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원의 영계
극락과 지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4차원 신의 세계에 대한 명료한 이해가 선행되야 한다. 한 나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사회와 문화를 먼저 알아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차원론에 대한 강론을 통하여 신계의 실상을 살피고자 한다.
1. 차원론의 실상
0차원이란 점()으로 시공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 1차원이란 선(↔)이고, 2차원은 평면(□)이고, 3차원은 입체이다. 여기까지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이 시간의 축을 하나 더해 4차원을 제시했다. 가령, 약속을 하기 위해서는 장소 뿐만 아니라 시간도 정해야 한다. 이렇듯 3차원에서 어떤 결정을 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수적인 바, 아인슈타인은 시간의 축을 더하여 3차원을 4차원으로 확장시켰다.
0차원인 점()에서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지만, 1차원인 선(↔)과 2차원인 면(□), 그리고 3차원인 입체는 시간과 공간의 축 위에서 존립한다. 시간과 공간이 전제되지 않고는 0차원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3차원이라 할 때는 시간은 당연히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시간이 포함되어 있는 3차원에 또 다시 시간을 넣어 차원론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어떤 과학자는 현재의 세상을 4차원이라 하고, 미치오 가쿠 같은 과학자는 그대로 3차원이라 부르는 등 혼란이 가중되고 말았다.
단언컨대, 3차원은 이미 시간을 내포하고 있는 바 여기에 시간을 아무리 첨가해도 그대로 3차원의 세계일 뿐이다. 2차원의 존재가 수억 년을 노력해도 3차원 세계에 발을 디딜 수 없는 것과 같이 차원의 벽이란 높고 큰 것이다. 단순히 시간만 더하고 빼는 것으로 차원의 벽을 넘나든다면 그것은 차원이라 할 수 없다. 아인슈타인이 거론한 ‘시간’이란 수학에서 쓰는 ‘축’이나 ‘방’에 속하는 개념으로, 아인슈타인은 용어 설정의 오류를 범하고 만 것이다. 4차원이란 시간의 유무와 관계없이 입체의 3차원을 뛰어넘는 초입체의 세계를 말한다.
그런데 요즘 등장하는 현대 물리 이론을 보면 아인슈타인보다 한 술 떠 뜨고 있다. 그 한 예를 들어 보자.
『고차원의 도입은 창조의 비밀을 들추어내는 데 필수적일 것이다. 고차원 이론에 따르면, 빅뱅 이전 우리의 우주는 실제로 완벽한 10차원이었고, 그 세계에서는 차원과 차원 간의 여행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 10차원 세계는 불안정하여 마침내 둘로 갈라져, 서로 떨어진 두 개의 우주, 즉 4차원 우주 하나와 6차원 우주 하나를 창조하였다. [초공간]
이상은 한 저명한 물리학 서적에 나온 구절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차원에 대한 설정과 그 기준이 모호하게 되어 있다.
현재 인류는 3차원의 세계에 갇혀 살고 있다. 마치 우물에 갇혀 사는 개구리가 그 밖의 세상(4차원)을 모르는 것과 같다. 개구리는 아무리 뛰어 올라도 한없이 높은 우물 밖으로 나가 창공을 날아다닐 수 없다. 마찬가지로 현재의 과학은 4차원의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우물 속에서 맴돌고 있다.
대부분의 과학자는 4차원의 세계를 두드리기 위해서는 과학이 수만 년 동안 기하급수로 발전해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과학자는 무한한 세월이 흘러도 4차원은 결코 이해하거나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라 주장한다. 이는 마치 장님에게 색깔을 설명해 주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차원이란 이와 같이 절대적인 장벽이다. 1차원 선(↔)의 세계에서 사는 생물은 결코 2차원 면(□)의 세계를 이해 할 수 없다. 만일 이해하거나 침범할 수 있다면 그것은 ‘차원’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3차원에 사는 인간은 4차원에 쉽게 들어갈 수 없다. 단지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4차원과의 창구인 정신이 고도로 발달되어 4차원 진입이 결코 불가능하지 만은 않다는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대체로 육체에 종속되어 있어 차원의 벽을 넘기란 지난(至難)하다. 이제 인류는 수만 년 동안 진화하여 4차원 세계에 대하여 실눈을 뜨기 시작하였고, 차원의 벽을 허물기 위하여 과학자와 철학자 모두 힘을 합쳐 마지막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렇게 4차원의 벽 하나를 허물지 못하여 수만 년 동안 낑낑대고 있는데 뜬금없이 과학계에서는 10차원, 6차원 같은 용어가 등장하고 있다. 땅속에 갇혀 지표의 세계도 모르던 지렁이가 갑자기 도통을 했는지 온 우주를 입에 담기 시작한 것이다.
