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구봉의 태극문(太極問) 팔십일 문답, 원문과 해석 全文
편집자의 말.
송구봉의 태극문(太極問)은 태극으로 비롯되는 우주관을 글로서 압축시킨 내용으로서 대단히 중요한 문답형식의 차원 높은 글이다. 태극의 이치는 곳 주역 경문의 이치요, 성리학의 근간을 이루는 것으로서 유교사상의 크나큰 줄기를 이루는 내용이다.
송구봉의 <太極問〉은 屈原의 〈天問〉을 본따 太極에 대한 의문점을 문답형식으로 풀이한 글로 모두 81개의 항목인데 자신의 개인적인 견해가 아니라 朱子의 견해임을 序說 에서 밝히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에 여러 이름난 학자들, 즉 퇴계 이황의 성학십도(聖學十圖), 남명 조식의 태극도여통서표(太極圖與通書表), 구봉 송익필의 태극문(太極問), 우암 송시열의 태극설(太極說), 한강 정구의 태극문변(太極問辯), 四未軒 張福樞(1815~1900)의 태극도설문답(太極圖說問答), 화서 이항로의 태극설(太極說), 기노사의 답문유편(答問類編) 등 태극설에 관한 많은 저작물이 있으나, 특히 구봉 송익필의 <태극문(太極問)>은 수리의 원리인 九九八十一의 숫자대로 태극의 이치와 성리학에서 비롯되는 八十一개의 이치를 자문 자답 형식으로 서술하여, 그 어느 학자의 글보다도 차원 높고, 뛰어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송 구봉의 <태극문 - 太極問> 서설(序說).
余 倣屈子天問 設太極問 以觀後學所答如何 後患答者多不合理 略成答說 以便看
○理一而已 太極問答 變轉雖殊 終歸一理 亦非自家私論也 皆朱子語意也 但一問一答而有易曉易知處 敢錄而自觀焉
내가 屈子의 '天問'을 모방하여 '太極問'을 지어서 後學이 어떻게 答하는가를 보았더니 答하는者가 이치에 합당하지 않음이 많기에 대략 答設을 만들어 보기 편하게 하노라.
○理는 하나일 따름이다. 太極問答가 이리저리 변하여 한결같지 아니하나 마침내 一理에 돌아가니 또한 나의 私論이 아니라 모두 朱子의 뜻이다. 다만 一問一答을 인하여 깨닫기 쉽고 알기 쉬운 곳을 감히 기록하여 스스로 보려 하노라.
● - 송구봉선생의 太極問 (1)
▶ 問-[01]
老氏之出無入有 莊氏之自無適有 佛氏之空說 各不同 而先儒不是 何也 至如柳子之無極之極 邵先生之無極之前 周夫子之無極而太極 若無所異 而又以爲不同 何也
老氏의 無에서 나와 有로 들어간다 함과 莊氏의 無로부터 有에 간다 함과 佛氏의 空說이 각기 같지 아니하나 先儒가 모두 옳지 않다 함은 무엇 때문인가? 柳子의 無極之極과 邵先生의 無極之前과 周夫子의 無極而太極은 다른 것이 없는 것 같은데 또한 같지 않다 함은 무엇 때문인가?
答
邵子言氣 周子言理 老莊佛柳 亦皆言氣 但邵子 知理而言氣
邵子는 氣를 말하고 周子는 理를 말하고 老. 莊. 佛 .柳는 또한 氣를 말했으나 다만 邵子는 理를 알고 氣를 말한 것이다.
▶ 問-[02]
老子之言有無 以有無爲二也 周子之言有無 以有無爲一也 而朱子曰無極而太極 只是說無形而有理 朱子之又以有無分言 何也 又朱子曰將有字訓太字 不得 而今 反以有理釋太極 何也
老子가 말하는 有無는 有와 無를 둘로 나누어 보는 것이요 周子가 말하는 有無는 有와 無를 하나로 보는 것이로되 朱子는 말하기를 "無極而太極은 다만 形은 없으나 理는 있다는 말이다."라고 하니 朱子가 도리어 有와 無로 나누어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며 또 朱子가 이미 말하기를 "有를 大로 해석함이 옳지 않다."라고 했으나 이제 도리어 有理로서 太極을 해석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答
無形而有理라고 말한 것이 바로 有無를 하나로 보는 것이다. (여기서의 有無는 한 물건에 대하여 말 하고자 하는 주제가 다른 것일 뿐이다) 또 有理의 有는 太極을 뜻하는 것이 아니오 理가 바로 太極(太極은 理의 尊號)인 것이다.
▶ 問- [03]
夫子曰易有太極 周子曰無極而太極 理一也 而易則謂之有 於太極則謂之無 夫子周子之異其說 何也
孔子는 말씀하시기를 "易에 太極이 있다."하시고 周子는 말하기를 "無極而太極"이라 하니 理는 하나일 따름인데 易에서는 有라 하고 太極에서는 無라 하니 孔子와 周子의 말이 서로 다른 것은 무엇 때문인가?
答
主太極則不可謂有 主周易則不可謂無也 此 正朱子所謂以理言之則不可謂之有 以物言之則不可謂之無者 是也
太極에서는 有라 하지 못할 것이요 易에서는 無라 하지 못할 것이니 이는 바로 주자가 "理로써 말하면 有라 하지 못할 것이요 物로써 말하면 無라 이르지 못할 것이 없다."라고 하는 말이 이것이다.
▶ 問-[04]
道與太極之二其名 何也 至如一木一草之分 而爲枝爲幹 又分而生花生葉生生不窮而各自成果 千果萬果 又自生生 是 所謂無限太極也 是 指流行處爲言 而反謂之太極 何耶 孔子曰夫道 若大路然 皆指至極處爲言 而又謂之道 此說非是耶 何相反之若此也
道와 太極이 그 이름이 둘인 것은 무엇 때문인가? 一草一木이 나누어져서 가지가 되고 줄기가 되며 또 나누어져서 꽃을 生하고 잎을 生하여 生生함이 끝이 없어 모두 열매를 이루고 千果萬果가 또 生하고 生하는 것을 無限太極이라 하는 것은 流行處를 가리켜서 말하는 것이로되 도리어 太極이라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孔子가 말씀하시기를 "吾道는 하나로서 꿰뚫는다"하시고 孟子가 말하시기를 "道는 大路와 같다"하시니 모두 至極處를 가리켜서 말하는 것이로되 또 道라 함은 무엇 때문인가? 朱子가 "至極을 말하면 이는 바로 太極을 이르는 것이요 流行을 말하면 이는 바로 道를 이르는 것이다1)"라고 말한 것은 틀린 것인가? 어찌 서로 相反됨이 이와 같은가?
答
流行處 固是道而不得爲太極云 則是太極 非活底物 至極處 固是太極而不得謂道云 則是道是偏黨物 況立言 各有所指耶
流行處가 진실로 道이긴 하나 太極이라하지 못한다고 하면 이 太極은 살아 있는 물건이 아니오 至極處가 진실로 太極이긴 하나 道라 하지 못한다고 하면 이 道는 편당 된 물건이라. 하물며 말마다 각각 가리키는 바가 있음에랴.
▶ 問-[05]
無極而太極 此而字 重也輕耶 抑有積漸之義耶 旣曰無 又曰太 何也 無極太極 孰先孰後 亦有方位耶
<無極而太極>에 이<而>자는 重한 것입니까? 輕한 것입니까? 아니면 쌓여서 늘어난다는 것입니까? 이미 말하기를 無라하고 또 말하기를 太라하니 무엇입니까? 무극 태극은 어느 것이 먼저이고 어느 것이 뒤가 됩니까? 또한 방위가 있습니까?
答
無太二字 添減不得者也 而字 輕 無積漸,無先後,無方位 因不知一而字之輕 便生陸氏議論
無太 두자는 더하거나 덜할 수 없는 것입니다. 而자는 輕하며 쌓여서 늘어나는 것이 아니며 先後가 있지 않으며 方位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의 <而>의 輕한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陸씨의 논의가 생겨난 것입니다.
▶ 問-[06]
極是何名 取他說諭此耶 抑理之一名 爲極耶 南極,北極,屋極,民極,爾極,皇極,商邑四方之極 太極 同一物事耶
極은 무엇을 이름하는 것입니까? 다른 것을 취하여 이것을 비유한 것입니까? 아니면 異의 한 이름을 極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남극, 북극, 옥극, 민극, 이극 황극, 상읍 사방지극, 태극은 동일한 사물입니까?
答
物之至極而莫能有加者 其名 爲極 古之稱極處 各有攸指
물은 궁극에까지 이르러 능히 더할 만한 것이 없는 것을 그 이름하여 극이라 하니 옛날 궁극처를 이름한 것은 각각 가리키는 바가 있는 것입니다.
▶ 問-[07]
指一物之理 爲太極耶 指天地萬物之理 爲太極耶
한 사물의 이치를 가리켜서 태극이라 합니까? 천지 만물의 이를 가리켜서 태극이라 합니까?
答
總天地萬物之理 爲太極也 然 一物之中 亦有一太極故 有天下公共之理 有一物所具之理 同一理也
천지 만물의 이치를 총괄하여 태극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한 사물 가운데에도 역시 하나의 태극이 있으니 천하가 함께 공유하는 이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사물에도 갖추어진 바의 이치가 있으니 동일한 이치입니다.
▶ 問-[08]
凡物 有其形則有其名 蒼蒼者爲天 博厚者爲地 高者爲山 深者爲海 未知 太極 其形如何而有此名也 圓耶方耶 高耶下耶 大耶小耶 斜耶正耶
무릇 사물이 그 형체가 있은 즉 그 이름이 있는 것이니 높은 것은 하늘이 되고 넓게 두터운 것은 땅이 되고 높은 것은 산이 되고 깊은 것은 바다가 되니 태극은 그 형체가 무엇과 같은지 알지 못하니 그 이름이 있는 것입니까? 둥근 것입니까? 각진 것입니까? 높은 것입니까? 낮은 것입니까? 큰 것입니까? 작은 것입니까? 경사진 것입니까? 바로 된 것입니까?
答
物之有其形有其名者 氣以成形者也 物之無其形有其名者 理也 太極 理之尊號也 無形則何方圓大小之有
사물이 그 형체가 있고 그 이름이 있는 것은 기로서 그 형체를 이룬 것이다. 사물이 그 형체가 없이 그 이름만 있는 것은 리이니 태극은 리를 높여 부르는 호칭이다. 형체가 없는 즉 어찌 각지고 둥글고 크고 작음이 있겠는가?
▶ 問-[09]
上天之載 無聲無臭 而又曰太極 何也 所云上天 太極耶 載乃太極耶 無聲無臭 可謂之太極 而亦可謂之無極耶 無聲無臭之與無極之三無 同耶異耶
상천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음을 또한 말하기를 태극이라 함은 무엇인가? 상천을 이르러서 태극인가재가 이에 태극인가? 무성무취를 가히 그것을 일러 태극이라 하며 역시 가히 그것을 이러 무극이라 하는가? 무성무취 그리고 무극의 삼 무는 같은 것인가? 다른 것입니까?
答
太極 無聲無臭 而無極者 無聲無臭之妙也 無聲無臭者 就其中說無也 無極而太極者 就其中說有也 說有無 兩無所碍 蒼蒼者 上天 而載是太極也 ○已上 皆朱子語意也 北溪陳氏 專欲以無聲無臭 解無極 恐非是
태극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으며 무극 이라는 것은 무성무취의 오묘함입니다.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는 것은 그 가운데 나아가서 없다고 말하는 것이고 무극이 태극이라는 것은 그
가운데 나아가서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까. 있음을 말하고 없음을 말하는 것은 둘다 걸리는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넓고 넓다는 것은 상천 재<載>는 태극이 됩니다. ○이상은 다 주자 말씀의 뜻입니다. 북계 진씨는 오로지 무성무취로서 무극을 이해하려 하나 아마도 옳지 않은 듯합니다.
● - 송구봉선생의 太極問 - 2
▶ 問-[10]
天地之間 只有動靜兩端 太極 其動耶 其靜耶 抑在此動靜之間耶 抑在此動靜之外耶 抑動靜者 太極耶 其所以動靜者 太極耶
하늘과 땅 사이에 다만 움직임과 고요함의 두 끝이 있을 뿐이니 태극은 움직임입니까? 아니면 고요함입니까? 아니면 움직임과 고요함 사이에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움직임과 고요함의 밖에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움직임과 고요함이 태극입니까? 움직이고 고요하게 하는 소리가 태극입니까?
答
不動不靜而含動靜者 太極也 動靜兩端之循環不已者 氣也 盖動靜者 氣也 所以動靜者 太極也
움직이지도 않고 고요하지도 않으면서 동정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태극이고 동정 양단이 순환하여 그만두지 않는 것은 기가 됩니다. 대개 동정이라는 것은 기이고 동정하게 하는 것은 태극입니다.
