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학/단학

봉우연구소 7. 國 譯 『 삼현수간 (三賢手簡) 』

검은바람현풍 2025. 1. 11. 10:54

봉우연구소 

7.  國 譯 삼현수간 (三賢手簡)

                                                                                                金 榮 福 譯

 

해제 (解題)

 

三賢手簡은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1537-1599),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 우계(牛溪) 성혼(成渾:1535-1598)의 서로 오고간 서신(書信)들을 모아놓은 책인데 일명 현승편(玄繩編)이라 한다.

율곡선생은 퇴계(退溪)선생과 함께 시대를 다소 前後하여 하늘이 내신 우리나라의 현철(賢哲)이니 그 학문과 전통은 전국을 망라하고 있으나 특히 퇴계는 주리(主理)로 영남(嶺南), 율곡은 주기(主氣)로 기호(畿湖)를 중심으로 주체를 이루었다.

 

한편 율곡과 때와 곳을 같이하여 의론(議論)이 귀일(歸一)한 학자는 우계 성혼과 구봉 송익필을 손꼽지 않을 수 없으니, 이 세분은 하나이면서 셋이요, 셋이면서 하나인 채로 오늘에 이르렀다.

이들의 평소 오고간 서간(書簡) 및 잡록(雜錄)들이 많았으나, 병화(兵火)에 산실(散失)되고 얼마 남지 않은 것을 구봉(龜峯)의 아들 취대(就大)가 수습하여 후세에 전하려 함에 구봉이 친히 그 서두(緖頭)에 연유(緣由)를 간략히 적어놓으니, 때는 선조 32년 기해(己亥:1599) 중춘(仲春)이요, 율곡 졸서(卒逝:죽음)15, 우계 졸서 한 다음해였다.

여기서 편명(編名)을 현승(玄繩)이라 함은 특별한 전고(典故)는 아직 발견하지 못하였으나, 짐작컨대 현()은 현묘(玄妙), 심오(深奧)를 뜻하고, ()은 곧 준칙(準則)이니 법도 또는 변화를 뜻하는 것과 견주어 유추(類推)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삼현수간(三賢手簡)은 구봉이 서문을 쓰고 현승편(玄繩編)을 이름 붙인 뒤, 구봉 집안에서 바로 직제자(直弟子)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집안으로 전해진 뒤 서기 1762(영조 38) 김장생의 6대손 김상성(金相聖)에 의해 115책으로 이루어진 문집 구봉집(龜峯集)의 제 4-5권에 수록되었다.

 

구봉집(龜峯集)<현승편>은 이 삼현수간(三賢手簡)을 토대로 하여 많은 편지 자료들을 덧붙여 배로 분량이 늘어나 있다.

삼현수간(三賢手簡)은 사계(沙溪) 집안에 소장되어 있다가 사계의 수제자인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에게 전해지고, 우암은 다시 자신의 수제자인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에게 전했다고 한다.

지금 삼현수간(三賢手簡)원본은 호암미술관에서 소장중이다.

전해오는 얘기로는 우암(尤庵)이 정치적으로 불우하여 귀양을 갈 때도 율곡일기 친필본과 이 삼현수간(三賢手簡)만은 꼭 끼고 다녔다고 할 정도로 애지중지 했었다 한다.

후대에 이루어진 구봉집(龜峯集)<현승편>은 이같은 배경으로 볼 때 구봉의 제자인 사계집안 광김(光山金氏)과 우암집안 은송(恩津宋氏) 등이 주동이 되어 엮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아무튼 이 삼현수간(三賢手簡)은 율곡 학맥(學脈)과 사계예론(禮論)의 중요한 원류가 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삼현수간(三賢手簡)의 사료적(史料的) 가치는 다음과 같다.

- 지금까지 전하는 여러 유묵(遺墨) 중에서 이 삼현(三賢)의 글씨는 어떤 준칙(準則)이 될만한 친필 글씨가 없었다는 점.

- 우리나라에서 조선시대 철학을 논할 때는 반드시 퇴계와 율곡으로 대별되는데, 이 간첩(簡帖)은 율곡파의 창시자인 율곡과 그와 학설을 같이하는 우계와 구봉 세 분의 철학적-성리학(性理學)과 예학(禮學)- 질의응답을 모아 놓은 것이라는 점.

- 세분 문집에 실린 내용과 여기에 친필로 쓰여 있는 내용과는 약간의 자구(字句)의 출입(出入)이 있으며, 각 문집에 여기 실린 편지가 모두 수록되지 않았다는 점.

- 이렇게 한 가지 주제로 종합적인 선현(先賢)의 편지 모음집이 지금 우리에게 전해오는 것이 거의 없었다는 점.