이론 물리학에서 쓰이는 10차원, 6차원… 등의 용어는 차원론에 대한 망각의 소치이다. 이것은 마치 5각형을 그리고 5차원이다 하고, 6각형을 그리고 6차원이다 하는 것과 같은 우치이다.
이론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10차원이란 10가지 방(축)을 이용하여 모든 물리를 통일하려는 시도로서, 10차원이 아니라 그 도구가 열 가지라는 뜻이다. 따라서 ‘10차원’ 대신 ‘10가지 방(축)’이란 용어로 대치해야 마땅할 것이다.
요컨대, 차원은 1차원에서 시작하여 5차원에서 끝을 맺는다. 5차원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의 정통 수리론(數理論)을 보면, 수(數)는 하나에서 동시에 셋이 생기고, 셋에서 다섯이 생겨난다. 절대체인 태일에서 정기신(精氣神) ‘셋’이 생기고, 다시 정기신이 어우러져 오행의 ‘다섯’을 만들어 낸다. 다섯까지는 무(無)에서 유(有)가 창출된 것이지만, ‘다섯’ 이후는 중복에 의하여 수가 불어나게 된다. 따라서 차원은 5차원에서 종결을 짓게 된다. ‘5’를 ‘다 섯다’의 ‘다섯’으로 발음한 이유도 여기에 기인한다.
2. 4차원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일찍이 힌턴은 그의 논문에서 제4차원이 어디에 존재하는 지에 대해서 나름대로 의견을 제시한 바가 있다. 폐쇄된 방안에 담배 연기를 피우면 열역학 법칙에 의하여 담배 연기의 원자들은 방안의 모든 곳으로 퍼져 나가게 된다. 이렇게 되면 방안에 담배 연기가 미치지 못하는 장소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험의 결과는 감추어진 공간은 없고, 따라서 4차원은 담배 연기 분자 보다 작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힌턴은 이러한 예를 들어 4차원은 원자 보다도 더 작은 곳에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물리학자들도 대부분 힌턴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즉, 4차원은 실험적으로 관측되기에는 너무 작다고 결론짓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4차원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작은 것이지 그 세계가 작은 것이 아니다. 4차원이란 3차원 공간이 무수히 겹쳐져 있고, 공간과 공간 사이의 입구가 너무 작아 우연히 열릴 때를 제외하고는 그 속으로 들어가기가 어렵다. 따라서 4차원을 이해하는데 힌턴이나 오늘날의 물리학자들 같이 극미의 세계로 보아서는 안 된다.