▶ 問-[11]
未有動靜之前 先有太極耶 旣有動靜之後 繼有太極耶 動時 太極 寓在何處 靜時 太極 寓在何處 動靜 陰陽也 陰陽之與太極 二其名則其二物耶 抑一物而二其名耶
動靜이 있지 않은 이전에 먼저 太極이 있습니까? 이미 동정이 있은 후에 이어서 태극이 있습니까? 動時에 태극은 어느 곳에 머물며, 靜時에 태극은 어느 곳에 머뭅니까? 동정은 음양이니 음양이 태극과 그 이름을 둘로 한 즉 그것은 二物입니까? 아니면 一物이면서 그 이름을 둘로 한 것입니까?
答
理之與氣 非彼無我 非我無所取 所謂二而一 一而二者也 彼之動靜 卽我之動靜也 動則動 靜則靜 何嘗少離
理와 氣는 저가 아니면 내가 없고, 내가 아니면 취할 바가 없으니 소위 二이면서 一이고, 一이면서 二인 것이다. 저것의 動靜은 즉 나의 동정이다. 動則動이요 靜則靜이니 어찌 일찌기 조금이라도 떨어지겠는가?
▶ 問-[12]
太極 形而上者也 陰陽 形而下者也 形而下 亦可謂有太極 則形而上 亦可謂有陰陽耶 陰陽太極 竟無先後之可言歟
태극은 형이상이요, 음양은 형이하이니, 형이하 또한 태극이 있고 말할 수 있다면 형이상 또한 음양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음양 태극은 마침내 선후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答
理氣 旣不相離 則固不可分先後 而然 朱子 曰自形而上下者 言 豈無先後 必欲言之 則其先後 亦可想矣 太極 理也 陰陽 氣也 形而上 豈有氣哉 於氣 理未嘗不在 而於理 或有氣未嘗用事處
理氣가 이미 서로 떨어질 수 없으니 진실로 선후를 나눌 수 없다. 朱子가 말하기를 '형이상 하로 말한다면 어찌 선후가 없겠는가' 라고 하니, 반드시 그것을 말로 하여야 하면 그 선후를 또한 생각할 수 있다. 태극은 理며, 음양은 氣이다. 형이상에 어찌 기가 있으리요? 氣에는 理가 일직이 있지 않음이 없으나 理에는 혹 氣가 일직이 작용한 곳이 있지 않다.
▶ 問-[13]
太極之與陰陽 取譬一身上性與心則心是太極耶 性是太極耶 抑何者 爲陰陽也 惟性惟心 性是一物 心是一物 而不相干涉耶 抑一物而二其名耶 孟子 只說一性 而伊川之以本然氣質 分說二性 何耶 上自聖賢 下至土石昆蟲 咸得一性 而今就賦人處 別爲二性 何耶
理氣가 이미 서로 떨어질 수 없으니 진실로 선후를 나눌 수 없다. 朱子가 말하기를 '형이상하로 말한다면 어찌 선후가 없겠는가' 라고 하니, 반드시 그것을 말로 하여야 하면 그 선후를 또한 생각할 수 있다. 태극은 理며, 음양은 氣이다. 형이상에 어찌 기가 있으리요? 氣에는 理가 일직이 있지 않음이 없으나 理에는 혹 氣가 일직이 작용한 곳이 있지 않다.
答
朱子 曰性猶太極也 心猶陰陽也 陰陽之與太極 非二物也 咸得一性 以理言也 氣質千萬 以氣言也 氣質之與本然 卽一性也 物得氣之塞故 無變化之理 人得氣之通故 濁可以爲淸 愚可以爲知 而此 大小學之所以說也 孟子程子 豈異其說 朱子 曰孟子 剔出言性之本 伊川 兼氣質而言 要之 不可離也
朱子가 말하기를 '성은 태극과 같고 심은 음양과 같다. 음양과 태극은 二物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모두 一性을 얻은 것은 理로써 말한 것이다. 기질이 천만인 것은 기로써 말한 것이다. 기질과 본연은 一性이다. 物은 기의 막힘을 얻었으므로 변화가 없는 리이다. 사람은 기의 통함을 얻었으므로 濁은 淸으로 될 수 있고, 愚는 智로 될 수 있으니 이는 대학 소학을 세운 까닭이다. 孟子 程子가 어찌 그 말을 달리 하였겠는가? 朱子가 말하기를 '孟子는 성의 본체를 추려 말하였고, 伊川은 기질을 겸하여 말하였다'고 하니 요컨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 問-[14]
南軒張氏 曰太極之體 至靜 其果靜耶 至靜之云 指已發之用而言 則何如 指未發之體而言 則何如 貫未發已發而言 則何如也
南軒張氏가 말하기를 "太極의 本體는 지극히 고요하다.(至靜)"하였으니 과연 靜한 것인가? 지극히 고요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 이미 발한 작용(用)을 가리킨 다고 보면 어떠하며, 아직 발하지 않은 본체를 지목한 것이라고 말하면 어떠하며 未發 已發을 통 털어 말한 것이라고 보면 또한 어떠한가?
答
太極 動靜之理也 至靜之云 於體,於用,於貫未發已發 太極之體 含動靜則似合朱子之指
太極은 動靜의 理이다. '지정'이라고 말한 것은 본체에, 작용에 그리고 未發 已發을 통 털어 봄에 모두 옳지 않다. 주자가 말하기를 "이처럼(나누어)보면 도리어 하나의 정당하지 못한 삐뚤어진 太極을 이루게 될 것이라" 하였으니 太極의 本體는 動靜을 포함한다고 보면 주자의 뜻에 합치 될듯하다.
▶ 問-[15]
太極 動而生陽 靜而生陰 則太極 自能動靜耶 太極 理也 理無形焉 有形者 能動靜 而無形者 又能動靜 何也
太極이 動하여 陽을 낳고 靜하여 陰을 낳은즉 太極이 스스로 히 動하고 靜하는가? 太極은 理이며 理는 형체가 없다. 형체를 가진 것은 능히 動하고 靜하지만 형체가 없는 것도 또 능히 動하고 靜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
答
非先有太極而後 乃能動靜也 卽動靜而知太極也
먼저 太極이 있는 후에야 능히 動하고 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動하고 靜하는 것을 卽하여(보고) 太極을 알게되는 것이다.
▶ 問-[16]
旣曰一陰一陽 則似乎二氣 又曰陰陽根 陽根陰 則似乎一氣 是何立言之無定也 所謂陰陽 做一箇說耶 做兩箇說耶
이미 말하기를 하나의 陰,하나의 陽이라고 말하였으면 마치 두 가지의 氣가 있는 듯 하고 또 陰은 陽을 뿌리로 하고(陰으로부터 나옴) 陽은 陰을 뿌리로 한다고 한 것으로 보면 마치 하나의 氣인듯 한데 이처럼 어찌 입론이 정해짐이 없습니까
答
朱子說陰之流行者 爲陽 陽之凝聚者 爲陰 非眞有二物相對 但立言處 各有攸主 或對說 或合說故 朱子 曰陰陽 作一箇看 亦得 做兩箇看도 亦得
주자가 말한 「陰이 흘러 움직여 陽이 되고 陽이 엉겨 모인 것이 陰이라」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두 물체가 서로 대립하여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입론 할 적에 각각 주안점이 있어 혹 상대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혹 합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주자가 말하기를 "陰陽은 한개로 볼수도 있고 두개로 볼 수도 있다." 고 하였다.
▶ 問-[17]
眞 理也 精 氣也 理氣合凝處 只言無極而不言太極 何也
眞이란 理이고 精이란 氣이다. 하면서 理와 氣가 합쳐 뭉친 곳에 단지 無極만을 말하고 太極을 말하지 않음은 어떤 이유입니까?
答
所謂無極之眞 便是太極也
이른 바 무극의 眞이 바로 太極이다.
▶ 問-[18]
在地成形則水火 在地而流動閃 其未定形 何也 水是陰物而其中反明 火是陽物而其中反暗 亦何意也 稱水爲陽 稱火爲陰 互言無定 亦有義耶 水有溫水 火無冷火 抑何義也 以五行成時 而四時之止於四 抑何義也
땅에 있는 것은 形體를 이룬다 하면 물(水)과 불(火)은 땅에 있으면서 흘러 움직이고 번쩍거려 형태를 이루지 못함은 어떤 이유인가? 물은 陰物이나 그 가운데에는 도리어 밝음이 있고 불은 陽物이나 그 가운데에 陰이 있으니 또한 무슨 까닭인가? 물을 가리켜 陽이라고 하고 불을 가리켜 陰이라고 하여 상호 말 사이에 일정함이 없으니 또한 이유가 있는가? 물에는 따뜻한 물이 있으나 불에는 찬불이 없으니 어떻게 설명하여야 할 것인가? 五行으로 시절이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四時가 넷 뿐인 것은 어떻게 설명하여야 하는가?
答
天地生物 先其輕淸 水火 其體尙虛 不離於氣者也 水 質陰而性陽 火 質陽而性陰 張橫渠,所謂陰陽之精 互藏其宅者也 水有溫, 火無冷 陰可變而陽不可變也 土包水火木金 此 所以木火金水爲時 而土之寄旺於四時者也
天地가 萬物은 만들어 냄에는 먼저 가볍고 맑게 하였다. 물과 불은 그 본체가 아직 虛하여 氣에서 떠나지 않는 자이다. 물은 바탕은 陰이나 그 성질은 陽이며 불은 바탕은 陽이나 그 성질은 陰이다. 張橫渠가 말한 바 "陰과 陽의 精氣가 서로 각각의 자리에 감추어졌다" 고 한 것이 이를 말함이다. 물에는 따뜻한 물이 있어도 불에는 찬 불이 없는 것은 陰은 변할 수 있으나 陽은 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土는 水 火 木 金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이는 木火金水가 각각 한 계절을 이루고 土는 사시에 붙여져 왕성하게 된다.
● - 송구봉선생의 太極問 - 2
▶ 問-[19]
五行地中 惟水火能動而木金土 不能動者 亦何意也 合天地人物而就動靜上 總論之 動而無靜 靜而無動者 是何物而稟何氣而然也 動而無動 靜而無靜者 亦何物也 動而不得其動之理 靜而不得其靜之理 可靜而動 可動而靜者 亦何物也 可動而動 可靜而靜 靜而不失其靜 動而不失其動 一動一靜 自合其中者 亦何名也
五行가운데 오직 水와 火만이 動할 줄 알고 木 金 土는 動할 줄 모르는 것은 또한 무슨 까닭인가? 天地와 人物을 합쳐 動과 靜을 총론하면 動하기만 하고靜이 없고 靜하기만 하고 動이 없는 것은 이 무슨 物로써 2무슨 氣를 타고 났기에 그런가? 動하면서도 動이 없고 靜하면서도 靜이 없는 것은 또한 무슨 物인가? 動해도 그 動하는 이치를 터득하지 못하고 靜하면서도 그 靜하는 이치를 터득하지 못하며 靜해야 될 때에 動하고 動해야 될 때에 靜하는 것은 또한 어떤 물건인가? 動할 때 動하고 靜할 때 靜하며 靜하면서도 그 이치를 잃지 않아서 한 번 動하고 한 번 靜하는것이 저절로 그 中道에 맞는 것은 또한 누구를 이름함인가?
答
物之屬乎天者 動 屬乎地者 靜 水火木金 屬地者也 宜靜而水火之或能動者 以不離於氣也 大抵動而無靜者 天也 靜而無動者 地也 動靜者 氣也 動靜而無動靜者 理也 動靜之反其理者 桀盜 也 動靜之合其中者 堯舜也
物로써 하늘에 속하는 것은 動하고 땅에 속하는 것은 靜한다. 水 火 木 金은 땅에 속한 것으로써 마땅히 靜해야 할 것이나 水와 火가 혹 動할 줄 아는 것은 氣에 분리되지 않기 때문이다. 무릇 動하기만하고 靜이 없는 것은 하늘이며 靜하기만하고 動이 없는 것은 땅이다. 動하기도하고 靜하기도 하는 것은 氣이며動하기도하고 靜하기도 하면서 動하고 靜함이 없는것은 理이다. 動과 靜의 이치를 위반한 자는 桀과 盜 이고 動과 靜을 그 中道에 맞게 한 자는 堯와 舜이다.
