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三節 數理의 신비 1. 數理에 담긴 精, 氣, 神 [太一論]에서, 絶對體인 太一에서 精氣神 三極이 갈라져 나오고, 三極이 서로 엮어지고 變化(변화)하면서 萬象과 萬物을 創造(창조)하게 되었음을 밝힌 바 있다. 이것은 數理로 본다면, 하나(太一)에서 셋(精, 氣, 神)이 나오고, 셋에서 萬物을 創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실로 《道德經》에 나오는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의 句節과 一致하는 것이다. 그런데, 世間에는 太極에서 陰陽이 갈라져 나오고, 이 陰陽의 作用에 의해 萬物이 비롯되었다고 믿고 있다. 또한, 이러한 믿음은 古今을 莫論하고 疑心(의심)의 餘地(여지) 없이 眞理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實情(실정)이다. 그렇다면 “道生一,一生二,三生萬物”로 表現하는 것이 合當할진데, 어찌하여 老子는 ‘三’까지 와서 萬物을 始生한다고 表現하였으며, 또한 이 冊에서는 무슨 根據(근거)로 精 ,氣 ,神 三極에서 萬物이 비롯되었다고 說破(설파)하고 있는가? 老子의 “三生萬物”이란 單純히 一,二,三,四......式으로, 數字가 늘어나는 原理와 같이 萬物이 하나부터 점차로 생겨나게 되었다는 뜻인지, 아니면 三이라는 數字에 어떤 特別한 理由가 있는 것인지 曖昧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果然 太一에서 ‘셋’이 나오고, 이 ‘셋’에서 萬物이 始生하게 되었는지를 ‘數理’로써 살펴보도록 하자. 數理에서 본 絶對體의 槪念(개념)은 ‘0’이다. ‘0’에서 一, 二, 三, 四, 五……式으로 數가 無限히 불어나게 된다. 그래서 老子는 ‘0’을 道로 놓고 여기서 一, 二, 三이 생기고, 三에서 萬物이 生成되었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數理에서 볼 때 ‘0’은 그 어떤 數도 없는 完全한 ‘無’인 것이다. 이런 ‘0’에서는 絶對로 一이 導出(도출)될 수 없다. 反面 ‘一’을 前提(전제)로 한다면, 이 一에서 二를 複製(복제)할 수 있고, 나아가 無限히 數를 늘려 갈 수 있다. 다시 말해, 오직 ‘一이라야 萬物을 創造해 낼 수 있는 것으로, 老子의 ‘道生一’의 表現에 있어서, 만일 ‘一’의 母體인 道를 ‘0’으로 前提하였다면, 이는 非論理的인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老子가 道를 ‘0’의 槪念으로 본 것이 아니라면 ‘0.1’, 아니면 ‘0.01’……이란 말인가? 내가 보건데, 老子는 ‘0’과 ‘一’의 槪念을 確悟(확오)한 것 같지 않다. 만일 ‘0’과 ‘1’을 안다면 天地의 秘密을 모두 푼 것이며 ‘道生一’이라는 表現은 결코 使用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見性成佛하여 絶對境인 涅槃(太一)에 오르게 된다면, 이 涅槃(열반)을 數理로써는 어떻게 表現하는 것이 合當할 것인가? ‘0’인가? 아니면 말쟁이들이 하는 式으로, ‘0도 그 어느 것도 없는 것이며, 그러면서도 모두 있는 것인가? 만일 前者와 같이 第一原因인 絶對的 自存體가 數理로써 ‘0’이라 한다면, 數理에서의 ‘0’이란 곧 絶對的 無이므로 一, 二, 三, 四……의 數는 생길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萬物은 결코 生成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後者와 같이 ‘0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닌 알 수 없는 그 무엇’이라고 한다면 어떠한가? 이런 式의 詭辯(궤변)은 理致를 正確히 따지는 數理의 領域(영역)에서는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이 問題는 結局 數의 始作이 ‘0’인가 아니면 ‘1’인가 하는 問題로서, 【太一論】에서 다룬 바 있는 ‘第一原因’을 設定하는 問題와 符合(부합)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擧論(거론)컨데, 만일 涅槃의 境地에 오른 聖人께, 그 곳에 무엇이 있는지 數理로써 說明해 달라고 要請한다면 果然 어떻게 對答하실 것인가? ‘0이라고 할 것인가’, ‘一이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0도 一도 그 어느 것도 아니다’라고 할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不立文字임을 表現하는 뜻으로 그냥 웃고만 있을 것인가?
