혼돈(混沌)한 상태. 우주 만물 구성의 근원이 되는 본체(本體).
274) 북송(北宋)의 유학자(1020∼1077). 자(字)는 자후(子厚). 이름은 재(載). 시호는 명(明).그의 학문은 역(易)과 중용(中庸)에 근거를 두어 공맹(孔孟)의 학을 최초로 삼음. 저서에는 『동명』(東銘).·『서명』(西銘)·『정몽』(正蒙)·『역설』(易說) 등이 있다.
275) 송대(宋代)의 유학자. 이름은 옹(雍), 자(字)는 요부(堯夫). 주렴계가 송학(宋學)의 이기론(理紀論)을 세운데 반하여, 그는 같은 때에 상수론(象數論)을 제창하였다.
276) 남송(南宋)의 유학자(1161∼1237) 호는 목당(波堂). 자(字)는 계통(季通). 저서로는 경해무집(經解文集) 40권이 있다.
5) 사생귀신책(死生鬼神策)
율곡선생전서 습유 제4권 잡저(雜著)
문(問)
사생 귀신의 설(說)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사람이 죽으면 혼(魂)은 날아가고 백(魄)은 흩어져 버려 진실로 남은 기(氣)가 없을 터인데, 공자(孔子)가 이른바, ‘훈호처창(焄蒿悽愴)’이라는 것은 어떤 물(物)을 가리켜 말한 것인가?
죽음에 만약 지(知)가 있다면, 불가(佛家)의 보응(報應)의 설이 이에 허황되지 아니한가? 죽은 뒤 만약 지각이 없다면, 조고(祖考)의 신(神)에게 제사하는 것은 어떤 의의와 도리가 있어서인가?
반경(盤庚)이 도읍을 옮길 적에 고후(高后 탕왕湯王을 가리킴)가 화복을 내린다는 것으로써 그 백성에게 고유(告諭)하였는데, 그렇다면 사람이 죽어 귀신이 되어서 과연 능히 화를 주기도 하고 복을 주기도 할 수 있다는 것인가?
주공(周公)이 삼왕(三王 하(夏)의 우왕(禹王)ㆍ상(商)의 탕왕(湯王)ㆍ주(周)의 문왕(文王))에게 고하기를, “나는 재예(才藝)가 많아 능히 귀신을 섬길 수 있다.” 하였으니, 이른바 귀신이란 것은 어떤 신(神)을 가리키는가?
사후에 과연 귀신을 섬기는 이치가 있는가?
백유(伯有)가 악귀(惡鬼)가 되자 자산(子産)이 그를 위해 묘(廟)를 세웠고, 악귀가 문에 들어와 진경(晉景)이 그 때문에 죽었다고 하니 이것 또한 이치의 필연적인 것인가?
원성(元城)이 임종하자 바람과 천둥이 정침(正寢)에 우르릉거리고 안개가 끼어 어두워졌다고 하니 이는 무슨 기(氣)인가?
불가의 승려가 죽을 때에 반드시 괴이한 변화가 있다고 하니 이는 무슨 이치인가?
자정자(子程子)가 이르기를, “한 포기 풀, 한 그루 나무에도 또한 모두 이(理)가 있다.” 하였는데, 하물며 사생(死生)은 인간의 대사인데 어찌 그 이치가 없다고 보겠는가?
여러 군사들을 통해 궁리(窮理)ㆍ격물(格物)의 설을 듣고자 한다.
대(對) : 기(氣)는 모이고 흩어짐이 있으나, 이(理)는 처음과 끝이 없습니다. 모이고 흩어짐이 있으므로 천지의 크기도 역시 한계가 있고, 처음과 끝이 없으므로 물(物)과 내[我]가 모두 다함이 없는 것이니, 이 설을 아는 자라야 가히 함께 사생의 이치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훌륭하신 물음을 받고서 감히 잠자코 있을 수 없어 논설해 보겠습니다.