▶問-[20]
姸醜美惡高下深淺之能使異之者 何物也 千狀百態之所以貫乎一者 亦何物也 旣不能無姸蚩貴賤之殊 則是乃物之情也 聖人之必欲使愚不肖 同歸於正心誠意之域 而一其德者 亦何義也
곱고 추하며 아름답고 나쁘며 높고 낮으며 깊고 얕은 것을 능히 다르게 하는 것은 어떤 物이며 천가지 모습 백가지 형태를 하나의 동일한 이치로 일관시키는 것은 또한 어떤 물인가? 이미 예쁘고 미우며 귀하고 천함의 차별이 없을 수 없으니 이는 곧 물의 情이다. 그런데 성인이 반드시 어리석고 불초한 자도 다 같이 마음을 바르게 하고 뜻을 성실하게 하는 경지로 돌아가서 그 덕을 균일하도록 하려는 것은 또한 무슨 뜻인가?
答
千百其狀者 氣也 貫乎一者 理也 稟得氣之偏且塞者 物也 正且通者 人也 於通正之中 又不能無淸濁之殊 而同得仁義禮智之理故 聖人說敎 欲返其理
그 모습이 천가지 백가지로 다른 것은 氣이고 동일한데에 통하는 것은 理이다. 치우치고 막힌 氣를 타고 난 것은 物이며 바르고 통하게 타고난 것은 사람이다. 그 통하고 바른 중에도 또 淸하고 濁한 차이가 없을 수 없으나 仁義禮智의 이치를 다 같이 타고나기 때문에 聖人이 교육을 베풀어서 그 이치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이다.
▶ 問-[21]
人具五行而物稟一行耶 物亦具五行耶 其異於人者 何也 旣曰人得五行之正 而於人 亦有聖狂之殊 何也 所謂明德 不分聖狂而同得 則明德之與仁義禮智 其同耶異耶 仁義禮智之均賦於人物 而明德之不在於物者 抑何義也
사람은 五行을 갖추었는데 物은 한 가지만을 타고 났는가? 物도 또한 五行을 갖추었는가? 사람과 다른 것은 무엇인가? 이미 말하기를 사람은 五行의 바른 氣를 탔다고 했는데 사람에도 또한 聖과 狂의 차이가 있음은 왜인가? 명덕을 聖과 狂의 구별 없이 다 같이 탔다고 한다면 명덕은 仁義禮智와 같은 것이다? 仁義禮智는 사람과 물에 고루 부여했는데 명덕이 物에 없음은 무슨 뜻인가?
答
物亦具五行而得其偏者 物也 人受其正而得其淸者 聖也 明德之不分聖狂 同得其正也 仁義之均賦人物 同得其理也 仁義禮智 全指其理 明德 竝擧理氣而言
物 또한 五行을갖추었으나 치우치게 타고 난 것이 物이다. 사람은 바르고 맑은 것은 받은 자가 성인이다. 명덕 에서 聖과 狂을 구분하지 않음은 다 같이 바름을 타고난 것이고 仁義가 사람과 物에 고루 부여 되었다함은 다 같이 理를 얻은 것이다. 그런데 仁義禮智란 것은 오로지 그 理만 가리킨 것이고 명덕 이란 것은 理와 氣를 아울러 말한 것이다.
▶ 問-[22]
凡人之生 先有陽而後有陰 陽在內而陰包外 今曰 形旣生矣 神發知矣 形是陰之聚也 神是陽之闢也 然則 陰先於陽耶 何先後之無序也
무릇 사람이 생길 때에 먼저 양이 있은 다음 음이 있게되며 양은 안에 있고 음은 밖을 싸고 있다. 그런데 이제 말하기를"형체가 이에 생겼으면 정신은 지각을 발한다."고 하였다. 형체는 음이 모인 것이고 정신은 양이 열린 것이다. 그렇다면 음이 양보다 먼저인 것인가? 어찌하여 선후가 각각 같지 아니한 것인가?
答
成形之與形生 陰陽先後 固各不同
형체가 이루어지는 것과 형체가 생기는 것에 있어 음과 양의 선후는 진실로 각각 같지 않은 것이다.
▶問-[23]
吉凶者 善惡也 陰陽也 陰陽不可偏發 而聖人之於吉凶善惡 常欲變惡而爲善 舍凶而趨吉者 何也 堯舜之世 比屋可封 是可謂獨陽而無陰耶 獨陽無陰 天下無是理 而吾儒之每抑陰扶陽 何耶
吉凶이라는 것은 善惡이며 陰陽이다. 陰陽은 한쪽을 치우치게 없앨 수 없는 것인데 聖人이 吉凶과 善惡에 대하여 항상 惡을 변화시켜 善으로 만들고 凶함은 버리고 吉함을 따르고자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堯舜時代에는 사람들이 착해서 집집마다 表彰할만 했다 하였으니 이것은 오직 陽만 있고 陰은 없었다는 말인가? 오직 양만 있고 음이 없다는 이치는 천하에 없는 것인데 우리 儒家가 항상 陰을 抑制하고 陽을 부추기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答
朱子 於易坤之初六本義 曰陰陽者 造化之本 消長有常 非人之所能損益也 然 有淑慝之分 聖人作易 於其不能相無者 旣以健順五常之屬 明之 而無所偏主 至其消息之際 未嘗不致其扶陽抑陰之意焉 盖所以贊化育參天地者 其旨深矣 以此說推之 可知
주자가 「周易 坤卦 初六 本義」에 말하기를 <陰陽이란 것은 造化의 根本으로 消長함에 一定한 理致가 있어 사람으로서는 줄이거나 보탤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착하고 간특한 구분은 있는 것이므로 聖人이 周易을 지음에 있어 착하고 간특한 성품이 서로 없을 수없다 하여 仁義의 착한 성품을 꿋꿋하게 따른다는 것을 밝힘으로서 편벽 된 주장이 없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消息하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일직이 陽을 부추기고 陰을 抑制하는 뜻에 이르지 않음이 없었다. 대개 化育을 도움으로써 天地造化에 參與하는 것은 그 뜻이 깊으니 이말을 가지고 미루어 본다면 가히 알 수가 있는 것이다.
▶ 問-[24]
謂太極含動靜 謂太極有動靜 含之與有 其一義耶
태극이 동과 정을 포함한다고도 하고 태극에 동과 정이 있다고도 하는데 포함했다고 하는 것과 있다고 하는 것은 그 뜻이 하나로서 같은 것인가?
答
含 以本體而言 有 以流行而言 含之與有 義有所在 朱子下語之精密處也
포함했다는 것은 본체로서 말한 것이고 있다고 하는 것은 유행하는 것으로 말한 것이다. 포함했다는 것과 있다고 하는 것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이것이 주자가 한 말의 정밀한 곳이다.
▶ 問-[25]
動之所以必靜者 根乎陰故也 靜之所以必動者 根乎陽故也 此 所謂所謂動靜無端 陰陽無始也 而今曰太極 動而生陽 却以動而生陽爲始 何也 未動之前 又如何也
동이 반드시 정하게 되는 것은 음에 근본 한 까닭이고 정이 반드시 동하게 되는 것은 양에 근본 한 까닭이다 .이것이 소위 동과 정이 끝이 없고 음과 양이 시초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말하기를 "태극이 동하면서 양을 낳는다"하니 이는 동하면서 양을 낳는다는 것으로 시초를 삼는 것인데 왜 그러한가? 동하기 전에는 또 어떠한 것인가?
答
未動之前 便是陰 亦非以動而生陽 爲始 故 朱子 曰今且自動而生陽處 看去 又曰動而生陽 其初是靜 靜之上 又須動 盖動靜無端,陰陽無始 天道也 始於陽,成於陰 本於靜,流於動 人道也
아직 동하기 전은 바로 음이지만 그렇다고 동하면서 양을 낳는 것으로 시초를 삼는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주자가 말하기를 "동하면서 양을 낳는다고 하는 곳에서 보아야한다."하고 또 "동하면서 양을 낳는다는 것은 그 시초가 정이며 아직 정하기 전에는 또한 동하게 되어 있다."고 하였다. 대개 동과 정이 끝이 없고 음과 양이 시초가 없음은 천도인 것이다. 양에서 비롯하여 음에서 이루어지며 정에 근본 하여 동에 유행함은 인도인 것이다.
▶ 問- [26]
太極 旣無動靜之可見 是乃空底物 而反謂與釋氏說性 不同 何耶 朱子曰釋氏說性 只言皮殼 以君臣父子 爲幻妄 然則其所謂君臣父子理歟氣歟
太極이라는 것이 이미 그 동하고 정하는 것을 볼 수 없다고 한다면 이것은 다만 헛물 질일 것인데 도리어 석씨가 말하는 性과 같지 않다 함은 무슨 까닭인가? 주자가 말하기를 "석씨가 性을 말한 것은 다만 껍데기만 말한 것으로서 군신과 부자를 헛깨비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다면 이른바 군신과 부자라는 것은 理인가? 氣인가?
答
太極 有陰陽五行之理 不是空底物事 若空則與釋氏說性 何以異 釋氏 屛棄人事 老氏 淸虛厭事 不知人事是天理 皆作下面粗底看 是 不知程子之所謂器亦道 道亦器 欲把道理 做事物頂頭玄妙底物 此 空之與太極 異 而竟將君臣父子之理 爲氣者也 初坐不知理 而終亦不知氣
태극에는 음양과 五行의 이치가 있으니 이것이 헛물질은 아니다. 만약 헛것이라고 한다면 釋氏가 말한 性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釋氏는 사람의 道理를 져버렸고 老氏의 淸虛라는 것은 人事을 싫어함이니 人事는 곧 天理임을 알지 못하고 모두 밑바탕의 하찮은 일로만 본 것이다. 이것은 程子가 말한 "器 또한 道이고 道 또한 器"라는 것을 모르고 다만 도리를 가지고 사물의 높고 현묘한 바탕으로 삼은 것이다. 이것은 空과 太極이 다른 것이며 결국 君臣과 父子의 이치를 氣로 본 것이다. 처음에 이러한 이치를 알지 못하면 마침내 氣또한 알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 問-[27]
南軒 曰無極而太極 言莫之爲而爲之 其果信然耶 抑有不是處耶
南軒이 말하기를 <무극 이면서 태극이란 것은 하는 것이 없으면서 한다>라고 하였다. 과연 그런가. 또는 옳지 못한 점이 있는가.
答
以莫之爲 釋無極 以爲之 釋太極 是 以無極太極 爲二說看也 又況爲之氣也 理固莫之爲 而所以爲之之理 在其中 此說 非是
<하는 것이 없다>라는 것으로써 無極을 해석하며, <한다>라는 것으로써 太極을 해석함은 곧 無極과 太極을 두 가지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도 <한다>라는 것은 氣라고 하여 理는 바로 하는 것이 없음인데 하는 것의 이치가 그 속에 있다고 함이니 이 말은 옳지 못하다.
● - 송구봉선생의 太極問 - 3
▶ 問-[28]
動靜陰陽 是皆形而下者也 已發之時 固不可謂太極 未發之時 亦不可謂太極耶 寂然不動之中 喜怒哀樂之無感通者也 中之與太極 其同耶異耶
動과 靜, 陰과 陽은 모두 形而下이다. 이미 發하였을 때는 결코 太極이라 할 수 없으며 發하지 않았을 때에도 역시 太極이라 할 수 없는가? 고요하게 動하지 않는(寂然不動) 中이란 것은 喜怒哀樂 감정이 통하지 않음이다. 이 中이란 것과 太極은 같은가 다른가?
答
已發未發 一是動 一是靜 太極含動靜 所以與中不同
이미 發한 것과 發하지 아니한 것은 하나는 動이며 하나는 靜이다. 太極은 動과 靜을 包含한 것으로서 中과 같지 않다.
▶問-[29]
人人 有一太極 物物 有一太極云 則於桀盜 亦可見太極 於木石 亦可見太極
사람마다 太極이 하나씩 있고 物物마다 太極이 하나씩 있다 하였다. 그렇다면 桀임금이나 盜 에게 서도 역시 太極을 볼 수 있고 나무와 돌에서도 역시 太極을 볼 수 있는가?
答
桀盜 有是性故 亦有可化之理 朱子 曰天下 無性外之物 又曰枯槁之物 亦有性 惟是合下有此理故云 又曰其所以爲是物之理 則未嘗不具耳
桀과 盜 도 이 性이 있기 때문에 역시 敎化할 수 있는 理致가 있다. 朱子가 말하기를 '천하에는 性外의 物이 없다'하고 또 '말라 버린 物도 性이 있음은 바로 이 理가 있는 까닭이다'하였다. 그러므로 또 '그 物이 되는 理致는 일직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라고도 하였다.
▶ 問- [30]
至於成知者 方謂之性 而朱子 說太極 有是性則有陰陽五行 此性字 與他時說性處 不同 何耶
이루어진 것이라야 바로 性이라 함에 있어 朱子는 太極에 이 性이 있으면 陰陽과 五行이 있다고 말했다. 이 때의 性이란 글자와, 다른 때의 性이란 글자가 같지 않은 것은 왜 그러한가?