4차원은 공간이 겹친 초공간의 세계이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신의 세계도 4차원에 속한 것이다. 가령, 전설의 고향 같은 민담을 보면 귀신이 가슴 부위만 공중에 떠서 나타나기도 한다. 이것은 4차원 공간에서 그 윗부분만 3차원에 내비쳤기 때문이다. 또한 귀신을 보고 놀라 한참을 정신없이 도망가다가 숨을 고르는데 갑자기 앞에서 나타난다. 3차원 인간은 길을 따라 멀리 도망가도, 귀신은 4차원 공간을 이용하여 다른 공간으로 문턱만 넘으면 바로 도망간 사람의 코앞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원리를 3차원에 사는 사람이 헤아리기란 참으로 어렵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기문둔갑이라 하여 공간을 마음대로 이동하는 법술, 바로 축지법이 개발되게 되었다. 축지라는 것은 글자 그대로 땅을 줄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흔히 말하는 남들이 한 걸음 갈 때 열 걸음으로 날아가는 것이 아니다. 축지란 땅을 줄여 한 걸음에 십리를 가는 것이다. 땅을 줄인다는 것은 공간을 줄인다는 것이고, 공간을 줄인다는 것은 4차원 공간을 이용하여 건너 뛰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축지하는 장면을 보면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졌다가 먼발치에 나타나고 다시 사라졌다가 아득히 먼 곳에 살짝 보이고 하는 식이다. 새들이 날아가는 것처럼 연속 동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 있는 얘기를 해보자. 우리가 흔히 신의 세계를 거론하며, 어째서 신의 세계는 하나로 통일 되지 않았는가 의심해 본다. 조물주가 있고 염라대왕이 있다면 죽은 자는 심판을 받아 신계는 질서 정연하게 형성될 것이다. 그러나 실상 신의 세계에 눈 뜬 사람들은 아연질색할 수 밖에 없다. 인간 세상보다 더욱 복잡하고 통제 불능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째서 신의 세계는 그와 같이 무질서한 것인가?
흔히 물귀신 얘기를 하며 그와같은 의문을 품곤 한다. 물귀신은 수 십년 동안 자신이 빠져 죽은 곳을 맴돌면서 인명을 앗아간다. 이런 경우에 어째서 조상 신계나 염라국 사자가 데려가지 않는 것인가? 만일 갑자기 죽어 기록에 없다 하여도 정기적으로 순찰을 돌면서 나쁜 귀신이 없는가 암행을 할 수도 있는 것인데 말이다.
우리는 3차원 공간에 살고 있다. 따라서 신창원이 아무리 숨어도 3차원 공간일 수밖에 없다. 즉, 하나의 공간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4차원 세계는 공간이 무수히 겹쳐 있고,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통로를 타고 이리 저리 옮길 수 있다. 물귀신이 계속 맴돌며 나쁜 짓을 하여도 그 곳을 통과하는 저승사자의 눈에 쉽게 띄이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지구 내부를 아무리 뒤져도 또 다른 문명을 발견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렇게 공간의 중첩으로 말미암아 신계에서는 신을 잡기가 수월치 않다. 무수한 공간을 바꿔가며 숨기 때문이다. 도둑놈이 빽빽한 도시 속으로 들어가면 방향을 이리저리 바꾸게 되어 잡기가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나온게 기문둔갑이다. 기문둔갑이란 시시각각 바뀌는 기운의 흐름을 포착하여 공간 이동에 활용하는 법술이다. 여기에 최고로 달통한 신이 바로 팔문신장(八門神將)이다.
여하튼 이러저러한 이유로 인하여 신계는 복잡하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공간이 무수히 겹쳐 있어 전체 상이 한 번에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요컨대 현대 물리학에서 말하듯 4차원은 극미의 세계가 아니다. 2차원에 사는 생물이 3차원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여 극미의 세계라고 몰아붙이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4차원은 3차원을 포함하는 커다란 극대의 세계라는 표현이 더욱 어울릴 것이다. 단지 그곳에 들어가는 문이 작다면 작은 것이 사실이지만….
3. 4차원 괴물을 잡는 법
넬슨 본드는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온 괴물》이란 공상 소설을 썼다. 그 소설에서 주인공 패터슨은 페루의 고산지대에 사는 야생 동물들을 사로잡으러 떠났다. 그는 페루 북부 마란탄 고원에서 기괴한 형태로 계속해서 모양이 변하는 초자연적인 물방울 덩어리 같은 환상적인 동물과 마주치게 된다. 이들 검은 덩어리들은 공중을 떠다니는데,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기도 하고, 크기와 모양이 수시로 변하였다. 그러한 덩어리들은 갑자기 탐험대를 공격하여 대부분의 사람을 죽였다. 덩어리 괴물은 나머지 사람들을 끌어올렸고,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공중으로 사라졌다. 단지 패터슨만 그 혼란에서 탈출했다. 용감한 패터슨은 도망가지 않고 숲속에 숨어 그 덩어리들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그는 2차원의 세계에 3차원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났을 때 창으로 찍어 평면에 붙들어맬 수만 있다면 손가락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기회를 엿보다가 덩어리 괴물의 발이 땅에 나타났을 때 창으로 찍어 3차원 세계에 붙들어 매는 데 성공했다는 얘기이다.