사람의 일신은 혼백(魂魄)의 성곽입니다. 혼은 기(氣)의 신(神)이요, 백(魄)은 정(精)의 신입니다. 그 살아 있는 때에는 펴 있어 신(神)이 되고, 죽었을 때에는 굽혀져 귀(鬼)가 됩니다. 혼기(魂氣)가 하늘로 오르고 정백(精魄)이 땅으로 돌아가면 그 기는 흩어집니다. 그 기가 비록 흩어진다고 하나 곧 그 흔적조차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기가 위로 발양(發揚)하여 소명(昭明)하고 훈호처창(焄蒿悽愴)하니, 이는 온갖 물(物)의 정(精)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위로 발양하는 것도 오래되면 역시 없어집니다.
무릇 천하의 물(物)에 대해 있다고 하면 있는 것이고 없다고 하면 없는 것이지만, 오직 사람 죽은 귀신은 있다고도 말할 수 없고 없다고도 말할 수 없으니, 그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정성이 있으면 그 신(神)이 있으니 가히 있다고 말할 수 있고, 정성이 없으면 그 신이 없으니 가히 없다고 말할 수 있으니, 신의 있음과 없음의 구분이 어찌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그 죽음이 바른 명으로 죽지 못해서 그 기가 발산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으면 극도의 울분(鬱憤)으로 발하여 요망(妖妄)한 것이 되니 이것 또한 이치로 볼 때 그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태어날 적에는 다 같이 음양의 기를 받지만 혹은 정(正)으로써 기르고 혹은 사(邪)로써 기릅니다. 방법에 있어서 사와 정이 비록 다르기는 하나 기르는 것은 한가지입니다.
길러서 그 강대(剛大)한 기를 모으게 되면 죽을 때 더러 이상한 일이 있을 수 있고, 길러서 그 굳고 엉긴 기를 모으면 죽을 때에 반드시 괴상한 일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괴상한 일이 있는 것은 진실로 족히 말할 바가 못 되나 이상한 일이 있는 것도 역시 지극한 것은 아닙니다. 살아선 지상에서 밝은 덕을 펴고 죽어서는 하늘에서 밝게 있어서, 따질 만한 형적이 없는 경우는 오직 성인일 뿐입니다.
청컨대 훌륭하신 물음에 대하여 자세히 말해 보겠습니다.
대개 사람에게서 형체가 있는 것은 신체요 형체가 없는 것은 지각입니다. 형체가 있는 것은 그 궤멸됨을 보지만 형체가 없는 것은 모이는 것도 흩어지는 것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사후에 지(知)가 있는 것같이 의심됩니다.
진실로 지가 있다고 이른다면, 불가(佛家)의 이른바 “백해(百骸)는 모두 흩어져도 일물(一物)은 길이 신령하다.”는 것이 어찌 일리가 있지 않겠습니까.
만약 죽은 뒤에 지각이 없다고 이른다면, 군자가 칠일계(七日戒)와 삼일재(三日齋)를 통해 반드시 제사 드리는 대상을 본다고 하는 것은 무슨 의의와 도리입니까? 제가 질정해 보겠습니다.
대개 사람의 지각은 정기에서 나옵니다. 이목의 총명이라는 것은 백(魄)의 영(靈)이요, 심관(心官)의 사려(思慮)라는 것은 혼(魂)의 영입니다. 그 총명과 사려는 기(氣)요, 그 총명하게 하고 사려하는 것은 이(理)입니다. 이(理)에는 지(知)가 없고 기(氣)에는 지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귀가 있어야만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눈이 있어야만 색을 볼 수 있으며, 마음이 있어야만 사려할 수 있습니다. 정기가 한번 흩어지면 귀로 들을 수 없고, 눈으로 볼 수 없으며, 마음으로 사려할 수 없으니, 모르겠으나 어떤 물(物)에 어떤 지각이 있다는 말입니까? 칠규(七竅)와 백해가 비록 흩어지지 않았음에도 오히려 지각이 없는데, 하물며 허공의 아득한 가운데에 어찌 한 물(物)이 있어 귀가 없이도 능히 들을 수 있고 눈이 없이도 능히 볼 수 있으며, 마음이 없어도 능히 사려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지각이 없으면, 비록 천당과 지옥이 있다고 하더라도 누가 그 괴로움과 즐거움을 알겠습니까.
