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학/단학

日月之書 11) 修眞九要 (2)

검은바람현풍 2012. 1. 24. 11:34

 

제 3요 第三要 진심궁리 盡心窮理

 

說卦傳에 말하기를 窮理盡性 以至於命(이치를 궁구하여 성을 다함으로써 명에 이른다)라 하였으니 가히 盡性至命의 學이 모두 이치를 궁구하여 옳고 그름을 定함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치를 궁구함이 투철한즉 성을 능히 온전히 할 수 있으며(性能全) 명을 능히 보전하게 되어(命能保) 곧바로 위없는 참되고 완전한 곳에 들게 된다.

이치를 궁구함이 어지러운즉 명을 닦기 어렵고 성 또한 마치기 어렵게 되어 마침내는 늙음에 이르러 空亡에 떨어지는 후회를 하게 된다.

오늘날 학인들이 한때의 기분에 따라 출가하고 흐리멍텅하게 도를 공부하여 수행 또한 갈피를 잡지 못한다. 살아있을 때 이처럼 불분명하니 죽을 때에 어찌 밝고 맑음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성명이 얼마만한 일이건대 이처럼 망령되이 행하는가?

金丹의 道는 천지를 감싸는 도이며 천지의 조화를 움켜쥐는 도이다.

지극히 높고 귀하며 지극히 신비롭고도 묘한 것이니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학인들이 자기의 性命이 어떤 물건인지도 생각지 아니하고 조사의 法言이 어떤 뜻인지도 분변치 못하고 종일토록 먹고 마시며 마음을 쓰지 않다가 망령되이 한마디, 반 구절의 묘함이 떠오르면 곧 깨치고 도를 이루었다 한다.

낮에는 허랑방탕하고 밤에는 베개를 높이 베고 깊이 잠들며 단경(丹經)은 쓸데없는 말만 늘어놓았다 하고 子書는 허풍이 심하다고 매도한다.

그러고서는 자신에게 도가 있다고 사칭하고 자신의 어긋남으로써 남도 어긋나게 이끌고 망령되이 자신이 진법이라고 착각함으로써 장님이 장님을 이끌게 되니 혹 한둘, 信心 있는 修士가 있다 할지라도 이는 말을 달리며 흘깃 꽃을 봄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 깊이 마음을 쓰고 실다운 이치를 궁구할 수 있겠는가?

옛 사람이 이른 말이 있느니 "만약 誌面 위에서 참된 뜻을 찾는다면 이는 모두 大羅神仙의 말이라" 하였으니 이는 특히 스승을 구하지 못하고 분발하는 자들을 위한 말이며 단경과 자서가 쓸데없다는 뜻이 아니다.

후인들이 옛 사람의 뜻을 알지 못하고 이 구절을 구실로 경서를 돌보지 않으니 크게 어긋난 일이다.

무릇 仙眞의 法言은 한 글자 한 뜻이라도 감히 함부로 쓰지 않는 것이니 한 마디 한 구절마다 모두 妙한 뜻이 감추어져 있다. 다만 다소의 노파심으로 후인을 위하여 계단을 만들고 교문을 세워 놓은 마음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헐뜯고 비방하니 그 죄를 어찌 말로 다 할 수가 있으랴?

뒤의 高人과 현인들이 행하는 바를 보면 모두 古人들이 말한 범주에서 벗어남이 없으니 옛사람들이 후세의 사람들을 잘못되게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나는 뜻있는 선비에게 권하노니 古人의 法言을 취하여 세밀히 궁구하라. 만일 그 가운데에서 스승의 한 妙結을 얻어 앞뒤를 다 통달하여 일점의 의혹이 없이 한다면 능히 그것을 얻어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또 자신의 총명함만을 믿고서 마치 자신 외에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하지 말 것이며 삿된 소리를 듣고서 함부로 남에게 가서 자신을 그르치지 말라.