答
太極 不可謂性 必朱子初年說也
太極을 性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 것은 반드시 朱子가 初年에 한 말일 것이다.
▶問- [31]
未有一物之前 先有太極耶 旣有萬物之後 繼有太極耶
一物도 있기 전에 먼저 太極이 있었는가, 이미 萬物이 있은 다음에 이어서 太極이 있는 것인가?
答
有物之後 始知太極 而然 初無太極則物不能爲物矣
物이 있은 다음에 이어서 비로소 太極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當初에 太極이 없었다면 物이 物로 되지 못했을 것이다.
▶ 問- [32]
先儒 就人身 以氣屬陽 以血屬陰 然則於血 只有陰而無陽 於氣 只有陽而無陰乎 抑兼有陰陽乎 抑互相爲陰陽耶
先儒는 사람의 몸에 대해서 氣는 陽에 속하고 피(血)는 陰에 속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피(血)에는 다만 陰만 있고 陽은 없으며 氣에는 다만 陽만 있고 陰은 없단 말인가? 그렇지 않으면 陰과 陽이 같이 있는가? 또한 서로 陰도 되고 陽도 되는가?
答
凡陽中有陰陽 陰中有陰陽 氣血 雖分屬陰陽 而亦各有陰陽 亦互爲陰陽 如魂爲陽,魄爲陰,吸爲陰,呼爲陽,血爲陽,肉爲陰之類 可知
무릇 陽속에도 陰과 陽이 있고 陰속에도 陰과 陽이 있다.氣와 血이 비록 陰과 陽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역시 각각 陰과 陽이 있고 또한 서로 陰도 되고 陽도 된다. 이는 마치 魂은 陽이 되고 魄은 음이 되며 들숨(吸)은 陰이 되고 날숨(呼)은 陽이 되며 피(血)는 陽이 되고 살(肉)은 陰이 된다는 유(類)와 같음을 알 수 있다.
▶ 問-[33]
動靜 是太極動靜乎 是陰陽動靜乎 論動靜 皆指陰陽 而圖曰太極, 動而生陽, 靜而生陰 然則太極亦能動靜乎
動靜은 太極이 動하고 靜하는 것인가? 陰陽이 動하고 靜하는 것인가? 動靜을 논함에 모두 陰陽을 가리켰는데 太極圖에서는 말하기를 "太極이 動하여 陽을 낳고 靜하여 陰을 낳는다."하니 그렇다면太極도 또한 動하고 靜할 수 있다는 것인가?
答
太極之有動靜 是天命之流行也 盖太極 有動靜之理故 陰陽 能動靜也 動靜者 陰陽也 所以動靜者 太極也
太極이 動하고 靜함이 있다는 것은 天命이 流行하는 것이다. 대개 太極은 動하고 靜하는 理致가 있기 때문에 陰과 陽이 動하고 靜할 수 있는 것이다. 動하고 靜하는 것은 陰陽이고 動하고 靜하게 하는 根據는 太極이다.
▶ 問-[34]
陰陽定位 等數分明 而今乃숙忽變化 橫看則左陽右陰 竪看則上陽下陰.仰手爲陽 覆手爲陰 北之陽 乃南之陰 東之下 乃西之上 如是幻易 使人莫測 亦何義耶
음과 양이 위치를 정함에 등수가 분명한 것인데 이제 이에 갑자기 변화하여 가로로 보면 왼쪽은 양이고 오른쪽은 음이오, 세로로 보면 위는 양이고 아래는 음이다. 손을 우러르면 양이 되고 손을 덮으면 음이 되며 낯을 향하면 양이 되고 뒤를 등지면 음이 되며, 북쪽의 양이 이에 남쪽의 음이오 ,동쪽의 아래가 이에 서쪽의 위이다. 이와 같이 변하고 바뀌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헤아릴 수 없게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答
二氣相 相 隨時隨處 不可爲一 此 人事之中 無定體者也 然 陰陽定位 則一定而無變
두 기운(음양)은 서로 당기고 밀며 때와 장소를 따르니 일정할 수가 없다. 이것은 인사의 시중(時中)이니 일정한 체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음과 양이 위치를 정하면 일정하여 변화가 없다.
▶ 問-[35]
易云有天地然後 有萬物 有萬物然後 有男女 圖曰乾道成男 坤道成女 二氣交感 化生萬物 二說之不同 何也
주역에 이르기를 "천지가 있은 연후에 만물이 있고, 만물이 있은 연후에 남녀가 있다."하고 태극도설 에서는 말하기를 "건도(乾道)는 남(男)을 이루고 곤도(坤道)는 여(女)를 이루며, 두 기운이 서로 느끼어서 만물을 화생 한다."하니 두 설이 같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答
易與圖 皆言有天地然後 有氣化 有氣化然後 有形化 易繫辭 天地絪縕,萬物化醇 氣化也 男女構精,萬物化生 形化也 圖之兩儀立 天地也 乾道成男,坤道成女 氣化也 二氣交感,化生萬物 形化也 何不同之有
주역과 태극 도설이 모두 천지가 있은 연후에 기화가 있고 기화기 있은 연후에 형화가 있음을 말하였다. 주역 계사전에 천지가 기운이 왕성해서 만물이 변화하여 순수해진다는 것은 기화이고 남녀가 정기를 합쳐서 만물이 변화하여 생성한다는 것은 형화이다. 태극 도설의 양의가 선다는 것은 천지이오, 건도는 남을 이루고 곤도는 여를 이룬다는 것은 기화이오, 두 기운이 서로 느끼어서 만물을 화생 한다는 것은 형화 이니 무엇이 같지 않음이 있는가?
▶ 問-[36]
五性感動而善惡分 到五行處 便有善惡之分 而其上動靜則無善惡耶 到人 便論氣質之性 天亦有氣質之性歟
五性이 감동하여 선과 악이 나누어지고, 오행이 있는 곳에 이르러서 곧 선과 악의 구분이 있게 되니 그 이상에서의 동과 정에는 선과 악이 없는 것인가? 사람에 이르러서 곧 기질의 성을 논하니 하늘도 또한 기질의 성이 있는 것인가?
答
或 問陰陽 便有善惡 朱子曰陰陽五行 皆善 又曰陰陽之理 皆善 此謂理皆善而氣有善惡也 氣有善惡故 有人物偏正淸濁之殊 到人 亦有幾善惡之分 皆理在氣中後說也 故 朱子曰此 言衆人 具動靜之理 而常失於動也 動靜之分善惡 衆人爲然 聖人 全體太極 與天同德 聖人 氣質之性 純善 天則無氣質之性 故 朱子曰天地之性 是理니 옇到有陰陽五行處 便有氣質之性 便有昏明厚薄之殊
어떤이가 음양에 곧 선악이 있는가를 질문하였는데 주자가 말하기를 "음양과 오행은 모두 선하다."하였고,또 말하기를 "음양의 이치는 모두 선하다."하였다. 이것은 이는 모두 선하나 기는 선과 악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기에는 선과 악이 있기 때문에 사람과 물, 치우침과 바름,맑음과 흐림의 차이가 있게 된다. 사람에 이르러서 또한 선과 악을 기미 하는 구분이 있게되니, 모두 이치가 기 가운데에 있고 난 뒤의 말이다. 그러므로 주자가 말하기를 "이것은 뭇 사람들이 동정의 이치를 갖추었으나 항상 동하는 데에서 잃어버림을 말한 것이다."하였다. 동하고 정함이 선과 악을 나누는 것은 뭇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오, 성인은 전체가 태극이니 하늘과 더불어 덕이 동일하다. 성인은 기질의 성이 순수하며 선하고 하늘은 기질의 성이 없다. 그러므로 주자가 말하기를 "천지의 성은 이치이다. 겨우 음양과 오행이 있는 곳에 이르르 면 곧 기질의 성이 있게 되고 곧 어둡고 밝으며 두텁고 엷은 차이가 있게 된다."하였다.
● - 송구봉선생의 太極問 - 4
▶ 問-[37]
周子則說靜字 程子則說敬字 二說之不同 何耶 亦有詳略之可論耶
周子는 '靜'字를 말했고 程子는 '敬'字를 말하였다. 두 사람의 말이 다른 것은 무엇인가? 또 자세하고 간략함을 논할만한 점이 있는가?
答
靜則偏 而敬乃通貫動靜 然 必以靜爲本 平居 湛然虛靜 如秋冬之秘藏 應事 方不差錯 如春夏之發生 物物得所
靜은 (動靜의) 한 쪽에 치우치고, 敬은 動과 靜을 관통한다. 그러나 반드시 靜으로 근본을 삼아야 하니, 평소 조용히 있을 때에는 침착하고 고요하며(湛然) 망상이나 잡념을 비우고(虛) 고요하게(靜) 하기를 마치 가을과 겨울이 만물을 갈 마무리하듯이 하여야, 몸을 움직여 일에 호응할 적에 바야흐로 어긋나지 않게 되기를 마치 봄과 여름이 제때에 맞추어 만물을 발생시키는 것처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사물마다 제자리를 얻게 된다.
▶ 問- [38]
太極圖 自一而二 自二而五 以至萬物 易則自一而二 自二而四 自四而八 以至六十四 西銘則只言陰陽 洪範則說五行 理一而已 是何所論之各異也
太極圖에서는 하나의 太極으로부터 둘인 陰陽을, 둘로부터 다섯인 五行이 되어 만물에 이르고, 周易에서는 하나로부터 둘, 둘로부터 넷(四象), 넷으로부터 여덟(八卦)이 되어 六十四괘에 이르며, 西銘에서는 다만 陰陽만을 말했고 洪範에서는 단지 五行만을 말하였으니, 理는 하나일 따름인데 어찌하여 논한 바가 각각 다른가?
答
朱子 旣言道理 未始不相値也 只是有詳略
朱子가 이미 말하였다. "道理는 시초부터 서로 일정한 값어치가 있지 않은 것이 없으니, 다만 자세하고 간략한 말이 있을 뿐이다."
▶ 問- [39]
太極之孔子 未曾與顔曾 語到此 何義也 朱子 謂程子 不以授門人者 蓋未有能受之者 然則顔之於孔子 亦在未能受之列耶 如此其難也 而朱子之編於近思錄初頭 亦何義也
太極에 대하여 孔子가 일찌기 顔子와 曾子와 더불어 말하지 않은 것은 무슨 뜻인가? 朱子는 "程子가 太極을 門人에게 가르쳐주지 않은 것은 아마 능히 받을만한 제자가 있지 않아서일 것이다"라고 말하였는데, 그렇다면 顔子와 曾子가 孔子에게 있어서 또한 가르침을 능히 받을 수 없는 반열에 있는 것인가? 이처럼 그것이 어려운 것인데, 朱子가 近思錄의 첫머리에 태극 도설을 편집한 것은 또 무슨 뜻인가?
答
孔子之於顔曾 如一貫之類 是也 朱子 亦曰焉知其不曾說 孔子 於易則鮮及焉 程子之未及易與圖 猶此意也 編在近思錄之初頭 呂東萊 曰使之知名義 有所向望而已
孔子가 顔子와 曾子에게 '吾道 一以貫之(나의 道는 하나로 꿰뚫었다)'와 같은 類들이 이것이다. 朱子도 또한 '어찌 일직이 (태극을) 말하지 않았음을 알겠는가? 공자는 주역에 대하여 드물게 말하셨으니, 정자가 주역과 태극도설을 언급하지 않은 것도 이와 같은 의도이다.'라고 하였다. 근사록의 초두에 편집 배치한 것은 呂東萊가 근사록의 서문에서 '初學者들로 하여금 太極의 명칭과 개념(名과 義)을 알게 하여 학업의 지향해 나갈 방향을 갖도록 할 따름이다' 라고 하였다.
▶ 問-[40]
朱子 曰滿山靑黃碧綠 無非太極 是氣也 而朱子之反以爲理 何也
주자가 '산에 가득 찬 푸르고 노랗고 푸르고 초록인 온갖 것들이 太極 아닌 것이 없다'라고 말하였는데, 이 것은 氣인데도 朱子가 도리어 理라고 하였으니, 무엇 때문인가?
答
器亦道 道亦器也 非理無氣 非氣無道
器 또한 道이고 道 또한 器이니, 理가 아니면 氣가 없고 氣가 아니면 道가 없게 된다.
