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학/동양철학

[스크랩] [제6장 象數論] 제2절 象數의 起原과 發生原因 1,象數의 起源

검은바람현풍 2012. 3. 9. 20:04

2 象數起源發生原因

 

 

1. 象數의 起源

 

  一般的으로 象數學의 出發을 河圖와 洛書로 보데, 이 圖象의 由來에 관해서는 不分明한 點이 적지 않다. 그러나, 文獻(문헌)을 土臺(토대)로하여 본다면, 伏羲氏(복희씨)와 禹(우)임금의 傳說(전설)에 基因하고 있다.

 

 《書經서경》의 顧命篇(고명편)에 보면 “天球(천구)와 河圖(하도)가 東序(동서)에 있다고”하여, 洛書(낙서)의 言及은 없으나 河圖의 用語가 처음으로 나오고 있다. 그리고 洪範篇(홍범편)에 보면, “舜(순)임금이 禹(우)에게 王을 잇게 하여 治水(치수)하게 하니 天帝(천제)가 洪範九疇(홍범구주)를 禹에게 주어 治水하게 하였다”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天帝가 洪範九疇를 주었다는 것은 落水에서 背紋(배문)이 있는 神龜(신구)가 出現함에 禹임금이 그것을 보고 天地의 大法인 洛書의 原理를 그리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河圖 洛書에 대한 具體的인 言及은《易經역경에서 비롯하였는데「繫辭傳계사전에 보면, “河水(하수)에서 圖가 나오고 洛水(낙수)에서 書가 나오니 聖人이 이를 취하였다” 고 하였다.

  그런데, 그 聖人이 누군지에 대해서《漢書한서五行志에 보면, 劉欽(유흠)이 말하기를, “伏羲氏(복희씨)가 하늘의 뜻을 받아 왕 노릇 할 때, 河圖를 받아서 書卦(서괘)하였으니, 八卦가 이것이고. 禹임금께서 洪水(홍수)를 治하실 때, 洛書를 받아서 法陣(법진)하였으니, 洪範이 이것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에 補充(보충)하여《晋書진서五行志에서는, “河圖와 洛書는 서로 經緯(경위)가 되고 八卦와 九章은 서로 表裏(표리)가 되었다”고 하여 河圖와 洛書 兩者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 世上理致임을 說明하고 있다. 그러나 洛書가 洪範의 基本이 되었다는 것은 모호한 감이 없지 않다.

 

  여하튼, 文獻上으로는 象數學의 嚆矢(효시)인 河圖와 洛書가 伏羲氏와 禹임금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전해 오는 것이 事實이다. 그러나 앞에서 言及한 바 있듯이, 河圖와 洛書는 실로 不可分의 關係에 있는 것이다. 河圖를 모르고는 洛書를 알 수 없는 것이고, 洛書를 모르고는 결코 河圖를 알 수 없는 것이다. 이는 마치 실을 모르고는 바늘의 쓰임을 알 수 없는 것이고, 바늘을 모르고는 실의 쓰임을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理致인 것이다.

  옛적에, 聖人이 계셔 五行과 天干의 理致를 깨우치셨으나, 그 原理를 形界의 言語로써는 사람들에게 理解시킬 수 없다는 事實을 깨닫고 象界의 言語를 만들게 되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河圖와 洛書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象界는 形而上의 領域이기 때문에 이곳의 原理를 形界의 固定觀念으로 뒤덮힌 人間에게 理解시킨다는 것은 至難(지난) 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聖人(성인)은 象界를 表現할 수 있는 一種의 言語로서 圖象을 그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五行의 原理에 있어서, 相生의 原理를 안다는 것은 곧 相剋의 原理도 同時에 아는 것이다. 이는 不幸을 모르고는 幸福의 槪念을 알 수 없고, ‘善’을 모르고는 ‘惡’의 槪念을 도저히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理致이다. 다시 말해서, 對稱(대칭)의 槪念(개념)은 어느 한 쪽의 槪念(개념)이 없이는 다른 한 쪽도 成立될 수 없는, 실로 兩者가 共存하는 不可分의 關係(관계)인 것이다. 이렇게 不可分한 生剋의 原理가 곧 河圖와 洛書의 原理인 것으로, 河圖가 만들어졌다 함은 곧 洛書도 同時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意味 하는 것이다.