일부 과학자들은 이런 공상 소설을 4차원의 단면을 이해시켜 주는 일례로 활용한다. 그러나 곰곰이 들여다보면 그야말로 공상과 망상에 불과한 얘기이다. 이런 허무맹랑한 얘기를 가지고 세계적 석학들이 과학적 잣대로 활용하는 현실을 볼 때 신 문명의 도래가 아득히 멀게만 느껴진다. 이와 유사한 내용으로《평평한 나라》라는 소설이 있다.《평평한 나라》에 보면, 갑자기 자신들의 평면 세계에 이상한 것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다. 바로 인간의 손가락이다. 공중에서 손가락이 나타나 평면 세계의 사람을 끌어올리면 갑자기 사라진다. 그래서 평평한 나라 사람들은 손가락 괴물을 잡기 위해 연구를 하고, 결국 손가락이 나타났을 때 바늘로 찔러 평면 세계에 묶어 놓는다는 내용의 소설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소설 모두 3차원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차원의 평면 세계에서는 3차원의 도구인 바늘이나 꼬챙이를 사용할 수 없다. 또한 사용한다 하여도 2차원 내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손톱의 끝면만 간지럽히고 말게 된다. 따라서 2차원 사람들이 3차원의 손가락을 잡을 수 없다. 또한 3차원의 인간이 4차원의 괴물을 잡을 수 없다. 몸은 3차원에 나타났지만 다른 공간에 거하기 때문에 이런 괴물에게 창을 던져 봐야 허공만을 가르게 될 뿐이다. 만일 4차원의 괴물을 잡으려면 4차원의 방법으로 4차원에 묶어 놓아야 한다.
일례로 염력이나 기공을 이용하여 4차원에 거하는 귀신을 묶는 것이 가능하다. 가령, 무속에 보면 못된 귀신을 잡아 서낭에다 묶어 놓는다. 서낭은 마치 감옥소와도 같다. 많은 귀신들이 그 곳에 묶여 교육을 받는다. 이렇게 4차원 괴물을 잡기 위해서는 4차원적 방식으로 4차원 내의 특정 공간에 묶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요컨대, 4차원을 다루기 위해서는 3차원적 사고에 갇혀서는 안된다. 넬슨 본드와 같은 물질적 사고에서 탈피하여 정신에 의존해야 한다. 그래야만 유체이탈, 직관, 시해, 투시, 채녈링,… 등의 방법으로 4차원에 입문할 수 있다.
4. 차원의 문
30년 전 미국의 어뢰 폭격기 제19 비행 편대가 카리브해에서 사라진 것을 비롯하여 무수한 배들이 버뮤다 삼각지대에서 자취도 없어 사라졌다. 해저 밑으로 침몰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공중으로 날아오른 것도 아니다. 완전히 증발된 것이다. 버뮤다뿐만 아니라 지구상에는 주기적으로 술공(戌空/차원의 문)이 열리는 곳이 있다. 물론 버뮤다 지역에 해로가 있어 배들이 자주 다녔기 때문에 빈번히 그런 일이 발생하였다.
술공이 열릴 때 두 가지 경우가 나타난다.
첫째는 진공 속으로 빠지면서 그대로 해체되어 버리는 것이다. 완전한 무(無)로 돌아간 것이다.
두 번째는 4차원의 축이 공각(空殼/차원의 경계선)에 걸리면서 완전히 해체되지 않고 다른 공간으로 순간 이동하는 경우이다. 물론 어떤 경우는 시간이 뒤틀려 나타난다. 4차원의 설계도가 남아 있게 되면 초공간에 들어갔을 때 다시 튕겨나올 수밖에 없다. 이런 경우 자신들 보다 더 높은 차원을 다녀오게 되고, 이런 일을 겪은 사람들의 정신에 충격이 오게 된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지구 공동설에 관한 것이다. 19세기부터 남극과 북극을 탐험하다가 커다란 구멍을 보았고, 어떤 사람은 실제로 그 속에 들어가 그 곳 문명인들과 접촉을 하고 다른 통로를 통해 나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은 지구가 텅 비었기 때문에 자전을 하여도 붕괴되지 않고 유지할 수 있다는 괴이한 소리도 한다. 그래서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지구 내부의 문명을 숭배하는 종교까지 나왔다. 지구 내부에서 모든 종교 지도자를 보내 인류를 교화시켰다는 내용이다.
