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학/단학

日月之書 6) 修心靜經 수심정경 (5)

검은바람현풍 2012. 1. 23. 20:14

 

제7장 명진상지도(明眞常之道) 참되고 떳떳한 道

 

( 청정경 시작 ) - 편집자

大道는 無形이나 生育天地하고 大道는 無情이나 運行日月하고 大道는 無名이나 長養萬物하나니 吾不知其名이라. 强名曰道니라. 夫道之行也에 有淸有濁하고 有動有靜하니 天淸地濁하고 天動地靜하며 男淸女濁하고 男動女靜하나니 降本流末而生萬物하나니라. 淸者濁之源이요 靜者는 動之基라. 故로 人能常淸靜하면 天地悉皆歸니라. 夫人神은 好淸而心撓之하고 人心은 好靜而慾牽之하나니 常能遣基慾而心自靜하고 證其心而神自淸하면 自然六慾이 不生하고 三毒消滅하리니 所以不能者는 爲心未證이라.

 

대도는 형상이 없으나 천지를 생육해 내고 대도는 情이 없으나 일월을 운행하고 대도는 이름이 없으나 만물을 장양케 하나니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함이라. 억지로 이름 하기를 도라 하였느니라. 대범 도를 행함에 맑음이 있고 탁함이 있으며 동함이 있고 정함이 있나니, 하늘은 맑고 땅은 탁하며 하늘은 동하고 땅은 정하며 남자는 청하고 여자는 탁하며 남자는 동하고 여자는 정하나니 근본으로부터 내려와 끝으로 흘러서 만물을 생 하게 하느니라. 맑은 자는 탁함의 근원이 되고 고요한 자는 동자의 기본이라. 그러므로 사람이 항상 청정하면 천지가 다 한가지로 돌아가느니라. 대범 사람의 정신은 맑음을 좋아하되 마음이 흔들리고 사람의 마음은 정하기를 좋아하되 욕심에 끌리게 되느니 항상 능히 그 욕심을 보내 버리면 마음이 스스로 정하고 마음이 맑으면 정신이 스스로 밝아져서 자연히 육욕이 생기지 아니하고 삼독(貪嗔痴)이 소멸하리니 바에 써 능치 못한 자는 마음이 맑지 못함이라.

 

慾未遣也니 能遣之者는 內觀其心에 心無其心하며 外觀其形에 形無其形하며 遠觀其物에 物無其物하느니 三者旣悟하면 惟見於空이니 觀空亦空여 空無所空하며 所空旣無하면 無無亦無하며 無無旣無하여 湛然常寂하며 寂無所寂하면 慾豈能生이리요 慾旣不生하면 卽是眞定眞常이라 眞常應物하며 眞常得性하여 常應常淸靜矣니라. 如此淸靜하면 漸入眞道라. 旣入眞道를 名爲得道니 雖名得道나 實無所得이요 爲化衆生을 名爲得道니 能悟之者는 可傳聖道하리라.

 

욕심을 보내지 못 함이니 능히 보내는 자는 안으로 그 마음 일어남을 관 하되 마음이 그 마음이 없으며 밖으로 그의 형상을 관 하되 형상이 그 형상이 없으며 멀리 그 만물을 관 하되 물건이 그 물건이 없나니 삼자를 이미 깨닫고 보면 오직 공 함 만이 나타날 것이니 공을 관 하되 또한 공해서 공 함이 공 한바가 없으며 공 한바가 이미 없으면 없는 것이 없다 함이 또한 없으며 없는 것이 없다 함이 이미 없어서 담연히 항상 고요하며 고요함도 또한 고요한 바가 없으면 욕심이 어찌 능히 생기리요. 하고자 함이 이미 생기지 아니하면 곧 이것이 참 정이요 참으로 떳떳함이니라. 참으로 떳떳함으로 물건을 응하면 참으로 떳떳한 성품을 얻어서 항상 응용되는 데에 항상 청정하리로다. 이와 같이 청정하면 점차 참 도에 들어가게 됨이라. 이미 참 도에 들어감을 이름 하기를 도를 얻었다 하리니 비록 이름이 도를 얻었다 하나 실상에 있어서는 얻은 바가 없고 중생을 화도 함을 이룸으로서 도를 얻었다 하나니 능히 깨달은 자는 가히 성인의 도를 전하리로다.