▶ 問-[41]
明道 言人生而靜以上 不容說 旣曰不容說 而周子之說無極 何也 邵翁之又說到無極之前 亦何義也 先儒之論 旣若有三等次第 則漸說到高處 似無不可 莊子之加一層於無極之上 而又以爲非 亦何意也 夫復坤之間 乃無極 而自坤反垢 乃無極之前 此 邵子所論也 始也者 太極也 未始有始也者 無極也 未始有夫未始有始也者 無極之上 又一層也 此 莊子所言也 周程莊邵同耶異耶
明道선생이 '사람이 나서 靜한 것 그 이상은 말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미 '말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하였는데도 周子가 無極을 말하였음은 무엇 때문인가? 邵子가 또 무극의 이전을 말하였으니, 무슨 뜻인가? 先儒들(明道,周子,邵子)의 논설이 이미 세 단계의 차례가 있다면, 차츰 더 높은 곳을 말했다고 하더라도 옳지 않을 것이 없을 것 같다. (그러나) 莊子가 무극위(無極之上)에 한 단계를 더 말 한 것에 대하여, 先儒들이 또한 잘못(非)이라고 하였으니, 이 또한 무슨 뜻인가? '復卦와 坤卦의 사이가 곧 無極이며 坤卦로부터 垢卦로 돌아가는 것이 곧 無極의 以前이다'라는 것은 邵子의 논설이다. '처음(始)'이란 太極을 뜻하고,'처음에는 처음도 있지 않다(未始有始)'라는 말은 無極을 뜻하는데, '처음에는 그 "처음에는 처음도 있지 않다 (未始有始)"라는 것조차도 있지 않다(未始有夫未始有始)'라는 말은 또 무극위의 한 단계 더 높은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 것은 莊子가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周子와 程子와 莊子와 邵子가 말한 것은 같은가 다른가?
答
朱子 曰非太極之上 別有無極也 無極太極 無次第 邵子 說到無極之前 只論氣之徇環 程子不容說 謂難言也 非不言也 莊子架虛 不須爲辨 亦專指氣爲言
朱子가 '太極 위에 또 다른 無極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였으니, 無極과 太極은 차례가 없다. 邵子가 無極 이전을 말한 것은 다만 氣의 순환을 논한 것이고, 程子가 말한 '설명할 수 없다(不容說)'는 것은 말하기 어렵다는 것(難言)이지 '말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님(非不言)을 뜻한다. 莊子의 '가공할 헛소리(架虛)'는 분별할 것이 되지도 않으나 또한 오로지 氣만을 가리켜말한 것이라 하겠다.
▶ 問- [42]
朱子 以太極動而生陽 爲天地之喜怒哀樂發處 而延平 謂做已發看 不得 抑何所見而然耶 何說爲是耶 於至理之源 大本達道處 亦可以已發未發 分言耶
朱子가 <太極이 동하여 陽을 낳는 것>을 가지고 天地의 喜怒哀樂의 發處라고 하였는데 延平李先生은 <이미 발한 것이라고 간주함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말하였으니, 어떤 것을 보고 그렇게 여겼는가? 또 누구의 말이 옳은가? 지극한 이치의 근원닌 大本과 達道에 있어서 已發과 未發로 分言할 수 있는가?
答
延平之意 以爲已發未發 就人身上 推於太極之動靜闔闢 終萬物,始萬物 只是此理一貫 做已發看不得 於天地大本達道處 難以分言故也 盖天地之間 實理充塞 無一息之妄 徹上徹下 不過如此 以動爲發 則當以靜爲未發 此 必朱子初年說也 朱子 曰一動一靜 皆命之行 又曰靜亦動之息爾 此論 爲是
延平은 생각하기를, 已發과 未發은 사람에 대한 것이요 태극의 動靜과 闔闢에 미루어 볼 때 만물을 마무리짓고 시동하게 하는데 다만 이 理致가 一貫한다고 여겼고, <已發로 간주함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은 天地의 大本과 達道에대하여 分言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대개 天地之間에 실한 理致가 가득 차서 한 순간도 망령됨이 없으니 徹上徹下에 不過 이와 같다. 動을 發이라고 하면 마땅히 靜을 未發이라 해야하니 이는 필히 朱子의 初年說일 것이다. 朱子가 이르되 <한번 동하고 한 번 정하는 것이 다 천명의 流行이다>라고 하였고, 또 <靜도 또한 動이 쉬는 것뿐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논설이 옳다.
▶ 問-[43]
太極之動而生陽 是繼之者善也 靜而生陰 是成之者性也 朱子 以繼 爲靜之終,動之始 則似在不動不靜之間 抑何義耶 仁智交際之間 繼在仁耶智耶
太極의 <動而生陽>은 繼之者善이란 것이고 <靜而生陰>은 成之者性이란 것이다.朱子가 繼之하는 것을 靜의 끝과 動의 시초로 삼았으니, 마치 동하지도 정하지도 않는 사이에 있는 듯 하니 무슨 뜻인가? 仁과 智가 交際하는 사이에는 繼之는 仁에 있는가 智에 있는가?
答
旣曰動之始 則是乃動也 此 邵子所謂一陽 初動處 萬物 未生時 卽朱子所謂貞元之間也 繼乃仁也 仁 元也 元雖四德之長 然 元 不生於元而生於貞 貞 智也 智 能成終成始
이미 동하는 시초라 하였으면 곧 동이니, 이는 邵子가 이른 바 <一陽이 처음 동하는 곳요 만물이 아직 생겨나지 않은 때>이라는 것은 곧 朱子가 이른 바 <貞과 元의 사이>가 된다. 있는 다는 繼는 곧 仁에 있으니 仁은 元이다. 元이 元에서 생기지 못하고 貞에서 생겨난다. 貞은 智이니 智라야 능히 終을 이루고 始를 이룰 수 있다.
▶ 問- [44]
繼之者善 所謂性善 而至成之者性然後 方有氣質之善惡否 抑未可以善惡分耶
<있는 것이 善>이란 말은 이른 바 性이 善하다는 것이니, 그러면 <이룬 것이 性>이라는 경지에 이른 뒤에야 바야흐로 氣質의 善惡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善惡으로 나눌 수 없는 것인가?
答
謂之性則未可分善惡
性이라고 이르면 善惡으로 나눌 수가 없다.
▶ 問-[45]
朱子 嘗以太極爲體 動靜爲用 以太極陰陽 分體用 抑何義耶 又曰太極者 本然之妙 動靜者 所乘之機 二說 同耶異耶
朱子가 일찌기 太極을 體, 動靜을 用이라고 하여 太極과 動靜을 體用으로 나누었는데 무슨 뜻인가? 또 말하기를 太極이란 本然之妙요 動靜이란 (太極이) 타는 기틀이다라고 하였으니, 두 가지 말뜻은 같은가 다른가?
答
後說 是 不可分體用 前說 未穩
後說이 옳으니,태극과 동정을 체용으로 나눌 수 없다.前說은 온당치 못하다.
● - 송구봉의 <태극문> ⑤
▶ 問-[46]
物可見而理難知也 太極圖 欲使人 知難知之理也 先儒之敎後學 皆明理一事也 大學之反欲格物而却不言窮理 何耶
物은 볼 수 있으나 理는 알기 어려우므로, 太極圖에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알기 어려운 理致를 알게끔 하려는 것이다. 先儒의 後學을 가르침이 다 이치를 밝히는 明理 한 가지일 뿐인데 大學에서는 반대로 格物하고자 하되 도리어 窮理를 言及하지 않은 것은 무슨 이유인가?
答
形而上 爲道 形而下 爲器 器亦道也 道亦器也 道 未嘗離乎器大學之不曰窮理 朱子 曰只是使人 就實處究竟
形而上이 道이고 形而下가 器이니, 器 또한 道이고 道 또한 器이다. 道는 일찌기 器에서 떨어져 있지 않으므로 大學에서는 구태여 窮理를 말하지 않았다. 주자도 말하기를 다만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진실된 곳에 나아가 그 궁극에 이르도록 하려는 것 뿐이라 하였다.
▶ 問-[47]
朱子 曰天地 形而下者 乾坤 形而上者 易所謂乾坤 乃氣也 而朱子之反以爲理 何也
朱子는 '天地는 形以下이고 乾坤은 形以上이다'하였다. 周易에서 말한 乾坤은 바로 氣인데 朱子가 도리어 理라함은 무슨 까닭인가?
答
天地 形殼也 乾坤 性情也 易所謂乾坤 兩儀也 天地乾坤 分言也兩儀 統說也 只說一生兩也 兩 便氣也
天地는 형체의 껍질이고 乾坤은 性情이다. 周易에서 말한 乾坤은 兩儀라는 것이다. 天地와 乾坤이란 것은 갈라서 말함이요, 兩儀라는 것은 합쳐서 말함이다. 다만 하나가 둘을 낳는다 함을 말하는 것으로 둘이란 바로 氣인 것이다.
▶ 問 - [48]
乾道成男,坤道成女 是獨指人耶 抑通萬物爲言耶 動物之有男女 而植物之無男女 亦何義耶
乾道는 남자가 되고 坤道는 여자로 되었다 함은 오로지 사람만을 가리킨 것인가. 또는 만물을 통해서 말한 것인가. 동물에는 남과 여가 있으나 식물에는 남과 여가 없는 것은 또한 무슨 뜻인가.
答
通萬物爲言也 植物 亦有男女 人自不察耳 朱子 曰麻有牝牡 竹有雌雄 推此 可知
만물을 통해서 말한 것이다. 식물에도 역시 남과 여가 있는데 사람이 스스로 살피지 않았을 뿐이다. 주자가 말하기를 '麻도 암수가 있고 대나무에도 자웅이 있다'하였으니 이것을 미루어 보면 알 수 있다.
▶ 問- [49]
朱子 曰觀萬物之異體 則氣有相近而理絶不同 然則理 亦有不同者乎
朱子가 말하기를 '만물이 체질을 달리하니 氣는 서로 근사하나 理는 전혀 같지 않다'하였다. 그렇다면 理도 역시 같지 않은 것이 있는가.
答
理絶不同 物 得氣之偏而理 在偏中塞而不同也 氣相近 知寒煖 識飢飽 好生惡殺 趨利避害 人與物 相近也
理는 전혀 같지 않다. 物은 氣의 치우침에 얻고 理가 그 치우친 속에 막혀 있으므로 같지 않은 것이다. 氣가 서로 근사하다는 것은 춥고 따뜻한 것을 알며 배고프고 배부른 것을 깨달으며 삶을 좋아하고 죽음은 싫어하며 利는 따르고 害는 피하는 것과 같이 사람과 物이 서로 근사함을 말한다.
▶ 問-[50]
通書 所謂幾字 在太極圖 却在何節也
通書에서 말한 幾字의 뜻이 太極圖에도 있다는데 어느 대목에 있는가.
答
五性感動而善惡分 便是幾
五性이 感動하여 善과 惡이 나누인다 한 것이 바로 幾라는 뜻이다.
▶ 問- [51]
孟子 言其情則可以爲善 周子 言五性感動而善惡分 感動則情也 孟子周子之異其言 何耶
孟子는 情은 可以 善하다 하였고, 周子는 오성이 감동하여 선과 악이 나누인다 하였다. 감동한다는 것은 즉, 情인데 맹자와 주자가 말을 달리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答
朱子 曰孟子 言其正 周子 兼其正與反者而言也 盖情 未必皆善 然 本則可以爲善 惟反其情故 爲惡
朱子가 말하기를 '孟子는 正만 말했고 周子는 正과 反을 겸해서 말했다'하였다. 무릇 情은 반드시 모두 善한 것은 아니다. 근본은 善할 수 있음에도 그 情에 반하기 때문에 악이 되는 것이다.
▶ 問- [52]
人 受天地之正氣 物 稟其偏塞 然而鷄能司晨 犬能吠客 牛能負重 馬能致遠 各能其事 人 反不及於物而不能踐形 子鮮孝 臣寡忠 何也 曾謂人之靈 而反不如物之塞耶
사람은 천지의 바른 기를 받았고 物은 치우치고 막힌 것을 타고났다. 그러나 닭은 새벽을 알릴 수 있고 개는 손님에게 짖을 줄 알며 소는 무거운 짐을 싣고 말은 먼 길을 갈 수 다. 각각 제 일에 능한데 사람은 도리어 物에도 미치지 못하고 능히 제 생김새대로 행하지 못하여 아들은 효자가 드물고 신하는 충신이 적음은 무슨 까닭인가.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으로서 도리어 物의 막힘만도 못하단 말인가.
答
物 以塞而能天 以心不虛靈也 故 莊子 曰惟蟲 能天 人 能變化氣質 以不肖 爲聖賢 亦以通也 人之 痔 至於弑父與君 行禽獸不爲之事 亦以通也 可不畏哉
物이 그 막힌 것으로도 본능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이 허령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자가 말하기를 <오직 벌레만이 천성을 따를 수 있다>하였다. 사람은 능히 기절을 변화시켜서 불초한 자가 성현이 되는 것도 또한 性이 통한 때문이고 남의 등창을 빨고 치질도 핥던 자가 나중에는 아비와 임금을 죽여서 금수도 하지 않는 짓을 행하는 것도 또한 性이 통한 때문이다. 두렵지 않겠는가.