나는 명상에 들어가 이 것을 확인해 보고자 하였다. 어느 날 지구 중심의 문이 열렸다. 물론 모두 나만의 직관이다. 따라서 확인된 것은 아니다. 공상과학 소설을 읽는 셈치고 들어주면 족할 뿐이다.
소위 말하는 지구 내부의 세계가 3차원 공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지구 내부는 현재 지질학자들이 밝혀 놓은 것과 같이 고밀도의 내핵과 외핵으로 가득 차 있다. 이 곳은 어떤 생명도 존재할 수 없는 불덩어리 그 자체일 뿐이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이런 지구 내부에 또 다른 공간이 뒤틀려 겹쳐 있다. 놀라운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이 순간 명상이 깨지며 현재 의식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몇 일 동안 시도를 해도 의도성이 짙어 깊은 의식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다시 선정에 들어가 그 곳을 보았다. 여기서 잠시 선정의 묘리를 한 가지만 언급하겠다. 만약 지구 내부를 보겠다는 의도를 가지면 선정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렇다고 아무런 의식 없이 들어가면 목표한 바를 알아낼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알음귀를 얻기 위해서는 화두로써 선정에 들어가야 한다. ‘지구 내부는 뭐꼬’라는 화두를 잡고 있다 보면, 지구 내부고 뭐고 생각이 없어지고 편안한 선정에 들어간다. 그러면 어떤 생각도 정지되어 그냥 그렇게 있게 된다. 그러다가 잠재된 화두에 의하여 지구 내부에 관한 것이 화면으로 보이거나 의식에 떠오르게 된다. 심지어는 외계인이나 어떤 신과도 대화를 하게 된다. 이렇게 해야 어떤 영감을 얻어낼 수 있게 된다. 물론 정신계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믿어서는 안 된다. 알아낸 답을 현재 의식에 돌아와 잘 따져 보고 합리적인지 검증을 해보아야 한다.
각설하고, 지구 내부에는 또 다른 공간이 겹쳐져 있었다. 전혀 다른 세계인 것이다. 왕래의 길은 없다. 그런데 주기적으로 북극과 남극에 문이 열린다. 이 때 여행하던 자는 그 속으로 들어가 새로운 공간을 체험하게 된다. 이것은 사실이다. 지구보다 문명이 발달 된 것도 맞다. 그러나 이들이 성인을 보내어 지구인을 교화시켜 온 것은 아니다. 그들은 지구 공간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특성은 무관심이다. 자연 그대로, 순리를 어기지 않고 사는 그런 세상이다. 마치 노자의 무위자연과 흡사하다 할 것이다. 도연명이 노래한 무릉도원이나 티벳의 샹글리라가 아마 그곳인 듯 싶기도 하다
요컨대 4차원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절실하다. 4차원에 대한 무지에서 신관(神觀)이 뒤틀리게 되었고, 여기서 온갖 종교 문제가 발생하여 오늘에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론 물리학에서 4차원의 연구에 힘을 쏟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 방향이 적잖게 잘못되어 있다. 3차원이 평면의 2차원을 포함하고 있듯이, 4차원 또한 3차원을 무수히 포함하고 있는 거대의 세계, 즉 초입체의 세계로 인식하여야 한다. 아인슈타인과 같이 시간의 축이나 더하고 4차원이라 해서는 인류는 끝내 4차원의 장벽을 넘을 수 없다. 더군다나 요즘 등장하는 10차원, 6차원, 5차원… 등과 같이 제멋대로 차원을 남발해서는 더더욱 신문명의 태동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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