불가(佛家)의 보응(報應)의 설은 공격하지 않아도 저절로 깨뜨려집니다. 그러나 그 제사 지내는 까닭은 이치가 있습니다.
사람이 귀(鬼)가 될 때 그 죽은 지가 오래지 않으면 정기가 비록 흩어진다고는 하나 즉시 소멸되지 않는지라, 나의 성경(誠敬)이 조고(祖考)에 감통(感通)할 수 있습니다. 이미 흩어진 기는 본래 들음[聞]과 봄[見]과 사려(思慮)함이 없으니 나의 정성으로써 생시의 그 거처를 생각하고, 그 웃고 말하던 것을 생각하며, 그 마음에 즐기던 바를 생각하고, 그 기호(嗜好)하던 바를 생각하면 완연히 흩어진 기가 이에 또한 모일 수 있으니, 공자의 이른바, ‘훈호처창’이라는 것이 이에 있지 않겠습니까. 만약 그 세계(世系)가 멀어서 그 기는 비록 없어졌으나 그 이는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또한 가히 정성으로 감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저 청천백일에 본래 비가 올 기운이 없다가 갑자기 먹구름이 모여서 드디어 큰비를 내리는 것은 비록 비가 올 만한 기는 없었으나, 역시 비가 올 만한 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먼 대수(代數)의 선조에게 진실로 능히 감통할 기가 없으나 일념지성(一念至誠)으로 드디어 감통을 이루는 것은 비록 능히 감통할 기는 없으나 감통할 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죽은 지가 오래지 않으면 기로써 감통하고, 그 죽은 지가 이미 오래되면 이로서 감통하는 것입니다. 혹은 기가 있고 혹은 기가 없으나 그 감통함은 마찬가지입니다. 더구나 자손의 정신은 곧 조고의 정신이니, 내게 있는 것을 가지고 조상의 없는 것에 감통하는 것이 또한 무엇이 의심스럽겠습니까. 이것이 효자와 자손(慈孫)들이 감히 그 어버이를 죽었다고 하지 않고서 제사 지낼 때는 그 엄숙함을 이루는 까닭입니다.
옛날에 상(商)나라 풍속이 귀신을 신앙하였는데, 반경(盤庚)이 화복을 내린다는 것으로써 그 백성을 고유했던 것은 고후(高后)를 잊지 않은 것이며, 무왕(武王)이 질병을 얻게 되자 주공이 삼왕에게 요청하였던 것은 죽은 이 섬기기를 산 사람 섬기듯 한 것입니다.
대개 천리(天理)란 진실무망(眞實無妄)하고 순선무악(純善無惡)한 것입니다. 군자가 그것에 순종하면 길하고, 소인이 그것에 거스르면 흉하나니, 이는 모두 자연스런 반응입니다. 한 물(物)이 있어 그 권한[柄]을 쥐고 화복을 내려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이 하늘이 되는 소이(所以)와 사람이 사람이 되는 소이와 선(善)이 길한 소이와 악이 흉한 소이가 이 이(理)의 소위(所爲)가 아닌 것이 없으나, 마치 주재가 있는 것 같기 때문에 굳이 이름하여 말하기를, 제(帝)라고 했으니, 제는 곧 이(理)입니다. 상나라의 성탕(成湯)은 그가 살았을 적에는 그 받은 이(理)를 온전하게 하여 사람의 제(帝)가 되었다가 죽은 뒤에는 자연의 이(理)로 돌아가 천(天)의 제에 짝했으니, 성인의 귀(鬼)와 상천(上天)의 제가 대개 어찌 다르겠습니까. 그러니 복되게 하는 것이 반드시 선에서 비롯되지만 역시 고후가 복을 내린다고 이를 수 있고, 화(禍)되게 하는 것이 반드시 악에서 비롯되지만, 역시 고후가 화를 내린다고 이를 수 있습니다. 반경이 이른바, “고후가 크게 재난을 내릴 것이다.”는 것이 이런 이(理)가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반경은 충후한 군주입니다. 어찌 상도(常道)가 아닌 설을 고취하여 곧은 도(道)를 좇는 백성들을 속이겠습니까.