문자에 통하지 못한 학인이라도 일상생활 속에 상용되는 말들을 깊이 변별한다면 그 속에 大道가 감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말들을 살펴보면 체면을 잊는다, 사람의 형상이 없어진다, 도를 궁구한다, 자재함을 좋아한다, 세 번 구르고 네 번 엎어진다, 방정함을 따라 원만함으로 나아간다, 기틀을 따라 변화에 응한다, 모래 속에서 금을 일어낸다, 無 가운데에서 有를 生한다, 일곱 번 죽고 여덟 번 산다, 나만 있고 남은 없다, 죽고 사는 것을 알지 못한다, 性命을 보지(觀) 못한다, 三家를 두루 달리는 것이 一家를 지킴만 못하다, 남에게 겸손하면 반드시 얻음이 있다, 다만 그 하나만을 알고 둘을 알지 못한다.

이상의 말들은 천기가 크게 노출되어 있는 것이니 어찌 한두 가지 일을 쓸데없다고 버릴 수 있겠는가?

깨달음의 실마리로 삼아서 아침저녁으로 생각한다면 큰 이치에는 밝지 못할지라도 지식이 점점 열려 도와 서로 가깝게 될 것이니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는 않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궁구하여 배워나가는 것은 어리석음과 현명함을 논하지 않고 사람마다 지어가는 것이니 능히 공부를 거르지 않고 오래도록 해나간다면 스스로 깨달음이 있게 된다. 다만 그 깨달음이란 것이 그 개인의 私見이므로 함부로 下手하여서는 안 된다.

진실로 밝은 스승을 만나 반드시 시작과 마침을 철저히 하고 그 가닥 가닥을 명백히 추구하여 진실로 확연히 보는 것처럼 알아서 마음으로 얻고 적절히 下手하여야 바야흐로 잘못된 일이 아닐 것이다.

만약 앞만 알고 뒤는 모르거나 뒤만 알고 앞을 모르며, 陰만 알고 陽을 알지 못하거나 양만 알고 음을 모르며, 體만 알고 用을 모르거나 용만 알고 체를 모르며, 혹 有爲만 알고 無爲를 모르거나 무위만 알고 유위를 모르며, 혹 元關은 보되 藥이 생기는 것을 알지 못하거나 약이 생김은 알되 늙고 어린 것을 분별하지 못하며, 혹 단을 맺는 것은 보되 단의 복식을 모르거나, 혹 태를 맺음은 알되 脫胎를 알지 못하며, 혹 文息으로 삶고 찌는 것은 알되 武息으로 단련함은 모르며, 혹 무식으로 단련함은 알되 文息으로 삶는 것은 알지 못하며, 혹 陽火는 알되 陰符는 모르며, 혹 眞火는 알되 止足을 모르며, 혹 溫養은 알되 추첨抽添은 모른다면 털끝만한 오차로 인하여 千里나 잃게 될 것이다. 참됨을 이루지 못함이 이것뿐만이 아니다. 음과 양에는 內外가 있고 오행에도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이 있다.

성명의 공부는 兩段이니 先後二天이 각기 다르다.

참됨이 있고 거짓됨이 있으니 참된 가운데 거짓도 있고 거짓된 가운데 참됨도 있다. 또한 참된 가운데 참됨이 있고 거짓된 가운데 거짓도 있다.

이러한 등등을 꿰뚫지 못하면 닦아 행하여도 도달하지 못한다. 또한 밝게 분변하지 못하면 지어도 이루지 못한다(修之不成 作不成之).

이로써 여조께서도 세 차례에 걸쳐 환단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후에 최공의 입약경을 얻어서 비로소 공을 이루었다. 자청 또한 야밤에 풍뢰의 근심이 있다가 거듭 닦아서 드디어 일을 마칠 수가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신선 가운데에서도 우두머리에 해당하지만 이렇게 밝지 못함이 있으면 오히려 뜻밖의 재난을 당함이 있다. 하물며 다른 사람들은 어떠하겠는가?

학인들은 마땅히 심사숙고하여야 한다.