이와 같이 여러 점으로 생각해보면 삼현수간(三賢手簡)의 가치란 고려청자나 조선 백자와 다른 높은 정신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하겠다.

참고로 구봉 송익필과 우계 성혼, 율곡 이이의 약전(略傳)을 덧붙인다.

송익필(宋翼弼)의 자()는 운장(雲長)이니, 경기도 고양의 구봉산(龜峯山) 아래에 살아서 학자들이 구봉이라 칭한다.

()는 통정(通政) 사련(祀連)이요, ()는 연일(延日) 정씨(鄭氏)이니 중종(中宗) 29(1534)에 출생하여 선조(宣祖) 32(1599) 88일에 충남 면천(沔川) 우사(寓舍)에서 졸()하니 수() 66세이다.

재학(才學)에 장()하여 고명학흡(高明博洽)으로 저명하고 또 문학에 조예가 깊어 이산해(李山海), 최경창(崔慶昌), 백광훈(白光勳), 최입( ), 이순인(李純仁), 윤탁연(尹卓然), 하응임(河應臨)과 함께 팔문장(八文章)이라 일컬으니 시()는 이백(李白)을 주로 하고 문()은 좌전(左傳)과 사마천(司馬遷)을 주로 하였으며, 율곡우계와 교분이 두터워 서로 논쟁하고 강마(講磨)하여 모두 외우(畏友)로 여기었다.

사칠이기론(四七理氣論)은 율곡의 설과 일치하였으니 현승편(玄繩編)이 있으며, 후진(後進)을 많이 개도(開導)하였으니 김장생(金長生), 김집(金集) 부자(父子)를 위시하여 정엽(鄭曄), 정홍명(鄭弘溟), 서성( ), 강찬(姜燦) 등이 있다.

글씨는 학문과 시문(詩文)에 가려졌지만 당대에 이름이 높았다.

초서(草書)는 소쇄혹일(瀟灑 :기운이 맑고 깨끗하여 높은 경지에 도달함)하다는 평을 받았다.

성혼(成渾)의 호()는 우계(牛溪), ()는 호원(浩原)이요, 청송(廳松) 수침(守琛)의 아들이다.

중종(中宗) 30(1535)에 서울 순화방(順化坊)에서 출생하여 선조(宣祖) 31(1598) 경기도 파주(坡州) 우계에서 졸()하니 향년이 64세요, 시호를 문간(文簡)이라 하였다.

율곡보다 일년 년장(年長)이나 20세에 율곡과 정교(定交)하니 처음 사사(師事:스승으로 섬김)하려 하다가 율곡의 만류로 도의교(道義交)를 맺어 일생을 성현(聖賢)사업으로 상약(相約:서로 약속함) 하였다.

소시(少時)부터 과거(科擧)를 사절하고 우계에 은거하여 성리(性理)의 학문에 전정(專精)하고 휴암(休菴) 백인걸(白仁傑:1497-1579)에게 수학(修學)하였으며, 경기감사 윤현(尹炫)이 학행탁이(學行卓異:학문과 행실이 뛰어남)로 천거하여 참봉(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36세에 적성현감을 불부(不赴:임지에 부임하지 않음)하였으며 벼슬은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다. 원근의 종학(從學)하는 이 많으므로 서실의(書室儀)를 지어 재규(齋規)를 세우고 율곡과 사단칠정(四端七情)의 이기설(理氣說)을 논란함에 전인(前人)의 미발(未發)한 것이 많았다.

우계의 학문은 율곡과 서로 강마(講磨)하여 여택지익(麗澤之益)이 있어 마침내 율곡의 설과 상부(相符)하니 율곡이 졸서함에 비탄하여 말하기를, "율곡이 도체(道體)에 있어서 그 대원(大原)을 통견(洞見)하였으니 이른바 천지의 화()는 이본(異本)이 없고 인심의 발()도 이원(二原)이 없으며 이기(理氣)는 호발(互發)할 수 없다는 등의 설은 모두 실견득(實見得)한 것이니 참으로 나의 스승이요, 진실로 산하간기(山河間氣)요 삼대상(三代上) 인물이나 이 세상에서 이름이 없이 뜻을 품고 별세하니 슬프다" 라고 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율곡도 일찍이 말하기를 "만약 견해의 이름으로 말하면 내가 일일지장(一日之長)이 있을 것이나 그 조리(操履:몸가짐과 마음가짐)의 독실함은 나도 미치지 못한다" 하였다.

글씨는 가법(家法)을 이어 부() 수침(守琛)과 당대에 이름이 높았다.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자()는 숙헌(叔獻)이요, 본은 덕수(德水)이다.

