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이야기/살며 생각하며

人生論 (4) - 太天 安庚洙 -

검은바람현풍 2012. 1. 24. 17:39

 

二. 형이상학적 고찰

 

 

(1) 사람의 구성

 

동의보감으로 널리 알려진 허준 선생은 사람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는 먼저 병이 생긴 원인을 알아야 하고, 병이 생긴 원인을 알기 위하여는

사람의 구조를 알아야 한다고 하여 동의보감 맨 앞에서 사람의 구조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즉 사람은 정(精)과 기(氣)와 신(神)으로 구성되어있다고 한다.

정(精)과 기(氣)와 신(神) 이란 것이 사람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要素라고 보고 있는데 비단 허준 선생 뿐 만 아니라 한의학 저변에 깔려있는 매우 중요시 되는 개념이며, 나아가 유교, 선도교, 등 등 모든 동양사상 전반에 걸쳐 폭 넓게 자리 잡고 있는데, 그 현묘하기가 끝이 없어서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략적인 윤곽만이라도 살펴보도록 한다.

精은 사람을 이루는 육체 또는 육체를 이루는 요소로 해석하면 될 것 같고,

神은 생물체를 이루는 精이 살아 움직일 수 있도록 체계적이고 통일적으로 조종해 주는 지휘자, 또는 마음체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며,

氣는 神의 명령에 따라 精인 육체가 움직일 수 있도록 해 주는 에너지원 이라고 생각하면 대략의 개념에는 접근이 될 듯하다.

그래서 허준 선생은 ‘精의 어디에, 어떻게 고장이 나면 어떤 약을 쓰고, 어디 어떤 氣에 고장이 나면 어디에 어떻게 침을 놓거나 뜸을 뜨며, 神에 고장이 난 어떤 증상에는 어떤 방법이 있다’ 이렇게 크게 셋으로 나누어 치료법을 소개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精을 고치는 약 방문과 氣를 고치는 침 뜸 방문은 잘들

말하고 있지만 神을 고치는 신방神方은 있는지 조차도 모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허준 선생의 이론인, 인체를 이루고 있는 精과 氣와 神의 개념을 컴퓨터(PC)에 비교하여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듯하여 비교하여 보기로 한다.

精이란 반도체 칩을 비롯한 하드웨어 즉 컴퓨터 본체로 보면 되고,

氣란 컴퓨터를 작동되게 해주는 에너지 즉 전기로 보면 되고,

神이란 OS를 비롯한 각종 프로그램 즉 쏘프트웨어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컴푸터를 쓰기 위하여 는 먼저 精에 해당하는 기계적 본체 즉 컴퓨터

몸체를 사와야 하고, 다음에는 본체인 기계가 일정한 일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 주는 神에 해당되는 프로그램을 깔아 놓아야 하며, 마지막으로 氣에 해당하는 에너지 즉 전선을 플러그에 꼽아야 비로소 컴퓨터를 쓸 수 있는 것과 흡사하다.

또는 자동차의 운행으로 비유하여 생각해도 비슷한 경우가 될 것이다.

즉 자동차 몸체를 精으로, 차가 움직이게 힘을 내주는 기름을 氣로,

그 차가 잘 움직여 가도록 운전하는 사람을 神으로 보아도 될 것이다.

사람도 이와 같이 精과 氣와 神으로 되어 있어서 이들 간에 긴밀하게

조화를 잘 이루고 움직여 갈 때에야 비로소 원만한 삶이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2) 동양사상에서의 탄생과 죽음

 

그렇다면 죽음이란 무엇인가?

나를 이끌어 왔던 주인에 해당하는 명령체 즉 神이 精이란 집 속에서

오래도록 살다 보면, 집에 해당하는 精은 낡게 되어 더 이상 神의 명령을 수행 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神은 精이란 집 속에 더 이상 머물러 살지를 못하고 빠져 나가게 되는데, 이와 같이 육체인 精으로부터 마음체인 神이 분리되어 빠져 나가는 현상을 죽음이라 보고 있다.

정과 신이 분리 되고 나면, 전체적으로 질서 있게 협력하여 움직이므로 하나의 생명체로 유지 되던 육체 즉 精은, 통일된 활동을 지휘하던

명령 체가 없어졌기 때문에, 더 이상 아무런 생명활동도 할 수 없게

되고, 한 낱 살덩이에 불과하게 되어 결국에는 썩어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이다.