  그런데, 時代의 差異(차이)를 두고 河圖가 먼저 나오고, 뒤에 洛書가 나오게 되었다는 것은 실로 納得(납득)하기 어려운 것이 아닐 수 없다. 河圖와 洛書가 原理가 아닌 어떤 物件이라 한다면 그 出現의 前後가 있을 수 있겠으나, 對稱의 原理인 이상 時代를 달리하여 出現 하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河圖를 얻게 되었을 때, 그 原理를 전혀 理解하지 못하고 간직만 하고 있었다면, 對稱의 槪念에서 벗어난 單純한 物件에 不過한즉, 時代의 差異의 차이란 當然히 있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즉, 傳說(전설)에 나온 대로 伏羲氏가 河水에서 龍馬의 무늬를 보고 河圖를 그리게 되었거나, 아니면 天帝로부터 啓示(계시)를 받아 그리게 되었다고 한다면, 分明한것은 伏羲氏는 河圖의 實際的 主人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河圖만 그리고 洛書를 그리지 않았다 함은, 相生의 原理만 알고 相剋의 原理는 모른다는 말이니, 이는 밝음은 알고 어둠은 모르는 것으로 對稱의 槪念(개념)을 깨뜨리는 矛盾(모순)을 범하는 것이다. 만일, 伏羲氏가 陰陽五行의 原理를 깨닫고 河圖를 그린 것이 아니라, 단지 河圖를 그린 어떤 聖人이나 그 後裔(후예)들로부터 傳受(전수)받은 것이라면, 河圖가 먼저 나오고 後에 洛書가 나오게 된 점이 納得 可能할 것이다.

 

  또 한가지 留意(유의)할 점은 陰陽五行의 原理를 그린 것이 비단 河圖 洛書에만 局限되는 것이 아니라는 點이다. 河洛의 原理는 生剋의 原理와 調和(조화)와 不調和(부조화)의 原理를 담고 있는 것이지만 陰陽五行原理의 全部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四象과 ‘土’가 어떻게 생겨나서 五行으로 엮어지는가를 담고 있는 圖象으로는 ‘윷놀이’를 들 수 있고, 循環(순환)의 秘密(비밀)이 담겨있는 金火交易의 原理는 ‘空氣놀이’에 담겨 있다. 또한, ‘形’을 創出하는 最上의 原理인 ‘九宮八風運動’은 ‘바둑놀이’에 담겨 있는 것이다.

  圖象과 놀이의 差異란 어떤 原理를 表現함에 있어서, ‘靜’的으로 定型(정형)되게 表現할 수 있으면 圖象을 그리게 되는 것이고, 만일 原理가 複雜多樣(복잡다양)하게 엮어져 固定的인 表現이 不可能할 때에는 圖象이 아닌 ‘놀이’를 만들어 ‘動’的으로 表現하게 되는 것이다. 실로, 圖象과 놀이의 區分이란 原理를 表現함에 있어 靜的혹은動的으로 表現해야 하는지에 따라 나뉘는 것이다. 즉, 原理를 表現하는 方法上의 差異(차이)일 뿐이다. 例(예)를 들어, 洛書에서 金火交易을 表現함에 金과火의 자리를 바꾸어 配置(배치)한 것으로도 原理의 大綱(대강)은 알 수 있다. 그러나, 具體的으로 ‘土’가 어떤 作用으로 金火交易을 이루게 되는지의 過程(과정)은 把握할 수 없는 것이다. 이 具體的 過程은 單純히 定型(정형)된 그림으로 表現 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에, ‘空氣놀이’를 만들어 土가 木火金水,各各의 空氣에 어떻게 作用을 하고, 마침내 金火交易을 이루어내는 지를 說明하게 된 것이다. 또한, 九宮八風運動에 있어서도 定型된 圖象으로는 그 複雜(복잡)하고 奧妙(오묘)한 理致를 表現할 수 없기에 ‘바둑놀이’를 通하여 具現한 것이다.