그리고 선왕(先王)이 어버이를 사모할 때에는, 색(色)은 눈에서 잊지 않고 소리는 귀에 끊이지 않고, 심지(心志)며 기욕(嗜欲)은 마음에 잊지 않아, 부모는 비록 돌아가셨으나 이 마음은 일찍이 하루도 부모 곁에 있지 않는 적이 없었습니다.
주공이 무왕을 위해 명(命)의 보전을 청하던 때는 삼왕이 돌아간 지 비록 이미 오래되었으나 이 마음이 일찍이 조금도 게으르지 않아 혹은 밥 먹을 때 삼왕이 국그릇에 보이기도 하고, 혹은 앉았을 때 삼왕이 담벼락에 보이기도 하여 선명하게 그 위(位)를 보며 숙연히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남들은 삼왕의 기가 이미 흩어져 버렸다고 여겼으나, 주공은 그 이미 흩어졌음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가, “능히 귀신을 섬길 수 있다.” 한 것은 삼왕의 귀신에 지나지 않습니다. 삼왕의 기가 굽혀져 귀(鬼)가 되었으나 공(公)의 정성으로 퍼져 신(神)이 되었습니다. 주공이 이미 굽혀진 기를 폈으니 그가 삼왕의 사후에 효를 극진히 한 것은 역시 그의 본래 그대로의 마음입니다.
삼단(三壇)의 사(辭)는 정성스럽기도 하고 간절하기도 하여 마치 사람이 어버이의 슬하에서 하는 말과 같으니, 아아, 주공의 조상을 추모하는 효성과 형을 사랑하는 정의와 나라를 근심하는 충성은 이토록 지극하였습니다. 저 정(鄭)나라의 백유 같은 이는 귀하기가 삼경(三卿)에 들어 그 겨레붙이가 강대했고, 정(精)을 모음이 심히 많았는데 그 죽음이 비명이었으니, 그 기가 발하여 악귀가 된 것은 별도로 이치가 있는 것입니다. 진(晉)나라의 조씨(趙氏)는 대대로 공훈이 있어 나라의 양신(良臣)이었는데, 하루아침에 멸족된 데다 그 죽음 또한 정당하게 죄로 인한 것이 아니었으니, 그 기가 격(激)하여 원귀가 된 것도 역시 일리가 있습니다.
무릇 사람은 기운이 다하여 죽는 경우에는 확연히 아무 물(物)도 없지만, 만약 혹 흩어지지 않았다면 어찌 울결(鬱結)되어 퍼지지 못한 것이 없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초성(楚成)은 시호를 고치자 비로소 눈을 감았으니, 이는 곧 울결한 기가 시호에 엉긴 것이므로 시호를 고치자 그 기가 흩어진 것입니다. 순우(荀虞)는 제(齊)나라를 치자 눈을 감았으니, 이는 곧 울결한 기가 제나라에 엉긴 것이므로 제나라를 치자 그 기가 흩어진 것입니다. 어찌 유독 백유와 조씨만이 그러하겠습니까. 백유의 기는 제사 지내지 않는 것에 울결된 것이라, 자산이 그의 그러함을 보고서 그를 위하여 묘를 세워 주자 그 기가 퍼져 자연히 깨끗하게 흩어졌습니다. 자산 같은 이는 가히 귀신의 정상을 안다고 이를 만합니다. 조씨의 기는 원한과 분통에 울결된 경우인지라, 진(晉)나라 경공(景公)이 비록 그 연고를 알았더라도 오히려 어찌할 수 없었을 것인데, 하물며 그의 그러함을 알지 못한 경우이겠습니까. 진경이 이미 죽고 나자 조씨의 원통한 기도 역시 점차 흩어졌습니다. 이들은 모두 이치상 혹시 그러할 수도 있는 것들입니다.