▶ 問 -[53]
聖人 定之以中正仁義 此定字 是 自定耶 抑定天下之定耶 定與靜與敬 其同義耶 抑各有不同耶
聖人이 中正과 仁義로써 定하셨다고 할 때의 이 定이란 글자는 스스로 定한다는 뜻인가 아니면 天下를 定한다는 定인가? 그리고 定과 靜과 敬은 같은 뜻인가 아니면 각각 따른 뜻이 있는가?
答
定 是立人極也 定萬事 以立人極也 圖 以動靜言故 言靜 靜字 只好作敬字看
定이란 人極을 세우는 것이니 萬事를 判定하여 人極을 세우는 것이다. 太極圖에서는 動靜으로 말했기 때문에 靜이라고 언급하였는데 靜이란 글자는 다만 공경 경(敬)자로 보는 것이 좋다.
▶ 問-[54]
樂記 云以靜言性則可 以靜形容天地之妙則不可 性則理也 與天地之妙 又何不同耶
樂記에 이르되, 靜으로 性을 말하는 것은 可커니와 靜으로 天地之妙를 形容하는 것은 不可하다고 하였다. 性은 곧 理이거늘 天地之妙와 또 어떻게 다른가?
答
性與天地之妙 初非二物 而性 卽喜怒哀樂未發之稱 屬乎靜 天地之妙 卽太極之該動靜者也 含動靜而不偏 此 中與太極之同一理 而指各有異者也 其實 性與中與太極 同一理也
性과 天地之妙는 본디 두 가지의 것이 아니로되, 性은 즉 喜怒哀樂이 未發함을 일컬으니 靜에 속하고 天地之妙는 즉 太極이 動靜의 이치를 갖추고 있는 것이니 動靜을 머금고 있으면서도 치우치지 않는 것이다. 이는 中과 太極이 같은 一理이면서도 가리키는 뜻이 각각 다른 점이 있는 것이니, 사실은 性과 中과 太極은 같은 一理인 것이다.
● - 송구봉선생의 太極問 - 6
▶ 問-[55]
程子 曰天地萬物之理 無獨 必有對 又曰惟道無對 道則理也 立言之不一 何耶
程子가 말하기를 天地萬物의 이치는 외따로 있는 것(獨)은 없고 반드시 對가 있다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오직 道는 對가 없으니 道는 곧 理이다라고 하였으니,立言이 一貫되지 않음은 무엇 때문인가?
答
有對 以陰陽動靜屈伸消長而言也 無對는 以太極而言也
대 쓿다는 것은 陰陽과 動靜과 屈伸과 消長으로 말하는 것이고 對가 없다는 것은 太極으로 말하는 것이다.
▶ 問-[56]
夫子 曰智者 動 仁者 靜 而周子之反以智爲靜 以仁爲動 何也
孔夫子가 말씀하시되 智者는 動하고 仁者는 靜이라 하였는데 周子가 도리어 智를 靜이라 하고 仁을動이라 함은 무엇 때문인가?
答
智屬陰 固是靜 仁屬陽 固是動 周子 主陰陽 爲言故也 仁又安靜 智又運用 夫子之言 各有其指 又朱子則以仁智體皆靜而用皆動 爲喩 或傳寫之未盡也 四德 無非體靜用動
智는 陰에 속하니 진실로 靜이요, 仁은 陽에 속하니 진실로 動이니, 周子는 陰陽을 爲主로 말했기 때문이다. 仁은 安靜함이요 智는 運用함이니 夫子의 말씀은 각각 그 가리키는 뜻이 있다. 또 朱子는 仁智의 체는 다 靜하고 用은 다 動하다고 비유하였으니, 혹 베껴 전할 때에 미진하였던 것 같다. 仁義禮智 四德에 있어서 體는 靜, 用은 動 아닌 것이 없다.
▶ 問-[57]
終萬物,始萬物 莫盛乎艮 艮 止也 止是生息之意也 先儒之反以動爲生 何也
萬物을 마무리하고 萬物을 시작하게 하는 것이 艮보다 盛한 것이 없으니, 艮은 그친다는 뜻이고, 그친다는 것은 生息한다는 뜻이다(易의 艮卦참고). 先儒가 도리어 動을 生息으로 삼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答
元 不生於元而生於貞 譬如穀種 必經秋冬 乃可以爲生 又以動爲生 偏說也 上一節 統說也
元은 元에서 나오지 않고 貞에서 나오니 ,비유하면 곡식의 종자가 반드시 秋冬을 지나야 싹을 틀수 있는 것과 같다. 또 動을 生으로 삼는 것은 편벽 된 말이니, 위 一節이 統說이다.
▶ 問- [58]
至成之者 性然後 氣質各異 則善惡之分 宜在斯矣 周子 却到五性感動處 分善惡 何耶
<이룬 것이 性>이라는 경지에 이른 뒤에 氣質이 각각 다르다면 善惡의 나뉨이 마땅히 여기에 있어야 할 터인데, 周子가 도리어 五性이 感動하는 곳에 이르러 善惡으로 나뉜다고 함은 무엇 때문인가?
答
性無善惡 純善而已 至情動處 便分善惡便有氣質之性
性은 善惡이 없고 다만 純善할 따름이다. 情이 動한 곳에 이르면 곧 善惡으로 나뉘어 氣質之性이 있게 된다.
▶ 問- [59]
受父母之氣 在胞中 是繼之者善也 及其旣生 自成一箇物 是成之者性也 旣成其性 則又自繼善 循環無窮 而反以佛氏之循環 爲無理 亦何義耶
부모의 기를 받아 태 중에 있는 것이 <繼之者善(이어 가는것이 善)>이고, 이미 태어남에 미치어 스스로 하나의 사물을 이룬 것이 <成之者性(이루는 것이 性)>이다. 이미 그 性을 이루면 또한 스스로 善을 繼承함이 循環無窮하는데 도리어 佛氏의 循環을 無理하다고 함은 또한 무슨 뜻인가?
答
流行造化處 是善 凝成於我處 是性 此 程子所謂生生之理 自然不息也 豈佛氏所謂將旣屈之氣 復爲方伸之氣 輪回不已者乎
流行造化하는 것이 善이고 凝結되어 나에게 이루어진 것이 性이다. 이는 程子가 이른바 <생겨나고 생겨나는 이치가 자연스레 끊임없이 펼쳐진다>는 것이니, 어찌 佛氏가 이른바 <衰退한 氣를 가지고 다시 바야흐로 펴지려는 氣로 삼아서 끊임없이 윤회한다는 것이겠는가?
▶ 問-[60]
朱子曰太極 只是一箇實理 太極圖一圈 便是一畵 又曰太極二氣五行之理 一與二五之互言 何耶
朱子가 말하기를 <太極은 단지 하나의 實理이고 太極圖의 한 圈은 다만 하나의 그림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太極은 陰陽五行의 理致다>라 하니 하나와 陰陽五行을 서로 엇바꾸며 말함은 무엇인가?
答
理一而已 二氣五行之理 卽一理也
理는 하나일 따름이니 陰陽五行의 理致가 즉 하나의 理이다.
▶ 問-[61]
太極 是藏頭物事 旣無方所 又無影響 先儒之能抽出爲圖 作爲名字何耶
태극은 사물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이미 방향과 장소도 없고 형체와 소리도 없거늘 선유가 추출하여 태극도를 만들어서 이름을 지음은 무엇인가?
答
在無物之前 而未嘗不立於有物之後 在陰陽之外 而未嘗不行於陰陽之中 著存明顯 無過於此 何爲不知
사물이 없기 전에 있었으나 일직이 사물이 있은 후에는 서지 않은 것이 없었고 음양의 밖에도 있으나 일직이 음양의 가운데에 행하지 않음이 없었다. 드러나고 존재하고 밝혀지고 나타남이 이 것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무엇을 알지 못하리요.
▶ 問-[62]
以事物看之 陰陽中有太極 而圖却謂太極生陰陽 何也
사물로써 보면 음 양 속에 태극이 있는데 태극도에 도리어 태극이 음양을 낳는다고 함은 무엇인가 ?
答
原其生出之初 則太極 生陰陽也 觀其見在之端 則陰陽 涵太極也 圖主生出故 云太極 生陰陽
그 생기고 나가는 처음을 살펴보면 태극이 음양을 낳고 그 나타나고 존재하는 끝을 보면 음양이 태극을 함유하는 것이다. 태극도는 생기고 나가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니 고로 태극이 음양을 낳는다고 이른 것이다.
▶ 問- [63]
不偏不倚之中與太極 同一理也 而先儒 以中訓極 爲非 何也
편벽 되지도 않고 치우치지도 않은 중은 태극과 동일한 이치인데 선유가 중으로써 극을 訓釋함을 그르다함은 무엇인가?
答
所指各異 中是無過不及之義 極是無加之稱
각기 지칭하는 바가 다르니 중은 지나치지도 않고 미치지 못하지도 않다는 뜻이고 극은 더할 것이 없음을 일컫는 것이다.
● - 송구봉선생의 太極問 - 7
▶ 問-[64]
漢志 謂太極函三爲一 莊子 謂道在太極之先 老子 云有物混成 先天地生 易云易有太極 此四說 與周子所謂太極 同異可分耶
漢志에 이르기를 <太極이 天地人 三才를 포용하여 하나가 된다>라하고 莊子에 이르기를 <道는 太極보다 앞에 있다>하고 老子에 이르기를 <사물이 섞여 이루어짐이 천지에 앞서 생겨났다>하고 易에 이르기를 <易에 太極이 있다>하니 이 네 가지 설은 周子가 이른 바 太極이라는 것과 같고 다름을 나눌 수가 있는가?
答
漢志謂函三 則形氣已具 非周子所謂太極也 莊子謂道先太極 則不以太極爲道 而道又太極上一箇空底物 非周子所謂太極也 老子云先天地生 似指斯理 而老子 實非知理者也 易所云易有太極 就陰陽變化中 言有此理 下語 又與周子不同 然 所謂理則一也 周子所謂無極而太極 不雜乎陰陽而爲言者也 盖漢志之太極 莊子之太極 雜陰陽而爲言者也 老子之有物混成 亦不得言理之妙
漢志에 <天地人 三才를 包容한다>고 한 것은 形氣가 이미 갖추어진 것이니 周子가 말한 太極과는다르다. 莊子가 <道가 太極보다 먼저>라 함은 太極이 道가 되지 못하고 道 또한 太極 위의 한 개의 空한 물체이니 周子가 말한 太極과는 다르다. 老子가 말한 <天地보다 앞서 생겨난다>함은 흡사 이 이치를 가리키는 듯하나 老子는 실제로 이치를 알지 못하는 자이다. 易에 <易에 太極이 있다>함은陰陽이 變化하는 중에 나아가 이 이치가 있음을 말한 것이니, 이 말은 또한 周子의 太極과 같지 않다. 그러나 이른바 理는 하나이다. 周子가 말한 無極而太極은 陰陽에 섞이지 않고 말한 것이다. 대개 漢志의 太極과 莊子의 太極은 陰陽에 섞여서 말한 것이다. 老子의 有物混成은 또한 이치의 묘함을 말할 수 없다.
▶ 問- [65]
易曰一陰一陽之謂道 而邵子曰道爲太極 朱子曰心猶陰陽也 而邵子曰心爲太極 邵子之異其說 何也
易에 이르기를 <한 번 陰하게 하고 한 번 陽하게 하는 것을 일러 道라 한다>하고 邵子가 말하기를 <道는 太極이다>하고 朱子가 말하기를 <마음은 陰陽과 같다>하였다. 邵子가 말하기를 <마음이 太極이다>라고 했으니 邵子의 그 설이 다름은 무엇인가?
答
道是流行 邵子之道爲太極 以流行者 言也 心是統會 邵子之心爲太極 以統會者 言也 易之一陰一陽之謂道 所以一陰一陽者 道云也 朱子之心猶陰陽 旣曰性猶太極云故也 萬理 同出一源曰統會 萬物 各具一理曰流行 康節之說 何嘗有異 道是太極 而心性 非二物 則復何爲疑
道는 流行이니 邵子가 道를 太極이라함은 流行하는 것을 말한 것이고 마음은 하나로 합쳐져 모으는 것이니 邵子가 마음을 太極이라한 것은 하나로 합쳐져 모으는 것을 말한 것이다. 易의 一陰一陽을 道라 함은 一陰一陽하는 까닭을 道라 이른 것이다. 朱子의 마음은 陰陽과 같다함은 이미 말하기를 性은 太極과 같다고 일렀기 때문이다. 만가지 이치가 모두 하나의 근원에서 나옴을 統會라하고 만물이 각기 하나의 이치를 가추는 것을 流行이라 한다. 康節의 설이 어찌 일직이 다름이 있으리요.. 도가 이 태극이고 마음은 두개의 사물이 아니니 다시 무엇을 의심하겠는가.