 

 

제 4요 第四要 방구진사 訪求眞師

 

古仙이 이르기를 만약 스승이 사람을 가르쳐 알맞게 일러줌이 없다면 天上의 신선이라 할지라도 머무를 곳이 없다 하였고 또 오진편에 이르기를 그대의 총명과 지혜가 두터워 안자와 민자건을 뛰어넘는다 할지라도 참스승을 만나지 못한다면 두각을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니 오직 정성이로다.

성명의 마음이여! 반드시 스승의 전수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며 망령되이 사사로운 견해로 헤아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옛날에 설도광은 돈오원통頓悟圓通이 스스로 노력하여 올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으며 후에 향림을 만나 진전을 얻고서야 비로소 대도를 이룰 수 있었다.

상양자도 이미 녹독綠督의 비결을 얻었으나 만족치 아니하고 청성靑城을 본 후에야 화후火候를 갖추었다. 장삼봉도 숭산에서 10년을 고련했으나 한 가지도 얻음이 없다가 후에 정, 여 두 선인의 가르침을 받고서야 비로소 大事를 알게 되었다.

비록 세간의 작고 얄팍한 기예라도 오히려 스승의 전수함에 힘입거늘 하물며 성명性命의 大事를 어찌 스승의 가르침 없이 깨닫겠는가?

대개 性命의 도는 음양을 훔치고 천지의 조화를 빼앗았으며 생사를 운전하고 기틀을 조정하여 하늘보다 먼저 하여도 하늘이 어기지 아니하는 도이다. 이 도는 귀신도 능히 헤아릴 수 없으며 시초蓍草나 거북이로도 능히 점칠 수 없는 것이니 이를 얻는 자 성인의 반열에 서는 것이요, 곧바로 피안彼岸에 오르는 것이니 이는 천하제일의 큰 일이 아닐 수 없으며 천하제일의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진실로 聖師께서 귀에 대고 속삭여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유독 外道訪問이 삼천 육백 가지나 되며 丹法 또한 칠십이품이나 되니 오히려 邪惡한 것이 바름을 해치고 가짜가 진실을 어지럽히니 누가 눈먼 스승이고 누가 밝은 스승인지 심히 분별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자세히 살피면 이를 판별하는 것 또한 어렵지만은 않으니 무릇 高人이 세상에 나옴에 스스로 命이 범상치 아니하며 홀로 현을 타며 여러 사람과 두루 사귀지 아니하며 세상에 아첨하지 아니하고 무리를 만들지 아니하며 명예를 탐하거나 바르지 못한 재물을 탐하지 아니하며 이익을 꾀하여 사람을 속이거나 괴이한 짓을 하지 아니한다.

한마디 말이라도 세상의 도리에 이익이 되게 하며 한 번 행하고 한 번 그치는 것이 모두 성인의 가르침에 도움이 되게 하니 탐, 진, 치, 애가 모두 없고 뜻이 나를 굳세게 하여 모든 것을 정화시키고 인품과 절조節操가 맑고 높아서 사람들이 능히 미치지 못하고 가슴이 열려 거리낄 것 없음을 남들이 흉내 낼 수 없다.

또한 간혹 뜻있는 사람을 이끌 때에는 그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천 번 갈고 백 번 꺾이게 하여 백옥에 하나의 티끌도 없이 한 연후에야 즐거이 그 처음과 끝을 가르쳐 주며 법을 전할 만한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천기를 경솔히 누설하지 아니한다.

이상 열거한 것이 밝은 스승의 모습들이다.

눈 먼 스승의 경우는 실제로는 아무 것도 없으면서 무언가 갖고 있는 듯이 하며 속이 비었으면서도 가득 차 있는 듯이 한다. 자신이 어긋난 것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지 아니하며 다시 어긋난 길로 사람을 가르친다.

혹 남녀로써 음양을 삼고 경락의 기 덩어리로 서미현주를 삼으며 혹 화톳불로써 외단을 삼고 心腎을 단련함으로써 내단이라 하고 혹 어떤 상을 잡고서 응신이라 하고 子午를 행함으로써 추첨抽添을 한다 하며 록노를 굴리면서 周天한다 하며 완공을 깨닫고서 無爲라 하고 運氣를 有爲라 한다.