원성(元城) 유안세(劉安世)와 같은 이는 도를 본 것이 분명하여 그 마음을 동요시키지 않는 자였습니다. 그 평일에 순강정대(純剛正大)한 기를 기른 것이 우주에 가득 찼으므로 임종할 무렵에 바람과 천둥이 으르렁거리고 구름과 안개가 어둑했던 것은 단지 정기(正氣)가 발산하여 그러했던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불가의 무리가 이단의 소견을 굳게 잡고 정신을 수련하며 외계의 유혹에 이끌리지 않고 능히 그 사특한 정(定 불교의 참선)을 지키게 되면 장차 죽을 때에 혹은 이상한 광채가 나타나기도 하고, 혹은 이상한 향내가 맡아지기도 하며, 혹은 거꾸로 서기도 하고 혹은 앉은 채로 죽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릇 그 변화의 일은 사기(邪氣)가 발산하여 그러한 것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불가에서 괴상한 일이 있게 되는 까닭은 세상을 현혹시키고 풍속을 놀라게 하려는 마음이 격동하여 그런 것이며, 원성에게서 이상한 일이 있게 된 까닭은 충성심이 분발하여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격동하여 그런 것입니다.
충분(忠憤)으로 격동하는 것이 바르기는 하지만 가히 따질 만한 형적이 없는 것보다는 끝내 같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공자와 맹자,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기른 바가 원성에게 못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그 이상한 일을 보지 못합니까? 그러므로 “괴상한 일이 있는 것은 진실로 족히 말할 바가 못 되나, 이상한 일이 있는 것도 역시 매우 지극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또, 정자의 설을 이끌어 와 이르기를, “한 포기 풀, 한 그루 나무에도 모두 이(理)가 있다.” 하였던 것이니, 이 말은 더욱 저를 감격시키는 바입니다.
대개 천지 사이의 사사물물(事事物物)이 어찌 이(理)를 벗어난 것이 있겠습니까. 사생(死生)의 이치를 제가 감히 망녕되이 의논할 수는 없겠으나 역시 일찍이 선현(先賢)에게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설에 이르기를, “밤과 낮은 사생의 도이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생의 도를 알면 사의 도를 안다.”라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일의 시초를 궁구하여 종말에 돌아간다.”라고 하였으니, 그러므로 사생의 설을 알 수 있습니다.
대개 만물은 이 이(理)에 의해 나고 이 理에 의해 죽으니 아직 태어나기 전에도 단지 이 理가 있을 따름이요, 이미 죽은 뒤에도 또한 이 理가 있을 따름입니다.
살아서는 기(氣)가 있고 죽어서는 氣가 없는 것은 이의 정상인 것이며 순(順)한 것이요, 혹 죽어서도 氣가 없어지지 않고 발하여 요망(妖妄)이 되는 것은 이의 변괴인 것이며 역(逆)한 것입니다. 성인은 정상을 말하고 변괴를 말하지 않으며, 순한 것을 말하고 역한 것을 말하지 않으니, 공자가 괴이한 것을 말하지 않았던 것은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아아, 세상의 도가 이미 낮아지고 민심이 날로 나빠져서 천신(天神)과 인귀(人鬼)가 한데 섞여 분별이 없으며, “들보 위에서 휘파람 불고 당(堂) 위에 올라서는 따위의 괴이함.[嘯梁立堂之怪]”과 “하늘은 음침하고 비가 내려 음습한 따위의 요괴함.[天陰雨濕之妖]”이 닿는 곳마다 발생하니, 이 어인 연유로 정상적인 것은 적고 변괴는 많으며, 순한 것은 드물고 역한 것이 많은 것입니까? 또 듣건대, 천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각각 마땅히 제사할 바가 있지 않는 이가 없다고 했습니다.
천지는 천자가 마땅히 제사할 바이요, 산천은 제후가 마땅히 제사할 바이며, 사(士)와 대부(大夫)의 제사는 조고에 불과할 따름이요, 서인의 제사는 부모에 불과할 따름인데, 진실로 그 마땅히 제사해서는 안 되는데 제사한다면 어찌 미혹됨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사서인(士庶人)의 집에서 음사(淫祠)를 숭상하고 응당 제사할 귀신이 아닌 귀신에 망녕되이 아첨하여 그 제사할 바가 조고인지 부모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풍조가 고쳐지지 않으면, 저로서는 구려(九黎)가 덕을 어지럽힌 일을 오늘에 다시 볼까 두렵습니다.