▶ 問-[66]
朱子 曰靜者 性之所以立也 動者命之所以行也 然 其實則靜亦動之息爾 故 一動一靜 皆命之行 而行乎動靜者 乃性之眞也 故 曰天命之謂性 動靜 天理也 而朱子之以動靜 皆屬乎動 而却欠了靜一邊 何意也 程子之動亦定,靜亦定 周子之主靜 又却欠了動一邊 亦何意也
朱子가 말하기를 靜은 性이 서게 되는 所以이고 動은 命이 流行하게 되는 所以이다. 그러나 實인즉 靜은 動이 또한 쉴 뿐이다. 그러므로 一動一靜이 모두 命의 流行이니, 動과 靜을 行하는 것은 바로 性의 眞髓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하늘이 命한 것을 性이라 한다. 動靜은 天理이거늘 朱子가 動靜을 가지고 모두 動에 分屬시키어 도리어 靜 一邊을 除外한 것은 무슨 뜻이며, 程子의 動도 定이고 靜도 定이라 한 것과 周子의 靜을 爲主로 한 것은 動 一邊을 除外한 것이니, 이는 또한 무슨 뜻인가?
答
太極之有動靜 天命之流行也 其靜 亦命之行也 主天命而爲言也 聖人 合動靜之德 而常本於靜 主修道而爲言也
太極에 動靜이 있음은 天命이 流行하는 것이다. 그 靜도 또한 命의 流行이라 함은 天命을 爲主로 하여 말한 것이요,聖人은 動靜之德에 합하여 항상 靜에 근본을 둔다고 함은 修道를 爲主로 말한 것이다.
▶ 問-[67]
伏羲作易 起於一畵 文王演易 肇自乾元 皆未嘗說到太極 孔子贊易 始言太極 周子作圖 又言無極 言愈密而理愈晦 何耶
伏羲가 易을 지음에 一畵에서부터 시작하였고, 文王이 易을 폄에 비로소 乾元으로부터하여 모두 太極을 말한 적이 없는데 孔子가 贊易하심에 비로소 太極을 말하고, 周子가 太極圖를 作함에 또 無極을 말하였으니, 말이 더욱 細密하나 理致가 더욱 분명치 못함은 어째서인가?
答
人自不知 理豈愈晦 人之不知 學不傳也
사람이 스스로 알지 못한 것이니,理致가 어찌 더욱 어두어 지겠는가? 사람이 알지 못함은 학문이 전수되지 못해서이다.
▶ 問- [68]
形而上 爲道 形而下 爲器 道甚微妙 器甚著現 天地 形而下也 乾坤 形而上也 日月星辰,風雨霜露 形而下也 其理 形而上也 君臣父子 形而下也 仁忠慈孝 形而上也 如一身之形體 形而下也 心性之理 形而上也 耳目 形而下也 聰明之理 形而上也 又如一物一器 形而下也 其理 形而上也 燈燭 形而下也 照物之理 形而上也 交椅 形而下也 可坐之理 形而上也 至如屈伸,往來,消長,盈虛,春秋,寒署,終始,晦明,奇偶 皆形而下也 其理則形而上也 凡有形有象 可睹可聞者 無非氣也 如許其廣大著現 而反以爲小 無聲無臭 不可聽,不可見者 理也 如許其微妙 而反以爲大 何也
形而上이 道요 形而下가 器이니 道는 심히 微妙하고 器는 顯著하다. 天地는 形而下요 乾坤은 形而上이다. 日月과 星辰과 風雨와 霜露는 形而下요 그 理致는 形而上이다. 君臣과 父子는 形而下요 仁과 忠과 慈와 孝는 形而上이다. 한 몸의 형체는 形而下요 心性의 理致는 形而上이다. 또 一物一器는 形而下요 그 이치는 形而上이다. 燈燭은 形而下요 물건을 비추는 이치는 形而上이다. 의자는 形而下요 앉는 이치는 形而上이다. 屈伸,往來,消長,盈虛,春秋,寒署,終始,晦明,奇偶(홀짝)은 形而下요 그 이치는 形而上이다 무릇 形이 있고 象이 있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것은 氣가 아닌 것이 없다. 이처럼 廣大하게 드러났는데도 도리어 작은 것으로 여기고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으며 들을 수 없고 볼 수도 없는 것이 理이니 이처럼 微妙하나 도리어 큰 것으로 여기는 것은 어째서인가?
答
氣有限量 而理無限量故也
氣는 限量이 있지만 理는 限量이 없기 때문이다.
▶ 問- [69]
朱子曰太極圖說陰陽五行之變不齊 二程 因此 始抽出氣質之性 於易 旣言陰陽五行之變 而孟子之不言氣質之性 何也
朱子가 말하기를,<太極圖說에 陰陽五行의 變化가 一定하지 않다>고 했는데 二程(明道,伊川)은 이를 引用하여 비로소 氣質之性에 대한 說을 主張하고 周易에 이미 陰陽五行의 變化에 대해 말했는데 孟子는 氣質之性에 대하여 말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答
凡道理 到後來 辨釋 愈精密
도든 道理는 後代에 올수록 分析이 더욱 精密해지는 것이다.
▶ 問- [70]
天地之理 生之者微 成之者盛 故 水生於陽而爲陰 火生於陰而爲陽 不特此也 氣常勝理 仁義禮智之理 微 水火金木土之氣 盛 終不可以微制盛 而聖賢之敎 每欲以理勝氣 何也
天地의 理致가 나게 하는 것은 微細하고 이루게 하는 것은 旺盛하다 그러므로 水는 陽에서 나오되 陰이 되고 火는 陰에서 나오되 陽이 되는 다만 이뿐만이 아니라, 氣가 항상 理를 이기니 仁義禮智의 理는 微細하고 水 火 金 木 土의 氣는 旺盛하여 마침내 微細한 것으로 旺盛한 것을 制御할 수 없다. 그런데도 聖賢의 가르침은 번번이 理로써 氣를 이기고자 하시니, 무엇 때문인가 ?
答
理不微 氣不盛則聖賢 又何爲敎 理雖微而益著 氣雖盛而可變 此聖賢之所以無不可爲之時 無不可化之人 而至於天地位,萬物育 氣常聽命於理者也 問之不特此以上 微與盛 皆言氣也 不特此以下 微是理而盛是氣 上下言勢 亦有毫髮之異 不可不知 盖生亦氣也 而生之理 理也
理가 微細하지 않고 氣가 旺盛하지 않다면 聖賢이 무엇 때문에 가르침을 베풀었겠는가? 理는 비록 微細하나 더욱 드러낼 수 있고 氣는 비록 旺盛하나 변화시킬 수 있다. 이 것은 聖賢이 하지 못할 때가 없고 교화시키지 못할 사람이 없는 所以이니, 天地가 제자리에 서고 만물이 化育됨에 이르러서도 氣가 항상 理한테서 命을 듣게 되는 것이다. 물음에서 '다만 이뿐만이 아니라'의 구절 위에서 말한 微細와 旺盛은 다 氣를 말하며, '다만 이뿐만이 아니라'의 구절 아래에서는 微細는 理이고 旺盛은 氣이니, 상하의 語勢가 또한 터럭만큼의 차이가 있음을 모르면 안될 것이다. 대개 生하는 것은 氣이고 生하게 하는 理致는 理이다.
▶ 問- [71]
天地造化之妙 天一生水 地二生火 天三生木 地四生金 而在人一身 亦初生腎水 又生心火 水又生肝木 火土又生肺金 而父母 卽天地也 以至昆 읊草木之生 莫不稟五氣以成形 此 孔子所謂精氣爲物 精便是水 氣便是火 不過如此 而於此 便有氣化形化之所以分 何也 今見物有氣化而人無氣化 亦何理也
天地造化의 妙는 天數 一이 水를 낳고, 地數 二가 火를 낳고, 天數 三이 木을 낳고, 地數 四가 金을 낳으며, 사람의 한 몸에서도 또한 처음에 腎水가 생기고,또 心火가 생기며, 水가 또 肝木을 낳고 火와 土가 肺金을 낳으니, 父母는 곧 天地이다.昆蟲이나 草木이 생겨남에 이르러서도 五行의 氣를 稟受하지 않고 형체를 이룬 것은 없다. 이것이 孔子가 이른 바 '精氣가 物이 된다'는 것이니, 精은 水이고 氣는 火이다. 不過 이와 같은데 여기에서 氣化와 形化로 나누는 까닭은 무엇인가? 지금에는 物에는 氣化가 있음을 보지만 사람에게 氣化가 없음을 보니 또한 무슨 이치인가?
答
未有種類之初 陰陽之氣 合而生之謂氣化 旣有種類之後 牝牡之形 配而生之謂形化 萬物之始 氣化而已 旣形氣相禪 則形化長而氣化消 程子云隕石無鍾 麟亦無鍾 厥初生民 亦如是 此氣化也 今見物有氣化者 無物處也 夫人亦然 先儒云海中島嶼稍大 安知無鍾之人 不生於其間 若已有人類 則必無氣化之人 如人着新衣 便有 生其間 此氣化也 氣旣化後 便以種生 此理甚明
아직 種類가 있지 않았던 처음에 陰陽의 氣기 합하여 생겨난 것을 일러 氣化라 하고, 이미 種類가 있고 난 뒤에 암수의 형체가 짝짓기 하여 생겨난 것을 일러 形化하니, 萬物의 始初는 氣化일 따름이다. 이미 形化와 氣化가 서로 자리를 바꾸면 形化가 오래 지속되고 氣化는 사라진다. 程子가 이르되,<隕石(별똥)은 種子가 없고 麒麟도 種子가 없으니 태초에 사람도 또한 이와 같았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氣化를 말한 것이다. 오늘날 物의 氣化를 볼 수 있는 것은 다만 그런 類의 物이 없는 곳에서만 볼 수 있다. 사람도 역시 그러하니, 先儒가 이르기를,<海中의 섬들이 조금 클 때 어찌 종자 없는 사람이 섬들 사이에서 생겨나지 안을 줄 알겠는가? 만약 이미 인류가 살고 있었다면 반드시 氣化한 사람은 없을 것이니, 이는 마치 사람이 새 옷을 입으면 곧 이가 옷 섶 사이에서 생겨나는 것과 같다>고 하였으니, 이는 氣化를 말한 것이다. 氣가 이미 變化한 뒤에 종자로 생겨나는 이 理致는 매우 분명하다.
▶ 問-[72]
陳幾 月落萬川,處處皆圓之譬 北溪陳氏 一大塊水銀 散而爲萬萬小塊 箇箇皆圓之譬 爲萬爲一 何者爲理 何者爲氣
<달이 數萬 냇물에 비추면 도처에 드리운 달이 다 둥글다>는 陳幾 의 비유와, <하나의 큰 水銀 덩어리가 흩어져 數萬의 작은 덩이가 되더라도 하나 하나가 다 둥글다>는 北溪陳氏의 比喩에서, 數萬이 되는 것과 하나가 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理가 되며 어느 것이 氣가 되는가?
答
爲萬爲一者 氣也 所以爲萬爲一而圓無欠缺者 理也 自氣看之 雖有大小離合之別 自理看之 都無損益盈縮之分
數萬이 되고 하나가 되는 것이 氣이고 數萬이 되고 하나가 되게 하여 둥글되 조금도 欠缺이 없게 하는 所以가 理이다. 氣로 보면 비록 大小와 離合의 구별이 이으나, 理로 보면 損益과 盈縮의 구분이 전혀 없다.
● - 송구봉선생의 太極問 - 8.
▶ 問- [73]
在天成象 在地成形 象是氣也 形是質也 陰陽是氣 五行是質 氣是虛質是實 虛者聚而實者成 如人噓呵出氣而成水然也 凡有氣莫非天 凡有質莫非地 氣質之外更無可指可論者 今周天三百度之下 大地九州之上 非天非地處如此其多 何也
하늘에서 象을 이루고 땅에서 形을 이루니, 象은 氣이고, 形은 質이다. 陰陽은 氣이고, 五行은 質이며, 氣는 虛한 것이고 質은 實한 것이다. 虛한 것이 모여 實이 이루어지는 것이 마치 사람이 숨을 내쉬어 물기가 생기는 것과 같다. 모든 氣는 天 아님이 없고, 모든 質은 地 아님이 없다. 氣와 質 이외에는 다시 지적할 것도 논할 것도 없다. 이제 周天 三百度의 아래 九州의 大地 위에 天도 地도 아닌 곳이 이처럼 많은 것은 무슨 이유인가?
