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희 에게
새 신부 선희 에게
결혼을 축하하며 앞으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선희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될까하여 이 글을 쓴다.
결혼 !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 했던가!
어쩌면 이세상의 모든 형상화 된 것은 언제인가는 반드시 스러져야 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 인가보다. 무생물이나 생명체를 가릴 것 없이 나무와 풀, 그리고 사람마저도 예외일수는 없겠지!
그런데 생명을 지닌 사람은 생명이 붙어 있을 때만이 사람이기 때문에 “나”라고 하는 살아있는 사람은 영원히 사람이고 싶은 원초적 본능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탄생이 있었다며는 반드시 죽어야 하는 자연의 법칙 앞에서는 또한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묘한 숙명을 갖고 있는 것이 인간이니 어찌할 것인가!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는 이에 대한 확실한 답을 갖고 있다.
그 방법은 반드시 죽어 없어져야 하는 숙명을 피할 수는 없기에, 내가 죽기에 앞서 나와 똑같은 제2의 나를 만들어 놓음으로써 나를 대신하여 살도록 하는, 그래서 간접적으로나마 내 생명을 영원토록 하는 번식(생식)의 방법을 쓰고 있단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본인은 인식하지 못하고 있겠지만 결혼이란 나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즉 번식을 위한 하나의 방법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러나 약 100만년 전 부터 이 땅에 탄생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인류에게는 그 생명을 유지시키고 안정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장치를 가지고 있으니, 그것이 바로 “어떻게 만들고 어떻게 살아가라”라고 하는 프로그램, 나의 설계도이다. 즉, 모든 생명체의 세포 속에는 유전인자인 DNA가 있고, 따라서 모든 사람도 탄생의 순간부터 죽는 날 까지 이 프로그램에 의하여 살아가게 되어 있단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지금 울고 웃고, 즐거워하고 미워하는 인생이란 모든 것이 어쩌면 이 DNA 속에 계획된 프로그램에 따라 그대로 진행되어지는 한편의 인형극에 불과하며 “나”라고 하는 것은 무대 위에서 이미 짜여진 DNA의 각본대로 움직이고 있는 인형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래서 사랑도 슬픔도 모든 것이 한낱 뜬구름이라 하던가!
그런데 젊은이들은 이러한 계획된 프로그램으로 나타나고 있는 각종 감각적 현상이 진정 “나”인 줄로 착각하고 희노애락에 깊이 빠져 헤매고 있구나.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결혼이란 나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자식을 생산하는 하나의 방법에 불과하며 따라서 결혼하여 자식을 생산하고 난 후에는 남편도, 아내도 그 이상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이며 부부간의 사랑도 점차 시들어 가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이치 일 텐데, 이러한 자연의 이치를 생각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은 결혼 전에는 오직 나만을 위하여 세상을 살어 줄 듯 하더니 이제 와서는 마음이 변하였다고 앙탈을 부리는 등 가정의 불화가 끊이지 않게 된단다.
그러면 결혼으로 자식을 얻는 일에서 다른 의미는 없을까?
자손이란 특히 사람의 경우 내 생명의 연장 방법 이외에도 엄청난 의미를 갖고 있단다.
내가 아닌 새로운 생명을 탄생 시켜주는 일은 그 생명이 탄생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고 또 그 생명체가 무럭무럭 잘 자라게 키워주는 데에서 크게 덕(德)을 쌓게 되는 것이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음 )
그러면 덕을 쌓는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를 갖는 것일까?
이 세상의 모든 존재하는 물체는 보다 안정된 방향을 향하여 점차로 변하여 가고 있다.
물은 좀더 안정되기 위하여 낮은 곳으로 흘러내리고, 풀들은 자신의 생활을 오래 안정시키기 위하여 씨를 만들며, 짐승들은 안정된 생활을 위하여 겨울을 준비하거나 보다 안정된 생활의 터전을 만들기 위하여 어려움을 무릎 쓰며 집도 짓고 살아가고 있다.
또한 전자(-)나 양성자(+)는 전기적으로 안정을 찾기 위하여 서로가 결합을 하여 원자를 탄생시키며(이온결합이라 함), 원자는 좀 더 안정되기 위하여 분자로, 분자는 고분자로, 고분자는 원시생명체로, 원시생명체는 고등한 생명체로 변화 해 가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생물의 진화도 한 개의 전자와 양성자에서 시작하여 고도의 안정을 유지하려는 프로그램이 갖추어진 한 공동 집합체라고 볼 수 있을 것 갖구나.
따라서 우리 인생에서도 결국 취해야 할 방향은 좀 더 안정된 길을 찾는 것이 그 목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덕을 쌓거나 선(善)을 쌓는 일은 매우 중요하고 값진 일이 되는 것이며, 부부란 불안정한 둘이 합심하여 자식을 탄생시키고, 양육하고, 나를 탄생시켜 주시고 잘 키워주신 부모님께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적선 적덕을 쌓기 위한,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또 다른 중요한 의미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덕을 쌓고 적선하는 일이 어떻게 안정을 위한 길이 되는가?