 

且上士는 無自他라. 故로 不爭하고 下士는 執自他라. 故로 有爭하며 上德은 處無相이라. 故로 不德하고 下德은 執有相이라. 故로 執德하느니 執着之者는 不名道德이라. 衆生所以不得眞道者는 爲有妄心이라. 旣有忘心하면 卽驚其神이요 旣驚其神하면 卽着萬物이요 旣着萬物하면 卽生貪求요 旣生貪求면 卽是煩惱라. 煩惱妄想이 憂苦身心하여 便遭濁辱하면 流浪生死에 常沈苦海하고 永失眞道라.

眞常之道는 悟者自得하느니 得悟者常淸靜矣니라.

 

또한 상사는 자타가 없음이라. 그러므로 다툼이 없고, 하사는 자타에 집착함이라. 그러므로 다툼이 있으며, 상덕은 무상에 처함이라. 그러므로 덕이라 하지 아니하고, 하 덕은 유상에 집착함이라. 그러므로 덕에 집착하느니 덕에 집착하는 자는 도덕이라 이름 하지 아니함이라. 중생이 바에 써 참 도를 얻지 못하는 자는 망령된 마음이 있음이라. 이미 망령된 마음이 있으면 곧 정신이 놀랄 것이요 그 정신이 놀라면 곧 만물에, 착심이 생길 것이요 이미 만물에 착심이 생기면 곧 탐심이라서 구하려는 욕심이 생길 것이요 이미 탐내서 구하려는 욕심이 생기면 곧 이것이 번뇌가 되느니라. 번뇌 망상이 몸과 마음을 근심케 하고 괴롭게 해서 문득 탁하고 욕됨을 만나게 되면 생사에 유랑해서 항상 고해에 잠기게 되고 기리 참 도를 잃게 됨이라. 참으로 항상 떳떳한 도는 깨달은 사람이 스스로 얻게 되느니 깨달음을 얻은 자는 항상 청정하리라.

( 청정경 끝 )

 

( 통고경 시작 - 편집자 )

有動之動은 出於不動하고 有爲之爲는 出於無爲하느니 無爲則神(體性)歸하고 神歸則萬物云寂이라. 不動則氣泯하고 氣泯則萬物無生하느니 神神相守하고 物物相資하여 厥本其根이라. 黙而悟之하면 我自識之하고 入乎無間하면 不死不生하여 與天地爲一이니라. 忘於目則光溢無極하고 泯於耳則心識常淵하느니 兩機俱忘하면 絶衆妙之門이라. 純純全全合乎大萬하고 溟溟涬涬하여 合乎無綸하느니 天地之大我之所維요 萬物之衆이 我之所持니 竭有窮終以語其蔽哉아.

 

동함에 있어서 동함은 동하지 아니함으로부터 나게 되고 함에 있어서 함은 함이 없는 곳으로부터 나오니 함이 없으면 본심에 돌아가고 본심에 돌아간 즉 만물이 적적하다 이르느니라. 동하지 아니하면 기운이 민민하고 기운이 민민하면 만물이 생함이 없느니 신령스럽고 신령스러움이 서로 지키고 만물과 만물이 서로 바탕 해서 궐 하느니라. 그 근본을 묵묵한 가운데 깨달으면 내 스스로가 알고, 사이가 없는 곳에 들어가고 보면 죽지도 아니하고 낳지도 아니해서 천지와 더불어 하나가 되느니라. 눈을 잃어버리면 빛이 넘침이 다함이 없고, 귀가 민민하면 마음 알음알이가 항상 연연하느니 두 기틀을 잊어버리면 중묘의 문이 끊기게 되느니라. 순순하고 전전해서 대만에 합하고 명명하고 행행해서 무륜에 합하느니, 천지의 큼이 나의 벼루 줄이요 만물의 중생이 나의 가진 바이니 어찌 다 끝이 있어서 써 그 가리움을 말할 수 있으리요.