答
太虛之間 便有氣充塞無欠缺處 出地以上無非天 古詩云坎地一尺地 便是一尺天 非是三百六十度是天也 只以日月星辰光所見處爲言爾六合之內 非質處便是氣 非地處便是天
太虛間(우주)에는 氣가 가득하여 없는 곳이 없다. 땅 위로는 모두 하늘이다. 古詩에, "한 자의 땅을 파들어 가면 한 자의 하늘이 생긴다."고 하였다. 三百 六十度만 하늘이 아니다. 이는 日月星辰의 빛이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 六合(天地 四方)의 안에서 質이 아닌것은 바로 氣이며, 땅이 아닌 곳은 바로 하늘이다.
▶ 問- [74]
圖以禮智換作中正 何義也 不曰仁義禮智 而却謂禮智仁義 亦何義也
太極圖에 禮 智를 中正으로 바꾸어 설명하였는데, 무슨 뜻인가? 그리고 仁 義 禮 智라 하지 않고 禮 智 仁 義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答
圖本乎易 易其德曰仁義 其用曰中正 要不越陰陽兩端 而尤重中正 又朱子曰中正較有力 以禮或有中不中 智或有正不正也 智禮水火也水火爲五行之先 圖主生出之序 故先言智禮
太極圖는 周易을 根據로 하였다. 周易에, 그 德을 仁義라 하고, 그 用을 中正이라 하였다. 요컨대 陰陽 兩端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中正을 더욱 重하게 여긴 것이다. 또 朱子는 "中正이 비교적 힘이 있다."고 하였다. 禮는 간혹 中하기도 하고 不中하기도 하며, 智는 간혹 正하기도하고 不正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智와 禮는 水와 火이며, 水火는 五行에서 먼저이다. 太極圖에서는 生成되어 나오는 순서를 위주로 하였기 때문에 智와 禮를 먼저 말한 것이다.
▶ 問- [75]
太極一動 至於爲陰陽爲五行爲萬物 莫有其差 在人讒動便有差 何義也 惟聖人無差 是謂聖人如天同德 而天又或不能無差 冬熱夏寒 安淵之不得壽 盜蹠之善其終 孔子之困於行 女后之爲天子 致旱於湯世有年於魯宣 天之反不及於聖人 亦何義也 賢希聖聖希天 則聖人反希不及聖人
之天歟
太極이 한번 動하면 陰陽과 五行과 萬物이 되어 조금의 차질이 없는데, 사람에 있어서는 動하기만 하면 차질이 발생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聖人만이 차질이 없다는 것은, 聖人이 하늘과 德이 같다는 것인데, 하늘도 때로는 차질이 없지 않다. 예컨대 겨울에 덥고 여름
에 춥다던가, 顔淵은 일찍 죽고 盜蹠은 오래 살게 하였다던가, 孔子는 곤욕을 당하고 女后(唐 則天武后)는 天子가 되게 하였다던가, 湯의 시대에는 가뭄이 들고 魯 宣公(16년) 때에는 풍년이 들게 하였다던가 하는 것들은, 하늘이 도리어 聖人에 미치지 못한 것이니 무슨 뜻인가? 賢人은 聖人을 희망하고 聖人은 하늘을 희망하는 것이라 하니, 이는 聖人이, 聖人만도 못한 하늘을 희망 한다는 말인가?
答
凡人之 옇動有差 氣使之然也 聖人之無差 得氣之淸也 天之或不能無差 亦氣使之然也 盖聖人純得其淸 凡人 淸濁不齊 天地之氣亦不齊故朱子曰天地之性理也 到 陰陽五行處 便有氣質之昏明厚薄 夫不得其常爲變 處變爲權 在聖人有處變之權 而天則無是 天普萬物而無心故也明道先生曰 聖人無情天無心
○聖人之氣 比天地愈精 天地之氣 比聖人猶雜 故稟賦有人物之殊 時序有常變之異 惟天地之性 大本達道 流行發育 無外無內 不偏不二 此所以聖希天也 文王之純亦不已者也
凡人은 動하기만 하면 차질이 발생하는 것은, 氣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聖人이 차질이 없는 것은 淸한 氣를 얻었기 때문이며, 하늘이 때로 차질이 없지 못한 것도 氣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대체로 聖人은 純一한 淸氣를 얻었고, 凡人은 淸濁이 고르지 못하며, 천지의 기운도 고르지 못하다. 때문에 주자는, "천지의 性은 理이다. 陰陽과 五行에 이르러서 昏明厚薄한 氣質을 지니게 된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기질은 常道를 벗어나 변질되기 마련이며, 이러한 변화에 대처하는 것이 權道 이다. 聖人은 변화에 대처하는 權道를 사용할 능력이 있지만, 하늘은 그러한 능력이 없다. 하늘은 모든 萬物에 존재하나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明道先生이 이르기를,"聖人은 無情하고 하늘은 無心하다."고 하였다.
○聖人의 氣는 天地의 그것에 비해 더욱 精密하다. 천지의 기가 聖人에 비하여 오히려 잡되기 때문에 人物에 稟賦하는 것이 일정하지 못하고, 계절에 있어서도 일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天地의 性은, 모든 것의 근본이자 통행하는 道이며, 기운이 流行하여 萬物을 發育시키고, 內外가 없어 치우치거나 나누이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점이 바로 聖人이 하늘을 희망하는 것이며, 문왕이 純一하여 마지않았다는 것이다.
▶ 問- [76]
動靜陰陽 如一連環 連續無欠缺處 未知此環着在何處
動靜陰陽이 마치 동그란 고리와 같이 연속되어 중단되는 곳이 없는데, 이 고리는 멈추는 곳이 어디인가?
答
動靜陰陽 着在動靜陰陽 此環 着在此環
動靜陰陽은 멈추는 곳이 動靜陰陽이고, 이 고리는 멈추는 곳이 이 고리이다.
▶ 問-[77]
圖兩儀中旣有地 五行中又有土 是何以一物 分作二物也
太極圖에, 兩儀 중에 이미 地가 있는데 五行 중에 또 土가 있다. 土와 地는 같은 것인데 어찌해서 둘로 나뉘었는가?
答
地是對天說也 有氣者無非天 成質者無非地 土是五行中成形之一物也 邵子曰方者土也 禹因劃州 韓子曰草木山川皆地也 朱子曰地言其大槪
地는 天에 대응한 설명이다. 氣가 있는 것은 모두 天이며, 質을 이룬 것은 모두 地이다. 土도 五行중의 형체를 이룬 하나의 물체이다. 邵康節은, "方은 土이다. 禹가 이를 이용하여 九州를 劃定하였다" 하고, 韓愈는, "草木山川이 모두 地이다." 하고, 朱子는, "地는 大槪를 들어 말한 것이다." 고 하였다.
▶ 問-[78]
元亨利貞是太極也 元亨是陽 利貞是陰也 元是木亨是火利是金貞是水 合而言之 則不過如是 所以各異其名 使學者眩於名物 何也
元 亨 利 貞이 太極이다. 元亨은 陽이고, 利貞은 陰이다. 元은 木이고, 亨은 火이며, 利는 金이고 貞은 水이다. 合하여 말하면 이러함에 불과한데, 각기 그 이름을 달리하여 學者로하여금 이름에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答
太極是總言天地萬物之理 理在天曰元亨利貞 理在人曰仁義禮智陰陽以氣言也 金木水火以物言也 雖欲不二其名 何可得也
太極은 天地萬物의 이치를 총괄해서 한 말이다. 理가 하늘에 있으면 元亨이정이고, 理가 사람에 있으면 仁義禮智이다. 陰陽은 氣를 기준으로 말한 것이고, 金 木 水 火는 物을 기준으로 말한 것이다. 이름을 둘로 구분하지 않고자 하지만 되겠는가?
▶ 問- [79]
五行之生各一其性 此性字理之本原耶 抑氣質之異耶 張南軒之指以爲本原 何也 朱子之或指爲氣質 或指爲本原 不一其論 亦何義也
五行의 生成에 각각 별도의 性이 있다고 하는데, 여기에서의 性은 理의 本源인가? 아니면 氣質이 다른 것인가? 張南軒이 "本源"이라고 지적한 것은 어떤 뜻인가? 朱子는 "氣質"이라고 지적하기도 하고, "本源"이라고 지적하기도 하여, 논의가 일치하지 않는 것은 무슨 뜻인가?
答
各一其性之性 卽氣質之性也 氣質之性 實與本原之性同一性也或問恐學者莫知所從 朱子曰陰陽五行之爲性 各一氣所稟 而性則一也又問兩性字同否 曰一般 又曰同者理也 不同者氣也
각각 별도의 性이 있다고 할 때의 性은 氣質의 性이다. 다만 氣質의 性은 실로 本原의 性과 동일한 性이다. 어떤 이가, "학자가 어떤 것을 따라야 할 지를 모를 까 걱정된다."고 묻자, 朱子는 "陰陽五行의 性은 각기 하나의 氣를 받았지만 性은 같다." 고 하였고, 또 묻기를, "두 性字가 같은가?" 하니, "같다."고 하고, 또 "같은 것은 理이고, 다른 것은 氣이다."고 하였다.
▶ 問- [80]
其曰動而生陽 靜而生陰 是兩儀初判時耶 其曰動極復靜 靜極復動 只擧此天地說耶 竝擧前天地後天地說耶
動하여 陽을 生하고, 靜하여 陰을 生한다 하였는데, 이는 兩儀가 처음 나뉠 때인가? 動이 極하면 다시 靜하고, 靜이 極하면 다시 動한다 하였는데, 이 天地만을 들어 말한 것인가? 前天地 後天地說을 아울러 거론한 것인가?
答
分陰分陽兩儀立焉 然朱子曰太極之有動靜 天命之所以流行也 又曰今且自動而生陽處看
○前後天地不須說 惟邵子先天圖曰 無極之前陰含陽
陰과 陽으로 나누어진 다음에 兩儀가 성립된다. 그러나 朱子는, "太極에 動靜이 있음은 天命이 流行하는 것이다." 하고, 또 "이제 '動하여 陽을 生한다.'고 하는 곳부터 보라."고 하였다.
○前後天地에 대한 說은 말할 것이 없다. 邵子의 先天圖에만 "無極 전에는 陰이 陽을 포함한다."고 하였다.
▶問- [81]
陰陽天也 以氣言也 剛柔地也 以質言也 仁義人也 以德言也 天之道不外乎陰陽 寒暑往來是也 地之道不外乎剛柔 山川流峙是也 人之道不外乎仁義 事親從兄是也 天也地也如許其大 而人以貌然一身 寄在其中乃敢與天地立而爲三 一念之善 景星慶雲 一念之惡 烈風疾雨 得與天地混然無間者 何義也
陰陽은 天이니 氣로써 말한 것이고, 剛柔는 地이니 質로써 말한 것이며, 仁義는 人이니 德으로써 말한 것이다. 하늘의 道가 陰陽에 벗어나지 않으니 추위와 더위가 往來하는 것이 그것이다. 땅의 道가 剛柔에 벗어나지 않으니 산이 높고 물이 흐르는 것이 그것이다. 사람의 道가 仁義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따르는 것이 그것이다. 저토록 큰 天地에 조그만 人間이 그 중간에 붙여 살면서 감이 天地와 함께 三才가 되어서, 생각을 善하게 가지면 상서로운 기운을 받고, 惡하게 가지면 재앙을 받아, 천지와 혼연일치 되는
것은 무슨 뜻인가?
答
陽中之陰陽 卽陰陽也 天道也 陰中之陰陽 卽剛柔也 地道也 陰陽合氣 剛柔成質 而是理始爲人道之極者 仁義也 其實一理也 着於上而爲天 着於下而爲地 着於中而爲人 雖理無不同 而以氣質言之 在人者又稍精 備 吾之心 卽天地之心也 故無感不通
陽중의 陰陽은 즉 陰陽이며 天道이다. 陰중의 陰陽은 즉 剛柔이며 地道이다. 陰陽이 氣를 合하고 剛柔가 質을 이룬다. 이러한 理가 처음 人道의 極이 되는 것이 仁義인데, 실제는 모두 하나의 理이다. 上에 붙여 天이 되고, 下에 붙여地가 되고, 中에 붙여 人이 된다. 理는 비록 같다고 하지만 氣質을 가지고 말하자면 사람에 있는 것이 조금은 정밀하다. 내 마음이 바로 하늘의 마음이다. 때문에 感通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 이상의 <太極問> 八十一 문답은 龜峯先生文集, 卷之三의 雜著에 그 원문이 실려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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