이점을 설명하기에는 매우 어려움에 부딧쳐야 할 것 같구나.
학문에는 형이하학(모든 것을 물질의 관점에서 보는 것 : 배가 고프면 먹어야 하는 일 등)과 형이상학(정신적 차원에서 보는 일 : 음악을 듣고 즐거워하거나 좋은 경치를 감상하며 즐거워하는 일 등)으로 나누고 있다.
서양의 과학문명(물질문명)은 형이하학의 극치라고 말할 수 있겠으며 예술이나 동양의 정신문명, 특히 종교는 형이상학의 극치라고 말 할 수 있겠다. 각각 그 분야에서 기여하는 점이 지대하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모든 안정적 진화의 관점에서 볼 때 형이상학이 우리 인간들이 추구해 나아가야 할 방향이 된다는 점은 어렵지 않게 생각 될 줄로 안다.
여기에서 또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
우리 인간은 너무나 부족함이 많은 미완성 단계라는 점이다. 즉 우리가 알고 있다는 지식도 따지고 보면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이건 이렇다” 라고 할 때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그런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경우,
“1+2=3”이란 등식은 독립되어 있는 고체의 경우를 전제로 하고 있는데 그 전제는 생각도 않고 모든 것에 적용하고 있는 경우(액체의 경우나 기체의 경우는 전혀 다른 답이 나오게 됨),
그리고 우리의 허술한 감각기로 보고들은 것만을 사실인 양 생각하고(우리의 눈은 가시광선 : 빨,주,노,초,파,남,보,만 볼 수 있고 적외선 자외선 등을 보지 못하며, 귀는 가청주파수만 들을 수 있음) 인정하고 있는 등 커다란 잘못된 지식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을 생각해 볼 때 덕을 쌓고 선을 쌓는 일이 인간의 진화적 안정적 방향 지향에 얼마나 귀중한 일인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며 따라서 부모가 자식을 생산하며 잘 양육하는 일이 인간으로 태어나 얼마나 중요한 일이 되는가를 생각 할 수 있겠구나.
우리는 형이하학의 산물인 서구의 물질문명 속에서 탄생하여 오늘날까지 살아왔기 때문에 형이하학적 생활만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인생은 한 차원 높은 세계 즉 형이상학적 정신세계가 또한 존재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내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고 단정 짖지 말 것이며, 내가 듣지 못한다고 없다고 단정 짖지 말아야 할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의 존재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하고, 들리지 않는 소리에도 귀 기울이는 생활태도가 요구된다는 말이다. ( 실제로 우리 인간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거나, 들리지 않는 것을 들을 수도 있는 능력이 감추어져 있음을 여러 면에서 확인 할 수 있었음 )
긴말을 간단히 줄이다 보니 앞과 뒤가 잘 연결되지 않는 면이 많을 줄로 생각된다.
정리하여 보면
첫째 결혼이란 원초적 본능에 따라 제2의 나(자식)를 만들어 나의 생명을 연장하려는 방법인 동시에, 덕과 선을 쌓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그래서 서로 다른 둘이 공동 운명체인 하나가 되는 것이다. ( 현명했던 조상은 나무꾼 과 선녀의 이야기를 통하여 3명 이상의 자식을 생산해야 확실하게 하나로 된다는 교훈을 남겼음 )
둘째 모든 것은 안정되려는 방향으로 변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도 형이하학적인 금전이나 명예, 권력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형이상학적인 정신적 발전을 위하여 가치관과 인생관을 세워 부지런히 실천 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 하늘의 이치를 알아보고 따르는 생활, 충성하고 효도하며 적덕, 적선하는 생활이 더욱 보람된 생활이 될 것임 )
아무쪼록 행복하고 보람되고 현명한 인생의 새 출발이 되길 축원한다.
선희의 결혼을 축하하며 결혼선물을 주기 위하여 이 글을 쓴다.
대전에서 이모부 씀.
추기 : 동의보감에 보면 사람은 정情과 기氣와 신神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情은 우리의 몸을 만드는 근본이 되는 것을 말하며 氣는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에너지에 해당하며 神이란 내가 무엇을 할 때 그 움직임의 명령을 내리는 정신작용 즉 마음의 본처를 말한다고 보면 대략 줄거리는 엮어 지는 듯 하다. 따라서 “나”라는 사람 중에서 진짜 나를 대표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神이며 너는 어떻게 태어나서 어떻게 살아가다 언제 어떻게 죽어라 하는 내 인생의 각본인 神이 될 것이다. 이 神은 DNA라는 물질로 용用을 삼아 나타난다. 그런데 이 신의 묘한 점은 神 자신이 점차 진화도 하고 퇴화도 할 수 있다는 점이다(이러한 현상은 남녀가 결혼하면 새로운 사람이 탄생되는 일에서 보면 그렇게 묘한 일도 아닐 것임).
大學(큰 학문)이란 바로 이 神적 진화(동양의 고전에는 이 말이 무수히 기록되어 있음).
( 2000. 1.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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