이제 참으로 능히 교화를 닦아 밝히고 인심을 바로잡아 남의 자식이 된 이로 하여금 주공의 통달한 효도를 본받아 오직 지극한 정성으로써 조고의 이미 굽혀진 기를 펴고 다른 귀(鬼)에 아첨하지 않게 하며, 남의 신하가 된 이로 하여금 반경의 고유를 생각하게 하고 오직 지극한 충성으로써 선왕의 하늘에 있는 영(靈)에 감통하고, 다른 신(神)에 현혹되지 않게 해야 할 것입니다.
대개 이와 같이하여 교제(郊祭)에는 천신이 감응하고, 묘제(廟祭)에는 인귀가 흠향한다면, 정기(正氣)가 유행하고 사악한 기가 일어나지 않아 세상을 현혹하고 백성을 기만하는 설이 천지 사이에 용납되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미 거경(居敬)의 공이 없는데, 어찌 궁리(窮理)의 학문이 있겠습니까. 다만 세인들이 귀신에 아첨하고 더럽히는 것에 분개한지라, 이미 집사(執事)의 물은 바에 대답한 것이요, 또 묻지 않는 것에까지 언급을 하였던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미치고 망녕된 점을 용서하시고 다시 위로 전하여 임금께 들려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삼가 응대합니다.
[주-01]반경(盤庚) : 은(殷)나라 17대 왕이다. 즉위하자 하북(河北)에 있던 도읍을 박(亳)으로 옮겼다.
[주-02]백유(伯有) : 춘추 시대 정(鄭)나라 사람 양소(良霄)의 자(字)이다. 성격이 괴팍하여 굴실(窟室)을 파 놓고 술 마시기를 좋아하였는데 공손묵(公孫墨)에게 피살당하자 악귀가 되어 공손묵 등을 죽였다.
[주-03]자산(子産) : 춘추 때 정나라 사람 공손교(公孫僑)의 자이다. 백유가 악귀가 되어 인심이 흉흉하자 백유의 아들을 세자로 세우고 묘를 지어 진혼하였다.
[주-04]원성(元城) : 진(晉)나라 왕 이존욱(李存勖)이 원성에 있던 양(梁)나라 유수를 칠 때 천변(天變)이 있던 다음 날 원성이 함락되었다. 《漢書》
[주-05]칠일계(七日戒)와 삼일재(三日齋) : 제사 지내기 7일 전부터 계(戒)하고 3일 동안 재(齋)하는 것을 말한다.
[주-06]칠규(七竅) : 칠공(七孔)과 같다. 사람의 얼굴에 있는 눈ㆍ귀ㆍ코ㆍ입의 7개의 구멍이며, 또 군자의 가슴에도 7개의 구멍이 있다고 한다. 《史記》
[주-07]삼단(三壇)의 사(辭) : 주공(周公)이 태왕(太王)ㆍ왕계(王季)ㆍ문왕(文王)을 위해 3개의 제단(祭壇)을 쌓고 지어 올린 제문이다.
[주-08]초성(楚成) : 초(楚)나라 왕 웅운(熊惲)이다. 진(晉)나라와 싸워 지고, 이어 세자 상신(商臣)에게 피살되자 죽어도 눈을 감지 못했는데, 휘(諱)를 성(成)으로 고치자 눈을 감았다고 한다.
[주-09]구려(九黎) : 야만족을 말하는데, 《당서(唐書)》에, “구려가 덕을 해치니 전호(顓頊)가 이를 쳤다.”라는 말이 있다.
[주-10]거경(居敬)의 공 : 거경은 거경궁리(居敬窮理)의 약칭인데, 주자학(朱子學) 수양(修養)의 안목(眼目)으로 한시도 쉬지 않고 심성(心省)하여 원리를 규명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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