혹 모양을 잊음으로써 고요를 닦는다 하며 몸을 움직여 (머리) 기를 내림으로써 退陰符를 행한다 하고 혹 유황을 복용함으로써 進陽火를 한다 하며 오곡을 피함으로써 장수한다고들 한다. 이 밖에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으니 공덕을 말할 수 없고 절개와 지조도 없다.

몸에 납의(검은 승복)를 걸치고도 허리 속에는 돈주머니를 차며 머리에는 의젓하게 잠관簪官을 썼으되 마음속은 사갈蛇蝎과 같다. 부귀한 것을 보면 마음을 머물되 어렵고 곤란한 때를 당하면 도를 팽개친다. 술과 고기를 배불리 먹으면서도 주위의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지 아니하며 무슨 일을 할 때에는 다만 돈 있는 곳을 향하여 공부를 쓰고 거동하는 곳 또한 의식衣食을 헤아려 마음을 쓴다. 인사하는 사람마다 모두 거두어 무리를 삼고 한번 차를 마시고 음식을 대접받음에도 도를 전한다.

이는 모두 성현의 문호를 빌려 스스로와 세상을 속임이며 仙佛의 法言을 훔쳐서 요사하고 괴이함을 짓는 것이니 이는 다만 스스로의 등 따시고 배부른 것만 생각함일 것이며 어찌 다른 사람들의 死活에 관심이 있다 할 것인가?

배우는 사람들이 만일 그 사람의 말만을 듣고 그의 행실을 살피지 않는다면 비록 도에 목적이 있다고는 하나 그늘의 그물에 들어 성명을 상해傷害 받지 않는 자가 없다. 한번 그들의 말에 현혹되면 가짜를 참된 것으로 알게 되어 고착되어 바꾸기가 어려우니 비록 고진성사高眞聖師가 이끌고자 하나 뾰족한 방법이 없게 된다. 천하의 도인들이 이러한 어려움을 만나는 것이 한번이면 족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치황(緇黃:중은 검은 옷을 입고 도사는 황관을 쓰는데서 유래)의 무리들이 동서를 달리며 근원도 없는 수많은 공안과 화후로써 사람을 현혹시키니 이들은 다만 구두삼매口頭三昧로써 사람을 취하여 사람마다 이에 부처요, 신선이다.

시험 삼아 도를 묻는 자 천만이나 되나 도를 이루는 자 그 몇이나 있던가? 대저 성현은 항상 나타나는 것이 아니며 仙佛 또한 많은 사람들이 이루는 것이 아니다. 이런 희유함으로 인하여 高人이 되는 것이니 이러한 고인은 일반적인 부류에서 벗어난 것인데 어찌 구두삼매로써 고인이 되겠는가?

당년에 나의 스승께서 몰래 시금석試金石을 주어 사람의 높고 낮은 성품을 가늠한 적이 있었으니 만약 여러 수사修士들이 주색재기酒色財氣의 시험을 만나 능히 흔들리지 않는 자라면 범상한 품성이 아닐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오진편이나 참동계에서 말하는 구결口訣에 상응하는 자는 곧 명사明師이니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이 글을 쓰신 님께

 

저는 96년도부터 수도생활을 해본다고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몇 년 전 정신없이 이것저것 자료를 구해 보던 중 인터넷을 통하여 님께서 쓰신 글을 보고 소중하게 간직하여 오다가 저의 브로그를 정리하며 귀한 자료라 사료되어 이곳에 올려놓았습니다. 수시로 탐독하며 공부해 나가는데 마음을 다스르며, 차후에라도 인연이 있는 분들이 게시면 수행에 참고하실 수 있게 하고 싶은 욕심에서입니다. 귀중한 글을 담아오며 아무런 양해의 말씀도 드리지 못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이곳을 통하여 사죄의 말씀을 드리오며 이곳에 이 글을 올려둘 수 있도록 선처하여 주시기를 간청 올립니다. 만약 저작권 관계로 불허하신다면 글을 남겨주십시오.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재삼 너그러우신 아량으로 용서하여 주시기를 간청 올림니다. 현풍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