아버지는 감찰(監察) 원수(元秀)이고, 어머니는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이다.

중종 31(1536) 226일에 강릉 북평촌에 있는 외가 오죽헌에서 출생하고 선조 17(1584) 정월 16일에 서울 대사동(大寺洞)에서 졸서(卒逝)하니 향년 49세이었다. 뒤에 시호를 문성(文成)이라 하였다.

13세에 진사초시(進士初試)에 발해(發解:합격)함에 문장이 날로 진전하여 명성이 더욱 높아졌고 16세에 내간(內艱:모친상)을 당하여 여묘집상(廬墓執喪:묘 옆에서 3년상을 치름)하고 19세에 비통을 이기지 못하여 우연히 불서(佛書)를 보다 사생지설(死生之說)에 감동되어 금강산에 들어가서 선학(禪學)에 침식을 잊다가 얼마 후 깨달은 바 있어 유학(儒學)에 전심하고 자경문(自警文)을 지어 자성(自省)하니 율곡의 입지는 이에서 비롯하였다.

22세에 도산(陶山)에서 퇴계를 뵙고 궁리거경(窮理居敬)을 논란하였으며, 23세에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별시(別試)에 장원하고 29세에 진사 및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니 전후 모두 방두(榜頭:수석) 이어서 구도장원(九度壯元)이라 칭하였다.

호조좌랑(戶曹佐郞)으로 사적(仕籍)에 올라 여러 벼슬을 거쳐 병조판서(兵曹判書), 우참찬(右參贊)에 이르렀다.

41세에 동서분당이 치열하므로 율곡은 조정(調停)에 힘쓰다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율곡에서 석담으로 은퇴하고 이듬해에 격몽요결(擊蒙要訣)이 완성되며 향약회집법(鄕約會集法) 및 사창(社倉)을 의립(議立)하고 44세에 소학집주(小學集註)를 완성하였다.

48세에 경연(經筵)에 입대(入對)하여 십만병을 예양(預養:미리 길러 놓음)하여 불우(不虞:미리 헤아리지 못함)에 대비할 것을 청하며 말하기를, "십년 안에 토붕(土崩:흙이 무너지듯 어찌할 수 없게 됨)의 화()가 있을 것이라 도성(都城)2, 각 도에 1만씩을 양병하여야 한다" 는 것이었다.

 

율곡의 학설은 퇴계와 같이 우주의 본체는 이기이원(理氣二元)의 개념으로 구성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 입론초두(立論初頭)에 있어 이기(理氣)는 공간적으로 서로 분리하거나 합하는 것이 없고 따라서 이기(理氣)는 시간적으로 선()하며 후()하는 것도 없다. 인심의 발()이 이원(二原)이 없고 이기(理氣)가 호발(互發)할 수 없다고 지적하여 퇴계의 설()을 배제(排除)하고 이통기국(이통기국:는 통하고 는 국한됨), 기발이승(氣發理乘)을 역설하면서 사단칠정(四端七情)이 별개의 정()이 아니요, 도심인심(道心人心)이 별종의 심()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또 본연지기(本然之氣)심시기(心是氣) 라는 말을 새로 창출하였고 이(), () 양자 중에서 기()만을 주() 한 것이 아니라 기발이승(氣發理乘) 이라는 말을 하여 주리파(主理派)들이 주기파(主氣派)라고 호칭하게 된다.

글씨에도 능하여 송설체(松雪體)를 습득했으며 그림에도 뛰어났다 한다.

 

원문 (原文)

 

吾與牛溪栗谷 最相善 今皆去世 吾獨生 能復幾日 而隨死耶 迷子就大 曾於兵火 散亡之餘 收拾二友書尺 及吾所報答私稿 及雜錄略干紙以示余 遂合以成帙 爲未死前觀感之資 且欲傳之一家云.

 

萬曆 己亥 仲春 宋翼弼 題.

 

해석

 

나와 우계, 율곡은 가장 서로 친한 사이였으나 지금은 모두 세상을 떠났다. 나만 홀로 살아남았으나, 다시 몇 날이나 더 있다 따라 죽을지 알 수 없다. 아들 취대(就大)가 일찍이 병화(兵火:임진왜란)에 없어지고 흩어진 나머지 가운데에서 율곡과 우계 두 친구의 편지들과 내가 주고받은 편지 및 잡다한 글들 약간을 거두어 모아서 나에게 보인다. 이에 이를 모아 서첩(書帖)을 만들어 내가 죽기 전에 보고 두 친구를 생각하는 자료로 삼으며, 차제에 한 집안에 전해지길 바랄 뿐이다.

 

선조 32(1599) 중춘(仲春:음력 2) 송익필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