 

養其無相하니 相故로 常存이요 守其無體하니 體故로 全眞이라 全眞相濟면 可以長久하니 天得其眞故長이요 地得其眞故久요 人得其眞故壽하느니 世人所以不能長久者는 爲喪其無相하고 散其無體하여 不能使百骸九竅與眞體 存 故로 死矣니라.

 

그 상이 없음을 기를 것이니 상이 짐짓 보존함이요 그 체가 없음을 지키나니 체가 짐짓 온전한 참이라. 온전한 참됨을 서로 구제하고 보면 가히 써 장구할 것이니 하늘이 그 참을 얻음으로 길고 땅이 그 참을 얻음으로 오래고 사람이 그 참을 얻음으로 수 하느니 세상 사람이 바에 써 능히 장구치 못함은 그 상이 없는 자리를 상실하고 그 체가 없음을 해산해서 능히 백해구규로 하여금 참 체성으로 더불어 아울러 존속케 함이라. 그러므로 죽게 되느니라.

( 통고경 끝 )

 

( 대통경 시작 - 편집자 )

先天而生하되 生而無形하고 後天而存하되 存而無體라 然而無體나 未嘗存也 故不可思議로다. 靜爲之性이나 心在其中이요 動爲之心이나 性在其中矣니로다. 心生性滅하고 心滅性現하느니 性現則如空無相하여 湛然圓滿이라 大道는 無相故로 內其攝於有하고 眞性은 無爲故로 外不生其心하느니 如如自然하여 廣無邊際로다. 對境忘境하니 不沈於六賊之魔하고 居塵出塵하니 不落於萬緣之化로다. 致靜不動하고 致和不遷하면 慧明十方하여 虛變無爲하리라.

 

하늘 먼저 낳되 생함이 그 형상이 없고 하늘 후에까지 존속해 있으되 존속함이 그 체성이 없음이니라. 그러나 체가 없어서 일찍이 존속할 수 없으니 그러므로 가히 사의할 수가 없도다. 정하면 성이라 하나 마음이 그 가운데에 있고 동하면 마음이라고 하나 성품이 그 가운데에 있음이로다. 마음이 생기면 성품이 멸하고 마음이 멸하면 성품이 나타나느니 성품이 나타나면 공해서 상이 없어 담연히 원만 하도다. 대도는 상이 없음이라. 그러므로 안으로 모든 있음을 끼워 안고 있으며 참 성품은 함이 없음이라. 그러므로 밖으로 그 마음이 나타나지 아니하느니 여여히 자연 그대로 넓어서 끝과 끝이 없도다. 경계를 대하되 경계를 잊게 되느니 육적의 마에 잠기지 아니하고 진세에 거하되 진세를 떠나니 일만 인연 관계로 변화됨이 떨어지지 아니 하도다. 정에 이르러서 동하지 아니하고 화한데 이르러서 옮기지 아니하면 지혜광명이 시방세계에 비치어서 허하게 변화하되 다함이 없느니라.

( 대통경 끝 )

 

 

 

제8장 총명강요(總明綱要) 修養으로 定力을 얻는 공부

 

不修養入定之工은 其法不一이라. 有外修養法하고 有內修養法하며 有外定靜法하고 有內定靜法하느니 學者能洞觀諸法하여 合用方便然後에 始可無缺而得大成하리라. 且有外道之定과 自性之定과 小乘之定과 大乘之定하여 於此에 亦明瓣而善察然後에 始可無謬而得正定하리라. 是以로 修養之道는 理一而法多하고 言殊而義同하리니 若不善解綱要면 則恐有執着偏修之病 故로 更擧全篇之總義하여 別爲簡辦如左하노라. 外修養者는 修養之意는 在於對治外境이니 對治外境者는 一 避境工夫니 初學之時에 當遠避外誘境界是也요. 二 捨事工夫니 不緊之事와 煩雜之段을 當捨而不作이 是也요. 三 依法工夫니 信受上乘解脫之法하여 求安心於眞理가 是也요. 四 多聞工夫니 多聞偉人寬大實話하여 常存心於大局이 是也니라.

 

대범 수양 입정의 공부는 그 법이 하나가 아니니, 외수양법(外修養法)이 있고 내수양법(內修養法)이 있으며, 외정정법(外定靜法)이 있고 내정정법(內定靜法)이 있나니, 공부하는 사람은 능히 여러 법을 통관(洞觀)하여 방편에 맞게 쓴 후에 가히 결함 없는 것으로 시작하여 큰 성공을 얻을 것이니라.