 

  이런 觀點(관점)에서 본다면, 河圖 洛書가 重要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全的으로 이것에만 重點을 두어 哲學을 硏究(연구)하는 것은 지나친 偏狹(편협)에 不過한 것이 되고 만다. 確實(확실)히 드러난 것만을 論하는 科學徒(과학도)라면 모를까, 無形의 象界를 硏究(연구)하는 哲學徒(철학도)라면 文獻에 나와 있는 것만을 다루어서는 안 될 것이다. 哲學의 道具는 理致를 바르게 볼 수 있는 理性에 있는 것이지, 傳說과 神話가 澎湃(팽배) 했던 元始社會의 記錄(기록)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文獻을 無視해서는 안되지만 그렇다고 터무니없는 얘기를 무조건 받아 들여서도 안 되는 것이다. 오직 理性의 잣대로서만 그 正確과 眞實을 期할 수 있는 것이다.

  文獻에 記錄되지 않았어도 그 보다 더 重要한 原理가 우리 周邊(주변)에 널려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先朝들은 첫째는, 動的原理의 表現과. 둘째는, 歲月(세월)의 흐름에 따른 消失(소실)을 막고자 하는 두 가지 目的에 의하여 宇宙變化의 原理가 담긴 ‘놀이’를 만들어 널리 퍼지게 하였던 것이다.

 

  假令, 으뜸圖象, 곤지곤지, 손뼉 치기, 가위 바위 보 等의 몸짓과, 空氣놀이, 바둑놀이, 고누놀이, 윷놀이…… 等等의 ‘놀이’에 담겨 있는 深奧(심오)한 宇宙原理의 秘義(비의)들은 結局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東洋哲學의 根源이 옆 나라에 있는 것이 아닌, 바로 우리 韓民族(한민족)에 있다는 事實을 說明하는 것이다.

  우리의 先朝들은 宇宙變化原理의 根幹인 五行思想을 백성에게 가르칠 때, 定型으로 가능한 것은 河圖 洛書와 같이 그림으로 그려 가르쳤고, 圖象으로 不可能한 것은 動的인 놀이를 통하여 가르쳤던 것이다.

  요컨대, 象數의 起源은 宇宙變化 原理가 담긴 놀이들을 日常的으로 즐기던 我民族의 선조들에게 있으며, 本書의 모든 內容이 그것을 證明(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太一論에서 始作하는 이 冊의 모든 內容은 어떤 文獻에도 나와 있지 않으며, 또한 世間에 膾炙(회자)되는 내용도 아닌 것으로, 오직 我民族의 始祖이신 檀儉天子님으로부터 認許(인허)를 받아 眞理를 밝히는 것이다.

 

  여하튼, 河圖와 洛書가 서로 다른 時代에 나왔다는 記錄은 理致的으로는 矛盾된 것으로, 두 가지 推論(추론)을 할 수 있다. 첫째, 가장 可能性이 높은 것으로 文獻의 記錄이 잘못 되었다는 것이다. 數 千年 前의 社會는 실로 神話와 傳說을 그대로 믿는 元始的 社會였던 것으로, 記錄함에 있어서 誇張(과장)과 修飾語(수식어)가 지나치게 添加(첨가)될 所持가 充分한 것이다. 河圖 洛書의 傳說에 나오는 龍馬(용마)나 神龜(신구)의 登場이 이것을 反映(반영)하는 것이다. 둘째, 文獻의 記錄이 맞는다면, 伏羲씨는 河圖의 原理를 眞實로 깨우치고 그린 것이 아니라는 事實이다. 다시 말하자면, 河圖와 洛書의 眞正한 主人은 伏羲씨도 禹임금도 아니며, 이들은 단지 傳受받은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로, 河圖 洛書를 만든 實際의 人物은 文獻에는 記錄되지 않은 그 어떤 聖人으로 보아야 마땅한 것이다.

출처 : 태극선법 현동선원
글쓴이 : 玄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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