數理로써 涅槃을 表現한다면,「‘0’이라는 놈 하나(一)가 存在하고 있다」라고 해야 正確한 表現일 것이다. 涅槃에는 모든 것을 超越한 絶對體(0) 하나(1)만 存在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數理로 보았을 때는 0이 一이고 一이 0인 것이며, 般若心經에 나오는 色卽是空 空卽是色인 것이다. 이렇게 ‘0’이면서 ‘一’인 것을 ‘太一’이라 하는 것으로, ‘0’이기 때문에 第一原因인 自存體가 될 수 있는 것이며, ‘1’이기 때문에 萬物을 始生할 수 있는 것이다. 이 ‘太一’에서 萬物을 創造하는 過程(과정)에 있어서 가장 基本이 되는 要素를 數理로 表現한다면 ‘三’인 것이다. 즉, 太一에서 精, 氣 ,神 셋이 나오게 되고, 이것들이 서로 어우러져 變化한즉, 萬象과 萬物이 創出 되는 것이다. 이것을 老子의 表現을 빌리자면 [一生三, 三生萬物.]이 된다. 老子의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은 잘못된 表現인 것이다. 왜냐하면, 一에서 同時에 三까지 生하게 된 것이지 결코 順序대로 생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太一에서 太初点의 微動에 의해 均衡(絶對性)이 깨지면서 瞬間的(순간적)인 無極을 거쳐 精氣神 셋이 同時에 갈라져 나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精氣神 三極의 作用에 의해 萬物이 創造된 것이다. 그렇다면 一에서 어떻게 二를 거치지 않고 三까지 同時에 나오게 되었는지 數理로써 살펴보자.
表一
表二 表一을 보면, 一에서 二가 만들어지고, 이 二 에 一 을 더하여 三 이 生成 되었다. 그런데, 生成된 ‘二’가 ‘三’을 만듦에 있어서 ‘一’의 도움을 받아 ‘三’을 만들게 된다. 즉, 表一 은 모두 一 의 影響(영향)을 받지 않고는 生成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一. 二. 三은 모두 ‘一’을 바탕으로 生成된 數로서, 三이 生成될 때까지는 一의 直接的 影響을 받아야 可能한 것이다. 그러나 三이 生成된 다음부터는 3의 活動範圍(활동범위)가 틀려진다. 즉, 二가 活動할 수 있는 範圍는 오직 一과 다시 結合하는 것밖에는 없었지만, 三부터는 一과도 結合할 수 있고, 또한 二와도 結合할 수 있는 것으로, 그 選擇(선택)의 幅(폭)이 넓어진 것이다. 이것은 바로 三부터는 더 이상 ‘一’의 影響(영향)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意味하는 것으로, 나름대로의 變化와 作用에 의하여 四, 五, 六, 七, 八……로 無限히 數를 불려 나갈 수 있는 것이다. 或者는 四도 ‘三+一’로서 一의 影響을 받을 수 있다고 여길 수 있겠으나, 여기에는 큰 差異가 있다. 즉, 三까지는 一의 影響을 받지 않고는 生成될 수 없었지만, 이에 反하여 四는 ‘二+二’로서도 成立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一에서 三까지는 一의 影響이 絶對的이었으나 四부터는 一이 아닌 二의 組合으로써도 可能해진 것으로, 이는 絶對性을 脫皮(탈피)한 것을 意味하는 것이다. ‘一+三=四’의 論理는 ‘一+四=五’, ‘一+五=六’……式으로 모든 數에 適用할 수 있는 것으로, 이는 萬物의 根源이 곧 一(太一)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요컨대, ‘三’을 만들기까지는 ‘一’의 介入이 絶對的으로 必要하였으나, 四부터는 ‘一’이 아닌 二의 組合(조합)으로도 可能해진 것으로, 一의 絶對性이 喪失(상실)된 것이다. 이것은 곧 ‘一’에서 三까지 同時에 만들어졌다는 것을 意味한다. 왜냐하면 ‘一’은 絶對體이기 때문에 相對體인 ‘二’가 만들어지는 瞬間부터 더 이상의 關與가 不可能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一에서 同時에 三이 나온 것이고, ‘三’이 나온 후부터 ‘一’은 自炊(자취)를 감추게 되는 것이다. 整理(정리)하자면 ‘0’과 ‘一’인 太一에서 瞬間的으로 一, 二, 三이 同時에 나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셋 부터는 自體 結合에 의하여 數를 불려 나가게 된 것이다. 이것이 太一에서 精氣神 三極이 同時에 갈라져 나올 수밖에 없는 數理的 理由인 것이다. 老子의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은 [道(太一)生 一二三, 三生萬物]로 바꿔 表現해야 마땅한 것이다. 聖人을 넘어 至人의 境地까지 달한 老子께서 하물며 이런 理致를 몰랐겠는가마는, 이런 表現은 時代水準(시대수준)을 考慮(고려)하여 衆生들의 理解를 돕기위한 方便일 것이다. 여하튼, ‘一’에서 ‘三’이 나오고 ‘三’이 곧 ‘一’로 돌아가는 것, 다시말해서, 太一에서 精氣神 三極이 나오고, 이 精氣神三極이 統一되어 太一로 돌아가는 원리가 바로 國祖 檀儉天子께서 내려주신 ‘三位一體’의 眞理인 것이다. 그리고, 이 三位一體의 眞理가 다겨있는 經典이 바로 《天符經》 인 것이다. 當付하건데, 宇宙論을 다 보기 前에는, 뒷면에 풀어 놓은 天符經을 미리 보는 일이 없도록 하라. 宇宙論을 完全히 理解한 後에 各自가 天符經을 풀어 보는 것이, 智識이 아닌 ‘智慧’를 渴求(갈구)하는 올바른 哲學的 態度일 것이다. 만일, 天符經의 秘義(비의)가 明確하게 들어오지 않는다면, 다시 한번 本書를 精讀하고 試圖(시도)해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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