  또한 자성의 정과 소승의 정과 대승의 정이 있으니, 이에 역시 밝게 판단하여 잘 고찰한 후에 가히 그릇됨이 없는 것으로 시작하여 바른 정(定)을 얻으라. 이것이 이 수양의 도이니라. 이치가 법이 많으니, 말은 비록 다르나 뜻은 모두 같은 것이라 만약 그 강요를 잘 알지 못하면 집착에 빠질까 우려하노라. 편벽된 수행이 병통이므로 다시 이 책의 전편의 모든 뜻을 별도로 간단하게 밝힌 것이다.

외수양(外修養)이라고 하는 것은, 그 수양의 의지가 외경(外境)을 대치(對治)하는 데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외경을 대치한다는 것은,

  첫째는 피경(避境)공부이니, 처음 공부를 할 때에 마땅히 밖에서 유혹하는 경계를 멀리 피해야 하는 것이요,

  둘째는 사사(捨事)공부이니, 긴요하지 않은 일과 너무 번잡한 일은 마땅히 놓아버리고 짓지 말아야 하는 것이요,

  셋째는 의법(依法)공부이니, 상승 해탈의 법을 믿어 받들어 진리로 안심을 구하는 것이요,

  넷째는 다문(多聞)공부이니, 위인들의 관대한 실화를 많이 들어 항상 국량을 크게 하는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니라.

 

做工之際에 行此四事하면 則自然外境平定하여 無有忤心之段하리니 古語에 云 樹欲靜而風不止라하니 風者는 外境也라. 風之則樹靜하고 境治則心安이니라. 內修養者는 修養之意가 在於內修自心이니 內修自心者는 一 執心工夫니 念佛坐禪과 及一切時中에 常念執心不動하여 使吾心神으로 不得流放外境이니 如馴牛人執不捨 是也요 二 觀心工夫니 執心稍可면 則又放任自適 而但觀心所之하여 制其妄念而已니 如馴牛人의 捨 觀牛하여 但制其錯行이 是也요 三 無心工夫니 觀心己熟이면 則又捨觀相 明寂自在 觀而無所觀이니 如馴牛人이 始入人牛不二之境하여 動靜一眞 是也니라.

 

 그러므로 공부를 하여갈 즈음에 이 네 가지 일을 행하면 자연히 외경이 평정(平定)하여져서 방해하는 마음의 폐단이 없으리라.

  옛 말에 이르기를,“나무가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는다.”하였으니, 바람은 곧 외경이니라. 바람이 그친 즉 나무가 고요하고, 경계를 다스린즉 마음이 안정되는 것이니라.

  내수양(內修養)이라고 하는 것은, 수양의 뜻이 안으로 닦아 쉬어버리는 데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안으로 스스로의 마음을 닦는 것은,

  첫째, 집심(執心)공부이니, 염불 좌선을 할 때와 일체의 때 가운데 항상 마음을 잘 붙잡아 동하지 아니하고 나의 마음과 정신으로 하여금 밖의 경계에 흐르지 않게 놓아버리지 않는 것이니, 소를 길들이는 사람이 고삐를 단단히 잡고 놓지 않은 것과 같으니라.

  둘째, 관심(觀心)공부이니, 집심공부가 점차 익숙해지면 혹은 방임 자적(自適)하면서 다만 마음이 가는 것을 보아 그 망념만을 제재(制裁)하는 것이니, 마치 소를 길들이는 사람이 고삐를 놓고 소를 보되 다만 어지럽게 다니는 것을 제재하는 것과 같은 것이요,

  셋째, 무심(無心)공부이니, 관심공부가 이미 순숙되면 혹은 본다는 상도 놓아서 서로 밝고 고요하게 자재함에 맡겨보는 것이니, 마치 소를 길들이는 사람이 사람과 소가 둘이 아닌 지경에 처음 들어가는 것과 같아서, 동과 정이 한가지로 참되느니라.