이 경우 精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神이 일시적으로 허공을 맴도는 때가 있는데 이것이 왈 귀신이다.

이렇게 허공을 떠돌던 귀신 즉 혼백이라는 것은, 합당한 인연을 만나게 되면 다시 精이 될 수 있는 집 즉 수정란 속으로 들어가서 잠시 동안

새로운 주인이 되는데, 이로써 새로운 탄생이 시작 되는 것이다.

정리하여 본다면 죽음이란 神이 살던 집을 버리고 떠나가는 것이고,

탄생이란 神이 새로운 활동을 하기 위하여 생활의 터전이 되는 精을

찾아 들어오는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죽음과 탄생의 현상을 흔히 비유하여 입고 있던 옷을 벗는 일 또는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는 일 정도로 보고 있다.

사람이 새 차를 구입하여 운행하다가 낡아지면 폐차시키고, 다시 새 차를 구입하여 타는 일로 생각하면 이해도 쉬우리라.

잘살기 원칙 12 : 잘 살고 싶은 자 이 떠나지 않도록 精養을 잘

하라. 〕

 

(3) ‘나’를 찾아서

 

그렇다면 ‘나’란, 인생은 무엇인가?

神이 알맞은 精을 결정하고 들어가서 변화해 가는 어느 과정 !

마치 아침이 되면 동녘에 해가 떠오르고 한낮에 중천 했다가 저녁이 되면 지평선 아래로 사라지는 변화와 별로 다를 바 없다는 말인가 !

하나의 난자와 하나의 정자가 수정하는 순간 나의 모든 인생 노정은 DNA 라는 물질에 의하여 그 각본이 이미 결정되어져 버리고 만다.

그리고 이 몸은 숙명적으로 확정지어져버린 꼭 가야할 길을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울고 웃다가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어쩌면

무대 위에 올려 져 각본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이 인생이란 말인가?

그러나 인생은 그렇게 허무하기만 하게 끝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적어도 ‘나’에게는 ‘나’라고 주장하는 마음의 작용, 그 무엇이 있다.

선현들의 말씀을 빌리면 영혼(혼백) 바로 그것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언어를 살펴 볼 때 ‘혼났다’ ‘혼줄 빠지게...’ ‘넉두리’ ‘넉나간 사람’ ‘넉살머리’ ‘얼간이’ ‘혼백을 모시다’ ‘반혼제’ 등등의 말들을

쓰고 있는데 이는 모두 혼백과 관련된 말들로써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민족에게는 ‘영혼백-정기신’의 개념이 생활 전반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양면성을 갖고는 있겠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최근 서양으로부터 과학문명과 함께 자본주의가 급격히 밀려들어옴으로써 우리들의 생활방식이나 직업 문화 사고방식 또는 가치관에 까지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조상님들이 이루어 놓은 높은 철학적 정신세계에

대하여는 까마득히 망각되어져 가고 있음도 분명한 사실 인 것 같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에게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되고 있는 영혼에 대하여는 그 존재조차도 등한시 해버리고 있으니, 당연히 인생을 바르게 알 수 없는 것이며, 그저 대충 살다가 때가 되면 생전에 자신이 닦아 놓은 길을 따라 또 방황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동차를 운전하는 일에서 차 값이 제아무리 비싸다 하더라도

주인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히 운전자인 사람이어야 하는 것과 같이

나에게서 가장 소중한 진정한 나의 주인은 바로 영혼이란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어이없게도 사람을 평가 할 때, 그 사람의 얼굴 생김새만을 본다거나, 몸 짱이란 말처럼 몸매만을 보고 혹한다거나, 재산 또는 사회적 지위 등을 앞세우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보라. 사람의 평가에서 가장 우선하는 것이 眞으로써 진실된 마음씨 이고, 다음이 善으로써 착한 마음씨 이고, 마지막에 가서야 외적인 美를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고 있다. 즉 평가의 첫째도

둘째도 형이상학적인 무형의 상象이었고, 마지막에 가서야 형이하학적인 유형의 형形이었다.