 

經云 心淨則一切淨하느니 心者는 包虛空萬相者也라. 心一淨이면 則百千外境이 一切淸淨하여 境我無間하여 同成淨土니라. 外定靜者는 定靜之義가 在於立志不動이니 立志不動者는 一 發大願心이니 願心이 己極하면 則千萬世緣이 雖當面橫在라도 視若不見하여 小不掛心이니 如釋迦世尊이 發心大道하여 王宮之樂과 雪山之苦를 無留心內底思想이 是也요 二 發大信心이니 信心己極이면 則千萬世法이 雖紛紜並處라도 更無思量取捨之心에 如慧可之於達磨也니 一信決志에 忘軀求法底思想이 是也요 三 發大忿心이니 忿心己極이면 則千萬障가 包圍重疊이라도 無有恐怖退縮之心어니 如耶蘇之十二司徒가 冒險守道하여 死而不己底思想 是也니라. 做工之際에 有此三思想則自然立志가 如山하여 無有動搖하리라(特擧世尊慧可十二司徒는 但指一例而言 諸聖之能入道門者는 皆有若是底心思이니 且曰 非云實行之果有同一而但思想之同一也니라)

 

  경에 이르시기를,“마음이 청정(淸淨)하면 일체가 다 청정하여, 마음이란 것이 허공과 만상을 포함하였다.”고 하셨거니와, 한 마음이 청정하면 백 천 외경이 다 청정하여 경계와 내가 사이가 없이 한가지로 정토(淨土)를 이루리라.

  외정정(外定靜)이라고 하는 것은, 정정(定靜)의 뜻이 입지(立志)가 흔들리지 아니한 데에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입지가 부동하다는 것은,

  첫째는 큰 서원을 발하는 것이니, 서원이 지극하면 천만 가지 세상의 인연이 앞에 가로 놓여 있어도 보되 보이지 않고 마음에 조금도 걸림이 없는 것이니, 마치 석가세존께서 대도에 발심하여 왕궁의 쾌락과 설산(雪山)의 고(苦)가 마음과 사상(思想)에 머물지 않음과 같은 것이요,

  둘째는 큰 신심을 발하는 것이니, 신심이 지극하면 천만 세간의 법이 비록 분운(紛紜)한 곳에 아울러 처하여도 다시 사량과 취사하는 분별심이 없는 것이니, 마치 혜가(慧可)가 달마에게 한번 믿고 뜻을 결정하여 몸을 잊고 법을 구하는 사상과 같은 것이요,

  셋째는 큰 분심을 발하는 것이니, 분심이 지극하면 천만 장애가 비록 포위 중첩하여도 두려워하고 물러나는 마음이 없는 것이니, 마치 예수의 십이사도가 위험을 무릅쓰고 도를 지키며 죽어도 마지않는 사상과 같은 것이니라.

  그러므로 공부를 할 즈음에 이 세 가지 사상이 있으면 자연히 입지가 태산 같아서 흔들림이 없으리라.(특별히 세존과 혜가와 십이사도를 드는 것은 다만 한 예를 들어 말한 것이고, 모든 성현들의 능히 도문에 들어간 것은 모두 다 이러한 심사(心思)이며, 또한 표현은 서로 다르지만 실행의 결과는 하나이며 근본 사상도 하나로 같으니라.)

 

 

 

이 글을 쓰신 님께

 

저는 96년도부터 수도생활을 해본다고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몇 년 전 정신없이 이것저것 자료를 구해 보던 중 인터넷을 통하여 님께서 쓰신 글을 보고 소중하게 간직하여 오다가 저의 브로그를 정리하며 귀한 자료라 사료되어 이곳에 올려놓았습니다. 수시로 탐독하며 공부해 나가는데 마음을 다스르며, 차후에라도 인연이 있는 분들이 게시면 수행에 참고하실 수 있게 하고 싶은 욕심에서입니다. 귀중한 글을 담아오며 아무런 양해의 말씀도 드리지 못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곳을 통하여 사죄의 말씀을 드리오며 이곳에 이 글을 올려둘 수 있도록 선처하여 주시기를 간청 올립니다. 만약 저작권 관계로 불허하신다면 글을 남겨주십시오.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재삼 너그러우신 아량으로 용서하여 주시기를 간청 올림니다. 현풍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