 

(4) 안다는 것 지식

 

이제 방향을 돌려 내가 알고 있다는 지식에 대하여 살펴본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지식에 대하여도 별 관심 없이 그냥

적당히 알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과연 내가 안다는 것, 지식이란 무엇인가?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내 놓기 전 까지만 해도 그 이전에 살던 사람들의 생각은, 지구는 책상같이 평평한 것이며 큰 거인 넷이 그 지구를 떠 밭치고 있어서 너무 멀리 나가면 떨어져 영영 돌아올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태양을 비롯한 뭇 별들이 지구의 주위를 돌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과연 그들이 갖고 있던 이 지식이 옳은 것인가? 과연 그들은 그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천동설이 전혀 잘 못 된 것이라는 가능성이라도

짐작 할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지식은 과연 모두 참된 것이라고 장담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우리가 알고 있다는 지식(知)이라는 것이

허망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즉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란 것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오는 과정에서 나의 다섯 가지의 감각기관을 통하여 외부로 부터 정보들을 입수하고 그 정보들과 그 정보들을 다시 종합적으로 연결 지어 나의 뇌에 입력 저장

하였다가 필요할 때에는 불러내어 쓰고 있는 즉 나의 뇌에 내가 저장한 각종 정보에 불과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모르고 있는 어떤 일에 대하여 옆에 있던 사람이 ‘이건 무엇이다’라고 하면,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옆 사람이 말한 그

정보들을 별다른 여과 없이 그대로 자신의 뇌에 입력 저장하여 자기의

지식으로 굳어 버리는 경우가 거의 일상화 되어 있다. 특히 선생님이란 칭호를 갖는 사람의 말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여기에서 꼭 집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점이 있으니 당연히 정보를 준

사람의 말이 잘못 된 말일 수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다른 예를 살펴보자. 내가 눈으로 보았다고 반드시 있는 것 일까?

물론 아니다. 무지개는 분명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지만 실존하는 물체는 아니다. 다만 물방울들에 의한 굴절 현상일 뿐이다. 따라서 무지개는

분명히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기는 하지만 존재하는 물체는 아니고 다만 어떤 현상일 따름이다. 존재와 현상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또한 모든 사람들이 흔히 경험하고 있는 꿈은 여러 가지를 보고 있지만 대부분의 꿈은 있지도 않는 것을 보는 경우에 해당한다( 물론 예외는 있음 ).

사람의 눈은 볼 수 있는 빛의 파장 법위가 정해져 있어서 자외선이나

적외선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하는데 우리들은 볼 수가 없다. 공기나

열기, 냉기, 전기, 또한 무엇인가가 있긴 있는데 우리 눈으로는 보지는

못한다.

귀에서 느끼는 소리도 마찬가지여서 가청주파수 범위의 소리만을 들을 수 있다.

정리해 보자. 내가 보았다고 반드시 있는 것이 아니며,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반드시 없다고 단정 지어서도 안 될 것이다. 듣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나아가 모든 감각 작용도 동일하다.

그렇다면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은 도대체 어디까지를 믿을 수 있을까?

유치원 아이들도 잘 하는 ‘1+1=2’ 이것이 과연 맞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미안하지만 ‘1+1=2’가 성립되는 것은 물질의 3가지 상태 중에서 고체인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지, 액체나 기체의 경우에는 전혀 ‘아니요’ 가

된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1+1=2’ 가 틀릴 수도 있음은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즉 ‘1+1=2’ 가 참이 되기 위해서는 ‘고체의 경우’라는 전제조건을 붙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생활 속에서 어떤 특수 상황을 전제조건으로 하는

경우가 있는데, 살다 보면 앞의 경우와 같이 그 특수상황이라는 전제조건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모든 상황에서 동일하게 적용시켜 버림으로써 커다란 착각 속에서 헤매게 되는 어처구니없이 모순된 경우가 종종 있다.

물론 본인은 이렇게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

우리들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통상적인 고정관념에 빠져,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고 착각된 허깨비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제는 ‘나’를 돌이켜 보고, 잊어버린 참된 ‘나’를, 그리고 올바른 지식을, 그리고 참된 진리를 찾아, 바른 인생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지금까지의

생활과 사고방식을 한번쯤은 바꾸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